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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 전3권 ㅣ 겨레고전문학선집
박지원 지음, 리상호 옮김 / 보리 / 2004년 11월
평점 :
지난 8월 초에 공부모임에서 진행한 '열하일기' 세미나의 교재는 고미숙씨의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상/하)가 아니라 이 책이었다.
가끔 독서 욕심이 분출할 때가 있는데, '열하일기' 세미나 당시에 내 마음이 그러했다. 당시 세미나 날짜에 맞추어 고미숙씨의 '열하일기'와 보리출판사의 '열하일기'를 모두 읽으려 했다. 하지만, 날짜에 맞춘 것은 고미숙씨의 책이었고 이 '열하일기' 세트의 경우 3권 중에서 마지막 하권을 절반 정도 밖에 읽지 못했다.
그래도 세미나는 아주 재미나고 유익하게 진행되었고 세미나를 마친 이후 여유를 가지고 세미나에서 이야기된 내용도 되새기면서 세트의 마지막 하권까지 읽었다.
(여기서 잠깐 나의 독서관과 독서방식에 대해 한 마디...)
아직까지 내가 책을 읽는 방식은 '정독'이 아니라 '속독'에 가깝다. '속독'이라 해도 1~2 시간에 책을 완독하는 수준은 아니다. 내가 책 읽는 것을 잠시 계산해보면 통계 상으로 보통 소설 50쪽을 읽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1시간 정도 걸린다.
따라서 수학이나 자연과학 서적, 경제경영 서적, 철학이나 인문도서 등 다른 분야의 책은 1시간 동안 집중해서 읽어도 1시간을 훌쩍 넘겨버리기 일쑤다. 그리고 일부러 '속독'을 배우거나 빨리 읽으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대신, 읽을 때 책 내용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집중하려고 애쓰면 그만큼 집중력은 높아지는 것 같다.
한 번 책을 다 읽으면 책을 덮은 후 적어도 몇 시간에서 길면 며칠 후에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책을 집어든다. 처음 읽을 때 메모해 놓거나 표시해 놓은 구절을 중심으로 전체적으로 책을 다시 읽는다. 서문과 결론도 이 때 반드시 다시 읽으면서 전반적인 내용을 머리 속에서 정리해보고 요점과 배울점, 느낀점, 비판할 점 등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는 것이다.
그냥 책 읽는 것을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숨 쉬고 밥 먹는 것처럼 생활화하는 것과 하루를 보내면서 애매하게 5~10분 이상의 짬이 나게되면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이려는 것이 내가 노력하는 방향이다. 집이나 사무실에서는 화장실 갈 때마다 책을 들고 가기 때문에 눈치를 준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책 읽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도 꽤 오래 전이다. 또한 술을 먹지 않고 불필요하게 저녁이나 주말 약속을 만들지 않으려고 하기에 평상시의 경우 하루 중 책 읽는 시간을 제법 확보할 수 있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일주일에 1권 이상 읽는 것이 올해 나의 (양적)목표다.
[열하일기_세트]는 보리출판사의 <겨레고전문학선집> 기획의 하나라 출간된 것이다. 보리출판사는 북한의 문예출판사가 펴낸 1995년판 <조선고전문학선집>을 <겨레고전문학선집>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일부 편집, 수정하여 지난 2004년 펴낸 것이다. 출판사측은 북한에서 진행한 우리 민족의 고전문학을 소개하면서 아직 한국에서 미진한 한반도의 고전을 발굴하고 북한의 문학계와 소통하고 싶었던 것이다.
<겨레고전문학전집>은 [열하일기] 3권을 시작으로 [동명왕의 노래](이규보 작품집)부터 [숙향전](소설)에 이르기까지 30권을 출간한 상태다. [열하일기] 세트는 북한의 리상호씨가 고문을 완역한 것이다.
고미숙씨의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와 달리 이 책은 처음 읽으면서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단어 사용이 남북이 제법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흙탕물'은 '흙물'로, '방금'은 '이즈막' 등 서로 다른 표현도 많고 '가닥물' 처럼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는 단어도 가끔 들어있기 때문이다.
------- * 역자 리상호는 누구인가?
북에서 한 활동 일부만 알려져 있다.
1955년에 《열하일기》 국역을 마쳤고, 1959년에는 《삼국유사》를 국역했다. 북녘의 고전 출간 사업은 모든 대중이 고전을 읽도록 한다는 원칙에 따른다. 리상호의 국역은 그러한 원칙을 따라 쉬운 우리말로 번역을 한 것 위에, 토박이 우리말을 잘 살려 쓰고 운율감이 배어 있게 하여, 이 《열하일기》가 빼어난 국역 문학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였다. ---------
당초 박지원 선생이 쓴 [열하일기]는 26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정본 없이 필사본으로만 전해져오다가 1901년 김택영이 처음 간행하였다. 현대문 제목은 북한의 리상호가 번역한 것을 따랐다.
