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랜드 - 여자들만의 나라 Rediscovery 아고라 재발견총서 5
샬롯 퍼킨스 길먼 지음, 황유진 옮김 / 아고라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표제작 <허랜드>를 읽으면서 새삼 내가 한 번이라도 여자들만의 세상에 대해 상상해 본적이 있는가 의문이 들었다. 내가 고작 생각한 건 이 세상에 남자가 없다면 동성애가 만연하지 않을까 하는 정도? 생각하는 수준이 바닥이다.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여자들이 사라진 남성들의 세계는 더 끔찍하지 않을까? 하긴 내가 여자들만의 세상에 살아 본 적이 없으니 상상불허다.

 

좀 우스운 얘기 같긴 한데, 시나리오를 공부했을 때 조 편성을 했다. 어찌하다 보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여자 수강생들이 몇 명 있었는데 거기에 나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결국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이 하나의 조가 되었다. 난 원래 학교 때부터 조 운이 없긴 했지만 속으로 이건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모르긴 해도 다른 조원들도 나와 같은 생각일 거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여자가 더 잘 아는 법이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놀리듯 막 배정된 우리들에게 아마조네스란 조명을 하사하시려 하는 걸 거부하고 다른 이름으로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우리가 무엇으로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수강 기간 내내 우리가 서로 못 지낸 건 아니다. 나름 잘 지냈다. 그런데 나중에 안 사실인데 다른 조의 사람들은 우리 조를 나름 꽤 부러워했다는 것이다. 남자 수강생들이야 뭐 여자들의 모임을 동경할 테니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여자들은 남자들과 썩어 놓으니 불편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여자들끼리 있으면 더 끈끈하고 재밌지 않겠냐는 것이다. 결국 우리들은 서로 남의 떡이 더 클 거란 상상을 하며, 자기가 속한 조에 대한 불만을 그렇게 표현하는 모양새였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결국 남자들은 어디를 가나 인기가 없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 되는 지도 모르겠다. 같은 남자들끼리도 재미없고, 여자도 싫다고 하니 말이다.

 

이 작품을 읽으니 새삼 그때 붙이려다만 아마조네스가 생각이 났다. 아마조네스와 허랜드는 다 여자들만의 세상이란 점에선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 둘의 성질은 판이하게 다르다. 아마조네스는 여성 무사족을 뜻한다. 여성을 무사로 만들기 위해 활쏘기 좋으라고 어려서 오른쪽 가슴을 도려냈다고 하니 좀 무시무시하다. 그들은 자손을 번식시킬 때에도 일정기간 이웃 나라의 남자들과 통정을 하고, 아들을 낳으면 버리거나 죽였다고 한다. 아무리 신화라고는 하나 배면에 완전히 남성을 배제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아마조네스는 진정한 여성 사회를 보여주고 있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남성화된 여성성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런데 비해 허랜드는 아마조네스 보다 훨씬 더 고도화되고, 치밀하며, 설득력 있다. 무엇보다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해 이웃 나라로 원정을 가는 법이 없다. ‘처녀 생식을 통해 아기를 낳으며 낳는 아기마다 딸이다. 그러므로 아들을 낳았다고 잔인하게 죽일 필요도 없다. 또한 그 사회는 철저하게 모성애와 자매애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해 생각할 것은 아마조네스 여성의 무사성과 허랜드의 모성애다.

 

사람은 어떻게 키워지느냐에 따라 결국 운명이 결정되기도 하는데, 날 때부터 무사로 키워지는 것과 어머니로 키워지는 것이 어떻게 다르겠냐는 거다. 무사로 키워진다면 무엇을 위한 무사겠는가. 적들의 위협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남성 무사와는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조네스의 여성 무사들은 누구를 적으로 삼았을까? 당연 남성이었겠지. 여성들만이 사는 세상이니 남성들은 얼마나 그 세계가 궁금할까. 만만히 보았을 것이다. 남성성에 정복하고자 하는 욕구도 있지 않은가. 그것으로부터 자기네 부족을 지켜야 하니 당연 더 많은 힘과 전략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허랜드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물론 그 나라에도 무사들 내지는 군인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건 국가를 이루는 많은 요소 중 하나로 존재할 뿐 전체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그녀들은 그리 많이 여성스럽지 않고 오히려 중성에 가까우며, 보통 여자 보다 약간 큰 편이라고 한다. 여기서 작가의 상상이지만 깊은 혜안이 느껴진다. 양성의 사회에선 여성성의 원형이 온전히 지켜지기가 어렵다. 그것은 여성이 남성 주류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성성을 변형하나 왜곡시키며 발전해 왔을 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선 여자 혼자 자신을 지켜나가기 힘들기 때문에 자기를 지켜주는 남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이제이인 것이다. 폭력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공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에 대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든. 안 그러려면 남자 보다 몇 배는 더 영리하고 남자다워져야 한다.

 

하지만 허랜드는 기본적으로 모성애를 전제로 하고 있고, 남자들이 없기 때문에 남자를 유혹하기 위한 관능이 발달되지 않고 오히려 퇴화되었을 것이다(나는 여자가 힘도 세면서 여성다움을 잃지 않은 건 남성적 사고가 반영된 거라고 본다). 양성의 사회에서는 여성성을 대표하는 것이 관능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여성성엔 그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모성애도 있으며 어찌 보면 관능은 상대적인 것인 반면, 모성애가 원형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양성사회에서 모성애를 발휘하며 사는 건 어렵고 점점 축소되어져 가는 느낌이다. 그게 단순히 여자가 아기를 낳기 싫어하는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엔 이 사회가 안전하지 않다는 걸 의식으로든, 무의식으로든 알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내 아이를 이렇게 위험하고 오염된 세상에서 키우고 싶은지. 그렇다면 양성 사회에 사는 사람이 허랜드의 사람이 관능이 없다고 안타까워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 모성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을 더 염려해야 하는 것이 맞다.

