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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色, 광狂, 폭暴 - 제국을 몰락으로 이끈 황제들의 기행
천란 엮음, 정영선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황제'란 무엇인가? '황제'란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이다. 그렇다면 '제국'이란 무엇인가? '제국'은 여러 나라를 차지하고 지배하는 국가, 즉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국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자인 황제는 제국의 권력을 감당할 수 있고, 또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만약 황제가 될 자격이 없는 자가 제국을 다스리게 된다면, 그는 미치게 되어 제국을 멸망의 길로 몰아넣는다. 그것은 로마제국의 역사와 중국제국의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다. 『색色, 광狂, 폭暴』은 그 중에서 중국의 미친 황제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동양의 국가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중국 제국이 어떻게 해서 순식간에 몰락의 길로 들어가게 되었는가? 그것은 외적의 침입도, 커다란 재해나 질병도, 백성들의 반란도 아니었다. 그것은 미친 황제 때문에 발생한 것들이며, 결국 근본은 '황제'에 있었다. 진나라에서 명나라까지 약 2000여년에 걸쳐서 천란은 중국의 '색광폭'의 황제 20명을 차례차례 소개한다. 그들의 기행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20명의 '색광폭'의 황제들 중 대부분의 황제가 색정적이며, 잔인하다. 짐승과 인간을 교배하게 한 황제, 상인이 된 황제, 신선이 되려고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황제, 지나친 사치로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리게 한 황제, 행차하다가 거슬리는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황제…… 이들은 결국 스스로를 망쳐가, "하늘은 너를 멸망시키기 전에 먼저 너를 미치게 한다"라는 말이 이들에게 정확히 들어맞게 되었다. 

 

 우리는 왜 황제들이 미치게 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색광폭'의 황제들은 모두 별다른 이유 없이 황제가 되면 미치광이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들이 미치게 되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던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운명 때문이 아니다. '색광폭'의 황제들은 모두 황제의 자격이 없었을 뿐이다. 그들은 제국의 통치자라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갑작스럽게 쥐게 되자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폭주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심을 품어보자. 왜 자격 없는 그들을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했을까? 그것은 '혈통 잇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가 오랫 동안 단일민족으로 지내왔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 아닌가? 그들은 피가 섞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 결과, 황제가 될 자격이 없는 자들도 혈통이 이어진다는 이유로 황제가 되고, 마침내 그런 황제는 제국을 멸망의 길로 이끄는 것이다. 

 

 슬픈 현실은, 그들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은 백성들이라는 것이다. '색광폭'의 황제는 서로 그 방식이 너무나 달라 도무지 공통점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그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 그들의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중국의 백성들이라는 것이다. 제국의 권력자는 '사랑'이라는 것을 반드시 갖추어야 했다. 사랑이 없는 통치는 누군가의 불행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색광폭'의 황제들은 '음욕'을 누릴 줄만 알았지, '사랑'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반란이 일어나고 외적이 쳐들어오면 황제는 백성들에 의지하고 자신은 계속 놀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훌륭한 통치자들은 모두 백성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사랑이 없는 통치자들은 비록 정치를 잘 한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고대 로마가 몰락한 이유도 그랬고, 조선에 자주 반란이 일어나는 이유도 그랬다. '색광폭'의 황제들이 반란을 많이 겪은 것은 자신의 행위에 의한 필연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분명하게 『색色, 광狂, 폭暴』에서 배울 점이 있다. 나는 이 책을 현대의 정치가들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역사를 아는 것은 곧 현재의 우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고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에 등장하는 20명의 황제들이 저지른 만행과 실수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역사를 알지 못한 채로 정치를 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짓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괴테는 이런 말을 남겼던 것일까?  

 

 지난 삼천 년의 세월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깨달음도 없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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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끼호떼 동서문화사 월드북 57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김현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무엇이 진실인가? 

 세르반떼스의 『돈끼호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기사도 소설을 지나치게 읽어 머리가 돌아버린 시골 귀족 라 만차가 자신을 기사로 여기고 이름을 '돈끼호떼'라고 바꾼 후, 말 로시난떼와 현실적이고 비열한 종자 산초와 함께 온갖 모험을 다니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 소설을 단순히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평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 윌리엄 포크너, 엘리엇 같은 문호들은 『돈끼호떼』를 단순하게 보지 않고 이 소설에 대해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 소설이 왜 그러한 명성을 얻게 되었을까? 이 리뷰에서 나만의 해석을 해 본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가 번성함에 따라 그리스인들은 부유함뿐만이 아니라 '지혜'를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지혜를 얻는지에 대한 지혜를 알지 못했다. 그럴 때 등장한 사람들이 바로 '소피스트(복수로는 '소피스테스')'라는 사람들이다. 궤변론자인 그들은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그들이 '지혜'라고 부르는 것을 아테네인들에게 가르쳤다. 그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소피스트는 바로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85~BC 414)'이다. 그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상대적 주관주의'를 주장한 소피스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만약 프라타고라스의 '상대적 주관주의'가 진실이라면, 이 소설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현실은 두 가지 이상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즉, 『돈끼호떼』 1부에서 돈끼호떼와 산초가 서로 다른 각각의 진실을 말한 것과 같이, 상대적 주관주의는 그러한 모순을 담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실은 단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돈끼호떼』는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적 주관주의'를 풍자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돈끼호떼』의 1부를 보자. 여러 장에 걸쳐서 돈끼호떼와 산초는 한 가지 대상에 대해 대립되는 생각을 가진 채 서로 대립했다. 한 가지의 현실을 놓고 두 개의 이론이 대립한다면, 작품 밖에 있는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오직 진실을 전해주는 현실이 직접 보여주는 것만이 우리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심지어 저자 세르반떼스는 아라비아 학자 씨데 아메떼라는 자를 저자로 내세우고 자신은 이 이야기의 화자 또는 편집자로서 나서서 우리로 하여금 둘 중에 누가 진짜 저자인지 판단할 수 없게 만든다. 물론 우리는 세르반떼스가 이 이야기의 저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가 아라비아 학자를 저자로 내세운 까닭은 당시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혼돈 속에서 우리는 현실 속에서의 분명한 진실을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세르반떼스가 노린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것을 통해 확고한 진실을 아는 것 말이다. 

 

 

 상대적인 진실  

 우리는 1300페이지에 걸친 엄청난 모험의 대부분이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골 귀족 돈끼호떼와 종자 산초가 처음으로 대립하는 사건인 '풍차 사건'을 보자. 돈끼호떼는 그것을 '거인'이라고 부르고, 산초는 그것을 '풍차'라고 부른다(내가 '풍차'라고 명명한 것은 풍차가 아니다. 그것은 풍차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인가? 돈끼호떼에게는 '거인'이 진실이고, 산초에게는 '풍차'가 진실이다. 진실은 하나뿐인데, 어떻게 진실이 두 개로 나타날 수 있는가? 이것이 상대적인 진실의 모순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적인 진실을 진실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러한 갈등은 계속된다. 주막이라 불리는 곳을 '성'이라고 부르는 돈끼호떼와 그 곳을 '주막'이라고 부르는 산초 간의 갈등, 다가오는 무리를 '군대'라고 부르는 돈끼호떼와 그 무리를 '양떼'라고 부르는 산초 간의 갈등, 돈끼호떼가 몬떼시노스 동굴에서 본 것이 진실인지에 대한 둘의 갈등……. 이렇듯, 『돈끼호떼』는 진실과 거짓, 현실과 상상의 갈등의 변증법을 통해 전개된다. 그래도 대부분의 독자들과 연구가들은 더 진실에 입각한 쪽을 산초라고 평하고 있다. 그가 지극히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초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진실이 아니듯이, 현실에 나타난 것들을 모두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갈등의 변증법의 혼돈 속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광인처럼 여겨지던 돈끼호떼가 점점 성숙한 기사로 변하게 되는 사실이다. 『돈끼호떼』 1부에서 보였던 돈끼호떼의 모습이 무모하고 몽상적인 어리석은 기사의 모습으로 보였다면, 2부에서 보이는 돈끼호떼의 모습은 숭고롭고 고귀한 '영웅'의 모습으로 보이게 된다. 우리는 사건이 진행됨에 따라 저자가 교묘하게 돈끼호떼를 점점 성숙한 인간으로 바꾸어가는 것과 산초와 돈끼호떼의 성격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여러 문인들의 찬사를 받은 이유이며, 이 소설이 고귀롭고 숭고한 두 인물을 창조한 최초의 근대소설이라는 평을 듣는 이유이다. 

