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인간의 맛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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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를 '진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나는 역사를 '중용'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역사정칙주의(historicism)'라는 것은 인류 역사의 미래를 확정적으로 예견할 수 있다는 모든 망상을 의미한다. 물론 마르크시즘이나 공산주의도 그러한 망상의 한 전형이다. 기독교 종말론의 사관이나 헤겔의 변증법적 사관 또한 그러한 망상의 전형임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나는 인류 역사를 계급투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인간 존재를 '해방'의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자유주의자'도 아니며, '평등주의자'도 아니다. '중용'은 하나의 주의가 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나를 '중용주의자'라고 부르지는 않겠지만, 하여튼 나는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철저히 '중용'의 입장을 취한다. '중용'은 오직 자유와 평등을 포섭하는 가치로서만 우리의 심성에서 꽃을 피운다."(p.15)
 
도올의 <맹자, 사람의 길>을 읽고 도올의 동양고전 해석에 맛을 보았으니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책의 서문에서 위와 같은 도올의 '선언'을 접하니, 서양식 가치관에 회의적이었던 나로서는 이 책에 대해 적지 않은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나 역시 서구식 가치관에 부정적이다. 서구식 가치관은 아직도 너무 이분법적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사람이든 상황이든 '천사 : 악마'로 규정하고, 근대 가치관은 세상을 '진보 : 후퇴'로만 규정한다. 삶과 죽음, 좌파 대 우파, 정의와 불의, 착취와 억압, 적과 아군... 하지만 삶은 죽음을 안고 시작한 것이고, 좌파가 없이는 우파가 불가능하다. 여자 없이 남자가, 낮이 없이 어찌 밤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사람이나 세상을 나누게 되면 오히려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부정하는 꼴이라 할 수 있다. 자유 없는 평등이 어떻게 가능하며, 평등이 없이 어찌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겠는가. 그렇다면 서구식 가치관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관은 무엇일까? 동양고전에 대한 학습은 새로운 가치관을 찾기 위한 여정일 것이다.

<맹자>를 읽고서도 느낀 바지만, 이 책을 한 번 읽는 것으로 내가 <중용>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없다.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서구식 가치관과 학문, 문서 등에 익숙한 내가 수 천년간 이어져 내려온 동양식 가치관에 입각하여 '중용'의 지혜를 앍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논어>가 공자의 말과 대화를 그대로 정리한 것이라면,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공자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도올은 1장 '천명장(天命章)'에서 중용의 철학이 양 극단의 '중간'이라는 생각을 근대식 편견이고 단견이라며 배격한다. <논어>에 나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대목에 대해서도, 도올은 "'중용'이라는 덕성을 규정하기 위한 철학적 논술의 맥락이 아니라 제자들의 언행이나 위인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대체적인 경향성을 평론하는 단편적 표현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라 해석한다. 
도올이 해석하는 '중용'은 "직선의 가운데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위와 감정의 발현태의 원초적 저변을 형성하는 잠재태이며 그것은 직선적인 것의 중간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 대한 원융한 구심점 같은 것"이다. '중(中)'이란 "희(喜), 노(怒), 애(哀), 락(樂)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순결한 심적 에너지의 근원 같은 것이다. 미발(未發)이기 때문에 그것은 치우침이 없으며 분별심이 없으며 모든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즉, '가운데'가 아닌, 모든 감정이 동적인 평형(平衡)을 아루고 있는 원초적 상태와 같은 것"이다.(p.93/ 음.... 이처럼 이해하기가 무지 어렵다..ㅋ)
6장 '순기대지장(舜基大知章)'에도 '중용'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양단의 중앙이 아니라, 모든 극단의 상황들을 충분히 고려해보고 그 숙성된 상황 변수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결단이라는 뜻"(p.163)이다.

12장 '군자지도(君子之道)'와 '부부지우장(夫婦之愚章)'에는 내가 도덕시간에 배웠던 '삼감오륜(三綱五倫)'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도올은 명나라에서 전해진 '삼강오륜'은 애초 공맹사상에 없었다고 말한다. 원초적인 규정은 <중용> 20장의 '오달도(五達道)'인 군신, 부자, 부부, 곤제, 붕우관계다. 고대의 중국 유가사상가들은 인간관계를 이 다섯 관계로 통칭한 것이다. 사람은 혼자가 아닌 '인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장에는 동양식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부부관계의 중요성이 나타나 있다. "우리가 새삼 깨달아야 할 중대한 사실은 오륜을 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전체적인 종합적인 평면에 놓고 본다면, 그 가장 본질적인 관계는 부부관계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아버지와 엄마라는 부부관계 없이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부부관계는 부자관계, 형제관계에 선행하는 것이며, 가장 본질적인 관계가 된다." 
 
<중용>에 대한 도올의 현대적 재해석에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중용'은 부부관계가 자연적 당위성과 문명적 당위성의 합체적인 성격으로 본다. 도올은 "<중용>의 부부예찬은 세계문명사에 유례를 보기 힘든 선진적인 것. 더군다나 '일부일처제'를 전제로 하고 있다."(p.171~172)고 설명한다.
13장 '도불원인장(道不遠人章)'에서 <논어>의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에 대한 추가 해석은 서구식 가치관과의 비교 또한 훌륭하다. <중용>의 '시저기이불원(施諸己而不願) 역물시어인(亦勿施於人)'은 기독교 성경의 마태복음 7장 12절과 대비된다. 마태복음은 "자신에게 베풀어 보아 원치 아니하는 것은 또한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 또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Whatever you wish that men would do to you, do so them)"인데, '시저기이불원 역물시어인'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타인도 좋아하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사랑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사랑은 나를 기준으로 하는 '베품'이 아니다. 부정형의 명제만이 인간세에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p.198)고 설명한다.
17장 '순기대효장(舜基大孝章)'에서 '효(孝)'에 대한 개념도 조선 이후 한반도에서 받아들인 '효'와 다르다. 도올은 "효를 단순히 개인덕 덕성의 성취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효를 중국 인문문명의 전범을 세운 초창기 혁명가들의 너무나도 리얼한 사회적 덕성의 성취로 파악하고 있다", "혁명(革命)은 천명(天命)을 가는(革) 것이다. 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명(受命)이 필요하다. 수명이란 명(命)을 하느님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독(愼獨)과 수신(修身)을 통하여 성취하는 것이다. 그 신독과 수신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것이 바로 효(孝)이다.", "효는 본원적으로 생명의 창조를 위한 절대적 선(善)의 체험이다."(p.233)라고 설명한다.

