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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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꽃에도 '꽃말'이 있듯이 책에도 '책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소설은 '나는 외로워', 에세이는 '삶이 무서워', 경제서적이나 자기계발서는 '돈이 필요해', 시집은 '옛 시절이 그리워', 그렇다면 종교서적은?  글쎄,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가끔 엉뚱한 생각을 잘 한다.  그래서 이런 철없는 짓도 하나 보다.  그렇다면 소설의 책말이 왜 '나는 외로워'이냐고?   글쎄다.  일단 소설을 읽으면 외로움에서 아주 조금씩 벗어나는 느낌이 든다.  마치 전면이 유리창으로 된 카페에 앉아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느낌이랄까.  나는 소설을 읽으며 그들의 일상을 감상한다.  갤러리에서 작가의 정신세계를 천천히 훑는 것처럼.

 

소설에서 읽게 되는 익명성의 너의 이야기는 색깔이 중요하다.  주인공이 갖는 삶의 색채가 선명할수록 현실에서는 자주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이의 가려진 시간들이 덜 궁금해진다.  나는 내 앞에 펼쳐진 현실의 시간에게 소설이라는 마취제를 놓는 셈이다.  그렇다고 내가 은둔형 외톨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내가 일 년 내내 소설만 읽는 것도 아니요, 현실세계의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요즘 외롭다.  그건 확실하다.  최근에 읽었던 책들의 대부분이 소설이었다는 사실이 그 걸 증명한다.  나는 오늘 또 소설을 한 권 읽었다.  그것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제목의 신간 소설이다.  제목이 참 길다.   하루키 작품의 특징은 그가 창조해 낸 독특한 성격의 캐릭터를 그가 쓰는 작품에 따라 번갈아 가며 써먹는다는 데 있다.  일단 그 주인공의 색채가 맘에 들었던 독자는 작가의 다음 작품에 어떤 인물이 등장할 것인가, 하는 궁금증에 새로 출간되는 책마다 사지 않고는 배겨 낼 수 없다.  나도 그런 부류의 한 사람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무엇보다도 작가의 섣부른 판단이나 주관이 없어서 좋다.  마치 한 인간의 삶을 변사가 없는 무성영화처럼 툭 던져줄 뿐이다.  판단은 니들이 알아서 하라는 듯.

 

이 책의 주인공인 다자키 쓰쿠루는 <상실의 시대>에서 '와타나베'의 성격과 비슷하다.  시골에서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것도, 말이 없으며 친한 친구가 없는 것도, 심지어 주말이면 도쿄 시내의 여러 곳을 무작정 돌아다니는 것도 닮았다.  서로 이름만 다른 작가 자신의 분신일 수도 있겠다.  이제 서른여섯 살의 다자키 쓰쿠르는 그보다 두 살 연상의 기모토 사라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에게는 고등학교 시절의 아픈 기억이 있다.  다섯 명의 남녀로 이루어진 순수한 우정의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그는 어느 날 이유도 없이 내쳐진다.  그 고독과 상실감으로 인해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철도 회사에 근무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그때의 상실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또 다른 이별의 슬픔을 겪지 않으려는 듯.       

 

"분명 자기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낙담케 하는 뭔가가 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는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결국 남에게 내밀 수 있는 건 뭐 하나 가진 게 없어.  그러고 보면 나 자신에게도 내밀 것이 하나도 없을지 모르지."    (p.150~151)

 

여행사에 근무하는 다자키 쓰쿠루의 연인 기모토 사라는 그에게 16년 전의 친구들을 다시 만나볼 것을 제안한다.  다자키 쓰쿠루는 자신의 고향에 사는 두 명의 남자 친구를 만난다.  그때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같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정직하고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게 여기서는 간단한 일이 아니야.  ......어이, 이런 거 엄청난 패러독스라는 생각 안 들어?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돼.  그리고 발견할수록 자기 자신을 상실해 가는 거야."    (p.244)

 

