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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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았어. 네가 본 산은 처량하게, 나목으로 남아 있었지.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며 꽃이 꺾였고 나무들이 베였어. 전쟁 중에는 군인들의 피와 포탄 자국을 품었고 격전지가 바뀌면서 나무 뿌리까지 캐먹으려는 굶주린 이들이 찾아왔지. 그때마다 그 산은 자기 자신을 스스럼없이 내어주었어. 비가 오면 쌓인 흙이 점점 벗겨지고 누구도 돌보지 않아 계절의 변화에 야위어 갔대. 하지만 그 산은 단지 그곳에 우뚝 서 있었어. 여전히 생명을 품은 채 말이야.

 

 젊은 남자들이 전장에서 싸우고 있을 때, 남아 있는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또 다른 방식의 전쟁을 치러야 했어. 어린 나이의 너는 그 모든 현장에 목격자가 아닌 생존자로서 참여했지. 오빠는 다리에 총을 맞고 돌아와 존경했던 모습을 상실했고 너는 올케와 함께 가족을 부양하는 처지에 놓였어. 북한군이 점령한 버려진 서울의 광경은 실로 암울했어. 너와 올케는 담을 넘어 빈 집에서 양식과 팔 것을 훔쳤고 공산당의 앞잡이에게 굽신거리며 버텼지. 네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어. 이것이냐 혹은 저것이냐로 생사가 갈리는 순간이었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싸구려 예술에 기꺼이 박수를 치고 불편한 사람들과 살을 맞대며 사는 것쯤이야 감당할 수 있었지.


 오빠가 죽고 나서 너희 가족이 겪었던 아픔을 기억해. 오빠가 무덤 틈으로 다시 기어나오는 악몽은 올케와 엄마의 갈등으로 현실이 되었어. 문득 내가 올케였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생각하곤 해. 사랑하는 이가 죽어가는 동안 그를 보살폈지만, 그이는 속절없이 세상을 등졌어. 생계를 위해 올케는 양놈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준 뒤, 그 역겨움을 이기지 못해 입을 게워내야 했지.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너의 눈에는 동정심이 없었어. 올케 역시 험난한 세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인물이라는 그 평정심이 오히려 나에게 위로가 되었어. 그래서 올케와 엄마가 그 문제로 싸운 뒤, 홀로 걸으며 네가 품었던 생각이 더욱 와 닿는다.

 

 어쩌다 우리가 이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을까? 엄마는 건강하여 손자들을 잘 돌보고, 올케는 사나흘에 한 번씩 주머니마다 돈을 하나 가득 벌어 오고, 아이들은 살지고 기름이 흐르고, 나는 한 달에 사십만 원이나 되는 수입이 보장돼 있고, 집 안에는 구메구메 양키 물건이고, 오빠가 살아 있어도, 전쟁이 안 났어도 이보다 잘 살기를 바라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은 점점 추비하고 남루해지는 걸까. 도둑질해서 먹고 살 떄도 이렇지는 않았다. 온 식구가 양키한테 붙어먹고 사는 거야말로 남루와 비참의 극한이구나 싶었다. (p.279~280)


 그때 나는 네가 본 산이 무엇인지 알았어. 네가 왜 과거를 돌아보는 기록들 사이에서 선명하게 기억날 이름을 담지 않았는지도. 일제강점기, 해방, 6˙25 전쟁을 거치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남았고, 몸과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 헤맸어. 하지만 자신들을 보호할 줄 알았던 산은 나목 투성이였고, 이미 줄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지. 도시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미군에게 빌어먹으며 불법을 일삼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다시 빌어먹는 양아치들과 부랑자들로 가득 차 있었어. 그속에서도 악착같이 희망을 보려 하는 너의 집요하게 객관적인 시선이 기억 난다. 백목련, 교하, 박수근, 지섭, 그이까지,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병든 사람들 틈에서 너는 그 시들지 않는 향기를 담아냈어.


