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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잎맥으로부터의 수분 공급이 차단된 감나무잎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이미 예정된 변화이건만 나는 계절의 한켠으로 물러서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시린 하늘에 잔물결처럼 옅은 구름이 퍼지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앙상한 감나무 곁을 지키며 애꿎은 구두 뒷굽만 쪼았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마는 영원할 것만 같던 어떤 것들이 속절없이 스러지는 모습에서 나는 무상함과 함께 쓸쓸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이런 기분쯤이야 때가 되면 세월의 거품 속으로 쉽게 사라질 일이다. 그러나 가슴 속에 맺힌 피멍울을 안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삶은 얼마나 고된 것이냐. 짧지 않은 우리네 삶에서 결코 치유되지 않는 가슴 속 생채기는 얼마나 아픈 것이냐.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를 읽었다. 재작년이었던가, 영화로도 제작되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 작품을 나는 끝내 외면했었다. 지저분한 것, 낡은 것은 모두 다락으로 쳐박아 두던 나의 오래된 습관은 이제 마음으로 옮겨 와 끔찍한 것, 처참한 것에 대해서는 애써 고개를 돌리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편한 것에 쉽게 이끌리도록 길들여진 나의 게으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정의'라는 이름이 햇빛 속에서 팔랑이던 젊은 시절이 저 감잎처럼 까맣게 타들어가는, 자욱히 내리는 안개에 가려 희미해지는 잊혀진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얼마 전, 자애학원 사건을 접하면서 나는 깨닫게 된 거야. 어른이 되면 그 대답을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어른이 되면 그 질문을 잊고 사는 것이라고 말이야. 이제 나는 정말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 그렇지 않다면 내 아버지의 삶도 연두와 연두 아버지와 너도 나도, 우리의 삶은 정말 꾸드러빠진 떡조각처럼 무의미해질 거야." (p.227)
그랬다. 보이지 않는 것, 아니 어쩌면 일부러 외면했던 것들은 내게 마음 속 파문을 일으키지 않았다. 비겁에 동조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비겁자들이 세상에는 차고 넘친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이다. 눈 감고, 귀 닫아 외면했던 모든 것들은 내 일이 아니었고, 나와는 상관도 없는 먼 나라의, 우주 밖의 일에 지나지 않았으며 나는 한낱 소시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변명한다. 다들 그렇게 산다고 자위하기까지, 먹고 살기 바빠서라고 변명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서유진은 오래도록 그런 생각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뭐지? 하고 누군가가 물으면 그녀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 세상이라는 호수에 검은 잉크가 떨어져내린 것처럼 그 주변이 물들어버린다. 그것이 다시 본래의 맑음을 찾을 때까지 그 거짓말의 만 배쯤의 순결한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다." (p.246)
공지영 작가는 이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했다. '삶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 될수록 사람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작가의 생각과는 다르다. 아무리 고귀한 인간도, 아무리 천한 인간도 그 내면은 서로 닮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작가는 자신은 그렇고 그런 인간이 아니라고 믿음으로써 보통의 인간 군상과 자신을 구별하고자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살면 살수록 내 자신의 본성이 그들과 하등 다르지 않음을 새삼 느낀다. 다만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출되는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만 존재할 뿐. 때로는 이런 생각에 나 자신이 미워질 때도 있지만 생각해 보면 '그래서 인간이다'라는 생각에 연민을 느끼곤 한다. 내게 부족한 면을 누군가 채워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돈도 아니고 쾌락도 아니며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한 어떤 것을 향해 노력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 거야. 그 과정에서 뜻밖에도 내가 인간이라는 것, 그것도 아주 존엄한 인간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는 어떤 기쁨을 맛보았어. 그리고 그것은 내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지만 낯설고 고귀하기만 한 게 아니라 그냥 인간인 내 속에 원래 그런 것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웃을 위해, 더불어 함께하기 위해 싸울 때 내가 스스로를 가장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안 거야. 그리하여 한 존엄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다른 존엄한 생명을 짓밟는 자들과 싸우고 싶어졌던 거야." (p.281)
이제 감나무잎은 다 떨어지고 몇 장 남지도 않았다. 작가는 여전히 인간에게서 선과 악을 구분하려고 든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도, 자라면서 그렇게 완벽하게 변한 것도 아님을 나는 안다. 인간이 갖는 이중성과 위선은 비록 그것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선인과 악인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나도 언제든 세상의 지탄을 받을 정도로 악해질 수 있고, 찬사와 존경을 받을 정도로 선해질 수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된 이후 불의를 보고서도 눈에 들어간 티끌처럼 거북하지도, 가슴에 맺힌 멍울처럼 꺼끌거리지도 않는다. 나는 그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