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휴먼 - 장애 운동가 주디스 휴먼 자서전
주디스 휴먼.크리스틴 조이너 지음, 김채원.문영민 옮김 / 사계절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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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애인이 되었고,

시민이 되었고,

결국 내가 되었다

Being Heumann 이라는 원제를 봤을 때 Heumann 이라는 단어를 '인간'으로 순간 해석했는데 또한 그순간 이상했다. 휴먼 철자가 저거였나;;; 나의 영어사용능력은 항상 믿을 수 없으므로 검색을 해보았을때 인간이라는 단어는 Human 이었다. 그제서야 저자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묘한 발음의 동일성으로 인해 한국어로 읽으면 더욱 의미심장해지는 저자의 성씨가 '휴먼' 이었다. '휴먼이 되다' 라는 문장에 대한 한글발음적 의미로는 '인간이 되다' 혹은 '(성씨로서의)휴먼이 되다' 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이 짧은 한 문장이 곧 저자의 삶을 대표할 수 있게 되다니 장애운동가로서의 저자의 삶은 운명적인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자의 삶은 그야말로 '장애인이 되고 시민이 되고 '내'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장애인이 아니고 특이한 시민이 아니고 그저 '주디스 휴먼'이 되어가는 과정은 그토록 험난한 시간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한 번도 장애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나의 부모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부모님에게 그에 대해 물어본 적은 없지만, 만약 내가 그런 질문을 했더라도 부모님은 나에게 장애가 없었다면 우리 삶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란 식의 대답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님은 나의 장애를 수용했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이 바로 나의 부모였다. 그들의 방식이었다. (p. 10) -들어가며 中-

주디스의 부모는 나치의 만행을 피해 미국에 이민온 분들이었다. 옳지 않은 것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던 가치관을 가졌고 소아마비인 딸을 시설에 보내라는 의사의 권고를 거부했다. 주디스가 학교에 입학을 거부당하자 갖은 노력을 다해 비록 장애인전용학급에나마 뒤늦은 입학을 시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어린 주디스가 집밖에서의 경험들로 인해 상처를 받으면서도 '함께' 맞받아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부모의 교육관 영향이 컸다.

나는 아픈 사람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아픈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왜 그 아이는 내게 그렇게 물어본 걸까?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사라졌다. 나는 아픈 사람인가? 그 아이의 눈을 통해 나 자신을 보니 주변의 빛이 사라졌다. (중략) 나는 달랐다. 항상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온 세상은 내가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은 집 안에서 침대에 누워 있다. 아픈 사람은 밖에서 놀지 않고, 학교에 가지도 않는다. 아무도 그들이 밖에서 놀거나, 어떤 무리의 일원이 되거나, 세상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p. 35)

주디스가 휠체어를 타고 거리를 지날 때 한 아이가 물었다. 신기하다는 듯이 휠테어를 타고 있는 주디스를 보며 아프냐고 물었다. 어린 주디스는 아프지 않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과 그 아이의 다름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다. 교육관계자들도 특수교육반 아이들이 공부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특수교육반은 일종의 돌봄케어였다. 하지만 주디스는 책을 많이 읽었고 공부를 열심히 했으며 대학에 입학했다. 그렇게 교사자격증을 땄으나 신체검사에서 교사먼허를 불허당했다. 스스로 걷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르칠 자격이 없다고 통보받았다. 다른 모든 시험은 모두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던 것이다.

나는 분노했고 마음 깊이 큰 상처를 입었다. (중략) 내 이야기를 세상에 직접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장애인이 교육, 고용, 교통 접근성 측면에서 마주하는 삶의 장벽이 일회성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리기 위해 내 이야기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p. 91)

주디스의 장애는 재활로 치료될 수 없는 영구적인 것이었는데도 의학적인 이유로 취업을 거부당했다. 주디스는 지인들을 통해 신문에 기사를 내고 법정 소송을 시작했다. 미디어는 교육당국을 맹공격했고 천운으로 개혁성향의 판사를 만나 소송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주디스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 운을 자신만의 성공경험으로 만드는데서 그치지 않았다. 주디스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생각했고 멈출 수도 그만 둘 수도 없었다. 그렇게 정치와 법의 세계에서 '장애'에 대한 혐오와 편견을 없애는 활동에 주력하게 되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3류시민으로 본다면,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과 당신이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당신과 함께 싸워줄 친구들이다. (p. 104~105)

