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 이야기 - 너무 늦기 전에 알아야 할
애니 레너드 지음, 김승진 옮김 / 김영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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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소비자다. 추출자도, 생산자도 아닌, 소비자다. 우린 소비자다. 그렇기에 우린 추출된 것으로부터 생산된 `물건`1)이 유통된 매장에서 물건을 소비하고, 그것을 버린다. 하지만 우린 이 간단하고 편리한 활동의 현재 구조가 지구적으로, 그리고 인종적으로 얼마나 큰 위험을 발생시키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오로지 `소비`2)할 뿐, 나머지 네 가지 과정에는 관심도 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린 기업이 TV에서 보여주는 속임수(광고)에 현혹되어 추출, 생산, 유통, 소비, 그리고 폐기에 이르는 한 물건의 일생과 그 안에 담긴 문제점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도, 해결책을 모색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애니 레너드의 『물건 이야기』는 쓰일 가치가 없었으리라.

 

 원래 『물건 이야기』는 20분 분량의 동명 영화를 바탕으로 하는 책이다. 하지만 책은 20분 안에 요점과 전체적인 흐름만 말해야 하는 영화보다 훨씬 더 상세하고 친절하다. 환경운동가이자 한 가정의 어머니인 저자의 주장은 매우 호소력 있다.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독성 화학물이 다름 아닌 모유에 가장 짙게 농축되어 있다는 문장을 보고 엄마들은 큰 충격에 빠질 것이다. 우리가 `TV보고-일하고-쇼핑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저자가 주장할 때, 많은 아빠들이 자신들의 생활 방식에 대해 반성했을 것이다.

 

 『물건 이야기』의 핵심 주장 중 하나는, 현재 우리가 `물건`이라고 부르는 것의 일생, 즉 추출, 생산, 유통, 소비, 그리고 폐기에 이르는 과정이 모두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이것이 지구의 환경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기본적인 권리까지도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분명히 하고 있다.

 

 "나는 가는 곳마다 "왜?"라고 물으면서 점점 깊이 파고들어갔다. 왜 쓰레기더미는 그렇게 유해한가? 그 버려진 물건들에는 애초에 왜 독성물질이 들어가 있었는가? 왜 쓰레기장은 저소득층 유세인종들이 사는 곳에 많이 들어서는가? 또 공장 전체를 다른 나라로 옮기는 것이 어째서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가? 어떻게 해서 기업들은 그렇게 멀리서 물건을 만들어 옮겨오면서도 고작 몇 푼을 받고 판매할 수 있는가? 그리고 또 하나!가전제품은 왜 그렇게 빨리 망가지며, 어째서 고치는 것보다 새로 사는 쪽이 비용이 덜드는가?" - 물건 이야기, 11쪽

 

 이뿐만 아니라, 이러한 심각한 구조상의 문제로 지구는 거의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지구가 한 개로는 부족하게 된 것이다. 과연 지금 상황은 얼마나 심각한 것일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물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여기서 대표적인 `물건`을 `책`으로 삼겠다).

 

 먼저 `추출`이다. 모든 물건은 지구에서 제공하는 자원 및 재료를 바탕으로 생산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그 물건은 우리가 언뜻 생각할 수 있는 재료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다른 많은 재료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종이를 만드는 데에는 나무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무를 벨 전기톱과 기계를 만들 금속이 있어야 하고, 베어 낸 목재를 가공공장에 보낼 트럭이나 배와 같은 운송수단이 필요하며, 기계와 공장을 돌리기 위한 석유도 있어야 한다. 종이 펄프를 만들기 위해 많은 물을 써야 하며 종이의 색을 밝게 만들게 하는 화학표백제나 과산화수소와 같은 화학물질 역시 필요하다. 그리하여 종이 1톤을 만드는 데에 대략 98톤의 자원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원리로 나무와 물, 그리고 광물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자원은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로 베어지고, 오염되고, 또 인간성을 훼손하게 만든다. 커피 한 잔을 만드는 데 물 140리터가 소비된다는 것은 아는가? 또,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대부분이 불결한 물을 마시고 찬물로만 목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세계 한편에선 다이아몬드 때문에 내전이 일어나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으며, `콜탄`이라는 광물을 캐기 위해 어린이들에게까지 가혹한 노동을 시키고 그 사이에 지역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러나 더운물로 목욕하고, 비교적 깨끗한 식수를 마시며, 광물로 만든 게임기로 게임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비극을 개선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 다음은 `생산`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손길과 환경의 손상을 거치고, 어찌되었던 `추출`된 재료는 이제 그 물건의 쓰임과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공장으로 이동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바로 `독성 화학물(그것도 약 10만 가지의, 대부분 인체에 유해한지 검증되지도 않은 화학물들이)`이 제품에 첨가되는 것이다. `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종이를 표백할 때 쓰이는 `염소`라는 화학물질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무기로도 쓰였다고 하니, 얼마나 유독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잉크를 만들고 인쇄기를 청소하는 데 사용되는 `톨루엔`은 공기를 오염시키고 사람의 호흡기질환을 유발하는 물질이다. 그리고 우리가 `비닐`이라고 일컫는 `PVC`, 이것은 이 책에서 저자가 수차례 사용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 극악무도의 독성 화학물이다. 얼마나 그것을 위협적으로 생각했는지, 부록에서는 PVC의 생산과 유통과 관련된 인물에게 편지까지 썼다.

 

 자, 이리하여 물건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 물건이 이 구조의 주체인 소비자, 곧 우리에게 전달되려면 '유통'의 과정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언뜻 생각하면 이 과정은 다른 과정에 비해 덜 환경친화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실상을 보면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배나 트럭이 내뱉는 이산화탄소와 독성 물질은 물론이요, 온라인 유통 분야에서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아마존'과 '언제나 낮은 가격'을 내거는 월마트의 횡포로 동네 서점과 동네 가게는 우리 곁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특히, 매년 엄청난 땅을 잡아먹는 월마트가 언제나 낮은 가격으로 소비자를 유혹할 수 있는 이유는 가히 놀랍다. 다른 마트보다 항상 싼 가격을 유지하는 물건 가격의 뒤에는 하루에 5달러도 채 안되는 보수를 받으며 노예처럼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으며, 의료보험조차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월마트 내 직원들이 있다. 그리고 아이티에서 저자가 겪은 일은 독자들에게 큰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아이티 국민들의 농업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고 그것을 이른바 '개발' 3)이라고 칭하는 'USAID' 4)의 설명을 듣자 나는 얼마 전 강제로 비준처리된 FTA와 함께 우리나라 농민의 미래가 떠올랐다. 어느 나라든, 어느 시대든, '개인'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생산층'이 점점 소외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과연 나뿐일까?

