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인간의 맛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역사를 '진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나는 역사를 '중용'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역사정칙주의(historicism)'라는 것은 인류 역사의 미래를 확정적으로 예견할 수 있다는 모든 망상을 의미한다. 물론 마르크시즘이나 공산주의도 그러한 망상의 한 전형이다. 기독교 종말론의 사관이나 헤겔의 변증법적 사관 또한 그러한 망상의 전형임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나는 인류 역사를 계급투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인간 존재를 '해방'의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자유주의자'도 아니며, '평등주의자'도 아니다. '중용'은 하나의 주의가 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나를 '중용주의자'라고 부르지는 않겠지만, 하여튼 나는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철저히 '중용'의 입장을 취한다. '중용'은 오직 자유와 평등을 포섭하는 가치로서만 우리의 심성에서 꽃을 피운다."(p.15)
 
도올의 <맹자, 사람의 길>을 읽고 도올의 동양고전 해석에 맛을 보았으니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책의 서문에서 위와 같은 도올의 '선언'을 접하니, 서양식 가치관에 회의적이었던 나로서는 이 책에 대해 적지 않은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나 역시 서구식 가치관에 부정적이다. 서구식 가치관은 아직도 너무 이분법적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사람이든 상황이든 '천사 : 악마'로 규정하고, 근대 가치관은 세상을 '진보 : 후퇴'로만 규정한다. 삶과 죽음, 좌파 대 우파, 정의와 불의, 착취와 억압, 적과 아군... 하지만 삶은 죽음을 안고 시작한 것이고, 좌파가 없이는 우파가 불가능하다. 여자 없이 남자가, 낮이 없이 어찌 밤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사람이나 세상을 나누게 되면 오히려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부정하는 꼴이라 할 수 있다. 자유 없는 평등이 어떻게 가능하며, 평등이 없이 어찌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겠는가. 그렇다면 서구식 가치관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관은 무엇일까? 동양고전에 대한 학습은 새로운 가치관을 찾기 위한 여정일 것이다.

<맹자>를 읽고서도 느낀 바지만, 이 책을 한 번 읽는 것으로 내가 <중용>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없다.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서구식 가치관과 학문, 문서 등에 익숙한 내가 수 천년간 이어져 내려온 동양식 가치관에 입각하여 '중용'의 지혜를 앍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논어>가 공자의 말과 대화를 그대로 정리한 것이라면,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공자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도올은 1장 '천명장(天命章)'에서 중용의 철학이 양 극단의 '중간'이라는 생각을 근대식 편견이고 단견이라며 배격한다. <논어>에 나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대목에 대해서도, 도올은 "'중용'이라는 덕성을 규정하기 위한 철학적 논술의 맥락이 아니라 제자들의 언행이나 위인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대체적인 경향성을 평론하는 단편적 표현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라 해석한다. 
도올이 해석하는 '중용'은 "직선의 가운데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위와 감정의 발현태의 원초적 저변을 형성하는 잠재태이며 그것은 직선적인 것의 중간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 대한 원융한 구심점 같은 것"이다. '중(中)'이란 "희(喜), 노(怒), 애(哀), 락(樂)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순결한 심적 에너지의 근원 같은 것이다. 미발(未發)이기 때문에 그것은 치우침이 없으며 분별심이 없으며 모든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즉, '가운데'가 아닌, 모든 감정이 동적인 평형(平衡)을 아루고 있는 원초적 상태와 같은 것"이다.(p.93/ 음.... 이처럼 이해하기가 무지 어렵다..ㅋ)
6장 '순기대지장(舜基大知章)'에도 '중용'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양단의 중앙이 아니라, 모든 극단의 상황들을 충분히 고려해보고 그 숙성된 상황 변수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결단이라는 뜻"(p.163)이다.

12장 '군자지도(君子之道)'와 '부부지우장(夫婦之愚章)'에는 내가 도덕시간에 배웠던 '삼감오륜(三綱五倫)'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도올은 명나라에서 전해진 '삼강오륜'은 애초 공맹사상에 없었다고 말한다. 원초적인 규정은 <중용> 20장의 '오달도(五達道)'인 군신, 부자, 부부, 곤제, 붕우관계다. 고대의 중국 유가사상가들은 인간관계를 이 다섯 관계로 통칭한 것이다. 사람은 혼자가 아닌 '인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장에는 동양식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부부관계의 중요성이 나타나 있다. "우리가 새삼 깨달아야 할 중대한 사실은 오륜을 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전체적인 종합적인 평면에 놓고 본다면, 그 가장 본질적인 관계는 부부관계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아버지와 엄마라는 부부관계 없이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부부관계는 부자관계, 형제관계에 선행하는 것이며, 가장 본질적인 관계가 된다." 
 
