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 전3권 겨레고전문학선집
박지원 지음, 리상호 옮김 / 보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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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초에 공부모임에서 진행한 '열하일기' 세미나의 교재는 고미숙씨의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상/하)가 아니라 이 책이었다.
가끔 독서 욕심이 분출할 때가 있는데, '열하일기' 세미나 당시에 내 마음이 그러했다. 당시 세미나 날짜에 맞추어 고미숙씨의 '열하일기'와 보리출판사의 '열하일기'를 모두 읽으려 했다. 하지만, 날짜에 맞춘 것은 고미숙씨의 책이었고 이 '열하일기' 세트의 경우 3권 중에서 마지막 하권을 절반 정도 밖에 읽지 못했다.
그래도 세미나는 아주 재미나고 유익하게 진행되었고 세미나를 마친 이후 여유를 가지고 세미나에서 이야기된 내용도 되새기면서 세트의 마지막 하권까지 읽었다.
 
(여기서 잠깐 나의 독서관과 독서방식에 대해 한 마디...)
아직까지 내가 책을 읽는 방식은 '정독'이 아니라 '속독'에 가깝다. '속독'이라 해도 1~2 시간에 책을 완독하는 수준은 아니다. 내가 책 읽는 것을 잠시 계산해보면 통계 상으로 보통 소설 50쪽을 읽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1시간 정도 걸린다.
따라서 수학이나 자연과학 서적, 경제경영 서적, 철학이나 인문도서 등 다른 분야의 책은 1시간 동안 집중해서 읽어도 1시간을 훌쩍 넘겨버리기 일쑤다. 그리고 일부러 '속독'을 배우거나 빨리 읽으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대신, 읽을 때 책 내용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집중하려고 애쓰면 그만큼 집중력은 높아지는 것 같다.
한 번 책을 다 읽으면 책을 덮은 후 적어도 몇 시간에서 길면 며칠 후에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책을 집어든다. 처음 읽을 때 메모해 놓거나 표시해 놓은 구절을 중심으로 전체적으로 책을 다시 읽는다. 서문과 결론도 이 때 반드시 다시 읽으면서 전반적인 내용을 머리 속에서 정리해보고 요점과 배울점, 느낀점, 비판할 점 등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는 것이다.
그냥 책 읽는 것을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숨 쉬고 밥 먹는 것처럼 생활화하는 것과 하루를 보내면서 애매하게 5~10분 이상의 짬이 나게되면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이려는 것이 내가 노력하는 방향이다. 집이나 사무실에서는 화장실 갈 때마다 책을 들고 가기 때문에 눈치를 준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책 읽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도 꽤 오래 전이다. 또한 술을 먹지 않고 불필요하게 저녁이나 주말 약속을 만들지 않으려고 하기에 평상시의 경우 하루 중 책 읽는 시간을 제법 확보할 수 있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일주일에 1권 이상 읽는 것이 올해 나의 (양적)목표다.
 
[열하일기_세트]는 보리출판사의 <겨레고전문학선집> 기획의 하나라 출간된 것이다. 보리출판사는 북한의 문예출판사가 펴낸 1995년판 <조선고전문학선집>을 <겨레고전문학선집>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일부 편집, 수정하여 지난 2004년 펴낸 것이다. 출판사측은 북한에서 진행한 우리 민족의 고전문학을 소개하면서 아직 한국에서 미진한 한반도의 고전을 발굴하고 북한의 문학계와 소통하고 싶었던 것이다.
<겨레고전문학전집>은 [열하일기] 3권을 시작으로 [동명왕의 노래](이규보 작품집)부터 [숙향전](소설)에 이르기까지 30권을 출간한 상태다. [열하일기] 세트는 북한의 리상호씨가 고문을 완역한 것이다. 
 

고미숙씨의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와 달리 이 책은 처음 읽으면서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단어 사용이 남북이 제법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흙탕물'은 '흙물'로, '방금'은 '이즈막' 등 서로 다른 표현도 많고 '가닥물' 처럼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는 단어도 가끔 들어있기 때문이다.
 
------- * 역자 리상호는 누구인가?
북에서 한 활동 일부만 알려져 있다.
1955년에 《열하일기》 국역을 마쳤고, 1959년에는 《삼국유사》를 국역했다. 북녘의 고전 출간 사업은 모든 대중이 고전을 읽도록 한다는 원칙에 따른다. 리상호의 국역은 그러한 원칙을 따라 쉬운 우리말로 번역을 한 것 위에, 토박이 우리말을 잘 살려 쓰고 운율감이 배어 있게 하여, 이 《열하일기》가 빼어난 국역 문학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였다. ---------
 
당초 박지원 선생이 쓴 [열하일기]는 26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정본 없이 필사본으로만 전해져오다가 1901년 김택영이 처음 간행하였다. 현대문 제목은 북한의 리상호가 번역한 것을 따랐다.
26권의 세부 제목과 내용은 아래와 같다.(목차 부분은 위키디피아에서 일부 옮겨온 것입니다...^^)
고미숙씨는 전체 26권 중에서 일부를 편집에서 제외하였고 이 책 [열하일기] 세트는 26권 전부를 완역하여 출간했다.






    1. [제1권] 압록강을 건너서 : 도강록(渡江錄) - 압록강을 건너 심양까지의 기행이다. 1780년 음력 6월 24일~음력 7월 9일

    2. [제2권] 성경의 이모저모 : 성경잡지(盛京雜誌) - 심양에서 광녕까지의 기행이다. 음력 7월 10일~음력 7월 14일

    3. [제3권] : 일신수필(馹?隨筆) - 광녕에서 산해관까지의 기행이다. 음력 7월 15일~음력 7월 23일

    4. [제4권] 관내에서 본 이야기 : 관내정사(關內程史) -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기행이다. 〈호질(虎叱)〉 수록. 음력 7월 24일~음력 8월 4일.

    5. [제5권] 북방 여행기 : 막북행정록(漠北行程論) - 북경에서 열하까지 가는 길이다. 음력 8월 5일~음력 8월 9일

    6. [제6권] 태학관에 머물면서 :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 열하에서의 일정이다. 음력 8월 9일~음력 8월 14일

    7. [제8권] 북경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1.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음력 8월 15일~음력 8월 20일.

      2. 북경에서 다시 조선 땅으로 들어오는 여정은 기록을 하지 않았다.


    1. [제7권] 구외이문(口外異聞)

    2. [제9권] 금료소초(金蓼少抄)

    3. [제10권] 옥갑야화(玉匣夜話) - 〈허생전〉 수록

    4. [제11권] 황도기략(黃圖記略)

    5. [제12권] 알성퇴술(謁聖退述)

    6. [제13권] 앙엽기(像葉記)

    7. [제14권] 경개록(傾盖錄) - 열하일기 등장인물에 대한 짧은 기록들이다.

    8. 제15권 황교문답(黃敎問答)

      1. 황교문답, 반선시말, 찰십륜포는 티벳과 달라이라마에 관해 들은 기록이다.

      2. 박지원은 황교문답에서 청나라의 이민족통치와 유학자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9. [제16권] 행재잡록(行在雜錄)

      1. 건륭제에게 바친 문서와 건륭제가 내린 칙유 등의 기록이다.

      2. 실례를 들어가며 청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조선이 가진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

    10. [제17권] 반선시말(班禪始末)

    11. [제18권] 희본명목(戱本名目)

    12. [제19권] 찰십륜포(札什倫布)

    13. [제20권] 망양록(忘羊錄)

    14. [제21권] 심세편(審勢篇)

    15. [제22권] 곡정필담(鵠汀筆談)

    16. [제23권] 동란섭필(銅蘭涉筆)

    17. [제24권] 산장잡기(山莊雜技)

    18. [제25권] 환희기(幻戱記)

    19. [제26권] 피서록(避署錄)

작품으로서의 [열하일기]에 대한 서평은 이미 고미숙씨의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에서 다루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은 연암 박지원 개인의 작품, 사상, 성과 등에 대해 정리했다. 이 책 [열하일기] 세트의 상(上)권의 후반부에 북한 김하명 박사의 '박지원 작품에 대하여'가 수록되어 있다.
김하명 박사의 글을 일부 인용하면서 빈약하지만 박지원 선생의 작품을 평해보고자 한다. 내가 박지원 선생의 [열하일기] 이외에 다른 작품, 그리고 조선 후기 학자들의 작품을 거의 읽어보지 않았기에 김하명 박사의 설명 자료를 토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김하명 박사는 작가로서 연암 박지원을 평가할 때 '18세기 조선이 낳은 저명한 사실주의 작가'라고 평가하면서 '사상가나 문학가로서 우리나라 고대 중세의 전 시기를 통하여도 가장 높이 솟아 있는 봉우리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박지원의 예술 문학 작품들과 평론 저술들에는 '당시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던 심각한 사회 경제적 변동과 문화 예술 분야에서 첨예한 신구 투쟁이 반영되어 있으며 시대의 선진 사상 조류를 대표하는 작가 박지원의 사상 미학 견해와 예술 기량이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고...
김하명 박사가 인용하는 박지원의 작품은 '양반전'을 포함한 [방경각외전放?閣外傳]에 실려 있는 단편 소설, 장편 기행문 [열하일기], '좌소산인에게(贈左蘇山人)'와 같은 시 작품, '글은 뜻을 나타내면 그만이다'와 같은 서문 등이다.
 
박지원의 집안은 명문 사대부였다. 그의 6대조 충익공은 임진왜란 때 공신이며, 그 후의 선조들도 대대로 정계에서 대사헌, 판서, 참판 등의 요직을 거쳤다. 그리고 그의 가문은 당시 집권파였던 서인 노론에 속했다. 그런데도 그는 과거나 벼슬을 거부하고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찾는 방향으로 나섰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김하명 박사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는 그가 나서 자라고 사상 문화 활동을 전개한 당시의 사회 문화적 환경이다. 두 번의 임란과 호란을 겪은 조선의 경제는 백성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점차 복구되어 갔으나 그럼에도 백성들의 생활은 점점 나빠졌다. 상인 계층은 늘어나고 빈부격차가 격화되는 가운데 양반 계급 사이에서도 빈부격차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계속된 전쟁에서 자신들의 무능과 반민중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양반 통치계급의 본질이 드러나면서 봉건 사회는 점차 쇠퇴기로 접어든 것이다. 조선이 폐쇄적인 사회였음에도 청나라와의 외교관계와 상인계급의 활동, 외국인들의 표류 등으로 청나라나 서구의 사상과 문물이 조선 사회에도 점차 스며들게 된다.
둘째는 연암 박지원의 가정 환경은 양반 가문임에도 그로 하여금 새로운 문물과 사상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열려있었다. 그의 조부도 젊은 나이에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고 연암에게 서당의 글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그는 일찍 보모를 여의게 되었다.) 열여섯에 이보천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이보천 역시 일찍이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에서 농사에만 힘썼다. 그리고 실학사상을 가지고 있던 자신의 동생 이양천이 연암을 지도하도록 했다.
 