23장 '기차치곡장(基次致曲章)에서 서양적 사고방식과 동양적 사고방식의 근본적 차이, 근대니 현대라는 개념이 동양에 무의함을 역설하는 대목도 특별하다. 질문의 중요성이 제기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너 요즈음도 마누라 패냐?" 누군가 갑자기 이렇게 물으면 뭐라 답해야 하는가? Yes or No? 평소에 아내를 패던 사람이라면 모르되, 근본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인간은 과연 근대적이어야 하는가? 인간의 역사은 서양사가 말하는 '근대(modern period)'을 구현해야만 하는가? ... 서양의 근대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기준은 종교적 가치와 결부되어 있다. 근대 이전이란 반드시 이성보다는 계시를 중시하고, 합리적 사유보다 비합리적 사유를, 개인의 자유의지보다는 신에게의 복속을 높게 평가했다. 이런 종교가 없던 사람들에게 '모던'이란 전혀 무의미한 언어일 수 있다"(p.294)
 
종합하면 이렇다. 중용은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중시한다. 하늘의 명령(天命)은 일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용의 사상은 일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삶의 자세에 인간의 길이 있고, 인간의 힘이 나오고, 인간의 맛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맛은 멋이다. 중용의 함양은 그 인간의 매력을 키우는 것이다.

<중용, 인간의 맛>은 도올이 2008년 발간한 <중용한글역주>를 어렵게 느낄 일반대중을 위하여 쉽게 쓴 책이다. 그러나 이미 나와 있는 <중용한글역주>의 요약본은 아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서도 그 전체의미를 새롭게 발전시킨 것이다. 중용사상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들어있고, 현대인의 삶에 짠한 도움을 주는 자기계발의 풍요한 내용이 번득이다. 그래서 사상가로서의 도올 김용옥 교수의 면모가 더 잘 발휘된 작품이다. 본문의 중국어 발음이 붙어있고(중국어 음운학 전공의 최영애 교수 고증), 또 정확한 한국어 발음이 붙어있어 암송에도 편리하다. EBS특강은 이 책을 기준으로 하여 진행된다.
도올선생의 EBS 방송강의와 함께, 이 책은 이러한 심오한 고전인 <중용>을 전 국민에게 이해시키고, 그들이 일상적 삶속에 매일매일 실천하게 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도올 선생은 이 책의 보급이 "우리나라를 “중용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거대한 장정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21세기 문명의 주축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동양 전통문명의 가치관 속에서 서양문명의 성과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관건이고, 그 핵심에 중용이 있다. 이 중용의 사상을 우리 국민이 선도하여 21세기 세계문명을 향도하여야 한다. 온 국민이 중용을 배워 익히는 나라, 곧 “중용의 나라”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고전학자이면서 사상가이다. 하지만 그는 골방에 박혀 학문만 파고드는 고루한 학자는 아니다. 이 땅의 민중들과 이 민족의 아픔과 미래를 걱정하는 따뜻한 인간이기도 하다. <중용, 인간의 맛>(2011. 9), <맹자, 사람의 길>(2012. 3), <사랑하지 말자>(2012. 8)를 읽으면서 느낀 점이다.(내가 동서양철학의 역사와 핵심을 꿰뚫지 못하는 관계로 도올의 '몸 철학'이 미래의 시대정신이 될 지 여부를 아직 헤아리기 어렵다...^^)
 
[ 2012년 10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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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진실 교육을 말하다 - 21세기 대한민국의 비밀스런 현주소 대한민국 진실 시리즈 1
김동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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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회적 곤경을 헤쳐나가려면 첫째, 질문을 잘 던져야 하고 둘째, 해답을 잘 찾아야 한다. 이 책은 질문은 잘 던졌는데 해답은 엉뚱한데서 찾은 전형적인 사례로 보인다.


한국 교육 문제의 근원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공부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좋은 대학의 졸업장을 얻기 위해 가정의 전부와 젊음의 대부분을 바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사회의 공공연한 지지를 얻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그러한 물음에 의문을 제시하며 교육의 새로운 가치와 제도의 변화를 통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저자는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를 과잉된 교육열에서부터 찾기 시작했다. 청소년들,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성적의 압박을 못 이겨 자살하는 일까지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기숙형 재수학원의 광고가 일간지 광고란을 도배하고 있다.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과열된 형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학 입학 경쟁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교육열은 이미 도를 넘어 거대한 열기에 휩싸여 있다. 저자는 한국의 교육현실을 사회학의 한 개념인 '약탈 국가'에 빗대어 '약탈적 교육 체제'라고 규정한다.
교육열의 원인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숭문주의'와 '시험만능사회', 그리고 '서울대의 학벌 독점'에서 찾는다.

교육열이 발생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 분야에 가치를 둔다는 것이다. 이 가치는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것일 수도 있다. 저자는 학문, 공부, 시험, 대학, 성적, 학벌, 교수, 자녀교육 등등의 개념들이 숭문주의적 가치관에서 나온 것이며 상당히 허구적이고 극복되어야 할 가치라고 지적한다.
돈을 모아 대학에 기부하는 것을 숭고한 행위로 인정하고 대학과 교수의 권위를 최고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는 과연 타당한 것일까.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교육의 풍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청년실업 문제, 인재상의 변화, 세계화 등의 사회변화만 보더라도 이미 이러한 가치관들이 허구적이며 구시대적인 발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사회가 변하고 있다. 계속되는 청년 실업 문제는 대학과 성공이라는 연결고리를 의심하게 만든다. 더 이상 대학과 학벌은 성공의 필수 조건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리고 인재상의 변화가 있다. 기업들은 더 이상 스펙위주의 인재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질적인 업무능력과 인간됨을 중요한 능력으로 생각하며 유연하고 창의적이며 재치가 넘치는 인재를 찾고 있다. 하지만 우리 교육은 여전히 점수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온실형 인재를 키워내고 있으니 지금의 교육에 모든 것을 걸고 ?아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저자의 해답은 간단하다. 숭상되고 있는 그러한 가치들에 대해 재평가하고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물론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교육환경이 이미 변하였음을 인식하고 가치관의 변화를 추구한다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시험만능주의도 심각한 현상이다. 한국사회는 '시험형 인간'을 대량생산하고 있다. 특히 객관식 시험의 폐해는 정도를 넘어섰다.(객관식 시험의 폐해에 대해서는 김덕영의 <입시공화국의 종말>에서 충분히 다루고 있다) 대입 수능시험 뿐 아니라 공무원 시험, 각종 고시, 편입시험, 진급 시험 등 모든 분야에서 실력이 아닌 객관식 점수로 우열을 가리고 당락을 결정하며 순위를 매긴다. 주관식 시험 역시 단답형 객관식 시험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어느 분야에서도 세상은 이제 더이상 흑백논리로 작동하지 않는다. 정답은 여러 개가 있을 수 있고, 사람들은 좀 더 나은 정답을 토론하고 합의하면서 결정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시험이라는 환상, 종교를 타파해야 한다.

