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배를 접는 시간 - 한진중공업 3년의 기록
허소희 외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 [서평] 허소희, 김은민, 박지선, 오도엽 저 <종이배를 접는 시간 : 한진중공업 3년의 기록>을 읽고 / 2013. 5., 304쪽, 삶창


2011년 그 해 뜨거웠던 여름, 부산시 영도구에 자리잡은 한진중공업 조선공장은 삼복 더위의 열기도 눌러버린 '희망버스'의 열기로 뒤덮였다. '희망버스' 참가자들 대다수의 참여 동기는 아주 단순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우리가 게을러서인지 85호 크레인에 또 한 분의 여성 노동자가 올라가 있어요. 그대로 뒀다가는 옛날처럼 또 죽음을 맞이할 지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여기 오게 됐어요(차용택)"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싶고,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요.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고 빨리 내려와 좀 쉬셨으면 좋겠어요. 해고자들도 가족들도 쉬면서 일하면서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조서윤숙)"

즉, 또 다시 한진중공업에서 그리고 크레인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참가자들의 공감과 연민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결국 그들의 염원대로 김진숙 씨와 이용대 씨 등은 1년이 채 되지 않아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희망버스'는 2008년 촛불시위와 비슷한 면이 많았다. 온라인에서 몇 명에 의해 촉발되었고, 온라인 상으로 분위기가 고조되었으며 나중에 야당과 시민사회단체가 합세한 점이 그렇다.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이 참가자의 대다수를 구성했고, 특정한 정치적 목적이나 목표 없이 한진중공업 노동조합과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절박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6번이나 뭉쳤다. 
그리고 '희망버스'의 열기는 한진중공업 경영자의 부도덕성과 불법성을 여론화시켰고, 주요 정당과 국회 그리고 정부를 움직였으며 크레인에서 사람들이 무사히 내려오도록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김진숙 씨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크레인에 오르도록 만들었던 법적, 제도적, 정치적, 구조적, 문화적 근본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최강서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책은 한진중공업 경영자들과 정부기관의 잔혹한 역사를 기록한 르뽀다. 특히 그 중에서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년 간의 기록을 담았다. 사측이 정리해고 계획을 발표한 2010년부터 최강서 열사가 노조 사무실에서 목 매 숨진 후 66일 뒤에야 솔밭산에 안치된 2013년까지, 크레인 위의 김진숙과 사수대, 그리고 크레인 아래의 정투위와 가대위가 정리해고 철회를 위해 어떻게 싸워왔는지를 보여주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철회 투쟁 3년의 기록이다.
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세 가지다. "왜 김진숙과 한진 노동자들이 크레인에 올라가야 했는가?"와 "3년 동안 어떤 과정이 있었는가" 그리고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교훈을 남겨 주었는가?"라 할 수 있다.
한진중공업의 사례는 국내 기업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처지와 조건을 대표적으로 말해준다. 부산에서 가장 강력한 노동조합이라고 평가받던 한진 노동조합이 경영자와 정부기관, 언론으로부터 탄압받아온 것을 고려한다면 대다수 국내 노동자들의 처지가 어떠할지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이 땅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들 말하지만 한진중공업 3년의 기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정부와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이 규정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했고, 보호받지 못했으며 경영자,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법을 위반하며 부도덕과 불법을 일삼았으면서도 제대로 통제되지도 처벌받지도 않았다.


헌법과 법률에 시민들의 표현, 집회, 시위, 결사 등의 자유가 보장되는 이유는 과거에 그런 자유가 국가권력이나 기타 폭력으로부터 침해받아 왔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의 결사와 시위, 집회와 파업 등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은 자본가와 경영자로부터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역으로 노동자들의 집회와 파업이 헌법과 법률의 권리를 넘어선다면, 근거가 없고 피해자가 발생한다면 공권력에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그런데 자본가나 경영자들은 '경비 용역'이라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의 권리를 침해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폭력배를 동원했다. 노동자외 노조가 집회, 시위, 파업을 통해 회사 시설물에 피해를 끼치면 법에 호소하면 된다. 하지만 '시설 보호'와 '피해 염려'라는 명분으로 회사 내 관리자나 경비용역을 동원하여 노동자와 노조의 권리를 방해하는 것은 엄연히 불법행위이기에 공권력이 이를 저지하고 처벌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부와 경찰, 검찰, 부산시는 공공기관으로서 어떠한 의무도 행하지 않았고, 선거를 통해 무능과 부패, 부정과 부패를 용인받았다.

국내 노동운동이 얼핏 '과격'하고 '폭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경찰과 검찰, 그리고 국회와 사법부가 이런 자본가, 경영자의 불법과 폭력을 용인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스스로 권리를 지키고 대응하기 위해 폭력충돌이 빈발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한 일본제국주의자들과 그 하수인들에 대해 김구, 안중근, 이봉창, 김좌진이 폭력을 가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고 강정마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 <의자놀이>를 읽고 쌍용차 사태의 본질과 성격을 더 깊이 알게 되었듯이 이 책을 통해 수박 겉 핥기식으로 알았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을 둘러싼 이 땅의 자본과 노동자 현실을 좀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최재천 교수는 자신의 저서 <통섭적 인생의 권유>에서 "알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표현(행동)한다."고 했다.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땅의 현실에 대해 좌절이나 절망이 아니라 희망과 용기를 얻고 싶었다. 그리고 책을 덮은 후 나는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 진실의 힘을 믿고 노동자들의 순수함과 열정을 알고 시민들의 내면에 자리잡은 공감과 연민의 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 명의 신진작가와 르포작가 오도엽이 공동으로 출간 작업을 했다. 문장의 유혹과 작가의 상상을 과감히 버리고 사실의 힘이 주는 감동에 집중해 한 문장 한 문장을 써내려간 네 명의 저자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배를 짓듯 서로의 손을 포개어 한진중공업 3년의 역사를 함께 빚어냈다. 
끊임없이 약속을 깨려는 이들이 있을 때, 누군가는 약속을 위해 곡기를 끊어야 했고, 땅을 버리고 허공에 올라야 했고, 피 터지게 싸워야 했고,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 르포르타주는 약속과 배신 사이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며 진행되어온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역사이고, 오늘날 모든 노동자들의 역사이다. 
85호 크레인과 희망버스는 과거가 아닌 오늘이기에 이 르포르타주가 던지는 메시지는 감출 수 없는 대한민국의 불편한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 책의 집필 과정과 결과물은 이 시대 르포문학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좀 더 자세한 책의 내용은 내 개인 블로그에 5부로 나누어 따로 정리해 놓았다. http://blog.daum.net/hy2oxy/8691518