1970년대 였다. 온갖 새로운 문화와 가치관들이 넘쳐나던 시대였고 온갖 새로운 활동이 태동되던 시대였다. 시대적 억압이 끝나고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겨나던 때였다. 장애를 갖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늘 보이지 않던 사각지대에 있었기에 그들이 거리에 건물에 학교에 나타나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에도 우호적인 시대였다. 언론과 시민들은 대체로 장애인들의 외침에 관심을 가져주었고 그렇게 정치권과도 연결될 수 있었다. 주디스는 그러한 장애인운동의 선두주자로서 백악관에서 일할 기회가 생기기도 했고 그렇게 활동범위와 영향력은 점점 커질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장애 활동가들은 기술적인 부분을 지원하고, 엔지니어 및 재무 분석가와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논쟁하기 위해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해야 했다. 그 결과 더 많은 공부를 하면서 점차 전문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우리의 일이 탄력을 받는데 큰 힘이 되었다. 동시에 우리는 변화가 일어날 때 사람들이 학습 곡선상에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임을 인정해야 했다. 사람들이 장애인의 시각에서 삶을 바라보는 것에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거부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이야기를 들려줌녀서 우리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해야 했다. (p. 220)

평등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도 문제였다. 그게 아닐 때도 말이다. 평등은 공정성에 관한 이야기다. 접근 기회의 형평성에 대한 이야기다. (p. 221)

요근래 몇년간 공정하다는 생각이 착각임을 알려주는 책들이 꽤 많았었다. 자유와 평등에서 자유가 그나마 획득되었다면 평등은 아직 획득되지 못한 가치인것 같았다. 평등은 다시 공정의 문제로 이어졌다. 무엇이 공정한가? 같은 출발선상에 선다는 것이 어떤 조건들을 필요로 하는가? 한날한시에 동일한 장소에서 시험을 보는 것이 공정한가? 그 시험을 보기까지 준비하고 공부했던 과정은 결코 동일하지 않았는데? 그 시험장소에 오기까지 누군가는 자가용으로 오고 누군가는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지 못할 수도 있는데? 접근기회의 형평성이란 문제는 굉장히 어렵고 복잡한 문제다. 게다가 주디스는 장애인 사회에서도 남녀의 처지가 다름을 체감해왔다. 장애인이자 여성인 경우 더욱 불공정한 상황에 처해지게 되곤했다.

사실 법안이 하원 위원회에서 교착 상태에 빠질 무렵까지는 미칠 것 같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민주주의는 본래 느리기 때문이다. 민주적 정부의 일은 오래 걸리고, 느리고, 힘들기 마련이다. 그래야 맞다. (p. 242)

민주주의 정부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에 지속적으로 투자한다면 우리는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이 복잡하다고 느껴질 때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복잡하고 그 과정에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본래 그러해야 한다. 모든 사람의 목소리를 포함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보호하고, 미국의 다양성을 드러내는 이 모든 것은 사안을 깊이 들여다보고, 다양한 토론과 회의를 거치며, 시간이 걸리는 견제와 균형의 방식을 따르기 따르기를 민주주의에서 요구한다. 의사 결정에는 시간이 걸린다. 무엇보다 우리는 사실을 검증하고, 납득할 만한 객관성을 보이며, 내 말을 듣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정부를 원한다. (중략) 불편하고 원망스럽다고 느껴진다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p. 297~298)

저자의 투쟁은 오랜 시간이 걸렸고 때로는 성과가 없다고 느껴질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민주주의는 그래야 맞다고 말한다. 오래 걸리고 그래서 힘들고 그래서 그 느림을 참을 수 없을 때도 있지만 그러한 민주주의여야 다양한 소통을 해내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며 다양한 입장을 보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오바마가 잘 해놓은 일을 트럼프가 망쳐놓아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 저자는 계속 활동해야 함을 강조한다.

'장애는 인간사의 자연스러운 한부분이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질수록, 더 많은 전쟁을 일으킬수록, 의학이 발달할수록 이전 시기라면 아마 죽었을 사람들이 점점 더 오래 살게 될 것이다. 아마도 장애를 가진 채.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을 중심으로 사회를 설계해야 한다. (p. 281)' 라는 저자의 말은 미래사회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별이 무의미해질 수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그동안 장애에 대해 너무나 협소한 범위로 생각해 온 것이 아닐까.

사회 안에서 전체 집단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될 때 민주주의 구조는 약화된다. 서로 거리를 두고 분리되다 보면 이해와 공감에 실패하고, 궁극적으로 불의를 초래하거나 타인의 권리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상상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나라로 서서히 변해가는 것을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차별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어떻게 느껴지는지 그 복잡성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면 불평등과 가난의 책임을 사회 구조가 아니라 개인에게도 쉽게 돌리게 된다. 서로를 비난하는 데만 급급한다면 평등을 중요하고 가치있게 여기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종종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수동적인 태도, 즉 우리가 혼자이고 개별적인 목소리일 뿐이라고 느끼는 데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모두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한다. (p. 300~301)

저자의 인생역정을 고스란히 담은 이야기들은 생생했고 읽을수록 그 생동감에 빠져들어 읽게 되는 책이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첫 페이지의 문장이 문득 생각났다.