 

작가는 허랜드에 표류한 세 명의 미국 남자를 통해 허랜드와 자기네 나라의 여성의 실체를 대변하며 의식을 깨운다. “... 그렇다. 그녀들은 어머니들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무기력하고 비자발적인 다산의 어머니들, 모든 땅을 사람으로 가득 채우도록 강요받고, 아이들이 서로 끔찍하게 싸우며 고통 받고 범죄를 저지르며 죽어가게 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지각을 가진 어머니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모성애는 잔혹한 열정, 즉 개인만을 위한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였다.

그들의 모성애에는 우리가 너무도 믿기 힘들어했던 그들의 단결성을 바탕으로 한 무한한 자매애가 포함되어 있다. (121p)“

이것은 단순히 저자가 허랜드의 이상을 설명하기 위해 현대 양성 사회의 여성성을 비교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진정한 여성성을 꿰뚫고 있으며, 그런 만큼 현대 여성들의 그것을 얼마나 위협받고 있는가를 역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허랜드는 완벽한 이상 사회를 구현하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분업화가 잘 이루어졌다. 단적인 예로 양성사회에선 오로지 여자만이 육아를 담당하지만, 여기선 그것의 담당이 국가다. 그것에 대해 표류하게 된 세 명의 미국 남자들은 당황해 하지만, 독자는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에 나오는 남자들은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이고 보면 19세가 말의 사람들이다. 그때 무슨 육아 시스템이 발달이 됐겠는가? 그러니 작가가 19세기 여성으로서 얼마나 앞선 생각을 가지고 허랜드를 그렸을지 놀랍다.

 

선진국의 조건을 여러 가지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중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게, 여권과 아이의 양육이다. 그만큼 발달된 나라일수록 육아는 개인이 아닌 국가가 담당한다. 그런 점에서 요즘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는 유치원 교사 폭행 사건이나 예산문제로 골머리를 썩는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라고 말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모르긴 해도 교사 선발은 갈수록 더 엄격해져야 하고, 고급 인력으로 양성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들의 근무 환경이나 재교육의 기회가 봉쇄되어 있으니 그런 일이 자꾸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이 소설은 하나의 허구만으로는 읽혀지지 않았다. 19세기에 쓰인 이 소설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만큼 미래에 가능성이 있다는 말기도 하다. 어느 때부턴가 여군이나 여경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힘으로 나라가 지켜진다면 여자들이 남자에게 자신의 안위를 맡기는 일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또한 역대로부터 모든 전쟁이 남자들에 의해 자행되어 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 결정권을 더 이상 남자들에게 맡길 수마는 없다고 할 때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볼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와 노인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분별력이 없고 힘이 없으며, 노인은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제 전쟁의 위협에서 가족을 지킬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될 것이다. 허랜드에서의 처녀 생식이란 것도 오늘날의 시험관 아기의 은유 같기도 하다. 어찌 보면 지금의 남성성을 가지고는 설 자리가 가면 갈수록 좁아질 것이라는 예측은 어렵지 않다. 또 남성성을 어느 정도 무력화해야 세상의 평화가 유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한마디로 좀 놀랍다. 그렇게 오래 전에 쓰였음에도 세월의 흔적을 하나도 느낄 수가 없다. 그런 작가의 필력이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할 정도다. 여성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과 문체에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다. 요즘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는 잘 살아 볼 생각은 안하고 이상한 싸움 양상을 보이고 있는가 본데 그런 쓸데없는 소모적 싸움은 그치고 이런 책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문제작이고 수작이다. 강추한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9-04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6-09-05 13:44   좋아요 0 | URL
ㅎㅎ 무슨...
정말 가능할 거 같다니까요. 남자들 정말 정신 차리고
여자들한테 잘 해야해요. 안 그러면 쫓겨나요.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6-09-0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복적인 상상력이군요. 여자들만 사는 나라라...
이 책 재미있겠네요.. 이 리뷰, 뭔가 정성을 들여 쓴 느낌이 듭니다..

stella.K 2016-09-05 13:54   좋아요 0 | URL
이거 이벤트에서 받은 거라서 리뷰를 써야하는데
정말 어떻게 써야하는지 고민 많이했어요.
왜 그렇게 안 써지는 ...
그나마 쉽게 쓰려고 하다보니까 써지는데
가끔 책 내용이 너무 좋으면 리뷰는 못 쓰겠더군요.
뭐 좀 달리 생각해 보던가, 뭔가 까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이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인정을 해 버리게 되거든요.

이 책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어 볼려구요.
빌려 드릴까요?
그냥 사서 보세요. 곰발님은 책 같은 거 빌려 볼 것 같지는 않아요.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6-09-05 14:48   좋아요 0 | URL
안 읽은 책이 산더미여서 아직 책은 사지 않아도 됩니다.
다, 2년 이상 예약된 상태라.. 이 책 읽으려면 2년 후에나.. ㅎㅎ

cyrus 2016-09-05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해경이라는 중국 신화 모음집에 여인국을 소개하는 글이 있어요. 여인국과 아마조네스는 여자만 사는 유토피아에 대한 남자들의 동경과 판타지가 투영되었어요.

stella.K 2016-09-05 14:13   좋아요 0 | URL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마조네스는 여자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지.
근데 허랜드는 완벽해.
어떻게 19세기에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줄 쫙쫙 치면서 읽었는데 정작 리뷰에선 하나 밖에 인용을 못했어.ㅋ

니르바나 2016-09-07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지안님^^

첫 저서 <네 멋대로 읽어라>가
알라딘 서재 대문에 금색 트로피를 수상하고 있네요.
블로거 베스트셀러 종합 1위 등극을 축하드립니다!!!