 

 마침내 물건이 나에게 왔다. 소비자인, 곧 주체인 우리는 지금까지 거쳐온 추출, 생산, 유통의 과정을 통해 탄생된 물건을 '소비'하면 된다. 소비를 하려면 먼저 돈을 벌어야 한다(소비자는 곧 돈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어떤 물건이 필요한지 골라야 한다. 아, 이 과정은 필요 없다. TV를 키면 나오는 광고가 당신이 지금 무엇이 부족하며 어떤 물건을, 왜 사야 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니까. 자, 그렇게 해서 우린 돈을 지불하고 그 물건을 샀다. 이로써 우린 우리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행복하지 않다. 심지어 만족감조차 없다. 과거, 적은 양의 그리고 작은 물건으로도 만족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왜 생활 여건이 그 때보다 더 개선되고 원하는 물건을 더 질 좋게, 더 빠르게 얻을 수 있는 지금이 그때보다 불행하단 말인가? 이것은 미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의 이야기이다. '물건'이 만들어지는 이 구조가 존재하는 까닭은, 결국 소비자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닌가? 그런데 왜 정착 주체인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 시스템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계속 되는가? 사람들은 새로운 물건을 사면 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그 물건을 사면 또 다른 새로운 물건이 우리를 불만족스럽게 만든다. 새로운 스마트폰이 나오면, 어제까지만 해도 미친듯이 붙들고 있었던 스마트폰을 버리고, 새 것을 산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 휴대전화가 나오면 또 다시 그것을 버린다. 이런 식으로 계속 새로 사고, 또 버리는데 이 구조가 어떻게 바뀌며, 또 지구는 어떻게 버틴단 말인가? 당장 바뀌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버리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한 사람당 매년 1톤 이상의 쓰레기를 버리는 오늘날, 지구는 쓰레기장이 되버리지 않을까? 이 물음 때문에 우린 '물건 이야기'의 마지막 단계, '폐기'에까지 이르렀다.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다 쓰고 버린 물건을 태우거나, 땅에 묻어버리는 것이다. 때로는 다른 나라에 멀리 보내져서 폐기된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는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다. 매립을 하든 소각을 하든 독성 물질은 쓰레기 사이에서 스며나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는 법이니까. 게다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매립과 소각은 최선의 해결책이 아니지 않은가. 매립을 하면 땅이 오염되고, 물이 오염되고, 또 대기가 오염된다. 소각을 하면 PVC를 비롯한 온갖 화학물질이 대기 속으로 퍼져나가 사람들의 몸 속으로, 또는 자연 속으로 파고들어가, 그 생명체를 부패시킨다. 결국 이 모든 '물건 이야기'는 인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해치는 것이었다. 인간의 편리함과 생활의 영위를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 도리어 인간의 생존, 나아가 지구의 환경까지 위협하고 있다니, 얼마나 비극적인가! 마침내 저자는 부르짖는다.

 

 "이 책에서 설명한 물건의 라이프사이클을 생각해보라. 모든 쓰레기는 각각 광산에서의 추출, 삼림이나 농장에서의 수확, 공장에서의 생산, 공급망을 따라 이동하는 기나긴 여정 등을 아우르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추출과 생산과 유통에 그렇게 많은 노력을 들여놓고는 그 자원들을 땅에 파묻다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이 지구상에 있는 자원의 양은 유한하다. 우리는 그것을 다 써가고 있다. 땅속에 자원을 파묻어버리는 것은 아주 멍청한 짓이다." - 물건 이야기, 367쪽.

 

 그렇다면 모든 것의 해답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방법인 '재활용'인가? 맞는 말이다. 그것은 이 문제의 훌륭한 해결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재활용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은 되지 못한다. 재활용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많고, 재활용 자체도 단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이 바로 '쓰레기 제로'다. 이 제도는 한 마디로 말해 추출 → 생산 → 유통 → 소비 → 폐기의 과정을 관찰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제도이다.

 

 답은 다섯 가지 과정의 일직선적인 경로를 순환적으로 바꾸는 일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 등 국민의 대표자들이 앞장 서서 노력해야 한다. 정부는 환경을 생각하는 정책을 세우고 기업은 돈을 더 투자해서 좀 더 친환경적이고 인권적인 추출·생산·유통 단계를 관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소비자, 곧 주체인 우리 개인이 작은 일부터 실천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부록'에도 제시되어 있듯이, 소비자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참으로 많다. 집에서는 독성 물질(특히 PVC)가 들어간 물건의 사용을 자제하고 1회용품을 최대한 사용하지 말고, 음식물 쓰레기로 퇴비를 만들어보는 게 어떨까? 또, 유기농 음식과 비료를 사고 에너지 사용을 줄이며 TV 코드를 끄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떨까(이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딱딱하게 방법을 제시하는 다른 책과는 달리 조금 더 인간적인 방법으로 다가간다)? 마찬가지로, 학교나 직장에서도 실천해 보자. 비록 어렵겠지만 이러한 작은 실천 하나가 조금 더 밝고 희망적인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애니 레너드는 미국의 독자들을 위해 이 책을 썼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물건 이야기』는 비단 미국의 독자들에게만 국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곧 우리나라의 이야기이다. 이 책에서 보여준 문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이다. 한편, 이 책에서 제시된 해결책 역시 우리나라에서도 발휘될 것이다. 그러니 결코 낙담하지 마시길! 이 세상은 작은 노력 하나로 바뀔 수 있는 법이니까.

 

 

 

 1) 물건: 이 책에서 물건은 제조된 상품, 또는 대량 생산된 제품을 뜻한다. 곧, 우리가 구매하고, 소유하고, 잃어버리고, 망가뜨리고, 새것으로 다시 사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개인적인 자아존중감을 그것과 헛갈리는 그런 물건들이다.

 

 2) 소비: 원래 '소비하다'를 뜻하는 'consume'에는 '파괴하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러한 뜻으로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소비자들이 구매하고 사용하는 것'으로만 제한했다.

 

 3) 개발: 불행히도 개발은 흔히 화석연료 집약적이고 독성 물질이 가득하고 소비 주도적인 경제 시스템을 이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4) USAID: U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미국국제개발처)의 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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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절판


덕분에 나는 현대 세계를 깨물어보고 그게 정말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알게 된 느낌이었다. 요즘 우리 사는 꼴이 그런 식이다. 모든 게 매끈매끈하고 유선형이며, 모든 게 엉뚱한 무엇인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디나 셀룰로이드며 고무며 크롬강 칠갑이고, 밤새 아크등이 빛나고, 머리 위로 유리 지붕이 덮여 있고, 라디오는 모두 똑같은 음악을 울려대고, 녹지는 남아나지 않고, 어디나 시멘트로 덮이고, 중성 과일나무 아래 모조 거북이가 풀을 뜯는다. 하지만 본질에 다가가 단단한 그것을 깨물어볼 때(이를테면 소시지 같은 것 말이다) 느껴지는 것, 그건 다른 무엇이다. 고무 같은 껍질에 든 썩은 생선이요, 입 속에서 터지는 오물인 것이다.-41쪽

청파리 소리와 폭격기 소리 중에 어느 쪽이 더 들어줄 만한가?-82쪽

도대체 왜? 사는 게 그런 까닭이다. 우리네 인생에서(인간의 삶 일반이 아니라 바로 이 시대 이 나라에서의 삶이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지 못한다. 늘 일만 하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다. 농장 막일꾼이나 유대인 재단사도 늘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이런저런 백치 같은 짓을 하도록 내모는 악마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중요한 일 말고는 무엇이든 할 시간이 있는 것이다. 당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당신이 살아오면서 그 일을 하기 위해 실제로 보낸 시간이 당신 인생에서 차지하는 몫을 계산해보라. 그러고 나서 면도하고, 버스로 여기저기 다니고, 기차 환승역에서 기다리고, 지저분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신문 읽느라 보낸 시간을 계산해보라.-118~119쪽

나는 더이상 고상한 지성인이 아니었으며, 현대 생활의 냉엄한 현실을 바닥에서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생활의 현실이란 대체 무엇인가? 아마 제일 주된 것은 무언가를 팔기 위한 끊임없고 광적인 발버둥이 아닌가 싶다. -183쪽