 

 

  스페인에 대한 비판 그리고 사랑

 세르반떼스가 이 소설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부패에 찌든 중세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서, 당시 스페인(에스빠냐)의 사회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격이 분명한 두 인물을 통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감동시키기 위해서……. 그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저자의 말로는 '당시 스페인에 팽배했던 기사도 소설을 비판'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기사도 소설을 지나치게 읽어 머리에 온갖 이상한 것이 담긴 돈끼호떼의 내면을 묘사한 구스타브 도레의 삽화)

 실제로 우리는 세르반떼스가 서술한 것과 같이, 이 소설이 기사도 소설을 타파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사실을 소설 초두에서 알 수 있다. 사람들에게 '착한 알론소 끼하나'로 불렸던 시골 귀족이 기사도 소설을 지나치게 많이 읽는 바람에, 결국 자신을 기사도 소설의 기사로 생각하게 된다. 『돈끼호떼』에 흔히 등장하는 기법인 '위장'이 등장하는 것이다. '위장'이란, 자신의 진실, 또는 정체를 감추는 것들을 일컫는다. 이 경우에는 '돈끼호떼'라는 이름이며, 이 이후에도 『돈끼호떼』에서는 위장이 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어쨌든 우리는 이로써 깨달을 수 있다. 당시 스페인에 팽배했던 기사도 소설은 착한 사람을 남에게 피해를 주는 미치광이로 전락시킨다는 것, 그리고 기사도 소설은 한 사람의 인생을 돌이킬 수 없게 망쳐버린다는 것, 그리하여 그런 기사도 소설은 뒷마당에서 '처형'당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세르반떼스가 『돈끼호떼』를 통해 비판하려고 했던 것은 단순히 '기사도 소설'만이 아니다. 그것은 기사도 소설에서 한층 더 나아간 '중세 사회의 스페인'이다. 기독교의 논리를 자신의 이익으로 삼는 부패한 성직자들, 기사도 소설에 빠져 깨우치지 못하는 스페인 백성들, 폭정을 하는 통치자들……. 세르반떼스는 이 모두를 겨냥하여 이 작품을 쓴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 곳곳에는 스페인 세계에 대한 비판과 유토피아에 대한 저자의 갈망이 담겨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속에서 세르반떼스의 사랑을 엿보았다. 이지성 작가의 『리딩으로 리드하라』에 따르면, 모든 인문고전 속에는 인문고전 저자의 사랑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치열한 독서를 통해 그 속에 담겨진 천재들의 사랑을 엿보아야 한다. 여러 문호들과 문인들이 열렬하게 찬사를 남긴 『돈끼호떼』가 어찌 인문고전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나는 이 소설에서 세르반테스의 위대한 사랑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세르반떼스는 『돈끼호떼』에서 당시의 스페인 사람들, 나아가 전 세계의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을 통해 그들을 좋은 상태로 이끌어나가려는 갈망을 담았다.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 사람을 좋은 상태로 이끌어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르반떼스는 전 세계 사람들을 좋음의 길로 이끌어나가려고 했다. 즉, 그는 모든 인류를 사랑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 세르반떼스는 중세 사람들이 저지른 만행과 악들을 그의 생애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한때 노예선에 붙잡혀 심한 고생을 하던 그로서는 어느 부류의 인간은 싫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까지 무시하고 온 인류를 좋음의 길로 이끌려고 했다. 나는 그의 초월적인 사랑에 감탄했다. 그의 초월적이며 숭고한 사랑이 돈끼호떼가 보여준 사랑과 숭고함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책 속에서 살아있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액자와 삽화 

 『돈끼호떼』는 하나의 장대한 대서사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줄거리가 그다지 길지 않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고전을 읽는 동안 지루해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는 『돈끼호떼』 속에 수많은 액자 소설과 에피소드를 담아놓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모여 『돈끼호떼』의 주제는 더욱 확고해지고, 이 소설은 더 숭고하고 위대해진다. 

  

 『돈끼호떼』는 수많은 액자로 가득 채워져 있다. 1부에서만 해도 6가지의 액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2부에서의 돈끼호떼가 몬떼시노스 동굴에서 겪은 이야기와 공작의 노시녀 도냐 로드리게스의 이야기 등을 합친다면, 『돈끼호떼』 한 소설에 등장하는 액자 소설만 해도 10가지 이야기 남짓한다. 게다가 우리는 이 방대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659명의 인물 중 459명이 액자 소설에 등장한다는 사실만 알아도 이 소설에서 액자 소설의 비중이 얼마나 크고, 또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돈끼호떼』는 본 줄거리보다 온갖 삽화가 더 비중이 클만큼(온갖 노래와 시도 한 몫한다) 삽화 천국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중이 큰 삽화는 분명히 2부에 등장하는 '공작의 장난'일 것이다. 사실 이 삽화는 삽화로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것들이 많다. 이 거대한 삽화는 또 다시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지기 때문이다(공작의 장난이 처음 두 번째의 이야기로 나타나며, 산초가 섬의 영주로 통치한 이야기와 혼자 남은 돈끼호떼의 개인적인 이야기, 그리고 노시녀 도냐 로드리게스의 이야기, 총 다섯 가지 이야기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돈끼호떼 없이 통치하는 산초의 이야기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돈끼호떼가 산초를 종자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유혹 때문이었다. 자신의 모험이 성공하기만 하면 그를 섬의 영주로 앉힌다는 유혹으로 말이다. 그 말을 듣자 산초는 바로 가족을 내팽개쳐버리고 모험길에 오른다(이 부분에서 세르반떼스는 권력욕에 눈이 먼 현실적인 사람을 풍자한다). 하지만 그와 함께 모험을 계속 해 왔지만 자신에게 오는 것은 고통과 광인 돈끼호떼의 변명뿐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돈끼호떼와 산초가 간 공작의 성에서 공작이 산초에게 섬 하나를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 이후로 산초는 가식적인 행동을 하며 섬의 영주가 되기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바라따리아 섬의 영주로 임명받아 그곳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솔로몬처럼 섬의 갈등을 해결하고 돈끼호떼와 서신을 교환하는 등 통치자로서의 자질이 보였다. 그리고 그 때까지 그는 드디어 자신의 오랜 갈망을 이루었다고 기뻐한다. 그러나 적의 습격으로 산초가 비참하게 전락하여 "나도 불행한 녀석이지! 내 어리석음과 몽상이 이런 결말을 가져오다니!"라고 부르짖을 때, 우리는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애초에 영주직에 앉을 자질이 없었고, 그것은 어리석은 소망이었다는 것을. 또한, 우리는 돈끼호떼 없이 통치한 그의 비참한 운명을 통해 우리는 통치는 돈끼호떼와 같은 것(상상력, 용기 등. 참고로 2부의 이야기이므로 더 이상 그를 광인 취급하면 안 된다)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산초의 이 허황된 생각으로 만들어진 모험은 굴에 빠져 절망하고 있는 산초가 그를 발견하고 손을 내미는 돈끼호떼와 만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어찌 보면 공작 부부의 성에서 벌어진 삽화는 산초를 위해 만들어진 삽화가 아니었는가 싶다. 왜냐하면 이 삽화가 만들어내는 결과는 모두 산초에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둘씨네아의 마법을 풀기 위해 엄청난 양의 곤장을 맞아야 하는 사람도 산초고, 영주가 되어 비참하게 전락한 사람도 산초다. 그리고 우리는 33장에서 산초가 공작 부인과 시녀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이 거대한 삽화의 목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님, 지금 여기서는 이 방에 계시는 분들 이외에 아무도 몰래 엿듣는 사람이 없으니까 무서워하거나 겁을 먹는 일 없이 방금 물은 말과 앞으로 물을 만한 일에 대답해 드릴 작정입니다. 우선 말씀드릴 것은 저는 주인 돈끼호떼 님을 손도 댈 수 없는 미치광이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기야 이따금 생각이 깊고 도리에 맞는 말을 악마 사탄이라도 그렇게 잘 지껄일 수 없을만큼 잘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는 정말 주저 없이 주인을 정신병자라고 부르는 것이 알맞다고 생각합니다."

