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 

  나나미는 이 책을 위의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덮고 나서 그의 말을 한 군데 수정해본다.  

  신이 그것을 원하실까? 

  십자군 전쟁을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한 마디로 십자군 전쟁을 요약하는 것은 너무 오만하고, 무리한 일이 아닐까? 나나미가 말했듯이 십자군 전쟁은 중세의 종교적인 광기와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 거기에 왕권과 교황권, 그리고 봉건 영주들의 여러가지 정치적인 문제들이 미묘하고 복잡하게 얽혀서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신이 그것을 원하셨다는 말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모든 것을 신에게 책임지우는 것은 종교적인 입장을 떠나서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  

  혹자는 저자의 필력이 쇠퇴한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판단하기도 한다. 그가 로마인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준 소설적인 재능을 기대했다면 충분히 그럴만도 하지만 난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 그가 소설처럼 써 내린 로마인 이야기보다는 비교적 역사적인 사료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이 책이 읽기에는 더 역동성이 떨어지고 무미건조하지만 역사가가 아닌 소설가로 평가를 받는 그의 오명을 약간은 벗겨주지 않을까?  

  책에 등장하는 중세의 영웅들(이슬람의 입장에서는 침략자이겠지만)의 파란만장한 인생, 화려한 영웅담, 그리고 정치적인 센스, 굳건한 종교적인 신념이 그들의 인생을 우리의 기억 속에 되살려 놓는다. 그들이 걸어갔던 행보가 어느 입장에서 보는지에 따라서, 그리고 어느 시대에 보는지에 따라 그들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겠지만 한 가지 신념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어 내는 그들의 굳건한 모습이 다만 부러울 뿐이다. 이 사람들에 비하면 부시에 의하여 저질러진 이라크 침공은 십자군 전쟁을 패러디한 짝퉁 일뿐이요, 속내가 너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세련되지 못한 행위이다. 자본이라는, 자원이라는 속내를 솔직히 드러냈다면 욕을 덜 먹지 않았을까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해본다.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해본다. 첫째는 과연 신의 뜻이란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십자군 이야기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형민우씨의 프리스트라는 만화를 다시 봤다. 얼마 전에 할리우드에 의하여 영화로 제작되어 유명세를 탔지만 영화와 원작 만화를 모두 본 나로서는 그 영화는 원작에 대한 테러 수준일 뿐이다. 원작에 담겨 있는 믿음에 대한 고뇌와 고민, 의심은 기독교 신앙을 거의 포기할 뻔 했던 나에게 깊이 곱십어 볼만한 내용이다. 그 만화를 그리는 가운데 장모님과 아내가 옆에서 걱정하면서 잔소리를 했다는 형민우씨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믿음의 근본부터 흔드는 내용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음미하면서 읽어볼 가치가 있는데 곳곳에 숨겨져 있는 신의 뜻에 대한 그의 견해 때문이다. 이반 아이작이라는 신부가 테모자레를 결계에서 풀어 주는 장면에서 신의 뜻의 운운하는 다른 신부에게 던진 말이 참 의미 심장하다. 

  "신의 뜻을 오판하는 것은 가장 큰 죄악이야-이반 아이작(프리스트 6권 중에서)" 