하지만 문제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 이후다. 우리가 빠져들고 있는 세계, 곧 증오의 세계나 슬로건의 세계라 할 만한 세상 말이다. 무슨 색 셔츠단, 철조망, 경찰봉의 세계 말이다. 비밀스러운 골방에는 밤낮으로 전기불이 밝혀져 있을 것이며, 형사들은 우리가 자는 동안에도 감시를 할 것이다. 숱한 행진, 거대한 얼굴 포스터, 그리고 한결같이 영도자를 환영하는 100만 인파. 그들은 딴 소리엔 귀를 막고 살다시피 하여 그를 정말 숭배한다고 착각할 정도가 되겠지만, 혼자서는 늘 구역질이 나도록 그를 혐오할 것이다. 그런 일들이 정말 벌어질 것이다. -215쪽

그러면서 문득 괴이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죽었다.' 유령이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죽은 것이다.
우리 주변에 걸어다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실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심장이 멎어야 비로소 죽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다소 자의적인 판단 같다. 우리 신체의 일부는 심장이 완전히 멎은 뒤에도 작동을 완전히 멈추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머리카락은 몇 년이 지나도록 계속 자라는 것이다. 인간이 정말 죽는 것은 두뇌 활동이 멈추는 때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관념을 받아들일 힘을 잃어버릴 때 말이다. 포티어스가 그렇다. 학식이 풍부하고 취향이 고상한 그이지만, 변화를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한다. 언제까지나 같은 말, 같은 생각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참 많기도 하다. 정신적으로, 내면적으로 죽은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짧은 노선을 계속 왔다 갔다 할 뿐이고, 그러면서 점점 활력을 잃어간다. 마치 유령 같다.-229쪽

철조망! 슬로건! 거대한 얼굴 포스터! 방음실 지하실에서 갑자기 뒷머리를 쏘아 죽이는 사형집행인! 뒤에서 갑자기 쏘아 죽이는 사형 집행인! 그런 점에 관해서라면 나보다 지적으로 훨씬 둔감한 사람이라도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건 왜일까? 전쟁은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과의 작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그 특별한 느낌 말이다. 원하신다면 그걸 평화라 불러도 좋다. 단, 내가 말하는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우리 뱃속 느낌으로서의 평화를 뜻한다. 경찰봉을 든 청년들에게 붙들린다면, 그런 평화는 영영 사라져버릴 것이다.-237쪽

차를 몰고 언덕을 내려오며 생각난 것 하나. 이제 과거로 돌아가본다는 생각일랑은 끝이다. 소년시절 추억의 장소에 다시 가본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숨 쉬러 나가다니! 숨 쉴 공기가 없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쓰레기통 세상의 오염은 성층권에까지 도달해 있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내겐 사흘이 더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약간의 평화와 정적을 누릴 것이며, 로어빈필드가 어떻게 되어버렸니 하는 것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낚시를 하러 간다는 생각-그거야 물론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아니, 낚시라니! 내 나이에! 힐다 말이 정말 맞았다. -311쪽

우리에게 닥칠 것은 무엇인가? 게임은 정말 시작되었나? 우리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세계는 영영 사라져버린 것일까? 그리고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을 얻게 되었다. 옛 시절은 끝나버렸고, 그걸 다시 찾으러 다닌다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로어빈필드로 돌아갈 길은 없다. 요나를 다시 고래 뱃속으로 집어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생각을 따라오시리라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이제 분명히 알아버렸다. 오랫동안 로어빈필드는 내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동할 때 다시 찾아볼 수 있는 한적한 구석에 감춰져 있다가, 마침내 다시 찾아보니 사라져버린 존재였다. 나는 내 꿈에다 수류탄을 투척한 것이었고, 실수가 없도록 공군이 따라와 500파운드짜리 TNT를 떨어뜨린 것이었다.-321 쪽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 1941년이라고들 한다. 전쟁이 시작되면 깨진 그릇도, 궤짝 뜯어나가듯 벽이 날아가버린 집들도, 할부로 구입 중이던 피아노에 덕지덕지 흩어진 회계사무소 직원의 내장도 넘쳐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게 대체 왜 중요하단 말인가? 로어빈필드에 있으면서 배운 것 하나를 말하자면 이렇다. '어떤 일이든 다 벌어지고 말리라.' 우리가 마음 한구석에 두고 있는 일들, 끔찍이 두려워하는 일들, 악몽일 뿐이거나 외국에서나 있는 사건이라고 자위하는 일들이 전부 벌어질 것이다. 폭탄, 식량배급줄, 경찰봉, 철조망, 무슨 색 셔츠단, 슬로건, 거대한 얼굴 포스터, 침실 창 밖으로 갈겨대는 기관총. 그 모든 일이 일어나고 말 것이다. 나는 안다. 아무튼 그때 난 알 수 있었다. 헤어날 길이 없다는 것을. 원한다면 맞서 싸울 수도 있고, 고개를 돌려버리거나 못 본 척할 수도 있고, 스패너를 들고 나가 사람들과 누군가의 얼굴을 내려칠 수도 있다. 하지만 벗어날 길은 없다.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인 것이다.-321~322쪽

흠집 난 결백을 주장해봐야 부질없는 짓. 내가 바랄 수 있는 것이라곤 가장 말썽이 적을 노선을 택한 것뿐이었다. 그런 생각과 더불어 당장 세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A. 힐다에게 정말 뭘 했는지 말해주고 아무쪼록 믿게 만든다.
B. 기억이 잘 안 난다는 등 구태의연하게 능글거리며 버틴다.
C. 딴 여자랑 있었다고 생각하게 놔두고 받을 벌을 받는다.

젠장할! 셋 중에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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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그 생각이 딱 떠오른 건 새 틀니를 하던 날이었다." 

 소설은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조지 볼링은 이름보다는 '패티(뚱보)'라고 불리는 중년 남자다. 그는 두 명의 아이와 한 명의 아내를 둔 평범한 가장이다. 현재 그는 다른 가장들과 마찬가지로, 가정을 돌보고 돈을 벌어오는 일상의 과정으로 인해 숨 쉴 틈조차 없다. 그런데 그에게 한 가지 기회가 찾아온다. 뜻하지 않게 17파운드라는 돈을 얻은 것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숨 쉴 기회'였기 때문에, 조지 볼링은 당황한다.  

 새 틀니를 하여 하루를 쉬는 바람에 조지 볼링은 거리를 여유롭게 누빈다. 하지만 그에게 전쟁의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영국에는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참을 수 없는 불안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신문 광고 포스터를 보고는 과거로 회귀하기 시작한다. 

 이후, 2부는 볼링이 과거를 독백조로 회상하는 장면으로 전개된다. 그 이야기는 볼링의 이야기이자, 조지 오웰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로어빈필드를 배경으로, 과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무엇보다 그의 과거를 이루는 것은 '낚시'에 대한 경험으로, 그는 어른들에게 혼이 나면서도 즐거워 하며 낚시를 했었다. 책도 많이 읽으면서 교양도 쌓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어 전쟁이 시작되면서 그의 아름다운 옛날은 사라져 간다. 전쟁 이후, 그의 일상은 숨 쉴 틈 없이 지나가버린다.  