연암 박지원은 열여덟 살에 옛 하인에게서 들은 재미나는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처녀작 '광문자전廣文子傳'을 ?고 이 때부터 계속 쓴 '민 모인전', '김 신선전', '우상전', '역학대도전', '봉산학자전' 등 9편을 묶어 약관의 나이에 [방경각외전]을 책으로 완성했다. 연암은 이 단편 소설집을 통하여 확고히 봉건 제도의 모순을 폭로하는 자로 등장했으며 조선 문학 발전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진 작가로서 등장했다. 그 속에는 양반 사회의 도덕의 위선, 백성의 정치 도덕적 우월성, 인간 성격 형성에서 차지하는 사회적 처지의 중요성, 노동의 고귀함, 양반들의 착취구조, 애국주의, 선린 외교, 사실주의 등이 담겨 있다.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의 사상과 이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오랜 세월을 두고 연구해 온 것을 '한 번 눈으로 증험한 것'이다. 중국에서 보고 들은 좋은 것을 조선 백성에게 알리며 그것을 실천에 옮길 것을 염원하면서 4년 동안 연암골에 박혀서 집필한 것이다.
[열하일기] 속에는 철학, 정치, 경제, 천문, 풍속, 제도, 역사, 고적, 문화 등 사회 생활 전 영역에 걸친 문제들이 취급되어 있으며 그의 세계관, 사회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견해와 민중적 임장이 명백히 반영되어 있다.
또한 그는 중국의 좋은 것과 조선에서 부족한 것을 대비하면서 그 원인이 전적으로 무위 무능한 양반 사대부들 때문임을 명확하게 주장했다. "수레는 왜 못다니는가? 이것도 한 마디로 대답한다면 모두가 선비와 벼슬아치들의 죄다."
 
그러면서 김하명 선생은 연암 박지원의 철학적, 사회정치적 식견이 과학적 세계관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과 민중을 역사와 개혁의 주체로 세우지 못하고 왕조와 사대부 체계를 인정한 것, 그리고 구체적인 조직행위와 혁명을 생각하지 못하고 '계몽'에 의지한 것 등을 박지원의 한계로 지적한다.
 
박지원은 정조 시대 말기에 다른 실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직접 고을 현감이나 한성 부파관을 지내는 등 현실 사회 속에서 자신의 선진 사상과 문물을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조선 사회의 제반 사회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을 주기 위하여 [과농소초] 등 정론을 많이 썼다. 또한 개인의 토지소유를 일정한 기준량으로 제한하고 그 이상의 소유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한전제'를 제안하기도 했고 화폐 정책 개혁, 신분 제도 개혁, 난민 구제책, 봉건적 도덕의 개혁 등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정조 사후 양반 통치계급의 반격과 반동으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하여 죽었다.
 
영조,정조 시대의 조선 사회와 21세기 한국 사회... 비슷한 면이 많은 것 같다.
선진 사상과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미 사망 선고를 받은 명나라 유교(미국의 신자유주의)를 살리려고 애쓰고 객관적으로 불가능한 만주땅(북한)을 가당치도 않은 무력으로 되찾겠다고 부르짖는 모습, 자신의 자리가 어딘지 찾지 못하고 사대부와 백성들의 생각을 아편처럼 중독시키는 불교와 유교(반공친미와 기독교), 민중들과 진보세력으로부터 분리되어 개혁주의자임을 내세웠던 임금(DJ와 노전대통령), 자신들의 기득권을 부여잡고 발악하는 양반 사대부(수구 기득권 세력), 어딘가 아직 부족하고 모자란 듯한 개혁주체들(진보세력), 자신의 삶과 권리를 주체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힘겹게 하루하루 살고 있는 백성들(민중들)....
연암 박지원과 당시 실학자들로부터 21세기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무엇일지...
 
[ 2011년 8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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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조선 운동사 -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역사
한윤형 지음 / 텍스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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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초에 대학 몇 년 선배(개인적으로 친분이 없으니 선배라 칭하기는 뭐하지만...)가 페이스북 비공개 그룹에 '희망버스는 희망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글을 올리면서 그룹 멤버들의 찬반 논란이 거세졌고 나 역시 며칠 동안 페이스북에 집중하여 댓글을 달았다. 나는 그 사람이 주장하는 내용에 50% 이상 동의할 수 없었고 일부 동의할 수 있는 주장 역시도 그런 문제를 제기할 시기나 방식이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논란이 거세지던 와중에 페이스북에서 '희망버스'를 반대하는 주장을 기사로 다루어주겠다는 중앙일보 기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유명세를 탔다. 
그 사실을 안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그 사람의 글에 반응하지 않았고 그 사람이 그룹 멤버들을 초대하여 토론회를 갖자고 제안하면서 나에게도 직접 참석할 것을 요청한 것도 거부하였다. 그 사람이 페이스북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주류언론에 '등장'하고 싶어서 일부러 논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주변 친구들을 만나다보니 많은 친구들은 그룹에서 논의되는 내용을 살펴보고 그냥 감각적이고 직관적으로 댓글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 그 사람은 일반적으로 대한민국 최고 학벌로 이야기되는 대학을 나왔고 10년이 넘는 청춘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바친 바 있다. 1990년대 소련의 해체와 시대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노동운동을 그만두고 대학에 재입학한 후 졸업하여 대우자동차에 근무하였고 이후 개인적으로 공부하면서 사회문제를 다루는 연구소를 차리기도 했다. 책도 몇 권 펴냈으나 별로 세간의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고 최근에는 동년배들과 모임을 갖고 자신의 주장과 이론을 알리는데 애쓰고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이 책 [안티조선운동사]를 읽기 시작한 것은 지난 달 7월 중순이지만 당시에는 공부모임에서 책의 분량이 많아 2부까지만 세미나의 대상이었고 이번 달에 나머지를 토론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 주에 3부~6부 나머지 부분을 읽었다. 나머지 부분을 읽는 동안 지나간 페이스북을 통한 경험과 의문이 계속 머리 속에서 오버랩되었다. 
나는 왜 본능적으로 '조중동'을 싫어할까? 지금 시대에 지식인이 자신의 의견을 '조중동'에 표현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언론은 산업인가 아니면 사회적 기능인가? 한국사회에서 언론의 과점상태를 이룬 '조중동'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회 속에서 '언론의 자유와 책임'이란 무엇인가? 언론이 사회적인 주장의 '공론화'장이라고 하면 언론이 국민들과 소비자에게 부여받은 권리와 의무는 무엇인가? 사적 소유와 사회적 책임에서 언론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가? 21세기 언론의 새로운 기능과 책임은 어떻게 변화되었나? 현실에서의 언론은 어떻게 기능하는가? ..... 끝없는 의문과 질문이 계속될 수 있다.
 
지난 2000년대 10년 동안 '안티조선 운동'은 한국사회를 달군 화두 중 하나였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관심을 가졌고 실제로 운동에 참여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나 또한 구체적으로 사이트에 가입하여 활동하거나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지만, 운동의 취지에 공감하여 동의하여 언젠가부터 조선일보 구독을 끊었다.
또한 안티조선 운동은 우리 사회에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왔다. '언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언론이란 어때야 하는가?'에 대해 사람들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도록 하는 계기를 주었고 실제 많은 사람들이 이를 계기로 심사숙고하기 시작했다. 그 이외에도 '안티조선 운동'은 이 사회에 많은 것을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그 시작을 15년 전이라 말하고 어떤 이는 10년 전이라 말한다. 그리고 또 어떤 이는 안티조선 운동을 과거로 기억하고 다른 이는 현재 진행형이라 이야기한다. 운동이 '실패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아직은 아니다'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대체 안티조선 운동이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 '안티조선 운동'은 시민들이 벌인 '조선일보' 반대 운동이다. 대한민국의 주요 언론인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행위에는 우리 언론의 어떤 변화를 꾀하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그런 점에서 안티조선 운동은 언론 운동인 셈이다.
하지만 그동안 언론이, 그리고 [조선일보]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안티조선 운동이 단순히 언론 운동에 그쳤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지금은 언론 환경의 변화로 언론 권력이 분산됐지만 과거, 언론 권력이 몇몇 언론사에 집중됐을 당시에는 그 위력이 실로 대단했다. 따라서 안티조선 운동은 시민운동임과 동시에 정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 * 한윤형은 누구인가?
대구에서 출생했으나 학창시절의 대부분을 대전에서 보냈다. 고등학생 시절 진중권과 강준만의 책을 읽으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인터넷에 접속했고 1999년 시작된 안티조선 운동의 원년 맴버가 되었다. 서울대와 조선일보 주최의 논술경시대회를 나갔다가 대상을 받았고 당시 안타조선 운동의 참여자임을 밝히며 조선일보의 인터뷰를 거부해 화제가 되었다.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여러 지면을 통해 글을 발표하고 있다. 공저로는 [MBC, MB氏를 부탁해](프레시안북, 2008)와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산책자, 2009)가 있고, 단독 저서로는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텍스트, 2009)가 있다. -----
 
 
이 책은 지난 10여 년 동안 진행되어 온 '안티조선 운동'의 역사를 담았다. 더불어 저자는 이 운동의 참여자로서 안티조선 운동에 대해 최초로 평가를 시도했다. 이를 위해 안티조선 운동의 태동과 전개, 절정의 과정은 물론이고 안티조선 운동 이전의 언론사와 언론 운동사를 살폈다. [안티조선 운동사]는 총 6부로 구성됐다.
 