  그렇다. 세상에서 가장 큰 범죄는 신의 뜻을 오판하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과 신념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 놓고 신의 이름을 덮어 씌우는 것만큼 큰 죄악이 어디있겠는가? 신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많은 범죄들이, 그리고 오늘날 벌어지는 많은 종교 분쟁들이 모두 신의 뜻을 오판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물론 십자군 전쟁도 예외일 수는 없다. 마치 자신만이 신의 뜻을 알고 있는 것처럼 신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여 신의 뜻을 오판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반인륜적인 범죄, 그리고 반인류적인 범죄는 그칠 수가 없을 것이다. 종교인들은 특히 마치 자신만이 신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행한다고 오만하게 생각하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둘째 순수한 신념과 의도는 과연 선한 결과를 낳는가? 고금을 틍털어 이 문제만큼 많은 정치학자들, 철학자들, 윤리학자들에게 고민을 던져준 질문은 없을 것이다. 1차 대전 이전 서구에 팽배했던 현상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선하게 그리고 윤리적으로 산다면 그 사회는 지상 천국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다.) 즉 인간에대한 근거없는 낙관이 결국 1차 대전과 2차 대전이라는 충격 속에 세계를 빠뜨리지 않았는가? 순수한 신념은 오히려 이기적인 인간성보다 인류를 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동조하게 만든다. 히틀러에 동조했던 독일인들이 모두 악인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대부분은 선하고 순수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종종 순수한 신념을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물론 십자군 전쟁에도 이 부분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사람들의 음흉한 속셈을 경계하고 순수한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순적이게도 적절한 현실 감각이 필요하다. 이 현실 감각은 때론 지극히 정치적이고, 때론 타협적일 수도 있다. 정치적이고, 타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순수한 신념만큼은 잃지 않고 지켜내야 하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순수한 신념만을 지키면서 불타협을 고수하다가 그 신념마저 꺾이는 사람을 본다. 혹은 너무 타협하다가 순수한 신념이 변질되는 사람도 본다. 현실 감각이 없이 순수한 신념만 가지고 있다가 보수 집권층에게 이용당하는 국민들이 있는가 하면 불타협을 고수하다가 설 자리마저 잃어가는 진보층이 있고, 혹은 너무 타협하다가 신념마저 잃어버리고 진보 대통합이라는 명목하게 말도 안되는 타협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타협이 아니라 야합을 함에도 스스로 타협이라 생각한다. 

  십자군 이야기를 읽고 신문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본다면 이 책을 통하여 얻을 것이 정말 많다. 만약 신문을 들여다 보지 않는다 해도 얻을 것은 충분히 있다. 그렇지만 전자에 비하면 후자는 새발의 피 정도일 것이다. 

  이 책과 함께 형민우씨의 프리스트, 그리고 영화 킹덤 오브 해븐, 살라딘 다시 보기를 읽는다면 충분히 재미있고, 더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프리스트와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전쟁은 그 다지 권하고 싶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귀스타브 도레 그림,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가 출간된다는 소식에 주문해 놓고 손꼽아 기다렸다. 가벼운 마음으로 먼저 읽기 위해서 이 책을 먼저 폈다. "그림으로 보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서 다른 책보다 그림이 더 많다거나 혹은 그림이 많아도 다른 미술책들처럼 그림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책일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림만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글도 있기는 하지만 그 글이라는 것도 그저 구색을 맞추듯이 몇줄로 그림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림이 주고 글이 거기에 보조로 달려 있다고 하면 정확할 것이다. 

  책을 열면 좌측 상단에 이 그림의 사건이 일어나는 도시를 동그라미로 표시해 놓고 있고, 좌측 하단에는 그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그리고 우측 전면에는 귀스타포 도레의 그림이 전면을 차지하고 있다. 사진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205페이지 밖에 안되는 책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렇다. 귀스타포 도레의 그림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좋을 법도 하지만 솔직하게 나에게는 이런 종류의 책은 그저 돈이 아까울 뿐이다. 지도를 조금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거나, 혹은 그림의 설명이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책이 십자군 이야기의 서곡이라고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서곡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다. 서곡이라기보다는 부록이라고 하는 것이 더 솔직하고 정확한 것이 아니겠는가? 도레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냥 십자군 이야기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하면 이 책을 사는 것을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이 책을 보면서 기억에 남는 두 컷은 이것이다. 

  

   

 

  첫번째 그림은 조상들의 묘 앞에서 십자군 참가를 서약하는 그림이고, 두번째 그림은 출발을 앞두고 가족과의 이별을 담고 있는 그림이다. 십자군이 신의 이름으로 행하여 졌지만 얼마나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행위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첫번째 그림에서 조상들의 묘 앞에서 서약을 하는 이들을 멀리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그림의 가장 스포트 라이트를 받는 부분에는 조상들의 조각과 기사들이 있지 십자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는 그저 장식일 뿐이다. 

