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지음, 정현종 옮김 / 물병자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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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 저, 정현종 역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읽고 / 2002. 4., 196쪽, 물병자리

법정스님의 추천 도서 서른 다섯 번째인 이 책은 '세계적인 현대사상가'로 알려진 자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저서 중 국내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세기에 가장 훌륭한 철학가이자 정신적 스승으로 간주되는 명상가이자 인도철학자"라고 출판사가 소개한 크리슈나무르티. 그는 권위자로서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정(assumptions)을 의심하며 삶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관찰자로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출판사는 그가 이룬 업적은 실로 대단하며, "그는 60년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였다. 그동안 그가 사용한 단어는 약 억만 개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죽은 해인 1986년 크리슈나무르티 재단은 그의 강연 내용을 전 세계에 내놓았다. 그의 연설과 대화 내용은 60여 권이 넘는 책으로 출간되었고, 세계 다른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로 소개한다.
"과연 그럴까?"라고 생각하며 이 책을 읽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문제제기는 '첫 번째 이야기'의 요점인 "오랜 세월 우리는 선생들에 의해, 권위자들에 의해, 책과 성인들에 의해 마치 숟가락으로 떠먹여지듯 양육되었다. 우리 안에는 아무 것도 새로운 것이 없다. 독창적이고도 원래 모습 그대로인, 그리고 명징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라 할 수 있으며, 그는 열 여섯 가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한다.
그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독자) 여러분은 어떤 기관이나 신념, 교리, 성직자, 제례를 통해서, 철학적 지식이나 심리학적 기술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관계의 거울 속에서, 지적인 분석이나 자기반성적 해체가 아닌 오직 관찰을 통해서 진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라 할 수 있다.

책을 읽은 소감은, 크리슈나무르티의 유명세에 비해 문장과 논리가 관념적으로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는 이해, 기쁨과 쾌락, 공포, 자유, 폭력, 관계, 시간, 사랑, 생각, 명상, 혁명에 대해 '관찰'을 통해 진정한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자신의 의견을 전개하지만, 그의 의견을 쉽사리 공감하거나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그가 주장하는 근본적인 성찰 방식을 따르게 되면 그의 책과 그의 주장마저도 나에게는 '권위자의 지식'에 불과해버리기 때문이었다.

또한 크리슈나무르티의 최초 문제제기에서부터 나는 문제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수십만 년전 인간종이 탄생한 이래 인류 역사가 계속되어 오는 동안, 인류의 지식과 지혜는 꾸준히 쌓여 왔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지목하는 선생들, 권위자들, 책들, 성인들 그리고 크리슈나무르티까지도 지난 인류의 진화사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그의 주장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글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문장 속의 단어와 개념과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즉, 지난 인류 역사의 '지식의 창고'를 우리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 다만 우리는 선조들의 지식과 지혜를 답습하고, 그것들에 의해 양육될 것이냐 아니면 과거의 지식과 지혜를 토대로 현실에 바탕을 두고 새롭게 연구하고 발견하고 개발하고 개선하고 혁신하고 창조할 것이냐를 두고 끊임 없는 선택과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주장에서 공감하고 배울 수 있는 부분은 "인간은 관계의 거울 속에서, 오직 관찰을 통해서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관점이다. 권위와 전통에 얽매이기 쉽거나 당장 얽매여 있는 사람들의 경우, 그의 책을 통해 선입관이나 의존성을 탈피하고 자신만의 관점과 논리를 갖추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 중에서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은 "지적인 분석이나 자기반성적 해체"를 부정하는 그의 지적 논리의 전개방식이다.  지적인 분석이나 자기반성적 해체는 기존 선생이나 권위자, 종교나 이데올로기에 몰입되지 않는 이상, 개인의 지적인 도약이나 정반합의 변증법 모델 통해 진리를 찾거나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관찰을 통해서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문장에서, 관찰을 통해 개념이나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축적된 정보와 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다만, 남의 주장이나 이론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체적인 관점을 통해 재해석해내는 능력이 필요할 뿐이다.

이 한 권을 읽고 내가 크리슈나무르티의 사상이나 철학을 전부 안다고 자신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책만 읽었을 때에는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나누어질 뿐이다.
기회가 되어 크리슈나무르티의 다른 책을 읽게 되면 이 책과 더불어 그의 사상과 주장을 다시금 되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 1895. 5. 12 ~ 1986. 2. 17)는 1895년 인도 남동부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철인(哲人)으로서 인도 마다나팔레의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떠한 계급, 국적, 종교 그리고 전통에도 얽매이지 말라고 말하며, 학습된 정신이 가져온 파괴적 한계로부터 인류를 완벽히 자유롭게 해방시키고자 했다. 죽을 때까지 60여 년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많은 강연을 했다.
그가 영구적으로 머물렀던 주거지는 없었지만, 주로 캘리포니아의 오하이(Ojai), 잉글랜드의 브록우드 파크(brockwood park) 그리고 인도의 첸나이(Chennai)에 머물렀다. 그는 일상에서 자신이 바라보고 느끼는 예민한 인식을 통해 스스로 변화해야 하며, 이는 관계의 거울을 통해 관찰될 수 있다고 말한다.