[ 관련 기사 ]

- 2013. 5. 한진중공업 3년의 기록, 종이배를 접는 시간 http://www.vop.co.kr/A00000635096.html

- (6차 희망버스) 2013. 1. 한진중공업에 모인 3000명 “죽음의 길, 멈추게 만들자” http://www.vop.co.kr/A00000584222.html

- (5차 희망버스) 2011. 10. 1박 2일의 가을소풍 끝나다.. "희망버스가 국회와 한진자본을 움직였다 "http://www.vop.co.kr/A00000438417.html  

- (4차 희망버스) 2011. 8. 4차 희망버스 5천여명 시민 참가속에 청계광장에서 개최 http://www.vop.co.kr/A00000427406.html

- (3차 희망버스) 2011. 7. '평화'로 꽃피운 3차 희망버스, 1박2일의 아름다운 '휴가' http://www.vop.co.kr/A00000420027.html

- (2차 희망버스) 2011. 7. 85호 크레인 1km 남기고 멈춘 희망버스.. 1만여 시민 “끝까지 우리는 달린다” http://www.vop.co.kr/A00000414625.html

- (1차 희망버스) 2011. 6. ‘트위터’가 한진중공업 '절망의 벽'을 무너뜨리다 http://www.vop.co.kr/A00000405892.html

 [ 2013년 6월 09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규홍의 한국의 나무 특강
고규홍 글.사진 / 휴머니스트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평] 고규홍 저 < 한국의 나무 특강 >를 읽고 / 2012. 11., 412쪽, 휴머니스트


세미나 교재로 채택되어 읽게 된 이 책은 '나무 이야기'라기 보다 '나무에 얽힌 한국인들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나무 인문학자'인 저자 고규홍은 지난 십여 년 동안 만난 우리 강산의 크고 오래된 나무들을 정리한 현장감 넘치는 기록이자, 나무에 스며든 우리 민족과 민중의 삶과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칼럼, 강연, 방송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나무는 늘 사람들 곁을 지켜왔지만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으면 의식하지 못하는 존재다. 하지만 나무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도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키며 시간의 흔적을, 그들의 희로애락을 자신의 몸에 새긴다. 
저자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단순히 식물이라는 연구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곳 사람들과 고락을 함께해온 존재, 즉 사람들의 조상이자 이웃, 친구처럼 대하며 나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그리고 이 땅의 크고 오래된 나무를 통해 인간들의 삶을 펼쳐 보인다.
조금 아쉬운 것은 저자의 이야기 전개와 해설에서 '한민족'이라는 역사적인 관점과 '민중'이라는 사회경제적인 관점이 부족한 점이다. 한반도에서 5백 년, 1천 년을 살아온 나무라면 결국 고려시대부터 조선,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쳐온 이 땅의 한민족과 민중들의 삶과 애환이 나무 속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저자는 단순히 전설이나 기록에만 의지하지 않고, 해마다 오랜 친구를 방문하는 양 나무를 찾아간다. 또, 나무뿐만 아니라 나무와 고락을 같이하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다. 
나무를 열정적으로 찾아다니며 마을사람들에게조차 잊혀가던 나무를 찾아내 천연기념물로 등재시키기도 하고, 60년 만에 꽃을 피운 나무의 소식에 반가워한다. 심지어는 더 크고 오래된 물푸레나무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존의 최고령 물푸레나무보다 나이가 2배 많은 수령 300살의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를 발견하기도 했다.

재산을 물려줄 자식이 없었던 노인이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지켜온 소나무에게 자신의 전 재산인 땅 2,000평을 물려준 이야기가 있다. ‘석송령’이라는 이 나무는 토지를 소유하고 토지대장에 이름이 올라가 재산세를 납부하고 마을 아이들에게 장학금까지 지급한다. 또 식민지 시대에 마을의 공동재산을 지키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나무에 사람처럼 이름을 지어주고 호적을 갖게 해서 공동재산을 지켜낸 예천의 ‘황목근’이라는 나무도 있다. 
댐 건설로 수몰위기에 처한 700살 된 은행나무를 살리기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옮겨 심은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부터 기묘사화로 좌절한 선비들의 한이 서린 나주 송죽리 금사정 동백나무, 천주교도들을 탄압하고 처형하는 교수대로 쓰여 수백 명의 죽음을 직접 겪어야 했던 서산 해미 읍성마을 회화나무 등 각 나무에 깃든 이야기는 기구하면서도 흥미진진하다. 
'백곡리 감나무'의 경우는 저자와 함께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한 감독이 아는 친구라서 저자의 이야기가 더 정겨웠다. 