  두번째 그림은 가족들과의 이별을 앞두고 성모 마리아에게 서약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서약을 받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죽은 아들 예수를 안고 있다. 만약 죽은 아들을 품에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슬픔을 안다면 성지 해방이라는 헛된 꿈에 사로 잡혀서 가족들과 이별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 아들을 품에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십자군 전쟁을 봤다면 무엇이라 말했을까? 이 두 장의 그림은 십자군 전쟁이 안고 있는 위선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하겠다. 얼마전 이라크를 폭격하면서 십자군 운운했던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이 이 그림을 보면 뜨끔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춘추전국 이야기 3 - 남방의 웅략가 초 장왕 춘추전국이야기 (역사의아침) 3
공원국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옛날 대학원을 다닐 때의 이야기이다. 

  채플시간이었다. 한 교수님이 한참 설교를 하시는데 그 분이 정말 괴짜다. 동양 철학을 가르치시는 목사님이신데 마침 그날의 주제는 진정한 신앙 생활이란 무엇인가였다. 알다시피 교수님들의 설교는 정말 재미가 없이 딱딱해서 졸기 딱 좋다. 그날도 열심히 졸고 있는데 이분이 신앙을 노장 사상을 가지고 설명 하시기 시작했다. 

  "여러분 신앙은 도를 닦는 것과 같습니다. 학문도 도를 닦는 것과 같습니다. 열심히 채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비워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 뻔한 소리인지라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 교수님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시더니 나즈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젠장 든게 있어야 비우지..." 

  참고로 강당의 마이크는 싸구려 마이크가 아니라 성능이 좋은 고가의 마이크였다. 당연히 그분의 혼잣말은 마이크를 타고 스피커를 통하여 학생들의 귀에 전달되었다. 졸던 학생들마저 다 깨어 일어나 낄낄대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분 때문인지 비운다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고, 잊지 않게 되었다. 

  정점에 이르렀을 때 더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한계를 알고 비워낼 수 있는 것, 멈출 수 있는 절제의 미덕을 소유하는 것,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초 장왕의 가장 큰 장점이다. 로마인 이야기에 비견하여 춘추 전국 시대의 이야기를 쓰겠다는 저자의 의욕이 빛나는 책이다. 1~3권까지 다 봤으나 가장 먼저 3권을 리뷰로 올리는 것은 오늘 읽은 따끈따끈한 책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춘추 전국 시대에 관련한 책들이라면 중국의 책들을 그대로 번역하거나 혹은 고사를 이야기처럼 엮은 것들이 전부인데 이 책은 그러한 고정 관념을 깬다. 춘추와 국어, 좌전, 사기 등 여러가지 고전들을 비교하고 분석하여 가장 사실에 들어맞을 법한 것들을 취사 선택하여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것도 착실하게 각주까지 달고, 지도까지 곁들이면서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은 이유도, 그리고 책을 읽는 속도가 스피디 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너무 착실하게 학자의 양심을 가지고 글을 쓴 나머지 로마인 이야기와 같은 재미는 없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1권은 제 환공과 관중을, 2권은 진 문공을, 3권은 초 장왕을 다루고 있다. 1권과 2권의 리뷰는 조만간 쓸 것이고 여기에서는 장왕에게만 집중하고자 한다. 

  항우로 유명한 초나라이지만 춘추시대에는 오랑캐로 분류되던 변방의 나라이다. 다른 나라들이 형식적으로나마 주 왕실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공"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지만 초나라 만큼은 왕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주 왕실의 인정을 받으려다가 거절당한 분노 때문인지 초나라는 스스로 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변방의 촌놈이 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큰 힘을 가지고 있으니 중원의 여러 나라들에게 초는 꽤 괴씸한 존재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 환공이 초의 북상을 막았고, 진 문공이 초와 성복에서 전투를 벌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3권 초 장왕의 시대를 거치면서 초나라를 오랑캐라 부르면서 자존심을 내세우는 모습이 희미해진다. 여전히 명분을 전면에 내세우기는 하지만 진 문공의 시대를 지나면서 천하는 각국의 실리를 추구하는 입장으로 굳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진을 제어하기 위하여 제와 초가, 서방의 진과 초가 손을 잡고 초를 제어하기 위하여 초보다 더 변방에 있는 오와 진이 손을 잡는다. 그 안에서 온갖 전란이 끊이지 않고, 국제 정세는 복잡해 지기만 한다. 이 모두가 초장왕의 패업이 이루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바야흐로 초는 장왕을 통하여 중국 역사에 메이저로 등장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초 장왕은 제 환공이나 진 문공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현명한 신하들을 발탁한 왕이다. 그가 신하들을 발탁하는 기준은 오로지 실력에 있지 신분에 있지 않다. 이러한 그의 대범함이 그를 춘추시대의 패자가 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장왕의 대단함은 패자가 되어서도 절제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정점을 찍었을 때 스스로를 비우고, 경계하는 것이 권력을 오래 유지하는 비결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전투에 승리하고도 그 전공을 과시하지 않았고, 나라를 빼앗고도 돌려줄 수 있었던 것이며, 결코 명분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무를 창을 그치는 무(止戈之武)라고 하는 것이며, 저자가 노자와 쌍둥이와 같은 존재라고 조심스레 평가하는 것이다.