 왜 너의 고백은 이토록 생생할까? 누구에게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들이 있지. 변한 시대의 일상을 살아가다가도 문득, 사라진 사람들의 감각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이를 테면, 숙모가 쑨 시뻘겋고 걸쭉한 팥죽을 아귀아귀 먹기 위해 달라붙은 식구들의 체취나 출근할 때마다 살색 스펀지를 달고 캐넌 중사에게 연애편지를 보내는 티나 김의 목소리, 그런 것들. 세상을 잘 몰랐던 시절에 체험했던 과격한 기억들이 그동안 얼마나 깊이 너의 영혼에 새겨져 있었을까? 나는 글의 힘을 믿는다. 어떤 글을 통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치유되는 존재는 바로 작가 자신이야. 이제 네가 본 산의 모습을 모두 담아내어 너를 괴롭혔던 기억들을 털어놓으렴. 세상의 파도에 마모되고 싶지 않았던, 최소한의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싶었던 너를 위해서. 


 -비로소 산을 찾은, 누구보다 험난했지만 아름다웠던 20대를 보낸 이를 기억하며.

이렇게 그이는 멋이라고는 없는 남자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지섭이와 그이를 비교하다가 뭣 하러 비교를 하는지 자신을 의심스러워하곤 했다. 아무리 비교해 봤댔자, 그이가 지섭이보다 나은 점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나은 점이라기보다는 명확하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그이하고 있을 때는 내가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전혀 부담이 안 된다는 거였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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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리포트 - 필립 K. 딕 단편집
필립 K. 딕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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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의 정수는 마지막 문장에 달려 있다. 특히 반전이 존재하거나 특이한 설정이 존재하는 단편들의 경우 그 중요성은 배가 된다. 이러한 법칙을 적용했을 때, 필립 K. 딕은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에 더 걸출한 능력을 보인다. 정신착란이나 꿈처럼 보이는 인상들이 반복되면 읽는 이들은 쉽게 지친다. 하지만 잘 마무리된 단편은 그의 정신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납득이 될 만큼 설득력이 있다. 수많은 SF 영화의 영감을 제공하거나 실제로 영화가 된 그의 단편들을 언젠가 꼭 읽어보고 싶었고, 마침내 접하게 된 그의 대표작들은 왜 그가 여전히 최고의 SF 작가들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지 보여주었다. 나는 어렴풋한 인상을 남기기보다 각 작품들의 장단점과 특징을 남기고 싶었다. 그래야 나중에 리뷰를 다시 보았을 때,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1. 워브는 그 너머에 머문다: 워브의 원형을 찾기 위해 독자는 작품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워브는 돼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도 아니다. 자신을 먹어치운 생명체의 뇌를 장악하여 생존한다. 설정의 한계가 존재하지만, 짧은 분량 안에서 작가의 독특한 생각과 워브의 평온함이 주는 묘한 공포감이 충분히 전달되었다. 또한, 필립 K. 딕이 주로 모색하는 주제인 "인간은 어떻게 정의되는가?"에 대해 탐구하고 있기 때문에 입문하기에 적절하다. 


 2. 수호자: 내가 여러 버전으로 존재하는 작가의 단편집들 중 『마이너리티 리포트』을 선택한 이유였다. 필립이 선호하는 배경은 언제나 핵전쟁 이후 몰락한 문명 또는 새롭게 세워진 문명이다. 이 소설은 방사능으로 오염된 지상에서 활동할 수 없는 인간 대신 리디라는 로봇이 전쟁을 대신 수행하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전쟁은 지표면이 파괴된 순간 끝나 있었고, 리디는 인간의 눈을 속인 채 자연을 보전하고 있었다. 적절한 반전과 흥미로운 설정들은 소개만으로 나를 매혹하기에 충분했고, 실제로 읽으니 더 만족스러웠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가 냉전과 메카시즘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제시하려는 대안에 가깝다.


 3. 두 번째 변종: 상상력이 빛나긴 하지만, 그 빛이 매우 날카로워 독자들을 때로 혼란스럽게 한다. 굳이 반전을 넣지 않아도 충분히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물론 곱씹어 볼수록 주제의식이 강렬해진다는 효과가 있지만, 변종이 끊임없이 생기고 그들은 서로를 파괴하려 한다는 결말을 보고 나서 의아함이 먼저 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즉 서술자가 불안정할 때 독자 역시 마찬가지의 감정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절 이후의 세상의 모습을 창의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한다.