나무에 깃들어 있는 민중들의 염원과 원한, 피맺힌 절규와 간절한 소망, 나무와 자연을 사랑했던 선조들의 마음. 그 이야기를 듣다보면 나무들을 찾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저자의 나무 사랑은 시골마을의 오래된 나무에만 머물지 않는다. 도시에서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버려진 나무의 가치를 알려 지켜낸 인천 신현동 회화나무 이야기, 대규모 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독극물이 주입되어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전주 삼천동 곰솔 이야기도 함께 들려준다. 
또한 살아 있는 나무만이 아니라 사라졌지만 마을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한, 죽어도 죽지 않은 나무들까지 빠짐없이 불러내 기록했다. 이런 나무 이야기에는 직접 발로 뛴 사람의 속내가 은은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지금 곁에는 어떤 나무가 있는지, 그와 함께한 사람들은 잘 지내는지를 궁금하게 한다.

책 속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나무를 찾고 또 찾은 저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 140여 컷이 함께 수록되었다. 사진 속 나무들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온 자신을 자랑하듯 다채로운 표정을 뽐낸다. 
본모습을 온전히 보여줄 때까지 8년을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나무가 자신의 모습을 오롯이 보여주었다는 용계리 은행나무 사진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감흥을 준다. 굶어 죽은 아이들의 무덤에서 자랐다는 전설을 지닌 이팝나무의 쌀밥처럼 피어난 꽃 사진은 보는 이를 울컥하게 만들고, 800년 된 제주도 비자림 숲 ‘조상목’의 모습은 그 시간의 흔적을 가늠케 한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은 그가 전해 주는 나무 이야기와 더불어 나무의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적인 이야기를 그려낸다.

앞으로 여행을 떠날 때는 꼭 이 책을 배낭 안에 포함시켜야겠다...^^

* 인상 깊은 문장 :

"사람보다 먼저 이 땅에 자리 잡고 사람보다 오래 사는 나무에는 사람살이가 새겨져 있습니다. 수백 년을 살아낸 노거수의 줄기에 새겨진 나뭇결에서 사람살이의 자취를 발견하는 건, 사람과 더불어 말없이 살아온 나무의 소중함에 대한 깨우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왜 이 자리에 심었을까? 나뭇결을 한창 바라보면, 나무는 서서히 나무껍질 깊숙이 감추어두었던 이야기를 하나둘 풀어냅니다."(프롤로그 중에서 p.8)

"저는 처음에 멀리서 나무가 보이면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거기서부터 천천히 나선형으로 돕니다. 물론 그게 여의치 않은 곳도 많긴 합니다. 한쪽이 낭떠러지라든가, 언덕으로 막혔다든가 하면 쉽지 않지요. 그저 가능한 한 그렇게 한다는 말씀인데요, 이 나무는 너른 논밭 한가운데 있어 제 방식대로 나선형으로 돌면서 관찰하기 아주 좋은 형편입니다. 차츰차츰 나무에 가까이 가면서 빙글빙글 돌면서 바라보면 나무가 얼마나 다양한 표정을 가졌는지 알 수 있게 돼요. 그러다가 나무 중심까지 다가서서는 나무의 오래된 연륜을 확인할 수 있는 줄기 표면, 수피를 오래 관찰하고 이번에는 직선으로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면서 바라보는 거지요. 그러니까 나무를 중심으로 해서 마치 거미가 집을 짓듯 옮겨 다니며 나무를 바라보는 겁니다."(';선한 사람살이의 표지로 살아온 800년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중에서 p.21~22)

"그들 앞에 우뚝 서 있는 회화나무에는 만일 배교하지 않으면 곧바로 매달리게 될 철사와 밧줄이 걸려 있었지요. 결국은 거기에 매달려 죽어야 한다는 위협이지요. 그러나 어수룩한 백성들은 선선히 배교를 허락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도대체 신앙이란 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죽음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에도 이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오랏줄에 매달려야 했지요. 머리채가 묶여 매달린 채, 신자들은 모진 매질을 당했으며 급기야 나무에 매달려 이승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중략)
나무가 이처럼 생사를 넘나드는 참혹한 아우성을 바라보아야 했던 건 순전히 처음 그가 자리 잡은 곳에 사람들이 감옥을 지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나무가 무슨 죄가 있어 그런 험한 일을 맡아야 했을까요? 오직 스스로 자리를 옮길 수 없는 나무가 처음 자리 잡은 그곳에 사람들이 감옥을 지었다는 것 외에 다른 요인은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나무는 말 한마디 못한 채 잔혹한 죽음의 현장을 지켜보고 그 아픔을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몸 안에 보듬고 고통의 모진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런 나무에게 여느 회화나무에서 볼 수 있는 기품이나 넉넉함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겠지요."(';교수대가 되었던 참혹한 기억이 스며든 나무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 익산 여산동헌 느티나무, 평택 팽성읍 향나무'; 중에서 p.232~233)

"나무 이야기라고 했지만, 사실 나무를 찾고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과정은 나무를 둘러싸고 살아온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와 어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무가 서 있는 아름다운 마을을 찾아가고, 그 마을에서 오래 살아온 노인들을 찾아뵙고 이런저런 나무 이야기, 혹은 마을 살림살이 이야기를 듣는 건 빠뜨릴 수 없습니다. 나무와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어느새 나무가 아무것도 모른 채 처음에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제 앞에 다가서 있음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는 일이 항다반사입니다. 그렇게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나무는 기쁨의 빛깔을 띠기도 했고, 어떤 때는 바라보기 힘들 만큼 한 많은 슬픔의 빛깔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결국은 사람 이야기인 셈입니다."(에필로그 중에서 p.407)

[ 2013년 4월 01일 ]