1910년 크리슈나무르티는 인도의 한 해변에서 신지학자들에게 발견된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열세 살이었다. 당시 신지학협회 대표였던 애니 베산트(Annie Besant)는 그와 그의 동생을 영국으로 데려가 교육했다.
그 이후로 크리슈나무르티는 "세계의 스승(World Teacher)"이라는 궤도에 오르지만, 돌연 방향을 바꾼다. 1929년 그의 나이 서른두 살이 되던 해, 그는 네덜란드(Holland)에서 열린 거대한 유럽 신지론자 연중모임에서 ‘세계의 스승’으로서 어떠한 공식적 역할도 하지 않을 것이며, 신지학 수장으로서 사임한다고 발표한다. 그리고 모든 종교적 관념과 종교적(spiritual) 단체와의 관계도 끊어버린다.
그의 핵심 가르침은 "진리는 길이 없는 곳(Truth Is A Pathless Land)"이라는 그의 연설문에 잘 나와 있다. "(출판사 소개글)

[ 2014년 9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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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 평범하지 않지만 평범한 소수자들의 이야기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1
인권운동사랑방 엮음 / 오월의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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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인권운동사랑방 저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 평범하지 않지만 평범한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읽고 / 2013. 4., 278쪽, 오월의봄

대한민국 헌법은 제11조 ①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을 통해 원칙적이고 근본적으로 주권자들 개개인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으며 평등함을 선언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본인이 차별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한민국 주권자 중 10%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의 사상적, 이념적, 정치적, 양심적 자유는 국가보안법과 종북몰이로 인해 근본적으로 침해받고 있으며, 정부의 재벌 대기업 기득권 위주의 경제정책과 황금만능주의 사회문화는 비정규직, 노인과 여성, 저소득층, 농민, 중소 상공인, 청년과 학생, 어린이 등에 대해 구조적인 경제적 차별을 당하고 있다. 사회문화적 차별 역시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에 대해 광범위하고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차별'은 현재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겪는 다양한 사회적 경험을 설명하는 하나의 담론이다. 하지만 "누구를 차별하고 있다" 혹은 "누구에게 차별받고 있다"와 같은 표현은 흔하게 사용되지만, 그 차별의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충분히 합의되지 않은 것 같다.
우리들은 인격을 파괴할 수 있는 위력을 지닌 인간적인 멸시나 모멸의 경험을 차별로 인식하고 있을까? 설사 차별로 인식된다 하더라도 "마음 약한 놈"이나 "여린 놈" 또는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식으로 매우 가볍게 치부되기 쉽지 않을까? 

인권운동사랑방은 차별이 "관계, 즉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개인과 사회(혹은 다수 집단)와의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즉 사회화된 인간이라면 자신의 다양한 삶의 조건으로 인해서 일상생활 속에서 흔하게 겪게 되는 사회현상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구체적인 일상생활 그리고 삶의 맥락 속에서 받고 있는 이야기다. 하나의 정체성으로 호명되기를 거부하는 소수자들의 목소리라 말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어떤 말로도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오히려 그 어느 말로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1장 승민의 이야기는 한 비혼모가 자기와 같이 수업을 듣는 동료 학생들에게 특강 형식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주인공 승민은 가장 힘든 것이 사람들의 동정어린 시선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이는 이른바 정상가족에게는 어떠한 결핍도 없냐고 되묻는다. 
2장 희수의 이야기는 트랜스젠더로 사법부에 성별변경을 호소하는 탄원서다. 희수는 자신의 신분증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트랜스젠더들에게 ‘성별주체성장애’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에 대해 자신은 한 번도 주체성을 잃은 적이 없다며 자신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성별을 정정해줄 것을 호소한다. 
3장 수민의 이야기는 엄마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다. 베트남에서 결혼이주를 한 수민은 한국인 남편과 이혼하고 베트남에서 모셔온 베트남 국적의 엄마와 한국 국적인 딸, 이렇게 다국적 가족을 구성하여 행복한 미래를 계획하고 있다. 

반면 5장 타파의 이야기는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들어와 가정도 꾸렸지만 결국 공장에서 일하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타파를 기억하는 활동가의 회상으로 겉으로만 화려한 다문화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드러내고 있다. 
4장 정현의 이야기와 8장 서윤의 이야기는 자신의 성정체성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생애주기에 따른 ‘키스’라는 성애적 경험과 ‘신공’(신촌공원)이라는 공간을 통해 성소수자 청소년의 성장사를 들려주고 있다면, 
6장 이숙의 이야기는 장애를 가진 청소년이 어떻게 세상과 사회에 때로는 맞서고 때로는 타협하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7장 민우의 이야기는 흔히 에이즈라고 불려지는 ‘HIV 감염인’이 목소리를 통해 감염인들의 인권을 위해 차별의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들려주며 9장 영석의 이야기는 청소노동자인 명희와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영석, 그리고 청년실업 상태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영은, 세 명을 주인공으로 하는 단편소설 형식으로 삶의 현장, 일터와 삶터에서 만나게 되는 차별의 문제를 짚고 있다. 