서울대의 학벌 독점은 여러 학자와 전문가들이 지적한 바 있다. 저자의 독특한 관점은 서울대-고대-연대가 독과점하는 'SKY 독점'이 문제가 아니라 '서울대 독점'이 문제엠을 강조한다. 특히 서울대 학벌을 '국가학벌'로 규정하면서 역사적, 헌법적 관점에서 서울대 국가학벌의 문제점을 파헤친다. 그는 교육파시즘과 국가학벌이라는 관점으로 서울대와 북한의 김일성대의 공통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 부분은 학벌독점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컸다.

하지만 저자는 책의 결말에서 국가학벌을 해체하기 위해 제시하는 해법을 엉뚱하게 제시한다. 그의 해법은 단순하게도 국가학벌의 해체다. 그리고 정부가 교육과 대학에서 손을 뗀 후 대학교육을 시장에 맡기자는 것이다. 시장에 맡기면 시장 논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국가학벌이 사라짐과 동시에 시장 경쟁을 통해 능력껏 대학서열체제도 해체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국가학벌'이 대학교육 및 교육문제의 핵심이라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그로서는 국가학벌 해체와 시장 논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교육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결말은 다분히 단순한 도식으로 보인다. '국가냐 시장이냐'라는 이분법적인 논쟁은 이미 학계서도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시장 논리라는 해법의 근거를 한국 경제와 재벌의 역사라고 제시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의 경제와 재벌의 역사가 오랜 관치경제와 정부의 일방적 지원으로 이루어져 왔고, IMF 이후 재벌이 살아남고 죽은 것 역시 정부의 힘이 작동했다는 것을 부정한다. 또한 사학의 부실과 부패의 원인이 '대학서열구조와 국가의 과도한 통제'라고 주장하는데 이 또한 사학법인의 현실을 모르는 안타까운 말이다.
저자의 주장은 전형적인 시장만능주의로 해석될 여지가 커 보인다. 심지어 교육애서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주장들과도 맥락이 비슷해 보인다.

* 인상 깊은 문장 :

- "아침 7시에 등교해 정규 수업에 야간 자율 수업에 독서실과 학원에 그리고 집에서 새벽 2시까지 복습에 더구나 방학도 휴일도 없이 몰아치는 이 끔찍한 지옥불 과정을 통과하고 난 대부분의 청소년은 이른바‘소진(消盡) 효과’때문에 더 이상의 고급 지력을 발휘할 기력을 잃고 만다. 마치 광맥이 바닥난 광산과 같다."(p.07)

- "오랫동안의 시험 만능 체제는 이 체제에 익숙해진 ‘시험형 인간’이라는 새로운 인간형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시험이 있는 곳에 그 시험의 전제였던 공부와 학문은 사라지는 모순이 발생한다. 국·영·수 과목은 조선 시대의 사서삼경의 역할을 대체하고, 객관식 시험 대비를 위해 공부하는12년 기간은 우민화 교육임을 지적하고자 한다."(p.113)

- "필자는 대학서열화를 이해하고 풀어가는 키워드로서 ‘국가학벌’이란 개념을 사용했다. 국가학벌이란 국립대학과 그 출신들이 국가권력을 등에 업고 이를 사유화하여 하나의 이익집단이 된 것을 말한다. 이 국가학벌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국립 서울대학교다."(p.168)

[ 2012년 10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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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 쌍용자동차 이야기
공지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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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공부모임이 끝나자 참석자 한 분이 <의자놀이>를 읽었냐고 물었다. "아직요..." 그러자 그 분이 <의자놀이>를 선물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자신은 쌍용차 문제를 적극 알리기 위해 <의자놀이>를 선물하고 있다고. 나에게는 책을 읽은 후에 공감이 되면 다른 사람에게 선물해주기를 부탁했다.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며칠 후 집으로 배달되어온 <의자놀이>를 읽기 시작했다.
사실 나에게는 쌍용차 문제가 '용산 참사'와 더불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 중 하나다. 2009년 8월 경찰이 쌍용차 건물 옥상에서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장면을 인터넷에서 잠깐 보았을 때, 나는 그 해 1월 '용산 참사'의 참혹한 영상이 기억났다. 그리고 1986년 11월 초 건국대 교양과학관 옥상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이 무의식에서 떠올랐기 때문이다. 1986년 가을 옥상에서도 헬리콥터의 굉음과 프로펠러의 강풍, 끝없이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 숨쉬기도 불가능한 최루탄 냄새, 백골단의 군화발과 몽둥이가 춤을 추웠다. "여기서 죽겠구나"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후 1986년 건국대 사건은 2009년 쌍용차 사태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1986년 사건은 그냥 3박4일의 농성과 무자비한 진압, 대규모 구속과 실형, 학생운동에 대한 색깔 씌우기로 끝나고 말았다. 2009년 쌍용차 사태는 8월은 하루동안의 무자비한 폭력 뿐 아니라 진압일 전후 오랜기간 동안 '인간의 바닥을 무너뜨리는' 교활하고 천인공노할 수준의 폭력이었다. '폭력'이라는 단어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나의 표현력이 짜증날 정도로...
국가와 자본과 언론과 사법부와 회계전문가와 정치권은 한 몸이 되어 쌍용차 노동조합과 해고자들에 대한 오랫동안 야만적인 테러를 자행한 것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벌어진 제주도와 거창의 양민학살사건의 21세기 버전일 것이다. 자본과 경영자들은 회계법인과 짜고 처음부터 끝까지 노동자들에게 거짓말로 일관하며 사법부와 정부와 언론에 거짓 정보와 자료를 제공하고 노동자 사이를 끊임없이 이간질 시켰고, 노동부와 경찰과 검찰은 노동자들에게 부당하고 불법적인 협박과 폭력을 자행했고, 사법부와 정부와 언론은 자본가들의 주장을 의심 없이 그대로 인정했다. 쌍용차의 자본가, 경영자는 국내인도 아닌 중국, 인도인들이었다.