 

 4. 콜로니: 이른바 '생활 공포'라고 할까? <트랜스포머>에서 가장 무서웠던 순간은 우리가 사용하는 전자기기와 자동차가 순식간에 인간을 위협할 때일 것이다. 도구가 도구가 아니게 될 때, 인간은 어떠한 위치에 있을까? 옷조차 믿을 수 없어 발가벗은 채 우주선에 오르는 군상을 묘사하는 필립 K. 딕의 어조에는 조소가 느껴진다. 인간이 인간으로만 남아 있을 때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가? 조금은 유치할 수도 있는 상상에서 출발하여 자신만의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작가의 통찰력이 돋보인다. 


 5. 페이첵: 표제작이 없었다면, 분명 이 작품이 그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가장 영화로 구현하기 좋은 소재와 줄거리를 갖추었다. 물론 실사화된 이야기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이 소설에서 보여준 '시간 트릭'은 무척 참신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고, 추격전에서 느껴지는 스릴, 그리고 작가가 강조한 '사소한 물건의 놀라운 쓰임새' 등은 꽤 즐거운 경험이었다. 다만 설정에 있어서 의문스러운 지점들이 존재했다. 개인의 삶을 얼마든지 박탈할 수 있고, 억압할 수 있는 보안경찰이 기업 앞에서 쩔쩔맨다는 설정이, 다른 디스토피아에 익숙한 나로서는 설명력이 부족했다. 또한, 아무리 무력하다 해도 수십 년 동안 시간 창문을 개발했는데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제닝스 혼자서만 그것을 수리할 수 있다는 것들도 아쉬웠다. 하지만 만족스러웠기에 아쉬운 지점이 보이는 법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이 단편은 매혹적이었다. 


 6. 변수 인간: 과거의 능력자가 현재에 찾아와 미래를 조작한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것이다. 변수 인간에 집중하기만 해도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이 소설의 경우, '필립스러움'이 사족이 되었다. 센타우리 행성과의 전쟁을 넣을 필요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물론 확률을 계산하는 컴퓨터에 의존하는 라인하트를 비꼬고, 더 높은 이상을 꿈꾸는 토머스 콜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지구 내에서 이야기를 해결해도 별 문제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작가의 아이디어가 상당히 두드러지는 작품이며, 꽤 집중력 있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있기에 기꺼이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7. 통근자: 가상의 세계로 인한 현실의 붕괴라는 소재는 현대에 있어서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가상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현실에 영향을 주는 이야기는 이제 새롭지 않다. 필립의 유쾌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예지적인 작품이다. 


 8. 요정의 왕: 작가가 시도한 몇 안 되는 판타지 소설이다. 하지만 필립 K. 딕에게 기대하는 것은 언제나 '그럴 듯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아무리 무리한 설정을 사용해도 그가 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에 가미가 되면 그만이다. 핵폭탄과 수소폭탄이 몇 번이 터지든 상관없다. 그에게는 판타지 소설이 일반 소설과 다를 것이 없다. 때로 이러한 환상적인 이야기와 해피엔딩은 독자들에게 쉼터를 제공한다. 


 9. 단기 체류자의 행성: 적어도 필립 K. 딕은 인간의 정의에 '지구에 거주하는 생물'을 절대 포함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든 우주로 공간을 확장한 다음, 인간의 거주지를 지구 밖의 어딘가로 보내버린다. 전쟁 이후, 수많은 돌연변이들로 인해 우리가 알던 인간의 정의는 바뀌었고, 지구는 우리가 아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대신, 새롭게 정의된 인간들이 그 영역을 차지했다. 그러니, 제목에 나타난 '단기 체류자'는 바로 현 인류다. 

 

 10. 자가 광고: 굉장히 극단적인 방식으로 광고를 비판하고 있다. 말하자면, 광고에 지친 남자가 태양계를 벗어나 재가 되는 이야기이다. 끝까지 에드 모리스의 옆에 붙어서 광고를 해대는 파스라드를 보면, 쉴새없이 광고에 노출되는 현대인으로서는 경각심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결말에 대해 불만을 내뱉는 독자들이 있겠지만, 주제의식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죽여도 좋다. 어차피 그의 이야기는 모두 대체현실을 기반으로 한다. 