프란츠 리스트의 곡 <르 말 뒤 페이>를 연주하던 한 명의 여자 친구는 죽고 없다.  마지막으로 그는 핀란드인과 결혼한 다른 한 명의 여자 친구를 만나러 핀란드로 향한다.  그녀에게서 다자키 쓰쿠루는 왜 자신이 그들로부터 추방되었는지, 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를 듣게 된다.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p.363~364)

 

스토리는 비교적 단순하고 보잘 것 없다.  나는 처음부터 작가의 의도를 생각했었다.  왜 하필이면 작가는 고교시절의 순순했던 우정과 그로부터 16년의 단절을 설정했을까 하고 말이다.  학창시절의 순수로부터 추방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고 그런 삶을 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잊혀지고, 까마득한 과거를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데...  다자키 쓰쿠루는 말한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는다'고.

 

이 작품에서 서른여섯 살의 다자키 쓰쿠루에게 지워진 예순이 넘은 작가의 철학이 조금은 부담스러운 듯 보였다.  작가의 상상력은 서른여섯의 나이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블라인드 처리된 잊혀진 역사처럼 툭툭 끊어지는 단절이 곳곳에 드러난다.  세월은 결국 많은 경험을 통하여 인간을 성장하게 하지만 그 기억만으로 과거를 재현할 수는 없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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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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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맥으로부터의 수분 공급이 차단된 감나무잎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이미 예정된 변화이건만 나는 계절의 한켠으로 물러서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시린 하늘에 잔물결처럼 옅은 구름이 퍼지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앙상한 감나무 곁을 지키며 애꿎은 구두 뒷굽만 쪼았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마는 영원할 것만 같던 어떤 것들이 속절없이 스러지는 모습에서 나는 무상함과 함께 쓸쓸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이런 기분쯤이야 때가 되면 세월의 거품 속으로 쉽게 사라질 일이다.  그러나 가슴 속에 맺힌 피멍울을 안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삶은 얼마나 고된 것이냐.  짧지 않은 우리네 삶에서 결코 치유되지 않는 가슴 속 생채기는 얼마나 아픈 것이냐.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를 읽었다.  재작년이었던가, 영화로도 제작되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 작품을 나는 끝내 외면했었다.  지저분한 것, 낡은 것은 모두 다락으로 쳐박아 두던 나의 오래된 습관은 이제 마음으로 옮겨 와 끔찍한 것, 처참한 것에 대해서는 애써 고개를 돌리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편한 것에 쉽게 이끌리도록 길들여진 나의 게으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정의'라는 이름이 햇빛 속에서 팔랑이던 젊은 시절이 저 감잎처럼 까맣게 타들어가는, 자욱히 내리는 안개에 가려 희미해지는 잊혀진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얼마 전, 자애학원 사건을 접하면서 나는 깨닫게 된 거야.  어른이 되면 그 대답을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어른이 되면 그 질문을 잊고 사는 것이라고 말이야.  이제 나는 정말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  그렇지 않다면 내 아버지의 삶도 연두와 연두 아버지와 너도 나도, 우리의 삶은 정말 꾸드러빠진 떡조각처럼 무의미해질 거야."    (p.227)

 

그랬다.  보이지 않는 것, 아니 어쩌면 일부러 외면했던 것들은 내게 마음 속 파문을 일으키지 않았다.  비겁에 동조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비겁자들이 세상에는 차고 넘친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이다.  눈 감고, 귀 닫아 외면했던 모든 것들은 내 일이 아니었고, 나와는 상관도 없는 먼 나라의, 우주 밖의 일에 지나지 않았으며 나는 한낱 소시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변명한다.  다들 그렇게 산다고 자위하기까지, 먹고 살기 바빠서라고 변명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서유진은 오래도록 그런 생각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뭐지?  하고 누군가가 물으면 그녀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 세상이라는 호수에 검은 잉크가 떨어져내린 것처럼 그 주변이 물들어버린다.  그것이 다시 본래의 맑음을 찾을 때까지 그 거짓말의 만 배쯤의 순결한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다."    (p.246)

 

