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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배를 접는 시간 - 한진중공업 3년의 기록
허소희 외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3년 5월
평점 :
추천 [서평] 허소희, 김은민, 박지선, 오도엽 저 <종이배를 접는 시간 : 한진중공업 3년의 기록>을 읽고 / 2013. 5., 304쪽, 삶창
2011년 그 해 뜨거웠던 여름, 부산시 영도구에 자리잡은 한진중공업 조선공장은 삼복 더위의 열기도 눌러버린 '희망버스'의 열기로 뒤덮였다. '희망버스' 참가자들 대다수의 참여 동기는 아주 단순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우리가 게을러서인지 85호 크레인에 또 한 분의 여성 노동자가 올라가 있어요. 그대로 뒀다가는 옛날처럼 또 죽음을 맞이할 지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여기 오게 됐어요(차용택)"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싶고,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요.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고 빨리 내려와 좀 쉬셨으면 좋겠어요. 해고자들도 가족들도 쉬면서 일하면서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조서윤숙)"
즉, 또 다시 한진중공업에서 그리고 크레인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참가자들의 공감과 연민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결국 그들의 염원대로 김진숙 씨와 이용대 씨 등은 1년이 채 되지 않아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희망버스'는 2008년 촛불시위와 비슷한 면이 많았다. 온라인에서 몇 명에 의해 촉발되었고, 온라인 상으로 분위기가 고조되었으며 나중에 야당과 시민사회단체가 합세한 점이 그렇다.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이 참가자의 대다수를 구성했고, 특정한 정치적 목적이나 목표 없이 한진중공업 노동조합과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절박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6번이나 뭉쳤다.
그리고 '희망버스'의 열기는 한진중공업 경영자의 부도덕성과 불법성을 여론화시켰고, 주요 정당과 국회 그리고 정부를 움직였으며 크레인에서 사람들이 무사히 내려오도록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김진숙 씨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크레인에 오르도록 만들었던 법적, 제도적, 정치적, 구조적, 문화적 근본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최강서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책은 한진중공업 경영자들과 정부기관의 잔혹한 역사를 기록한 르뽀다. 특히 그 중에서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년 간의 기록을 담았다. 사측이 정리해고 계획을 발표한 2010년부터 최강서 열사가 노조 사무실에서 목 매 숨진 후 66일 뒤에야 솔밭산에 안치된 2013년까지, 크레인 위의 김진숙과 사수대, 그리고 크레인 아래의 정투위와 가대위가 정리해고 철회를 위해 어떻게 싸워왔는지를 보여주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철회 투쟁 3년의 기록이다.
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세 가지다. "왜 김진숙과 한진 노동자들이 크레인에 올라가야 했는가?"와 "3년 동안 어떤 과정이 있었는가" 그리고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교훈을 남겨 주었는가?"라 할 수 있다.
한진중공업의 사례는 국내 기업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처지와 조건을 대표적으로 말해준다. 부산에서 가장 강력한 노동조합이라고 평가받던 한진 노동조합이 경영자와 정부기관, 언론으로부터 탄압받아온 것을 고려한다면 대다수 국내 노동자들의 처지가 어떠할지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이 땅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들 말하지만 한진중공업 3년의 기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정부와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이 규정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했고, 보호받지 못했으며 경영자,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법을 위반하며 부도덕과 불법을 일삼았으면서도 제대로 통제되지도 처벌받지도 않았다.
헌법과 법률에 시민들의 표현, 집회, 시위, 결사 등의 자유가 보장되는 이유는 과거에 그런 자유가 국가권력이나 기타 폭력으로부터 침해받아 왔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의 결사와 시위, 집회와 파업 등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은 자본가와 경영자로부터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역으로 노동자들의 집회와 파업이 헌법과 법률의 권리를 넘어선다면, 근거가 없고 피해자가 발생한다면 공권력에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그런데 자본가나 경영자들은 '경비 용역'이라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의 권리를 침해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폭력배를 동원했다. 노동자외 노조가 집회, 시위, 파업을 통해 회사 시설물에 피해를 끼치면 법에 호소하면 된다. 하지만 '시설 보호'와 '피해 염려'라는 명분으로 회사 내 관리자나 경비용역을 동원하여 노동자와 노조의 권리를 방해하는 것은 엄연히 불법행위이기에 공권력이 이를 저지하고 처벌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부와 경찰, 검찰, 부산시는 공공기관으로서 어떠한 의무도 행하지 않았고, 선거를 통해 무능과 부패, 부정과 부패를 용인받았다.
