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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의 건축 -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
정기용 지음 / 현실문화 / 2008년 10월
평점 :
추천 [서평] 정기용 저 < 감응의 건축 :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 >을 읽고 / 2008. 10. 15., 382쪽, 현실문화연구
건축 일반에 대해 그리고 공공건축물과 공간계획에 대해 독자들이 자신의 '관점'을 갖출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책...
이 책은 1996년부터 2006년까지 만 10년간 돈벌이 보다 농촌과 마을 공동체를 고민하면서 면사무소부터 납골당까지 크고 작은 30여 개의 공공건축물 설계작업을 진행했던 '무주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다. 그 주인공은 건축가 정기용, 즉 정기용 선생의 건축 활동 내지 건축에 대한 철학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저자 정기용의 건축에 대한 철학은 말 그대로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농촌의 공동체 계획과 건축 계획을 준비할 때 그는 가장 먼저 '농촌'을 고민했다. "아직도 농촌을 '개량'의 대상이나 구제해야 할 문제로만 바라보는 한 아무 것도 제대로 해결될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제 농촌은 없다. 우리들의 소중한 국토가 있을 뿐이며, 농촌과 도시 사이만 있을 뿐이다."(p.7~8)
건축을 어떤 전문가들만의 유희나 시혜가 아니라 '공공서비스'로 바라보는 그의 관점 역시 신선하고 정확했다. "주민들에게는 면사무소보다 더 필요한 것이 면 단위의 공중목욕탕이라는 것을 소위 공간의 전문가들이란 사람들만 알지 못한다. 아주 사소한 이런 것들을 섬세하게 배려하는 일이 전문가들과 공공의 서비스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다."(p.9)
도시나 농촌 등 공동체의 공간과 건축을 대할 때 역사적인 식견과 관점을 가지고 거주 문제와 지역 문제, 도시 문제와 주택 문제들이 서로 연동되는 종합적인 사고와 대처가 필요함을 지적하는 지점에서는 감탄이 절로 난다.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서 다른 질문을 던질 것이다. 도시냐 농촌이냐도 아니고, 전원주택이냐 아니냐 하는 상업적 용어에 매몰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디에서 나는 자연과 더불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하는 점으로 이행할 것이다. '인간답게'란 혼자 외롭게 자기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따로 또 같이'의 가치관을 다시 공유하는 것이다. 그 때 비로소 유목민은 다시 인간이 될 것이다."(p.11)
그런 관점과 태도를 유지한 채 무주군청과 군민들이 요청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였으니 각각의 공간 계획이나 건축이 자연과 호흡하고 이야기를 지니게 되며 사람들과 소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환기의 공공시설을 고민했던 진도리 마을 회관과 안성면/적상면/주남면/무풍면 주민자치센타, 사람의 삶과 자연의 삶을 고민하여 시대가 원하는 건축을 시도했던 공설운동장과 무주군청 뒷마당 리노베이션, 그리고 무주시장 현대화 프로젝트, 건축을 총체적으로 접근했던 청소년 수련관과 청소년문화의집, 곤충박물관과 향토박물관, 그리고 천문과학관과 버스정류장에는 그의 철학과 고민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또한 농촌의 문제를 넘어서는 접근이 돋보였던 농민의 집과 된장공장, 그리고 전통문화공예촌, 지속 가능한 사회를 구현하려고 노력했던 보건의료원 리노베이션과 종합복지관, 노인전문요양원과 무주공설납골당 프로젝트는 소위 '농촌문제'를 넘어서는 대상 프로젝트를 주어진 한계와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미래의 세대에게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하려던 저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
특히 나는 '면 단위의 공중목욕탕'과 '공설운동장'에서 나타나는 "주민이 원하는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공공건축과 공공서비스의 가장 근본적인 태도와 접근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도 몇 개 건축물 설계에 실무자로 참여한 경험이 있지만) 지난 수십 년간 세금을 쏟아 부으며 건축된 수많은 관공서와 공공건축물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왔다.