 (…) 

 "그 말을 듣고 보니 내 마음 속에서 한 가지 걱정이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그리고 내 귓전에서 이렇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요. '돈끼호떼 데 라만차님이 미치광이이고 바보라면, 그것을 알고도 그 사람을 섬기고 따라다니면서 구름을 잡는 듯한 약속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종자 산초 빤사도 틀림없이 주인 못지 않은 미치광이이며 바보가 틀림없다. 사실이 그렇다면 그런 산초 빤사에게 다스리도록 섬을 준다면,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도 다스릴 줄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남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하고 말이에요." 

 산초가 말했다. 

 "마님, 그 걱정은 알맞게 나왔습니다. 그에게 좀더 마음대로 지껄이라고 하십쇼. 그게 옳은 말이라는 걸 저도 알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제가 영리한 사나이라면 벌써 주인을 버렸을 겁니다. 하지만 이게 제 팔자인 걸요. 싫어도 제 팔자니까 어쩔 수 없이 주인을 따라다녀야 합니다. 우리는 같은 마을에 살고, 저는 주인의 빵을 얻어 왔으며, 또 저는 주인을 좋아합니다. 주인도 그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저에게 당나귀 새끼를 주셨습니다. 저는 우직한 인간입니다. 큰 괭이나 삽이라도 사용하지 않고서는 우리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만일 마님께서 약속하신 영주 자리를 저한테 주시기 싫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니 억지로 그런 걸 받지 않는 편이 제 양심을 위해서도 더 좋을지 모릅니다(p.900~901, 『돈끼호떼』 제 33장, 「공작부인과 시녀들이 산초 빤사와 나눈, 읽을 만하고 기록할 만한 뜻 깊은 대화에 대해서」 중)." 

 

 그래서 산초와 돈끼호떼는 위대하고 고귀로운 인물이다. 그들은 비록 우스꽝스럽고, 무식하게 저돌적이며, 항상 크게 깨지지만, 결코 그들은 지치지 않는다. 계속 그들은 도전한다. 그리고 꿈꾼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는 뭐든지 마다않고 우직하게 덤벼든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면 병으로 쓰러져 죽어버리는 못말리는 무식쟁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불멸의 인간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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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펭귄클래식 96
제임스 조이스 지음, 한일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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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음울한 도시의 초상

 '음울한 도시의 초상'은 『더블린 사람들』의 서문을 쓴 테렌스 브라운이 자신의 서문에 붙인 이름이다. 「음울한 도시의 초상」이야말로 『더블린 사람들』에 대한 가장 완벽한 해설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서문은 작품의 출판 내역부터 설명한다. 1905년 기대에 부푼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의 원고를 냈지만, 결국 거절당한다. 1909년에도 마찬가지였고, 1914년에야 이 단편집은 출간될 수 있었다. 하지만 출판된 이후에도 이 단편집은 그의 다른 작품에 묻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더블린 사람들』은 분명히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집으로서 그 가치가 높다.

 『더블린 사람들』에는 조이스의 자전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 그가 어릴 적에 가난했던 것처럼,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가난하다. 실제로 『더블린 사람들』의 시대적인 배경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쇠퇴해 가는 시대였다. 오코넬이나 파넬 같은 정치적인 지주가 죽고, 아일랜드에 대기근이 몰아닥치던 시기에,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표지에 나타난 것처럼 마치 '죽은 사람들(혹은 유령)'처럼 더블린이라는 미로를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표지에서 우리는 테렌스 브라운이 설명한 것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표지에서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건물(가난함 또는 빈곤함)과, 유령처럼 더블린을 방황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서문은 조이스의 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에피파니'에 대해 설명한다.

 

 "『더블린 사람들』의 예술적 가치는 조이스가 사실주의자의 시각으로 사실 덩어리를 다루었다는 데 있지 않고, 상징주의 전략을 구사하여 세상에 대한 광휘로운 진리를 전달하는 데 있다. 예술가의 임무는 독자들이 그들에게 가능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문맥 속에 에피파니의 순간을 짜 넣음으로써 현시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조이스는 믿었다. 『주인공 스티븐(Stephen Hero-필자)』에서 스티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결정적인 상황의 그물로부터 이미지의 절묘한 혼을 정확히 풀어내어, 예술가가 선택한 예술적 상황에서 그것을 정확하게 재구현하는 사람이 최고의 예술가이다." 『더블린 사람들』에서 조이스는 더블린 시 전반에 관한 자신의 해석적 진술을 담기 위해, 서로 간에 상호작용할 수 있는 맥락에서 그가 친숙하게 알고 있는 더블린 생활의 세세한 면면을 재구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더블린 사람들』에 나오는 에피파니의 세부 요소들은 스스로 진실을 드러내는 동시에 역사적 메아리, 문화적 연상, 신화적 유사물들이 제공하는 의미도 함유하게 된다(p.38~39)."

 

 『젊은 예술가의 초상(범우사 판)』의 역자인 김종건 교수님의 해설에 따르면, 에피파니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이 내릴 수도 있다.

 

 
"에피파니는 기독교에서 세 동방박사 마기(Magi)의 방문으로 상징되는 구세주의 현현(顯現: 1월 6일이 그 축제일임)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예수의 탄생은 단지 아기 예수의 탄생 이상의, 즉 구세주의 도래라는 갑작스런 계시를 짐작케 한다.

 아마도 조이스가 20세기 문학에 공헌한 수많은 업적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에피파니의 창안일 것이다. 조이스의 작품에 있어서의 에피파니는 주인공이 경험하는 갑작스런 정신적 발로(revelation) 또는 계시(manifestation)로서, 이는 마치 베일이 걷히며 드러나는 사물의 본질 같은 것이다. 에피파니의 동기는 가장 사소한 소리나 제스처에 의하여 야기된다. 또한 에피파니는 상징주의와도 구별된다. 전자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의 암시적 뜻을 갖지만, 후자는 각자에게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조이스의 에피파니는 그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그의 특유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는 과거의 경험주의에 뿌리를 박고 그 경험하는 자의 직감과 연결되기도 한다.

 창작에 있어서 에피파니의 전개(epiphanization)는 일종의 작품의 기법 또는 구조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자연주의적, 극적, 상징적 문체의 전개를 의미한다(p.351~352)."

 

 2. 자매

 제임스 플린 신부가 죽었다. 평소에 그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나'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마비'라는 말에 깊이 고민한다. 제임스 플린 신부는 마비증으로 죽었고, '나'가 살았던 더블린 역시 마비되었기 때문이리라. 얼마 후, '나'와 아주머니는 신부의 관이 있는, 플린 신부의 여동생인 일라이저 댁에 방문했다. 그들은 일라이저로부터 그가 왜 죽었는지 들을 수 있었다. 플린 신부는 자신이 성매를 깨뜨렸다고 생각하고 죄책감을 심하게 받다가 심신이 이상해진 것이었다.

 소설 내에서 고딕체로 표시된 부분은 원서에서 이탤릭체로 강조한 부분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작가가 직접 강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매」에서 고딕체로 표시된 부분을 알아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강조한 부분이 바로 이 단편의 주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마비", "그노몬", "성직 매매"이다. "그노몬"이란, 평행사변형에서 한 각을 포함하는, 그보다 작은 닮은 꼴의 평행사변형을 떼어낸 나머지 부분을 일컫는다.

