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찮은 기회로 『청소년을 위한 고전산문 다독다독』을 읽었다. 이 책의 구성은 총 4부로 되어 있고, 우리나라의 고전 산문 중 잘 쓰인 것을 선별하여 수록했다. 그리고 각 장의 끝마다 엮은이의 해설이 첨부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저자에 대한 상세한 소개도 부록으로 추가된다. 이러한 구성은 예상 독자인 청소년들이 옛글에 좀 더 접근하기 쉽도록 이루어져 있어서, 누구라도 편하게 읽을 수 있다. 각 장의 분량도 3~4장 가까이 되어, 틈틈이 읽기 수월하다. 확실히 고전 산문에 대해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친절한 안내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한계도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나라의 옛글에 입문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이 쉽게 풀어쓴 고전들의 파편은 독자를 끌어당길 힘을 잃게 된다. 해설의 분량이 더 많은 경우에는, 역자가 하고 싶은 말을 고전 산문을 이용해 전달하는 듯한 인상도 받는다. 차라리 원문의 분량을 늘리고 해설을 최소화하는 구성이 어땠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청소년들은 충분히 선조들의 글을 음미하고 즐길 수 있다. 다만 엮은이가 해설을 통해 칭찬만 하지 않고 적절한 비판이나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에, 원문을 이용한 토론 활동에는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어디에서 태어나 자랐는가‘라는 환경도 중요하다. 외지고 적막한 곳에서 나고 자라 자연이나 인물, 이웃, 여행 등의 경험이 부족하여 높고 웅장하고 그윽하고 특별하고 괴상하고 호탕한 일들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다면, 마음이 세련되거나 넉넉해지지 못한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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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텍쥐페리의 인간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글들이다. 답장을 확인할 수 없기에 그의 편지들이 독백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보이는 애절함과 부족함이 작가를 이해하는 데에 한결 도움을 준다. 한편, 알베르 카뮈와 마찬가지로 생텍쥐페리의 글에는 생동감이 있다. 마음을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녹아 있다. 비평을 하기보다는 감상하려는 목적으로, 여기에 그가 쓴 글의 일부를 남긴다.

"글을 쓰기 전에 우선 살아야한다"라고 앙트완느는 대답했다. 다른 그의 말에 대해서도 상당한 반향이 일기 시작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야!" - P22

리네트, 항공 비행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당신 알고 있소? 이 곳에서 비행이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오. 내가 비행을 좋아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여기서의 비행은 부르제 공항에서 하던 것과 같은 스포츠가 아니고,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며, 일종의 전쟁이오. - P73

밤새도록 나는 불안한 상태였소. 그리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에 애착을 느끼고 있소. 누가 자고 있는가. 내 침대에 누워 내가 밤새우고 있을 때면 환자를 지키는 간호원보다 나는 더 불안하다오. 여러날 밤을 새울 때 나는 나의 보물들을 잘 지키지 못하지요. - P97

리네트, 아가씨들은 그를 잘 보살펴 주지 않았어요. 그 아가씨들은 행실이 바르지 못하여 아름다운 모든 추억을 간직하지 못하게 했어요. 그렇지만 바로 그곳으로 그는 아가씨를 찾으러 갔다오. 이렇게 한다는 것은 각자 충실한 노력이지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바친 사람에게는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기 때문이지요. - P98

그렇지만 연극이란, 그것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연극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가 아니라, 사람의 의식 속에서만 자주 상연되기 때문이다. 행복한 도시인 페르피냥에서도 병원 창문 위에서 어떤 암종 환자가 자기 고통을 피하기 위해 마치 냉혹한 소리개처럼 공연히 몸을 뒤척이고 있다. 그 도시의 평화는 그 때문에 바뀐다.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보편적인 중요성도 띄지 않는 고통도 아니고 정열도 아닌 것이 바로 인류의 기적이다. - P119