 조지 볼링은 힐다라는 여성과 결혼한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는 그녀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여자들은 결혼 후에 너무나 빨리 망가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처녀였던 힐다는, 2~3년이 지나자 추악한 아줌마가 되었고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 '속물'이 되었다. 그렇게 그는 오늘날까지 살아왔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고향 로어빈필드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 곳은 "벽돌의 바다"와 "현대"라는 괴물에 묻혀 전혀 다른 곳으로 변해버렸다. 건물들뿐만이 아니라, 사람들마저 변했다. 그의 옛 연인 엘시는 완전히 늙어버린 노파로 변해있었고, 성당의 신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그렇다. 그도 변한 것이다). 또한, 어릴 적의 추억이 있었던 낚시조차 오염된 물로 인해 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못 역시 쓰레기 매립장이 되어 있었다. 그 때, SOS에 힐다가 위독하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볼링은 그것을 무시하고 사흘 더 있다가 가려고 했지만....... 마을이 폭탄에 맞자 미련 없이 그 곳을 떠나버린다. 결국 그가 돌아온 곳은 '숨 막히는' 일상이었다. 이것이 바로 조지 오웰이 묘사하고자 한 평범한 중년 남자의 비극이다.  

 

 모든 현대인들은 죽었다. 그들은 "변화를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한다. 언제까지나 같은 말, 같은 생각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저 몸만 움직일 뿐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조이스가 『더블린 사람들』에서 묘사했던 사람들, 곧 '죽은 사람들'이다.  

 조지 볼링도 죽었다. '그는 죽었다.' ........ "하지만 누워 있지 않으려 하네." 현대는 사람들의 정신을 모두 먹어버렸다. "덕분에 나는 현대 세계를 깨물어보고 그게 정말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알게 된 느낌이었다. 요즘 우리 사는 꼴이 그런 식이다. 모든 게 매끈매끈하고 유선형이며, 모든 게 엉뚱한 무엇인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 하지만 본질에 다가가 단단한 그것을 깨물어볼 때 느껴지는 것, 그건 다른 무엇이다. 고무 같은 껍질에 든 썩은 생선이요, 입 속에서 터지는 오물인 것이다." 현대는 직접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모든 사람은 각 시대의 '현대인'이니까. 

 현대라는 괴물은 볼링에게 절망만 남겨주었다. "벽돌의 바다"에 묻혀버린 과거의 로어빈필드를 묘사하는 장면은 참으로 참담하다. 현대는 개인에게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친다. 앞으로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낚시'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과거에 남겨진 순수한 상태를 상징한다. 결국 전쟁 끝에 남겨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현대라는 괴물은 한 명의 개인이 맞서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은 『숨 쉬러 나가다』에서 전쟁의 장면뿐만이 아니라, 전쟁 그 이후의 장면까지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묘사하는 장면들은 『1984』의 장면들과 비슷한 것이 너무나 많다. "폭탄, 식량배급줄, 경찰봉, 철조망, 무슨 색 셔츠단, 슬로건, 거대한 얼굴 포스터, 침실 창 밖으로 갈겨대는 기관총." 이미 이 때부터 그의 작가 의식은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숨 막힐 텐데, 그 때에는 얼마나 숨이 막힐까? 그러나 그 일은 원스턴 스미스에게 맡겨두기로 하자.  

 조지 볼링이여, 당신이 A, B, C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 이제 말하라. 원스턴 스미스가 만난 노인이 당신인지, 아닌지. 그 때에는 현대보다 더 무서운 현대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대가, 조지 볼링이 살던 현대보다 더욱 숨 막히다는 것을 이제 알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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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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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그리고 파리 

  19세기는 역사에서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 이 세기는 '질풍노도'의 세기였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 기존의 귀족체제가 무너지고,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지배 계급이 등장하여 귀족과 평민의 갈등에서 부르주아와 노동자의 갈등이 심화된 세기였다. 또한, 19세기는 보불 전쟁이나 나폴레옹 전쟁 같은 몇몇 전쟁들을 제외하고, 유럽과 일본, 그리고 미국이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던 '발전의 세기'이기도 했다. 때마침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 일본의 공업화가 시작되고, 1500여년 동안 분단되어 있던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제국들의 성장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한편으로 19세기는 20세기를 암시하는 세기였다. 독일이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되어 강대국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어, 제국주의가 갈수록 심해지고, 일본 역시 그 대열에 끼어들면서 큰 전쟁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식민지 국가들의 투쟁이 암시되었으며, 미국의 노동자와 부르주아간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면서 대공황 역시 암시된 세기였다. 19세기는 이렇게 피와 얼룩, 발전과 진보로 이루어진 세기였다. 그리고 『고리오 영감』의 배경이 된 파리는 19세기의 중점에 있던, 산업화로 인해 발전이 한창 이루어지던, 그러나 어딘가에서 붕괴의 징조가 보였던, 파리였다. 

 

 이러한 파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떠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 수많은 정치철학자들이 꿈꾸었던 이상국가의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것이 파리에서 가장 존중받고, 훌륭한 사람이었을까? 발자크는 고발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이 파리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고. 오히려 파리는 그 정반대였다고. 발자크는 보트랭의 입을 빌려서 그것을 설파한다. 

 

 "이곳 파리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출세하는가를 알고 있나? 천재성을 떨치든지 아니면 능수능란하게 타락해야 하네. 사회 집단 속으로 대포알처럼 뜷고 들어가거나 페스트 균처럼 스며들어 가야 하네. 정직이란 아무 소용이 없네. 사람들은 천재의 위력에 굴복하고, 그것을 미워하고 비방하려고 들지. 왜냐하면 천재는 분배하지 않고 독점하니까 말이야.  

 천재가 버티기만 하면 사람들은 굴복하기 마련이네. 한마디로, 사람들은 무릎 끓고 존경하는 법일세. 왜냐하면 사람들은 천재를 진흙 속에 묻어버릴 수 없으니까. 타락은 힘을 얻고 재능은 희귀한 것일세.  

 (…) 

 그래서 성실한 인간은 모든 사람의 적이 되어버렸네. 도대체 성실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알겠나? 파리에서 성실한 사람이란 입을 다물고 분배를 거절하는 사람일세(p.148~149)." 

  

 (구스타브 카유보트, 「파리의 오후, 비 오는 날(1877)」) 

 

 『고리오 영감』에서 묘사된 파리의 사람들은 대부분 위선에 가득차고 돈에 굶주린 사람들이다. 고리오 영감의 두 딸인 뉘싱겐 부인과 델핀은 아버지에게 손을 벌릴 때에만 찾아오고, 고급 하숙집의 주인은 보케르 부인은 '파리 자체'다. 보트랭은 '불사신'이며, 그 외에 주인공 라스티냐크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은 위선적이고 돈만 밝힌다. 만약 이것이 정말로 19세기의 파리의 초상이라면, 파리에는 어떠한 희망도 존재하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다. 발자크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파리가 지니고 있었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발자크는 이 작품에서 그것을 '고리오 영감'과 '라스티냐크'로 잡았다. 우리 모두의 '구세주'이자 '아버지'였던 고리오 영감이 평생 무지몽매하게 살아가다가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된 죽음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죽음은 청년 라스티냐크에게 커다란 희망을 가져다주었으며, 마침내 그로 하여금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라고 외치게 한다. 『고리오 영감』은 그의 이런 희망 찬 외침으로 마무리짓게 된다.  

 

 19세기 파리의 초상 1: 스탕달의 『적과 흑』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과 더불어 19세기 파리를 묘사한 소설 중 으뜸으로 꼽히는 소설이 있다면, 단연코 스탕달의 『적과 흑』일 것이다.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앵 소렐은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인 라스티냐크와 마찬가지로 야심이 많은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라스티냐크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소렐은 라스티냐크보다도 출세욕이 더 강해서, 사랑조차도 출세하기 위해 사랑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소렐은 정말로 레날 부인에게 사랑에 빠져버린다. 어쩌겠는가. 그게 그의 천성인 것을. 하지만 무엇보다도 쥘리엥 소렐이 파멸한 이유는 자신 때문도 아니고, 레날 부인과의 사랑 때문도 아니었다. 그를 파멸시킨 존재는, 그가 그토록 출세하고 싶어했던 사회였기 때문이다. 

