덧붙여지듯 당신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을에 이어 겨울 이야기가 덧붙여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낭만도 뭣도 아닌, 어느 월간지의 별책부록처럼 누군가의 이야기가 우연처럼 끝없이 덧대어져 마침내 관계의 미로를 형성하게 됩니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관계의 미로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속한 시대를 함께 살아온 어느 악인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늘 그렇듯 시대를 이끌어가는 것은 그 시대의 악인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그 악인의 이야기에 수없이 많은 당신의(혹은 당신이라는 익명의) 이야기가 덧붙여집니다. 역사는 그런 것이지요.


맹위를 떨치는 동장군의 기세는 한낮에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하의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은 저마다 플라스틱 썰매를 한 손에 거머쥐고 아파트 인근의 공원 잔디밭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잔디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은 한낮이 되어서도 녹지 않았던 것입니다.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아이들은 해맑은 웃음과 함께 아래로 아래로 내달립니다. 썰매의 매력은 내가 적응할 수 있는 속도를 적당히 추월하는 데 있습니다. 내 예상을 앞지른 썰매의 속도는 약간의 긴장감에 공포와 스릴을 더하곤 합니다. 그럴 때 삶은 마냥 더디게 흐를 것만 같습니다.


"최근의 여론 조사는 미국인들이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자산이 버텨주는 나이보다 오래 사는 일을 더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나이 많은 미국인 대부분이 여전히 은퇴를 ‘휴식의 시간’으로 보고 있음에도, 자신이 전혀 일하지 않으면서 말년을 보내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겨우 17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p.109~p.110)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의 저서 <노마드랜드>를 읽고 있습니다. 2008년 금융 위기의 여파로 타격을 입은 이들의 삶의 형태가 어떻게 무너지고 변화되었나를 차분하고 날카롭게, 그리고 인간미 넘치는 시선으로 조명하는 이 책은 각자도생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되짚어보게 합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고가의 명품백을 장난감처럼 수집하기도 하고, 탐욕에 눈이 먼 재벌들을 대동하여 소맥 파티와 떡볶이 먹방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어느 악인의 이야기에 수없이 많은 당신의(혹은 당신이라는 익명의) 이야기가 덧붙여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급변하는 날씨를 몸이 못 따라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일주일 쌓인 피로가 주말에도 풀리지 않는다. 20도를 넘나드는 기온에 봄인지 겨울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날씨. 나는 께느른한 몸을 이끌고 친구와의 점심 약속에 나갔었고, 자리를 옮겨 차를 한 잔 마셨고, 의자 아래로 가라앉을 것만 같은 무력감에 귀가를 서둘러야만 했다. 해가 갈수록 삶이 녹록지 않다고 느끼는 까닭은 기후 변화에 적응하는 일조차 점점 힘에 겹기 때문이 아닐까.


최근 우리나라 국민 중 많은 이들이 뉴스를 보지 않는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종편을 포함한 지상파 언론사에서 송출하는 뉴스의 보도 행태나 질이 어느 유튜버의 코멘트보다도 못한 실정이니 누가 굳이 시간을 내어 그 같은 저질의 뉴스를 시청할까마는 그럼에도 대한민국 정치 수준은 나날이 떨어져 80년대 군부독재 시절 이전으로 회귀하는 듯한 모습을 볼 때마다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이와 같은 현상을 초래한 데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지금까지 수면 아래에서만 존재하던 '꼴통 보수'가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여 대한민국 정치판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극우'나 '정통 보수'가 아닌 '꼴통 보수'라는 용어는 세계 어느 나라의 정치 사전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특수한 언론지형에서나 가능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꼴통 보수'는 첫째 나와 사상이 다른 이는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여 대화가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둘째 나의 이익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물론 어느 정도의 불법 행위는 언제든 용인되며), 셋째 자신이 믿는 종교의 유일신도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면 언제든 배신할 수 있으며(이를테면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말했던 어느 목사의 발언처럼), 넷째 나와 사상이 다른 상대방에 대해서는 최고 권력자라고 할지라도 입에 담을 수 없는 갖은 욕설을 퍼부을 것이며(대통령을 향해 공산주의자 또는 간첩이라고 지칭하였지만 처벌은 받지 않음), 다섯째 자신의 모국인 대한민국보다 일본을 더 사랑하며, 여섯째 검찰이 자신을 기소하지만 않는다면 자신이 지닌 권력을 축재의 정당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좋게 말하면 '돌+아이'이고 나쁘게 말하면 '꼴통 보수'인 그들이 대한민국에서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 우호적인 언론지형과 검찰을 포함한 권력의 비호와 두둔이 늘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위에서 나열한 '꼴통 보수'의 특성은 순전히 나의 판단이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혹여라도 현재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인 어떤 사람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오해라고 말하고 싶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2023 올해의 한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가 꼽혔다고 한다.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다'는 뜻의 견리망의는 '꼴통 보수'의 모토가 아닌가. 그와 같은 사자성어가 뽑히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23-12-10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의 한자성어가 시사하는 바가 크네요.