밤을 새운 암환자가 바로 인간의 두려움의 중심 인물이다. 어쩌면 광부 한 사람이 수천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과 비길 만하다. 나는 인간이 문제가 될 때 이 무서운 숫자를 사용할 줄 모른다.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한다면, "단지 인구 문제에서 볼 때 수십 명의 희생자는 무슨 뜻이 있습니까? 타버린 몇 채의 신전은 계속 생활하고 있는 한 도시의 입장에서 보면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르셀로나에서는 어디에 공포가 있습니까?" 나는 이런 관점을 거부한다. 아무도 인간의 제국을 측량하지 못한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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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영미문학연구회 소속의 학술지, 『안과밖』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학술지의 제목이 알베르 카뮈의 초기 산문집인 『안과 겉』에서 유래되었는지 무척 궁금해졌다. 수록된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 같은 책을 읽는 것 이상으로, 같은 작가를 동경한다는 것은 큰 기쁨이다. 알베르 카뮈와 생텍쥐페리는 동경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그들의 문장을 읽고 나면, 글에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단순한 글자들의 나열을 넘어서서, 감동을 받고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가 달라진다. 아마 그 이유는, 다른 작가들도 그러하겠지만, 두 사람은 자신의 삶 자체를 꾹꾹 눌러담았기 때문이리라. 아이러니하게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공통점도 그렇고.


 여기에는 그가 최초로 발표한, 그래서 스스로도 애증을 느끼는 『안과 겉』을 읽으며 마음에 감돌았던 문장들에 대해 쓰려고 한다. 때로 카뮈의 작품은 비평의 대상이 아닌 감상의 대상이 된다. 이미 『이방인』과 『페스트』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가에게 처음에 쓴 글에 대해 아쉬운 점을 토로하는 일은 상당히 비효율적이다. 


  그렇다, 이런 것은 모두 진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태양과 함께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 극단의 의식의 극한점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되면서 나의 생은 송두리째 버리든가 받아들인가 해야 할 하나의 덩어리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어떤 위대함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p.81)

 

 카뮈에게 빛은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때부터 『이방인』의 서사는 예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역자의 해설대로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것은 매우 타당한 해석이다. 작가에게는 이분법의 경계가 아주 중요했다. 빛과 어둠, 생과 죽음, 조리와 부조리 등이 그렇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다행히도 그는 자신의 생을 송두리째 받아들였다.


  삶에 대한 나의 모든 사랑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내 손에서 빠져 나가버리려고 하는 것에 대한 말없는 열정, 불길 밑에 감추어진 쓰디쓴 맛이다. 매일 나는, 짧은 한순간 동안 이 세상살이의 시간 속에 아로새겨진 채 마치 나 자신에게서 앗겨가듯이, 그 승원을 떠나곤 했던 것이다. (…) 내 입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은총의 행위들이 아니라 태양에 짓눌린 풍경 앞에서가 아니고는 탄생할 수 없는 그 '나다(허무)'였던 것이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p.90~91)

 

 아, 내가 알베르 카뮈와 생텍쥐페리를 사랑한 이유. 그것은 삶에 대한 지독한 사랑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름다운 삶을 향한 지독한 투쟁의 의지 때문이었다. 알베르 카뮈의 반항과 생텍쥐페리의 용기는 서로 맞닿아 있다. 반항과 용기는 특정한 행동양식이 아니라 살아가는 태도에 가깝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고, 절망 속에서도 기꺼이 희망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반항하는 인간과 어린 왕자는 시지프처럼 무시받을 수밖에 없거나, 외계에서 오지 않으면 안 된다. 절망을 맛보아야 사랑할 수 있다는 역설을 언제쯤 완전히 이해하게 될까?


  중요한 것은 인간적이 되고 단순해지는 일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고 또 잠시 후에는 실제로 그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 즉 인간적인 것도 단순함도 거기에 다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곧 세계일 때보다도 더 진실해지는 때가 과연 언제이겠는가? 나는 갈망하기도 전에 만족되었다. 영원이 눈앞에 있는데, 나는 그것을 바랐던 것이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명철한 의식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p.100~101) 

 

 표제작인 「안과 겉」에 인용된 구절이다. "중요한 것은 진실해지는 것이다"라는 그의 단언이 와 닿는다. 그는 애둘러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골키퍼로서, 그는 공을 막거나 못 막거나의 기로에 놓여 있다. 솔직해지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 알베르 카뮈를 수식하는 표현은 참으로 많고 그를 대표하는 여러 단어들이 있지만, '행복'을 빼놓고서 그에 대해 논할 수 없다. 알베르 카뮈는 언제나 행복을 찾았다. 지금의 부조리에 맞서는 것, 그 투쟁과 반항이 고난의 여정처럼 보여도 결국엔 행복에 이르고 말 것임을 그는 확신했다. 삶이라는 연극 속에서 모든 무대 장치와 소품, 고된 연기들은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간다. 그렇기에 "갈망하기도 전에 만족"되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 책의 구성은 본문과 해설이 절반씩을 차지한다. 생각보다 짧은 분량에 놀랄 수 있지만, 읽다 보면 길이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촌철살인이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다만, 글은 사람을 살린다. 더 나은 삶의 양식을 제안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인가? 그것을 아는 사람은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조금씩 익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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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런던의 삶을 조사하던 중, 호보(Hobo, 떠돌이 노동자)로서의 생활을 담은 자전적 전기인 『더 로드(The Road)』가 최근에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참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런던의 이스트엔드에서의 생활을 담은 기록인 『밑바닥 사람들』도 함께 구매하여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알아보고자 했다. 