 

 스탕달의 『적과 흑』의 제목은 학자간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적(赤)'은 군인의 붉은 의복을, '흑(黑)'은 사제의 검은 의복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는 결국 19세기 프랑스에서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두 직업을 나타내는 것인데, 쥘리엥은 '적과 흑'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파멸해버리고 말았다. 스탕달은 스스로 "문학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했다. 그 말처럼, 스탕달은 『적과 흑』을 비롯한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19세기의 파리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려고 노력했던 작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물론, 발자크도 『인간희극』을 통해 19세기의 파리를 입체적이고 종합적으로 분석해 낸 작가였지만 스탕달의 공 역시 무시할 수 없겠다. 

 

 19세기 파리의 초상 2: 플로베르의 『감정교육』 

 발자크나 스탕달 외에도, 19세기의 파리를 함께 살았고, 체험했던 작가들과 철학자들 역시 19세기 파리를 묘사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중에서 "뛰어나다"라고 평가받는 작가가 바로 플로베르이다. 플로베르는 사실주의의 창시자이기 때문에, 그는 사람의 행동뿐만이 아니라 파리 역시 사실적으로 보고하는 게 당연했다. 많은 사람들은 19세기의 파리를 그린 작품으로 『마담 보바리』를 꼽고 있지만, 나는 그 작품보다는 그의 숨은 걸작인 『감정교육』이 그 점에 더 입각한다고 생각한다. 

  

 『감정교육』의 주인공 역시 라스티냐크와 쥘리엥 소렐처럼 청년인 프레데릭 모로이다. 프레데릭 모로는 파리에서 출세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온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는 작품의 첫 부분에서부터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다. 아르누 부인이라는 미모의 귀부인을 보게 된 것이다. 이윽고 프레데릭 모로는 '출세냐, 사랑이냐'의 고민 속에 빠지기 시작한다. 쥘리엥 소로와는 다르게, 그는 사랑과 출세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출세의 길은 물 건너가고, 세월을 허비하게 된다. 그래서 작품의 마지막은 그로부터 약 25년이 흐른 후, 프레데릭과 데로리에가 서로 옛날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끝나나 보다.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은 『고리오 영감』이나 『적과 흑』과는 달리, 혁명기를 배경으로 하고, 사건의 진척이 별로 없다. 이 작품은 굉장히 삽화가 많은데, 그 중 대부분이 주인공 프레데릭이 '감정교육'을 받으며 출세할 준비를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에게 파리는 라스티냐크나 쥘리엥 소렐처럼 야심차고, 거대한 적이 아니라, 왜곡되고 미숙한 연애장에 불과했다. 사실 『감정교육』은 파리의 사교계에 대해 알기 위해 살펴보는 게 아니라, 19세기의 일부분은 '유혈 충돌'을 알아보기 위해 살펴본 것이다. 

 

 그 외의 초상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보들레르의 『악의 꽃』 

 19세기는 한 마디로 형언할 수 없는 세기지만, 동시에 수많은 고전 작가들을 배출한 세기이기도 했다. 프랑스에만 10여명이 넘으니(위의 다섯 작가를 비롯하여 공쿠르 형제, 모파상, 에밀 졸라, 라마르틴, 발레리 등), 엄청난 축복이겠다. 하여튼 그 중에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보들레르의 『악의 꽃』 등은 파리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레 미제라블』은 그 자체로 숭고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빅토르 위고가 묘사한 파리에서 입각해보면, 더욱 위대한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묘사한 파리는 혁명기의 파리이며, 그래서 정치적으로 불안한 세기이자, 더러운 세기였다. 가브로슈 같은 소년들, 꼬제뜨와 같은 소녀들이 그 당시 파리에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빅토르 위고는 장 발장의 이야기를 통해서 밝혀내고 있었다. 『고리오 영감』이나 『적과 흑』에서 본 파리가 모두 거짓이었고, 진실은 따로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악의 꽃』 역시 그것을 증명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시를 지은 낭만주의 시인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는 파리를 상징적으로 비판할 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파리에 반대되는 개념, 즉 자유, 순결함, 지혜 등을 노래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시는 출간 당시 굉장한 파문을 일으켰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서 보면 『악의 꽃』은 숭고한 것을 노래하고 있는 걸작이다. 이 작품뿐만이 아니라 『파리의 우울』이라는 시집 역시 파리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들 중 하나이다.  

 더불어, 소제목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프랑스의 대표적인 자연주의 작가 에밀 졸라의 『나나』를 비롯한 『루공 마카르 총서』, 드레퓌스 사건이 벌어지자 그를 옹호하기 위해서 쓰여진 『나는 고발한다』 등의 작품들 역시 훌륭한 작품들이며, 19세기 파리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다시 발자크로: 『사촌 베트』와 『고리오 영감』 

 이렇게 수많은 19세기 프랑스 작가들이 '파리', 나아가 '19세기'의 본질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도 발자크처럼 거대한 계획과 체계를 가지고 19세기를 묘사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분명 19세기 프랑스를 묘사한 작가들 중 최고봉에 서 있는 작가는 오노레 드 발자크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는 『고리오 영감』을 비롯하여,『골짜기의 백합』이나 『나귀 가죽』, 『루이 랑베르』 등, 발자크의 작품이 점점 번역되고 있지만, 나는 아직 이 소설과 『사촌 베트』 밖에 읽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느낌이 분명히 왔다. 발자크의 작품들은 모두 맥을 잇고 있다는 것을. 

 『사촌(누이) 베트』의 주인공은 당연히 '베트'이다. 그녀는 노처녀로서, 거짓된 사랑이 들끓은 이 파리에서 '순수한 여인'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복수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에, 온 정성을 다해 보호하고 사랑하던 벤세슬라스를 조카딸에게 빼앗긴 것에 대해 복수를 감행한다. 한편, 이 소설에는 또 다른 축이 되는 여인이 있는데, 그녀의 이름은 창부 '발레리',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매혹하여, 여러 남자들을 파멸시키고 돈을 가로채는 '악당'이다.  

 『사촌 베트』는 이야기가 비교적 단순하게 전개되는 『고리오 영감』과는 달리, 음모가 들끓는 파리의 전형적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고금 횡령 음모로 자살한 사람, 벤세슬라스의 음모로 죽은 크르벨과 발레리, 못 생긴 리스베트의 음모로 여러 위기를 맞는 윌로 남작 집안……. 이런 음모가 모이고 모여 파리가 완성된다니, 정말 끔찍하다. 

 하지만 『사촌 베트』에도 희망적인 존재가 나온다. 바로 윌로 남작의 아들 빅토랭이다. 변호사인 그는, 라스티냐크와 프레데릭, 그리고 쥘리엥 소렐과 같은 다른 작품의 젊은 청년을 연상시키지만, 그들과는 다르게 믿음직한 '영웅'으로 묘사된다. 그는 방탕한 아버지가 집안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지 않고, 자신의 능수능란한 능력으로 집안을 재기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발자크는 그의 행적에 대해서 꽤나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면에서 보든, 그는 가장 완벽한 '영웅'이자 '구세주'이다. 물론 그 역시 인간이기에 실수도 하고, 단점도 많지만, 19세기 파리의 전형에 비하면 아주 청결한 인간이다. 