2016-10-15 1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뮈로부터 온 편지
이정서 지음 / 새움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가 언젠가 카뮈의 <이방인>을 새롭게 번역하고 알라디너들과 번역논쟁이 붙었던 걸 기억한다. 그때 워낙 많은 글들이 난무했던지라 일일이 다 읽어 볼 수도 없는 일이고, 그때 그저 나의 바람은 그가 얼른 백기를 들어주길 바랐었다. 왜 그랬을까? 처음엔 그의 오만함이 싫었다. <이방인>의 번역본이 어디 한 둘인가? 그의 번역도 그 많은 번역 중의 하나일 뿐인데 이제까지의 번역본들은 다 가짜라며 오로지 자신의 것만 진짜인 척 하는 게 같지 않아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껏 힘쓰고 애쓴 김화영의 번역본을 위시해서 이것을 번역하느라 고생했을 다른 번역자들은 뭐란 말인가? 그리고 누구의 번역이던 지간에 그것을 사 봤을 독자들은 또 뭐란 말인가. 우매하다는 소리로도 들릴 수 있다. 더구나 난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란 책을 읽었는데 뭐 나름 중대 사안을 다뤘던 건 사실이나 그다지 만족스러웠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 사람 자신의 책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구나 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좀 바뀌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논쟁은 생각보다 길었고 치열했던 것으로 안다. 그렇게 치열한 정도면 꺾이기도 할 텐데 그는 꺾이지 않았고 그동안의 논쟁을 집대성이라도 한 듯 이 책을 내놓았다.

 

이 책은 딱히 재미있는 건 아니다. 저자가 기존의 번역을 거부하고 새로운 번역작업을 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일기체로 담담하게 썼다. 특히 예문을 위해 카뮈의 <이방인> 원서를 그대로 옮기기도 했는데 프랑스어 전공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 같은 까막눈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특히 그의 저격 대상은 김화영 교수(소설에서는 김수영)의 번역본이다. 일일이 여기에 옮길 수는 없지만 그의 번역본이 뭐가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를 줄줄이 나열하고 있다. 뭔지는 모르겠으니 이 정도라면 마음이 흔들릴 법도 하다. 그러면서 이런 번역이 지난 25년 동안 문제제기 없이 계속 이어올 수 있었는지 개탄했다.

 

사실 김화영 교수가 우리나라 1세대 카뮈 전문가이고 보면 어느 듣보잡이 이러고 나오는 걸 편하게 봐 넘길 수는 없을 것 같다. 하극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고, 김윤식 교수의 표절을 통해 우리나라 학계의 카르텔을 비판하더니 또 이 문젠가 싶기도 할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우리나라에 <이방인> 번역본이 수십 종이 있는데 그것도 하나 같이 김화영 교수의 번역본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뭐 꼭 그게 아니어도 아무래도 권위자 앞에 이인자이기를 자처한다는 건 상당한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만그만한 번역본을 내놓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우리나라가 늘 주관적인 사고를 박제시키고 교육받아 온 탓에 기인한 줄도 모른다

 

 솔직히 저는 카뮈의 <이방인>을 번역하는 내내 분노와 흥분으로 잠 못 이룬 게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러한 번역이 25년 이상 우리 번역문학, 출판문화를 대표해서 세대를 달리하여 권장도서로 읽힐 수 있었던 것인지 감히 참담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교한 결과, 김수영 교수님의 번역은 단지 그 한 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뒤를 이은 수많은 후학들의 번역서들이 거의 비슷한 번역들을 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번역은 우선 작품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일 터인데, 소설에서 중요시되는 인물에 대한 이해를 앞선 선학의 시각으로부터 이해하고 시작하는 것이니, 그 번역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지요.(330p) 

 

그렇다고 저자의 문체가 시종 자기 오만으로 채워졌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상당히 진지하다. 읽다보면 저자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일지가 짐작이 되는데(이 소설은 메타 픽션으로 처음엔 이윤으로 시작했다 저자 자신의 이름으로 나오고 있다) 대체로 과묵하고, 신중하며, 치밀하고, 판단력과 대처능력이 좋은 그런 이미지로 읽힌다. 게다가 이미 읽은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와 함께 보면 뭔가 혁명가적 기질이 다분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가 김진명은 추천사에서 저자가 옳은 일에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는 투사 이미지로 말하고 있다. 하긴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기존에 없던 이야기를 하는데 처음부터 좋게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꾸 이건 잘못됐다고 문제제기를 하면 사람은 듣게 된다.

 

아무튼 그래서일까? 번역에 대해 그다지 아는 바는 없지만 뭔가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난 아직 저자가 번역했다는 <이방인>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지금까지의 리뷰나 평점을 보면 상당히 긍정적이다. 물론 그의 번역본을 탐탁지 않게 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모 방송국 경제부 기자가 TV에 나오면 항상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다. 기업과 기업이 경쟁이 붙으면 그 사이에 덕을 보는 사람은 소비자다. 나는 이 말을 여기에도 적용 해 보고 싶다. 우리가 어떤 작품에 대해 번역에 경쟁이 붙으면 그 사이에서 덕을 볼 사람은 독자다. 그렇지 않아도 저자는 말한다. 왜 우리는 고전은 재미없는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거냐고거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느냐고. 사실 <이방인>은 그렇게 어렵고 재미없는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프랑스어 전공자가 아닌 자신도 번역할 수 있으리만치 평이한 언어로 씌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번역만 거치면 어려운 것이 되어 읽기를 꺼려하게 만든다라고 했다.