 11. 황금 사나이: '인간을 적대하는 절대자'라는 설정을 굳이 내세울 필요가 없다. 언제나 선제공격은 인간이 먼저 했으니까. 진화된 인류는 그냥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고, 기존의 인류는 그것을 허용할 리가 없다. 하지만 역사는 증명하지 않는가? 끝에 누가 살아남는지 말이다. 


 12. 제임스 P. 크로우: 「페이첵」에서 사용되었던 시간 창문이 다시 등장한다. 이번에는 인류가 전쟁으로 멸망하고, 로봇과 인간의 위치가 도치된 미래 세계이다. 줄거리를 설정대로 따라가면 의문스러운 지점이 생기기 때문에 일종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으로는 두 상응하는 존재의 공존은 불가하다는, 필립 K. 딕의 쓸쓸한 현실 인식이 반영되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13. 사칭자: SF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공포소설에 가깝다. 자기 자신의 실존을 의심하는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가? 만약 1인칭으로 전개되었더라면, 주인공이 느낀 감정이 더 극대화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립 K. 딕은 독자가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작품 속에 던져진 단서와 암시를 확인하고 그가 제시하는 결말에 대해 사유하길 바라는 듯하다. "하지만 저게 올햄이라면, 나는 분명..."이라는 완성되지 않은 문장이 기폭제라는 것에 대해 나는 납득할 수 있었다. 자신이 폭탄이라고 인식되는 순간, 사칭자의 세계는 붕괴된다. 앞으로 존재할지도 모르는 복제 생물에 대한 작가 나름대로의 해답일 것이다. 


 14. 음울한 대지에 고하노니: 러브크래프트의 '우주적 공포'가 연상되는 작품이었다. 다만 필립은 언제나 그것을 지구 전체의 규모로 확장시킨다는 차이점이 있다. 실비아의 형상이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장악하여 마침내 릭까지 차지해버리는 모습, 그리고 정작 본인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다는 점이 공포감을 유발한다. 작가의 창의력이 절제 있게 구현되어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든 작품이다. 


 15. 조정 팀: 현실의 붕괴, 조정 팀, 그리고 진실을 알 수 없는 투쟁 등, 이 소설은 '필립스러움'이 가득 담겨 있다. 그의 팬이라면 이 소설을 사랑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줄거리와 결말에 대해 의구심을 표할 것이다. 나는 물론 만족했다.

 

 16. 아버지 괴물: 그의 다른 SF 소설들에 비하면 평범하지만, 그의 순수한 상상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 재미 있게 감상할 수 있다. 다만 미완성된 것 같다는 인상을 주는 결말은 찝찝함을 남긴다. 조금만 이야기를 발전시켰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들었다.


 17. 포스터, 넌 죽었어!: 전체가 대의를 위해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 선명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메카시즘에 정면으로 맞서는 그의 태도가 엿보인다. 미국과 러시아 독자들에게 골고루 사랑을 받았는데, 이는 대중들 대부분이 만들어진 증오의 물결에 휩쓸려 지쳐 있었다는 방증이었다. 그놈의 명분이 뭐라고 우리의 삶이 침해되고, 때로는 빼앗겨야 하는가? 이러한 부당함에 대한 의문은 표제작으로 연결된다. 

 

 18. 독점 시장: 이 작품까지 보고 나서 느낀 것은, 특별한 반전이 없으면 필립의 마지막 문장은 그렇게 힘이 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는 호기롭게 독자를 사로잡고 나서 후반부에 그것을 풀어버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대부분은 끝까지 나를 붙잡았지만, 이 소설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19. 얀시의 허울: 여러모로 실존 인물보다는 '빅 브라더'를 연상시킨다. 조지 오웰이 만든 인물과 뚜렷한 차이점은, 빅 브라더가 힘과 단순한 구호로 사람들을 억압한다면, 얀시는 그럴 듯한 말장난과 눈에 좋은 허울들로 대중들을 현혹한다는 것이다. 얀시의 환상에 휘말려 자신의 의견을 잃어버린 자들을 제시하는 이 단편은 현대인에게도 충분히 경고가 된다. 자극적인 언론이나 대중매체를 접할 때 충분한 거리를 두고, 그리고 자신만의 사유를 가지고 접근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되새기게 한다.