이렇게 재현된 각각의 이야기마다 반차별운동을 함께 모색하고 실천해온 활동가들의 글을 한 편씩 덧붙였다. 장애, 퀴어, 이주, 성별정체성, 반성매매, 노동 등 각 분야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이들의 글은 차별이 한국사회의 어떠한 맥락 속에서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며, 한 개인이 가진 여러 정체성 중에서 하나의 정체성에 갇힌 차별이 아니라 중첩되고 교차하는 정체성 가운데 차별이 놓인 자리를 짚어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마지막에 실린 남은 이야기 ‘일터에서, 우리는 어떻게 만날까’와 ‘반차별운동은 정체성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는 한국사회 반차별운동이 어떤 고민을 중심으로 차별 문제를 대해 왔는가와 함께 앞으로 반차별운동이 풀어가야 할 숙제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책은 '평범한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연이어 소수자들과 인터뷰한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가들의 느낌과 생각도 함께 들려 준다. 내가 그들의 느낌을 십분 공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느 정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활동가들의 의견이나 주장이 어려운 학문 용어나 개념을 자주 사용하고 있고 접근하기 어려운 이론이나 논리를 내세우는 경우가 종종 담겨 있어 재미 있던 책이 중간 중간 딱딱해지고 마는 것이 흠이다. 반차별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지 않는 현실에 활동가들의 운동 태도나 언어 사용에 문제가 없는지 되돌아 보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며느리가 남자라니, 동성애가 웬 말이냐!”
2007년 참여정부가 내놓은 차별금지법은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감자는 차별금지 사유에 적시된 ‘성적 지향’이었고, 이를 삭제하라며 열린 집회에서 등장한 저 문구는 반차별운동 활동가들을 당혹하게 했다. 
어떤 사람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의 성별정체성 때문에 차별받거나 고통 받아서는 안 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는 ‘동성애 차별금지 = 동성애 조장 = 남자 며느리’라는 등식을 통해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반인륜적, 반사회적 주장으로 내몰렸다. 결국 참여정부는 차별금지법에서 성적 지향을 비롯해 출신 국가, 가족 형태, 범죄 경력, 학력과 병력 등 7개 항을 슬그머니 지워버렸고 그럼에도 차별금지법은 만들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7년의 세월이 지나 다시 2013년, 차별금지법과 성적 지향은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다.

"2007년 그 사건 이후 반차별운동 활동가들의 고민은 깊어졌다. 많은 언론들은 차별금지법에서 제외된 항목들에 해당하는 차별 피해 사례를 알려달라고 했다. 마치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듯이 누가 미혼모라는 이유로,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전과자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달라는 주문 앞에서 반차별운동 활동가들은 차별 당사자, 소수자를 직접 만날 필요를 절감했고 2011년 인권운동사랑방의 ‘변두리스토리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전문 인터뷰어나 생애구술 작업을 업으로 삼는 학자가 아닌 활동가들이었기에 작업은 서툴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보고서를 계획했다. 차별의 다양하고 생생한 양상을 드러내고 차별이 이러저러한 문제를 낳으니 “우리 함께 차별에 맞서 싸우자”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보고서. 하지만 인터뷰 녹취를 풀고 함께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활동가들은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의 형식으로 전하고 싶어졌다.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들, 대중매체에 흔히 등장하는 전형적인 피해자의 사례나 사건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들이 느꼈던 설렘과 먹먹함으로 생생하게 재현해보고자 했던 것이다."(인권운동사랑방)

차별금지법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인권단체와 인권운동가들과 시민사회단체, 진보정당 그리고 일부 보수정당의 정치인들도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별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즉, "차별금지법은 과연 차별을 없앨 수 있을까?"
차별금지법 제정운동, 그리고 반차별운동은 지금 이 순간에도 차별에 대한 법적인 구제 장치를 만드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진정으로 한국사회에서 차별이 없어지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인권운동사랑방은 그 첫 출발로 이 책이 전하는 이야기를 수신하고 전송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 또는 아무런 생각 없이 종종 비혼모, 트랜스젠더, 레즈비언과 게이, 이주자, 청소년과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를 차별했다는 걸 깨달았다..ㅜ

[ 2014년 9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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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콤플렉스 - 광기가 남긴 아홉개의 초상
강준만 외 / 삼인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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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천 [서평] 강준만 등 9인 공저 <레드 콤플렉스 : 광기가 남긴 아홉 개의 초상>을 읽고 / 1997. 6., 312쪽, 삼인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인 1997년, 강준만 교수와 김교만, 김민웅, 김삼웅, 김진아, 문부식, 손석춘, 최종욱, 황광수의 글이 묶여 발간된 책이다.

책은 제목 그대로 한국사회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레드 콤플렉스'에 대해 비판한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레드 콤플렉스`를 전파하고 그 피해를 당하는지를 철저히 파헤쳤다. 1990년대 말까지 대표적인 레드 콤플렉스의 전파자와 그 피해자 9명을 집중 조명했다. 아홉 명은 박홍, 이문열, 김영삼 등 가해자라 할 수 있는 3명과 한완상, 김대중, 리영희, 조정래, 윤이상, 서준식 등 피해자라 할 수 있는 6명이다.


이 책이 다른 사회과학서나 인물평전과 다른 것은 `이념` 자체를 파고들기 보다는 사회병리현상의 하나인 레드 콤플렉스가 우리들 내면에 얼마나 깊숙이 감염돼 있는지를 다뤘다는 점이다.

레드 콤플렉스는 독재집단에게는`정치적 자산`과 같다. 그러나 민족, 국가차원에서 볼 때는 암과 같은 존재라고 저자들은 진단해 내고 있다. 또 레드 콤플렉스는 오히려 국가 안보에도 도움이 안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총론 "왜 레드 콤플렉스가 문제인가"에서 언론인 손석춘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친일파 언론으로 출발하여 해방 이후 생존본능으로 시작했다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적색 공포증 조장에 앞장선 한국언론을 고발한다.