   말은 쉽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실천할 수 있을까? 한참 올라갈 때 내려올 준비를 하지 않아서 그대로 추락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공만 꿈꾸는 이 시대 미련한 사람들에게 좋은 본이 된다. 저자는 관중을 현실적인 정치인으로 평가했는데, 나는 장왕도 관중에 못지 않는 현실적인 정치인으로 평가하고 싶다. 

ps.148p 밑에서 2번째 줄 재방을=>제방을, 244p 무후와 문후가 동시에 사용되고 있는데 문맥상 문후가 맞는 것으로 보임.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02-09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패자가 되어서도 절제한다.... 이 문구가 딱 맘에 걸리는군요. ^^
그러게요,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올라갈거라고만 생각하죠.
달리 생각하면 그걸 희망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만, 지나치면 욕심이 되는거네요.

즐거운 하루되세요, 세인트님~

saint236 2011-02-09 11:09   좋아요 0 | URL
그러다 떨어지면 다시 일어나기 힘든걸 모르는거죠. 마녀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L.SHIN 2011-02-09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세인트님의 일화 이야기였습니다.(웃음)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

saint236 2011-02-10 10:21   좋아요 0 | URL
그럭저럭이요. 엘신님도 잘 지내시죠.

2011-02-15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5 1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25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28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작 2011-03-03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뛰어난 논리력, 빛이 납니다. 시작하는 글도 좋은데요.
평안하세요

saint236 2011-03-04 10:38   좋아요 0 | URL
오랫만에 뵙네요. 건강하시죠?
 
처음 읽는 미국사 - 인종과 문화의 샐러드, 미국 처음 읽는 세계사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의 우파에게는 “우방, 혈맹국가”로 좌파에게는 “제국주의, 오만한 패권주의자”로 불리는 미국! 한국 근대사는 미국과 일본을 제외하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신미양요를 통하여 처음 접촉하게 된 미국은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넘어가는 순간에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고, 광복과 동시에 미군정을 시작하여 우리나라를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나누었다. 반민족특위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일제의 기득권층을 그대로 기용하였으며, 6.25에는 응원군으로서 참전하였다. 군사독재 정권을 승인하여 이 땅에 민주주의가 후퇴하게 만들기도 하였고, 김대중을 풀어주라는 압력을 넣기도 하였다. 미순이 효선이 사건, FTA, 광우병, 핵우산, 조기 유학, 원정 출산 등등 한국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제외하고는 이야기하기가 불가능한 곳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동경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심지어는 어린 나이에 조기 유학을 가지만 정작 미국에 대하여 아는 것은 쥐뿔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기껏 안다고 하는 것이 아파치, WWF, 헐리우드, 미군 정도일까? 

  제대로 된 미국사에 관한 책 하나 추천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는 저자의 말마따나 이 책은 미국사에 대하여 딱딱하게 쓰지도, 그렇다고 날림으로 쓰지도 않았다. 책임감을 가지고 최대한 쉽게 풀어 썼다. 중고등학생을 위한 미국사 교과서라고 하면 제대로 된 평가이려나?  