공지영 작가는 이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했다.  '삶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 될수록 사람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작가의 생각과는 다르다.  아무리 고귀한 인간도, 아무리 천한 인간도 그 내면은 서로 닮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작가는 자신은 그렇고 그런 인간이 아니라고 믿음으로써 보통의 인간 군상과 자신을 구별하고자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살면 살수록 내 자신의 본성이 그들과 하등 다르지 않음을 새삼 느낀다.  다만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출되는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만 존재할 뿐.  때로는 이런 생각에 나 자신이 미워질 때도 있지만 생각해 보면 '그래서 인간이다'라는 생각에 연민을 느끼곤 한다.  내게 부족한 면을 누군가 채워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돈도 아니고 쾌락도 아니며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한 어떤 것을 향해 노력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 거야.  그 과정에서 뜻밖에도 내가 인간이라는 것, 그것도 아주 존엄한 인간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는 어떤 기쁨을 맛보았어.  그리고 그것은 내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지만 낯설고 고귀하기만 한 게 아니라 그냥 인간인 내 속에 원래 그런 것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웃을 위해, 더불어 함께하기 위해 싸울 때 내가 스스로를 가장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안 거야.  그리하여 한 존엄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다른 존엄한 생명을 짓밟는 자들과 싸우고 싶어졌던 거야."    (p.281) 

 

이제 감나무잎은 다 떨어지고 몇 장 남지도 않았다.  작가는 여전히 인간에게서 선과 악을 구분하려고 든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도,  자라면서 그렇게 완벽하게 변한 것도 아님을 나는 안다.  인간이 갖는 이중성과 위선은 비록 그것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선인과 악인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나도 언제든 세상의 지탄을 받을 정도로 악해질 수 있고, 찬사와 존경을 받을 정도로 선해질 수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된 이후 불의를 보고서도 눈에 들어간 티끌처럼 거북하지도, 가슴에 맺힌 멍울처럼 꺼끌거리지도 않는다.  나는 그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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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수업 -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
법륜 지음, 유근택 그림 / 휴(休)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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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절절 옳은 얘기만 듣고 있을 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다가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불쑥 "그래, 나 못났다. 어쩌라고?"하면서 대들고 싶은 마음이 생기곤 합니다.  일종의 투정이자 어리광입니다.  청개구리 영신이 붙은 까닭일까요?  아니면 나보다 잘난 사람에 대한 질투일까요?  아무튼 저는 그렇습니다.  법륜스님의 또 다른 작품《스님의 주례사》를 읽었던 것이 아마도 2010년의 딱 이맘때쯤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스님의 글을 읽은 적은 없었습니다.  작정하고 그렇게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저의 관심이 다른 데 있었겠지요.

 

『인생수업』이라는 신간이 나왔을 때 저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인생수업>을  떠올렸습니다.  예전에 나왔던 책이 재출간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법륜스님이 쓴 전혀 다른 책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저서는 이미 다 읽어보았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읽어야지,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법륜스님과 다시 만났습니다.  서두가 너무 길었죠?

 

이 책 『인생수업』에서 받았던 전체적인 느낌은 스님이 쓴 예전의 책 <스님의 주례사>나 <엄마 수업>에 비해 폭이 넓어지고, 전하려는 뜻도 깊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사실 <엄마수업>은 읽지는 못했고 그저 주워들었던 것입니다).  그 전의 책들은 한 가지 주제를 두고 썼었지만 이 책은 인생 전반에 대한 스님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쳐놓았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해 봅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아주 평범해 보이는 말에도 주의를 기울이며 한 문장 한 문장을 꼼꼼히 읽었습니다.  제 우둔한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도 많았거든요.

 

책은 총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 : 지금, 당신은 행복합니까?  2장 : 생로병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  3장 : 사흘 슬퍼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4장: 아픈 인연의 매듭을 풀다  5장 : 인생 후반전, 즐겁고 행복하게 일하는 법  6장 :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가 그것입니다.  제목만 읽어도 감이 오지요?  네, 그렇습니다.  아직은 이승을 떠나지 않은 모든 중생들이 현생에서 두려움없이 잘 살 수 있는 방법들을 스님은 나름대로 정리하여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듯합니다.