'무엇보다 '나 홀로'가 아니라 '우리'였다는 말을 먼저 해야겠다. (p. 20)'

저자는 늘 '함께'였다. 그것은 물론 운이 좋아서였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저자의 노력이 통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이고 따라서 함께일때 그 해결능력도 높아지게 된다. 사회가 갈수록 개개인으로 분리고립 시키고 민주주의는 갈수록 더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꾸준히 느리게 '함께' 해야 한다. 당장 눈앞에 한쪽으로 치우친 빠른 해결법을 강조하는 이들을 조심하자. 느리지만 합리적인 해결을 위해 우리는 계속 '함께' 소통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장애운동가의 삶의 이야기이자 함께하는 소통의 이야기로 의미있게 읽히는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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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1 - 인도, 문명의 나무가 뻗어나가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동양미술 이야기 시리즈 1
강희정 지음 / 사회평론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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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시대가 온다

이제 미술의 역사를 다시 쓸 차례

일명, <난처한 미술 이야기> 시리즈를 정말 좋아한다. 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시리즈를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6권 중 1권과 2권을 읽으며 너무 유익하고 재미있어서 시리즈 전체에 욕심이 났던 책이었다. 서양사를 읽을 때도 박물관에 전시물을 보러 갈때도 꼭 한번 읽고 넘어가야 할 시리즈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번엔 동양미술에 대한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1권은 인도편이다. 아~! 기대된다!!!

미술을 회화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건 우리가 그만큼 서양의 기준에 익숙하다는 뜻입니다. 이제부터 탐험할 동양미술의 세계는 훨씬 넓고 깊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단단히 준비해주세요. (P. 16)

저자는 이른바 고대문명발상지 4곳중 3곳이 동양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서양사관에 젖어 온게 아니냐고 묻는다. 동양미술 이라고 하면 수묵화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서양의 기준으로 판단하는데 너무나 익숙해진 때문이라고 말한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 따라서 동양미술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 있어서 보다 열린 태도로 임할 것을 당부하며 보다 광범위한 예술 세계를 만나게 될 것을 예고한다.

1872년 일본정부에서 해외 박람회에 참가하면서 만들어낸 번역어예요. 독일오 쇤네 쿤스트(Schöne Kunst)의 번역얼오, 쿤스트는 원래 미술보다 예술이란 뜻에 더 가까워요. 그림 뿐만 아니라 시, 음악, 조각, 공산품 등이 포함되죠. (p. 18) 그런데 우리가 아는 미술사는 서양 관점이에요. 혁신을 핵심 기준에 놓은 미술이죠. 동양 미술은 달라요. 서양미술이 스스로 발전을 거듭한 끝에 일상에서 먼 곳까지 달려나갔다면 동양미술은 생활에 밀착해 있습니다. (p. 20) 동양미술이라는 세계를 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의 기준을 내려놓고 우리 주변을 새롭게 돌아보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입고 먹고 자는 모든 곳에서 동양미술이 단서를 찾을 수 있어요. (p. 23)

미술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본인들이 만든 번역어 였다. 번역어란 아무리 충실해도 원어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기란 어렵다. 예술을 의미하는 Art 라는 영어단어의 기원도 찾아 올라가다보면 테크네라는 그리스어로 거슬러올라가지게 되는데 테크네는 예술이라기 보다는 기술에 가까웠다. 여하튼, 그러한 미술이라는 단어 자체도 일본이 서양을 바쁘게 쫓가며 만든 단어였기에 서양 관점이 담길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게게 지금 미술이나 예술은 일상과 너무나 멀고 먼 비싸고 귀한 무엇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동양미술 세계는 달랐다고 말하여 따라서 서양식 관점을 벗어날 것을 다시한번 강조한다. 또한 동양과 아시아라는 단어의 의미와 그 간극에 대한 설명도 덧붙이는데 일단 '동양미술'로 부르기로 한다.

우리가 먼저 가볼 곳은 인도입니다. 동양미술의 시작으로 인도만큼 적당한 출발지가 없어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인도에서 불교가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p. 38) 제야의 종도 원래는 불교 행사였어요. (p. 39) 통치방식을 바꾼다고 1000년간의 세계관이 갑자기 바뀔 리 없지요. (중략) 조선 건국 이후 600년이 더 흘렀지만 우리는 아직 그 세계관 안에 있습니다. 잘 몰라서 안 보이는 것뿐이에요. (p. 41) 한가지만 강조하고 싶어요. 미술에는 그 미술을 만들어낸 이들의 역사와 문화, 즉 세계가 깃들어 있습니다.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우리는 서양 중심으로 세상을 봐왔지만 그 역시 여러 관점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물론 알던 대로, 익숙한 대로 세상을 본다고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닫힌 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가치는 충분하죠. 알에서 깨어나야 더 넓은 세상이 열리는 것처럼요. 동양미술, 더 나아가 동양을 이해한다는 건 우리를 이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p. 42)

저자는 동양미술에 들어가기에 앞서 동양이란 어디이고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으며 왜 동양미술을 알아야 하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조곤조곤 설명해 준다. 하나하나 주옥같은 말이 많아서 포스트잍을 붙이며 읽다가 앗! 했는데, 소단원내용이 하나 끝날때마다 <필기노트>로 깔끔하게 이미 정리되어 있었던 것이다.이 책을 읽고 요약해보고픈 사람은 매 단원마다 있는 이 <필기노트>로 핵심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매 대단원이 끝날때마다는 본문에 나왔던 유물들을 모아 간략한 설명과 연표로 정리해놓음으로써 핵심노트 뿐만 아니라 시각적 자료의 되새김까지 가능하게 해놓았으니 이 책의 친절한 구성에 감사할 따름이다.