  미국 건국의 아버지 필그림 파더스에서부터, 서부개척, 남북전쟁, 1 ․ 2차 세계 대전과 대공황,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깊이 들어가기 보다는 전반적으로 다 다루고 있다. 전문서적으로서는 부족하겠지만 “처음 읽는 미국사”라는 타이틀에 충실하다. 역사 교과서이긴 하지만 어느 개인이 쓴 것이 아니라 전국 역사교사 모임이라는 단체의 이름을 걸고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더 신뢰가 간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려 최대한 노력한 흔적도 보인다. 그렇지만 한국의 비정상적인 우파에게는 빨갱이 도서로 보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미국에 유학을 가거나 혹은 여행을 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것도 아니고 나처럼 미국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개론서로서 이 책을 한번 읽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책을 읽으면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특성에 대하여 한 가지 생각해 본다. 아무리 모든 것을 끌어다 붙여도 미화할 수 없는 미국 특유의 오만함 말이다. 자기만이 옳고 정의라는 이 오만함은 미국의 건국사 곳곳에 나타난다. 흑인에 대하여, 원주민에 대하여, 그리고 외국에 대하여 미국은 자기가 정의라는 오만함, 지극히 이기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 미국이 세계에서 욕을 먹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루이지애나 주인은 에스파냐, 프랑스, 미국으로 바뀌었지만, 다른 아메리카 땅과 마찬가지로 루이지애나 또한 조상 대대로 살던 원주민들의 땅이었다. 그들에게는 아무도 땅값을 치르지 않았다. 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프랑스인들과 미국인들은 원주민들의 존재는 완전히 무시한 채 그들의 땅을 팔고 또 샀다. 원주민들은 마치 그 땅에 살고 있는 동물이나 식물처럼 취급되었던 것이다.
  이후 프랑스로부터 사들인 원주민의 땅으로 많은 미국인들이 몰려갔다. 원주민들은 오랜 세월 살아왔던 자신들의 땅에서 강제로 쫓겨나야 했다. 미국의 땅은 그렇게 커져 갔다.(P.150)  

  미국 땅의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이주민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배려는 고사하고 위에 인용한 구절처럼 투명 인간 취급하였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무시하고 쫓아낼 수 있는 존재로 여길 뿐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인디언 이주 정책이 시행되었고, 여기에 반대하여 자기 종족의 문화를 지키려는 많은 인디언 영웅들이 나타났다. 미국의 주류들(백인들)은 러시모어 산에 그들의 영웅을 조각하고 영원히 기억하기를 바랐지만 인디언들의 영웅은 기억의 저편으로 묻어버렸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러시모어 기념조각을 바라보는 블랙힐즈에 인디언의 영웅 크레이지 호스의 조각상이 만들어 지고 있는데, 미 정부의 지원을 거부하고 철저하게 관광수입과 크레이지 호스 재단의 이익금만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왜 이들은 크레이지 호스의 조각상을 만들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러시모어 산과 마주보고 있는 곳에 말이다. 원래 러시모어 산이 있는 블랙힐즈는 인디언들의 성지로 숭배되는 곳이었지만 금이 발견되면서 인디언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백인들이 차지한 곳이라고 한다. 이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전사한 수우족의 추장이 크레이지 호스라고 한다. 크레이지 호스는 러시모어 산에 조각되어 있는 4명의 대통령과는 다른 것을 의미힌다. 4명의 대통령이 영광스러운 미국을 의미한다면 크레이지 호스의 조각상은 미국의 오만함과 패자의 설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미국의 영광이란 것은 때론 원주민을, 흑인을, 여성을, 이민자들을 짓밟고 세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미국이기에 미국은 더 나은 곳을 향하여, 인간이 인간다운 곳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의무가 있음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 아닐까? 

  그러나 미국은 전혀 다른 곳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여전히 오만하고, 여전히 이기적이다. 흑인을 차별하고, 원주민을 보호 구역이라는 미명하에 감옥에 가두어 둔다. 자신들의 삶만이 문명이라고 하면서 다른 이들의 전통을 파괴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중동을 공격하고, 자기들의 군대를 십자군이라 지칭한다. 원주민을 사냥하듯이 세계 곳곳의 약자들을 사냥하고, 자원을 사냥한다.  

  이런 미국 속에서 크레이지 호스가 응시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희망일까, 절망일까? 미국의 영광일까, 아니면 쇠락일까? 자본일까, 양심일까? 우리는 그를 어떻게 응시해야 하는가?