"어느 날 자다가 꿈을 꿨는데 꿈에서 제가 자살을 하는 거예요. 그게 꿈인데 제가 우는 거예요, 자면서."
"파업 때, 남편 아는 사람이 자신을 향해 새총을 겨누고 있었대요. 그 생각만 하면, 그 얘기만 하면 자꾸자꾸 눈물이 난다고 하더라고요. 아,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우리 애들한테 제가 폭력을 행사합니다. 감정이 앞서면서 가끔씩 그런 게 나타나거든요. 그게 제일 두렵습니다.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순간순간 통제가 잘 안 됩니다."

 

이 책 속에는 파편으로 흩어진 22개의 죽음과 해고자 2,646명의 전염병처럼 번진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들이 담겨 있다. 2009년 쌍용차 노동자들, 유령처럼 스며든 정리해고 명단, 거기에 속한 이들은 발버둥 칠 수밖에 없었다. 기준도 상식도 없는 일방적인 해고에 삶의 터전을 잃은 노동자가 절실하게 물으며 몸부림치는 것을 이기적이라고 몰아세울 수 있을까. 77일간의 파업은 이들에게 인간에 대한 환멸과 소통할 곳 없는 고립감을 가슴 깊이 느끼게 했다. 그리고 죽음의 행렬은 시작되었다. 그중에는 해고 노동자도 있었고, 해고당하지 않은 노동자도 있었고, 해고 노동자의 가족도 있었다. 해고의 영향은 불행히도 당사자에게만 머물지 않고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아직도 많은 사람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심리치유센터 ‘와락’의 정혜신 박사는 "쌍용차 노동자의 경우, 정신과 의사를 하며 접한 최악의 사례이며, 이는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후 이상 증세를 보이는 사람과 비슷하며 그냥 놓아둘 수 없는 아주 심각한 상태"라고 말한다. 이제 더는 이들이 죽음의 기운에 전염되지 않도록 사회가 나서야 한다. 국가가 나서야 한다. 국회와 법원이 나서야 한다. 그리고 가해를 한 주체인 국가와 자본가, 경찰 뿐 아니라 지켜만 보았던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다.

작년(2011년) 2월 26일, 쌍용자동차 13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그간 많은 사람들이 몰랐거나, 알았어도 그냥 지나쳤을 쌍용차 노동자의 죽음이 이번엔 작은 파장을 일으키며 알려졌다. 10개월 사이 부부가 모두 죽고 졸지에 고아가 된 남매의 이야기는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파업과 해고는 뉴스 한 자락에 늘 있어 왔는데, 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단시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일까? 작가 공지영은 이 죽음을 접하고, 그 후 이어진 죽음의 행렬을 보면서 이제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쌍용자동차 사태를 "또 다른 도가니"라고 규정하며,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이 사건을 알리는 것이 작가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의 죽음을 막아야 한다."
이 책은 그녀가 쌍용자동차 77일간의 뜨거운 파업의 순간부터 22번째 죽음까지를 작가적 양심으로 써내려간 첫 르포르타주다. 잔혹한 게임은 끝났으나, 실체를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자들과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결코 남의 일일 수 없는 이 싸움에 시민적 양심으로 함께할 것을 요청한다. 용기 내서 같이 걸어가자고 뜨거운 손을 내민다.

 

작가 공지영이 쌍용자동차 사건을 '의자놀이'로 규정한 것은 그 사건의 핵심이 '1%를 위해 99%끼리 싸움을 붙이는' 자본가의 모략이기 때문이다. 정리해고는 노동자들끼리 생존을 걸고 싸우는 잔혹한 의자놀이와 같다. 동료를 밀쳐 엉덩이를 먼저 의자에 붙이지 못하면 자신이 나락으로 떨어져야 하니까. 작가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죽음을 따라가는 내내 곳곳에서 의자놀이가 벌어지는 현장을 마주한다. 자본은 무척이나 악랄하게 그들의 이익을 위해 생명을 건 의자놀이를 수시로 벌인 셈이다.
쌍용자동차는 참여정부의 결정으로 2005년 중국 상하이차에 이미 투입된 국가 세금의 절반 값으로 서둘러 매각되었고(1조2천억 국고 투입 - 5,900억에 매각 - 실제 투입현금은 1,200억) 기술 유출이 본격화됨과 동시에 정리해고가 단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77일간의 옥쇄파업과 인간사냥과도 같은 경찰의 진압이 있었고, 죽음이 잇달았다. 그 후 2011년 쌍용자동차는 인도 마힌드라사에 다시 매각되었고, 복직 약속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삶의 터전을 잃은 노동자들은 실체를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자들과의 싸움을 지속해야 하는 암담한 상황이다.

한국사회는 2000년대 들어서 시민의식도 크게 성장했다. 부당한 일에 대해 일인시위도 하고 함께 촛불을 들었다. 억압하는 권력자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권은 무능하고 시민의 힘은 미약했고 더 용기 있게 앞선 사람들은 남다른 고통을 당했다. 용산 참사, 한진중공업 사건, 쌍용차 사건 등. 그렇다면 반복됐던 우리 시대의 문제를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여 풀 수는 없을까. 이번 쌍용차 르포르타주 <의자놀이>는 그런 마음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쌍용자동차 문제가 단순히 특정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 작가 공지영, 출판사 휴머니스트, 의학박사 정혜신과 심리치유센터 ‘와락’, 칼럼니스트 하종강, 우희종, 조희연, 시인 송경동, 정호승, 변호사 김태욱, 여러 매체의 기자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자신의 재능을 내놓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인세나 수익금의 일부를 기부하는 사례는 있었지만 참여한 모든 이들과 출판사가 전액을 기부하는 사례는 처음이다.
하지만 이 책의 시작은 지금부터다. "우리는 이제 독자 여러분께도 함께하자고 손을 내민다. 이 책의 인세, 판매 수익금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에게 전해진다. 책 한 권을 사면 독자 여러분도 4,000원가량을 이들에게 전하는 셈이 된다. 제2, 3의 의자놀이를 막고 권력을 가진 이가 비상식적인 일을 자행하지 못하도록 시민 권력이 감시의 눈을 빛내야 할 때다. 다시는 그들이 제멋대로 잔혹한 ‘의자놀이’를 기획하지 못하도록."