 

 3. 우연한 만남

 인디언 놀이를 즐기는, 꿈이 사제인 조 딜런과 그의 동생 레오 딜런은 '우리('나'를 포함)'와 어울리면서 여러 가지 잡지를 돌려가며 본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 중 그 잡지를 읽는 것을 들키는 바람에 아이들은 큰 흥미를 잃고, 그리하여 학교를 하루 정도 쉬고 싶었던 '나'는 레오 딜런과 마호니와 함께 피전하우스로 모험을 떠나기로 했다. 왜 이것이 모험인가? 그저 그들은 더블린에 있는 발전소로 가려는 것 뿐인데 말이다. 그 이유는 더블린이 '미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칫하면 더블린에게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이렇게 위험한 모험을 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 그래서 그런가, '나'가 6펜스까지 주면서 그들(마호니와 레오 딜런)과 약속했지만, 결국 레오 딜런은 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마호니와 '나'만이 그곳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와 마호니는 더블린을 가로지르는 모험을 하느라 그곳까지 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더블린이 미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래는 피전하우스까지 갈 수 있었으나, 더블린이 가진 미로적 요소로 인해 끝내 마호니와 '나'는 그곳으로 갈 수 없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리고 작품의 중반 부분 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어느 아저씨였다. '나'는 고양이를 쫓는 마호니의 모습을 본 그 아저씨가 마호니가 거칠더냐고 묻자 '나'는 그렇다면서, 그가 많이 맞아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아저씨와 헤어진 후, '나'는 언덕에서 그에게 인사하는 마호니를 보고 자신이 그를 무시한 것을 뉘우쳤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이 '우연한 만남'이다.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우연한 만남'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4. 애러비

 노스 리치먼드 가의 어느 집에서 살고 있는 '나'는 우선 자신의 집에 들어 살던 신부의 죽음을 말해준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맨건의 누이를 짝사랑하여 그녀를 따르는 '나'의 이야기이다. 그러다가 그녀가 '나'에게 1894년 5월에 더블린에서 열렸던, 아라비아의 시적 표현인 바자회 '애러비'에 가자고 했다. '나'는 그 바자를 매우 고대했고, 마침내 그 날이 왔지만, 아저씨가 너무 늦게 보내주는 바람에 바자는 이미 거의 문을 닫고, 그녀도 이미 간 후였다. '나'는 번민과 분노를 느끼며 집으로 들어온다. 둘의 사랑을 이어주는 매개체인 '애러비'는 이렇게 끝난 것이다. 그야말로 이 소설은 더블린 사람들의 애환을 담아내었다.

 「애러비」 이후부터는 작품이 한층 더 성숙해진다. 조이스가 자신의 문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작품의 진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율리시스』에서 문체와 기법이 점차 성숙해지는 것과 같이, 「애러비」 이후의 단편은 점차 성숙해진다. 지금까지는 '소년'인 '나'를 주인공으로 하던 단편이었지만, 이젠 주인공이 한층 더 성숙하고 자라게 된다. 3인칭 관찰자로 관점이 바뀌면서, 우리는 새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5. 이블린

 3인칭이 된 화자는 '그녀(이블린)'을 관찰한다. '그녀'라는 것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단편이 완성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후의 작품인 「죽은 사람들」에서는 3인칭이 없다.

 이블린의 어머니는 죽었고, 아버지인 어니스트는 타락하였다. 그녀는 어느 날 집을 떠나 멀리 도망가기로 했다. 아버지도 마침 죽었고, 자신이 살게 될 새 집에 대한 기대도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자신의 남자친구인 프랭크와 함께 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어니스트가 있었을 때는 할 수 없었던 일을 드디어 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그녀는 떠나기 전 어머니와의 약속을 기억한다. 그녀는 떠나고 싶었지만, 죽은 어머니의 약속 때문에 프랭크와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갈 수 없었다.

 왜 그녀는 죽은 어머니와의 약속에 집착하는가? 왜냐하면, 서문에도 밝혔듯이, 『더블린 사람들』에는 조이스의 자전적인 요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율리시스』의 1장을 보면, 스티븐 데덜러스(즉, 제임스 조이스)는 암으로 죽은 어머니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멀리건의 조롱도 견뎌낸다. 아마 이블린이 지켜야만 했던 약속은 스티븐의 그것과 유사할 것이다.

 

 6. 경주가 끝난 뒤

 자동차 경주가 열렸다. 경마와 자동차 경주는 더블린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것이다. 경주가 끝난 뒤, 승리자와 다름 없는 두 젊은이는 축하 파티에 참석힌다. 그리고 계획을 세운다. 요트에서 저녁을 먹은 후, 음악을 즐기며 카드놀이를 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사건은 그들의 계획대로 움직인다. 지미와 세구앵은 카드놀이를 즐긴다. 그런데 지미는 카드놀이에서 점점 재산을 잃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미는 아침이 될 때까지 계속 카드놀이를 한다. 쉬고 싶은 마음에 마음껏 즐기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쾌락의 끝은 고통"이라는 말이다. 지미는 쾌락 끝에 고통을 얻기 때문이다.

 

 7. 두 한량

 더블린을 활보하는 두 한량, 코얼리와 레너헌은 어느 여인에 대해 논의한다. 코얼리의 여인을 레너헌이 본 후, 그들은 잠시 약속을 하고 헤어진다. 레너헌은 코얼리를 기다린다. 그의 청혼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마침내 코얼리는 레너헌에게 황금 하나를 내민다. 그의 성공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이 단편 소설은 두 한량이 더블린을 무의식적으로 방황하는 것을 다루고 있는 단편 소설이다.

 

 8. 하숙집

 푸주간 집 딸인 무니 부인은 장인이 죽고 무니 씨가 주정뱅이로 횡포를 부리자 신부의 허가로 별거를 하기로 한다. 그녀는 딸 폴리와 함께 하숙집을 차렸다. 그곳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는데, 그 중 폴리는 도런과 사랑을 나누기로 한다. 폴리는 그러기 전까지 아픈 기억들을 극복해 내야만 했다. 이 단편 소설은 돈에 굴복당하는 가난한 아일랜드인을 그려낸 단편 소설이다.

 

 9. 작은 구름 한 점

 꼬마 챈들러 씨는 런던 신문계에서 성공한 그의 친구 이그너티우스 갤러허를 떠올리며 더블린을 배회한다. 둘은 콜리스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다. '토이'라고 불리는 챈들러는 갤러허와 술을 마시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더블린 사람들에게 '술'은 소통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며, '술집'은 또 하나의 집이자 만남의 장소이다. 그만큼 더블린 사람들에게 '펍'은 특별한 공간이다. 어쨌든 그들은 이것이 마지막 술자리라는 것을 알고 더 많이 술을 마신다. 갤러허는 런던과 파리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고, 챈들러는 자신의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 날, 챈들러는 애니의 사진을 보다가 갤러허처럼 떠날 생각을 하지만, 바이런의 시구를 읽다가 아이가 울자 죄책감을 느끼다가 남기로 한다. 이것 역시 '이블린'처럼 약속 때문에 더블린에 남는 것이지만, '에피파니에 의한 약속의 회상'이라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이의 울음소리라는 에피파니의 동기가, 그로 하여금 약속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더블린 사람들』에서는 갈수록 조이스의 기법이 성숙해간다.

 

 10. 분풀이

 사장 앨레인 씨는 패링턴 씨에게 그가 보들리외 커원과의 계약서를 정서하지 않은 것에 화낸다. 이 단편에서 '분풀이를 하는 사람'은 앨레인과 패링턴 씨로 나눌 수 있다. 분노한 패링턴 씨는 분풀이 거리를 찾는다. 그는 펍(술집)에서 흑맥주를 마시고 회사로 돌아온다. 그런데 아직도 앨레인 씨의 분노는 그치지 않았다. 편지 두 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로 분노한 것은 패링턴이었다.

 패링턴의 분노는 이 단편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가 사무실에서 느낀 분노는 이렇다.

 "사내는 사무실 전체를 혼자서 날려 버릴 정도로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몸은 무언가를 하고 싶고, 밖으로 뛰쳐나가 마구 때려 부수고 싶어 근질근질했다(p.156).

 그리고 나중에 술집에서도 친구들과 팔씨름을 했는데 졌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더블린의 약자(패링턴)가 느끼는 분을 예리하게 묘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속은 분해서 부글부글 끓는 데다가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나 수치스럽고 분한 나머지 술에 취한 것 같지도 않았다(p.163~164)."

 그리고 약자 패링턴은 더욱 더 약자인 자신의 아들에게 분풀이를 한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더블린 사람들의 약육강식적 모습을 알 수 있다. 패링턴 씨는 아이가 불을 꺼뜨렸다는 이유로 아이를 마구 때린다. 그러자 아들은 외친다.

 

 "아, 아빠!" 아이가 울부짖었다. "때리지 마, 아빠! 아빠를 위해 기도드릴게요……. 기도드릴게요……. 아빠, 때리지 않으면…… 기도드릴게요……(p.166)."