 

"이제 내 중심을 잡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금까지 삶의 우선순위였던 재물, 출세, 명예, 건강, 등에 대한 욕구를 뒤로 돌려야 합니다.  이 욕구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그것을 해결하기 급급해서 정작 중요한 것이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그 욕망들을 내려놓아야 그 순간 눈이 열리고,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 비로소 인생의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p.12 "프롤로그"중에서)

 

그러나 사바세계의 중생들은 어디 그렇습니까?  머리로는 알아도 하나하나 경험해보지 못하면 가슴으로는 느껴지지 않으니 말입니다.  스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슴 답답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니 전하실 말씀도 자연 많아지셨겠지요.  비록 장(章)을 나누어 소주제를 따로 정하였지만 때로는 뒤섞일 수밖에 없었을 듯합니다.  우리네 중생들의 전 생애에서 고민을 안고 가지 않는 시기가 과연 존재할까요?  크게는 생로병사의 문제에서부터 결혼과 자녀 양육의 문제, 소소하게는 이웃의 가정사에 이르기까지 없던 고민도 만들어서 하는 듯합니다.  하여, 인생의 절반쯤 지나고 나면 고민이 없으면 오히려 불안해지기도 합니다(제가 그렇습니다).  어쩌면 현대인은 고민을 사서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는 이런 속담도 혹 생겨나지 않을까요?  "살아서 하는 고민은 사서도 한다."

 

이 책은 사실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스님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겠으나 범위를 조금 좁힌다면 인생의 후반부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가 아닐까 합니다.  나이듦에 대하여, 죽음과 상실의 고통에 대하여, 재물과 건강에 대하여 그동안 익숙했던 젊은 시절의 생각과는 분명 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그닥 자신이 없습니다.  어쩌다 허방을 짚고 된통 당하고 나면 그때서야 뒤늦게 스님의 말씀이 떠오를지는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들면 자꾸 일을 벌이고 계획을 세워서 무언가를 하려고 할 게 아니라 정리를 해나가야 합니다.  인생을 포기한다는 게 아니고 열매를 맺는 과정이기 때문에, 잔가지들을 정리하면서 잘 마무리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또한 나이 들어감을 한탄하거나, 나이를 인정하지 않고 젊어지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단풍처럼 물들어가는 나'를 차분하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욕심을 하나하나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p.227~228)

 

어제는 비가 내렸고 밤새 바람이 강하게 불었습니다.  그러나 비가 개인 오늘의 아침 하늘은 더없이 맑았습니다.  바람은 여전히 그칠 기미가 없어 보이고 날씨도 제법 쌀쌀하지만 어제와는 분명 달라진 하루였죠.  우리는 그렇게 변화 많고 변덕이 심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듯합니다.  단 하루도 어제와 똑 같은 날은 없습니다.  마음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제는 비가 내리고 우울했는데 오늘은 맑고 드높은 하늘을 보고 밝아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다양한 모습을 그냥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의 고민도 한결 가벼워질 듯합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책 <인생수업>에 나오는 제가 좋아하는 말을 옮기면서 리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당신은 삶을 위하여 얼마나 시간을 할애하는가?   하루에 몇 시간씩 일하고, 얼마를 벌고, 어떤 야망을 이루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그 모든 일을 한다 하더라도, 삶은 언제까지나 저쪽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당신의 인생 시계는 몇 시인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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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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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역할이나 기능에 대해서, 인간의 욕망이나 도덕에 대해서, 또는 선과 악의 대립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던 책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던 책이다.  나는 사실 이 책을 예약 구매를 통하여 손에 넣었었다.  출간된 책이 하루 아침에 동이 날 것을 염려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기표를 뽑고 내 순번을 기다려야만 원하는 책을 손에 거머쥘 만큼 우리나라의 독서열이 뜨겁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공지영 작가의 작품을 편애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도가니> 이후 계속된 긴 휴지(休止)는 며칠 동안의 기다림에도 갈증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나의 오랜 기다림과는 상관도 없이 책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책을 반쯤 읽었을 때, 남은 반을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했었다.  책 한 권을 읽는 데 근 10여 일을 소모한 것은 내게는 참으로 드문 일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책의 앞부분 몇 쪽을 읽다가 아니다 싶으면 숫제 읽지 않고 책을 덮어버리거나, 재미있다 싶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다 읽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랬던 내가 열흘이라니...  어찌 보면 나는 난생 처음으로 예약 구매를 했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오기와 자존심이 발동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실망했던(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몇몇을 소개함으로써 리뷰를 대신하려고 한다.  다분히 주관적일 수도 있고(가끔 동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의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되잡아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책을 읽고 각자가 느끼는 점은 열이면 열 모두 제각각일 터이니 신경 쓰지 않겠다.