26권의 세부 제목과 내용은 아래와 같다.(목차 부분은 위키디피아에서 일부 옮겨온 것입니다...^^)
고미숙씨는 전체 26권 중에서 일부를 편집에서 제외하였고 이 책 [열하일기] 세트는 26권 전부를 완역하여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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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권] 압록강을 건너서 : 도강록(渡江錄) - 압록강을 건너 심양까지의 기행이다. 1780년 음력 6월 24일~음력 7월 9일
- [제2권] 성경의 이모저모 : 성경잡지(盛京雜誌) - 심양에서 광녕까지의 기행이다. 음력 7월 10일~음력 7월 14일
- [제3권] : 일신수필(馹?隨筆) - 광녕에서 산해관까지의 기행이다. 음력 7월 15일~음력 7월 23일
- [제4권] 관내에서 본 이야기 : 관내정사(關內程史) -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기행이다. 〈호질(虎叱)〉 수록. 음력 7월 24일~음력 8월 4일.
- [제5권] 북방 여행기 : 막북행정록(漠北行程論) - 북경에서 열하까지 가는 길이다. 음력 8월 5일~음력 8월 9일
- [제6권] 태학관에 머물면서 :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 열하에서의 일정이다. 음력 8월 9일~음력 8월 14일
- [제8권] 북경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음력 8월 15일~음력 8월 20일.
- 북경에서 다시 조선 땅으로 들어오는 여정은 기록을 하지 않았다.
- [제7권] 구외이문(口外異聞)
- [제9권] 금료소초(金蓼少抄)
- [제10권] 옥갑야화(玉匣夜話) - 〈허생전〉 수록
- [제11권] 황도기략(黃圖記略)
- [제12권] 알성퇴술(謁聖退述)
- [제13권] 앙엽기(像葉記)
- [제14권] 경개록(傾盖錄) - 열하일기 등장인물에 대한 짧은 기록들이다.
- 제15권 황교문답(黃敎問答)
- 황교문답, 반선시말, 찰십륜포는 티벳과 달라이라마에 관해 들은 기록이다.
- 박지원은 황교문답에서 청나라의 이민족통치와 유학자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 [제16권] 행재잡록(行在雜錄)
- 건륭제에게 바친 문서와 건륭제가 내린 칙유 등의 기록이다.
- 실례를 들어가며 청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조선이 가진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
- [제17권] 반선시말(班禪始末)
- [제18권] 희본명목(戱本名目)
- [제19권] 찰십륜포(札什倫布)
- [제20권] 망양록(忘羊錄)
- [제21권] 심세편(審勢篇)
- [제22권] 곡정필담(鵠汀筆談)
- [제23권] 동란섭필(銅蘭涉筆)
- [제24권] 산장잡기(山莊雜技)
- [제25권] 환희기(幻戱記)
- [제26권] 피서록(避署錄)
작품으로서의 [열하일기]에 대한 서평은 이미 고미숙씨의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에서 다루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은 연암 박지원 개인의 작품, 사상, 성과 등에 대해 정리했다. 이 책 [열하일기] 세트의 상(上)권의 후반부에 북한 김하명 박사의 '박지원 작품에 대하여'가 수록되어 있다.
김하명 박사의 글을 일부 인용하면서 빈약하지만 박지원 선생의 작품을 평해보고자 한다. 내가 박지원 선생의 [열하일기] 이외에 다른 작품, 그리고 조선 후기 학자들의 작품을 거의 읽어보지 않았기에 김하명 박사의 설명 자료를 토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김하명 박사는 작가로서 연암 박지원을 평가할 때 '18세기 조선이 낳은 저명한 사실주의 작가'라고 평가하면서 '사상가나 문학가로서 우리나라 고대 중세의 전 시기를 통하여도 가장 높이 솟아 있는 봉우리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박지원의 예술 문학 작품들과 평론 저술들에는 '당시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던 심각한 사회 경제적 변동과 문화 예술 분야에서 첨예한 신구 투쟁이 반영되어 있으며 시대의 선진 사상 조류를 대표하는 작가 박지원의 사상 미학 견해와 예술 기량이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고...
김하명 박사가 인용하는 박지원의 작품은 '양반전'을 포함한 [방경각외전放?閣外傳]에 실려 있는 단편 소설, 장편 기행문 [열하일기], '좌소산인에게(贈左蘇山人)'와 같은 시 작품, '글은 뜻을 나타내면 그만이다'와 같은 서문 등이다.