 20. 마이너리티 리포트: 필립 K. 딕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영화는 알고 있다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그리고 직접 읽어보니 납득할 만큼 잘 썼다. 분량이 길지 않음에도 많은 주제를 담고 있었다. 프리크라임의 정당성, 시스템과 개인 사이의 우위, 예측할 수 있는 미래라는 환상 등 '필립스러움'의 장점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상해 보라. 나는 평화롭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경찰이 들이닥쳐 나를 살인죄로 체포하는 장면을. 가족과 친구들과 떨어져 하루아침에 수용소에 감금되는 모습을. 카프카나 카뮈의 소설에서 나오는 부조리한 상황이 미래에 현실이 되고, 시스템이 되는 모습을. 그러한 상상력이 있다면, 누구나 프리크라임 제도를 거부할 것이다. 소수점에 그치는 범죄율 따위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인간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낙관적인 법이다. 다시 말해, 필립은 인간의 속성을 잘 알았고, 프리크라임의 현실화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대신 그는 불가능한 설정을 도입하여 인간의 의지와 정의에 대해 묻는 것이다. 누가 평범한 인간을 살인자로 만드는지 말이다. 


 그의 상상력은 현실에 대한 통찰만큼이나 날카롭다. 문체나 구체적인 설정, 캐릭터 등이 상상력을 못 따라간다는 점은 아쉬웠다. 하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주제의식이 탈시대적인 배경과 만나 참으로 멋지고 매력적인 이야기가 탄생한 것을 볼 때, 그의 작품은 계속 조명받을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의 대부분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언젠가 똑같은 위기가 찾아올 때, 인간은 실수를 반복할까? 아니면 교훈을 찾아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답을 찾을까? 그 답이 나오기 전까지 '필립스러움'은 언제나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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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드디어 다윈 1
찰스 로버트 다윈 지음, 장대익 옮김, 최재천 감수, 다윈 포럼 기획 / 사이언스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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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의 기원은 흥미롭다. 읽는 이마다 다른 인상을 받을 수 있는 책이다. 나는 자연과 인간이 얼마나 대비되는가에 대해 느꼈다. 저자인 찰스 다윈은 여러 장에서 인간의 능력과 자연의 영역을 구별한다. 사육과 재배를 통해 동식물을 인간의 필요성에 맞게 적응시킬 수는 있어도 그것들의 내부 기관에는 영향을 미치기란 매우 어렵다. 또한, 그것은 자연에 의한 변이가 일어난 후에야 가능하다. 결론 부분에서는 인간이 가변성을 만들어 낼 수 없고, 할 수 있는 일은 유기체를 새로운 환경 조건에 노출시키는 것이 전부라고 말한다. 자연은 모든 것을 서서히 바꾸지만, 인간은 어떻게든 자신의 기호에 맞추려고 한다. 그리고 그 조작은 보통 자신의 생애 안에서 이루어진다.


  지질학을 다룰 때, 인간과 자연의 차이는 극명해진다. 다윈은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지형과 화석 등을 직접 조사하면서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을 지구가 견뎌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지구의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는 고작 몇 줄로 존재할 뿐이라고 기록한다. 유기체의 변이가 아주 천천히 일어난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까지 인간이 다른 생물들에게 미친 영향은 지극히 미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해석이 달라지는 지점은 자연 선택이 언급되는 순간이다. “각각의 사소한 변이가 유용한 경우에 보존되는 원리, 나는 이것을 인간의 선택 능력과 대비해 자연 선택이라 부르기로 했다.” 여기서 찰스 다윈은 자연의 원리를 인간의 것과 대립시킴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강화한다. , 생존의 원리는 자연과 인간에게 다르게 해석된다는 것이다. 자연 선택은 오로지 유용함만을 따진다. 동종 간의 생존 투쟁에서는 성선택에 해당되는 종이 살아남으며, 본능은 습성을 앞선다. 어떤 한 종의 후손은 멸절한 종의 빈자리를 정확히 메우기 위해 적응하다가 그것을 완전히 대체한다. 그러나 그들은 각기 다른 특질을 물려받았으므로 똑같지 않다. 그리하여 한 번 멸절한 종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멜서스의 원리에 따라 생존할 수 있는 수보다 더 많은 개체들이 생겨날 때, 반드시 생존 투쟁은 발생한다. 이 투쟁의 결과는 다수의 죽음과 소수의 변화를 동반한 계승이다.