 

<높고 푸른 사다리>에서 가장 실망했던 점은 인물의 평이성이다.  어떤 특색있는 인물이 없다는 얘기다.  소설은 주인공인 정요한 수사(사제 서품을 앞둔 젊은 수사)와 W시의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원장의 조카인 소희와의 사랑이 큰 틀을 형성하고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요한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수도원 동기인 미카엘과 미카엘의 여자 친구, 갖은 고초를 겪고 남한으로 탈출한 이방인 성직자들과 소설 속에서 인간이 아닌 듯 그려지는 동기생 안젤로 수사, 남자 친구에게 버림받고 미혼모가 된 모니카와 어린 요한 등.  그들은 하나같이 작가가 바라는 어떤 모습, 또는 독자가 원하는 어떤 모습일 뿐 인간이 갖는 보편성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무한의 에너지가 도덕이나 이성적 판단, 또는 개인의 신앙에 의해 굴복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지 못하였다.  절대적으로 욕망이 승리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인간의 욕망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정요한 수사가 남자로서 갖는 이성에 대한 욕망은 소희와의 입맞춤에서 끝날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는 얘기다.  작가는 교묘한 상황 설정을 통하여 그 선(입맞춤)에서 한 발 물러서고 있다.  특정 종교와의 연관성 때문이었는지, 작가가 여자라는 한계성에서 비롯된 것인지, 어려서부터의 유교 교육에 세뇌된 탓인지, 또는 '외설'이라는 비난에 직면할까 봐 두려웠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대학 시절에 내가 하고 있던 아르바이트의 특성상 나이 지긋한 사회인과 만나는 기회가 많았다.  매매춘이 일반적이었던 당시에 그들 대부분이 약속 장소로 잡는 곳은 호텔의 나이트클럽이나 을지로의 지하 술집이었다.  사무적으로 만났을 때는 그렇게 근엄하고 도덕적으로 보였던 사람들도 열에 아홉은 젊은 여성의 유혹에 백기를 드는 모습을 많이도 보았었다.  나는 그때, 그들을 기다리며 담배 두 개피를 천천히 태우곤 했다.  배설하듯 욕망을 충족한 그들은 멋적게 웃으며 "오늘도 담배 두 개피?"하며 대답하기도 어려운 질문을 던지곤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 소설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그러나 등장인물 대부분이 신과 동물의 중간자, 도덕과 욕망의 경계인으로서 묘사되고 있다는 점도 실망스럽다.  물론 인간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은 잘 알지만(도덕적으로 완벽하지도, 죽을 때까지 악한 것만도 아닌) 작가가 예상하는 것처럼 인간의 삶이 도덕과 일탈의 경계선에서 마치 외줄타기를 하듯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어떤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 비열해질 수도 있고, 어떤 인간은(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신의 모습처럼 완벽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꾸준히 그런 것도 아니다.  삶 전체에서 볼 때 그 모습은 변화의 폭이 상당히 넓고 다양하게 전개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에 그의 작품이 사랑받는 이유는 오히려 단순할지도 모른다.  인간 군상의 실체, 인간 본성의 적나라한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의 책이, 책에서의 그의 묘사가 구토가 나올 정도로 더럽고 지저분하게 보인다고 느낄 수도 있고, 나는 이렇게 되지는 말아야지, 하고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보편적인 삶을 작가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도덕적으로 더럽고 추악하다고 하여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 아이들은 어른들이 '이렇게 하라, 이것이 옳다'고 말할 때 뒤돌아서서 웃는다.  현실을 솔직하게 말하고 도덕적 선택은 아이들 자신에게 맡겨야 한다.  기성세대와 소위 교양과 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간혹 현실을 무시한 채 좋은 것만 보여주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살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이다.