꼼쥐 2023-12-16 13:03   좋아요 0 | URL
교수신문이 선정하는 올해의 한자성어가 대개는 뜬금없지만 올해는 비교적 적당하지 않았나 싶어요.
 

감기 몸살로 주말 일정을 모두 비운 채 꼬박 앓았다. 조금이라도 무리를 하면 나의 몸은 이제 시차를 두지 않고 즉각즉각 반응을 한다. 나이가 들었음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피로를 담아두는 그릇이 바다만큼 크고 넓어서 하루이틀 밤을 새우는 정도의 무리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겨낼 수 있었던 시절이 내게도 물론 있었다. 나 죽겠소 할 정도로 피곤함을 느끼다가도 하루이틀 쉬고 나면 웬만큼 회복이 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로를 담는 함지박이 시나브로 조금씩 쪼그라들다가 어느 순간 그 공간이나 여지가 조금도 남지 않는 것이다. 야속한 게 흐르는 세월이지만 어쩌겠는가.


육체를 과하게 사용했다는 경고를 즉각적으로 알려주는 것처럼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과한 욕심을 제어하고 즉각즉각 알려주는 영혼의 시계가 존재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세월에 비례하여 약해지는 체력에 비해 인간의 욕심은 줄어들 줄 모르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부끄러움도 없이  명품백을 덥석덥석 받거나 국토의 동맥인 고속도로의 건설도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등 권좌에 있는 동안 부릴 수 있는 모든 욕심을 한껏 펼쳐보려는 어느 여인이 있으니 인간의 어리석음은 바로 거기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다. 욕심을 제어하는 영혼의 시계가 누구에게도 없으니 말이다.


총선이 멀지 않았다. 정치인들의 욕심이 최대로 분출되는 시기가 지금일 터, 자신의 이익에 따라 이리저리 떠도는 이합집산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가끔 되지도 않는 명분을 언론에 발표하지만 그걸 믿어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신념은 없고 오직 욕심만 남은 저급한 정치판에선 썩은 내가 진동한다. 언론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의 나이도 결코 어리지 않은 듯한데.


지금도 몸살기가 가시지 않은 듯하다. 쉬어야겠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와같다면 2023-12-04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님 2023년 서재의 달인 선정되심 축하드립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비슷해서 꼼쥐님 글을 통해서 같이 공감하고 분노하고 그랬던 한 해 였던것 같습니다
한 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꼼쥐 2023-12-09 13:0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사실 알라딘 서재에 애착이 가는 이유는 나와 같다면 님처럼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가지신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분들을 통하여 활력을 얻곤 합니다. 나와 같다면 님, 서재의 달인, 북플 마니아로 선정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서니데이 2023-12-05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연말 좋은 시간 보내세요.^^

꼼쥐 2023-12-09 13:12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님의 글을 자주(매일은 아니지만) 읽고 있습니다만 그 한결같은 노고에 고맙다는 말조차 남기지 못했습니다. 서니데이 님 덕분에 힘을 얻는 한 사람으로서 말입니다. 2023년 한 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잉크냄새 2023-12-10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은 축하 인사드립니다.

꼼쥐 2023-12-16 13: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잉크냄새 님도 올 한 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즐거운 연말연시 맞으시길~~
 

낮은 각도의 겨울 햇살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희끄무레 물때가 묻은 베란다 유리창을 통해 너울너울 퍼지는 햇살. 겨울 햇살은 마치 꼬리가 긴 저녁노을을 닮은 듯합니다. 성긴 햇살 알갱이 사이로 그리운 이름과 얼굴들이 떠다닙니다. 중학생인 듯 보이는 네 명의 아이들이 추위도 잊은 채 아파트 놀이터에서 캐치볼을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입니다. 피곤에 지쳐 께느른한 오후 햇살이 아슴아슴 졸음을 몰고 옵니다.


굥교롭게도 문제가 많았던 합참의장 후보자가 오늘 임명되었습니다. 자녀의 학폭 의혹과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당일 주식 거래와 골프를 한 사실 등 합참의장은커녕 일반 사병의 경계 태세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를 군의 최고 실세(각군의 작전부대를 작전지휘·감독하고, 합동작전 수행을 위하여 설치된 합동부대를 지휘·감독) 자리에 앉힘으로써 대한민국 군대가 당나라 군대로 전락했음을 만방에 알리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자칭 세계 최고의 디지털 정부라면서 영국 런던 내각부를 방문했던 행안부 장관은 디지털정부를 담당하는 영국의 알렉스 버가트 내각부 장관과 '한-영 디지털정부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하니 소가 웃을 일입니다. 국내의 행정 전산망 먹통 사태의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면서 말입니다.