  또한 미국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핏대를 세워가며 편을 드는 한국에서 우리는 크레이지 호스의 얼굴에서 무엇을 봐야할까? 패자의 설움인가, 아니면 당당하게 기억되고 있는 원주민의 자부심인가? 자본주의의 오만함인가, 아니면 역사와 현재 속에 살아 있는 양심인가? 크레이지 호스에 대한 평가는 일단 뒤로 미루고 그의 당당함과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0-12-24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안 그래도 미국, 중국, 일본 같이 근처에 있는 나라의 역사 정도는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인데.
세인트 님의 리뷰를 읽으니 객관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궁금하군요.

좋은 리뷰 감사드려요.
제가 한동안 세인트 님의 리뷰를 못 읽었는데,
얼마나 책을 많이 읽으시는지..... 아하하...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진짜 감탄하고 있답니다.

saint236 2010-12-24 10:04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었고요 한가지 흠이 있다면 종이 재질이 너무 반짝반짝 비치는 재질이라 불빛이 반사될 때가 많아요. 그래서 눈이 아픕니다. 종이 재질을 무광택으로 하고 책 값 조금 깎아 주면 좋겠더라구요.

2010-12-24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0-12-24 17:15   좋아요 0 | URL
님도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되세요.

2010-12-25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5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0-12-25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국역사모임이 미국사에 관한 책을 냈었군요. 평소에 학창시절부터
전국역사모임이 쓴 책을 관심 갖고 있었는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서재에 들리게 되었는데 오늘 날씨가 추워지는만큼
감기 조심하세요. 늦은 감 있지만,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saint236 2010-12-25 15:41   좋아요 0 | URL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시고요. 서재의 달인 되셨더라구요.

cyrus 2010-12-27 20:12   좋아요 0 | URL
ㅎㅎ 세인트님께서 잘못 아신거 같네요.
저는 서재의 달인에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벌써 발표나왔는가 보군요.
만약에 달인에 되었다면 알라딘에서 메일을 보냈어야하는데
그런거 안 온걸 보니, 안 된거 같습니다.ㅎㅎ
제가 여기 블로그질한지 1년도 채 안 되었는데,
서재의 달인이 되면 머쓱하고 어색할거 같습니다. ^^;;

saint236 2010-12-27 21:11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잘못봤나? 요즘들어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오락가락하네요.

cyrus 2010-12-28 00:41   좋아요 0 | URL
알고보니 제가 서재의 새 얼굴에 되었더군요.
발표난지 이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
세인트님 덕분에 기분 좋은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ㅎㅎ
 
승정원일기, 소통의 정치를 논하다
박홍갑 외 지음 / 산처럼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통의 정치라? 

  모든 위정자들은 소통의 정치를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소통의 정치라는 정치철학을 삶으로 구현하며 살아왔던 위정자들은 손에 꼽는다. 소통의 정치는 텅빈 구호요, 자신들의 이익을 포장하는 화려한 포장지로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 주면 그걸로 자기의 역할은 다 한 것이다. 군주도 그리고 군주를 보필하는 지배계층도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이치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지배 계층 중에도 소통의 정치라는 철학을 삶으로 구현하는 것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을 왕의 남자라 부른다. 그들은 왕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권력에 아부하지도 않고 목숨걸고 왕명을 제대로 출납하면서, 그날그날의 내용들을 장인정신으로 기록하였다. 승정원에 대한 저자의 평가가 이렇다. 물론 나는 이러한 저자의 장미빛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기록 정신에는 존경을 표하지만 그들의 고고한 학처럼 그렇게 깨끗하게만 살았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승정원 일기라는 제목을 통해 알듯이 승정원에서 그날의 상황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그날의 날씨와 정치적인 사안들, 이에 대한 왕의 대응과 정책의 실현 과정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책이다. 단편적인 기록들이지만 그것이 세월을 두고 쌓이게 된다면 대단한 자료가 된다. 일이십년만 쌓여도 대단한 것인데 그것이 수백년 동안 쌓였다면 그 가치는 말로할 수 없다. 전란의 역사 속에서 잃었던 일기들도 많지만 복구되기도 하고, 우연히 전란을 피하기도 해서 쌓여 있는 것이 200년 분량이 넘어가니 그 대단함은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방대한 분량을 남기기 위하여 모든 열정을 투자한 왕의 남자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소통이 정치라는 제목답게 이 책은 승정원 일기를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그 역사를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소통을 바라본다. 한 부분을 살펴 보자.  