 두 작품은 시기와 배경이 서로 다르지만, 어조는 동일하다. 『더 로드』가 조금 더 생존에 치중한 모습이라면, 후자는 문명을 비판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문명의 보호에서 벗어나 힘겹게 생활하는 이들의 삶을 담담하게 그리다가 격앙되는 방식은 동일하다. 다만, 『더 로드』는 자신의 생존이 걸린 문제를 그리다 보니 더욱 차분하다. 그래서 다소 서투르더라도 더 어린 시절에 남긴 글이 애착이 간다. 



 『밑바닥 사람들』에서 느낀 점은, 잭 런던이 이후의 작품에서 보이는 강한 문명 비판적인 태도가 이스트엔드에서의 생활을 통해 확고해지지 않았나 싶은 것이었다. 특히나 보여주기 식 자선을 행하는 이들을 강하게 비판하는 부분은 생활 전선에 뛰어들지 않은 사람이라면 감히 제기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기계문명과 밑바닥의 인간이 되는 것보다, 황야와 사막의 인간, 동굴과 움막의 인간이 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구절에서 그가 왜 그토록 원시세계의 원형을 작품 속에서 제시하고자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원시세계는 잭 런던이 보여주고 싶었던 이상향이 아니었을까? 그는 토머스 모어나 사회주의가 설명하는 "모두가 똑같이 행복한"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차라리 적자생존과 격세유전의 원리로 작동하는 원시세계가 차등의 행복일지라도 모두가 행복에 가까워지는 세상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나머지 작품을 모두 분석한 뒤에야 알 수 있겠지.


 어쨌든 잭 런던이 런던 생활을 통해 내린 결론들은 상당히 극단적이다. 

 문명이 보통 인간의 생산력을 향상시켰는데 왜 인간의 운명을 개선하지 못하는가?

 답은 딱 하나다. 잘못된 관리. 문명은 온갖 육체적 정신적 안락과 기쁨을 제공해줄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의 영국인들은 그러한 것들을 누릴 수가 없다. 만약 영원히 누릴 수 없다면 그 문명은 몰락할 것이다. 그렇게 실패가 빤히 보이는 문명이 계속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인간이 놀라운 문명을 헛되이 일으켰다고는 믿을 수 없다. 이성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렇게 완전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노력과 진보에 치명타다. (p.309) 


 한편, 『더 로드』는 방랑자이자 청년인 잭 런던의 모험을 다룬다. 꽤 박진감 있고 흥미롭다. 게다가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왠지 모르게 따뜻하다. 그들이 겪어야 할 삶은 고통과 생존의 처절한 노력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동시에 소소한 즐거움과 현재의 행복을 찾으려는 기대가 공존한다. 물론 호보 생활을 자발적으로 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 세상에 나그네로 지내는 것 역시 또 다른 삶의 양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1장부터 3장까지 그려진 자전적 일대기는 근래에 본 어떤 모험소설보다 흥미진진했다. 살아남기 위해 구걸하고, 친절한 이들에 의해 식사를 대접받고, 그에 응당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는 그의 모습은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다. 기차에 뛰어드는 호핑(hopping)에 대한 노하우를 핏줄 속에 새기고 있는 잭의 움직임은 야생동물을 보는 듯 했다. 


 내가 잭 런던의 삶과 작품을 본격적으로 탐구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된 소설은 그의 마지막 저서인 『별 방랑자』였다. 그리고 『더 로드』를 통해 작가 자신이 다름 아닌 별 방랑자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육신은 언제나 실패를 거듭했으나, 영혼은 자유로웠다.