장석주 박연준이 쓴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를 읽고 있습니다. 1월에 시작된 그들의 책 읽기 일기는 6월이 되어서야 끝이 납니다. 그들이 읽었던 많은 책에 대한 짧은 일기 형식의 글이 책의 지면을 메우고 있습니다.


"아껴 읽던 <A가 X에게>를 방금 다 읽었다. 좀 울고 싶어졌는데, 누가 코끝에 고추냉이를 쑤셔넣은 것처럼 찡해졌다. 어떤 밤은 감정을 쏟아내고 싶지 않고 쟁여놓고 싶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그런 밤이 있다. 감정을 아끼게 되는 밤. 아모스 오즈의 단편을 더 읽고, 음악을 들으려 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상처 나서 벌어진 틈새로 피가 고이고, 아물 때 즈음이면 결국 마음의 결이 바뀌게 되는 글. 이 책은 정치범으로 독방에 갇힌 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인이 그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 한 번의 면회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리움으로 야위는 여성의 말들이 담겨 있다."


나도 어쩌면 오래전에 읽었던 존 버거의 <A가 X에게>를 다시 읽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끝에 고추냉이를 쑤셔넣은 것처럼 찡해지는' 기분을 느껴보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 오후 첫눈이 내렸다. 첫눈 내리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사람들. 처음이라는 설렘과 기대는 차치하고서라도 첫눈에 대한 느낌은 우리 모두에게 각별한 것이어서 "와~" 하면서 몰려드는 사람들의 시선 너머로 아련한 그림움이 물방울처럼 맺혔다. 그렇게 우리는 첫눈 내리는 풍경에 한동안 넋을 놓았다. 그리움! 딱히 떠오르는 대상이 없을지라도 첫눈과 함께 누렸던 가슴 따뜻했던 경험과 기억들. 우리는 어쩌면 닿을 수 없는 그런 기억들에 대한 간절한 욕망에 사로잡히는지도 모른다. 첫눈과 함께 말이다.


어제는 온라인 민원 서비스인 '정부24'가 종일 먹통이었다. 현 정부의 특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현 정부의 책임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이나 부의 창출에만 관심이 있을 뿐 대다수 서민의 삶의 질 향상이나 복지에는 관심이 전혀 없다. 사실 그런 증거들은 차고도 넘치지만 가축 전염병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는 뉴스에 보도조차 되지 않던 전염병이 보수당이 집권하면 이상하게도 전국적으로 창궐하여 집권 말까지 이어지곤 한다. 구제역이나 조류독감, 아프리카 돼지 열병, 이제는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럼피스킨병에 이르기까지 각종 전염병이 농민들을 괴롭힌다.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전염병은 사실 예방이 중요한데 보수정권의 위정자들은 서민들의 삶에 관심이 없다 보니 병이 확산한 후이거나 언론의 질타가 이어진 후에나 움직이기 때문이다. 사후약방문인 셈이다. 그런 조치는 집권 말기까지 이어진다. 잘 돌아가던 '정부24'가 왜 갑자기 먹통이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스티븐 킹이 쓴 동화 <페어리 테일>을 읽고 있다. "쓰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진 뒤 이 소설을 답으로 제시했다고 하는데, 작가는 아니지만 나 역시 스티븐 킹의 생각에 동의하는 바이다. 게다가 해피엔딩의 아름다운 동화를 쓰고 있노라면 쓰는 일 자체가 얼마나 행복할까.


"우리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언제 찾아오는지 절대 알 수가 없다. 나도 이때가 보디치 씨와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아차렸다. 그는 좀 더 버티다가 (살짝) 긴장을 풀고 내게 이마와 뺨을 맡겼다."  (1권 p.141)


"아빠는 나를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추고는 왔던 길로 언덕을 내려갔다. 나는 아빠가 가로등 불빛 속으로 번번이 등장했다가 다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여전히 잃어버린 세월을 떠올리며 아빠를 원망할 때가 있었다. 그건 내게도 잃어버린 세월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빠가 다시 돌아와서 기쁜 마음이 훨씬 컸다."  (1권 p.189)


눈이 그친 주말 하늘은 어둡고 을씨년스럽다. 첫눈에 대한 두근거리던 느낌은 하루 혹은 반나절로도 충분했었나 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