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읽은 두 작품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공교롭게도 이 두 책을 쓴 작가가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두 사람에 의해 쓰였으며, 사랑과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헛소동』은 원어로 도전했는데 셰익스피어 특유의 말장난이나 어휘 구사력을 이해하는 것이 도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Dogberry가 일부러 단어를 틀리는 것은 주석이 없으면 도무지 그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극작가가 구사하는 pun 역시 난해했고 신화나 당대 문화에 기반한 비유적 표현들도 주석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희극이 비극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나 인지도가 낮은 이유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즐거움이나 말장난의 영역은 문화와 언어를 넘어가는 순간, 그 의도가 완화되는 경향이 있다.


 『노생거 사원』은 제인 오스틴의 다른 작품들과는 조금 다르다. 물론 나 역시 오스틴의 소설을 모두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만큼이나 작가의 목소리가 강력하게 개입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작가의 의견이 직접 삽입되는 것이 메시지 전달에는 효율적이지는 몰라도 작품에 몰입하는 데에는 유용하지 않다. 어쩌면 그녀는 이것을 의도했을지도 모른다. 뭐랄까, 캐서린과 틸니의 연애와 결혼은 지나치게 평범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을 통해 당대의 풍속이나 결혼관을 비판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고전문학에서 접하기 힘들었던, 특이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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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에 우연히 영화 <메이즈 러너>를 본 이후, '영 어덜트'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두 장르를 적절히 조화시킨 원작을 읽고자 하는 관심이 꽤 높았다. 각 작품의 설정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이 각각의 작품을 접할 때 방해가 될까 봐 3부작은 천천히 감상했다. 하지만 프리퀄 시리즈는 영화화될 가능성이 희박한 데다가 원작의 완성도가 영화보다 높다는 판단 하에 소설을 모두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달에 걸쳐 『킬 오더』와『피버 코드』를 읽었다. 후자는 토머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메이즈 러너』에서 설명되지 못한 것들을 드러낸다. 사악이 어떻게 아이들을 교육했으며, 토머스와 테리사가 미로 제작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 그리고 공터 아이들과의 만남. 이 시리즈의 끝을 동참한 독자들에게 남기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한편, 『킬 오더』는 태양 플레어 현상의 시작과 플레어 병이 퍼지는 모습을 생생히 담았다. 익숙한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아 당황스러울 수 있으나, 오히려 제임스 대시너 특유의 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는 것 같은 긴박한 서술이 특히 두드러지며, 원작에만 존재하는 평면 이동문의 원리, 그리고 플레어 병의 경과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매혹적인 서사를 이끌어 낸다. 마지막 장이 지나고 나서야 다음 시리즈와 이어질 준비가 끝나는 것을 보아, 작가가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두 프리퀄이 훌륭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메이즈 러너』 시리즈는 완성도 있게 마무리 된 듯 하다. 원인 모를 대재앙 이후 인류가 살아남는 과정, 그속에서 드러나는 어른들의 이기심과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아이들의 협동과 지혜, 그리고 희망으로의 여정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소설들은 언제라도 영 어덜트 SF 시리즈의 대표작으로 회자될 준비가 되어 있다.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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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 레이코프와 M. 존슨이 함께 집필한 『삶으로서의 은유』를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어렸을 때는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해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도 책의 내용이 완전히 파악된 것은 아니지만, 몇 개의 문장들은 양식이 될 듯 하다. 리뷰에 남기기에는 나의 이해가 얄팍하여 인상 깊은 구절들을 남기기에 그친다.

 

 처음 내용만 보면 우리 일상에 존재하는 은유를 예시로 풀어놓는 것 같으나, 은유에 대한 사유의 본질은 체험주의적 접근을 위한 발판이다. 객관주의 신화와 주관주의 신화가 가지고 있는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해 내놓은 대안과도 같은데, 이 역시 결함이 있다. 다만 새로운 방안을 찾으려는 시도는 언제나 바람직하다.