1부 ‘맥락을 모르는 이들을 위한 예비 학습’은 1920년부터 1998년까지의 한국 언론사를 간추렸다. 한국의 언론사는 한국의 굴곡진 현대사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친일과 친미, 기득권의 세대세습으로 이어져왔다. 그 중심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있고...
2부 ‘안티조선 운동의 탄생’은 안티조선 운동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1995년부터 1999년까지의 상황을 다뤘다. 1995년 강준만교수의 [김대중 죽이기]는 안티조선 운동의 맹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999년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은 의도와 사실조작으로 '최장집 교수 사건'을 기획,실행했고 이에 대항하여 대대적인 '안티조선 운동'이 전면에 등장한다.
3부 ‘안티조선 운동의 성장’은 2000년부터 2001년까지의 사건들을 묘사하고 그 맥락과 의미를 짚었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와 국민의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 '옥천전투' 등 안티조선 운동은 활활 타올랐다. 그리고 이문열의 '홍위병 논란' 등 수구기득권 세력의 도전도 만만치 않게 일어난다. 언론환경의 변화와 세무조사는 그동안 조금씩 달랐던 조중동이 하나의 기득권 집단이자 수구세력으로 결집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4부 ‘혼란에 빠진 안티조선 운동’은 안티조선 운동에서 특별히 중요한 해라 할 수 있는 2002년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안티조선 운동의 참여자가 늘어나고 자체가 국민의 정부의 실정과 2002년 대선을 앞두면서 안티조선 운동은 분열한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조중동과 진보언론의 전쟁이 벌어지고 '언론'이란 세계는 과도한 당파성으로 얼룩진다. 안티조선 운동과 노무현 후보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점점 가까워졌다.
5부 ‘관성에 젖은 안티조선 운동’은 2003년에서 2007년까지의 안티조선 운동 진영의 문제점과 당시 참여정부의 문제점 등을 살폈다. 참여정부의 실정과 여러 세력과의 갈등을 맞이하여 또 다시 안티조선 운동은 분열을 거듭하고 조중동은 이를 틈타 역습을 가한다.
6부 ‘안티조선, 그 이후’는 이명박 정권 집권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언론과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담았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과 촛불시위를 통해 안티조선의 정신은 다시 다른 주체로 부활했다.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 언론환경은 또 다시 변화하고 언론 운동은 기존 과제와 더불어 새로운 과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 책을 통해 안티조선 운동사를 좇다 보면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안티조선 운동사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역사인 셈이다.




< 책에 대한 평가 >
이 책은 직접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한 저자의 체험담이자 사실관계를 토대로 10~15년간 한국의 언론개혁운동을 서술했다. 
저자는 직업 저술가도 아님에도, 그리고 젊은 나이라고 하기에는 독자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한국 현대사 속에서 언론의 흐름을 책 속에 담아냈다. '안티조선 운동'이라고 불리우는 언론운동사만 다룬 것이 아니다. 언론운동사에 필요한 일제시대 친일 언론의 사실과 행태, 해방전후사에 대한 인식, 개별 사건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확한 자료들을 책 속에 담아내는 것을 보면 저자의 열정과 실력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어떤 사회적 배경, 언론 환경의 배경 속에서 '조선일보'에 대한 시민들의 문제의식이 탄생하고 어떤 계기와 과정을 통해 '안티조선 운동'이 탄생했는지 독자들이 충분히 수긍이 갈 수 있도록 설명했다. 그리고 초창기 '안티조선 운동'에서 강준만교수의 빼어난 역할과 기여를 밝혀냈다. (그는 스스로 강준만 교수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쪽까지 읽은 후 덮고 나면 '안티조선 운동'의 10년 넘는 과정이 파노로마처럼 눈 앞에 펼쳐질 정도로 '안티조선 운동'을 정확하게 다루었다.
뿐 만 아니라 저자는 '안티조선 운동'의 주도세력의 입장과 주장 뿐 아니라 '안티조선 운동'을 거쳐간 수 많은 개인과 단체, 정치권, 세력의 흐름과 주장까지 객관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 속에는 박정희 추종론자와 한총련, 민주당 지지자들과 노사모, 유시민과 최문순, 김대중과 노무현, 진중권과 변희재, 언론운동단체, 각 언론사까지 포함된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저자가 '안티조선 운동'을 객관적으로 다루고 평가하는데 있다. 
저자는 '안티조선 운동'만이 최선이고 그들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잘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냥 '안티조선 운동'은 한국현대사에서, 시민들의 의식과 언론의 모습, 각 개인과 집단들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1995년에서1999년까지 이어진 기간 속에서 탄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탄생하는 배경과 과정, 참여하는 주체와 구조, 그리고 그들의 운동과정은 '안티조선 운동'의 긍정적인 성과 뿐 아니라 부정적인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안티조선 운동'은 자연스럽게 운동의 상대인 조선일보와 다른 주류 언론사, 그리고 진보언론과의 관계 속에서 전개되어 나가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와의 관계 속에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태동했던 '안티조선 운동'은 그 탄생 배경, 논리와 유사했던 정치인 노무현을 만나면서 급격하게 대중화 되었고 스스로의 한계 속에서 참여정부의 프레임에 발목이 묶여 참여정부의 몰락과 함께 사라져갔다. 그래서 저자는 "안티조선 운동은 실패했다"고 결론을 내린다.


또한 저자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 대한 공과를 공정하게 평가하려고 노력했다. 
2009년 정권의 친위대를 자처했던 검찰과 조중동 등 보수언론은 노무현 전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갔고 이 과정을 통해 언론 운동이 다시 부활하고 그동안 일방적으로 폄하되었던 노무현 대통령 개인과 참여정부의 성과는 재평가되었다. 하지만, 과도한 재평가의 분위기는 참여정부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가로막기도 했다.
저자의 말대로 IMF 이후 사회적 양극화와 노동자, 농민에 대한 부당한 처우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들어 개선되지 않았다. 두 민주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구기득권 세력의 여론 호도와는 달리 사실 10년 기간 동안 수구기득권 세력과 자본가들의 이익과 권력은 늘어났지만 그 반대편에 존재하던 노동자, 농민, 빈민, 비정규직, 청년, 여성, 아동, 노인들의 권리와 이익은 줄어들었다. 특히 수구기득권 세력과 부패관료, 삼성에 가로막힌 참여정부의 경우 '때 이른 4대 개혁입법'과 한미 FTA 추진 등 실정이 만만치 않았다.


저자는 '안티조선 운동'의 역사를 서술했지만, 그 속에서 언론의 '사회적 기능과 책임'에 대한 문제의식, 극우/보수/진보를 떠나 한국의 언론이 언론으로서의 기본적인 기능과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제기, 진보언론의 필요성과 성장 조건에 대한 지적, 언론개혁의 방향과 방식에 대한 고민, 사회적 의견을 담아내는 '공론화'의 장으로서의 다양한 언론의 역할과 관계, 주권자로서의 국민과 소비자로서의 시민의 책임과 역할 등도 함께 다루고 있다.
'안티조선 운동'이 단순하게 조선일보를 반대하고 없애고자 하는 것이 아닌 한국의 언론이 제 역할과 기능을 다 할 수 있도록 시민들의 노력인 것이고 그렇다면 단순히 조선일보만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야만적 극우선동집단의 하나로 기능하고 있는 '조중동'을 한꺼번에 바라보아야 하고 소위 진보언론에서 나타나는문제점 역시 무시하거나 눈감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신문 뿐 아니라 방송과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를 모두 포함한 언론매체 환경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고 그 모든 것의 소비자이자 주권자인 시민들의 각성과 참여가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한국 언론의 현실과 문제점은 한국 정치계, 관료와 교육부문에서의 현실과 문제점, 그리고 다른 분야에서의 그것과 비슷한 맥락을 보여주고 있고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영향을 주고 받고 있다. 결국 저자가 1부에서 '예비 학습'으로 서술한 '해방전후사'의 언론의 모습은 한국사회 각 부분에서 비슷한 맥락으로 나타나고 있고 현재의 수준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자력이 아닌 타력에 의한 해방, 동족상잔의 비극, 남북의 이념 대결, 친일세력에서 친미세력으로의 지배세력 교체, 독재와 군사정권의 체제 장악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전과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뿐 아니라 언론 속에서도 그대로 녹아들었고 '안티조선 운동'은 언론 분야에서 '해방전후사'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민적 운동의 하나일 것이다. 
 
안티조선 운동의 참여자이기도 한 저자 한윤형은 과감히 안티조선 운동이 ‘실패’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실패했던 그 지점에서 새로움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안티조선 운동사]를 통해 지금, 안티조선 운동을 다시금 돌아보며 기록한 이유는 바로 새로운 꿈을 꾸고 실현시키기 위해서라 할 수 있다. [안티조선 운동사]는 독자들에게 가까운 과거와 현재를 이어 주며 한국 언론과 한국 사회의 미래를 꿈꾸게 해줄 수 있다.
 