 

 언뜻 보면 냉혹하기 그지없는 생존의 원리가 인간과 전혀 무관할까? 물론 동식물을 위주로 분석한 다윈의 이론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변화하지 않는 것들은 멸절한다는 인용문은 긴 시간을 가정해야 성립한다. 다만 나는 자연 선택이 모든 유기체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지질학을 다루는 11장과 12장에서 이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가장 미약한 유기체인 씨앗이 가장 다양한 지역에 분포하며, 생활 조건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한 종이 멸절할 수 있다. 또한, 현존하는 종에게도 유용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으며 오래전에 사라진 형질이 후손 세대에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자연의 불완전함은 그 안에 속한 어떤 종에게도 적용된다.

 

 자연과 인간은 동화될 수 없지만,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기는 언제나 조용히 닥쳐온다는 것이다. 멸절된 종과 현존하는 종 간의 투쟁보다도, 생활 조건의 변화보다도 치열한 것은 동종 사이에 일어나는 생존 투쟁이다. 외부의 위협은 종을 강하게 만들지만, 내부의 문제는 아주 천천히 종을 멸절시킨다. 멸절하는 종의 대표적인 특징은 세대 간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멸종에는 여러 가변적인 요소가 존재하지만, 그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굳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다윈이 초판에서 창조론을 정면으로 반박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생각을 밝혀야겠다. 『종의 기원은 출간된 이후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쳤고, 그 과정에서 외부의 압력에 의해 용어를 첨가하거나 수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논조가 창조론을 비관하는 입장임은 변함이 없다. 그가 주장한 이론들 중 일부는 틀렸음이 증명되었고, 일부는 판게아 이론이나 원시 미생물의 발견으로 보강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생물학과 지질학이 증명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 남아 있다. 다윈은 그러한 부분에 대한 반박을 예상하고 이렇게 쓴다.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한 설명보다는 설명하기 힘든 어려운 문제에 비중을 더 많이 두는 기질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나의 이론을 거부할 것이다. 반면, 유연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미 종의 불변성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 일부 박물학자들은 이 책에 의해 모종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비워 놓은 우연과 복잡성을 그랬을 것이다라는 추측보다 전지전능한 존재의 개입으로 설명하는 편이 나에게는 더 합리적으로 여겨진다.


 다윈의 이론은 출간 직후 어떠한 이론보다 가장 많은 공격을 받았고, 동시에 가장 많은 옹호를 받았다. 그것은 이 학문의 물결이 종교의 심오한 진리를 공격하는 것 이상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지성의 싸움은 단순히 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지식은 곧 삶에 직접 타격을 준다. 어떤 깨달음이 머릿속에 각인되는 순간, 그 사람은 예전과 같이 사고할 수도, 행동할 수도 없다. 코끼리를 인지하는 사람은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는 언어의 의미보다 언급되는 단어에 먼저 반응한다. 찰스 다윈의 연구를 통해 활성화된 진화론은 여전히 창조론과 대립 중이며 이 정신의 투쟁은 곧 생존의 원리와 직결될 것이다.


 나는 박물학자가 아니기에 그의 어떤 부분이 틀렸고, 어떤 부분이 맞는지 일일이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반박할 수 있다. 『종의 기원의 초판은 결론에 이르러서 상당히 희망에 찬 전망을 내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생명이 미래에도 과거만큼이나 오래 존속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도 있다. 또한 자연 선택은 오로지 각 유기체에 의해, 그리고 각 유기체의 이득을 위해 작용하므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자질은 완벽해지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찰스 다윈은 순진하게도 인간을 자연에 속한 하나의 종으로 보았다. 그의 이론이 동종 간의 억압을 합리화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명분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만약 그가 현재의 세계를 본다면, 지구의 시계에서 인간이 움직인 영역이 지극히 미미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식의 저주를 택했고,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엇갈린 생존 투쟁은 한계가 없는 형태로 굴절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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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부터인가 서평을 쓸 때 일정한 분량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기준에 충족하지 못한 서평은 아쉽고, 남들의 눈에도 그럴 것으로 보였다. 삶에서 독서의 비중을 줄이고, 다짐들을 흘려보내면서 '책을 읽을 때마다 꼭 독후감을 남기자'라는 약속에 점점 소홀해졌다. 이대로 문학과는 거리를 두는 생활이 지속될 것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다만, 프랑수아즈 사강의 데뷔작인 『슬픔이여, 안녕』은 적절한 자극제가 되었다. 습관적으로 펼쳐들지 않고, 어디선가 들어본 명성에 이끌려 소설을 집어들었다.