본문에 들어가면 가해자 3명과 피해자 6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가해자 3명은 모두 한때는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지만 개인적 탐욕과 헛된 보복심으로 레드 콥플렉스의 가해자가 된 사람들이다.

"박홍 : 역사를 상대로 도박을 한 사제"에서 김진아는 1991년 폭압적인 노태우 정권 아래 민주투사들의 헌신을 "죽음을 사주하는 어둠의 세력" 등으로 몰아댔던 한때의 '민주총장 박홍'의 빨갱이 사냥을 통해 그 화려한 변식을 고발한다. 그는 극우언론이 만든 ‘연예인”이었으며, 권력의 속성을 빠르게 익히고 구사한 인물이었다.

"이문열 : 시대와의 불화"에서 최종옥은 이문열이 역사에 대해 개인적 보복을 가한 인물로 묘사한다.  그는 남로당 고위 간부였던 아버지의 월북으로 인하여 가정이 몰락하고 ‘빨갱이 가족’으로 지목되어 뿔뿔이 흩어져 해체되는 어려움을 겪은 유년기로 인하여 정치 문제는 본능적인 공포였기 때문에 스스로 허무주의자로 변호했다. 하지만 최종욱은 그가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보수주의자이면서도 수상쩍은 이론을 이용하여 자신을 어느 한쪽에도 기울지 않은 가장 중립적인 인사인 체하는, 대단히 자기 변명에 능란하고 영리한 지식인"이라고 규정한다.

"김영삼 : 고난의 시대에서 배반의 시대로"에서 김민웅은 김영삼의 좌절과 출로를 통해 그가 '우리의 자화상'임을 말한다. 김영삼은 권력욕이 가득하며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야당 정치인이 언제든지 변절할 수 있다는 산 교훈이라 할 수 있다.


피해자 6명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한완상 : 냉전의 덫에 걸린 자유주의자의 꿈"에서 김교만은 통일 총리 한완상의 예견된 좌절을 겪는 과정을 다룬다. 한완상은 동서냉전이 해체되는 시기에 등장한 김영삼 문민정권의 등장에 힘입어 통일부총리로서 의욕적으로 남북화해를 시도했지만, 냉전 해체와 문민정권 등장에 위기감을 느낀 공안세력의 ‘한완상 죽이기’와 북미간 핵갈등의 소용돌이를 해쳐나오지 못함으로써 좌절했다.

"김대중 : 김대중 죽이기는 끝나지 않았다"에서 김삼웅은 60년대 이후 김대중을 둘러싼 광기의 정치사를 보여준다. 친일파 반공극우주의자인 박정희와 친일파 언론은 부정부패와 권력찬탈을 위해 김대중에게 레드 콤플렉스를 덧칠해 수십년간 마녀사냥을 했다. 김대중은 1997년 합법적 선거로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그리고 죽은 뒤에도 여전히 친일파들이 씌운 '빨갱이, 간첩'이라는 색깔에서 온전하게 벗어나지 못했다.

"리영희 :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에서 강준만은 리영희의 진실을 위한 투쟁을 말해준다. 한평생을 ‘오로지 진실’을 위해 싸운 리영희에게 공안세력과 극우언론은 새깔 칠하기에 광분했다. 그러나 리영희는 휴머니즘에 입각하여,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 진실에 근거하여 오직 진실만을 추구한 저널리스트로 기억한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재량을 지니는 자율적인 인간의 창조를 위하여,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광신적 반공주의에 대해 저항적 입장에서, 군인 통치의 야만성, 반문화성, 반지성을 고발하기 위하여, 시대 정신과 반제 반식민지 제3세계 등에 대한 폭 넓고 공정한 이해를 위하여, 남북 민족간의 증오심을 조장하는 사회 혀실에 반발하면서 두 체제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다는 입장에서 글을 썼다”(리영희)


"조정래 : 두 벌의 시나리오와 두 통의 유서”에서 황광수는 조정래가 공안세력과 극우언론의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태백산맥>이라는 소설 작품으로 분단의 벽을 뛰어넘었다고 평가한다. 

"윤이상 : 좌절된 귀향의 꿈”에서 문부식은 윤이상을 "세계 속에 통일음악을 꽃피운 음악가”로 평가한다. 윤이상이 타향에서 독립적인 예술가로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만든 1967년의 '동백림 사건’은 그해 5월 박정희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을 누르고 3선 개헌을 위한 개헌선 확보를 위해 6월 총선에서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서울대생을 필두로 대학가의 학생 시위가 잇따르게 되었고, 박정희는 주권자들의 부정선거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동백림 사건’을 조작하여 터트린 것이다. 

2012년 대선 부정선거와 2013년 NLL 대화록 공개, 간첩조작 사건 그리고 내란조작 사건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분단 구조에 기반한 독재 권력은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이 반공주의는 그것을 합리화시켜 주는 이러저러한 ‘사건들’을 필요로 하며, 이러한 사건의 발생과 적발을 통해 권력은 자신의 기반을 강화해 간다는, 또 자본은 자신을 보호해 주는 권력의 이러한 권위주의 통치 아래 자본의 무한한 이해를 무서운 속도로 추구해 간다는 ‘먹이 사슬’이 성립하는 것이다.”(문부식)