- 용계리 은행나무




- 석송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통섭적 인생의 권유 - 최재천 교수가 제안하는 희망 어젠다 최재천 스타일 2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서평] 최재천 저 <통섭적 인생의 권유 : 최재천 교수가 제안하는 희망 아젠다>를 읽고 / 2013. 03., 236쪽, 명진출판


저자인 최재천 교수는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 ‘통섭(統攝,Consilience)’의 개념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를 ‘통섭의 대부’라고 부르기도 한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통섭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지만, 대체로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아우르는 학문적인 노력쯤으로 이해하며 우리 삶과는 별 상관없는 개념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최재천 교수는 이번 책을 통해 삶의 방식과 태도의 개념을 담은 ‘통섭적 인생’을 우리에게 권유한다. 그는 통섭적 인생을 "자연의 일부가 되어 더불어 사는 삶, 사물을 달리 볼 줄 아는 능력, 깨어 있는 마음으로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적극적인 삶의 태도"라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삶의 방식임을 주장한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오랜 관찰과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신의 '통섭적 사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그의 발언을 12개의 항목으로 분류해 제시한다. 
생물 다양성, 그린 비즈니스, 의생학(자연을 표절하는 학문), 미래형 인재, 기획 독서, 여성 시대, 경계를 허무는 삶 등 최재천만의 독특한 시각이 담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통섭적 인생’이란 과연 어떻게 사는 삶인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맛보게 될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통섭적으로 산다는 것"의 첫 번째 의미는 자연의 법칙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사람도 결국엔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삶이라고 그는 말한다. 
두 번째 의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피카소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다. 피카소는 엄청난 다작을 통해 천재성을 발휘했다. 최재천 교수 또한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시도했던 피카소의 삶을 실천해 왔다. 한 우물만 파지 말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면서 다양한 분야에 몸을 담그다 보면 어느새 통섭적 인생을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21세기는 융합형 인재, 즉 통섭형 인재를 원하며, 그러한 인재가 되길 원한다면 먼저 통섭적 인생을 살기 위한 태도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사회적 발언은 자연과학의 내용과 과학적 방식을 적용하지 못하는 인문사회계열 전공자와 출신자들에게 많은 시사점과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실사구시 없는 학문이나 정치경제는 사상누각일 뿐이니까.
그리고 그가 한 말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알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표현한다"이다.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사랑하게된다는 것이며, 특히 보통은 무신경하게 흘려보내는 자연과 동식물, 어떤 사람이나 집단, 직업이나 활동을 구체적으로 잘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되고 그러면 표현하고 행동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내가 본 최재천 교수의 '통섭적 인생'의 긍정적인 면은 여기까지다. 나는 그가 자연과학자로서 부족한 인문학적 소양이 아직 일정 수준에 오르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그런 평가를 내리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사용하는 몇 가지 단어와 논리 때문이다.

그는 지구 생태계 전체가 다양성과 상호의존성으로 개체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함을 역설하면서도 '21세기 성공학'을 내세운다. 그리고 생물 다양성을 감소시키는 궁극적인 원인으로 이미 이론적으로 폐기된 맬서스의 '인구론'을 제시한다. 
나는 남보다 앞서 나가거나 더 많이 소유하거나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는 것을 '성공'이라 부르는 논리가, 인간 사회에서 '근대적인 성공과 패배'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고 생각하는 근대적인 세계관이라 감히 말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생물학적 세계관, 통섭적 세계관은 다양성과 상호의존성이 적용되는 인간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즉 다양성과 상호의존성(공생)에 기여하는 삶이 인간다운 삶이자 성공하는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잘못된 전제와 논리적 허점이 가득하다. 인구가 많아서 제3세계 10억 인구가 굶어죽는 것이 아니고 생물 다양성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엄청난 식량생산이 잘못된 사회경제구조로 인하여 일부 계층에게 독점되기 때문이고 사람이 아닌 사육용 동물의 먹이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생물 다양성은 '값싸고 다량의 동식물'을 기르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다국적 금융자본 때문인 것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세대 갈등의 징후에 대해 저자가 내놓은 해법에도 무언가 미진하다. "눈앞에 놓인 모든 것을 일단 거머쥐었다가 슬며시 조금씩 내놓는 50~60세대와는 달리, 20~30세대는 자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따지지 않고 달려가는 공감의 세대다. 20~30세대여, 앞 세대가 아닌 세계와 상대하라." 
50~60 세대 중에서도 '모든 것을 거머쥔' 계층이 있고 단칸방에서, 지하에서, 실업자로, 국민연금도 없이 고통받는 계층이 있다. 세대간 갈등을 부추기는 듯한 그런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20~30 세대는 앞 세대를 상대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앞 세대와 공감하고 상생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이해하고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계층간에 화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세계에 나가 다른 국가의 20~30 세대와 경쟁하라는 것이 과연 통섭적 인생관인지 잘 모르겠다.