  이날의 모임은 국왕 영조가 평소 커다란 민폐로 인식하던 공인과 시전 상인들의 고충을 듣고 해결하기 위한 자리로, 특히 이 시기 이후 국왕은 자주 공인 등을 면담하면서 그들의 문제들을 바로 해결하고자 했다. 오늘날 대통령이 재래시장을 도는 모습들이 가끔 TV 화면에 나오긴 하지만, 문제점이 바로바로 해결됐다는 후일담을 들은 기억이 없다. 전통 왕조사회의 단순한 구조와 체제라는 점을 감안한다 할지라도, 영조의 대민 접촉은 분명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신문이나 방송, 그리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구중궁궐에 갇혀버리면, 그야말로 캄캄한 별천지 세상이기 때문에 국왕은 대민접촉을 중요시했던 것이다.(P.67) 

  왕과 백성이라는 신분의 차이가 날지라도,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아갈 수 있는 구중 궁궐이라고 할지라도 세상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세상과 분리되어 소통을 포기해 버린다면 그는 왕의 자격이 없다. 왕이 백성들을 만나러 가고, 별 효용성은 없지만 신문고라는 제도를 둔 것도, 암행어사를 파견한 것도 결국 소통이라는 정치 철학의 구현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제도를 통하여 약간이나마 개선이 이루어지고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것을 만천하에 알려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어 그들의 불만을 희석시키는 것 또한 고도한 정치 기술이라 할 수 있겠다. 요는 아주 티끌만한 것이라도 소통이라는 가치가 현실에 나타나는 케이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저자의 말마따나 대통령들이 재래시장을 방문한다. 국회의원들이 한표를 부탁하면서 재래시장을 살리겠다는 정책을 제시한다. 재래시장의 상인들은 그 말을 믿으며 반갑게, 혹은 황송하게 악수를 한다. 지지를 약속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정말 그 말을 믿는 것일까? 내가 보기엔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드물다. 기분에 취해 황송하게 악수는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이 아닐까? 되면 좋고 안되면 원래 저래라고 지나가지 않을까? 그동안 오죽 많이 속았으면 이런 말을 할까? 그동안 얼마나 말만 무성했지 소통이 현실이 되지 않았다면 그럴까? 그 자리에서 표를 부탁하며 악수를 하는 사람도, 지지를 약속하면서 악수를 하는 사람도 모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으니 말그대로 소통은 멀리 사라지고 오직 불통만이 남아 있는 답답한 현실이 아닌가?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이 사라들에게 소통을 현실로 보여줬으면 좋겠다. SSM규제문제 같은 정책을 정쟁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쓸데없이 반짝하고 지나가는 이벤트성 사업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서 떡볶이 한번 먹고, 순대 하나 먹고 "나는 국민의 마음을 대변하네, 재래시장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네."라는 농담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린이날 결손 가정 아이들을 초대해서 "어린이에 관심이 있네, 혹은 불우한 아이들의 처우를 개선하겠네."라는 농담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급식비 무상이라든지, 세금 감면이라든지, 그라민 은행같은 소액 대출 은행 제도를 만드는 것이 더 소통을 현실화 하는 것이 아닐까? 

  왕의 남자들은 투철하게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이 왕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대통령 옆에도 대통령의 남자들이 있다. 그들이 기록하는 국가 기록은 어떤 식으로 평가를 받을까? 과연 소통의 정치철학을 어떻게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을까?  

  지금은 불통을 소통으로, 못살겠다는 몸부림을 북한의 지령을 받고 행하는 불순한 행동으로 둔갑시키는 둔갑술만 난무한다. 전우치도 울고가는 둔갑술이 아니라, 반짝 이벤트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G20같은 대형 이벤트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국민들이 느낀느 불평이 다만 한가지라도 해결되었으면 좋겠다.(코엑스 거리를 막아 놓은 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불편함을 가져다 주었는지 알기는 아는 것일까?) 티끌만한 소통이라도 현실이 된다면 좋겠다. 비록 그것이 희망고문이요, 고도의 정치 기술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