 

이것에 관해 번역자들도 나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나의 지인 중에 번역가가 있어, 지난 주말 그동안의 안부도 물을 겸 이 책과 관련해서 통화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아직 이 책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대충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니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면서 아직 책을 읽지 못해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카뮈가 20세기 중반의 사람이고 보면 그 시대 프랑스어도 그리 세련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김화영 교수 역시도 그나마 카뮈가 살았을 연대에 가장 근접해 있는 사람이고 보면 그 분위기를 그대로 옮기려고 하다 보니 오늘 날 보기엔 좀 다소 세련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 말도 일리는 있어 보인다. 결국 또 원점인 듯싶기도 하다. 정말 번역에 대해서만큼은 황희정승이 되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저자의 말처럼 김화영 교수는 자신의 번역에 대해 말이 없다저자 역시 뭐라고 해명해 주길 바라고 있는데 말이다.

 

왜 그럴까를 나도 생각해 본다. 김화영 교수의 침묵은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 험하다>의 김윤식 교수의 침묵과는 뭔가 달라 보인다. 그것은 번역을 한다는 나의 지인의 말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번역은 하면 할수록 어렵다고 했다. 번역은 제 2의 창작이라 하지 않는가? 얼마나 많은 윤문이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니 원작 그대로의 번역을 기대한다는 건 거의 있을 수 없으며, 답이 없는 일이 번역 일 같다고 토로했다. 게다가 사람들은 번역은 혼자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오해 하곤 하는데 이 분야처럼 부침이 많은 것도 없다고 한다. 어떤 편집자를 만날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 어쨌거나  책이 나와 독자들로부터 말이나 안 들으면 좋겠지만, 번역이 개판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꼭 있기 마련이고 그러면 욕을 먹는 건 번역자일 뿐 이라는 것이다. 번역자의 고충이 얼마만한 것인지 짐작이 갈 것도 같다. 물론 김화영 교수가 번역 작업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에 관해 구구하게 설명해 자신의 위신을 깎는 일을 할 리가 없다.

 

사실 독자들에겐 한 작품에 관해 그렇게 많은 번역본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번역자나 특별히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특이체질이라면 여러 번역본을 비교하며 쾌감을 얻을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누구의 번역본이 좋다고 하면 그것 하나만을 선택해 보는 것이 대부분이다. 독자들은 그 번역본에서 줄거리가 뭔지 원작자가 작품에서 의미하는 바가 뭔지를 알려고 할 뿐 번역본끼리의 차이 같은 것엔 관심이 없다. 저자가 지금까지의 <이방인>의 번역이 잘못됐다면 그것 하나만 잘못됐을 리 없다. 얼마나 많은 역자의 번역이 잘못됐을지 알 수없다. 몇 년 전,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냈다 회수한 출판사가 있어 화제였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됐는지 모르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선 박수칠 일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나 같이 언어에 둔감한 독자는 말 안하면 그러면 그런가 보다 했을 것이다. 내가 무슨 러시아어 전공자도 아니고.

 

그런 것처럼 나는 저자를 비판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나는 저자의 의도를 알기 때문에 저자의 이런 태도를 환영한다. 그는 단순히 자신이 옳고 남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다. 문제의식이 없는 것이 문제지 우리나라 번역 잘 되고 있는가를 문제 삼는 건 필요해 보인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나라 번역은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 이 책은 적어도 독자 편의 책이라고 생각한다. 별뜻도 없는 내용을 가지고 말장난이나 하는 요즘 작가의 가벼운 언어유희 보다 훨씬 훌륭하고 값진 책이라고 생각한다. 문제작이다. 번역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의집 2016-08-23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글 진짜 좋네요~

stella.K 2016-08-23 13:5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기억님.^^

2016-08-23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23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8-23 0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랑스어 전공자로서 말씀드리면 이 분은 <이방인> 오역을 굉장히 많이 고치셨습니다.
반면에 대화체에서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번역을 많이 하셨고
카뮈 <이방인>을 과연 이해했는가에 대해선 의문입니다.
(뫼로소의 네 발의 짧은 노크를 정당방위라고 하셨죠.....공감할 수 없어요 )

스텔라님 말처럼 기존 번역에 이의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과보다 공이 많다고 봐요. ^^


stella.K 2016-08-23 14:07   좋아요 1 | URL
아, 하나하나 드러나는 시이소님의 정체!ㅋㅋ
프랑스어 전공하셨군요. 부럽슴다.
저는 뭐 한국어 하나 밖엔....ㅠ

참고로, 리뷰엔 쓰지 않았지만 번역한다는 지인이 최근
문학동네판으로 읽으셨나 봐요. 거긴 <이인>으로 나왔을 걸요?
거기 역자는 이방인 원본을 100번을 읽고 번역을 했다고 하는데
번역된 것 중 가장 쉬운 언어라나 뭐라나 그런데 이건 정말 뭐라고 형언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면 완벽한 번역은 없는 것 같고, 자신에게 맞는 번역을 선택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근데 그걸 테스트 할 수는 없을 테니
가장 많이 팔린 번역본을 찾겠죠. 그러다 보면 다른 번역도 비슷해질 테고.

전 저자의 번역 자체보단 이런 문제의식과 번역 자체에 들인 공 뭐
그런 것들을 높이 사고 싶더라구요.^^

시이소오 2016-08-23 14:14   좋아요 0 | URL
전공을 했지 공부한건 아니구요. 문학동네판 이인도 읽어보고싶네요.