 

"요한 수사님, 악은 수많은 얼굴로 다가옵니다.  사실 사람인 우리가 그것을 식별하는 것은 은총에 의지할 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도 있어요.  우리가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모든 사랑을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모든 폭력, 모든 설득, 모든 수사는 악입니다.  너 한 사람이 무슨 소용이야, 네가 좀 애쓴다고 누가 바뀌겠어, 네가 사랑한들 아는 사람 하나도 없이......  속삭이는 모든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p.239)

 

결국 내가 작가에게 실망했던 까닭은 인간의 욕망이 갖는 스펙트럼을 자의적으로 축소하였거나 현대인의 실제 모습에서 슬몃 도망쳤다는 점이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현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조망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도덕적이냐 그렇지 못하냐, 이성적으로 옳으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철학서나 잠언집에서 다룰 일이지 소설을 쓰는 작가가 판단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소설은 있는 그대로의 보편적인 삶,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본성을 기록하는 것이지 작가가 생각하는 도덕적 기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기초한다고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인간 본성의 가장 밑바닥을 건드리지 않고 가장 상위의 어떤 모습을 상상한다는 것은 어렵다.  전임 대통령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끝까지 비열하고 야비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었다.  인간의 본성은 그런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그를 선망하든, 아니면 그렇게 되지는 말아야 겠다고 생각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들 각자의 몫이다.  어쩌면 작가는, 또는 일부 비평가는 인간 본성을, 인간의 적나라한 실체를 문학적으로 미화하고 승화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작가는 인간의 적나라한 실체에세 한 발 물러선 것이다.  작가는 조금 비겁했다.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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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3-11-12 19:39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는 공지영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였지만, 언제부턴가 점점 공지영의 글들에 공감이 가지 않는 경우가 생기더군요. 특히 소설 보다는 에세이에서...
이 소설도 첫 문장이 상당이 마음에 들었는데, 읽는 속도는 별로 안 나가 되더군요. 그래서 접어 놓고 다른 서평 이벤트 책들을 읽다 보니, 다시 손에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연히 꼼쥐님의 서평을 보게 되고 지금 읽을까 말까 망설이는 중입니다.

꼼쥐 2013-11-13 13:23   좋아요 0 | URL
소설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가 너무 경건했어요. 나같은 잡놈이 읽기에는 말이죠. 그러다 보니 공감하기도 어려웠고요. 자연히 재미를 느끼지도 못했죠. 라일락님이라면 혹 다르지 않을까요?
 
해변의 카프카 -상 (양장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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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는 안개가 짙었다.