그 은유에서는 ‘가까움‘은 문장의 구문에 적용되고, 반면에 ‘영향의 강도‘는 문장의 의미에 적용된다. ‘가까움‘은 형태와 관계가 있고, 반면에 ‘영향의 강도‘는 의미와 관계가 있다. (…) 그래서 위에 제시된 실례들에서 보이는 의미의 미묘한 차이는 영어의 특수한 규칙의 산물이 아니라, 언어의 형태에 자연스럽게 적용되는 우리의 개념 속의 은유의 산물이다. - P179

은유는 전체적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것=느낌, 미적 경험, 도덕적 관행, 영적 자각-을 부분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도구들 중의 하나이다. 상상력의 이러한 활동은 합리성을 결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은유를 사용하기 때문에 상상적 합리성을 사용한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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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혀 다른 두 작품처럼 보이지만, 두 소설은 접점이 존재한다. 바로 죽음이다. 일부러 의도해서 접근한 것은 아니지만, 『천국에서 만난 다섯사람』은 죽음 이후에 돌아본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죽음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어떤 사람에 대한 기록이다. 


 첫 번째 책은 '어떤 사람이 가장 인상 깊었는가?'를 따질 수밖에 없는데, 나는 단연 첫 번째 사람을 꼽을 것이다. 모든 인물들이 그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삶 자체가 누군가에게 죽음이 될 수도 있다는 역설, 그와 동시에 누군가의 죽음이 나의 삶이 될 수 있다는 진리가 동시에 접하는 순간이다. 천국에 대한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삶이 지니고 있는 필연적인 모순을 짚어낸 것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책의 줄거리는 익숙하다.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을 유지해 온 연인 중 한 명이 죽음에 점점 가까워지고,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내용은 여러 작품들에서 제시된 바 있다. 그리고 남겨진 자의 쓸쓸함과 작은 희망은 우리의 마음을 괜시리 아프게 한다. 죽음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낯선 일이다.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조차 삶의 특권이다. 두 책을 읽은 지 꽤 되었는데 지금에야 말하는 것은 이소라의 'Track 8'을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자주 접하는 것은 분명 유익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삶의 고귀함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남은 자는 여전히 더 나은 삶을 지향할 수밖에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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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문선 출판사의 『현대영미희곡선 3』에 수록된 네 편의 작품, 즉 Mary, Mary by Jean Kerr, Rain by William Somerset Maugham, Verdict by Agatha Christie, 그리고 The Disposal by William Inge을 감상했다. 원어로 표기한 이유는 번역된 제목이 원제의 분위기와 맞지 않은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네 작품에 대해 한 마디로 표현하면, '어딘선가 본 것들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이후의 현대극에 상당한 모티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Rain은 『타이스』라는 소설이 절로 떠올랐다. 정신적으로 타락한 여자와 그녀를 구원하기 위한 성직자가 등장한다. 세상은 여자를 추방하려고 하고 극한의 상황 속에서 여자는 회심한다. 그러나 성직자는 그녀와 정반대의 길을 택한다. 낯익은 서사를 희곡의 형식 속에 녹여내니 꽤 새로운 체험이 되었다. 


 Mary, Mary는 네 작품들 중 가장 현대적인 감성에 가깝다. 가장 반대편에 위치한 것이 Agatha Christie의 희곡으로, 소설과 다름없는 추리극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그 과정을 풀어내는 방식이 20세기의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와 배우, 출판업자 등 뉴욕과 할리우드의 문화계에서 흔히 보이는 사람들이 극을 펼쳐낸다.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든 그들의 대사가 상당히 세련되었다고 느꼈다.


 The Disposal은 나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극이었다. 제스, 아키, 룩크는 남아 있는 삶의 기간을 세어야 하는 사형수이고, 그들의 대화는 당연히 가시가 돋혀 있다. 그 속에서 죽음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 본연의 불안이 보인다. 제스의 아버지가 찾아오는 장면부터 마지막까지 극은 특별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다. 제스는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그를 적극적으로 반기지만, 아버지는 그와 같은 마음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다. 제스는 마지막까지 목사의 말에 설득되지 않고, 남들과 똑같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행적을 평가하기도 전에 또 다른 사형수 조가 죽음의 행렬에 동참한다. 나는 원제를 '처분'이라고 번역하고 싶다. 인간을 마치 물건을 폐기하듯이 다루는 사형장의 분위기를 전달해 주는 듯 하다. 물론, '마지막 포옹'도 훌륭한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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