 

결국 쌍용차 해고자 문제는 2012년 한국사회를 특징지을 수 있는 '화두'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말해주고 있는... 쌍용차 사태는 한국 자본주의 비극의 축소판이다. 어느 가업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아니 지금도 알게 모르게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대기업 군에 속하는 쌍용차 노동자를 그렇게 학살하는 구조인데 중소기업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는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또한 쌍용차 문제는 국가의 문제, 국가권력의 문제, 자본의 문제, 노동의 문제, 사법과 법치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 함께 사는 문제, 사람의 문제다. '국가가 먼저냐 시민이 먼저냐'라고 따져볼 수도 있고, 차여정부의 과오를 다루는 문제이고, 그 이전에 정부와 사법부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고, 사람이 수단이냐 목적이냐의 관점의 문제이고, 서로 모른채 하며 잘 살아보려고 애쓸 것이냐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냐의 문제이고, 외국자본 유치의 근거가 무엇이냐를 물을 수도 있다.
이 문제들에 대한 해답은 먼저 각자 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 책을 읽은 후, 내가 쌍용차 문제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니 별로 없었다. 독후감이야 내가 늘 쓰는 것일 뿐이고, 쌍용차 해고자를 위한 모금이나 '와락센터' 치료비 기부는 이미 참여했다. 공지영씨처럼 대한문 앞 농성장에 찾아가 위로를 드릴 만큼 적극적이지도 못하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쌍용차 사태의 전모와 본질을 주변에 널리 알리는 것이고, 내가 선물받을 때 약속한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의자놀이>를 사서 읽기를 권하는 것. 그래서 책을 모두 읽은 후에 인터넷 서점에서 3권을 주문했다.

 

[ 2012년 10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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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 - 시대의 지성, 청춘의 멘토 박경철의 독설충고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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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교수에 대해 관심을 갖기 전에는 '시골의사'로 유명한 박경철 원장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언론이나 인터넷에서 묘사되는 박경철씨는 '시골의사' 출신으로 '주식투자 등 실물경제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가 발간한 책들도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이나 <시골의사의 주식투자란 무엇인가>와 같은 실물경제 성공전략이었다. 실물경제에 뛰어들어 어려움과 고통스러움을 뼈저리게 맛본 나로서는 책 한두 권으로 실물경제를 '코치'하겠다는 발상을 반기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성공담'을 미끼로 책을 팔아보겠다는 '수작'으로 여기기 때문이다.(박경철씨가 그런 수작으로 책을 썼다는 애기가 아니라...ㅋ)
이번에 박경철 원장의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안철수 후보와 강준만 교수 때문이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선 안철수 후보를 알아보기 위한 내 나름대로의 접근방법 중 하나가 안철수 후보가 가까운 이들의 책을 읽는 것이다. 안철수 후보가 자신의 '경제멘토' 중 한 명으로 소개한 사람이자, 오랜기간 안철수 원장과 청춘콘서트를 진행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청춘세대의 멘토로서의 박경철과 대통령 후보 안철수의 경제멘토로서의 박경철을 어떻게 봐야하는지 알아야했다. 그리고 강준만 교수가 <멘토의 시대>에서 박경철 원장을 '멀티, 관리자형 멘토'로 평가했고, 멘토로서의 박경철씨의 특징과 속성을 나도 책에서 읽어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박경철 워장의 책 중에서 굳이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가장 최신작이기도 하고, 청년학생들의 멘토로서 자신을 의식하면서 발간한 책이기 때문이다. 

 

책을 모두 읽고 난 느낌은 반반이다. '반반'이라는 의미는 강준만 교수가 설명한 '멀티, 관리자형 멘토'로서의 느낌은 공감되지만, 멘토로서 청년들에게 제시하는 자신의 깊이가 별로라는 의미다. 본인 스스로가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이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주장하지만, 마찬가지로 책 속에서 '문.사.철'을 많이 접한 사람치고는 아직 제대로 자기 중심에서 그것들을 소화를 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저자가 내심 대상 독자로 삼은 청춘세대들에게 이 책이 실제 도움이 될지 궁금하다. 물론, 나와 같은 비판을 미리 의식했다는 듯(겸손한 마음가짐이겠지만...) 박경철 원장은 책의 서문에 "필자 자신도, 책에서 다룬 이야기들을 그대로 내 삶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필자에게 이 책은 내 삶의 후회를 담은 시행착오의 기록이기도 하다."라고 밝혀놓았다.

안철수 후보의 '경제멘토'로서 어떨까라는 애초 궁금증을 이 책으로 해소하지는 못했다. 경제관련 내용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다만 저자는 경제 상황에 대한 일부 글에서 비정규직 문제, 시장만능주의, 신자유주의, 재벌의 폐해, 제도의 문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인했다.
 