맞는 말씀입니다
번역도 개인취향을 타는것같아요. 한 책을 백명이 번역해도 다 다를거같ㄱㅓ든요. ^^


stella.K 2016-08-23 14:35   좋아요 0 | URL
ㅎㅎㅎ 대학 다니는 거 비슷한 거 같아요.
전공 따로 공부하는 것 따로.
저도 그래요.^^

기억의집 2016-08-23 1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양반이 뭘 그리 잘 못 했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는지 이해가 안 가더라구요. 우리나라 상명하복의 유교문화가 너무 거쎄서 저렇게 문화적 권력을 가지면 주변에서 더 난리더라구요. 아닌 말로 김화영이가 절대 지식이나 절대 언어감각을 가진 사람이 아닐 건데 까면 어때요? 저 양반의 언어가 김화영만 못한다하더라도 김화영교수가 절대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저런 양반 있어야 우리 번역문화도 발전하죠. 이 세상에 절대 지식 절대 언어 없어요. 오류도 많고요. 오류 있으면 좀 어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천년 이상 그 잘 못된 학문도 잘도 써 먹었다가 아리스토델레스의 지식에 의문이 들어 갈리레이같은 지식인들이 그 오류를 수정한 거잖아요. 아휴. 저 양반 번역 오류 있을 때 완전 우리 나라 상명하복의 절처한 라인을 보았네요.

stella.K 2016-08-23 17:52   좋아요 1 | URL
원래 없던 소리하면 반발이 많잖아요.
그래서 천재나 혁명가들이 외로운 거고.
근데 없던 소리도 못해도 세 번 정도 일관성 있게 떠들어 주면
저 같은 팔랑귀는 듣는다는 거죠.ㅋ
이 사람 참 많이 외로웠을 것 같습니다.

억울하면 출세하랬다고는 하지만 누군가 족적을 남겨버리면
다 쫓아가게 마련이죠. 그래야 뭐라도 건질 테니...
우리나라는 문제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무엇보다 지성계가 깨어있어야 하는데 다들 제 잘난 맛에 살고 있으니...ㅉ

yamoo 2016-08-23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저는 카뮈의 대부분 책을 김화영 번역본으로 모았는데욤....이정서 라는 분이 그렇게도 김화영을 깠다면, 한번 거들떠 보고 싶네요. 그리 깐데에는 분명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허접함이라는 게 있을 테니까요. 서점가서 몇 페이지만이라도 읽어봐야 겠습니다!

교수가 번역한 것이 좋다는 걸 보증하지 못하는 걸 많이 봐서뤼...어쨌건 요즘 계속 스텔라 님 때문에 책과 영활 찾게 되네요..^^

stella.K 2016-08-24 13:27   좋아요 0 | URL
이런 영광스런 일이...!ㅋㅋㅋㅋ
뭐 그 사람이라고 완벽한 번역을 했겠습니까?
시이소오님 댓글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도 번역에 문제는
아주 없어 보이진 않습니다.
본인도 자신의 번역 문장을 쓸 때마다 졸역이라고 겸손해 했으니까요.
근데 중요한 건 그 사람이 깠다는 거죠.
문제를 문제로 봤다는 것! 그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야무님.^^

2016-08-24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24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24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24 1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24 1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5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소설이군요. 원래 이정서가 소설가였습니다. 번역을 해서 의아하다 생각했었는데....
이 출판사에서 나온 << 타는혀 >> 라는 평론집 한번 읽어보십시오. 문단이 돌아가는 꼴을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stella.K 2016-08-25 13:45   좋아요 0 | URL
꽤 똑똑한 사람이더군요. 지금은 출판사 대표로 일을 하는가 본데...
저도 <타는 혀> 읽어 보고도 싶은데 읽으면 뒷목 잡을 것 같아 자신이 없습니다.ㅠ
 
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작주의는 아니지만 김훈 작가의 작품은 나름 꽤 읽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것이 <내 젊은 날의 숲>을 끝으로 한동안 그의 작품을 읽지 못했다. 나는 그 작품을 읽기도 했지만 출간 당시 강연회도 참석 해서 거기서 작가의 다음 작품에 관해 들을 수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흑산>이었다. 물론 그때는 구체적으로 제목을 언급했던 것은 아니지만, 천주교 박해 관한 소설을 쓰게 될 것 같고, 쓰게 된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을 지키는 쪽이 아닌, 목숨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신앙을 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의 입장을 쓸 것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확실히 작가답다고 생각했다. 들어나지 않는 이면의 것을 쓰는 것이 김훈 작가의 글 쓰는 방식은 아닌가. 독자는 자신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만만히 보이는 작가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튼 그런 내가 <내 젊은 날의 숲> 이후로 그의 작품을 읽지 않게 되었다. 그는 약속을 지키듯 <흑산>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나의 게으름 탓도 있지만, 난 왠지 <내 젊은 날의 숲>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도 오래 전에 읽어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 미흡하고, 미진했다. 게다가 <흑산>에 대한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읽었던 작품이 마음을 채우지 못하면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여도 다음 작품을 선택하기란 꺼려진다. 그런 내가 몇 년만에 그의 작품을 읽는다.

 

읽고나서 역시 김훈이다 했다. 작가는 살아 있었다. 아마도 그는 역사 소설을 쓸 때가 가장 그답지 않나 싶다. ‘화장도 좋고, ‘언니의 폐경도 좋은데 다 그것에는 못 미친다. 하지만 그가 역사 소설만 썼다하면 따라오는 오명이 있는데 그것은 마초. 여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나와도 그저 작품의 부속품 정도로 나온다고 해서 마초라고 해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찌질한 마초도 다 있을까?

 

인간의 세계에서 신앙을 가진 게 죄라면 죽음으로 그 죄값을 치르는 것도 좋은 일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 또한 마초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사내대장부가 죽음을 두려워 할까. 그러나 그렇게 해서 죽는 거라면 그건 허세일 뿐이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순교는 아닐 것이다. 어찌 사람의 생과사를 마초에 비할까. 그래서 살면 마초가 아닌 것이고, 죽으면 마초가 되는 것인가? 그것처럼 어리석은 이분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말했다. 마초는 허세로서 자신의 문학을 단순히 그렇게 부르지 말아 달라고. 이건 모르긴 해도 초기 그의 문학을 평했던 평론가들이 부르기 좋은 말로 그렇게 불렀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마초하면 김훈이란 등식은 이제 성립하지 않는다. 그저 남성의 고독한 실존을 그렸을 뿐이다.