인도가 지금과 같은 영토를 갖춘 건 영국 식민지 시기부터입니다. 말하자면 어느 날 갑자기 영국이 '여기 다 우리 땅!'하며 경계를 긋고 이를 인도란 이름으로 관리하기 시작하면서지요. 생각보다 얼마 안 된 일이에요. (p. 59)

이 책은 '미술이야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긴 하지만 풍부한 미술적 자료를 갖춘 역사책에 가까웠다. 그렇다고해서 인도의 역사이야기 라기 보다는 인도를 중심으로 한 동양 역사의 유래를 풀어내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인도라는 나라의 이름부터 지금의 인도에 이르기까지 간략하게 설명되는 인도 역사는 동양미술, 인도미술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 바탕이었다. 제대로 된 '의미'파악은 늘 제대로 된 배경'지식'에서 출발하게 되므로.

문명의 시작 연대는 점점 올라가고 있습니다. 인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인도 최초 문명을 인더스 문명이라 배웠겠지만 그 이전에 있었던 문명이 최근에 발견됐거든요. (p. 79) 이 문명을 인더스 문명에 앞선 문명이란 뜻에서 먼저 선(先)자를 붙여 선인더스 문명이라 불러요. (p. 80) 기원전 2000년경 기후 변화로 날씨가 급격히 건조해지자 메르가르에 살던 사람들이 인더스 계곡으로 이주했을 거라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p. 82) 메르가르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게 기원전 7000~6000년이에요. 지금으로부터 약9000년 전입니다. (p. 83) 메르가르는 비교적 최근인 1974년에 발굴됐습니다. 이 사실이 교과서까지 반영되려면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해요. 시간이 충분히 지나야 '추상적인 무늬를 그린 게 신석기 문화의 특징이다'라고 배웠던 우리의 고정 관념도 바뀔 수 있을 겁니다. (p. 88)

신석기혁명과 농업혁명에 너무나 익숙한 나로서는 괴베클리 테페의 유적을 알게 되었을 때 무척 충격이었다. 농업혁명 이전에 집단거주가 있었을 수도 신석기 혁명이 신석기 혁명이 아닐 수도 있게 할 괴베클리 테페 유적은 1963년 발견되었을 땐 그저 무덤이겠거니 했다가 1994년 재발굴에 들어가면서 1만년~9천년 전의 고대인류 유적지로 인정받아 2018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발굴 및 연구중이다. 그런데 1974년에 발굴된 선인더스 문명에 대해선 왜 지금껏 단 한번도 들어본 적 없었을까? 이런....

동양 문명이 서양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한 서구 학자들의 선입관이 반영돼 있습니다. 즉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문명의 지모신은 그리스 문명이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인도까지 퍼져 나간데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애초에 인도 최초 문명의 발상지를 인더스강으로 봤던 것도 인더스강이 메소포타미아와 가깝기 때문이었고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인더스 문명을 낳았다는 생각은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오랫동안 기정사실처럼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인더스 문명을 만든 드라비다인을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라고까지 했죠. 하지만 메르가르의 발굴을 통해 드라비다인이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훨씬 먼저 문명을 일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 장은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p. 92~93)

아직 논쟁중인 문제에 대해 저자는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진 않는다. 다만 지금껏 상식이라고 여겨왔던 고대문명에 대한 상식을 깨트릴 것을 제안하는 듯 했다. 모든 문명은 서로 교류했다. 따라서 서로 영향을 끼쳤다. 어디가 먼저이고 어느것이 우수한지를 따지는 것은 나중 문제다. 그러한 것보다는 그 교류와 영향을 통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나또한 그런 저자의 생각에 깊이 동감한다. 이후 저자가 풀어내주는 이야기들은 그러한 오픈마인드를 더 탄탄하게 지탱해줄 만큼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처음 봤을 땐 두꺼워보이던 책이었지만 재미난 소설읽듯이 책장이 아주 술술 넘어갔다.