저자의 글은 보통의 청춘세대들에게 도움이 되는 게 많다. 한국판 '탈무드'나 '논어'로까지 칭송하지는 않겠지만, 그에 버금갈 수 있는 명언과 혜안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단락은 무수히 많다. "방황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낯선 것을 통해 본질을 통찰하라" "침묵은 가장 능동적인 대화다" "배움의 즐거움" "진정한 행복은 과정의 몰입에서 온다" "발산하지 말고 응축하라" "언어는 그 사람을 말해주는 지표다" "진실을 보고 행하는 참지식인이 되자" "환경은 새로운 패러다임이며 기회다" "자기 삶의 혁명가가 돼라" "경계를 넘어서야 진보가 온다" "철학을 통해 사유의 경계를 넓혀라"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균형잡기" "자신을 감동시켜야 진정한 노력이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 "인간의 가치는 밀도가 결정한다"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통섭하라" "패러다임의 변화를 읽어내는 주인공이 돼라" "공공의식을 가진 공감형 리더쉽이 요구된다" 등등... 그리고 책 읽기와 글 쓰기에 대한 저자의 조언은 나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책의 상당부분은 저자 자신의 경험과 학습과 깨달음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저자의 삶은 아주 치열하고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보통사람들 중에서 자기혁명을 위해 어느 순간 술과 골프를 끊을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그만큼 저자는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장점과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자기혁명'은 살갑게 다가오지 않는다. 스스로 청춘세대에게 애기하고픈 것을 정리했다고 밝혔음에도, 그의 주장과 이야기는 청춘세대의 현실에 기초했다고 보기 어렵다. 저자의 말대로 스스로 노력하여 '자기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청춘들도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실제 그렇게 할 수 있는 청춘세대는 극히 드물다. 저자의 조언은 절대 쉽지 않은 것들이다. 저자의 삶 자체가 동 시대인들 중에서 평범하지도 일반적이지도 않았음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자기혁명'의 동기부여와 전략을 제시했음에도 오히려 청춘세대들이 이 책을 읽고 또 다른 좌절감을 느끼거나 포기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그리고 저자의 '자기혁명'은 단독 또는 개별적인 개인에 대한 충고라는 것이 또 다른 한계로 보인다. 개인이 자신의 불안함이나 부족함을 뛰어넘어 '자기혁명'을 이루기는 극히 어렵다. 인간 자체가 사회적인 동물인 이유가 개인의 '자기혁명'이나 '자기변화'를 사회 속에서 타인과 영향을 주고 받을 때 가능함을 의미할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성공담이라는 경험에 기초했기 때문에 강조했지만, 청춘세대의 다수의 노력을 이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지 않을까 싶다.(이런 평가는 내 자신의 추론이다. 청춘세대가 이 책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는지 나는 모른다.)
좀 더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 직설적으로 말해보겠다. 저자는 청춘들이 자신의 재능을 찾고 노력하면서 독서하고 사색하는 가운데 자기 혁명을 통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하지만 공부와 시험성적으로 줄을 세우는 학교제도, 학습경쟁은 없이 스펙쌓기와 고시만이 가득한 대학, 경제적 격차로 인한 교육기회의 불평등, 새로운 기회나 도전이 불가능한 중산층과 서민의 가계구조, 공부와 생존을 위해 하루종일 알바와 비정규직에 시달리는 대학생, 창업과 재기가 불가능한 사회경제구조에 놓여져 있는 청춘들에게 '자기혁명'만을 주문하는 것이 과연 멘토의 역할인지에 대해서는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대부분의 청춘들에게 독서하고 사색하고 봉사하고 여행할 여유와 기회가 주어져 있는지 오히려 묻고 싶다.
 
전체적으로 잠언집과 같은 명언을 제공함에도, 나는 저자의 멘토링 중에서 중간중간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예를 들어 보면, 저자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고민하며 방황하고 노력하는 것은 바른 길을 찾기 위한 여정이어야 한다"(p.19)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너무 당위적이면서도 한쪽 측면만 부각한 것이다. 사람이란 고민하고 방황하여 스스로를 부정하고 나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즉 처절하게 깨지고 자신을 부정한 후 일어서는 경우도 있고 사람에 따라 그런 방식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현상을 버리고 본질을 관통하려면, 다양한 체험적 지식을 통해 얻은 새로운 생각과 기존의 것을 비교하고 개선하는 긍정적 태도를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p.30) 철학적으로 생각해보면, 경험을 통해서 본질을 발견할 수도 있지만 선입관을 버리고 현상을 면밀하게 세세하게 고찰하고 그 이면까지 분석하여 본질을 꿰뚫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본질에 대한 깨달음은 직관도 있을 수 있고 합리적 추론도 있을 수 있다.
"위로를 주는 대상은 내부에 있고 스트레스를 주는 대상은 외부에 있다" 이 표현은 전형적인 근대적 또는 서구식 사고방식이 아닐까? 위로야 말로 자연 속에서 찾을 수 있고 음악이나 옆 사람에서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스트레스야 말로 외부의 대상에 대해 내가 어떤 선입견이나 감정을 가지고 스트레스로 받아들이는 것이거나 서로 상호작용에서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의 이성이 추구하는 행복의 개념은 단지 '요청되는 것'일 뿐이다. 행복의 대상은 '함께한으로써 더욱 빛나고 가치가 변하지 않으며 새로운 가치를 끊임없이 창조해 내는 것들이다." '행복론'은 시대별로,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그야말로 사회적이고 상대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이 '행복론'일 것이다. 사람에 따라 깨우침을 얻는 것도,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도, 단지 함께할 누군가가 있는 것도, 사랑을 나누는 것도 행복일 수 있다.
"철학의 역사는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와의 씨름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또한 서양철학사에만 관통하는 것이지 않을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운 바람직하고 건강한 가치관을 정립하고 삶의 모든 선택을 그것에 의거해 해나가는 것이다"(p.83) 일찍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도 좋지만, 가치관을 조금씩 세워나가고 경험하고 공부하며 부단히 수정하는 게 좀 더 평범하고 일반적인 모습이 아닐까? 평생을 학습해도 제대로 알기 힘든 세상에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사는 것이 인간이라면, 항상 주관이 있으면서도 외부에 열려있는 가치관이 되어야 독선이나 아집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삶에서 20대는 준비, 30대는 질주, 40대는 수확의 시기다. ... 그래서 청년의 시기에는 무조건 발산하지 말고 스스로를 다스리며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p.91) 사람은 개인마다 다르다. 이렇게 사람의 인생을 무우 자르듯 가르는 건 너무 획일적이다. 무조건 발산하지 말자'는 타당하지만 '무조건 인내' 역시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요즘과 같은 복잡한 세상에서... 지금의 20대는 고민하되 저항하고 실험하고 경험하며 스스로를 단련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또한 굳이 세대로 분류한다면, 준비는 원래 10대부터 하는 것이리라...
"새로운 시대는 사람이 부가가치 창출의 핵심 수단이다" 산업화 시대야말로 사람이 부가가치와 이윤의 핵심 수단이었다. 새로운 시대는 사람이 수단이 이니라 목적인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만이 존재의 의미를 두는 시대야말로 변해야 한다. 또 '가치'에 대한 근대적 경제 중심적 시각을 재검토해야 한다. 인간의 가치란 따로 없다. 인간 그 자체가 유의미하고 가치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 저자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책의 상당분량이 인생에서의 성공을 위한 전략과 태도를 어떻게 갖출 것인지에 대해 다룬다. 심지어 사람이 99번 성공해도 100번째 실패하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규정한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인식하는 것도 공공의식을 가지는 것도, 공감하는 것도 모두가 '성공'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간의 인생에게 성공과 실패라는 두 개 밖에 없는 것인지.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서 도대채 무엇이 성공인 것인지 저자에게 묻고 싶다.
저자의 글에 많이 공감이 되면서도 진정성이 깊숙히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80년대 학창시절에 대한 소회가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저자가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하고 의사가 되기까지 한국사회에서는 무수히 많은 사건사고들이 있었다. 박정희 유신체제와 광주민중항쟁, 전두환 군사정권, 87년 6월 항쟁과 대통령 선거,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그 과정에 대해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다. 21세기 한국이라는 사회가 존재하는 것은 과거에 지나온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절은 시절에 대해 솔직한 심경을 밝혀야 했다. 청춘세대들은 크게 관심이 없겠지만, 나와 동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궁금해할 수 있다.
 