 

 소설의 첫 번째 문단은 언제나 설렌다. 작가, 당신이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이토록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가 없으니까. 독자에게 오는 수많은 외부의 정보들은 활자 너머의 세상으로 넘어오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는 초점을 옮긴다.

 나를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나는 망설이다가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 이 감정이 어찌나 압도적이고 자기중심적인지 내가 줄곧 슬픔을 괜찮은 것으로 여겨왔다는 사실이 부끄럽게까지 느껴진다. 슬픔, 그것은 전에는 모르던 감정이다. 권태와 후회, 그보다 더 드물게 가책을 경험한 적은 있다. 하지만 오늘 무엇인가가 비단 망처럼 보드랍고 미묘하게 나를 덮어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킨다.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세실은 슬픔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다. 처음에 그것은 사춘기의 역경과 결합하여 친구처럼 늘 그녀 곁에 있는다. 자신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존재로 여겨졌던 안이 죽고 나서야, 자신의 관계를 왜곡시킨 존재가 바로 슬픔임을 인지한다. 그리고 다시 세실이 슬픔의 이름을 불렀을 때, 두 친구는 작별을 고한다. 물론 그녀는 알고 있다. 지금은 헤어지지만, 언제라도 슬픔은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일일이 이름을 부르는 과정이 부끄럽고 거추장스럽기에 그녀는 미리 인사를 남긴다. 


 1부를 읽었을 때만 해도 이 소설의 주제가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안으로부터 빼앗긴 세실의 상실과 성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가 시릴과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가 싶었다. 하지만 인간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안이 죽고 나서야 세실은 고백한다. "순간 나는 그를 사랑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가 멋지고 매력적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나는 그가 내게 준 쾌락을 사랑했을 뿐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나는 떠날 터였다. 이 별장을, 이 청년을, 이 여름을." 이 고백이 『슬픔이여 안녕』을 독특한 지점에 올려놓는다. 아픔과 시련이 늘 주인공의 방황을 종결시키고 내면을 단단하게 만든다는 생각은 어른이 지어낸 동화다. 그들은 이미 그것들을 받아들였으니까. 열일곱 살에게 죽음이란 가혹하다. 너무나 아프다. 더구나 그것이 자신의 실수로 인해 초래된 것임을 알고 있을 때는 말이다. 세실에게 필요한 것은 곁을 묵묵히 지켜주는 남자 친구가 아니라 고독의 시간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그 시간들을 견뎌낸 후에야 부녀는 다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때 여름은 지나 있었다.