저자는 상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사실 책을 모두 읽고나면 가장 명확한 결과가 하나 도출된다. 그것은 국가권력의 주인이자 언론을 소비하는 소비자로서 시민들이 어떻게 언론을 소비하고 언론운동에 참여하는지에 달려있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여 '국민의 수준이 국가의 수준이고 대통령과 정치인, 언론의 수준'인 것이다.
저자는 실천적인 과제도 몇 가지 제시한다. 진보언론에 대한 적극적 유료 구독과 주간지에 대한 유료구독, 진보언론의 내용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질책, 그리고 조중동과 방송 등 제 언론과 관련 제도에 대한 감시와 참여이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기존 언론 이외에 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경우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집단은 소비자이고 국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권자가 자기 권리를 행사하고 자기 역할을 다하게 되면 어느 사회의 어느 집단도 국민의 힘을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책을 읽고 개인적으로 얻은 것들도 많다.
하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한국 언론의 지형과 역사, 언론의 환경과 구조, 언론운동의 흐름과 과제 등에 대해 많은 정보와 시사점을 얻었다. 이것 만으로도 책 값은 뽑은 셈이다.
둘. 강준만 교수와 진중권 교수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얻었다. 그동안 나는 주변 사람들의 개인적인 생각과 판단에 의존하여 두 사람을 받아들였고 스스로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이 책을 통해 두 분의 가치와 실력, 주장과 논리를 접해보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셋.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그리고 동아일보 각각에 대해서 그동안의 그들의 행위와 과정을 통해 각 수구언론의 정체에 대해 내 나름대로 개념과 기준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넷. 한국의 인터넷 소통문화가 초기에 비해 훨씬 '집단극화'와 '사이버 발칸화'의 특징을 보였다는 설명에 공감하고 동의한다. 이는 포탈이나 카페 뿐 아니라 나아가서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에서도 비슷한 정황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과 고민은 '공론화'에 대한 장기적인 과제를 심각하게 생각토록 만든다.
다섯.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한 대중적인 세력과 '노사모'의 연결 가능성, 노무현 전대통령의 생각과의 공통점을 상기시켜 주었다.
여섯. 참여정부와 삼성의 '커넥션'에 대해 한 번 더 심증을 굳혔다. 더군다나 참여정부 참모진이 내뱉은 여러 가지 발언은 심증을 넘어서 물증까지 가능한 정도다.
일곱. 개혁당에 대한 유시민씨의 배신, 그동안의 발언과 달리 '당내 민주주의'와 '진성당원체제'에 대한 유시민씨의 이중적인 태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유시민씨는 앞으로도 오랜 동안 의심받을 수 밖에 없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것보다 더 오래 '행동'과 '결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 저자의 글 중 비판적으로 검토한 부분
- (p.52) 저자는 1970년대 '언론자유 수호'를 외치다가 박정희 정권과 언론사주에 의해 ?겨난 조선투위와 동아투위를 평가하면서 "그들이 제도권 내부에서 계속 투쟁할 수 있었다면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는 훨씬 더 성숙하지 않았을까?"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당시의 좀 더 구체적인 신문사 상황과 조선투위와 동아투위 주체들 입장에 처하게 되면 이런 가정법은 유효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 사회구조 전체를 고려해보고 1988년 한겨레신문을 비롯한 '대안 언론' 탄생을 되돌아볼 때 역으로 조선투위와 동아투위가 없었다면 관제언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언론 운동 및 '대안언론' 추진이 지체될 수도 있었다는 의견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 8장 '한총련의 귀환' (p.152~163) 사실 저자도 그렇고 나고 그렇고 2000년을 전후하여 한총련이 검찰의 공소장대로 '북한의 통일전선' 지침에 추종하여 학생운동을 전개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조심스럽기는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국가 정보원과 검찰이 믿는 것처럼 한총련이... (중략)... 이미 참여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한총련의 불법행위나 북한추종의 이유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 정보원과 검찰이 믿는 것처럼'이라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수구언론 조중동의 사실 왜곡과 극우적 주장을 비판하면서 국가기관의 '주장'을 토대로 학생운동 단체가 반역자인 것처럼 다루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고 생각한다.


* 안티조선 운동의 구조와 연표









 

[ 2011년 8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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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 - 유럽 미술관 산책
최영도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에게 있어서 '미술'은 언제나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먼 것이었고 어느 봄날 안개 속에 희미하게 잘 보이지 않던 장면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어린 시절 운동장 바닥에, 담벼락에, 도화지에, 그리고 심지어 손바닥에도 이런 저런 그림과 기호를 그리곤 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수 십 만년 전에 존재했던 인류의 조상부터 시작된 것이고 우리의 아들, 딸과 후손들에게도 이어져 계속될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어땠는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나의 딸아이는 돌이 지나고 나서 볼펜이나 크레파스 등 손에 잡히는 것마다 들고서 방바닥이나 벽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나는 아이가 어디에 어떤 것으로 낙서를 하거나 그림같은 것을 그리더라도 방해하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40대 중반에 들어선 지금의 나도, 10대에 접어든 아이도 여전히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노트나 메모지, 신문지 등에 낙서를 하거나 특별한 의미는 없는 그림을 그리곤 한다. 미술의 범주를 크게 잡는다면 이런 일반적인 '끄적거림'도 미술의 영역에 포함될 것이고 우리 모두는 평생 '미술'을 생활처럼 하다가 한 줌 흙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미술'은 언젠가부터 일상생활에서 멀어지고 만다. 아마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미술'시간이란 것이 교과과정에 들어오면서 상황이 바뀌지 않았나 싶다. 선생들은 어떤 정형화된 그림과 '화가'라는 개념과 직업(전문)가의 그림만이 진정한 '미술', '예술'인 것처럼 교육하고 우리는 '미술'에 대한 일종의 고정관념 또는 선입관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미술'의 범주는 자기자신,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멀어지게 되고 '미술가'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미술가'의 그림만이 '예술'인 것처럼 사회적 의식이 조성되었다. 엄밀하고 이론적으로 따져보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과정은 이반 일리히가 [학교없는 사회 Deschooling Society]에서 이야기한 '가치이 제도화'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 개인적인 경험과 인식을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언어 실력, 수학 실력, 기억력, 시력과 마찬가지로 '미술' 또는 '미술품'에 대한 공감과 감동하는 수준도 긴 스펙트럼의 연속선상에서 위치한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언어 구사력이 아주 뛰어난 수준부터 아주 모자란 수준의 연속선 상에서 어딘가에 위치해 있는 것이고 미술 감상력 역시 아주 민감한 수준에서 둔감한 수준 사이의 어디엔가 위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준비나 노력 없이 타고난다거나 유전적으로 그 수준이 결정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면에서 최영도 선생의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는 읽어볼 가치가 있었다.
이 책을 읽은 이유가 '미술' 작품에 대한 지식과 감상 실력에 무슨 거창한 이론을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책을 고른 원초적인 이유는 어제 진행한 공부모임의 교재였기 때문이l다..ㅋ
 
"사람들은 왜 미술품에 매혹되는가? 그 속에 자연과 역사, 예술과 문화, 종교와 철학, 이상과 현실이 모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_최영도

나 역시 작년 런던을 방문했을 때에도 그랬지만, 유럽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유럽의 미술관들을 한 번쯤 가보기를 꿈꾼다. 그런데 부푼 기대로 막상 그 미술관에 들어서는 순간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작품들 앞에서 우왕좌왕하고 두리번거리다가 제대로 감상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루브르 박물관은 전시장 길이만 약 20km에 소장품만 37만여 점이라고 하니, 무턱대고 가면 어디부터 봐야할지 막막할 수 밖에 없다. 

런던의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과 국립현대미술관을 직접 가보았지만 저자의 말대로 각 전시실에 어떤 작품, 누구의 작품이 얼마나 걸려 있는지 ?어보면서 감상하는 동안 눈 깜짝 할 사이에 오후 반나절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 미리 감상할 작품을 고르지 않은 채 무작정 박물관, 미술관에 가게 되면 후회할 수 밖에 없음을 실감했던 것이다.(영국박물관에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한국관'이라는 전시실이 박물관의 가장 구석에 위치해 있고 그마저도 '한국'을 상징할 수 있는 전시품이 거의 없이 피상적인 수준의 전시품만 쓸쓸하고 초라하게 놓여져 있다는 느낌이다. 실제 관람객도 '중국관'이나 '일본관'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다.)

저자는 "수천 점씩 전시되어 있는 큰 미술관에서 다 보려고 욕심을 냈다가는 미술관을 나올 때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서 미술감상은 양이 아니라 질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저자는 풍부한 교양과 열정으로 자신이 보고 싶은 작품을 꼼꼼히 선정한 후 미술관으로 향한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그는 루브르 19점, 오르세 20점, 피티 8점, 우피치 16점, 프라도 16점만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 * 최영도는 누구인가?
1938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1965년 판사에 임관되고, 1973년 유신정권 시절 법관재임명이 거부되어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군사정권 하에서 시국사건들을 변론하고, 정의실천 법조인회(정법회)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창립발기인이 되었다. 1992년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장, 1996년 민변 회장 및 인권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 1999년 한국인권재단 이사로 인권운동을 하였으며, 2002년 참여연대 공동대표가 되어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저자는 예술과 문화에 대한 남다른 조예를 갖고 있는데, 이를 보여주듯 열정어린 저술 활동도 해왔다. [토기 사랑 한평생](2005, 학고재)은 토기에 대한 평생의 애정이 담긴 그의 반평생의 체취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그는 다른 컬렉터와 달리 토기 하나만을 집중적으로 수집했고, 이렇게 모은 토기 1,580점을 2001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여 세간을 놀라게 했다. [참 듣기 좋은 소리](2007, 학고재)는 클래식에 취해 살아온 마니아의 50년 음악감상기이다. 또한 세계문화유산 답사기인 [앙코르·티벳·돈황](2003. 창비)을 펴내기도 했다. ---------


이 책은 8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은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미술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8개의 미술관은 각각 일본의 마쓰카타 미술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 마르코탕 미술관, 이탈리라의 피티 미술관과 우피치 미술관,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이다.
 
일본의 마스카타 미술관(국립서양미술관)은 소위 '마스카타 컬렉션'을 일본인들에게 물려준 마스카타 고지로의 이름을 딴 곳이다. 저자는 1910년대 유럽 전역을 돌면서 유럽 유명화가들의 미술작품을 사들인 카와사키조선소 사장 마스카타 고지로의 '미술품 수집과 그 이후 스토리'를 전하고 있다. 마스카타 미술관에는 로댕, 밀레, 쿠르베, 피사로, 마네, 드가, 모네, 르누와르, 세잔, 시슬리, 반고흐 등의 회화 수 백점과 로댕, 부르뎅, 마이욜의 조각 수 십점이 보관되어 있다. 
저자는 작품 중에서 로댕의 조각 '지옥의 문', 몰리리아니의 '앉아있는 잔 에뷔테른', 르느와르의 '알제리아 풍의 파리 여인들', 반 고흐의 '붓꽃', 피카소의 '곡예사와 어린 알레퀸'을 소개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은 런던의 영국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스 미술관, 러시아 생트페테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최대의 박물관 중 하나라고 한다. 1998년에만 년간 690만 명이 관람했다. 하지만 루브르의 소장품은 런던의 영국박물관과 더불어 그 대부분이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나 약소국가에서 약탈해 온 문화재이기 때문에 감동이 크지 않을 수 있다. 더군다나 프랑스와 영국은 피해 당사국들의 반환 요구를 계속 묵살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올해 초에 조선시대 문화재 '외규장각 조선왕조 귀례'를 정식으로 반환하지 않고 '대여'한 사실이 있어 한국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한 일이 있다.
아무튼 저자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 중에서 카르통의 '아비뇽의 피에타', 루벤스의 '마리드 메디시스의 초상'과 '마리 드 메디시스의 마르세유 상륙', 라 투르의 '목수 성 요셉'과 '작은 등불 앞의 마들렌', 와토의 '시테르 섬으로의 출발', 조각상 '사코트라케의 니케',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등을 소개한다.