 

남들은 순교라는 이름으로 죽어갈 때, 그 누군가는 배교로 목숨 하나를 구했다. 그리고 순교하는 신도를 지켜 본다는 게 마음 편한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 점을 주목하여 본 것이다. 그렇게 구차한 목숨 하나 구했다고 어찌 배교했다고, 비겁하다 할 수 있을까? 나도 신앙인이지만 박해로 인해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면 쉽게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이렇게 교회 다니기 좋은 시대에 그 안에서 온갖 비리의 냄새를 풍기고도 그것이 배교인지도 모르고 교회를 다니는 게 더 문제는 아닐까.

 

책을 읽다보니 내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을 알았다. 배교했다고 해서 다 살아남는 것도 아니라는 것. 배교는 배교대로 하고 끝내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더라는 것. 그들은 이승에서도 구원을 받지 못하지만, 저승에서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 영혼은 또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한 것인가. 나는 어떨까? 나는 신잉인으로 죽으면 부활을 믿고, 천국의 소망이 있지만 그런 박해의 시대에 감히 야소를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사학죄인이 되기를 기꺼워 할 수 있을까?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지금도 이 지구 어디에선가는 예수 믿는데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곳이 있다. 즉 순교자가 있다는 말이다. 나는 가끔 교회 다니는 게 비정상 같다는 생각도 든다. 교회는 병든 사람이 위로 받자고 다니는 건데 죽기를 강요 받고, 겁박하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박해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배교할 사람이 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순교는 확실히 신비다. 그것을 아무리 이해 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때로 믿음을 이해의 영역에서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하는 건 얼마나 무모한가. 

 

복음이 전파되려면 그곳에 먼저 피의 순교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참 무서운 분 같다. 그리고 순교의 터 위에 교회는 세워졌다. 내가 죽어야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나의 후손과 공동체가 구원을 받는다. 아마도 이 마음 가지고 순교하지 않았을까? 생명은 나 하나만을 생각하면 결코 버릴 수 없는데, 나의 후대와 공동체를 생각하면 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이를 몸소 보여주신 분이 또한 예수가 아닌가.

 

배교하고 살았다고 그를 쉽게 비겁자라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때는 박해를 피하려고 배교가 불가피 했는지 모르지만 모든 건, 이 또한 지나간다. 박해 후 또 신앙을 회복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아니 그는 배교했을지라도 그의 후손은 신앙을 받아 들였는지 알 수 없다. 그건 그저 그 사람의 실존인 것 같다. .

 

소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배교자로서 순교자와 배교자들을 지켜 본 정약전은 그냥 그 시대를 담담히 살아낸 실존주의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배교자가 되어 가정을 지켜내는 가장이길 바랐을 뿐이다. 그것이 실질적인 명분이었는지 아니면 살기 위한 핑계였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아무튼 그것이 김훈이 말하는 마초와 가부장의 차이일 것이다. 그는 또 말했다. 가부장이 오늘 날 잘못 왜곡되어서 그렇지 진정한 가부장은 가문과 식솔들을 지켜낸다고. 그 옛날 가장들은 가정과 식구를 지켜내지 못한 것을 치욕이요 불명예로 여겼다. 눈 앞에서 오랑캐에 끌려가는 자신의 아내와 누이와 어린 자식을 지켜보면서 울부짖지 않을 가장이 어디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가부장은 나름의 독특함으로 발전하고 왜곡되어져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잠시 세월호 선장을 생각했다. 점점 바다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갑판의 끝에 매달려 구조 받던 그 선장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그는 책임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건 심판 받아 마땅하지만, 난 그때 그것을 보면서 왠지 그의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이해관계를 떠나 그는 본능적이고 원초적으로 살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건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비난을 받던, 벌을 받던 그건 나중의 일이다. 그가 바보가 아니라면 구조 받던 그 순간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 건지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라도 살고 싶었을 것이다. 살아야 그 다음도 도모할 수 있다. 아니면 얻어 걸렸다고 수장됐어야 할 목숨이 얼떨결에 구조되었던 걸까?

 

아무튼 그는 세월호의 희생자수만큼이나 죽어 마땅하지만 생으로 귀환한 그는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비며, 늙은 부모의 자식일 것이다. 다른 사람은 그를 비난하고 욕해도 그의 가족들은 그를 비난할 수 없고, 그렇게라도 살아 있음을 다행으로 여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들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을까. 심판 이후 모든 것은 그와 그의 가족들이 감당해야 할 몫일뿐 우리는 어떤 것도 그에게 그 이상도, 그 이하의 것도 바랄 수가 없다. 모르긴 해도 그는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세월호 희생자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게 그에게는 앞으로의 실존이고, 삶의 몫인 것이다. 배교자는 배교자의 삶이 있는 것처럼.

 

난 김훈의 문체를 좋아한다. 그의 문체는 아름다운 것도, 시적이지도 않다. 특히 이 작품은 피와 살점이 툭툭 패이는 것만 같다. 또한 적절히 녹아있는 성애장면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 것을 보면 사극 같은데서 등장인물이 추국을 당하고 그 다음 장면에서 사지육신 멀쩡한 것으로 나오는 걸 보면 참 이미지가 문자를 못 따라 가는구나 싶기도 하다. 

 

그의 문장은 한번도 성공한 사람을 대변하거나 표현해 준 적이없다. 쓰는 것마다 실패하는 자를 대변하고 그의 고독하고도 처절한 실존을 표현해 왔다. 어설픈 성공보다 차라리 처절한 실패가 더 났다는 말은 그의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실패하는데 성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작가다. 그는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난 그를 좋아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8-07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6-08-08 12:57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저는 반대로 에세이는 자전거 여행인가
그거 달랑 읽은 거 같아요. 근데 소설은 읽히더군요.
아직 안 읽은 것도 많아요.