건축과를 졸업했다는 것이 그리고 그 건축물을 설계한 이들 중 상당수를 내가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 결코 자부심이 아니라 굴욕이고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언젠가부터 한국에서 지역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건축문화와 공간문화가 크게 개선되야 한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고 있다. 이런 시점에 이 책은 '공공건축을 통한 지역발전의 모색'이라는 특수하고, 유용한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건축계에서는 두루 회자되고 있다고 들린다.
건축설계를 하는 이들에게 물어보면 상당수 전문가들이 이 책을 읽은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정기용의 깊은 고민과 노력, 성과와 한계를 이해하거나 공감한 사람은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다. 건축계 대부분이 '성공'과 '성장', 돈벌이와 기득권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현재 시점으로는 공공기관과 건축 전문가들이 몇 가지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성과와 문제제기를 받아들이는 데 만족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공감대의 확산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은 고질적인 한국 지식인층의 문제라 생각한다. 한국의 학벌주의와 엘리트주의의 최고봉인 서울대를 졸업했음에도 건축학과가 아닌 미술대학 출신이라는 이유로 건축학계 주류와 건축설계 업계를 장악한 서울대 건축과 출신들에게 '왕따'당한 정기용 씨...
나는 공간과 건축 문화의 답보상태가 한국사회만의 독특하면서도 강력한 문제, 즉 '실력' 보다 '학벌'이 기득권 체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 생각한다.
물론 소수의 양심적인 건축가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 건축과 나 ---
나 역시 대학에서 건축을 배우고(?) 설계사무소에서 5년 가까이 실무를 했다. 건축 설계나 건설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대학 선후배, 동기들과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기도 했고 업무 진행을 위해 미팅도 자주하고 여러 자리에서 정보도 듣고 의견도 나누기도 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내가 건축가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건축업계에 종사한다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물론 '범 건축계'에 종사한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작년에 영화 <건축학 개론>을 보면서 이십 몇년 전 대학 새내기 시절이 생각났는데, 특이했던 점은 내가 공부할 때 영화 속에서 교수가 '건축학 개론'을 강의하던 식으로 건축에 대해 접근하는 교수는 전혀 없었다. 영화 첫 장면을 보면서 "아! 건축을 저렇게 자신이 사는 동네와 지역과 연관지어서 접근시키면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겠다."라고 느꼈다.
내 기억으로는 6 ~ 7명 정도 되던 건축 전공 교수들은 세부전공이 건축계획이나 건축설계 또는 건축구조나 건축사이던 간에 그냥 국내외 교과서나 참고서, 또는 오래된 '강의 노트(?)'를 가지고 거창한(그렇지만 결국 단순한) 개념이나 이론을 가르치는 정도였다.
분명 그 당시에도 새내기들 중 건축이라는 학문에 대해 뭔가 잘 알거나 어려서부터 적성으로 생각하거나 무언가를 탐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 학력고사 점수에 맞추어 입학한 경우가 다수였음에도 교수들과 대학은 그런 새내기들의 조건과 처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강의를 할 뿐이었다. 물론 몇몇 교수는 몇 년이나 된 너덜너덜한 강의노트를 강의(수업)시간에 들고 왔고.(덕분에 '족보'라는 말도 배우고...ㅋㅋ)
건축이라는 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고 서로의 관심사를 가지고 이야기하기보다 주어진 강의시간에 출석하려 일방적인 설명을 듣고 때 되면 시험치르고 설계숙제(테크닉을 가르치는)을 제출하면서 한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면 졸업을 하는 구조...
건축이라는 학문에 대한 교수들의 지식과 시각 속에는 도시도, 농촌도, 근대화도, 지본도, 산업도, 문화도, 사회도, 그 어떤 사람사는 것과도 관계없는 '순수학문(?)'이었습니다. 철학의 고사하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최소한 양심도 책임도 지혜도 상실하였지만 기득권은 쥐고 있는 '지식 소매상'들이었다.