"서준식 : 인간은 과연 존엄한 존재인가”에서 강준만은 인권전도사로서 서준식의 삶과 투쟁을 말해준다. 서준식은 1971년 형 서승 및 서로 무관한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박정희가 만들어 낸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에 7년간 옥살이를 하였고, 형기를 마친 후에도 반인권적인 전향 제도를 거부하고 10년간 더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는 한국 인권의 대부로 인정받는다.(서준식은 2000년대에 인권운동사랑방의 후배 활동가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개인적인 어려움도 겹쳐서 인권운동 일선에서 물러나 현재 외롭고 힘들게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ㅠ)


레드 콤플렉스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한 명 한 명에 대한 사례와 가해/피해과정을 읽고 있는데, 2014년의 레드 콤플렉스가 17년 이전과 비슷하다는, 아니 그 때보다 더욱 심해졌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특히 십수 년 전에는 김대중, 리영희, 서준식 등 수구세력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레드 콤플렉스와 맞서 싸우는 정치 지도자와 지식인들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는데, 2014년 현재는 유력 지도자는 커녕 그런 중량감 있는 분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 더욱 안타깝다.


군사정권 때의 반공이데올로기와 레드 콤플렉스는 민간정권에서도 여전한 위력을 발휘하여 책이 발간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분단 트러우마(종북 콤플렉스)라는 이름으로 이름만 바뀌어 이 땅을 온통 뒤덮고 있다. 극우보수세력에 대한 공포, 야권과 진보개혁세력 내의 권력욕과 분열이 종북이라는 마녀사냥에 대한 저항력을 상실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일반인들까지 저들의 공격에 무기력해지고 있다. 2012년 총선-대선의 패배, 2013년 부정선거 투쟁의 패배, 2014년 지빙선거와 보궐선거의 연이은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야권 분열을 가져온 내부의 레드(종북) 콤플렉스다.

더욱 얼척이 없는 것은 20여년 전에는 수구세력(극우보수세력)의 용공조작과 반공이데올로기 공세에 대해 제1야당이 전면에 나서서 방어막을 형성하며 싸웠는데, 지금은 제1야당 뿐 아니라 소위 진보개혁세력이라는 집단들 일부까지도 종북공세와 반북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여 함께 춤을 춘다는 것이다. 심지어 가끔은 먼저 나서서 칼을 휘두르기도 한다.


레드 콤플렉스와 종북공세의 희생양, 피해자는 겉으로는 일부 진보정당이나 진보세력이라고 보여지지만 실질적인 피해자는 대다수 민중이다. 노동자, 농민, 서민, 중소상공인 등 약자들인 것이다.

친일세력을 뿌리로 하여 군사쿠테타와 부정부패로 정치, 경제, 사법, 언론, 문화 등 대다수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극우보수세력의 유일무이한 무기가 바로 레드 콤플렉스이고 종북공세다. 국정원 부정선거와 세월호 참사처럼 아무리 그들이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부정부패를 일삼는다고 해도 "너도 종북이지"라는 한마디에 움추러드는 상황, 그런 허약한 정치세력은 민중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우리는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애를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특히 그분들이 얼마 되지도 않는 소수야당으로도 집권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리더쉽을. 그 리더쉽의 핵심 중 하나는 레드 콤플렉스에 굴하지 않고 야당과 진보세력의 중심에 서서 맞서 대항한 것이다. 그럴 때만이 레드 콤플렉스에 주눅들어 있는 일반인, 주권자들도 그 리더와 정치세력에 힘입어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레드 콤플렉스, 종북 콤플렉스를 전면에서 맞받아치지 않는 그 어떤 정치세력, 정치지도자도 한국인의 리더로 일어설 수 없을 것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 2014년 9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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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시대 임동진의 서재 8
토머스 페인 지음, 임동진 외 옮김 / 알토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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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평]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저, 박홍규 등 공역 <이성의 시대 The Age of Reason>을 읽고 / 2012. 10., 402쪽, 알토란

18세기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대혁명에 참여했던 하여 지지했던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 그는 서구에서 가장 유명한 두 번의 근대 혁명에 모두 뛰어든 드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근대 혁명에 대한 토머스 페인의 역할이나 참여보다 저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몇 권의 책에서 보여준 그의 놀라운 사상과 정치철학, 그리고 종교관이었다.
그의 저서 <상식 Common Sense>과 <인권 Rights of Man>가 근대 서구사회에 '상식'과 '인권'이라는 개념과 정의를 처음 일깨워 주었다면, 이 책 <이성의 시대>는 프랑스 혁명정부와 인민들, 그리고 종교인들이 썩어문드러진 기독교를 상식과 인권과 이성에 맞게 변하도록 재촉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서구 근대사회에서 '이성'이 자리잡기 위해 100년이 걸렸던 과정을 토머스 페인의 유골분실 사건으로 보여준 폴 콜린스의 <토머스 페인 유골분실 사건>을 읽고서 프랑스대혁명을 다시 공부하다보니 프랑스혁명에서 중세 카톨릭이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카톨릭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페인의 <이성의 시대>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과 페인의 유골이 서구 방방곡곡을, 구천을 떠돌면서 학대받은 이유가 바로 같은 책임을 알게 되면서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대혁명은 비단 절대왕정에 대한 항거에 그치지 않고 기성종교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다. 따라서 왕정의 전보과 동시에 프랑스 전역에서는 부패한 기성교회의 구습을 절멸시키기 위한 차원에서 사제들을 추방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토머스 페인은 이때 비단 프랑스에서 뿐만 아니라 당시 기독교가 지배하던 유럽전역과 미합중국을 상대로 하여서도 이제 종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이성을 찾아야한다는 계몽운동에 나설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결국 그것이 이 책의 집필로 연결된 것이다.