다만 유념했으면 합니다. 강의를 처음 시작할 때 동양이라는 말의 의미를 짚었던 걸 기억하나요 아시아를 하나로 묶기 위해 동양이라는 단어를 쓰고, 불교를 공통된 정신으로 내세운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고작 몇백년 전인 19~20세기의 일본에서였지요. 일본 근대미술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오카쿠라 덴신이 최초로 동양이란 세계를 정의하고 퍼뜨린 사람입니다. (p. 496) 오카쿠라 덴신의 주장은 훗날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배경이 된 대동아 공영권 개념을 뒷받침할 때 이용돼요. (중략) 여기서 우리가 불교라는 관점에서 인도를 돌아본 것처럼 19~20세기 일본 학계에서도 같은 일을 했었단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지끔까지 인도를 일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만 이해했어요. 하지만 이제 그 프리즘 밖으로 나올 때입니다. 불교를 통해 아시아 미술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방향 자체가 틀린 건 아니에요. 아시아 일대에 불교가 어떻게 영향력을 미쳤는지 좇는 여정은 여전히 의미있고 유효합니다. 다만 그 여정에는 과저 제국주의자들이 아시아와 동양, 인도에 덧씌워놓은 선입견을 벗겨내는 과정이 동반돼야 할 거에요. 난생처음 한번 공부하는 동양미술 이야기가 그 성공적인 시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p. 497~498)

책에 실린 이미지 자료들보다도 매단원마다 잘 정리된 핵심포인트들보다도 역사와 맞물려 흥미롭게 읽히는 동양미술이야기 보다도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마지막 페이지에 쓰여있던 바로 저 문장들이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갇혀 있던 미술에 대한 예술에 대한 프레임을 넓히고 선입견을 벗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그럴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그러한 노력에 이 책과 이 시리즈가 한몫할 것이라 믿으며 다음 편을 기다려본다.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읽은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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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유재민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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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을 읽기 전 먼저 읽으면 좋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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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유재민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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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종교·문화적으로 시대를 지배한

'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이 작고 얇은 책의 제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지만, 이 작고 얇은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집대성한 그의 대표작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 이렇게 작고 얇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 책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엄청난 책을 읽기 전 보면 좋을 훌륭한 책이다. 원전번역서가 아니지만 원전번역서와 세트로 읽어야 할 책이라고나 할까 ㅎㅎ

이 작고 얇은 책은 사실 시리즈다.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시리즈로 동서양 철학 고전을 쉽고 입체적으로 읽도록 도와주는 안내서인데, 시리즈 중 한권인 <모어의 유토피아>를 인상깊게 읽었던 터라 다른 책들도 궁금했고 그렇게 이 책을 읽게 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의 철학자이자 현실의 철학자다. 그의 모든 사상이 그러하지만, 인간의 삶을 다루는 윤리학적·정치학적 저술들 속에서는 이를 보다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그는 타고난 외모나 물려받은 재산이 많을수록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을 하는 철학자이다. (p. 5)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분량에 있어서나 내용 이해의 측면에서 평범한 독자들이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읽어내기 힘든 저술이다. 이해를 방해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그의 개념 사용에 있다.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몇 개의 핵심 개념들 (중략) 이해와 어떤 점에서 다르고, 현대적인 관점에서라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염두에 두면서 만들어졌다. 부디 이 책을 읽고 난 독자들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직접 대면할 용기를 가지기를 바란다. (p. 7)

결론적으로 먼저 말하자면 아주 유익했다. 엄두도 못냈던 책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대면할 용기가 조금은 생긴듯 하다. 비록 근시일내에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아예 손도 못대볼 고전이 아니라 내가 언젠간 읽을 고전목록에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포함된 것은 이 작은 책 덕분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작한 학문의 이름에는 윤리학, 정치학, 수사학, 미학, 생물학, 화학, 경제학, 경영학 등 우리가 들어본 적 있는 대부분의 학문분과들이 포함된다. 그에 걸맞게 후대 사람들은 그를 '만학(萬學)의 왕'이라고 불렀다. 또한 서양 중세 시대에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대사상가들로부터 '그 철학자'로 불렸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을 언급할 필요 없이 그냥 '그 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는 식으로 한 명의 사상가가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받아들여져던 것이다. (p. 13)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는 행복, 중용, 덕, 정의, 우정 등 다양한 주제들이 등장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먼저 '행복'개념을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p. 14) 역사상 위대한 철학자들은 대부분 돈이나 타고난 음색이나 외모 같은 '우연'적인 것들에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중략)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점에서 매우 현실적인 철학자다. 그는 돈이나 타고난 재능 같은 '우연성'들이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고, 참된 행복과 우연성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탐구한다. (p. 16)