 

 작가는 이 부분에서 '기도'라는 단어에 강조한다.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신에게 올리는 대화이다. 하지만 모더니즘 작품은 '신의 부재'라는 것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즉, 아들의 말은 더블린에서 약자는 누구에게도 분풀이를 할 수도, 의지할수도 없다는 슬픈 현실을 보여준다.

 

 11. 진흙

 더블린 등불 세탁소의 주인인 마리아는 여자들과 다과회를 하면서 만성절 전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진흙'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이 날에 반지를 집으면 구혼을 의미하고, 진흙을 집으면 '죽음'을 의미한다. 마리아는 이 날에 기도책을 받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조의 집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구혼을 받지 못한다.

 

 12. 가슴 아픈 사건

 이 소설에서는 평범하지만 약간 괴팍한 성격을 지닌 제임스 더피씨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어느 날 로툰더 극장에서 어느 여인을 만나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서서히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사귀기도 전에 '가슴 아픈 사건'이 벌어진다. 에밀리 시니코(제임스 더피의 연인)부인이 기차에 치여 사망한 것이다. 더피 씨는 그녀의 두 가지 이미지를 떠올리며, 술집에서 나와 길거리로 나온다. 그녀가 없자 그는 두려움(외로움)을 느낀다. 비록 그녀가 그를 타락시킨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녀가 필요했던 것이다.

 

 13. 위원실의 담쟁이날

 '위원실의 담쟁이날'은 아일랜드의 애국자인 찰스 스튜어트 파넬의 사망일인 10월 6일을 기리는 기념일이다. 이 날에는 그의 정치적 추종자들이나 숭배자들이 부활의 상징인 담쟁이 줄기나 잎을 옷깃에 달고 파넬을 추모한다고 한다. 그러니 이 단편은 그의 모든 단편 중 정치적으로 가장 관련이 깊은 소설이고, 제임스 조이스가 존경했던 정치적 인물에 대한 작가의 서술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하인즈와 오코넬, 그리고 잭 영감은 하나같이 파넬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그들과 교류하는 사람들은 모두 일종의 파넬 추종자이다. 크로프튼 씨와 라이언스 씨, 그리고 셋은 시의원 선거에 대해 논의하면서, 파넬에 대해 언급한다.

 

 "파넬은," 헨치 씨가 말했다. "죽었소. 자, 난 이렇게 본단 말이오. 여기에 온다는 그 작자는 노모 때문에 머리가 백발이 되도록 왕위에 오르지 못하다가 이제야 겨우 즉위한 사람이오. 그는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사람이며, 우리에게 호의를 갖고 있소.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꽤 명랑하고 점잖은 사람이며, 악의라곤 전혀 없소(p.209)."

 

 이윽고 하인즈가 들어와, '파넬의 죽음'이라는 노래를 읊기 시작한다. 이 노래야말로 이 단편의 주제일 것이다. 이 노래 안에는 파넬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아일랜드의 죽음까지 나와 있으며, 아일랜드의 부활에 대한 희망도 담겨 있다(그 부분은 고딕체로 표시할 것).

 

 파넬의 죽음

1891년 10월 6일

 

(…)

 

님은 갔습니다, 우리 무관의 왕은 갔습니다.

오, 아일랜드여, 설움과 슬픔으로 애도할지어다.

현세의 타락한 위선자들의 무리에 꺾여

님은 이제 쓰러지고 말았으니.

 

님은 비열한 도당들의 칼에 맞고 가시니

님은 오욕으로부터 영광의 반열에 오르셨네.

아일랜드의 희망이며 아일랜드의 꿈은

우리의 왕을 보내는 불 위에서 사라지도다

 

궁전, 초옥, 오두막

아일랜드의 정기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슬픔으로 그 정기 꺾였도다

조국의 운명 짊어질 님이 가셨기에.

 

조국의 명성을 떨치시고,

영광의 초록 깃발을 휘날리시며,

세상의 만백성 앞에

조국의 문무를 드높이신 우리 님.

 

님은 자유의 꿈을 품으셨으나

(아, 슬프도다, 꿈에 지나지 않음이!)

그 자유를 쟁취하려 애쓰실 때

배신을 당하시와 못 이룬 님의 꿈.

 

수치스럽도다

자기들의 님을 치거나, 혹은 입맞춤으로

그의 친구가 결코 아닌 아첨하는 오합지졸 사제들에게

그를 팔아넘긴 비겁자들아, 비열한 손들아.

 

님의 자부심으로 저들을 물리치신

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애써 더럽히려 한

그자들의 기억을

영원한 치욕으로 썩게 하소서.

 

님은 용맹한 자들이 쓰러지듯 가셨도다,

최후까지 고귀한 용맹 떨치며,

죽음이여, 이제 그분을 하나 되게 하소서

과거 아일랜드의 영웅들과 함께.

 

어떠한 투쟁의 소리도 님의 잠을 방해하지 마라!

님께서 고요히 잠들어 계시니,

이제 어떤 인간적 고통도, 드높은 야망도 그를 독려하지 마라

그가 영광의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저들은 자신들의 소망대로 님을 꺾었네.

그러나 아일랜드여, 들어라,

님의 영혼은 새날의 먼동이 틀 때

불사조처럼 불꽃에서 다시 일어나리니.

 

우리에게 자유의 세상을 가져다줄 그날.

그리고 그날 아일랜드여, 부디

기억하라, 기쁨의 축배를 드는 술잔 속에

하나의 슬픔을-파넬의 기억을(p.212~214).

 

 14. 어머니

 홀로헌과 키어니 부인은 캐슬린 키어니를 낳는다. 그녀는 예이츠의 시극 『캐슬린 백작부인』의, 캐슬린의 딸과 이름이 같다. 캐슬린은 극장의 가수로 일한다. 그녀는 극장에서 여러 사람들과 교제하다가 연중 음악회에서 실패를 해버린다. 그리고 캐슬린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늘자 그녀의 어머니가 발끈하여 체면을 무시한다. 더블린 사회는 그녀를 비난한다. 어머니적 요소를 띤, 차별받는 여자인 '어머니'는 곧 '아일랜드'를 뜻한다. 작가는 '아일랜드'를 '어머니'에 비유한 것이다.

 

 15. 은총

 이 단편은 '종교적'으로 가장 깊이있게 다루고 있다. 물론 깊이있게 다루기보다는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에 대한 풍자가 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말이다. 파우어 씨, 커넌 씨, 커닝엄 씨, 머코이 씨 등의(머코이나 파우어 씨, 커닝엄 씨는 『율리시스』의 '하데스' 장에서 볼 수 있어서 친숙했다) 인물들이 모여서 종교에 대해 토론(사실상 풍자에 가까운)하고, 가톨릭 교황를 비꼰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에 참석한다. 그리고 제목 '은총'은 퍼던 신부의 설교로부터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이 이 단편의 주제이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 그러니 잘 들어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는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

 "네, 제 장부를 살펴보았더니 이러이러한 잘못된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러이러한 점을 시정하겠습니다. 제 회계장부를 사로잡겠습니다(p.261~263)."

 

 이 설교에서는, 이 소설의 종교적 주제와 종교적 풍자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하느님의 은총'이 '돈'과 관련된 일에 시정되는 것을 보면, 당시의 가톨릭 교회가 돈에 물든 세속적인 곳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16. 죽은 사람들

 「죽은 사람들」의 제목은 조이스의 문학적 스승 중 하나인 헨리크 입센의 희곡 『죽은 우리가 눈을 뜰 때』에서 따왔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 작품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가득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등장인물의 이름 역시 상징적이다. 릴리(Lily)라는 이름은 가브리엘의 상징이자 죽음과 부활의 상징이다. 게다가 주인공 '가브리엘' 역시 마찬가지다. '가브리엘'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잉태를 알렸으며, 인간에게 위안과 동정을 베푼다는 천사이다. 그리고 콘로이의 형제의 이름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름을 본따서 지었다.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다. 가브리엘의 아내가 마이클 퓨리의 죽음을 가브리엘에게 말해 준 후, 그의 의식이 점점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죽은 더블린 사람들의 초상을 볼 수 있다.