<중용>에 대한 도올의 현대적 재해석에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중용'은 부부관계가 자연적 당위성과 문명적 당위성의 합체적인 성격으로 본다. 도올은 "<중용>의 부부예찬은 세계문명사에 유례를 보기 힘든 선진적인 것. 더군다나 '일부일처제'를 전제로 하고 있다."(p.171~172)고 설명한다.
13장 '도불원인장(道不遠人章)'에서 <논어>의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에 대한 추가 해석은 서구식 가치관과의 비교 또한 훌륭하다. <중용>의 '시저기이불원(施諸己而不願) 역물시어인(亦勿施於人)'은 기독교 성경의 마태복음 7장 12절과 대비된다. 마태복음은 "자신에게 베풀어 보아 원치 아니하는 것은 또한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 또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Whatever you wish that men would do to you, do so them)"인데, '시저기이불원 역물시어인'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타인도 좋아하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사랑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사랑은 나를 기준으로 하는 '베품'이 아니다. 부정형의 명제만이 인간세에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p.198)고 설명한다.
17장 '순기대효장(舜基大孝章)'에서 '효(孝)'에 대한 개념도 조선 이후 한반도에서 받아들인 '효'와 다르다. 도올은 "효를 단순히 개인덕 덕성의 성취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효를 중국 인문문명의 전범을 세운 초창기 혁명가들의 너무나도 리얼한 사회적 덕성의 성취로 파악하고 있다", "혁명(革命)은 천명(天命)을 가는(革) 것이다. 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명(受命)이 필요하다. 수명이란 명(命)을 하느님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독(愼獨)과 수신(修身)을 통하여 성취하는 것이다. 그 신독과 수신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것이 바로 효(孝)이다.", "효는 본원적으로 생명의 창조를 위한 절대적 선(善)의 체험이다."(p.233)라고 설명한다.

23장 '기차치곡장(基次致曲章)에서 서양적 사고방식과 동양적 사고방식의 근본적 차이, 근대니 현대라는 개념이 동양에 무의함을 역설하는 대목도 특별하다. 질문의 중요성이 제기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너 요즈음도 마누라 패냐?" 누군가 갑자기 이렇게 물으면 뭐라 답해야 하는가? Yes or No? 평소에 아내를 패던 사람이라면 모르되, 근본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인간은 과연 근대적이어야 하는가? 인간의 역사은 서양사가 말하는 '근대(modern period)'을 구현해야만 하는가? ... 서양의 근대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기준은 종교적 가치와 결부되어 있다. 근대 이전이란 반드시 이성보다는 계시를 중시하고, 합리적 사유보다 비합리적 사유를, 개인의 자유의지보다는 신에게의 복속을 높게 평가했다. 이런 종교가 없던 사람들에게 '모던'이란 전혀 무의미한 언어일 수 있다"(p.294)
 
종합하면 이렇다. 중용은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중시한다. 하늘의 명령(天命)은 일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용의 사상은 일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삶의 자세에 인간의 길이 있고, 인간의 힘이 나오고, 인간의 맛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맛은 멋이다. 중용의 함양은 그 인간의 매력을 키우는 것이다.

<중용, 인간의 맛>은 도올이 2008년 발간한 <중용한글역주>를 어렵게 느낄 일반대중을 위하여 쉽게 쓴 책이다. 그러나 이미 나와 있는 <중용한글역주>의 요약본은 아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서도 그 전체의미를 새롭게 발전시킨 것이다. 중용사상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들어있고, 현대인의 삶에 짠한 도움을 주는 자기계발의 풍요한 내용이 번득이다. 그래서 사상가로서의 도올 김용옥 교수의 면모가 더 잘 발휘된 작품이다. 본문의 중국어 발음이 붙어있고(중국어 음운학 전공의 최영애 교수 고증), 또 정확한 한국어 발음이 붙어있어 암송에도 편리하다. EBS특강은 이 책을 기준으로 하여 진행된다.
도올선생의 EBS 방송강의와 함께, 이 책은 이러한 심오한 고전인 <중용>을 전 국민에게 이해시키고, 그들이 일상적 삶속에 매일매일 실천하게 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도올 선생은 이 책의 보급이 "우리나라를 “중용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거대한 장정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21세기 문명의 주축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동양 전통문명의 가치관 속에서 서양문명의 성과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관건이고, 그 핵심에 중용이 있다. 이 중용의 사상을 우리 국민이 선도하여 21세기 세계문명을 향도하여야 한다. 온 국민이 중용을 배워 익히는 나라, 곧 “중용의 나라”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고전학자이면서 사상가이다. 하지만 그는 골방에 박혀 학문만 파고드는 고루한 학자는 아니다. 이 땅의 민중들과 이 민족의 아픔과 미래를 걱정하는 따뜻한 인간이기도 하다. <중용, 인간의 맛>(2011. 9), <맹자, 사람의 길>(2012. 3), <사랑하지 말자>(2012. 8)를 읽으면서 느낀 점이다.(내가 동서양철학의 역사와 핵심을 꿰뚫지 못하는 관계로 도올의 '몸 철학'이 미래의 시대정신이 될 지 여부를 아직 헤아리기 어렵다...^^)
 
[ 2012년 10월 26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