이 책에는는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 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부제만 보면 어찌어찌해라 라는 식의 실용적 지침을 배울 수 있는 책 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사실 이 부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집중 탐구한 주제를 압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는데 그 행복이 무엇이냐를 탐구하다 보면 인간의 본성과 인간이 지켜야 할 무엇을 탐구하게 되고 결국 행복한 사람이 갖게 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서 이것이 모아져서 일종의 윤리처럼 받아들여 지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책이 아니라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 '훌륭한 성품을 갖춘' 사람을 만들기 위한 책이다. (중략) '윤리'는 그리스어 '에티코스'를 번역한 단어다. '에티코스'의 어원은 '습관'을 의미하는 '에토스'이고 우리가 습관을 들여 좋아지거나 나빠지는 것은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성격' 혹은 '성품'이다. 이런 점에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성격에 관한 책' 혹은 '성품에 관한 책'이지, 착한 사람이 따라야 하는 법칙이나 착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윤리학'은 정확하게 말해서 '성격학'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전제해야 한다. (p. 33)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행복'의 윤리학으로 불린다. 그의 '윤리학'적 사유는 '행복'에 관한 논의로 시작되어 '행복'에 관한 검토로 막을 내린다. (p. 36)' 고 한다. 어떻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행복론 혹은 성품론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윤리학'에 대해 기존에 갖고 있던 상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내려놓고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윤리적? 도덕적? 이런 것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가 있을 텐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것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이 철학자는 늘 행복에 관심을 기울이고 특히 인간의 행복에 대해 철학적 사유를 한다. 이러한 철학자의 사상이 왜 '윤리학'으로 전해졌는지 의아해질텐데 저자는 어원적 의미와 당대의 사상적 변화를 토대로 핵심만 쏙쏙 골라 간단명료하게 설명해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주관의 만족감이나 즐거운 감정으로 이해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주관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그의 행복은 객관적이다. 행복의 그리스어 어원은 '에우다이모니아'이다. 여기서 '에우'는 '좋은'을 의미하고, '다이모니아'는 '신적 존재, 수호신'을 의미해서, 어원상 행복은 '좋은 수호신의 보살핌, 신이 내린 행운'이 된다. 어원상으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주관의 만족감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p. 37) 그리스어, 영어, 한자어 모두 하나의 단어가 '착한' 과 '좋은'의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 셈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가 있는데, 그가 사용한 '아가톳'를 '착하다'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윤리학 책은 착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 책은 훌륭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각자의 욕망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이성을 어떻게 발휘해야 하는지, 인간관계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등을 알려준다. (p. 38)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행복의 윤리학이자 '덕'윤리학이다. 행복으로 시작하지만, 저술의 대부분은 '덕'을 해설하는 데 할애된다. (p. 39)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은 '좋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행복론은 객관주의적 행복론을 표방한다. (p. 41)

그리스어 '아가토스' 영어의 'good' 한자어 '善' 은 모두 '착한' 과 '좋은' 의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윤리학' 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착한' 이라는 뜻이겠거니 여기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에 역점을 두었다. 자신이 좀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는 것을 그렇게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을 우리는 도덕적이라거나 윤리적이라고 말할 때가 종종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니라고 말한다. 개인적 쾌락주의도 초월적 탈세속주의도 집단적 공리주의도 사회적 윤리원칙도 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행복'하지 않은 것들이다. 어느 하나만 콕 집어 맞다 라고 혹은 틀리다 라고 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윤리'는 다른 차원의 답변을 시도하는 것으로 현대에 와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고 하는데 이 얇은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왜 그런지 수긍할 수 있었다.

저자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는데 필수적인 개념들을 설명해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하는 단어를 지금 현대어로 번역했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번역됐다고는 말할 수 없기에, 그가 그당시 왜 그단어를 사용했는지를 알고 읽어야 그 참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작고 얇은 책이 알려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 개념들은 무척 유용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아직 읽지 않았음에도 어렴풋이 그의 사상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쉽고 편하게 읽혔다. 책의 뒷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도 알려주니 이또한 더할나위 없이 좋은 참고서라 할만 하다. 그 중에서도 <성격의 유형들, 테오프라스토스, 쌤앤파커스, 2019> 라는 책과 <세 통의 편지(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2), 에피쿠로스, 나남, 2021> 그리고 <덕과 지식, 그리고 행복, 윌리엄 J 프라이어, 서광사, 2010> 이라는 책은 언젠가 꼭 읽어리라 다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이나 그의 사상이 궁금했던 사람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관심이 있지만 시작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아마 한결 가뿐해진 기분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 것같다.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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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농장 책세상 세계문학 5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책세상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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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

조지 오웰의 작품은 엄청나게 유명해서인지 안 읽었는데도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줄거리를 대강 알고 있기에 더 그런것 같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렇게 대충 아는 것과 온전히 작품을 읽는 것은 천지차이의 깨달음을 준다. 유명한 문학 작품들이라 해도 나는 그닥 관심없는 작품들이 종종 있었는데 몇달전 책세상 출판사에서 나온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마음가짐이 바뀌었다. 새로 나온 번역도 좋았지만 작품 뒤에 실린 독후감이 참 좋았다. <위대한 개츠비>의 독후감은 백민석 소설가가 썼는데 '위대한'이라는 수식어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던 그동안의 내 비호감을 변화시켜 주었다. 이번 <동물농장>은 장강면 소설가가 쓴 독후감이 실려 있었는데 역시 현실비판적 공감도를 높여주는 촌철살인 문장이 마음에 남았다.