 

 자, 우리는 어느새 우리가 다시 『고리오 영감』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19세기 파리의 초상은 『고리오 영감』을 축으로 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그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비스러운 것은 라스티냐크다. 처음에 "출세만이 미덕이야!"라고 부르짖던 이 청년은 어느새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라고 외치고 있으니...... 아무리 고리오 영감의 죽음으로 그가 바뀌었다고 해도 그럴 순 없는 법이다. 그렇다, 그 와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다. 『고리오 영감』의 중심 사건을 잊으면 안 되는 법이다.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보트랭이 잡혀가는 부분, 그리고 보트랭이 라스티냐크에게 충고하는 부분이다. 아까 전에 보트랭의 충고를 일부분 보여주었지만, 정말로 발자크가 보트랭의 입을 빌려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 말이 아니었을까? 

 

 "인생이란 부엌보다 더 아름답지 않으면서도 썩은 냄새는 더 나는 거라네. 인생의 맛있는 음식을 훔쳐 먹으려면 손을 더럽혀야 하네. 다만 손 씻을 줄만 알면 되지. 우리 세대의 모든 윤리가 거기에 있네. 내가 이처럼 자네에게 세상 얘기하는 것은 세상이 나에게 그럴 권리를 주었기 때문이야. 나는 세상을 알고 있네(p.149)." 

 

 이 말이야말로 '파리'를 넘어서 '19세기'를 표현하는 단 한 마디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기의 추악함을 고발하는 발자크, 그리고 그를 대신해 그것을 표현한 인물 보트랭은 분명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람들이다. 보트랭, 그의 본명은 자크 콜렝으로, 사기죄로 툴롱 도형장에 수감되었다가 탈옥한 죄수이다. 그의 별명은 '불사신'. '세상을 알고 있는' 그가 결코 굴복하지 않는 이유다. 그가 불사신인 이유는 그가 죽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19세기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가 죽으면 이 모두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보트랭은 발자크가 창조해 낸 그 어떤 인물보다도 독특하고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보트랭이 이 작품의 전부가 될 순 없다. 결국 라스티냐크에 변화된 이유는 그 곁에서 항상 악마의 조언을 하는 사기꾼 보트랭이 그의 곁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보트랭은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유혹하는 뱀과 같이, 파리에 대해 모르는 라스티냐크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충족하려고 했다. 라스티냐크는 꼭두각시처럼 그의 말에 따라 이용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잡혀가자 라스티냐크는 더 이상 그럴 동기가 없어지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라스티냐크는 외쳤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그렇다. 보트랭이 잡혀가고 라스티냐크 곁을 떠난 것, 그 순간부터 발자크는 희망과 가능성을 작품 속에 던져넣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작품들이 그렇듯이 마지막 부분은 중요하지만 『고리오 영감』의 경우 그것이 더욱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초상으로: 발자크의 현대성 

 우리가 이렇게 깊이 19세기의 초상을 엿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오늘날의 우리의 초상과 19세기의 초상과 유사하기 때문이 아닐까? 여전히 사람들은 출세하려고, 권력을 잡으려고 폭력과 뇌물을 일삼고, 사기죄를 저지르고 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어서 출세하려고 사교계에서 성공하고 있다. 세상은 그것을 '연예(entertainment)'라고 부른다. 하지만 명심하라. 그런 것들은 모두 '도박'에 불과하다는 것을. 물론 어떤 사람들은 진심으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연예계에 들어가려고 한다. 하지만 그 나머지는 모두 돈을 벌기 위해, 혹은 어쩔 수 없이 연예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보트랭이 말했듯이, "한 걸음만 잘못 내디디면 지옥 같은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오늘날에까지 적용되고 있다. 왜? 발자크의 근대성, 아니 '현대성' 때문이다.  

 사실, 본질적으로 근대성(modernity)과 현대성(modernity)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근대성'이라는 표현보다는 '현대성'이 더욱 적절한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현대'라고 부르지, '근대'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자크의 작품, 나아가 수많은 과거의 고전들을 읽는 이유란 본질적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더욱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함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우리가 『고리오 영감』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은 이 세상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위선적이고 거짓에 가득찬 세계에서 밝고 진실된 세계로 나아가는 그 날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고전을 읽으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죽은 고리오 영감도 분명히 그것을 바랄 것이다. 발자크 역시 우리에게 던져주지 않았던가. 우리에겐 커다란 가능성이 있고, 또한 희망을 품고 있다는 걸. 

  마지막으로, 나는 이 리뷰가 발자크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지침서가 되길 바란다. 누군가에게 이 리뷰가 커다란 도움이 되길 나는 기대한다. 

 

 자, 이제 세상과 나와의 대결이다. 커다란 가능성으로, 빛을 향해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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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으로 리드하라 -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의 인문고전 독서법
이지성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인문고전 독서
 

인문고전, 지금 나는 인문고전을 읽고 있는가? 집에 꽃여 있는 책장을 둘러본다. 플라톤의 『국가·정체』,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르네 데카르트의 『성찰』 등의 책이 꽂혀 있었다. 그러나 의문이 들었다. 나는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있을까? 그래서 꺼내든 책이 바로 이지성 작가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다.

 

나는 6학년 때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문학의 세계, 소설의 세계로 들어왔다. 이윽고 2010년이 되자, 나는 본격적으로 인문고전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비록 학교 생활 때문에 인문고전을 읽는 데에 제약이 있었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읽었던 책이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 『크라튈로스』, 『소피스테스』, 『정치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였던 것 같다. 이윽고, 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의 매력에 빠져 그의 작품을 하나씩 섭렵해나가기 시작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영웅스티븐.망명자들』, 그리고 『피네간의 경야』 등....... 이렇게 갈수록 나의 인문고전 사랑은 늘어만 갔다. 그럴 때 나의 관심을 한눈에 사로잡은 책 한 권이 들어왔다. 이지성 작가의 『리딩으로 리드하라』였다. 사실 문학동네 카페에 가입해 있는 나로서는, 그가 '다음' 블로그에 연재하는 것을 미리 보아 온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무슨 내용이 담아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문고전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도저히 이 책을 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내 손에 들어왔다.

 

하지만 『리딩으로 리드하라』를 다 읽은 후, 나에게 일종의 부작용이 생긴 것 같다. 나는 지금 르네 데카르트의 『성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 혹시 내가 그것을 잘못 읽고 있지는 않을까 염려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철학고전에 담긴 천재들의 사랑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종의 중압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마음으로 인문고전을 읽으면서 불편함을 느꼈고, 이내 그것은 지루함으로 번져서 인문고전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결국 이런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이 책이 전부가 아니다. 이 책에 얽매여 인문고전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 책은 단지 인문고전을 읽는 데에 도움이 되는 안내서일 뿐이다. 더 이상 이 책에 얽매일 이유가 없다.

 

나는 지금도 인문고전을 읽고 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인문고전을 강제로 읽지 않는다. 나는 편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인문고전을 읽고 있다. 물론 나는 아직도 이 책이 마음에 든다. 정말 간직하고 싶은 책이다. 하지만 나는 한 떄 나와 같은 고민을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지성 작가는 당신이 그런 걱정을 하라고 이 책을 쓴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한 때는 인문고전의 초보였습니다. 지나친 부담 갖지 마시고, 인문고전이 어렵다고 느끼시면, 그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십시오."

 

나에 대한 이야기는 지나치게 한 것 같다. 나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내용, 그리고 『리딩으로 리드하라』에서 얻어야 할 점을 알아보자.