 처음 느낌 그대로, 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늘 똑같은 일상조차 매일 미묘하게 다른 것을.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그 세계를 지키는 여정이 쉽지만은 않다. 비단 소설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각자만의 독특한 세계를 보유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정신은 불변하나, 나약하다. '처음'이라는 말만큼 떨리고 간절한 단어가 있을까? 한 번 경험된 느낌과 행동이 다음에 똑같이 다가올까? 세실에게 또 다른 여행이, 여름이, 사랑이, 안이 찾아온다 해도 처음 느낌과는 분명 다르리라. 슬프게도 그녀는,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모두 안다. 자신이 만들어 낸 세상은 쉽게 흔들린다. 교훈은 여정을 마친 자의 몫이다. 아직 우리는 길 위에 있고, 자주 슬픔과 마주친다. 그 친구와의 관계는 무딜 만큼 무뎌져서 이제 그다지 반갑지 않다. 그래도 목 끝에 탁 걸린 그 말을 뒤로 하고, 다시 손을 뻗는다. 처음 만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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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상점 -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5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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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존경하는 친구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다. 청소년 문학이라는 장르가 나에겐 다소 낯설었다. 특정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문학은 보통의 문학과는 구별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본문 뒤에 실린 심사평들은 이질감을 불러일으켰다. 지금은 10년 전에 비해 청소년 문학의 지평이 꽤 넓어졌고, 응모작도 그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들이 많을 것이라고 믿는다(심사평을 보면 『시간을 파는 상점』이 선택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청소년을 위한 소설도 일반적인 소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세상에 대해 조금 더 거칠고 솔직한 시선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었던 온조와 그녀의 친구들은 어른이 되어 성장한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시간을 파는 상점』이라는 청소년문학상 수상작과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동시에 읽었다. 어른을 위한 문학, 청소년을 위한 문학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다. '어렵다'는 것은 주관적인 개념이다. 주인공의 성별이나 나이는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상상력은 어디에나 돋보였다. 어린 시절 한국 문학에 대해 지녔던 따분했던 편견은 어느새 사라졌다. 조만간 서평을 남기겠지만, 단편소설에 담긴 깊은 사유는 꽤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장편소설에 대해서는, 심사위원들과 비슷한 시선으로 분석했다. 청소년 소설에서는 어떤 어휘를 쓰고, 대화를 할 때는 문장에 무엇을 채워넣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시간을 파는 상점'이라는 판타지를 어떻게 구현했을지 확인하고 싶었다.


 "시간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재미있게 풀어내었다"라는 심사평이 지배적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소설은 말을 아낀다는 것이었다. 온조는 시간을 파는 상점의 주인이지만, 시간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의뢰인들이 생각하는 '시간'을 실천한 것이 전부였다. 모든 관계가 한 번에 풀리지 않았다. 한 아이의 미래에 대해 함부로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 억지스러운 만남을 추구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작가는 수수께끼를 여백에 남겨두었다.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여기서 『시간을 파는 상점』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청소년에게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 역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이 소설의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배웠다. 무엇보다 이것은 어머니가 딸을 위해 바치는 선물이다. 만약 이 소설이 상에 당선되지 않았다 해도, 적어도 작가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리라.


 『당신의 정원』을 완성한 후에 『시간을 파는 상점』을 보았다. 나는 그 소설을 내가 쓴 최초의 청소년 소설이라고 구분했다. 처음부터 청소년을 위해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마음을 담아내다 보니 작가 자신이 치유되었고, 그 기쁨의 순간을 아이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 검증된 작품을 읽고 나니, 내 습작의 완성도는 아직도 많이 부족함을 느꼈다. 우선 심사평에서 강력하게 지적한 사항을 위반했다. "청소년문학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끔찍한 경험은, 등장인물인 청소년의 입을 통해 작가의 설교를 듣게 되는 것이다." 즉, 등장인물인 청소년을 살아 있는 인물이 아닌 작가의 대변인으로 전락시키는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소설에서도 적용되는 부분이다. 교훈을 전달하려고 하는 순간, 그것은 문학이 아닌 우화가 되고 만다. 나는 우화를 그리고 있었다. 


 같은 범주 안에서 두 작품에 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창작자로서는 신비한 경험이었지만, 독자에게는 분명 반갑지는 않은 상황이리라. 이미 수없이 많은 청소년 문학에 등장한 요소들이 반복되니까 말이다. 온조에게 홍난주가 있었듯이, 루이에게는 김원주가 있었다. 들꽃자유가 꽃들의 이름을 보내주었듯 아이들은 사계절의 꽃들과 함께 했다. 바람의 언덕에서 그 아이를 만났듯, 당신의 정원에서 기적은 일어났다. 그러나 온조와 루이는 다른 인물이다. 오히려 전자는 온의 어린 시절 모습과 유사하다. '딸을 위해', 즉 '온조를 위해' 작가는 시간을 파는 상점을 개업했다. 나는 루이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어떤 평가를 받든 간에 『당신의 정원』은 나에게 중요한 작품이다. 루이를 통해 다시 한 번 글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감사하다. 나는 오늘도 루이를 위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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