'추신' : 저자가 '말의 세 가지 교훈'이라면서 "첫째, 말을 조심하자. 둘째, 별 생각 없이 상투적으로 한 남의 말에 상처받지 말자. 셋째, 말의 때를 알자"라는 문장을 소개했다. 장경동 목사가 한 말을 책에 인용한 것이다. 저자가 인용한 장경동 목사가 "스님들은 예수를 믿어야 한다"라고 발언한 당사자라면 크게 실수한 것 같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의 말은 '허언(虛言)'일 뿐이며 그 말을 인용하는 것은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2012년 10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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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공화국의 종말 - 인재와 시험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대한민국이 산다
김덕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한국에서 외국사회를 바라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들이 많듯이, 한국 밖에서 한국을 바라보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모습이 전통에서 이어져온 문화적인 것이라면 '다름'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상식'적으로도 이상하면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저자는 외국에서 볼 때 한국사회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에 교육문제가 특별하다고 말한다.
그 중 하나는 중,고등학교까지는 OECD 상위권에 위치하는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순위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에 서열을 매기는 '학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등부터 꼴찌까지 순위를 매기는 '객관식' 시험이다. 객관식 시험의 경우 초중고, 대학 뿐 아니라 각종 고시와 공무원 시험, 자격시험 등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시험은 객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그 핵심 이유와 뿌리를 '입시공화국'에서 찾는다. '입시감옥'이라는 단어가 더 알맞을 수도 있다.


"온 나라가 병영이던 군사독재 시절에도 아이들에게만은 자유가 있었다. 모든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놀며 자기들만의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그 느린 시간, 어른이 보기엔 별 실용적 의미가 없어 보이는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정서와 인간적 면모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걸 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어떤가? 그들의 삶은 감옥에서 지내는 수인과 다를 바 없다. 과거 방식으로 아이들을 구속하는 일, 즉 폭력이나 권위주의적 방법을 통해 아이들을 구속하는 일은 이제 적어졌고 누구나 비판적이다. 이를테면 아이들을 심한 매로 다스리는 교사는 더 이상 발붙이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아이의 미래'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구속은 전 사회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심지어 우리는 그 가공할 인권 탄압을 '교육 문제'라고 부른다."(p.16)


지금의 40~50대가 다니던 초,중,고등학교와 지금 초,중,고등학교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애기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구속하는 감옥은 학교 뿐이 아니다. 가정과 학원, 그리고 사회 전체가 감옥이 되었다. 학부모와 교사, 학원강사, 언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모두 감옥의 간수 역할을 자청하고 있다.
무엇을 위한 감옥인가? 그것은 '수능시험'을 위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입시만을 위해 준비한 것이 단판 승부로 결정되는 날, 한국에서는 기괴한 현상이 벌어진다. 1등 대학부터 꼴등 대학까지, 인기 학과에서 비인기 학과까지 서열이 매겨진 한국 사회에서 수험생들은 더 상위의 대학과 학과를 가기 위해 1등부터 꼴등까지 일렬로 줄을 세우는 시험을 치러야 한다. 수험생과 학부모, 학교는 물론 온 나라가 몸살을 앓는 가히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입시. 과연 이 입시는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
우리나라가 유례를 찾기 힘든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높은 교육열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입시에 목숨 거는 과열된 교육열은 앞으로도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사회 발전을 이룰 수 있을까? 21세기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지식정보와 문화의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과연 지금의 입시와 교육 철학이 그러한 시대에 대비할 수 있을까?


이 책은 바로 입시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한국의 교육과 인재관에 던지는 본질적인 회의이자 도전장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은이는 지금의 입시로는 “NO”라고 한다. 인재와 입시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는 것이다. 학교와 학원 그리고 가정이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힌 채 감시와 처벌 속에서 길러지는 우리의 아이들은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는 기회를 말살당한 채 인재가 아니라 그저 ‘쉼 없이 뛰는 조그만 선수들’로 양산되고 있을 뿐이다.
한국의 교육은, 좀더 정확히 말해 오직 입시만을 위해 존재하는 교육은 인적 자원밖에 가진 것이 없는 나라에서 인재를 죽이고 나라를 망치는 ‘원흉’이다. 교육이 인재를 기르고 국제 경쟁력을 제고한다는 주장은 한갓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열화된 대학의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무한 경쟁에서 승리한 엘리트들은 허약할 수밖에 없다. 허약한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자연히 허약할 수밖에 없다. 이런 엘리트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커녕 남을 위한 일말의 배려도 찾아볼 수 없다.
저자는 상식 수준에서 생각해봐도 지극히 비정상적인 한국의 입시 교육을 비판하고 있다. 아이들이 힘들어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정도의 어려움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지금의 무한 ‘입시’ 경쟁이 유일한 방법인지. 누가 ‘인재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아이들을 무자비한 입시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지를 파헤치고 있다.