오르세 미술관은 프랑스의 퐁피두 대통령이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당시 철도역사로 건축하여 사용하다가 1939년부터 폐역으로 방치되어 있던 건물을 1973년 국가 기념물로 지정하고 미술관으로 개조하기로 결정하여 탄생한 곳이다. 이 미술관에는 근대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상징주의 미술작품 위주로 전시되고 있다.
이곳에서 저자는 앵그르의 '샘', 쿠르베의 '화가의 아틀리에',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드가의 '무대 위의 무희',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 르느와르의 '물랭 드 라 칼레트의 무도회',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등에 대해 감상평을 남겼다. 그리고 각 화가의 미술작품의 양식과 특징, 화가들의 생애, 화가들과 작품들 사이의 연관 등에 대해 설명한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1827년 개관되었고 저자는 르누와르, 세잔, 드랭, 루소, 피카소, 모딜리아니, 로랑생, 위틀릴로 등 인상파에서 1930년대까지의 근대회화를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저자는 모네의 '수련' 작품 수 백점이 전시되어 있는 '수련의 방'에 크게 감동하였다고 설명한다.

마르코탕 미술관은 18세기 중엽에 건축된 것으로 1882년 주식과 석탄광산으로 부자가 된 '쥘 마르모탕'이 매수하여 저택 겸 수집품 보관소로 사용하다가 아들에게 상속었고 아들인 폴이 1932년 저택과 미술품을 박물관 설립을 목적으로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에게 유증하여 1934년 미술관으로 탄생했다고 한다.(이 시점에서 한국 최고의 재벌가인 삼성 이병? 회장과 이건희 회장을 유럽 부자들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희 회장과 그의 마누라는 불법과 편법을 동원하여 자식에게 상속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는데다가 미술품을 '뇌물' 용으로 수집하여 사용하고 있으니 같은 국가와 민족의 일원으로 참으로 한심하고 수치스러운 현실이다...)  
이곳에서 저자는 모네의 '인상, 해돋이', 모리조의 '부지발 정원의 외젠 마네와 그의 딸'을 가장 감명깊게 감상했음을 이야기하면서 마네, 모네, 그리고 모리조의 인생 이야기와 작품 활동에 대해 설명한다.

피티 미술관은 15세기에 필리포 브루넬리스키가 피렌체에서 가장 화려한 궁을 건축하다가 실패하고 이후 코지모 1세 데 메디치의 대공비 엘레오노라가 16세기에 이를 매수하여 완성시켰다. 미술관은 피티 궁 안에 있는 팔라티나 미술관을 비롯하여 7개의 미술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이 곳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거장들의 작품을 감상했다.
저자가 소개하는 작품은 라파엘로의 작품인 '작은 의자 위의 성모'와 '포르나리아', '시스타나의 성모'와 '아테네 학당', 티치아노의 작품인 '연주'와 '라 벨라', 루벤스의 '전쟁의 참화', 반 다이크의 '추기경 귀도 벤티볼리오' 등에 대해 설명하고 피렌체의 시뇨리아 과장에 전시되어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첼리니의 '페르세우스' 등 걸작 조각품들을 소개했다.

우피치 미술관에서 저자는 보티첼리의 '봄'과 '비너스의 탄생'을 설명하고 보티첼리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까지 이야기했다. 이어 조토의 '장엄한 성모', 마사초의 '성 안나와 성모자', 프라 필라포 리피의 '성모자와 두 천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방박사의 경배', 미켈란젤로의 '성가족', 램브란트의 '자화상' 등에 대해 설명했다.

프라도 미술관은 1785년 카를로스 3세가 자연과학박물관으로 착공한 것을 1819년 페르디난도 7세가 왕립 프라도 미술관으로 개관한 것이다. 처음 개관했을 때에는 스페인의 신고전주의 작품 일부만 소장되었으나 그 이후 이사벨라 여왕, 카를로스 1세, 펠리페 2세, 펠리페 4세, 카를로스 4세 등 역대 왕들이 개인적으로 수집한 작품들이 추가되면서 이제는 '세계 최고의 회화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저자는 이 곳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감동하여 작품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 또 라파엘로의 '추기경의 초상', 티치아노의 '다나에', 엘 그레코의 '삼위일체', 벨라스케스의 '브레다의 항복', 고야의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와 '마드리드 1808년 5월 2일'과 '5월 3일', '자기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마하' 시리즈 등에 대해 설명한다.(고야의 생애와 작품은 지난 번 공부모임 때 다룬 적이 있어서 그런지 저자의 주장대로 쉽고 빠르게 이해했다....^^) 
   
저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창립발기인과 회장, 그리고 1992년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장,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까지 역임한 분이기 때문에 서양 미술을 감상하는데 있어 일반적인 미술전문가와 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감상한 후 저자는 "그림 앞에 서면, 나는 4.19, 5.18, 6.10 등 총탄이 난무하고 최루탄 연기 자욱한 거리에서 독재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치달았던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상기하며 그날의 감격과 비탄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다."(p.82)라고 썼다. 



피렌체의 피뇨리나 광장에 전시되어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등의 조각품을 감상한 후 저자는 "따지고 보면 이 광장에 있는 조각상들은 사람의 머리를 자르거나 여인을 약탈하는 등 하나같이 혐오스러운 내용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훌륭한 공간에 사랑과 평화를 주제로 한 조각상을 세우지 못하는 서양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호전적이고 잔혹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된다."(p.255)라고 썼다.



또 프라도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와 고야의 작품을 감상한 후 저자는 "평등주의자였던 벨라스케스와 자유주의자였던 고야는 모두 시대를 앞서간 민주화 운동의 선각자들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서둘러 프라도를 빠져나왔다."(p.370)라고 썼다.



저자가 책의 부제를 '유럽미술관 산책'이라고 달아놓고 이와 어울리지 않는 미술관을 다루고 있는데 바로 일본국립서양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에는 19세기 중엽 사실주의에서부터 20세기 초 프랑스 근대미술의 주요한 흐름에 속하는 작품 365점이 전시되어 있다. 아마도 같은 동양의 국가이면서 미술작품에 대해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아붓고 있는 일본과 한국의 현실을 비교하기 위해서일 것이라 추측한다. 마스카타의 미술작품에 대한 수집 및 유증, 일본인들의 미술품에 대한 열정 등이 부러웠던 것일까?
 
저자는 애정과 학식을 가지고 작품에 대한 감상과 해설을 하면서도 현학적인 표현이나 전문적인 용어는 삼가고 대신 다양한 주제와 솔깃한 이야기들로 독자의 귀를 만족시키고 동시에 180컷에 달하는 도판으로 눈까지 즐겁게 해준다. 물론 '무엇을 그린 걸까', '어떤 화가였을까', '어떤 시대였을까', '어떻게 그린 걸까', '그림을 보는 관람자의 시선' 등 미술감상의 기본적인 덕목도 두루 갖추고 있다.
 
"삶을 아름답게 살고자 한다면, 아름다움을 찾아나서야 한다. 정성을 다해 갈구하고 준비하고 기억하는 사람에게 비로소 깊고 섬세한 아름다운 세계가 열린다." (강금실 변호사, 전 법무부 장관) "나는 최 변호사님과 함께 여행하면서 그가 얼마나 예술에 깊이 심취하는지 목격하였다. 그가 이런 책을 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낯설었던 예술이 이 한 권의 책을 통하여 가까이 다가온다." (박원순 변호사,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최영도 변호사의 유럽 미술관 기행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는 명언을 새삼 실감케 하지만, 동시에 아는 일과 보는 일 모두 애호의 열정이 있어야만 가능함을 일깨워준다." (백낙청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저자가 일찍이 [토기 사랑 한평생]과, [참 듣기 좋은 소리]를 냈을 때, 그 지은이를 동명이인으로 알던 사람이 많았다. 험난한 시대를 인권운동, 시민운동, 변호활동으로 벅차게 살아온 그가 우리 토기문화와 클래식 음악의 영역을 두루 섭렵한 것도 놀라운데, 이번에는 유럽 미술관 순례기까지 상재(上梓)하였으니, 나 같은 예술 문외한으로서는 부럽다 못해 배가 아프다. 꾸준한 탐구정신에 경의를 표한다." (한승헌 변호사, 전 감사원장) 
모두 이 책에 대해 추천서를 쓴 분들의 글이다. 나는 추천자들의 말처럼 저자의 열정과 노력, 탐구정신과 더불어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저자의 인생관과 각오, '시간의 만들어 내는' 정신적 여유, 그리고 실행의 경제적 토대도 부럽다...ㅎ
 
저자의 말대로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미술작품에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을까? 내가 직접 노력해보지도 실천해보지도 않아 무어라 단정지을 수는 없다. 반 고흐의 [영혼의 편지]를 읽고나서 그의 작품을 다시 보았을 때, 고야에 대한 책 [고야]와 [고야, 영혼의 거울]을 읽은 후에 고야의 작품을 대할 때 아무래도 작품 자체와 작품과 관련한 시대적 배경, 화가의 생애 등을 알았던 것이 '작품' 자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작품'에 대한 이해와 '공감' 또는 '감동'은 별개였다. 인간에게 이성과 감정이 따로 존재하고 머리와 가슴이 따로 느끼고 인식하듯이...
 
저자의 말이 맞다면 저자 만큼 나도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작품에 대한 전후 관계와 시대적 배경, 화가의 생애와 미술사 등 전반적으로 '아는' 내용을 풍부하게 한 후 저자처럼 하나의 작품에 많은 시간을 들여 때론 작품 자체의 느낌을, 때로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작품의 느낌을, 때로는 화가의 생애 속에서 작품을 오랜 시간, 여러 번에 걸쳐 접하면 조금 감동이 일으켜지려나??? 
 
(어제 공부모임에서는 이 책의 저자인 최영도 선생님이 직접 참석하시어 책에 대한 설명과 유럽 미술관 기행 뿐 아니라 그 이외에 세계문화유산 기행 등에 나섰던 자신의 경험과 미술작품 이해에 대한 고견을 들려주셨다. 세미나를 진행하고 보니 최 선생님은 미술 뿐 아니라 음악과 영화, 토기 등 다방면에 엄청난 수준을 쌓은 분이신 것 같다. 미술작품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높이기 위해서는 작품을 직접 '소장'해야 함을 강조하시기도 했다. 쩝... 나 같은 사람은 생각하기도 어렵고 능력도 되지 않는 꿈같은...^^)
 
[ 2011년 8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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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 하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2
박지원 지음, 길진숙.고미숙.김풍기 옮김 / 그린비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혹자는 이 [열하일기]를 읽고서 50대의 뒤늦은 나이에 연암 박지원 선생을 '인생의 멘토'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그 사람은 단지 보리출판사에서 완역하여 출간한 [열하일기 세트] 3권을 읽었고 그 이외에 열하일기나 박지원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서 추가로 공부했을 뿐이다. [열하일기]의 무엇이 그 중년의 직장인을 '열하광인' 또는 '연암광인'으로 만들었을까?
 