 

 

 인문고전 독서의 힘

 

인문고전의 힘은 얼마나 될까? 인문고전을 읽는다고 우리의 두뇌가 완전히 변할 수 있다고 믿는가? 인문고전 독서가 베스트셀러나 노벨상 수상작가의 저서를 읽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는가? 확신이 가지 않는다면 다음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듣도록 하자.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독일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부모의 근심거리였다. 세 살이 되도록 말을 하지 못했기 떄문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는 모든 면에서 너무 느렸다. 지적 장애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중학생이 된 아이는 나쁜 기억력과 산만함 그리고 불성실한 수업 태도로 교사들의 독설을 들었다. 이후, 그는 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당했고, 대학 입학 시험에서 낙방했고, 다시 고등학교에 들어가 대학교를 졸업하는 데엔 성공하지만, 학점도 별볼일 없었고 졸업논문도 지극히 평범하여 조교 자리조차 따내지 못했다. 또한, 그는 지도교수와 반목하다가 박사학위 논문을 도중에 그만두었고, 생계 유지를 위해 초라하기 그지없는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특별한 면이 있었다. 아이는 인문고전을 열렬히 사랑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부모의 영향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집에서 문학고전을 즐겨 낭독했고, 어머니는 고전음악 마니아였기 때문이다. 또한, 의대생 막스 탈무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의 집에 방문하였는데, 천성이 따뜻하고 쾌활한 그는 아이와 금새 친해져 자연스럽게 아이의 멘토가 되었다. 인문고전 독서의 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아이의 두뇌를 인문고전 독서로 바꿔주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아이에게 읽힌 첫 번쨰 책이 유클리드의 『기하학』이었고 두 번쨰 책이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었기 때문이다. 열세 살에 유클리드, 열네 살에 칸트를 만나고 어떤 변화를 경험한 아이는 인문고전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기로 결심하고 열일곱 살에 "나는 술 대신 철학고전에 취하겠다!"라고 맹세한다.

아이는 자신의 특별한 면인 인문고전 독서를 통해 자신의 두뇌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미 십대에 대부분의 서양철학 고전을 독파한 아이는 대학에 들어가서 전공보다 철학 강의를 즐겨 들었고, 친구 아버지가 알선해준 직장에 들어가서 상사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근거한 사고 훈련을 받는 데에 몰두했고, 퇴근한 뒤에는 자신이 만든 인문고전 독서모임인 '올림피아 아카데미' 회원들과 독서토론을 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그들은 플라톤의 대화편이나 존 스튜어트 밀의 『논리학 체계』, 데이비드 흄의 『인간 오성론』 등을 읽었는데, 중요한 부분에 이르면 한 페이지나 반 페이지 또는 한 문단을 가지고도 며칠씩이나 치열하게 토론을 벌였다.

이 아이의 이름은 '최고의 물리학자'라고 칭송받고, 오늘날까지도 칭송을 받고 있는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다.

 

열네 살에 한 유명 미술가의 작업장에 조수로 들어간 사람이 있었다. 그는 견습생들 중에서 단연 돋보였다. 스승조차도 그를 보고 은연 중에 많은 것을 배울 정도였다. 덕분에 그는 13년 이상을 일해야 오를 수 있는 수석장인의 자리를 6년만에 이루어냈다. 하지만 성공도 잠시, 1481년 피렌체 정부가 교황 식스투스 4세로부터 시스티나 성당을 장식해줄 최고의 예술가들을 추천해달라는 의뢰를 받았을 떄, 그는 뽑히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그는 프로로 나선 지 3년이 되도록 피렌체 예술의 주소비자인 지배층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통치자 로렌초 데 메디치는 드러내놓고 그를 무시했다. 당시 피렌체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런 도시의 지배계층에게 삼류에 준하는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예술가로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시달리던 그는 실날 같은 희망을 품고서 1482년에 밀라노로 이주했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밀라노에 널리고 널린 중간급 장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실패한 예술가였던 그에게 인생을 통쨰로 바꿔놓을 사건이 생겼다. 바로 인문고전 독서였다. 1487년, 그는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지 않은 문학, 철학, 역사 고전을 읽기 위해서 라틴어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위대한 천재들의 사고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늘 고생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해서 책을 읽어나가곤 했다. 이렇게 인생을 건 인문고전 독서를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천재성이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회화, 조각, 공기역학, 광학, 해부학, 식물학, 건축학, 지리학,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적인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마침내 빛을 발한 이 예술가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천재'의 대명사로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다.

 

1806년, 런던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해력, 기억력 등 지적 능력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모든 부분에서 특별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특별했다. 그는 평범한 두뇌를 천재의 두뇌로 변화시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두뇌를 장기간에 걸쳐서 인문고전에 노출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이의 인문고전 독서는 시작되었다. 그는 여덟 살부터 열세 살까지 수많은 거장들의 작품들, 그것을 번역서가 아닌 원전으로 접했다. 엄청난 양의 인문고전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아이의 두뇌는 자연스럽게 그 저자들의 두뇌처럼 바뀌어갔다. 내용을 이해하고 못 이해하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천재들의 생각하는 방식과 접촉한다는 자체가 중요했다. 비록 내용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평생 인문고전을 읽어나가면서 마침내 그 역시 천재가 된 것이다.

평생 인문고전에 푹 빠져 살아온 이 사람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철학, 경제학, 사회과학 분야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논리학 체계』, 『경제학 원리』, 『자유론』의 저자 존 스튜어트 밀이다.

 

첫 번째, 아인슈타인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보 또는 바보에 준하든 두뇌도 인문고전 독서를 통해 천재의 두뇌로 바뀐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다 빈치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인문고전 독서는 그 동안 억눌려 있던(숨겨져 왔던) 천재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세 번째, 밀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평범한 생각밖에 할 줄 모르던 두뇌가 인문고전 독서를 통해 천재적인 사고를 하는 두뇌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위의 세 사람의 이야기로부터 한 가지 위안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아인슈타인처럼 머리가 멍청해도 천재가 될 수 있다는 것, 다 빈치처럼 나이가 좀 들어도 인문고전 독서로 천재가 될 수 있다는 것, 스튜어트 밀처럼 이해하지 못해도 천재처럼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문고전 독서는 지극히 평범한 또는 바보 같은 사람조차도 천재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독서이다. 그리고 인문고전 독서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당장 시작하라!

 

 대한민국, 인문고전 독서 프로젝트

 

인문고전 독서, 그 힘을 알았으니 당장 읽어야겠다. 아, 그런데 학원 숙제가 너무 많아서 책 읽을 시간이 없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책 읽기가 어렵다. 내신 관리하느라 정신 없는데 인문고전 독서 때문에 또 골치 아프라고?

 

이게 우리나라의 실태다. 인문고전을 읽어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 떄문에 그것이 무척 힘들다. 현대 사회에는 존 스튜어트 밀과 아인슈타인 같은 인물이 나오기 어렵다. 그 이유는 서양의 교육 제도와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문고전을 읽지 말고 지금의 교육 방식대로 하자고? 천만의 말씀이다.

 

명심하라. 지금 우리나라가 하고 있는 교육은 프러시아식 교육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프러시아식 교육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프러시아식 교육은 일종의 '생산을 위한 교육'이다. 즉, 과거에 군대 교육을 시키던 프러시아 시대의 교육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프러시아 교육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고, 또 부패된 교육 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육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니, 정말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미국의 일류 대학, 영국의 일류 대학 그리고 시카고 대학은 우리나라처럼 공부만 시키지 않는다. 그 대학들은 인문고전을 놓고 치열하게 토론을 벌인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대학은? 암울하다. 분명 우리나라의 기세라면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은 치열한 독서로 우리의 두뇌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데 말이다. 이지성 작가는 그것을 한탄한다. 나 역시 프러시아식 교육 제도로 학생들을 '생산'하려는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 방식을 한탄한다. 하루 빨리 우리나라가 진보된 교육 제도로 발전하여 사람을 '생산'하는 교육이 아닌, 사람을 '인간답게' 만드는 교육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교육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경영에서도 인문고전 독서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세계 경제를 재패하고 있는 기업가들 또는 그들의 선조들은 모두 인문고전 독서를 꾸준히 해 왔으며, 또 하고 있다. 외국의 기업가들뿐만이 아니라 정주영 같은 우리나라에 길이 남을 기업가들 역시 인문고전 독서를 해 왔다.