[ 2013년 5월 03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 - 학벌없는 사회
학벌없는사회 외 지음 / 메이데이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강추!! [서평] '학벌없는 사회' 김상봉 외 7인 저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를 읽고 / 2010. 07., 296쪽, 메이데이


'학벌 철폐'와 그 대안으로서의 '대학평준화'는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이슈화하지 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한반도에서 1천 년이 넘도록 계속되어 왔던 '엘리트 통치'의 문화적 유전자가 강하게 잔존해 있기 때문일 것이고, 서구사회를 비롯하여 전 세계 정지사회 구조도  '엘리트주의'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한국사회 각 분야의 상층부 핵심 요직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장악하고 있는 SKY 학벌주의 세력이 기득권 여론과 반대 흐름의 여론까지 장악하고 있기 때문임을 예상할 수 있다. 실제 교육정책을 주무르는 정치권이나 정부관료, 기득권 언론사, 교육계 등에서는 '학벌타파'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그 폐해를 무시한다. 아니면 "사회구조의 문제가 해결되면 학벌주의 등 교육문제도 해결된다."라는 식으로 사회 전체 문제에 감추어 버린다.
그리고 다른 문제들과 달리 '학벌'에 의한 피해자는 아직 사회에서 자기 삶의 주체,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어린 학생들과 20대 청년들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학벌주의' 사회에서 학부모들은 개별화되어 잘못된 제도와 문화에 저항하지 못한다. 학생들의 교육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아빠, 할아버지, 삼촌, 아저씨는 20~30년 전 자신이 학교에 다니던 시절만 생각하면서 "세상이 이렇게 좋아졌는데 왜 공부를 안하지?"라는 정도의 의식 수준을 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학벌주의' 폐해는 서구의 '엘리트주의'와 다른 역사와 구조를 보이고 있기에 그대로 내버려둘 수 만은 없는 문제이다. 누군가는 그 심각한 피해와 폐해를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대안을 제시하고 요구하고 직접 시도해야만 한다. 학벌주의에 대해 문제의식이 있는 일부 학부모, 교사, 학생들의 경우에도 대안이 마땅치 않아 학교와 시장을 버리는 데 주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책의 저자는 한국 사회에 ‘학벌 철폐’와 ‘대학평준화’라는 화두를 최초로 던졌던 시민단체인 [학벌없는사회]이다. 그들은 이 책을 통해 ‘학교'와 '시장’을 넘어 ‘교육’의 근본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오랫동안 ‘교육상품론’을 해부해 온 [학벌없는사회]의 풍부한 분석과 성찰적 화두는 학교 현장의 3주체인 교사, 학생, 학부모에게 교육의 근본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학벌없는 사회]측은 책의 기획 취지를 "‘학교제도’와 ‘시장경쟁’을 비판하면서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며 변화의 시작점을 만들어보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학교제도’와 ‘시장경쟁’ 없는 교육은 가능할까?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 과감하게 ‘그렇다’고 말한다. 수능시험, 일제고사, 영어몰입교육, 국제중, 특목고 등 교육을 서열화하는 무수한 시도에 대해 학벌없는사회는 그 길은 모두가 죽는 길이며, 모두가 살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무한경쟁에서 살아남는 법. 그것은 이미 알고 있듯, 경쟁 속에 뛰어들지 않는 데 있다. 그 길은 다름 아닌 ‘학벌없는 사회’다. 여기 사람의 값어치가 그가 나온 학교로 매겨지는 사회가 있다. 강남 출신이 서울대생이 되는 우울한 사회. ‘교육인적자원부’가 교육행정부처 명으로 버젓이 이름을 내걸 수 있는 사회. 수능점수가 개인의 전부를 결정하는 현실은 ‘교육상품론’의 극단을 보여준다. 부모의 배경이 자녀의 인생을 결정하는 사회는 어마어마한 사교육 열풍을 만들어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슬픈 자화상이다. 
한국 사회에 ‘학벌철폐’와 ‘대학평준화’라는 화두를 최초로 던졌던 학벌없는사회가 이제 ‘학교와 시장’을 넘어 ‘교육’의 근본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자고 제안한다. 체제의 요구를 거부하는 ‘내부로의 망명’ 떠나기, 학교밖 청소년에 주목하여 다양한 학교밖 배움터를 만들어내기, 입사원서에 학력란 없애기 등은 ‘학벌없는 사회’가 건네는 새로운 탈출구 전략이다.
교육의 첫째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의 계발이다. ‘무한경쟁’과 ‘스펙쌓기’만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가 자신과 전체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교육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때 자유롭고 동등한 시민으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사회가 가능해질 것이다. 

책은 '학벌'이라는 큰 주제를 관통하며 내용상 대략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1부 [‘학교’를 버려야 한다]는 왜 ‘학교‘를 버려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오늘날의 학교는 학생들을 점수로 줄 세우는 국가 독점 학력인증기관이며, 일류대에 얼마나 많이 보냈느냐가 그 학교와 학생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학벌의 구조와 논리를 재생산해내는 기관이다. 거기선 교육이 아니라 반反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김상봉이 철학적 관점에서 자유와 주체성의 논의에 근거해 학교를 비판하고 ‘내부로의 망명’ 또는 자발적 ‘낙오자 되기’를 위한 강령을 제시하고 있다면, 채효정은 체험을 바탕으로 실제로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왜 학교를 나오는지, 그들은 거기서 어디로 가는지를 분석하고 학교밖 배움터의 필요성과 의미를 보여준다. 학교가 아니어도 갈 곳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제도권학교에 충격을 주고 건강한 변화를 이끌어 내기를 시도한다. 
학교와 학교제도에서 벗어나자는 저자의 주장은 이반 일리히의 <학교없는 사회 Deschooling Soceity>와 일맥상통하는 흐름이 존재한다. 일리히는 인간에게 교육이 필요하지만, 학교라는 제도가 교육을 독점하면서 교육의 원래 취지인 주체성과 자립성을 오히려 훼손시킨다고 주장한다.