2016-08-07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6-08-08 13:01   좋아요 0 | URL
오, 정확히 보셨네요. 맞아요.
김훈 자신도 역사 소설가는 아니라고 밝히고 있지요.
단지 역사를 재료로 할 뿐이라고 했어요.
아마도 그는 역사의 인물을 통해 남자를 재해석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뭐 남자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징징거리는지도 모르구요.
아무튼 전 그가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단백한 문장이 좋더라구요.
읽어 주셔서 고맙슴!^^

2016-08-08 0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8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녕, 테레사
존 차 지음, 문형렬 옮김 / 문학세계사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항상 느끼는 거지만, 사람이 태어나기도 잘 태어나야겠지만 죽기도 참 잘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무리 의학의 발달로 백세시대를 얘기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연수를 다 채우고 사는 것은 아니다. 그 살아가는 동안 무슨 일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얼핏 강간 살해 피해자의 가족과 피의자간의 법정 싸움을 그린 작품처럼도 보인다.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피해자의 유가족 즉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절절히 토로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책이 나올 즈음 다 아는 일이지만, 강남역에서 20대 여성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 그에 꼬리의 꼬리를 물고 터져 나왔던 일련의 사건들은 차마 입에 떠올리기도 싫다. 물론 일어나지 말아야할 사건이 일어나 공분을 샀지만,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그들의 살아남은 가족은 어떤 심정일까,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은 선량해서만도 아니다. 누구든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당한만큼 복수하며 살고 싶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법이 없다면 말이다. 그러나 문명국 특히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일수록 예외 없이 법치국가이기도 하니 총이나 칼이 있기 전에 먼저 법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그러니 피해자의 가족들은 어찌 보면 고통을 가중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재판에서 만족한 결과가 나온다면 그나마 법의 위로를 받는 것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 당하는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최근 배심원 제도라는 게 있긴 하지만, 미국은 그 보다 훨씬 앞서 이 제도를 시행해 오고 있는 줄 알고 있다. 어쩌다 미국의 법정 드라마를 보면 배심원이 근엄하게 그려지곤 하는데 책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아 보인다. 더구나 그 배심원 제도라는 게 다수결의 원칙 같은 것이 아니라 평결의 원칙 그러니까 만장일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다른 의견이 있다면 상대가 유리해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 가족들은 만장일치의 평결을 얻어 피의자인 산자를 구형 받도록 하는데 승리하지만 나중에 항소해 다시 법정에 서는 이중의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물론 그 재판에서도 승소해 결국 산자를 최소 25년에서 무기징역을 받을 수 있고 아마도 살아선 교도소 밖을 나오는 일이 없게 만들었다. 불행 중 다행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려니 우리나라 법은 과연 어떨까 싶기도 하다. 대체로 우리나라 법은 무르다는 평을 받고 있다. 연이은 여성 대상 범죄에 우리나라 법정은 어떤 형을 내릴지 모르겠다.

 

얼마 전, 혼자 사는 중년의 여성이 알지도 못하는 남성에게 이유 없는 괴롭힘을 당하자 경찰에 신고를 했더니 증거불충분으로 보호해 줄 수 없다고 했단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법은 어떤 경우에도 약자를 보호해 줘야하는 것인데 증거불충분이라니. 여성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데, 피의자에게 정신병이니 심신미약이니 온갖 이유로 그들을 보호해 주려고 하고 있다.

 

이 책이 범죄에 취약한 여성을 얼마나 대변해 주는 책인지 모르겠다. 물론 그런 의도로 쓰인 것인지 아니면 미국 내 촉망 받는 우리나라 젊은 예술가의 비참한 죽음을 알리기 위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로선 공교롭게도 시의가 그렇게 맞아 떨어졌다. 그런데 제발 부탁이다. 이런 작품을 통해서라도 우리나라에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가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을 생각해서라도 엄한 법의 구형을 적용해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 물론 피의자의 가족도 못지않은 고통을 당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서도 엄한 법적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우리나라엔 잘 안 알려져서 그렇지 실력 있는 소설가다. 그러니만큼 문체가 유려하기도 하다. 하나의 문학작품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일독을 권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6-06-18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이 폭행이나 성범죄를 당하면 누군가 나서서 도와줘야 하는데, 도와준 사람이 가해자가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요. 그래서 보고도 그냥 지나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단 나부터 살자는 마음인거죠.

stella.K 2016-06-19 14:01   좋아요 0 | URL
그런데 웃긴건, 또 다른 여자도 그 비슷한 일을 당했는데
얼마만에 한번씩 그집 아들이 왔다 가는 것을 알고 그 다음부턴
그런 일이 없어졌다는 거야.
여자는 남자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남자에 의해 보호도 받고,
그런 걸 보면 아무래도 여자는 유도라도 배워둬야 하려나 봐.
남자들 그러다 나중에 죄 받지.
선량하게 사는 남자들 조차 어떤 피해가 갈지 몰라.ㅠ

페크pek0501 2016-06-18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그의 가족은 앞으로 어떻게 사나, 하는 것이에요. 피해자도 그렇지만 가족의 고통을 생각할 때 남의 일 같지 않아요.

stella.K 2016-06-19 14:03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이요.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죽은 거야 아쉽긴 하지만
고통은 온전히 살아 있는 가족의 몫이잖아요.
그런 일이 나한테도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도 없고.
두루 세상 살기가 무섭네요.ㅠ

낭만인생 2016-06-22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해자의 유가족 즉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절절히 토로하고 있는 작품`에 눈이 가네요. 글을 참 잘 쓰십니다. 좋은 책 꼭 읽고 싶네요.

stella.K 2016-06-22 14:01   좋아요 0 | URL
저는글 잘 쓰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그저 감사할다름입니다.
이 책 좋더군요. 시간 나시면 읽어보시라고 감히 추천드립니다.^^
 
단테의 연옥 여행기 단테의 여행기
단테 알리기에리 원작, 구스타브 도레 그림, 최승 엮음 / 정민미디어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 영계에서 연옥이란 개념은 가톨릭에서나 있는 개념일 뿐 기독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연옥은 단순히 말에 지옥에 떨어지지는 않으나 천국에도 들어 갈 수 없는 영혼이 가는 곳이다. 그러니까 지옥에서 보면 다행인 것이고, 천국에서 보자면 아쉬운 곳이 연옥일 것이다.