 이 단편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정신적으로 '죽은' 사람들이자 스티븐 데덜러스가 건설한 더블린이라는 '미로' 속에서 방황하는 '유령'이다. 조이스의 이 단편집은 갈수록 진화하여 이 작품에서 절정을 이룬다. 지금까지는 일부의 더블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이 단편에서는 모든 더블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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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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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군부 독재 시절. 그 시절, 군부는 빨갱이를 찾는다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들을 학대하고 태백산맥에 뿌려진 '삐라'를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그 시절 작가들은 그런 현실을 보며 묵묵히 지켜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작가들 중에 유일하게, 그 잘못을 비판적이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쳐다본 소설가 한 명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조정래. 조정래 작가는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썼다. 그 소설이 출간되자마자 국가는 파동이 일어났고, 조정래 작가의 그 소설은 금서가 되었다. 하지만 그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군부 독재의 진실을 직면하게 되었고, 그것을 바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태백산맥』은 우리나라의 정치사를 바꾼 소설이었다. 붓 하나에서 나오는 힘은 참 대단하다는 말이 진실인 것 같다. 

 

 조정래 작가는 군부 독재 시절을 무너뜨리고, 국민들의 영웅 소설가가 된 채로 계속 살아왔다. 그리고 계속 그는 우리나라와 함께 살아오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문제점을 치밀하게 파고들었다. 그래서 『아리랑』, 『한강』 등의 또 다른 대하소설이 등장한 것이다. 그가 주로 비판한 것은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였다. 

 

 그런데 21세기로 접어들자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21세기에는 경제가 놀랍도록 비약되어(비록 IMF는 있었지만)대한민국은 수출대국이 되었다. 그리고 정치도 민주화가 되어 국민의 뜻에 따라 대통령이 움직였다. 참으로 평범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지만, 조정래 작가는 이 사이에 벌어진 어마어마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비리를 저지르는 기업들이 국민들의 경제를 이끌었다는 이유로 계속 그 비리가 감추어지고 있다는 진실 말이다. 조정래 작가는 의문을 품었다. '왜 정치에서는 비리가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경제에서는 그렇지 않는가? 정치와 경제는 분명히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 대체 왜?' 이런 의문 끝에 조정래 작가는 깨달았다. 기업들의 비리를 감춰준 것은 바로 '국민'이었다는 것을. 이윽고 그는 그의 최대 무기인 '붓'을 꺼내들고, 이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소설이 바로 이 『허수아비 춤』이다. 이 소설의 제목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허수아비 춤'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지난 50여년 동안 사람들이 기업을 마치 종교처럼 맹신하고 경제 범죄를 방관하거나 관대하게 봐주었다는 의미이다. 즉, 우리는 그 동안 '허수아비 춤'을 춘 것이다. 둘째는, 그와 반대로 국민들이 힘을 합쳐서 그들이 인간답게 행동하도록 하고, 허수아비 춤을 추게 하도록 만드는 것이 국민들의 과제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제목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소설의 내용은 이 제목의 의미와 일치한다. 이 소설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만들 수 있는데, 하나는 국민들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기업들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기업들을 '허수아비'로 만들려는 '경제민주화실천연대'의 사람들의 노력이 드러나는 내용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 대부분 '강기준'이라고 하지만, 또 다른 주인공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전인욱'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부터 시작하여, 대기업들의 비리를 고쳐보자는 다짐을 보여주는 것과 함께 끝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해결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아, 여운이 길다. 

 『허수아비 춤』은 6장까지는 주인공이 강기준인 것처럼 묘사한다. 그의 이중적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소설의 제 1장 첫부분을 보라. 강기준은 자신의 선배인 경제학 교수 박재우에게 아부를 하는 동시에 우리나라의 기업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조폭은 배신자에게 야구방망이를 휘두르지만 회사는 무능자에게 인사권이란 칼을 휘둘렀다. 그러고 보면 회사는 조폭보다 더 매정한 조직일 수도 있었다(p.17)." 

 소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장면은 태봉 그룹에서 스카우트해서 온 박재우와, 일광그룹의 사원인 강기준, 그리고 회장의 특급 충견이라고 불리는 윤성훈 실장이 '문화개척센터'를 만드는 장면이다. 소설이 전개되면서 점점 복선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예컨대, 남 회장이 몇 백억의 비자금을 암호로 숨기고, 초고층 대형 주상복합아파트를 지을 계획을 세우는 부분이 그렇다. 

 "몇십 층을 헤아리는 최고층의 대형 주상복합아파트를 수천 세대 지으면서 그 내부 자재들을 전부 외제로 하고, 그걸 구매할 때 구매가의 20%를 비자금으로 붙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외국에서 발생하는 거래이기 때문에 세무서의 눈길을 깨끗이 피하게 되고, 그 막대한 비자금은 회장 개인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p.89)." 

 『허수아비 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식이 하나 있다. "정치=경제"라는 공식이다. 일광그룹과 태봉그룹의 경쟁은, 구 소련과 미국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이 소설의 4장을 보면, 강기준과 박재우가 각각 정인용, 김동석 그리고 신태하를 스카우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성공적으로 그 셋을 스카우트해 감으로써 '은밀한 그물짜기'를 완성시킨다. 그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과시하며, 여러 말을 하는데, 이 대화 중에는 이 소설의 공식이 다시 증명되는 부분이 있었다.  

 

 "예, 언제나 그게 골치지요. 허지만 5만 원권이 생겨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고맙게도 부피가 5분의 1로 줄어들지 않았습니까. 전에는 만 원권으로 1억이면 골프 가방에 하나 가득 되었는데, 그걸 가지고 어느 국회의원한테 갔는데 글쎄 안 받는 겁니다. 그걸 그냥 가지고 돌아오는데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속상하고 그러던지요." 박재우가 크크크 웃었다."아니, 그런 국회위원도 다 있소? 넙죽넙죽 제일 잘 넘기는 게 그 사람들인데." 윤성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p.152~153) 

   

 『허수아비 춤』 8장에서 윤성훈, 박재우, 강기준, 일명 '골든 패밀리'가 외국으로 나가 쇼핑을 하는 장면도,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 흔히 일삼는 외국 여행을 연상시킨다.

 『허수아비 춤』은 6장까지 기업들의 비리를 폭로하는 데에 애쓴다. 이 소설의 6장은 '무한 감동 로비'를 이루기 위해 금고를 만들고 차명계좌를 만들다가 들켜버리는 일광그룹의 모습이 등장한다. 윤성훈이 은행장에게 그를 해고한다면서 위협하는 장면은 참으로 씁쓸했다. 기업들이 이렇게 '돈'으로 자신들의 비리를 감춰버리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강한 것은 '돈'이다. 그 다음이 '회장'인데, 회장은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권력이 많아진다. 돈(경제)와 권력(정치)는 비례 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돈'의 힘에 관한 부분은 제 2장에서 가장 강렬하게 드러난다. 

   

 "돈은 귀신도 부린다. …… 하물며 네까짓 사람쯤이야(p.69)!" 

 

 돈은 이 책에서 절대권력이자 괴물이다. 돈은 죽은 사람도 부리는데, 하물며 '네까짓 사람쯤'은 부릴 수 있다는 것이다. 돈 앞에서 인간의 가치가 상실되는 부분이다. 돈이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일광그룹 기업의 세 인물의 생각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을 이끌 자격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대한민국을 이끈다면 과연 대한민국이 올바른 길로 나아갈까? 작가의 말처럼, 강기준, 박재우, 윤성훈, 남 회장 같은 사람들이 나라를 지배한다면 그것은 파멸의 길일 뿐이다.

  

 한편, 이 소설은 7장부터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한다. 바로 검사 '전인욱'이다. 그는 일광그룹 같은 부패한 대기업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전인욱은 기업의 비리를 폭로하는 일을 주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업들은 많은 돈을 치름으로써 그들을 마비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전인욱은 그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다. 

 대기업이 그를 제주도로 귀양보내려는 음모를 그는 가족과 함께 해결하는 지혜를 발휘함으로써 극복한다. 전인욱이 너무나 위험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태봉그룹의 비자금 사건도 아주 큰 사건으로 여기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가, 일광그룹의 비리를 모른 척 할리 없으니까 말이다. 전인욱은 과감하게 검사 직업을 포기한다. 그에게 놓인 '서로 다른 길' 중 그는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다. 그는 검사 직업을 포기한 눈으로 태봉그룹의 운명을 지켜본다. 예상대로, 태봉그룹은 무죄로 끝난다. 정말 그들은 국민보다 10000배나 더 재산이 많아서 국민들을 노예로 부릴 수 있는 걸까? 이런 의문을 품어본다. 