1부 중  '내부로의 망명, 낙오자 되기'라는 소제목이 달린 부분은 김상봉 교수의 교육 철학과 제도교육에 대한 진단 그리고 방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라 개인 블로그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http://blog.daum.net/hy2oxy/8691477)

2부 [시장을 떠나야 한다]는 왜 시장을 떠나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학교는 시장이 될 수 없고, 교육은 상품이 아니고, 인간은 도구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홍훈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속에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 상정하는 교육과 상품의 유비를 비판하고, 이철호는 학벌사회인 한국에서 정부가 밀어붙이는 교육시장화정책은 학교교육의 문제들을 풀지 못하고 결국 사교육시장의 비대화를 초래했을 뿐임을 보여준다. 정세근은 고착된 대학서열체제가 대학교육을 붕괴시키고 나아가 국가경쟁력도 약화시킨다고 주장하며 학벌타파의 우선적인 실천으로 학력란 없애기를 제안한다. 경쟁을 할 때 이미 강자에게 유리한 규칙을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이 사회에서 하승우는 공생을 모색하며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기업은 더 공격적으로 학교와 자신과 거리를 좁히고, 학교가 더 상세하게 자신에게 봉사하며, 학교가 자신의 모습을 닮아가도록 시도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학교가 기업과 점점 동일시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대학의 총장이 학자라는 이미지에서 대기업 총수와 같은 이미지로 옮아가고 있다. 더 중요하게 기업의 목표가 이윤추구이지만 학교의 목표는 다르다는 종래의 생각에도 변동이 있다. 이런 보편적인 흐름에 특수성이 겹치면서 한국 사회에서 기업에 대한 학교의 예속이 급격히 진행되고 있다."(p.138)

"학벌이 정치경제적 가치로 환산되는 국가조직이 아니라, 정말로 능력과 창조성, 그리고 패기에 의해 운영되는 경쟁력 있는 선진국형 국가이길 젊은이들은 꿈꾸고 있다. 이 꿈은 입사원서에서 학력란을 없애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입사원서의 ‘학교명’이라는 빈칸은 실제로는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을 가로막고 있는 ‘학벌’이라는 원죄를 담는 그릇임을 우리 모두 인식할 때이다."(p.204)

3부 [교육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교육의 의미를 돌아본다. 
지식교육보다 앞서는 신체의 단련을 위한 체육교육의 실태를 살펴보고, 개별학과의 지식을 넘어서는 시민교육을 철학적으로 반성한다. 김재홍은 아리스토텔레스의[정치학]을 중심으로 교육이 왜 공공적이어야 하는지 시민교육이 어떤 함의를 갖는지 보여준다. 이병호는 우리나라의 체육교육을 해부함으로써 가장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교육이 근저에서부터 어떻게 왜곡되어왔는지 드러내준다. ‘보는’ 스포츠가 아니라 ‘하는’ 스포츠가 우리를 건강하게 하듯이, 자신과 전체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각자가 정치행위를 수행할 때만이 자유롭고 동등한 시민으로 이루어진 정치적공동체가 가능할 것이다. 철학 책 한 권 제대로 못 읽고 친구들과 공도 맘껏 못 차고 남을 사랑할 틈도 주지 않는 학교에서 모두를 위한 교육은 불가능하다. 학교는 변해야 하고 학교가 바뀔 수 없다면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서 교육을 다시 세워야 한다. 

“경쟁은 우리 사회를 행복과 풍요로움보다 절망과 빈곤으로 내몰고 있다. 이제는 그런 경쟁의 논리에서 벗어나 공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경쟁에서의 패배를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몰고 가는 헝그리 사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홀로 러닝머신을 뛰는 것이 아니다. 거리로 나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자기 목소리를 외칠 때 공생은 가능하다.”(p.221)

[ 2013년 4월 27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평등해야 건강하다 - 불평등은 어떻게 사회를 병들게 하는가
리처드 윌킨슨 지음, 김홍수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평] 리처드 윌킨슨(Richard G. Wilkinson) 저, 김홍수영 역 < 평등해야 건강하다 The Impact of Inequality : 불평등은 어떻게 사회를 병들게 하는가 >를 읽고 / 2008. 03., 392쪽, 후마니타스

저자의 논지는 책의 부제처럼 '불평등이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출판사가 책의 제목을 잘못 정한 듯하다. '평등해야 건강하다'라는 제목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책이 '육체적인 건강'을 다루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고, 문제해결의 방향을 '불평등 축소'가 아니라 '평등 지향'으로 왜곡(?)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얻을(배울) 수 있는 점은 네 가지다. 첫째는 사회적 집단(예 : 국가) 내에서 빈곤의 구조나 수준보다 (상대적인) 소득 불평등이 더 치명적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스트레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며, 셋째는 불평등이 빈자나 약자 뿐 아니라 모두에게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고, 넷째는 불평등을 축소하기가 쉽지 않지만 불평등 수준의 개선은 생각보다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 일본, 유럽 등 일인당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소위 선진국들에서 외형적, 물질적인 부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질병과 범죄 등 사회적 실패를 해결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여기에서 사회적 실패의 지표는 범죄율과 강력범죄, 우울증, 불안, 스트레스,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 사망율, 자살율, 사회적 관계 또는 사회적 자본지수, 건강지수, 행복지수 등의 악화를 말한다. 사회적 실패의 주요 사례는 주요 국가들, 특히 미국, 영국, 이태리, 구공산권 국가에서 나타나며 국가 내에서도 주별, 도시별로 큰 편차가 있다.
한국의 경우 OECD에 진입한 만큼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음에도 소득 불평등과 빈부 격차가 OECD 평균보다 심한 데다가 점점 더 그 격차가 커지고 있기 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

연구 초기에 저자가 고민한 지점은 "사회적 실패를 가져오는 결정적인 요인이 빈곤인가, 불평등인가"였다. 저자는 주요 국가들간 그리고 국가 내의 주와 도시들간 통계수치를 조사한 후 결정적인 요인이 '불평등'이라 결론을 내렸다. '불평등'의 출발점과 토대는 소득 불평등이다. 국민소득이 아주 작은 국가라 하더라도 소득 불평등이 작을 경우에는 미국 각 도시들보다 사회적 실패가 적다.
그는 책 속에서 20세기 초의 통계와 연구결과 뿐 아니라 1960년대 이후의 장기적인 통계와 연구조사 결과랄 토대로 자신의 분석과 주장의 근거를 보여준다. 한국의 경우 그가 70~80년내 소득 불평등 격차가 줄어드는 통계수치를 반영한 덕분에 소득 불평등이 양호한 국가로 분류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속하게 심각해진 불평등 통계가 반영되지 않은 셈이다.