고미숙씨의 이야기처럼 [열하일기]에는 유머와 우정, 유목이 가득하다.
'유머'와 관련한 두 가지 내용. 첫 번째는 산해관에 들어서서 연암은 옥전현이라는 작은 마을을 지나게 된다. 무심하게 거리를 쏘다니다 한 점포에 들러 벽에 쓰여 진 기이한 문장을 발견하고는 촛불 아래 ‘열나게’ 베껴 쓴다. 이 문장이 바로 그 유명한 [호질]이다. 점포 주인이 연암에게 묻는다. “선생은 이걸 베껴 대체 무얼 하시려오?” 연암은 이렇게 답한다. “돌아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번 읽혀 모두 허리를 잡고 크게 웃게 할 작정입니다. 아마 이 글을 보면 다들 웃느라고 입안에 든 밥알이 벌처럼 튀어 나오고, 튼튼한 갓끈이라도 썩은 새끼줄처럼 툭 끊어질 겁니다.” 연암은 고국에 돌아간 후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연경에 도착하여 태평하게 쉬고 있다가 느닷없이 열하로 떠나게  되어 사람들이 울고불고 난리를 칠 때였다. 연암과 같이 자던 수행원들이 일어나 연암에게 물었다. “불이 났소?” 순간 악동 기질이 발동한 연암은 이렇게 대답한다. “황제가 열하로 가는 바람에 연경이 비어서 몽고 기병 십만 명이 쳐들어 왔다는구먼.” 수행원들은 기절초풍하기 직전이다. “아이고!”

'우정'과 관련해서는 북경과 열하로의 여행일정 내내 연암이 만인이나 한인을 가리지 않고 누구를 만나던지 지필묵을 들고 상대방과 통성명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연암의 이러한 태도는 산해관까지 가는 길에 어느 술집이나 찻집에 들러서도 자신의 글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청나라 학자나 선비를 만나면 사서삼경과 중국의 역사, 시와 고문, 철학과 학문, 이용후생 등에 대해 거리낌 없이 대화하고 정을 나누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연암의 열린 자세와 태도는 비슷한 중국인 학자들로부터도 크게 환영을 받아 서로 동등하게 논의하고 우정을 쌓게된다.
 
'유목'과 관련한 것은 연암 박지원이 아무런 공적 지위가 없음에도 사신단의 수장인 정사 박명원의 친척임을 내세워 일행 중에 합류한 것에서부터 엿볼 수 있다. 공식적인 지위와 역할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연암이 자유롭게 활보하면서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때로는 사신단 본진에 앞서서 한참을 앞서 여행길을 달려가서 마음껏 새로운 경치를 맛보기도 하고 때로는 다음 날 공식 일정이 없기 때문에 중국인 학자들과 밤을 세워가며 필담을 나누고 술을 마시다가 숙소로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연암이 진정한 '유목인'이었음은 그가 여행기간 동안 취한 행동보다는 40대 중반의 나이에,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230년 전인 1780년 봉건시대에 자신이 살고 있던 좁은 세상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맛보고 겪어보고 사귀어보고 싶은 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몸을 움직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 * 연암 박지원(1737~1805) 일대기 --------
1737년 2월, 박사유와 함평 이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출생
1752년  월 :관례를 올리고 유안재 이보천의 딸과 결혼
1757년  월 : 시정의 기이한 인물이나 사건을 듣고 '방경각외전'을 쓰다.
1766년  월 : 장남이 태어나다.
1767년  월 : 아버지 사망. 장지 문제로 녹천 집안과 시비가 벌어짐. 벼슬길을 단념함.
1768년  월 : 백탑 근처로 이사하고 이덕무, 이서구, 유금, 유득공과 가까이 지내다.
1770년  월 : 감시의 양장에서 모두 일등으로 뽑혔다. 입궐하여 영조에게 극찬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박지원을 급제시켜 공을 세우고자 했으나 회시에 응하지 않거나 응시한다 하더라도 시권을 제출하지 않거나 제출하더라도 노송과 괴석을 그린 그림을 제출하여 벼슬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1772년  월 : 식솔들을 처가로 보내고 서울 전의감동에서 혼자 살기 시작하다.
1778년  월 : 사은진주사 일원으로 북경으로 떠나는 이덕무와 박제가를 전송하다.
1780년 5월 : 진하사 겸 사은사 박명원과 동행하여 북경 등지를 여행
1786년 7월 : 유언호가 천거하여 선공감역에 임명되다
1787년  월 : 부인이 죽었다. 연암은 그 뒤로 죽 혼자 지냈다.
1791년 월 : 한성부판관, 안의현감으로 부임하다.

1793년 월 : <열하일기>의 잘못된 문체에 대해 속죄하라는 정조의 하교를 받고 반성문을 제출하다.
1797년 월 : 면천군수에 임명되다.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 집필하다.
1799년 월 : <과농소초>를 집필하다.
1800년 월 : 정조 승하하다. 양양부사로 승진하다.
1802년 월 : 아버지 묘를 이장하려다 유한준이 방해하여 좌절되다.
1805년 월 : 가회동 집에서 향년 69세로 죽다. ---------
 
 
고미숙씨가 번역, 편집하여 발간한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하)]는 크게 관내정사, 막북행정록, 태학유관록, 환연도중록 4개의 장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박지원의 원본에 별도의 권으로 분리되어 있던 황도기략, 황교문답, 곡정필담, 환유기, 옥갑야화 등을 4개의 장 속에 편집하여 삽입하였다. 역자는 [열하일기] 원본 중에서 독자들이 난해하거나 지루하다고 생각할만 한 부분들을 생략한 것이었고 그것은 책의 서문에 기술되었듯이 보리출판사에서 [열하일기 3세트] 완역본이 이 책 출간 직전에 출판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권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 관내정사(關內程史) > 7월 24일 / 7월 25일 / 7월 26일 / 백이 숙제 묘당을 둘러보며 / 난하를 건너며 / 석호석기 / 7월 27일 / 7월 28일 / 범의 꾸중(虎叱) / 7월 29일 / 7월 30일 / 8월 1일 / 8월 2일 / 8월 3일 / 8월 4일 / 북경의 이모저모(黃圖記略) / 공자묘를 다녀와서(謁聖退述)
-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기행을 담았다. 북경까지의 여행 중에 느꼈던 몇 가지와 북경에서의 특이한 여행기를 기사체 형식으로 별도로 정리했다.
- 호질 : 역자는 연암이 '열하일기' 속에 기록한대로 '호질'이 연암의 창작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자는 연암이 연행 기간 중에 많은 이야기를 구한 것 자체만으로 연암의 역할이 크다고 주장한다. 호질의 줄거리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사람 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범(호랑이)에게 졸개인 창귀들이 사이비 유학자인 북곽선생과 수절과부로 소문난 동리지를 추천하면서 전개된다.- 황도기략 : 북경의 이모저모를 관람한 소감을 적었다. 황성의 아홉 개 문, 서관, 만수산, 체인각, 황제의 마구간, 종묘와 사직, 천단, 범의 우리, 풍금, 서양화, 코끼리 우리(상방), 황금대, 황금대기, 옹화궁, 개우리(구방), 공작포, 오룡정, 구룡벽, 남해자, 회자관, 유리창- 알성퇴술 : 공자묘를 구경한 소감을 적었다. 태학, 학사, 관상대, 시원, 조선관
 









 
< 막북행정록(漠北行程論) > 막북행정록 서 / 8월 5일 / 8월 6일 / 8월 7일 / 밤에 고북구를 나서며(夜出古北口記) /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一夜九渡河記) / 8월 8일 / 만국진공기(萬國進貢記) / 8월 9일
- 북경에서 열하까지 가는 길이다. 청나라 황제의 독촉으로 인하여 400리 넘는 여정을 단 5일만에 도달했다. 휴식도 잠도 없는 강행군을 별도로 정리했다.- 야출고북구기 : 고북구는 예로부터 전쟁의 중심터였다. 후당의 장종, 거란의 태종, 여진의 희윤, 원나라 문종 등이 고북구에서의 승전으로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연암은 고북구의 장성에 붓을 꺼내 (물이 없어서) 술을 부어 먹을 간 후 "건륭 45년 경자 8월 7일 야삼경, 조선의 박지원, 이곳을 지나노라"라고 적는다.- 일야구도하기 : 연암 일행은 하루 밤에 하나의 강을 아홉 번 건너게 된다. 그만큼 강이 굽이쳐 흐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연암은 도를 깨우친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명심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섬세해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지금 내 마부는 말에 밟혀서 뒷수레에 실려 있다. ... 한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거난 아무 근심 없이 자리에서 앉았다 누웠다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경지였다.)- 만국진공기 : 청나라 황제의 천추절을 맞아 주변 국가들이 사방으로부터 공물을 바치기 위해 열하를 향해 몰려들었다.



 
<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 8월 9일 / 8월 10일 / 8월 11일 / 찰십륜포(札什倫布) / 황교에 대한 특별 보고서(黃敎問答) / 8월 12일 / 8월 13일 / 8월 14일 / 천하의 형세를 논하다(審勢篇) / 왕민호와 나눈 말들(鵠汀筆談) / 코끼리를 통해 본 우주의 비의(象記) / 환타지아(幻戱記)
- 열하에서의 일정이다. 황교(라마불교)의 반서(달라이 라마)를 접견한 것, 황교에 대한 탐문 결과, 중국 학자들과의 밤을 세운 필담, 기타 열하에서 보고 들은 특이한 것들을 별도로 정리했다.- 연암은 조선이 가난한 까닭을 대체로 목축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목축과 관련한 조선의 한심한 상황을 여섯 가지로 정리하면서 그 이유가 '말을 다루는 솜씨가 틀렸고 말을 먹이는 방법이 옳지 못하며 좋은 종자를 받을 줄 모르고 관원들이 말 기르는 방법에 무식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황교문답 : 연암은 '적국을 염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형상을 통해 상대국을 제대로 분석해야 함을 역설한다. 연암은 열하에 이르러 자신이 헤아려 본 천하의 형세를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또한 황교와 관련하여 청나라 관료나 학자인 학성, 추사시, 왕민호, 윤가전, 기풍액 등과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곡정필담 : 이 글에는 연암의 우주관과 철학이 나타나 있다. 조선 후기에 한반도에서도 빛에 대한 학설, 지동설, 티끌을 통한 우주만물 생성론,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 제3세계설 등에 대한 주장과 이론이 있었다는 것은 뜻밖이었고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비록 그 이후에는 왕조와 사대부들에 의해 싹이 말라 버렸지만...