 

연옥은 어찌 보면 뜻밖의 곳임엔 틀림없는 것 같다. 그래서 단테는 지옥에서 만난 영혼은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살았을 때 극악한 죄를 지은 영혼이 갔으니까 그건 당연했다. 그러나 연옥은 뜨악했다. 이를테면, 지옥에 있을 것 같은 영혼을 연옥에서 만났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데 그들 역시 거기 있을만한 이유는 있었다. 그들은 죽기 직전에 자신의 죄를 뉘우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천국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연옥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있어야할 요건은 살아 있는 사람이 연옥에 있는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테는 거기 있는 영혼들에게 수 없이 많은 부탁을 들어야 했다.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면 가족들에게 일러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전해 달라고.

 

그게 과연 근거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사실 연옥은 가톨릭에만 있는 개념으로 성경 어디에도 뚜렷한 근거가 될 만한 것은 없다고 알고 있다. 단지 짐작이 갈만한 예는 있다고 들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부자와 신앙심 좋은 그의 종이 어느 날 죽어 지옥엘 갔다. 불속에 있으니 신앙심 좋은 자신의 종더러 손끝에 물 한 방울만이라도 묻혀 자신의 입만이라도 서늘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 종을 시켜 가족들에게 일러 자신처럼 이렇게 지옥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도 부탁을 한다. 바로 인간의 죄를 경계하고 경건하기를 위한 말씀인데, 종을 시켜 물 한방을, 가족들에게 일러 지옥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은 소통과 벌을 유예시킬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럴 수 있는 공안이 연옥이라고 보는 것이다.(물론 난 가톨릭 신학자도 아니고, 오래 전에 얼핏 그렇게들은 것 같아 생각나는 대로 짜깁기한 것에 지나지 않다.)

 

하지만 기독교에선 연옥은 없다. 물론 죄를 짓고 살다가 죽음 직전에 회개를 한다면 그 영혼은 그냥 천국을 간다고 보는 것이다. 대신 천국은 7천 층까지 있는데, 살았을 때 신앙도 없고 쌓은 공덕도 없으니 좋은 곳에 있지는 않게 되겠지만 어쨌든 연옥이 아니라 천국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건, 연옥은 그렇게 자기 수행을 쌓고, 살아 있는 가족들이 기도해 줘야만 가는 다분히 자신의 의가 있어야 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마치 착한 사람이 천당 간다는 식의), 기독교에서는 내 의가 아닌 믿음으로 가는 곳이 천국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떤 개념이 옳으냐는 차치하고라도, 정말 연옥이 있다면 신의 자비를 위한 공간이라는 것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단테가 신곡을 쓴 이유는, 그가 망명한 이후 심각한 정치와 윤리, 종교적 문제들로 계속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그것을 해결해 보고자 썼다고 했다. 그런 것으로 봐 당대의 부패상이 어느 정돈지 짐작이 간다. 그렇지 않아도 단테는 말한다.

“... 교황은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전하긴 하지만 하늘의 행복을 사모하지 않고 지상의 왕이 되려 했기 때문에 정의를 행할 자격이 없다오. 목자가 탐욕에 눈이 어두워 양을 지키는 일을 내팽개치고 부를 찾아 나서는데 어찌 그를 아직도 목자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이오.(155p)라며 분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단테의 시대 땐 정교가 분립이 안 됐던 시대였으니 저 말은 액면 그대로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엔 분립이 되어도 역시 목자들의 탐욕과 부패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높은 영성에서 울림이 있게 전하지 못하고,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데 사용하는 목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린 감히 짐작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나는 새삼 신곡은 단테만이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의 사상과 깊이는 감히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그가 왜 신곡을 쓸 수밖에 없는가를 안다면 이 시대에 신곡은 이름을 달리해서라도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내가 볼 때 그는 자신의 나라와 유럽의 역사를 통해 윤리의 회복을 꿈꿨던 사람은 아니었나 싶다. 그게 또 지옥 편과 같이 연옥에서도 신화와 성서 말씀의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의 이 세대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테 시대의 역사적 인물은 우리와는 너무 많이 떨어져 있어 다소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렵다. 좀 더 가까운 예로 잡아 볼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되는 것이다. 하긴, 시대에 저항하는 책을 썼다 스러져간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그러고 보면 시대정신은 살아 있다는 생각을 또 한 번 해 보게 된다. 욕심이라면 그렇게 단테처럼 인문주의로 무장된 또 다른 단테를 꿈꿔 본다는 거지.

 

이 책은 소설버전이긴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매력적이란 느낌이 든다. 그동안 신곡 읽기의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그런 것을 날려주기에 적합한 텍스트인 것 같아 만족스럽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신곡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모쪼록 신곡 읽기 운동 같은 것이 일어나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보게 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5-10 1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6-05-10 18:57   좋아요 1 | URL
그럴수도 있지요. 근데 조금 더 천국에 가까웠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그 반대로 가는 것 같기도 하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