저자는 소득불평등이 어떻게 사회적 실패로 이어지는지 메커니즘을 연구했다. 소득 불평등이 클수록 사회적 관계의 질과 사회적 자본이 악화됨을 보여준다. 물리적인 소득 불평등이 사람들에게 사회적 관계를 악화시키면서 생물학적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켜 궁극적으로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는 보건 연구성과를 적용하여 만성 스트레스의 뿌리가 되는 심리사회적 위험 요소는 '낮은 사회적 지위'와 '빈약한 사회적 관계', 그리고 '초기 아동기의 경험'임을 밝힌다.
'낮은 사회적 지위'는 물질적 생활수준 뿐 아니라 멸시당하는 느낌, 사회적 위계서열에서 열등한 위치에 놓여있다는 느낌, 종속감과 낮은 통제력처럼 사회적 지위가 낮아서 생기는 모든 사회적 감정을 포함한다. 이는 한국의 경우 봉건적인 문화와 군사독재 문화의 잔재로 인하여 일반적인 직장과 사회조직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며 물질적 지위가 비정규직, 일용직, 단순노무직, 재하청구조, 교육 및 자산 수준에 따라 더욱 심한 것이 현실이다.
'빈약한 사회적 관계'는 친구가 없고, 독신생활을 하며, 사회적 연결망이 허술하고, 참여하는 공동체가 없는 상황을 말한다. 가족 붕괴 현상이 심해지고, 1인 가구가 급속하게 늘어나며, 개인주의적 문화가 확신되는 한국의 상황에도 시사점이 큰 부분이다.
'초기 아동기의 경험'은 전체 생애에 걸쳐서 스트레스와 건강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출생 전후의 스트레스 경험을 말한다. 이런 초기 아동기의 경험이 어떠했는지에 따라서 각 인간이 비슷한 사회적 환경에 대처하는 방법이 달라진다. 이는 소득 불평등에 따른 스트레스가 부모와 아이를 통해 장기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심각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소득 불평등'과 '사회적 전략'에 대한 저자의 주장도 크게 유익하다. 그는 서열이 확실한 관계에서 사람들 사이에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전략과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전략이 크게 다르다고 설명한다. 전자는 당연히 권위적, 위계적이고 남성중심적, 가부장적이며 억압적, 폭력적일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은 상위계층에 머리를 조아리면서 동시에 상위계층에게서 당한 피해나 상처를 자신보다 아래계층에게 전가하는 것이다.('자전거 타기 반응'이라는 사회학의 용어가 있음) 문제는 소득 불평등이 심한 사회와 서열사회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강하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학교 폭력이나 가정 폭력, 어린이나 여성에 대한 성폭력 증가, 묻지마 폭력 등은 이런 관점에서도 파고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처럼 무한경쟁을 유도하는 사회구조와 방식, 문화라면 하층, 약자층 뿐 아니라 이들에게 억압을 가하는 중간계층, 중간계층을 억압하는 상위계층까지도 온갖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물론 최상위 계층으로 올라갈수록 스트레스나 억압은 줄어들테지만... 따라서 한국 내에서 최상위 1%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99%는 억압이나 스트레스의 강도나 수준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스트레스와 사회적 관계, 사회적 지위 등으로 인하여 악영향을 받는 취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여러가지 통계와 실험 결과들을 통해 소득 불평등의 격차를 조금이라도 개선시키는 것이 당사자들의 스트레스 완화에 크게 기여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회경제 구조를 바라보고 분석하는 데 있어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시각이 실질적인 문제해결보다 탁상공론에 그치고 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내에서 논의되는 경제 민주화나 복지국가 담론의 근거는 헌법 상의 기본권이나 지속가능한 경제발전, 공정함이나 공평함이다. 하지만 저자의 설명처럼 구체적인 사회적 병폐와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소득 불평등 완화'라는 관점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사람들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자신의 문제와 소득 불평등의 문제를 직접 연관시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소득 불평등 문제를 여론화시키고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 과정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연방공화국인 미국이나 유럽 등과 제도나 문화, 역사가 크게 다르기 때문에 광역 시도별 소득불평등과 건강이나 사회적 자본, 범죄율 등의 데이터를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한국 내 관련 통계들이 객관적으로 조사된다면 저자의 연구성과를 한국의 사정에 맞게 적용하여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이상적인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 '평등한 세상'만을 꿈꾸며 힘들게 끝없이 추구하는 것보다 현재의 소득 불평등 격차를 더 이상 늘리지 않도록 하고 조금씩이라도 개선시키는 것이 한국사회 전체를 위해 단기적, 실질적으로 필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분석 결과는 정치적인 분야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소득 불평등과 위계적인 사회문화는 스트레스와 불안은 사람들에게 개인 또는 가족 이외의 사람에 대한 관심과 협력을 멀리하고 상위계층의 가치관에 복무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작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 결과를 분석함에 있어서도 일정 부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저소득층의 보수정당 후보 투표 성향 관련하여...) 다시 말하자면, 일부 사람들이 빈부 격차가 더 커지고 빈곤층이 늘어나면 보수정당에게 불리하고 좌파 정당이나 진보세력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의견을 표명하는데, 저자의 분석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도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빈곤은 단지 재화의 양이 작다는 사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빈곤은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빈곤은 사회적 지위다" (마샬 샬린스)
"사회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치열한 서열체계 속에서 아주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동일시하며, 자신의 지위를 잃거나 거부당하는 위험을 최소화하기위해 복종이나 다른 퇴행적 회피행동을 보인다" (길버트 P)