 

<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8월 15일 / 8월 16일 / 8월 17일 / 8월 18일 / 8월 19일 / 8월 20일 / 옥갑에서 밤들이 주고받은 이야기(玉匣夜話)
-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 옥갑야화 중에 그 유명한 '허생전(許生傳)'이 들어 있다. 연암은 청나라 학자들과 변승업이라는 조선 갑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윤영'이라는 사람에게서 허생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한다.


 
역자는 글들을 일상적인 여행기 뒤에 두어 시간의 흐름을 따름으로써 이해와 감정의 효율을 최대치로 올리려는 시도를 했다. 왕민호와 기풍액과의 인상적인 만남 이후 연암이 따로 「경개록」에 엮어 둔 그들에 대한 글을 「태학유관록」속에 넣은 것, 고북구를 떠나는 여정에「야출고북구기」가 따라 나오는 것, 열하에서 성승을 만나고 티베트 불교(황교)를 접하면서 그 뒤로 「찰십륜포」와 「황교문답」이 이어지는 배치. 그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배치는 자신의 호흡으로 직접 읽어본 이들만이 느끼고 행복해 수 있는 흐름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바로 『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가 갖는 편집의 힘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역자는 편집 과정에서 연암과 이국 친구들과의 길고 긴 밤샘 필담 부분은 희곡 형식으로 처리했다. “형식적 구속 때문에 가슴속의 말을 자유롭게 쏟아낼 수 없다” 하여 시(詩)를 멀리했던 연암의 글답게, 형식의 구속 없이 자유롭게 희곡으로 엮은 것이다. 그리하여 예속재와 가상루에서 연암이 나누었던 필담의 희곡버전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부분을 박진감 넘치고 리드미컬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질적 존재들의 시끌벅적한 향연을 즐긴 건 에피쿠로스를 닮았고, ‘친구에 살고 친구에 죽는’ 우정의 정치학을 설파한 건 스피노자를 닮았으며, 웃음이야말로 삶과 사유의 동력임을 보여준 것은 니체를 닮았으며, ‘투창과 비수’의 아포리즘으로 통념의 기반을 가차 없이 뒤흔든 건 루쉰을 닮았구나!”
역자 고미숙이 박지원의 묘비명으로 바치고 싶다는 이 헌사에서 우리는 연암이 자신의 삶을 통해 그가 구현하고자 한 철학적 실천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철저하게 비타협적인 연암, 그는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결국 자기 인생은 자기가 굴려가는 것, 그러니까 ‘내 멋대로’ 하는 거라는 진실은 현대의 경쟁 속에서, 그리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천편일률의 일상 속에서그래도 좀 괜찮은 삶을 살아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이다. 
역자는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은 이들, 지루한 삶의 해독제가 필요한 이들에게 '연암과의 접속'을 강추한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열하일기]를 다 읽고 보니 역자 고미숙씨를 비롯하여 그토록 많은 이들이 한반도의 수 많은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당부하는 뜻을 조금 알 수 있겠다.
 [열하일기]만 하더라도 당시 조선이 세상의 흐름에 닫혀있는 상태에서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진 명나라의 후계국임을 자임하고 유학의 고리타분함만을 암송하는 새태를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고리타분한 유학에서 벗어나거나 서학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로 하더라도 조선이 벽돌, 구들, 수레, 목축, 축성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청나라의 '이용후생'을 도입하여 백성들의 후생과 복지를 위해 노력했다면 역사는 지금까지와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연암이 [열하일기]에서 지적하는 상당수 논거와 주장의 큰 틀은 연암이 연행기를 쓴 이후 2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가 지리적으로 사방이 바다와 대륙에 막혀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역으로 사방의 효과적인 문물을 도입하고 내세를 강화한다면 21세기 지금에서도 한국은 더욱 강력한 공동체와 국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국가 공동체의 정책입안자, 관리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 '기득권'에 안주하여 과거의 잘못과 병폐를 고치지 못하고 미래를 향해 손에 움켜진 것을 내던지고 과감하게 나서지 못한다면 단기적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이 유지될 지는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신들의 기득권마저 아지랑이처럼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서 말기까지의 과정에서 가장 크게 고통받는 것이 조선의 백성들과 뜻있는 지사들이었다면 앞으로 21세기의 남은 기간 역시 잘못하게 되면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중산층 이하 민중들과 뜻있는 사람들이 쓰러지고 고통받을 것이 자명하지 않을까???
 
[ 2011년 8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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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패러다임
김창섭 지음 / 아카넷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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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 Paradigm’이란 1962년 미국의 과학철학자 토머스 새뮤얼 쿤이 발표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개념을 처음 제기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과학 활동에서 새로운 개념이, 객관적 관찰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 집단이 모두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집단이 신뢰하는 과학 내용과 수단을 패러다임이라고 하며, 패러다임이 대체되는 과정을 과학 혁명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나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과학자 집단에서 모두 받아들여지면서 새로운 관점과 방법론이 세워지는 과정이 ’패러다임의 전환’에 해당한다.
쿤은 그 책에서 과학혁명을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 이후 ’패러다임’이란 단어가 주는 폭발력으로 인하여 과학 뿐 아니라 사회, 정치, 문화 등 커다란 변화,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이 발생하는 경우에 대해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저자는 한국사회가 지난 60년간 ’성장 패러다임’을 통해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여 최빈국에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거듭났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수 많은 위기들이 닥쳤음에도 한국이 그러한 위기를 국민의 힘으로 극복하였고 그 때마다 도약했다고. 하지만 이제 한국에게 다시 ’기후변화’라는 엄청난 위기가 닥쳐오고 있으며, 자칫 잘못하면 한순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저자는 새로운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생산과 소비 구조의 전반적인 혁신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그 전략은 바로 ’저탄소 녹색 성장’이라고 말한다.
 
’저탄소 녹색 성장’....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현 대통령인 이명박이 2008년 8월 ’건국 60주년 기념식’에서 새로운 국가 경제 모델로 제시한 표어였다. 2007년 12월 대통령 선거공약에도 없던 경제 전략이었다. 왜 갑자기 ’저탄소 녹색 성장’이 이명박 정부의 주요 전략으로 등장했을까? 그리고 그 중요한 내용은 무엇일까? 녹색 성장의 핵심 내용 중 하나가 ’4대강 공사’였음을 보면 그 전략 제시가 결국 ’정치 구호’에 불과함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즉,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1년도 되지 않은 2008년 봄에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파동을 계기로 전국에서 벌어진 촛불시위에 충격을 받고 청와대 뒷산에서 ’아침이슬’을 부르면서 반성한 후 정치국면을 전환시키고자 그럴싸한 단어를 조합한 것이다.
이번 정권의 특징 중 하나가 내용과 전혀 다른 단어를 제목으로 선택하여 ’정치 구호화’하는 것이다. 4대강을 죽이면서 ’4대강 살리기’라는 제목을 단 것이나 KBS, MBC, YTN을 정권의 홍보처로 전락시키면서 ’언론자유’니 ’언론개혁’이니 포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래서 이 책의 머리말을 읽던 중 ’저탄소 녹색 성장’을 "현 시대의 요청에 부합하는 가치있는 전략"이라는 표현을 읽고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책이 내일 세미나의 교재만 아니었다면 더 읽어볼 것도 없이 쓰레기 통에 집어던졌을 것이다. ’성장 패러다임’에서 ’그린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자고 하면서 ’저탄소 녹색 성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부터가 문제라 할 수 있다. 저자 스스로도 현 정권의 녹색 성장에 관한 제반 전략과 정책이 자신이 제기하는 ’그린 패러다임’이나 ’저탄소 녹색 성장’에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하면서 머리말에 ’가치 있는 전략’이라고 표현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책이 잘 팔리기 위한 마케팅인가? 아니면 이명박 정부에게 찍히고 싶지 않아서? (조금 심했나...^^)
 
아무리 앞에 그럴싸한 표현을 집어 넣더라도 나는 ’저탄소 녹색 성장’은 ’성장 패러다임’의 변종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생산과 소비 구조의 전반적인 혁신’은 인정할 수 있는 개념이다.
 
아무튼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 * 김창섭은 누구인가? ------------------
현재 경원대학교 전기공학과 교수로 있으며, 국가과학기술위원회 국가주도분과 간사위원, 행정안전부 녹색 성장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대통령 직속 지속가능발전위원회 등에 실무위원으로 참여하였고 한국품질재단 녹색경영연구소 소장, (사)지속가능소비생산연구원 대표, 에너지시민연대 감사로 있으면서, 소비자 시민 모임에도 참여하는 등 시민사회 영역에서도 활발하게 일하고 있다. 서울대 전기공확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미국 전기위원회(EPRI)에서 포스닥을 거쳤다. 우리나라 에너지 기술개발 정책을 주도하였고 에너지 및 전력 IT 사업에 관한 전략과 정책을 맡아 왔다. 주요 논문으로 <전력선 통신을 이용한 HSA 사업의 경제적 타당성 분석>, <시장 전환을 통한 심야전력제도개선방안에 대한 연구>, <심야전력제도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 등이 있다. ---------------------------
 