 내가 떠돌이가 된 것은, 글쎄 쉬게 두지 않는 내 안의 생명력과 내 핏속을 흐르는 방랑벽 때문이었다. 물에 빠지면 피부가 젖는 것처럼 사회학은 단지 부차적이었다. 추후에 따라온 것일 뿐이다. 벗어날 수 없기에 나는 '길'에 나섰다. 주머니에 기차표를 살 돈이 없었기 때문에, 평생 한 가지 일만 반복하며 살 수 없게 태어났기 때문에, 글쎄 아마도 내게는 길이 더 쉬웠기 때문이리라. (p.165)

 여운을 남기는 것은 작품의 말미에 수록된 '호보 코드'와 '호보 윤리 강령'이었다. 이는 그들이 각자의 생존을 위해 움직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한 뜻 모를 연대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15가지 항목의 윤리 강령을 모두 옮길 수는 없지만, 그 중 인상 깊은 것 세 가지를 꼽자면, "1. 자신의 삶은 자신이 결정할 것. 다른 사람이 휘두르게 두지 말 것. 4. 일시적인 일이라도 찾기 위해 노력하고 항상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일을 찾을 것. 그렇게 해야 산업에 도움이 되고 다시 그 지역에 오더라도 일을 얻을 수 있다. 15. 필요하다면 언제 어디서나 동료 호보들을 도울 것. 언젠가 당신도 그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이다. 곰곰이 읽고 있자면, 어쩌면 우리 모두 호보가 아닐까, 라는 인상을 받았다. 21세기의 우리 역시 한 곳과 한 직장에 머물지 않고 노동하며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었다가 헤어지는 일을 반복하지 않는가?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호보 윤리 강령을 마음속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더 로드』 가장 뒤에 쓰인 문구가 공감이 간다. "잭 런던이 쓴 가장 위대한 이야기는 바로 그의 삶 자체이다." 이는 그의 대표작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의 생애만큼 모순으로 가득 찬, 역설적인 문학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잭 런던을 단순히 사회주의자 내지는 자연주의 작가라고 정의하기에는 수식어가 너무나 다양하다. 자연의 냉혹한 섭리를 꿈꾸면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백인우월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다른 문화를 담아내려고 한다. 자본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다가도 자신의 부를 마음껏 과시하며 어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육체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요컨대, 그가 걸었던 길은 '항상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일'과 같다. 변화하는 정신은 그에 따르는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삶에 넘치는 모순은 운명과도 같고 그가 살아낸 사회의 초상이기도 하다. 『더 로드』와 『밑바닥 사람들』의 이면에는 글에 담기지 않는, 수많은 죽어가는 이들이 있다. 언젠가 그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을 대비해서라도, 언제 어디서나 동료를 도와야 한다는 정신을 간직해야 한다.


 각자에게는 언제나 불가능한 길이 있다. 차마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 여기고 언제나 마음 한켠에 담아두고 있는 길이다. 대부분은 그 종착지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 두렵기 때문에 가지 않는다. 일부는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무모한 도전을 한다. 그리고 소수는 불가능한 길 끝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잭 런던은 7년 전, 수많은 고민 속에서 방랑하던 나에게 작은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그가 나에게 그랬듯, 나 역시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인생에 단서를 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게 어떠한 방식으로 결말을 맺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지금 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이것이다. 잭 런던의 삶에 대해 써 보자. 만약 전기를 번역할 수 없다면 직접 써 보자. 나는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실패한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실패를 무릅쓸 최소한의 용기는 남아 있기에 한 번 가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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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읽은 두 작품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공교롭게도 이 두 책을 쓴 작가가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두 사람에 의해 쓰였으며, 사랑과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헛소동』은 원어로 도전했는데 셰익스피어 특유의 말장난이나 어휘 구사력을 이해하는 것이 도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Dogberry가 일부러 단어를 틀리는 것은 주석이 없으면 도무지 그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극작가가 구사하는 pun 역시 난해했고 신화나 당대 문화에 기반한 비유적 표현들도 주석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희극이 비극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나 인지도가 낮은 이유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즐거움이나 말장난의 영역은 문화와 언어를 넘어가는 순간, 그 의도가 완화되는 경향이 있다.


 『노생거 사원』은 제인 오스틴의 다른 작품들과는 조금 다르다. 물론 나 역시 오스틴의 소설을 모두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만큼이나 작가의 목소리가 강력하게 개입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작가의 의견이 직접 삽입되는 것이 메시지 전달에는 효율적이지는 몰라도 작품에 몰입하는 데에는 유용하지 않다. 어쩌면 그녀는 이것을 의도했을지도 모른다. 뭐랄까, 캐서린과 틸니의 연애와 결혼은 지나치게 평범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을 통해 당대의 풍속이나 결혼관을 비판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고전문학에서 접하기 힘들었던, 특이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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