 

 이 소설의 9장은 이 작품의 주제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이 소설의 첫 부분은 마치 조정래 작가가 독자들, 아니 국민들에게 직접 말하는 것 같이 신랄하다. 

 

 "국민은 나라의 주인인가. 아니다. 노예다. 국가 권력의 노예고, 재벌들의 노예다. 당신들은 이중 노예다. 그런데 정작 당신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것이 당신들의 비극이고, 절망이다.  

 이번에 재벌의 재산권 불법 상속과 경영권 불법 승계 사건이 또다시 벌어졌다. 일광그룹이 일으킨 이번 사건은 몇 년 전 태봉그룹에서 일으킨 사건과 한 치도 다름없이 똑같다. 왜 그런 사태가 거듭 벌어지는 것일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세상 망칠 그 거대한 경제 범죄를 저지르고도 태봉그룹이 무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라의 주인이고 이 사회의 주인인 국민과 대중들이 그 끔찍한 사건을 방관하고 묵인했기 때문이다. 

 (…) 

 국민인 당신들이 노예이고 싶지 않다면 이 점에 눈을 부릅떠야 한다. 당신들 모르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알아야 한다. 그 엄청난 경제 범죄를 무죄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비자금의 막강한 힘이었다.  

  (…) 

 태봉그룹의 시범을 보고 그대로 따라한 것이 일광그룹이다. 자기네도 무죄가 될 것이 틀림없으니까. 재벌들이 저지르는 그 불법 행위는 분명 사회를 병들게 하고 나라를 망치는 범죄이고, 그 피해는 국민 전체에게 씌워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동안 재벌들의 경제 범죄에 대해 너무나 관대했다. 왜 그랬을까. 기업들이 잘되어야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순진함을 넘어 바보 같은 기대고 희망이었다. 그건 지난 40여 년 동안 우리가 취해 있었던 환상이고 몽상이고 망상이었다. 태봉그룹과 일광그룹의 불법 행위가 그것을 잘 입증해 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그동안 일방적으로 품어 왔던 그 기대와 희망은 바로 자발적 복종이었다. 스스로 노예 되기를 자청한 것이다. 

 긴 인류의 역사는 증명한다. 저항하고 투쟁하지 않은 노예에게 자유와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데 노예 중에 가장 바보 같고 한심스런 노예가 있다. 자기가 노예인 줄을 모르는 노예와, 짓밟히고 무시당하면서도 그 고통과 비참함을 모르는 노예들이다. 그 노예들이 바로 지난 40년 동안 우리들 자신이었다.  

 우리는 지난 80년대에 피 흘려 '정치민주화'를 이룩했다. 이제 우리는 '경제민주화'를 이륙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그 경제민주화가 바로 모든 재벌들이 그 어떤 불법 행위도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취해 있었던 그 환상과 몽상과 망상에서 빨리 깨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강력한 무기를 뽑아들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소비자로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권한인 '불매'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경제 범죄를 저지른 기업의 상품을 사지 않는 '불매 운동'을 적극 벌이는 것이다. 그 막강한 소비자의 힘에 대항할 기업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그 굴복으로 마침내 기업들은 투명경영을 하게 되고, 세금도 올바로 내게 된다. 그 때에 비로소 '기업들이 잘되어야 우리도 잘 살수 있다'는 말이 성립하게 된다. 

 투표가 피 흘리지 않고 민주주의를 계속 신장시켜 나갈 수 있는 '정치혁명'이듯이, 우리가 단결한 불매운동은 기업들과 우리들이 모두 함께 행복해 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경제혁명'이다. 우리가 그 어리석은 환상과 몽상과 망상에 사로잡혀 뿔뿔이 흩어져 있으면 기업들은 더욱 신바람 나게 경제 범죄를 저지르고, 우리는 점점 더 비참한 노예가 되어 간다.  

 감기 고뿔도 남 안 준다는 말이 있다. 하물며 왜 재벌들이 당신들에게 돈을 주겠는가. 모기도 모이면 천둥소리 내고, 거미줄도 수만 겹이면 호랑이를 묶는다. 조상들의 일깨움이다. 

 국민, 당신들은 지금 노예다(p.322~327)."  

 

 조정래 작가는 이렇게 국민들에게 신랄한 한 마디를 던지면서도 이야기를 전개시키려고 노력한다. 이 부분에서 생략된 부분은 바로 일광그룹이 재산권을 불법 상속하고 경영권을 불법 승계하는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 서술된 부분이었다. 전인욱이 가입한(전인욱은 경제민주화실천연대에서 고문변호사를 맡고 있다) '경제민주화실천연대' 역시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1인 시위를 하지만, 결국 그것은 파묻히고 만다. 윤성훈 역시 이 사건이 태봉그룹의 비자금 사건과 마찬가지로, 순조롭게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한편, 기업들이 싫어하는 사람 중 한 명인 허민 교수는 결국 대기업의 횡포에 당하고 만다. 그는 재임용에서 탈락되어, 대학에서 나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 되었다. 좌절한 그는 이윽고 경제민주화실천연대의 고문변호사인 전인욱을 찾아간다. 전인욱과 허민 교수는 서로 뜻이 맞는다. 전인욱은 허민의 탈락 이유(내용 부실)는 핑계이며, 그것이 기업들의 음모라고 여긴다. 그러면서 전인욱은 허민 교수에게 번역 사업을 권고받아 생계를 유지하도록 한다(사실 전인욱의 아내도 번역하는 것에 시간을 쓰고 있지만). 

 전인욱과 허민 교수는 갈수록 경제민주화실천연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마침내 전인욱은 경제민주화실천연대의 공동대표를, 허민 교수는 (나중에)이사장이 된다. 그래서 나는 이 둘이야말로 이 소설의 다른 부분의 거대한 축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이 가져다주는 비리의 해결책의 중심에는 그들이 서 있다. 

 

 『허수아비 춤』의 마지막 장인 11장은 허민 교수가 올린 칼럼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칼럼'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정래 작가의 말이다. 즉, 그는 다시 한 번 국민들에게 자신의 말을 전하는 것이다. 이 두 번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저자가 이 작품에서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우리나라 기업인들이 세상을 향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만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네를 전혀 신뢰하지도 존경하지도 않고 너무 불신하고 욕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는 말이 있다. 선진국에서는 기업인들을 전혀 나쁘게 보지 않고 존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인가? 틀림없이 사실이다. 그럼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그 원인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첫째 선진국의 기업들은 완전히 투명경영을 한다. 그러므로 전혀 탈세를 하지 않는다. 둘째 뒤로 비자금을 조성하는 범법을 저지르지 않는다. 셋째 기업인들은 그렇게 합법적이고 양심적으로 자기 개인들의 돈(절대 회사 돈이 아님)에서 천문학적인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 

 그런데 우리 기업인들은 어떠한가. 선진국 기업인들과 정반대로 한다. 그들은 투명경영을 하지 않고, 당연한 것처럼 탈세를 일삼으며, 몇천억에서 몇조에 이르는 비자금을 조성하는 범행을 예사로 저지르고, 개인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는 커녕 불법 상속을 밥 먹듯이 한다. 이러면서도 세상 사람들이 자기네를 존경하지 않고 불신한다고 불만을 갖다니……. 바람이 불어야 나무가 흔들리고, 북은 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이 괜히 생겨났겠는가. 우리 기업인들이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처럼 한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들을 존경하다 못해 그들의 그림자도 밟지 않을 것이다. 

 기업인들은 추한 자화상을 자기네 스스로 만들어 놓고는 존경해 주지 않는다고 사회인들을 타박한다. 그들은 탈세, 비자금 조성, 불법 증여와 상속뿐만이 아니라 선거 때마다 터지는 불법 정치 자금 사건, 권력 기관 매수 사건, 막대한 돈 해외 도피, 끝없이 뿌리는 불륜의 스캔들……. 이런 것들이 그들 스스로 만든 자화상 아닌가. 