동지 여러분, 오늘날 우리 동물들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우며 덧없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겨우 목숨을 부지할 정도로 최소한의 먹이를 받아먹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몸에 남아 있는 힘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죽어라 강제 노동에 시달립니다. 우리는 이렇게 일만 하다가 주인이 더는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는 순간, 소름 끼치도록 잔인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휴식은 무엇인지 아는 동물은 이 잉글랜드 땅에 단 한 마리도 없을 겁니다. 이 땅에서 자유로운 동물은 하나도 없다, 이말입니다. 동물의 삶, 그것은 비참한 노예의 삶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처음부터 정해진 우리의 운명이며 자연의 섭리일까요? 우리가 사는 이 땅이 너무나 척박해서 우리에게 안락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여러분! 단언컨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p. 13)

동지 여러분! 오늘 밤 내가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은 인간과 맞서 싸우는 것, 즉 반란입니다! (중략) 동지 여러분, 남은 생애 동안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십시오! 무엇보다 오늘 내가 말한 것을 여러분 후손에게도 전달하십시오! 미래 세대들이 승리를 얻을 때까지 투쟁을 이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동지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의 굳은 결의가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논리에 유혹당해서도 안 됩니다. (중략) 우리 동물들끼리 단결해야 합니다. 투쟁을 위해 투철한 동지 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인간은 모두 우리의 적이고, 동물은 모두 우리의 동지입니다. (p. 16) 우리는 모두 힘을 합해 인간과 맞서 싸우되 절대로 그들을 닮아가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을 꼭 기억하십시오. 승리를 쟁취한 뒤에도 인간이 저질러온 악행을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p. 17)

매너 농장은 평범하다면 평범한 농장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이 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하고 있었고 농장주는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질뿐 동물들에 대한 애정도 배려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이든 돼지 한마리가 동물들을 모아놓고 그동안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들려준다. 동물들은 그 연설을 듣고 각성해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소설의 앞부분에서 대놓고 설명해놓은 이상사회를 뒤로 가면서 슬금슬금 너무나 자연스럽게 파괴시키는 것을 읽다보면 작가의 탁월한 표현에 저절로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죽은 돼지 영감의 가르침을 다듬어서 '동물주의'라는 사고체계를 만들어낸 동물들은 비밀모임을 갖기 시작하고 서로서로 교육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배고픔에 지쳐있는데 채찍질까지 당하자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농장을 장악하게 된다. 매너농장이라는 간판은 내리고 '동물농장'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내건 후 영리한 돼지들의 지휘에 따라 동물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농장을 운영해간다. 합의하에 만들어낸 7대강령에 대해 보다 쉽게 각인시키기 위해 하나의 금언으로 압축하는데, 그것은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 였다. 하지만 너무나 똑똑한 돼지들은 점차 교묘하게 다른 동물들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귀한 우유와 사과는 돼지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동물들은 스스로가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돼지들의 지배에 점점 예속되어 가는 중이었다.

동지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우리 돼지들은 힘든 두뇌 노동을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이 농장의 전반적인 경영과 관리 업무를 모두 우리가 맡고 있다, 이겁니다. 우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하면 동지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줄까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우유를 마시고 사과를 먹는 건 다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p. 43)

그러다 동물농장 사회는 전복됐다. 사나운 개들을 앞세운 돼지 한마리가 모든 권력을 강제적으로 장악해버렸다. 동물들은 갈수록 점점 더 많이 노동하고 점점 더 많이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인간지배 아래 있던 때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라는 돼지들의 말에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상황은 수년 전 인간 타도를 목표로 뭉쳤을 때 모든 동물이 꿈꾸던 미래의 모습과 완전히 다르다고, 메이저 영감이 맨 처음 반란을 언급했던 그날 밤, 동물들이 기대했던 것은 공포와 살육으로 얼룩진 미래가 아니었다. 클로버가 머릿속에 그렸던 미래는 굶주림과 채찍질로부터 자유롭고, 모든 동물이 평등하며,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였다. 메이저 영감이 연설하던 날 밤, 클로버가 앞다리를 구부려서 어미잃은 새끼오리들을 보호했던 것처럼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야말로 클로버가 꿈꾸는 동물농장의 참모습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영 딴판이었다. 동물들은 사나운 개가 사방에서 으르렁대며 어슬렁거리는 바람에 아무도 자기 생각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런 데다 동룓르이 자아비판을 한 뒤 잔인한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p. 92)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동물들은 여전히 돼지들이 시키는데로 죽어라 노동했고 굶주림에 시달렸다. 어느새 지도자격 돼지였던 나폴레옹은 모든 성공과 행운의 주인공으로서 온갖 대단한 칭호의 수식어를 이름앞에 붙이도록 했다. 동물농장은 '공화국'으로 선포되었고 대통령 후보자는 단 한마리의 돼지 뿐이었으므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하늘너머 세상엔 '슈가캔디 마운틴'이 있어서 영원히 편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하고 다니는 까마위 모세의 말을 예전엔 다 무시했지만 이제 동물들은 모두 그 말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돼지들은 쫓아냈던 모세를 농장에 살게 했다.