페인이 이 책을 집필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르네상스시대 이래 서구에서는 과학적 발명과 지리적 발견 등을 이루었고 이로부터 수학, 기하학, 물리학, 화학, 천문학 등이 발전되었다. 이런 모든 발견은 인간이 우주에서부터 물질과 생명에 이르기까지 만물의 질서를 탐구하고 그 원리를 생활에 응용하는 데에서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근대 계몽가들은 우주를 창조하고 질서를 부여한 신적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즉 무신론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신앙인이 유일신에게 기도하고 무조건 믿고 순종하면 복을 받고 천당에 간다는 식의 인격신 개념만큼은 철저히 부정했다. 토머스 페인도 이런 신관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유일신(one God) 이외에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 나는 인간의 삶이 끝난 후에도 행복이 있기를 바란다. 나는 인간이 평등하다고 믿으며, 종교적 의무란 올바른 일을 하고 자비를 베풀며 더 나아가 우리의 동료 피조물들을 행족하게 만들기 위하야 노력하는데 있다고 믿는다.”(p.05)
"나는 유대교당과 로마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와 마호멧 교회(Turkish Church)와 개신교회와 그 이외에 내가 아는 그 어느 교회의 교리(creed)도 믿지 않는다. 내 마음이 곧 나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이건, 기독교이건, 마호멧교이건 간에 나에게 제도권의 교회(national institutions of churches)는 하나같이 인류에게 겁을 주고 인류를 노예화하고 또 권력과 이익을 독점하기 위한 인간의 발명품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 뿐이다."(p.05)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인은 자신과 다른 종교인들과 신자들의 믿음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런 선언을 한다고하여 내가 나와 달리 믿는 사람들을 비난(condemn)코자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내가 나의 믿음을 가졌듯이, 그들 또한 자기의 믿음을 가질 똑같은 권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행복해지려면 정신적으로 스스로에게 충실할(faithful to himself) 필요가 있다. 불신(infidelith)이라 함은 믿거나 안믿거나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으로는 믿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믿는척 꾸미는데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스스로 믿지 않으면서 성직자가 되기 위하여 믿는양 가식을 꾸밀 정도로 자기마음의 순결성을 타락시키고 스스로를 돈에 팔아넘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면, 그런 사람은 이미 다른 어떤 범죄라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p.06)
마지막 문장은 한국 종교계에서 숱하게 나타나는 저질 종교인과 정치인들이 왜 그렇게 부패하고 타락했는지 말해주는 대목 같다.

페인은 이 책에서 중세 기독교의 기복신앙 등 인격신 개념과 성경의 모순과 부조리함을, 단지 성경의 내용과 구절에 기초하여 비판한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이고 논리적이고 치밀하게…
그는 구약성서에서 유대민족이 다른 족속을 정복하게 되면 남녀노소의 구분없이 심지어 갓난아기조차 가차없이 죽여버리는 잔악함에 치를 떨면서, 만약 그것이 구약에 적힌대로 하느님의 명령이었다면 그런 하느님은 악마에 다름아닐 것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내세운다. 그리하여 만약 인간이 우주를 창조하고 인간에게 삶과 존재를 허용한 넉넉하고 너그러운 신적 존재를 인정한다면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로 베풀 의무가 있으며, 심지어 동물에 대한 학대조차도 허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시대에 앞선 주장까지 한다.
그는 또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원수에게 한 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도 내어놓으라고 한 말은 비겁한 수작이라며 정면에서 반박한다. 원수에게 당할수록 더 사랑하라는 말도 결국 범죄를 조장하는 소리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인격신을 내세워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게하는 신앙체계로 서구에서 제도권에 진입한 기독교회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권력과 재물이며, 그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은 공포와 강제라는 것이다.

토머스 페인을 21세기 대한민국으로 초청한다면 그는 한국사회를 보며 무슨 말을 할까? 아마도 <이성의 시대>보다 더 강도 높은 비판을 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참사에 대처하는 행정부와 국회와 언론과 종교를 보면서 한국민중들에게 18세기 말 프랑스의 인민들처럼 혁명을 촉구하고 기존 권력을 타도하고 종교인들을 추방하라고 소리 높일 것이다.

[ 인상 깊은 문장 ]

“그러나 이런 것들을 무시하더라도, 만약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썼다는 복음서들이 마태, 누가, 마가, 요한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면 그 복음서들은 처음부터 협잡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 네 복음서의 역사기술이 뒤죽박죽이라는 점, 한 책에서 전하는 내용이 다른 책에서는 전혀 언급조차 되지않는다는 점, 네 복음서간에 서로 불일치하는 것이 수두룩하다는 점 등은 결국 이 책들이 기록하고 있는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도 한참 후에, 그것도 저자들간에 아무런 횡적 연락조차도 없이 각자 고립된 상태에서 마치 자기들이 이를 직접 경험한양 자기들 나름의 이야기를 꾸며낸 것에 불과하고, 사도들처럼, 서로 긴밀하게 공동생활을 영위하면서 써낸 글도 아니어서, 결국에는 구약에서처럼 책 제목에 붙여진 이름과는 동떨어진 사람들에 의하여 조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p.302)