이렇게 농무(霧)가 낀 날의 대기는 달착지근했던 지난 밤의 꿈을 생각나게 한다.  의식이 살짝 걷힌 듯한 틈새로 이치에 닿지 않는 무의식의 장난들이 활개를 치던...  어깨에 매달린 꿈의 무게는 아침운동을 나서는 내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더이상 확산되지 못한 채 안개 속에서 자맥질을 하는 역한 냄새들.  고무 타는 냄새와 화석연료가 불완전 연소를 할 때 내뿜던 역한 냄새가 비위를 거스르며 내 발길을 붙잡는다.  약간의 편두통이 있었고, 메슥메슥한 고약한 느낌이 있었다.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올 때에도 어둠은 채 걷히지 않았고, 그 희미한 어둠 속에서 농무는 더욱 짙어진 듯했다.  어느 만화영화의 배경처럼 안개가 낀 숲은 괴괴한 느낌마저 감돌았다.  나는 그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생각했다.  내 의식의 투명한 유리잔에 지문처럼 묻어나는 무의식의 저편.  뜬금없다.  인적이 끊긴 조용한 숲에서 나는 그렇게 <해변의 카프카>를 떠올렸고, 분주히 나무를 타는 청설모 한 쌍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해변의 카프카>를 처음 읽었던 것은 내가 처음부터 무모하게 시작했던 사업을 정리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그때 나는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막연히 소일하고 있었고, 다가올 미래는 마치 오늘의 안개처럼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불안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책을 읽고 있던 내가 남들 눈에는 태평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당시의 내 불안의 정도는 다른 어떤 것에도 의식을 집중할 수 없을 만큼 심한 것이었다.  나는 내 의식을 옥죄어 오는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순간순간의 기억마저 의도적으로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여러 가지 소중한 것을 계속 잃고 있어."  전화벨이 그친 다음에 그는 말한다.  "소중한 기회와 가능성, 돌이킬 수 없는 감정, 그것이 살아가는 하나의 의미지.  하지만 우리 머릿속에는, 아마 머릿속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을 기억으로 남겨두기 위한 작은 방이 있어.  아마 이 도서관의 서가 같은 방일 거야.  그리고 우리는 자기 마음의 정확한 현주소를 알기 위해, 그 방을 위한 검색 카드를 계속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지.  청소를 하거나 공기를 바꿔 넣거나, 꽃의 물을 바꿔주거나 하는 일도 해야 하고.  바꿔 말하면, 넌 영원히 너 자신의 도서관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거야."    (하권 p.449)

 

<해변의 카프카>는 서로 관련도 없어 보이는 사건과 인물들이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오늘 아침 집 근처의 도서관에서 빌린 <해변의 카프카>를 만10년 만에 다시 읽는다.  그때의 불안했던 내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쨌든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고, 그간의 추억들이 비 오는 날 솔잎에 맺힌 작은 물방울처럼 조롱조롱하다.  내가 불러낸 기억들과 얼굴을 맞대고 함께 읽었다.  나는 그때 '왜 작가는 하필이면 오이디푸스 신화를 책으로 엮을 생각을 했을까?' 하고 궁금해 했으며, 시간의 비가역성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시공간을 넘나드는 소설의 전개 방식에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었다.

 

"다무라 군, 우리 인생에는 되돌아갈 수 없는 한계점이 있어.  그리고 훨씬 적기는 하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점도 있지.  그런 한계점에 이르면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들은 그저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거야."    (상권 p.315)

 

한참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 나는 한 편의 소설을 매개로 그때의 나를 되돌아 본다.  나는 그때 상상력이 결여된 공허한 인간이었고, 오직 그 불안했던 현실의 한 순간이 훌쩍 다른 시간대로 옮겨지기를 간절히 원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는 그 고통의 순간순간을 한발짝도 뛰어넘지 못하고 주어진 시간들을 꼭꼭 눌러 밟으며 천천히, 아주 느리게 지나쳐 왔다. 

 

"차별당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인지, 그것은 차별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아픔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그 뒤에는 개별적인 상처 자국이 남아.  그렇기 때문에 공평함이나 공정함을 추구하는 데에는 나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다만 내가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이지.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즉 쉽게 말하자면, 조금 전 도서관의 실태를 조사하러 온 두 여성 같은 인간들이라구."    (상권p.351)

 

15세의 소년 다무라 카프카를 통하여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10년 전의 나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입구의 돌'처럼 일본에는 혹시 시간여행을 가능케 하는 웜홀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또 다른 시간대로 훌쩍 떠나고도 싶었었다.  그러나 소설 속의 다무라 카프카가 판타지와 같은 환상의 세계를 경험한 후 현실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처럼 삶의 기억들은 아름다운 무늬로 누군가의 가슴 속에 새겨질 수 있음을 나는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결국 소중한 것은 내게 주어진 시간과 그 시간을 밟고 지나가는 나의 기억들임을 다시 읽은 한 편의 소설을 통하여 나는 되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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