국내 노동운동이 얼핏 '과격'하고 '폭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경찰과 검찰, 그리고 국회와 사법부가 이런 자본가, 경영자의 불법과 폭력을 용인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스스로 권리를 지키고 대응하기 위해 폭력충돌이 빈발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한 일본제국주의자들과 그 하수인들에 대해 김구, 안중근, 이봉창, 김좌진이 폭력을 가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고 강정마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 <의자놀이>를 읽고 쌍용차 사태의 본질과 성격을 더 깊이 알게 되었듯이 이 책을 통해 수박 겉 핥기식으로 알았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을 둘러싼 이 땅의 자본과 노동자 현실을 좀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최재천 교수는 자신의 저서 <통섭적 인생의 권유>에서 "알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표현(행동)한다."고 했다.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땅의 현실에 대해 좌절이나 절망이 아니라 희망과 용기를 얻고 싶었다. 그리고 책을 덮은 후 나는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 진실의 힘을 믿고 노동자들의 순수함과 열정을 알고 시민들의 내면에 자리잡은 공감과 연민의 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 명의 신진작가와 르포작가 오도엽이 공동으로 출간 작업을 했다. 문장의 유혹과 작가의 상상을 과감히 버리고 사실의 힘이 주는 감동에 집중해 한 문장 한 문장을 써내려간 네 명의 저자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배를 짓듯 서로의 손을 포개어 한진중공업 3년의 역사를 함께 빚어냈다.
끊임없이 약속을 깨려는 이들이 있을 때, 누군가는 약속을 위해 곡기를 끊어야 했고, 땅을 버리고 허공에 올라야 했고, 피 터지게 싸워야 했고,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 르포르타주는 약속과 배신 사이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며 진행되어온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역사이고, 오늘날 모든 노동자들의 역사이다.
85호 크레인과 희망버스는 과거가 아닌 오늘이기에 이 르포르타주가 던지는 메시지는 감출 수 없는 대한민국의 불편한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 책의 집필 과정과 결과물은 이 시대 르포문학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좀 더 자세한 책의 내용은 내 개인 블로그에 5부로 나누어 따로 정리해 놓았다. http://blog.daum.net/hy2oxy/8691518
[ 관련 기사 ]
- 2013. 5. 한진중공업 3년의 기록, 종이배를 접는 시간 http://www.vop.co.kr/A00000635096.html
- (6차 희망버스) 2013. 1. 한진중공업에 모인 3000명 “죽음의 길, 멈추게 만들자” http://www.vop.co.kr/A00000584222.html
- (5차 희망버스) 2011. 10. 1박 2일의 가을소풍 끝나다.. "희망버스가 국회와 한진자본을 움직였다 "http://www.vop.co.kr/A00000438417.html
- (4차 희망버스) 2011. 8. 4차 희망버스 5천여명 시민 참가속에 청계광장에서 개최 http://www.vop.co.kr/A00000427406.html
- (3차 희망버스) 2011. 7. '평화'로 꽃피운 3차 희망버스, 1박2일의 아름다운 '휴가' http://www.vop.co.kr/A00000420027.html
- (2차 희망버스) 2011. 7. 85호 크레인 1km 남기고 멈춘 희망버스.. 1만여 시민 “끝까지 우리는 달린다” http://www.vop.co.kr/A00000414625.html
- (1차 희망버스) 2011. 6. ‘트위터’가 한진중공업 '절망의 벽'을 무너뜨리다 http://www.vop.co.kr/A00000405892.html
[ 2013년 6월 0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