“그리스도가 살았다는 때로부터 약 350년쯤 뒤에, 내가 말하고 있는 이런 부류의 글들이 다양한 사람들의 손에 흩어져 있었는데, 교회가 세속적 권력을 가진 성직자계급 내지 교회의 지배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것들을 수집해서 우리들이 지금 알고 있는 신약이라고 불리는 경전 속에 집어넣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수집한 것들 중에서 어느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어야 하고 어느 것이 될 수 없는지를 투표로 결정했다.”(p.331)

“인간이 만든 그 모든 종교의 체계들 중에서, 소위 기독교라는 것보다 더 전능자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인간에게 유익하지 못하고, 이성에 반하며 그 자체로 모순적인 것은 없다. 믿기에는 너무 불합리하고, 확신하기에는 너무 불가능한 것이 많고 실천하기에는 앞뒤가 모순되어서, 기독교는 감동을 주지 못하고, 단지 무신론자나 광신자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것은 권력의 추진체로서 독재의 목적달성을 위한 주구로 되고, 축재의 수단으로서 사제들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뿐이다. 보편적 인간의 선에 관한한, 그것은 당장 이 순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p370)

[ 2014년 8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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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사회계약론
장 자크 루소 지음, 정영하 옮김 / 산수야 / 2014년 8월
평점 :
판매중지


[서평]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저, 역 <사회계약론(The Social Contract) : 21세기를 이끌어 가는 모든 리더를 위한 장 자크 루소의 제안>을 읽고 / 2011. 02., 288쪽, 산수야


'세월호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해야할 일 중 하나가 스스로 나태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이라 다짐하며...'


프랑스혁명사를 공부하다 보면 당시 혁명가들 중 상당수가 이 책 <사회계약론>을 들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루소가 1761년에 썼던 책이 30년 가량 유럽 대륙 전역에 사상적 영향을 미쳤고 프랑스 뿐 아니라 미국과 영국, 독일 등 유럽 전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서구의 근대사상과 역사 나아가 현재까지 공부하기 위해서는 이 책을 더 이상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반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미국과 서구의 사상, 문화, 제도가 어디서 기원하고 전개되어 왔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18세기의 프랑스는 새로운 이상과 체제를 모색하는 전환의 시기였다.(당시 한반도와 동양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쪽은 왜 다른 역사가 전개되었는지...) 사회현상은 정치에 따라 좌우되므로 루소의 방대한 사상체계의 핵심은 정치 사상이 된다. 

프랑스의 절대왕정은 봉건적 토지 소유와 신분적 지배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십한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안고 있었다. 이 시대에 민중들과 함께 생활한 루소는 모든 사회악의 근원이 절대주의라는 사회제도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본성이고 자격이며, 인간으로서의 가치였다.


루소는 1749년 "본래 선하게 태어난 인간은 사회와 문명에 의해 타락했다."라는 명제로 논문 공모전에 응모했다. 그리고 5년 후에는 "인간의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이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된 것인가?"라는 명제의 논문 공모전에 응모했다. 그는 이 논문을 발전시켜서 1755년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발표하여 현대 사회의 타락과 불평등의 기원은 사회쟈도 자체에 귀착된다고 재시했다. 

불평등 기원에 대한 그의 주장은 "농업과 연금술에서 노동의 분할과 상호 의존관계를, 농작에서 소유가, 소유의 불평등이 부의 불평등을 가져왔으며, 부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법을 만들어 지배자로 군림한다. 결국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불평등이 확대되었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전제체제를 생겨나게 하여 사회의 불의가 극에 달하게 되었다."로 요약할 수 있다.


루소와 같은 학자가 있었고 그의 논문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학교와 학계, 정치문화계에서 거대한 한 편의 흐름으로 끊임없이 논의되고 탐구되기 때문에 서구사회는 18세기부터 지금까지 사회적 불평등 및 부의 불평등과 싸울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서구에 비하여 동양사회는 인권이나 인간평등론에 기초한 이론이나 주장이 제대로 자라나지 못한 채 19세기부터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탈에 직면한 셈이다. 제국주의적 침탈의 사상문화적 근거는 루소류의 사상보다 지배자들의 사상, 자본주의적 사상, 제국주의적 사상이 토대였던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노예가 되어 있으면서도 자기가 그들의 주인이라고 믿는 자들이 있다."

<사회계약론>의 첫머리에 나오는,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는 글이다.


루소가 이 책을 통해 힘의 근원, 정당한 권리, 만민평등, 주권자의 개념, 일반의지, 사회 상태 또는 국가 구성과 관련해 인간이 맺는 관계 그리고 '사회계약'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루소는 특히 '주권자'의 개념을 혁명적으로 설파함으로써 중세 이후 절대권력이라는 개념에 균열을 가져왔는데, 서구 대부분 지역에서는 <사회계약론>이 자유민권사상을 전파했다고 평가한다.


또한 그는 사회 구성과 인간 교육의 기본 원칙을 제시하였고, 주권자의 개념과 자유민권사상은 프랑스혁명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프랑스혁명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엄연히 신분제가 존재하던 당시로서는 너무나 혁명적인 사상이었기에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수많은 찬반양론의 중심에 서 있던 <사회계약론>의 자유민권사상과 이상적인 민주주의사회는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것을 시사하며, 자유, 정의, 평등, 법, 인권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그 맹아를 보이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정치학의 고전이다. 이 책은 루소의 모든 저작물 중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심오한 것으로 인간의 선한 본성과 천부적인 자유를 토대로 한 이상적인 사회 질서와 정부 수립을 논의하고 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통해서 개인의 행복에 대한 열망과 사회생활의 요구 사이에도 조화와 균형을 찾으려고 했으며, 참된 정치의 원리로 전체의사의 존중과 시민의 자결권, 그리고 주권을 제시했다. 또한 루소는 공동체에는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이 감수해야 할 희생을 결정지을 정당한 권리가 있음도 사회계약론을 통해 인정하고 있다.