[ '자전거 타기 반응' ]

 개코원숭이는 서열 따지기에 매우 민감하다. 위계질서와 자존심에 죽고 산다고 할까. 그렇다 보니 그 사회에선 폭력이 일상화할 수밖에 없다. 서열은 폭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다. 이놈들은 강자에게 얻어터지면 약자에게 반드시 화풀이를 한다. 특히 수컷 사이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우두머리에게 된통 당한 중간 서열의 수컷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이제 막 성장기가 끝나가는 수컷을 못살게 군다. 공격받은 이 젊은 수컷은 어른 암컷에게 소리를 내지르고, 이 암컷은 다시 어린원숭이를 물어뜯는다. 그리고 어린 원숭이는 새끼 원숭이를 찾아가 작신작신 두들겨 팬다.
이것이 어찌 원숭이 사회만의 일일까. 불평등이 심하고 서열의식이 강해지면 인간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한다. 크든 작든, 사회에서 가정까지 두루 나타나는 게 약자 학대와 화풀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전위된 공격 행동’이라고 부른다.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억압한 사람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다른 대상에게 분노를 전가해 표현하는 행동이다.

상위서열에게서 얻은 상처를 하위서열 학대로 치유하는 건 교도소에서도 일어난다. 이곳은 사회에서 가장 무시당했거나 업신여김 받았던 사람들의 집합소다. 이들 역시 상처 입은 우월감과 자존심을 회복시켜 줄 대상을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출구는 어디에나 있는 법. 격렬한 지배 경쟁과 폭력에 내몰린 이들은 만만한 상대로 성범죄자를 곧잘 선택한다. “적어도 나는 저 개자식보다 낫다”는 심리가 그들에게 열등감을 털고 우월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평등해야 건강하다>의 저자 리처드 윌킨슨은 이런 현상을 ‘자전거 타기 반응’이라는 말로 명쾌하게 정리한다. 물론 이 용어는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의 저서 ‘권위주의적 인성’에서 빌려왔다. 이 용어는 사회 위계적 관계를 경주용 자전거 타기에 빗댄 것이다. 아래(하급자)로는 마구 발길질을 해대면서도 위(상급자)로는 허리를 굽실거리고 머리를 조아리는 경주자의 모습을 연상하면 되겠다.
이는 개인과 집단 심리에 그대로 적용된다.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에게 무시당하면, 업신여길 개인이나 집단을 찾아 폭력을 휘두르거나 차별적 언행을 퍼붓는다. 자신의 우월성을 제삼자에게서 보상받아 잃어버린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남대문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이랄까.

최근 어린이와 여성을 상대로 한 강력범죄가 잇따라 발생해 충격을 던진다. 안양 초등생 납치·살해 사건, 군포 부녀자 실종 사건, 이호성의 네 모녀 피살 사건, 일산 초등생 납치미수 사건 등이 끊이지 않는다. 급기야 대통령까지 일선에 나섰고, 아동대상 성범죄자를 사회와 격리시키는 ‘혜진·예슬법(法)’도 만든다고 한다.
이들 사건의 공통점은 사회 하층부로 밀려 소외된 사람들이 자기보다 약한 어린이나 여성들을 희생양 삼아 폭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희생자는 가해자와 직접 관계가 없거나 그에게 전혀 피해를 입히지 않았으면서도 비극의 주인공이 돼버렸다. 여론은 이들 사건에 대해 거의 한결같이 개인적 폭력과 그 잔인성에 초점을 맞춘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을 텐데, 결과만 주목할 뿐 그 원인은 외면하는 셈이다. 패자 또는 낙오자를 양산해내는 사회적 폭력과 그 구조에 눈을 감는다면 유사 사건은 재발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때그때 증상만 완화하는 대증요법으론 근본치유가 어렵다는 얘기다.
그럼 점에서 윌킨슨의 진단과 처방은 귀 기울일 만하다. 소득격차는 불평등을 가져오고 심화한 불평등은 반드시 극단적 서열 사회를 초래하며 이는 폭력의 일상화로 이어진다. 빈곤지역일수록 폭력이 만연하고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회적 관계는 형편없이 나빠져 각종 범죄가 빈발한다는 것이다.

늘어가는 각종 강력범죄는 점점 뚜렷해지는 사회 양극화의 우려스러운 단면이기도 하다. 불평등이 심해지고 서열화가 강고해지면서 사회는 수평적 협력보다 수직적 경쟁으로 치닫게 마련이며 이런 환경에서 ‘위’에 짓눌리고 ‘아래’를 짓밟는 ‘자전거 타기’는 더 험해질 수밖에 없다. 서열사회는 높든 낮든 모두를 폭력의 피해자로 전락시킨다.
범죄 예방과 단속도 철저히 해야겠지만 좀 더 근원적인 발생 원인과 치유책을 찾는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 하굣길 책임은 아예 사설경비 업체가 맡고, 여성들이 어둡거나 한적한 길을 마음 놓고 걷기도 더 힘들어질지 모른다. 인간이 개코원숭이가 아님을 입증할 지혜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http://blog.daum.net/david872/15099394)

[ 2013년 01월 04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