 

현대 우리나라의 평범한 직장인들 또는 기업가들은 인문고전 독서를 하지 않고 있어서 더 이상 발전을 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상상력과 창의력은 분명 경영에서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상상력과 창의력을 머릿속에서 마구 발산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문고전이다. 상상력과 창의력뿐만이 아니라 인문고전 독서는 우리의 사고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또한, 인문고전 독서는 정치가에게도 읽혀져야 하는 것이다. 서양과 동양의 위대한 정치가들은 모두 인문고전 독서를 읽었다. 세종 대왕과 정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세종 대왕은 병자리에서도 책을 읽고, 인문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경연'을 수차례 연 왕으로 유명하다.

 

현대의 정치가들도 이렇게 할 수 있다. 만약 그들이 인문고전을 국민들에게 권장하는 캠페인을 벌인다면, 추락했던 그들의 이미지도 점차 개선되어가고, 국민들의 신뢰를 얻을 것이다. 또한, 국민들도 그들로부터 동기를 받아 인문고전을 읽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지성이 꿈꾸었던 '대한민국 인문고전 독서 프로젝트'가 완성에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다. 인문고전 독서는 학생에서 대통령까지, 그리고 개인에서 국가까지, 모두가 읽어야 할 필독서인 것이다.

 

 

 인문고전 세계를 여행하는 초보자를 위한 안내서

 

모든 일에 처음이 존재하듯이, 인문고전 독서에서도 '처음'이 있다. 모든 사람이 '처음'을 겪듯이, 모든 사람은 인문고전 독서에서 '처음'이 있다. '처음'의 낯설음과 부담감 때문에, 이제 막 인문고전 세계를 여행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장이 바로 5장이다. 이 장에서는 이지성 작가의 인문고전 체험기가 삽입되어 있는데, 이는 이지성 작가야말로 인문고전 독서의 힘을 체험한 사람들 중 하나이며, 또한, 그 역시 인문고전 독서의 초보였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지성 작가의 고백은 인문고전 세계에 막 발을 들여놓은 초보자의 고백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문고전은 짧게는 100~200년, 길게는 1,000~2,000년 이상 된 지혜의 산삼이다. 이런 지혜의 산삼을 지속적으로 섭취한 두뇌가 어떻게 혁명적으로 변화하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어렵기만 했던, 아니 차라리 고문처럼 느껴졌던 인문고전이 어느 순간 기막히게 재미있어지기 시작하고, 두뇌 속에 그 '재미'를 맛보는 순간이 서서히 쌓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계속 해나가다보면 마치 벼락처럼 두뇌가 충격적으로 바뀌는 순간이 온다(P.199)."

 

5장은 다름 아닌 '나'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사실 나도 인문고전 세계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된 풋내기일 뿐이다. 고작해야 1년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분명 "고문처럼 느껴졌던 인문고전이 어느 순간 기막히게 재미있어지"는 경험을 해 보았다. 그 책은 바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였다. 이미 현대에 탄생한 인문고전으로 평가받는 『율리시스』는 그 유명한 '난해함'으로 인해 처음에는 읽는 것이 매우 지루했었지만, 나는 그 소설을 필사하면서 소설 속에 숨겨진 재미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발견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인문고전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간절함과 사랑을 가지고 『율리시스』 속에 감춰진 제임스 조이스의 사랑을 엿보고 있다. 나는 『율리시스』를 통해 인문고전이 어떻게 난해함 속에 재미를 감출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소설에 참 감사해하고 있다.

 

무엇보다 인문고전은 '우리'를 위해서 해야 한다. 즉, "어떻게 하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내 수준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주제를 놓고 묵상"하면서 인문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향한, 그리고 온 인류를 향한 사랑으로부터 근거한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이런 간절함은 우러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지성 작가는 인문고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했던 것일까.......

 

어쩄든 우리는 인문고전 세계를 여행하는 초보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노하우를 보여준 후,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인 6장으로 넘어가자.

 

1. 해설서름 멀리하라. 해설서는 인문고전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집필한 것이지만, 초보자들이 해설서를 함부로 읽다가는 그들의 방식대로 인문고전을 이해해버리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자신만의 체계를 세워라. 인문고전 독서도 체계가 있다. 체계없는 독서는 무질서하다.

3. 필사하라. 중요한 것은 글자를 단순히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진 변화들을 경험하는 것이다.

4. 일단 저질러라. 인문고전을 읽으려면 우선 사야하지 않겠는가. 물론 빌려보는 방법도 있지만 말이다.

5. 항상 인문고전을 가지고 다녀라. 의외의 장소에서 자신도 모르게 인문고전을 집어들어 순간적으로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6. 읽은 내용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라. 그렇게 하면 독서할 때 몰랐던 부분을 순간적으로 이해하게 되거나 체계가 잘 잡히지 않았던 부분이 갑자기 확 잡힌다거나 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문고전 독서법, 그것은 사랑이다

 

온 마음으로 사랑하라. 인문고전 독서의 핵심은 천재들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백독백습, 필사를 비롯한 모든 독서 기법들은 다만 천재들의 마음을 꺠닫는 장치에 불과하다. 천재들의 마음을 꺠닫기 위해 맹수 같은 간절함으로 덤벼드는 이유도 결국 그것에 있다.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겸허한 마음으로 인문고전을 읽는 것도 그것이다.

 

천재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놓은 인문고전에 사랑 역시 담아놓았다. 특히 퇴계 이황, 율곡 이이는 인문고전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천재들의 인문고전을 알기 위해서는 온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읽어야 한다. 누구를 향한 사랑으로? 바로 온 인류를 향한 사랑으로 말이다. 이 세상을 변화시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인문고전 독서는 무의미하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는 사색하고, 또한 깨달아야 한다. 깨달음이 인문고전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사랑이야말로 그 목적에 이르게 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세종 대왕, 퇴계 이황, 정약용 등의 인물은 꺠달음이 있었다. 그리고 실천으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었다.

 

명심하라. 사랑이 없는 인문고전 독서는 우리의 두뇌를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의 인문고전 독서는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분별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나의 인문고전 독서에는 사랑과 간절함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인문고전 독서에 사랑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단지 그것이 부족할 뿐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정말로 많은 성찰을 해 보았다. 그 결과, 나는 결핍된 사랑으로 인문고전을 읽고 있었다. 안타까운 현실이고, 믿고 싶지 않은 결과였지만, 나는 다시 꺠달았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것을.

 

이지성 작가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나는 이 책을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온 마음으로 사랑하라.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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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1-29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방법이 많은데도 쉽게 읽혀지지 않는 것이 고전인거 같아요.
저도 한 권 어렵게 읽고나면 제대로 읽었는지 알 수 없는,,
가까워도 먼 존재인거 같습니다. ^^;;

starover 2011-01-30 11:49   좋아요 0 | URL
정말로 고전은 유명하면서도 읽혀지지 않는 책들이죠..... 저 역시 쉽지만은 않은 책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