서울대는 전 세계 대학에서 그 전례가 없는 독특한 풍광을 보여준다. 즉 세계 최상위권의 인재들을 싹쓸이하고 있다. 서울대는 한마디로 우수한 인재들의 집합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인재들이 차고 넘친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의 최고 대학일 뿐 국제적인 위상은 그다지 높지 않은 것일까? 세계적인 대학자는 없고, 희대의 논문 조작이 있을 뿐이다.
지은이는 입시만을 위한 교육에서 그 문제점을 찾는다. 수능 시험이 끝나면 고등학교 수업은 시간 때우기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대학 교육이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치열한 무한 경쟁을 뚫고 대학에 입학하는 것으로 경쟁은 끝난다. 가능한 높은 서열의 대학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목표이고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작 공부를 시작하고 제대로 경쟁해야 할 대학에서는 더 이상 '공부'하지 않는다. 오로지 고시 시험과 스펙 쌓기 뿐이다.


공교육이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공교육이 부실해서 사교육으로 몰리고 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교육의 무엇이 부실한 것인가? 지은이는 “공교육이 부실하다고 말하는 것은 대학 입시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경쟁 학생보다 1점이라도 더 좋은 점수를 받아서 한 단계라도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학과에 입학시키는 것이 교육의 목표인 상황에서 공교육은 부실할 수밖에 없다.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이 제공되는 학교 수업은 남보다 앞서는 것이 교육 목표인 상황에서 내용이 견실해도 불충분하고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 줄 세우기에 방해가 되는 학교 교육은 내용과 방식을 아무리 개선해도 부실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대학 서열화가 계속 유지된다면 공교육이 부실하다는 비난은 더 거세지고 많은 학생들은 사교육으로 몰리게 될 것이다.


한국의 학교 교육은 토론식이나 논술식이 아닌 주입식 교육과 ‘찍기’의 객관식 시험이 중심을 이룬다. 학교나 교사 모두 논술식 교육을 진행할 준비와 능력도 부족하지만, 채점에 대한 시비 때문에 정답이 명백하게 있는 단답형 시험을 벗어날 수 없다. 논술을 위한 사교육시장은 급팽창하고 있다. 공교육이 채워줄 수 없는 것을 사교육이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학교 교사는 논술에 있어서 ‘아마추어’이고 학원 강사는 ‘프로’이다. 팽창하는 사교육은 학부모들의 사교육비 부담으로 이어지고 있다. 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성적, 순위가 매겨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논술, 통합 교과형 논술 시험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서울대와 주요 사립대들이 학생들을 일렬로 줄 세워 기존의 대학 서열을 공고히 하기 위한, 그래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대학의 자율성이니, 우수한 학생을 선발해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느니, 아니면 국제 경쟁력 제고를 위한 엘리트 교육이 필요하다느니, 그리고 이는 국제적 경향이니 하는 것은 그저 변명이요 허위의식이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국의 대학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국가, 국민, 사회 등 거창한 이름으로 감추고 있다.
객관식 시험에서는 “정답이 1개인 특성을 감안해 어느 모로 보나 정답인 답항을 골라야” 한다. 복수 정답을 인정하라는 소송의 법원 판결이다. 정답이 반드시 존재하고 그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을 받는 우리 학생들이 창조적인 인식과 자율적인 사고가 가능할까? 프랑스 바칼로레아에선 “진실에 저항할 수 있는가?”라는 식의 문제가 출제된다. 이런 문제에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자신의 견해를 논증하는 과정 자체 즉, 논증 방식과 절차 그리고 사유의 참신성과 독창성 등이 답일 것이다.


진짜 경쟁은 중,고등학교가 아닌 대학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진정한 경쟁을 해야 할 대학에서는 경쟁하지 않는 엘리트들이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허약한 엘리트들은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던 것처럼 정답 찾기에 여념이 없다. 정답을 찾으면 나머지는 모두 오답이다. ‘조국 근대화’, ‘세계화’, ‘BK21’, ‘천재론’, ‘지식정보 사회’, ‘FTA’ 이것들은 허약한 엘리트들이 찾은 정답들이다. 한때 정답이었다가 다른 정답이 제시되면 오답이 되고 만다. '성장'과 ‘세계화’가 정답이던 시절 모든 것을 성장과 세계화에서 찾았다. 무엇을 해야 하는 이유도 ‘성장'과 '세계화’였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그랬다. 그러나 그 정답의 결과는 외환 위기였다. 이후 새롭게 찾은 정답은 ‘지식정보 사회’이다. 구호만 난무하고 수단에 불과한 컴퓨터 보급과 인터넷을 까는 것이 전부였다. 정답을 찾아 헤매는 허약한 엘리트들은 사회 전체를 뒤흔들어 놓는다. 허약한 엘리트가 지배하는 허약한 사회의 스산한 자화상이다. 허약한 엘리트의 이데올로기에 허약한 민중들이 끌려다닌다.
엘리트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지 않다는 것은 이미 입증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엘리트가 다수를 대신하여 이끄는 시대도 지났다. 정보를 공개하고 공유하여 다수가 참여하는 토론의 장을 만들고, 지혜와 대안을 수렴하여 사회적으로 합의하도록 해야 한다. 인터넷과 정보통신기술은 이미 그것이 가능하도록 기반을 조성해 놓았다. 구조적으로 참여가 어려운 이들이 배제되지 않도록 조금 더 고민하고 배려하면 된다.


대통령 선거가 70일 앞으로 다가왔다. 학생들을 체념과 절망과 포기로 밀어넣고 있는 입시공화국, 입시지옥을 바꾸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정책을 제시하여 동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정답이 될 만한 대안들은 이미 몇 해 전부터 제시되어 있다. 무상교육, 중고교와 대학의 분리, 대학평준화, 수능시험 폐지와 자격고사, 국공립대 통합네트워크, 전문대학원 체제, 교육민주화, 교사 충원 및 획일적 교육방식 개선, 각종 객관식 시험제도 개선 등... 토론하여 선택하고 합의를 도출하여 내년부터 새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면 된다.
독일 대학에서 저자가 보내는 한국교육애 대한 이 메시지를 대선 후보들, 특히 안철수 후보와 문재인 후보에게 들려주고 싶다. 제대로 된 교육도 복지국가의 중요한 요소다. 안철수 후보의 <안철수의 생각>이나 문재인 후보의 <문재인의 힘>에서는 한국 교육문제에 대한 심각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두 후보 뿐만 아니라 구조적으로 엘리트 지위에 위치한 사람들부터 '엘리트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 2012년 10월 0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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