한국애서 근대 제도라 할 수 있는 헌법이나 법률, 정치나 정당, 행정부와 입법부와 사법부 등애 관심을 갖거나 그 속에서 활동하고 싶은 이들은 근대 제도의 탄생과 전개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루소의 사상에 대해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다.

막연히 자신이 언론이나 방송을 통해 유명세를 탔다고, 돈을 벌어 사회에 공헌한답시고, 특정 정치인에게 줄을 잘 섰다고 하여 정치가 무엇인지, 정치사상이 무엇인지, 근대 제도의 근원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뛰어드는 이들은 아이들과 후손들을 위해 제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으면 한다.


[ 인상 깊은 대목 ]


"어떠한 인간도 자기 같은 인간들에 대해 자연적 권위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힘은 어떠한 권리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오로지 계약만이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합법적 권위의 토대로 남게 된다."(p.18)


"일본의 약장수들은 구경꾼들 앞에서 아이의 팔다리를 잘라 하나씩 공중으로 던져 올린 뒤 완전히 다시 합쳐진 아이가 살아서 떨어지게 만든다고 한다. 우리 정치 이론가들이 부리는 재주도 거의 이런 식이다. 장터에서 선보여도 될 만큼 능수능란한 솜씨로 사회라는 몸통의 팔다리를 절단한 뒤 재조립하기(그 방법은 알 수 없으나) 때문이다."(p.41~42)


"사전에 어떠한 계약도 없다면 선거가 만장일치도 아닌 다음에야 소수가 다수의 선택을 따라야 할 의무가 어디 있는가? 

다수결의 법칙도 그 자체가 이미 계약으로 이루어진 만큼, 적어도 한번은 만장일치의 결의가 있었음을 전제로 한다."(p.48)


"(인간의)주권은 일반의지의 행사이므로 결코 양도될 수 없으며, 주권은 오로지 집합적 존재이므로 그 자체에 의해서만 대표될 수 있다."(p.69)


"(인간의)주권은 양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분할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지는 전체적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p.72)


"법을 만드는 사람은 법이 어떻게 집행되고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행정권이 입법권과 결합된 것보다 더 나은 체제는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이 정부를 어떤 점에서는 불충분한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구분되어야 할 것들이 구분되지 않고 군주와 주권자가 같은 사람이 됨으로써 이를테면 정부 없는 정부가 만들어질 뿐이기 때문이다."(p.90)


"나는 또 여러 도시를 단 하나의 국가도시로 결합시키는 것은 언제나 좋지 않은 일이며, 이렇게 결합시키면 자연적 장애를 피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겠다. 작은 나라만을 원하는 사람에게 큰 나라의 폐단을 내세우며 반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큰 나라에 저항할 만큼의 힘을 어떻게 작은 나라에 부여할 것인가* 옛날에 그리스 도시들이 대왕에게 저항했고, 최근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오스트리아 왕가에 저항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만일 국가를 적절한 크기로 축소시킬 수 없다면 아직 한 가지 수단이 남아 있다. 즉 수도를 절대 허용하지 말고 정부를 각 도시에 번갈아 자리 잡게 하며, 그 나라의 신분을 대표하는 모든 의원을 정부가 자리 잡은 그 도시로 소집하는 것이다."(p.123)


"입법권은 주권자인 국민에게 속해 있으며 국민에게만 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p.131)


"그 자체의 본질로 전원 일치의 동의를 요구하는 법은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사회협약이다. 왜냐하면 시민적 협동은 가장 자발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나 스스로를 다스리고 있는 만큼, 어느 누구도 어떤 구실로도 그의 동의 없이는 그를 예속시킬 수 없다." 


"아이에게 가르칠 학문은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인긴으로서의 의무이다." - 루소 <에밀>


"법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적응하는 것을 가로막는 법의 경직성은 경우에 따라 법을 해로운 것으로 만들고, 그 때문에 위기에 처한 국가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 형식과 절차를 내세우다 보면 시간이 소요되어 이따금 상황에 적응하지 못할 때도 있다. 입법자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전부 다 예견할 수는 없다고 느끼는 것은 꼭 필요한 선견지명이다. 그러므로 정치제도를 확립하려다가 그 효력을 정지시키는 권한마저 제거해버려서는 안 된다. 스파르타인들도 그들의 법을 잠재운 적이 있었다."(p.163)


"정치생명의 원리는 주권에 있다. 입법권은 국가의 상징이고 행정권은 다른 부분을 움직이게 하는 두뇌이다. 두뇌가 사라져도 개인은 살아남을 수 있지만, 심장이 멈추면 죽는다. 국가가 존속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입법권에 의해서다"(p.187)


"상업 예술의 난립, 이득의 탐욕, 나태 안락의 욕망. 이것들은 개인적 봉사를 돈으로 바꾼다.

자유로운 국가에서 시민들은 의무를 면제받기 위해 돈을 내기는 커녕 오히려 의무를 다하기 위해 돈을 내고 모든 것을 자신의 두 팔로 한다" (p.197)


[ 2014년 6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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