고등학교에서도 교사들의 수업에서 배우기보다 스스로 원리를 깨닫고 공부방식을 터득하고 암기하는 데 익숙한 새내기들은 고등학교보다 난이도가 조금 높은 것 말고는 차이가 없는 대학 강의와 수업에 대해 탁월하게 적응해 갔다. 다행인 것은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간의 공부모임이나 의견교환을 '커닝' 비슷한 분위기로 몰고 갔지만 대학은 학생들의 어떠한 공부방식에 대해서도 '자유방임'했다는 것...^^
지금 대다수의 40~50대 건축사, 건축과 교수, 건축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분들은 아마도 나와 비슷하게 대학을 보내면서 스스로 공부하고 인맥을 쌓고 진로를 개척했을 것이다. 대학은 그냥 간판만 필요했던 셈이다. 물론 대학을 졸업한 후에 명문대학 중심의 학벌체제의 위력과 공고함에 놀라기는 했겠지만...
그럼에도 정기용 씨의 무주 프로젝트 이야기를 읽으면서 9학기 동안 다녔던 대학 생활에 대해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컸다. 대학과 학과, 교수들 탓만 하면서 중,고등학교 때부터 '꿈'이었던 '건축'을 내 스스로 깊이 고민하고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잘 몰랐던 건축의 '진가'를 대학을 떠난 후 20여년 만에 이 책에서 발견한 셈이다.
* 인상 깊은 문장 :
"경작지는 있으나 농민이 드물고, 사람의 기척은 있으나 동질적 농촌 공동체는 사라지고 있으며, 농업은 있는 듯하나 몰락하는 산업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농촌과 농업은 국가의 '골치 아픈 영역'이다. 그러나 의외로 앞으로 쓸 예산은 많다. 바로 이런 것이 문제다. 이런 상황 속애서 아직도 농촌을 '개량'의 대상이나 구제해야 할 문제로만 바라보는 한 아무것도 제대로 해결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잘못된 질문을 바로잡아야 한다. 농촌을 타자화하는 버릇을 버려야 하고, 세계시장 속에서만 바라보는 농업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농촌은 없다. 우리들의 소중한 국토가 있을 뿐이며, 농촌과 도시 사이만 있을 뿐이다. 농촌을 늘 변방으로 보고 자신의 일부를 식민지 경영하듯 하는 자가당착을 벗어던져야 한다.
지금 농촌은 최후의 보루처럼 남아 있다. 살기는 모두 도시에 살면서 늙은 부모들을 인질로 잡고 있다. 그 후손은 전 국노를 반나절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농촌 식당에서도 미국산 수입쇠고기 태우는 냄새가 진동한다. 모든 농촌은 '도시화'의 후유증에 앓로 있으면서 동시에 세계화의 여파에 시달리는 중이다. 따라서 이제는 형식과 구호에만 머무는 '마을 만들기'식의 사고에서 탈피해 농업과 농촌의 문제를 전 국토의 공간 재편 문제와 함께 생각할 때가 온 것이다."(p.7)
"사실 농촌에서 개발의 문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농촌 주민들도 개발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 이 어려운 농촌에서 해방될 것인가가 그들의 당면 문제였으며, 여기에는 또한 그들의 미래가 달린 것이다.
한국에서 농촌의 개발이란 무엇보다도 땅값을 올리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개발론자들은 개발을 위해 땅이 필요하고, 오랫동안 땅을 섬기고 살았던 농민들은 그 땅을 지키려 한다. 그 팽팽한 긴장은 시간이 흐르면서 종종 충돌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결국 한국의 많은 농촌 거주민들은 '높은 가격으로 땅을 파고 농촌을 탈출하는 것'에 기대를 걸고 자본에 굴복하게 된다. 그래서 이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지속적으로 잉태한다. 모든 농촌을 자본의 논리로 개발한다면 누가 남아서 오래된 땅을 지키고 살아갈 것인가?"(p.29)
"오늘날에도 여전히 붕괴되고 있는 농촌사회를 지키며 살아가는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 자부심과 정체성을 이어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농촌에서 살아가는 것에 조금이라도 자부심을 느낄 때, 농촌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 이런 모든 것을 탐색하고, 또 사람들을 세살과 사회와 소통할 수 있게 하느 것고 건축가의 몫임을 필자는 무주에서 배웠다."(p.43)
[ 2013년 5월 2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