농장은 전에 비해 훨씬 부유해졌지만, 동물들의 생활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물론 돼지와 개들은 예외였다. (p. 131) 동물들의 삶은 하루하루 힘겨웠다. 동물들이 바라는 것이 모두 충족되지는 않았다. 충족되기는 커녕 부족한 것투성이였다. 하지만 동물들은 자신들이 다른 농장의 동물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p. 134)

힘겨운 생활 속에서도 동물들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생각에 버텼다. 자신들이 이루어낸 성과가 동물농장의 존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압축적인 표현이 바로 변해버린 강령이었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더 좋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더 좋다!" (p. 136)

돼지들이 두 다리로 걷기 시작했다!

한때 이웃 농장에서는 이곳 동물 농장의 훌륭한 경영주에게 적대 감정, 아니 정확히 말해 걱정스러운 마음을 품었던 게 사실입니다. (p. 138) 하지만 이제 그런 의구심이 말끔히 해소된 겁니다! 오늘 나와 내 동료들이 이곳을 방문해 직접 농장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둘러본 결과,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중략) 이 농장의 하급 동물들은 전국의 그 어떤 동물들보다 많이 일하면서도 먹이는 더 적게 받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효율적인 농장 운영 방식입니까? (p. 139) 돼지 여러분에게 골치아픈 하급 동물들이 있다면, 우리 인간들에게는 하층민들이 있지요! 푸하하! (p. 140)

앞에서 한 돼지 영감이 했던 연설을 상기해 보라. 지금의 농장 상황이 더더욱 소름끼치게 느껴질 것이다. 인간처럼 굴고 인간과 어울리는 돼지들의 모습을 창밖에 보던 농장 동물들...

창밖의 동물들은 돼지의 얼굴에서 인간의 얼굴로, 다시 돼지의 얼굴로, 또다시 인간의 얼굴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동물들은 어느 것이 인간의 얼굴이고, 어느 것이 돼지의 얼굴인지 끝내 구별하지 못했다. (p. 143)

마지막 장면의 여운이 길다.

왜냐하면 저 상황은 80여년전 조지 오웰이 쓴 저 문장은 여전히 지금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오웰은 사회 정의에 민감한 작가로서 진실을 증언하고 사실을 기록하려는 욕구가 강했다. 그는 '폭로하고 싶은 거짓이 있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 진실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거짓과 진실은 악과 선, 억압과 자유, 굴종과 저항을 대신하는 말이었다. (p 147) 조지 오웰이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기간은 첫 작품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발표한 1933년부터 마지막 작품인 <1984)를 출간한 1949년까지 17년이다. 이 기간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류 전체가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채 피를 흘리던 비극의 시기로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파시즘, 독일 히틀러의 나치즘, 소련 스탈린의 스탈린주의, 일본의 군국주의 등 전체주의의 양상이 극에 달했다. 이로 인해 전 세계는 공포와 광기에 휩싸였으며,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말살되고 곳곳에서 끔찍한 살상이 자행되었다. 오웰은 작품을 통해 그런 잔인무도한 시대에 저항하고, 폭력성을 낱낱이 고발했다. 그는 특히 전체주의를 극도로 혐오했다. (p. 150~151) <1984>에서도 그렇지만 <동물농장>을 보면 작가 오웰이 가장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아주 가까운 과거에 일어난 일조차 쉽게 잊어버린다는 점이다. 망각은 똑같은 역사를 반복하게 하고, 사회 정의나 윤리적 원칙이 제자리걸음 치게 한다. 오웰은 사람들에게 바로 그런 사실을 환기하려고 <동물농장>을 쓰지 않았나 싶다. 오웰은 말한다. '그것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지 마라. 그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라고. (p. 154~155) -작품해설 中-

전체주의... 망각... 역사의 반복... 뼈때리는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전체주의가 과연 저 냉전시대에만 있었을까? 망각하던 대중들이 지금은 과연 자각하는 시민들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시대를 역행하는 역사의 반복이 지금 이 시대에도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독후감을 쓴 소설가의 문장이 내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 했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 그 선량하고 이상적인, 동시에 얄팍하고 선정적인 구호가 회의를 중단시키고 비판자들의 목소리를 막는다. 모든 구호가 그런 위험성을 품고 있다. 그래서 나는 복잡한 논의가 오가지 않는 사회, 각론이 부실한 사회, 대신 맹목적인 열성 지지자와 그럴싸한 구호와 선정적인 음모론이 넘치는 사회를 진심으로 염려한다. 그런 사회는 전체주의를 향한 내리막길에 있다. 여기서 지금의 한국 현실을 떠올리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리라. 오웰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예언자다. (p. 166~167) - 장강명(소설가) 독후감 中 -

지금 한국 현실에서 읽어야 할 단 하나의 소설을 골라야 한다면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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