 
이 책은 머리말, 서론(들어가며), 3개의 장, 마치며(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 [들어가며]에서 저자는 한국이 지난 60년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유일한 나라라고 자부한다. 하지만 외형적인 엄청난 물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최저 출산율과 최고 자살율, 최고 노동시간이라는 질적 수준이 낮은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울한 지표를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익숙한 모습’이라고 과감하게 간주하면서 그런 산업화와 민주화의 혜택을 우리가 지속적으로 향유할 수 있을지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저자는 대량 살상 무기, 범죄, 전쟁, 질병, 기아 등 세계의 수 많은 위기들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위기가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한국의 경우에도 무수히 많은 위기 요인이 있다. 분단에서 오는 전쟁의 위기, 경제 위기, 실업 위기, 지역 갈등, 보수와 진보 간의 노선 갈등, 사교육 부담 등... 하지만, 저자는 우리의 성취를 무너뜨릴 세계적 차원의 위기 중 가장 심각한 위기를 신용의 위기, 에너지의 위기, 기후변화의 위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이 신용위기(경제위기)를 극복했으나 에너지 위기와 기후변화의 위기에 대한 해법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제1부. [에너지가 미래를 말한다]에서 저자는 지구 문명의 근원이 에너지이며, 세계적으로 에너지 고갈에 대한 낙관론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지구사회의 생존방식으로는 에너지는 계속 소비할 수 밖에 없으며 결국 고갈될 것임으로 주장한다. 에너지 소비의 근원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것을 자본주의와 세계화라 규정한다. 에너지의 대량소비가 기후변화를 초래했음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데 아직 다양한 에너지 및 환경에 대처할 기술은 준비되어 있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화석 연료의 사용을 극단적으로 자제하게 되면 해고와 실업, 빈곤과 생존, 갈등과 전쟁이 야기될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저자는 한국은 자원이 없고 에너지 고소비형 경제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지정학적 조건이 에너지 융통이 불가능한 고립된 섬이기 때문에 ’에너지와 기후변화의 위기에 가장 취약한 나라’라고 주장한다.
중화확 공업 위주의 수출 주도형 경제구조를 지향하는 발전 모델은 에너지와 기후변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경제전략이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의 에너지 및 환경 기술은 선진국에 비해 턱 없이 낮은 수준이다.
 
제2부. [성장 패러다임에서 그린 패러다임으로]에서 저자는 1972년 로마클럽 보고서 [성장의 한계 The Limits to Growth], 1992년 리우 환경개발회의와 국제연합기본협약(UNFCCC), 1997년 교토 의정서, 2006년 스턴 보고서, 2007년 IPCC 4차 보고서와 발리 로드맵 등 서구에서 그동안 진행된 ’지속 가능한 발전’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서 ’지속 가능성’을 제기한다.
저자는 지속 가능성의 3대 요소를 경제 성장과 형평성의 진작, 그리고 환경으로 해석한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지속되고 있고 성장의 부작용에 따른 형평성을 바로잡기 위해 민주화의 과정을 밟았으며, 이제 또 다른 성장의 부작용인 환경 문제를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환경 문제의 핵심은 한정된 자원의 지속 가능한 이용,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의 적정화, 그리고 기존 문명의 물적 기반 뿐 아니라 소비자의 도덕적인 변화까지 포괄적이고 혁명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저자는 토머스 프리드먼의 [코드 그린]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21세기는 에너지와 기후변화 문제가 경제 성장을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로 전화되는 시점이며 민주화까지도 에너지로 인하여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인식과 행태가 바뀌어야 하고 저자는 그 과정을 ’그린 패러다임’으로 정의한다.
 
저자는 이명박 정부가 보수정권임에도 진화의 핵심 가치인 녹색을 국정의 최일선에 배치하여 일단 성공하였다고 말한다. 집권당이 국정을 주도하는 주요한 화두를 잡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4대강과 자전거를 예로 들면서 문제는 현 정부의 정책 수단과 운용 방식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저자는 박정희 정권의 ’수출 100억불’이라는 목표와 구호가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의 동력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사회 전체를 통합시키는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면서 그린 패러다임에서도 그러한 목표와 구호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회적 합의를 통한 국가 배출 감축 목표’라고 제안한다. 이명박 정부는 사회적 합의가 아닌 정부 내 일부 구성원 주도로 임의로 목표를 설정했다.
 
제3부. [그린 패러다임의 적은 내부에 있다]에서 저자는 산림녹화와 그린벨트, 그리고 220V 승압과 전력시스템 개편 등 산업자원부의 전신인 동력자원부의 과거 에너지 정책추진의 사례를 들어 우리나라도 녹색 성장의 씨앗이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린 패러다임의 적은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음을 주장하면서 과소비와 전기요금 등 에너지 가격 제도, 에너지 비용의 외부화, 보조금 제도를 예로 든다. 그는 에너지의 세제와 가격의 문제는 에너지 믹스의 조정, 기술 개발과 신재생 에너지의 보급, 에너지 수요의 합리화 등 에너지 시스템 전반의 녹색화에 가장 핵심적인 사안으로 이러한 기존의 세제와 가격 체계를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또한 기술 혁신에 의한 소비의 녹색화, 스마트 그리드 등 자원의 배분과 이용의 최적화, 소비자의 녹색 모럴과 기업의 녹색 기술 혁신 등을 통해 생산소비 구조를 혁신해야 함을 주장한다. 
 
저자는 박정희 정권에서부터 시작된 관 주도의 의사결정방식은 지금까지 인프라를 개발하고 구축하는데 효과적이었고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그러한 관 주도의 의사결정 방식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상징적인 사건은 김영삼 정부에서 동력자원부가 소멸하여 산업자원부의 일개 부서로 전락한 것, IMF 체제 아래에서 김대중 정부에 의한 에너지 산업 구조 개편으로 정부와 에너지 공급자 간의 긴밀한 관계가 사라진 것, 노무현 정부 들어서 방폐장 건설 과정에서 부안 사태가 발생하여 정부정책이 좌초한 것(저자는 이 사건을 민란으로 해석함), 그리고 2004년 전력산업 구조개편으로 추진된 배전 분할이 노조의 힘으로 중단된 것을 예로 든다.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에너지 행정의 민주화와 개방화라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법적 책임성에 기반한 에너지 행정 주체의 약화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앞으로는 에너지와 기후변화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현 정부에서 가장 취약한 거버넌스가 중요함을 제기한다. 저자는 에너지 부문에서의 정책 목표 설정의 문제와 에너지 산업의 규제와 시장 기능에 관한 문제에 대한 처리과정에서 사회적 참여와 책임성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정부체계에서는 정책부서와 규제부서를 분리하면서 양쪽 모두 역량강화가 필요함을 제기한다.  
 
* [마치며]에서 저자는 "그린 패러다임의 전환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아젠다이다. 모든 이해 당사자가 동의하여야 가능하고 이에 걸맞은 비용을 지불할 각오가 있어야만 달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용을 투자로 연동시킬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하다. 그린 패러다임은 그러한 고통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우리가 반드시 지향해야 하는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라고 최종 결론을 내린다.
 
 
저자는 "숭늉 대신에 스타벅스에서 페어 트레이드에 의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아주 성공한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있다."라고 글을 마무리했다. 나는 저자의 마무리 글에 동의할 수 없다. 숭늉을 마시면 실패한 것이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면 성공한 것일까? 웃기는 소리다. 내가 브랜드 커피숍에 가는 이유는 다방이나 기존 커피숍이 사라졌기 때문이고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그곳에 숭늉이 없기 때문이고 생과일쥬스나 다른 상품보다 더 싸기 때문일 뿐이다.
스타벅스는 프랜차이즈 업체이고 개별 사업장은 개인서비스업이다. 스타벅스는 프랜차이즈 로열티와 커피 제조 기계값과 브랜드를 씌운 커피값으로 엄청난 수익을 미국으로 가져간다. 개인서비스 업체의 사장은 최소한의 수익만 남길 뿐이며 커피숍의 직원은 모두 최저임금을 받는 비정규직이거나 그보다도 못한 아르바이트 대학생일 것이다. 그 모습이 대한민국의 성공인가?
 
에너지 문제와 기후변화의 위험성이 모든 국민들에게 지금보다 더 알려져야 한다. 아무런 생각없이 ’더 크게, 더 많이, 더 빨리, 더 높이’가 동의되는 문화에서 벗어나야 하고 무조건 대학에 가고 ’사’자를 달아야 하고 아이폰을 사야하고 자동차를 사야하고 아파트를 사야만이 서로 인정하고 인정받는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담배값 올리는 것, 기름값 올리는 것, 전기료와 가스료, 상하수도 요금을 올리는 것을 동의하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물론, 그와 동시에 정부가 세금을 공정하게 걷어야 하고 부자감세를 철회하고 누진세를 강화해야 한다. 탈세와 기업의 불법, 경제사범, 기득권자의 부정에 대해 강력하게 제재해야 한다. 정부예산을 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사용해서는 안되고 소득불평등을 완화시키는데 주력해야 한다. 정부와 기득권자, 소득이 높은자와 많이 배운 자, 많이 가진 자와 상류층이 중산층과 빈곤층에게 모범을 보이고 사회에 환원하고 먼저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해야 중산층과 빈곤층이 뒤따르게 된다.
 
저자가 말한 ’성장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문제제기에 공감한다. 또 중장기적으로 ’그린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에도 공감한다. 마찬가지로 거버넌스가 가장 취약하고 중요한 문제라는 인식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형평성이,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간주’하는 관점, 평가, 판단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 3년 만에 1987년 이후 20여년 동안 피와 땀을 흘려가면서 이룩한 정치민주화가 크게 후퇴했다. 경제 민주화와 사회 민주화는 더욱 후퇴했다. 저자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잘 될 것이라고 넘겨버리는 저출산, 고령화, 자살율, 빈부격차, 최장 노동시간, 실업, 빈부격차, 그리고 민주화와 거버넌스가 먼저 해결되지 않고는 한국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미 한국이라는 국가와 한국의 사회 공동체는 붕괴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10년 민주정부 시절 민주화와 형평성을 제고시킬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씩이난 살리지 못했다. 저자의 ’그린 패러다임’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린 패러다임의 제반 요소가 민주화와 형평성을 담보하지 않고서는, 함께 추동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의견이 다르고 노선이 다르고 반대한다고 경찰과 검찰 권력으로 통제하고 탄압하는 세상에서 건전한 거버넌스가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순진한 발상이다. 집권여당의 대표가 신문사 기자에게 ’맞을래!’라고 애기했다. 그런 정치 수준에서 홍준표 대표의 눈에 일개 개인과 국민은 유권자도도, 시민으로도, 주권을 가진 국민으로도, 사람으로도 취급받을 수 없다.
 
’그린 패러다임’은 더 진화할 필요가 있다. 환경과 더불어 형평성을 위한 강력한 내용으로...!!! 
 
[ 2011년 7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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