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역할이나 기능에 대해서, 인간의 욕망이나 도덕에 대해서, 또는 선과 악의 대립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던 책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던 책이다. 나는 사실 이 책을 예약 구매를 통하여 손에 넣었었다. 출간된 책이 하루 아침에 동이 날 것을 염려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기표를 뽑고 내 순번을 기다려야만 원하는 책을 손에 거머쥘 만큼 우리나라의 독서열이 뜨겁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공지영 작가의 작품을 편애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도가니> 이후 계속된 긴 휴지(休止)는 며칠 동안의 기다림에도 갈증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나의 오랜 기다림과는 상관도 없이 책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책을 반쯤 읽었을 때, 남은 반을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했었다. 책 한 권을 읽는 데 근 10여 일을 소모한 것은 내게는 참으로 드문 일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책의 앞부분 몇 쪽을 읽다가 아니다 싶으면 숫제 읽지 않고 책을 덮어버리거나, 재미있다 싶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다 읽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랬던 내가 열흘이라니... 어찌 보면 나는 난생 처음으로 예약 구매를 했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오기와 자존심이 발동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실망했던(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몇몇을 소개함으로써 리뷰를 대신하려고 한다. 다분히 주관적일 수도 있고(가끔 동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의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되잡아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책을 읽고 각자가 느끼는 점은 열이면 열 모두 제각각일 터이니 신경 쓰지 않겠다.
<높고 푸른 사다리>에서 가장 실망했던 점은 인물의 평이성이다. 어떤 특색있는 인물이 없다는 얘기다. 소설은 주인공인 정요한 수사(사제 서품을 앞둔 젊은 수사)와 W시의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원장의 조카인 소희와의 사랑이 큰 틀을 형성하고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요한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수도원 동기인 미카엘과 미카엘의 여자 친구, 갖은 고초를 겪고 남한으로 탈출한 이방인 성직자들과 소설 속에서 인간이 아닌 듯 그려지는 동기생 안젤로 수사, 남자 친구에게 버림받고 미혼모가 된 모니카와 어린 요한 등. 그들은 하나같이 작가가 바라는 어떤 모습, 또는 독자가 원하는 어떤 모습일 뿐 인간이 갖는 보편성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무한의 에너지가 도덕이나 이성적 판단, 또는 개인의 신앙에 의해 굴복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지 못하였다. 절대적으로 욕망이 승리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인간의 욕망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정요한 수사가 남자로서 갖는 이성에 대한 욕망은 소희와의 입맞춤에서 끝날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는 얘기다. 작가는 교묘한 상황 설정을 통하여 그 선(입맞춤)에서 한 발 물러서고 있다. 특정 종교와의 연관성 때문이었는지, 작가가 여자라는 한계성에서 비롯된 것인지, 어려서부터의 유교 교육에 세뇌된 탓인지, 또는 '외설'이라는 비난에 직면할까 봐 두려웠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대학 시절에 내가 하고 있던 아르바이트의 특성상 나이 지긋한 사회인과 만나는 기회가 많았다. 매매춘이 일반적이었던 당시에 그들 대부분이 약속 장소로 잡는 곳은 호텔의 나이트클럽이나 을지로의 지하 술집이었다. 사무적으로 만났을 때는 그렇게 근엄하고 도덕적으로 보였던 사람들도 열에 아홉은 젊은 여성의 유혹에 백기를 드는 모습을 많이도 보았었다. 나는 그때, 그들을 기다리며 담배 두 개피를 천천히 태우곤 했다. 배설하듯 욕망을 충족한 그들은 멋적게 웃으며 "오늘도 담배 두 개피?"하며 대답하기도 어려운 질문을 던지곤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 소설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그러나 등장인물 대부분이 신과 동물의 중간자, 도덕과 욕망의 경계인으로서 묘사되고 있다는 점도 실망스럽다. 물론 인간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은 잘 알지만(도덕적으로 완벽하지도, 죽을 때까지 악한 것만도 아닌) 작가가 예상하는 것처럼 인간의 삶이 도덕과 일탈의 경계선에서 마치 외줄타기를 하듯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어떤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 비열해질 수도 있고, 어떤 인간은(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신의 모습처럼 완벽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꾸준히 그런 것도 아니다. 삶 전체에서 볼 때 그 모습은 변화의 폭이 상당히 넓고 다양하게 전개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에 그의 작품이 사랑받는 이유는 오히려 단순할지도 모른다. 인간 군상의 실체, 인간 본성의 적나라한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의 책이, 책에서의 그의 묘사가 구토가 나올 정도로 더럽고 지저분하게 보인다고 느낄 수도 있고, 나는 이렇게 되지는 말아야지, 하고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보편적인 삶을 작가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도덕적으로 더럽고 추악하다고 하여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 아이들은 어른들이 '이렇게 하라, 이것이 옳다'고 말할 때 뒤돌아서서 웃는다. 현실을 솔직하게 말하고 도덕적 선택은 아이들 자신에게 맡겨야 한다. 기성세대와 소위 교양과 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간혹 현실을 무시한 채 좋은 것만 보여주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살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이다.
"요한 수사님, 악은 수많은 얼굴로 다가옵니다. 사실 사람인 우리가 그것을 식별하는 것은 은총에 의지할 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도 있어요. 우리가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모든 사랑을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모든 폭력, 모든 설득, 모든 수사는 악입니다. 너 한 사람이 무슨 소용이야, 네가 좀 애쓴다고 누가 바뀌겠어, 네가 사랑한들 아는 사람 하나도 없이...... 속삭이는 모든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p.239)
결국 내가 작가에게 실망했던 까닭은 인간의 욕망이 갖는 스펙트럼을 자의적으로 축소하였거나 현대인의 실제 모습에서 슬몃 도망쳤다는 점이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현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조망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도덕적이냐 그렇지 못하냐, 이성적으로 옳으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철학서나 잠언집에서 다룰 일이지 소설을 쓰는 작가가 판단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소설은 있는 그대로의 보편적인 삶,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본성을 기록하는 것이지 작가가 생각하는 도덕적 기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기초한다고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인간 본성의 가장 밑바닥을 건드리지 않고 가장 상위의 어떤 모습을 상상한다는 것은 어렵다. 전임 대통령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끝까지 비열하고 야비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었다. 인간의 본성은 그런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그를 선망하든, 아니면 그렇게 되지는 말아야 겠다고 생각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들 각자의 몫이다. 어쩌면 작가는, 또는 일부 비평가는 인간 본성을, 인간의 적나라한 실체를 문학적으로 미화하고 승화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작가는 인간의 적나라한 실체에세 한 발 물러선 것이다. 작가는 조금 비겁했다.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