박지원의 집안은 명문 사대부였다. 그의 6대조 충익공은 임진왜란 때 공신이며, 그 후의 선조들도 대대로 정계에서 대사헌, 판서, 참판 등의 요직을 거쳤다. 그리고 그의 가문은 당시 집권파였던 서인 노론에 속했다. 그런데도 그는 과거나 벼슬을 거부하고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찾는 방향으로 나섰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김하명 박사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는 그가 나서 자라고 사상 문화 활동을 전개한 당시의 사회 문화적 환경이다. 두 번의 임란과 호란을 겪은 조선의 경제는 백성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점차 복구되어 갔으나 그럼에도 백성들의 생활은 점점 나빠졌다. 상인 계층은 늘어나고 빈부격차가 격화되는 가운데 양반 계급 사이에서도 빈부격차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계속된 전쟁에서 자신들의 무능과 반민중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양반 통치계급의 본질이 드러나면서 봉건 사회는 점차 쇠퇴기로 접어든 것이다. 조선이 폐쇄적인 사회였음에도 청나라와의 외교관계와 상인계급의 활동, 외국인들의 표류 등으로 청나라나 서구의 사상과 문물이 조선 사회에도 점차 스며들게 된다.
둘째는 연암 박지원의 가정 환경은 양반 가문임에도 그로 하여금 새로운 문물과 사상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열려있었다. 그의 조부도 젊은 나이에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고 연암에게 서당의 글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그는 일찍 보모를 여의게 되었다.) 열여섯에 이보천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이보천 역시 일찍이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에서 농사에만 힘썼다. 그리고 실학사상을 가지고 있던 자신의 동생 이양천이 연암을 지도하도록 했다.
연암 박지원은 열여덟 살에 옛 하인에게서 들은 재미나는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처녀작 '광문자전廣文子傳'을 ?고 이 때부터 계속 쓴 '민 모인전', '김 신선전', '우상전', '역학대도전', '봉산학자전' 등 9편을 묶어 약관의 나이에 [방경각외전]을 책으로 완성했다. 연암은 이 단편 소설집을 통하여 확고히 봉건 제도의 모순을 폭로하는 자로 등장했으며 조선 문학 발전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진 작가로서 등장했다. 그 속에는 양반 사회의 도덕의 위선, 백성의 정치 도덕적 우월성, 인간 성격 형성에서 차지하는 사회적 처지의 중요성, 노동의 고귀함, 양반들의 착취구조, 애국주의, 선린 외교, 사실주의 등이 담겨 있다.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의 사상과 이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오랜 세월을 두고 연구해 온 것을 '한 번 눈으로 증험한 것'이다. 중국에서 보고 들은 좋은 것을 조선 백성에게 알리며 그것을 실천에 옮길 것을 염원하면서 4년 동안 연암골에 박혀서 집필한 것이다.
[열하일기] 속에는 철학, 정치, 경제, 천문, 풍속, 제도, 역사, 고적, 문화 등 사회 생활 전 영역에 걸친 문제들이 취급되어 있으며 그의 세계관, 사회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견해와 민중적 임장이 명백히 반영되어 있다.
또한 그는 중국의 좋은 것과 조선에서 부족한 것을 대비하면서 그 원인이 전적으로 무위 무능한 양반 사대부들 때문임을 명확하게 주장했다. "수레는 왜 못다니는가? 이것도 한 마디로 대답한다면 모두가 선비와 벼슬아치들의 죄다."
그러면서 김하명 선생은 연암 박지원의 철학적, 사회정치적 식견이 과학적 세계관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과 민중을 역사와 개혁의 주체로 세우지 못하고 왕조와 사대부 체계를 인정한 것, 그리고 구체적인 조직행위와 혁명을 생각하지 못하고 '계몽'에 의지한 것 등을 박지원의 한계로 지적한다.
박지원은 정조 시대 말기에 다른 실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직접 고을 현감이나 한성 부파관을 지내는 등 현실 사회 속에서 자신의 선진 사상과 문물을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조선 사회의 제반 사회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을 주기 위하여 [과농소초] 등 정론을 많이 썼다. 또한 개인의 토지소유를 일정한 기준량으로 제한하고 그 이상의 소유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한전제'를 제안하기도 했고 화폐 정책 개혁, 신분 제도 개혁, 난민 구제책, 봉건적 도덕의 개혁 등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정조 사후 양반 통치계급의 반격과 반동으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하여 죽었다.
영조,정조 시대의 조선 사회와 21세기 한국 사회... 비슷한 면이 많은 것 같다.
선진 사상과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미 사망 선고를 받은 명나라 유교(미국의 신자유주의)를 살리려고 애쓰고 객관적으로 불가능한 만주땅(북한)을 가당치도 않은 무력으로 되찾겠다고 부르짖는 모습, 자신의 자리가 어딘지 찾지 못하고 사대부와 백성들의 생각을 아편처럼 중독시키는 불교와 유교(반공친미와 기독교), 민중들과 진보세력으로부터 분리되어 개혁주의자임을 내세웠던 임금(DJ와 노전대통령), 자신들의 기득권을 부여잡고 발악하는 양반 사대부(수구 기득권 세력), 어딘가 아직 부족하고 모자란 듯한 개혁주체들(진보세력), 자신의 삶과 권리를 주체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힘겹게 하루하루 살고 있는 백성들(민중들)....
연암 박지원과 당시 실학자들로부터 21세기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무엇일지...
[ 2011년 8월 3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