 그 결과 국민들의 기업 호감도는 100점 만점에 38점이며, 기업인들의 재산에 대해 '부정적인 방법으로 축적했을 것'이라는 응답이 77%이고, '정당한 방법으로 축적했을 것'이라는 답변은 19%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건 5~6년 전의 조사이고, 요즈음에 하면 어떻게 될까? 그 결과가 더욱 나빠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에 대기업 서너 개가 엄청난 비자금 사건과 불법 상속 사건을 일으켜 세상을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생산되는 먹거리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고루 나누어 먹고도 남는다. 그러나 부자들의 욕심을 채우기에는 모자란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그 끝도 한도 없는 부자들의 탐욕을 방치하면 결국 이 사회는 망할 것이다. 그들의 탐욕을 막아야 한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 일반 대중인 우리들이다. 그런 경제 범죄를 저지른 기업들의 상품을 사지 않는 '불매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여야 하고, 그 효과적인 추진을 위해 여러분들은 시민단체로 모여 들어야 한다. 모든 시민단체들은 지금 활짝 문을 열어 놓고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다(p.393~396)." 

  

 허민 교수가 경제민주화실천연대의 인터넷에 올린 '기업인들의 자화상'이라는 이름의 이 글은, 조정래 작가의 '작가의 말'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그래서 나는 허민 교수가 이 소설에서, 조정래 작가의 초상이라고 생각한다. 

 

 일광 그룹은 일심 재판에서 무죄(무죄에 가까운) 선고를 받는다. 이 소식에 기뻐한 박재우, 윤성훈, 강기준은 술자리를 들기로 한다. 전인욱은 비록 분노하고, 속이 답답하겠지만, 그는 분명히 희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직 두 번의 재판 기회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최후에 승리하는 자가 이기는 것이 법의 방식 아닌가. 

 하여튼 그 셋은 술자리에서 '자발적 복종'에 대해 실컷 떠들어댄다. 그리고 그 와중에 박재우가 던진 말은 이 소설의 주제를 드러내 준다.  

 

 "아까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힘에 의해 80년대의 군부 독재가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예, 그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들 또한 그 경험을 확실하게 믿기 때문에 '경제민주화' 운운해 가며 다시 나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정치'라는 것과 '경제'라는 것의 차이를 모르고 설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군부독재 30년이 국민들에게 준 것은 무엇입니까. 억압과 공포 두 가지 뿐입니다. 자기네 통치에 반대하는 말은 한 마디도 못하게 억압하고, 신문에 난 사실을 술주정으로 떠들어도 수사 기관에 잡아다가 두들겨 패는 공포를 느끼게 했습니다. 국민들은 들고 일어나지는 못하고 불만이 가득 차 있는데, 80년대에 마침내 그들이 화염병을 던지며 거리로 뛰쳐나오기 시작했습니다. (…) 그게 억압정치, 폭력정치, 공포정치에 분노하고 저항하기 시작한 군중 심리라는 거지요. 한번 불붙으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며 끝장을 보고 마는 그 무서운 군중의 힘에 의해서 인류사의 모든 독재 권력들은 종말을 고했습니다. 그런 정치에 비해 경제는 전혀 다릅니다. 경제가 국민들에게 주는 것은 정치와 정반대로 꿈과 희망입니다. 오늘 고생한 만큼 내일은 더 잘살게 된다. 선진국 부러워할 것 없다. 우리도 선진국 국민이 될 수 있다. 이런 꿈과 희망들은 차츰차츰, 차근차근 현실로 이루어지게 해준 것이 바로 지난 50년의 경제발전 역사입니다. (…) 이렇게 국민 모두는 자기들의 꿈과 희망이 경제발전을 따라 이루어지고 현실이 되는 것을 똑똑히 체험했고, 생생히 실감했습니다. 그 경제 발전을 주도한 것이 누굽니까, 바로 기업들입니다. 그중에서도 대기업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국민들은 몇십 년에 걸쳐서 '기업들이 잘되어야 우리가 잘살 수 있다'라는 생각을 마음속 깊이깊이 하게 되었고, 그 확고한 믿음은 뼛속 깊이까지 아로새겨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꿈은 단 하나, 더욱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잘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목표는 선진국처럼 국민소득이 4~5만 불 되는 것입니다. (…) 이런 현실은 앞으로 갈수록 심해질 것이고, 그에 따라 '기업이 잘되어야 우리가 잘살 수 있다'는 생각은 더욱더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자들은 이런 뚜렷하고 명백한 생각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인터넷에서 아무리 기를 쓰고 나대 보았자 세상 사람들은 끄떡도 하지 않지 않기 때문에 다 헛짓이고, 공염불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더욱더 잘살기를 원하는 한 '기업이 잘되어야 우리가 잘살 수 있다'는 믿음은 그 어떤 종교의 주문보다도 신통력이 강하고 강력합니다. 그러니까 아무 염려 안 하셔도 된다 그겁니다(p.408~412)." 

  

  어쩌면, 기업이 이렇게 부패하게 된 것은 우리, 즉 국민들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동안 선진국(미국이나 벼락부자가 된 중동)을 부러워하며,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썼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대기업의 비리까지 허용했다. 그러나 대기업의 비리는 절대 국민들을 잘살게 할 수 없다. '기업이 잘되어야 우리가 잘살 수 있다'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 그들을 이길 수 없다. 우리가 대기업이 부패하도록 키웠고, 결국 그 손해를 보는 것은 우리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읽은 후, 대기업의 비리를 무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왠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조정래 작가의 힘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 즉 강기준이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서 일광그룹을 떠나는 장면은, 돈만 추구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반영한다. 우리가 '돈'이라는 것을 위해 대기업의 부패를 인정했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의 큰 실수이다. 왜 우리는 정치의 잘못을 보면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면서도, 기업의 잘못은 묵인하는가? "정치=경제"라는 공식은 무시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동안 모순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인가? 조정래 작가에 따르면, 그렇다. 그것도 50년 동안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정치민주화를 이룬 후, 자발적 복종 때문에 경제민주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 분명 우리나라를 성장시키고 발전시킨 것은 기업들의 공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비록 그들이 그런 공이 있다고 해도, 지금 그들이 벌이는 것은 그들의 공을 다시 원상태로 되돌리고 있다는 것을. 박재우의 말처럼, 경제가 국민들에게 주는 것은 "꿈과 희망"이지만, 기업들의 비리는 "꿈과 희망"을 붕괴시키고, 그것을 빙자하여 수많은 절망을 안겨준다. 조정래 작가는 정치민주화 이후, 아직 경제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삼성을 생각한다』와 『굿바이 삼성』 같은 우리나라의 대기업을 철저하게 비판하는 책 역시, 우리들이 그들의 부패를 인정해버렸다는 것을 고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조정래의 문학은 고발의 문학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고발함으로써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 조정래 작가는 분명 이것이야말로 자신에게 내려진 하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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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1-01-24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간단히 이 책 읽고 메모 남겼는데

주인장은 장문의 감상문을 썼네요 ^^

starover 2011-01-24 19:16   좋아요 0 | URL
ㅎㅎ 다이조부 님 감사드립니다.

다이조부 2011-01-25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우연인지 작가의 의도인지는 알수 없지만

삼성을 연상하는 그룹 태봉 은 웃겨요~

내조의 여왕 의 멋진 재벌 윤상현 태봉이 가 생각나서요 ㅋㅋㅋㅋ
 
열네 살이 어때서? - 노경실 작가의 최초의 성장소설
노경실 지음 / 홍익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노경실 작가 최초의 성장 소설인 이 책은 평소 고전적인 작품만 읽는 나로서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정말 나는 이 책을 작가의 말처럼 '읽고 느끼고 생각하고 울고 웃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 청소년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은 바로 작품의 첫 부분이다. 

  "365×14=5,110.  

 '겨우 오천백십 일?' 

 연주는 휴대전화 뚜껑을 화닥 덮었다.  

 '14년이나 살아왔는데, 고작 5천 일 정도라고?' 

  연주는 사회 선생님이 내 준 숙제를 고민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연주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 온 날을 계산하는 부정적 입장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연주는 이 소설 속에서 나날이 성장하여, 앞으로 자신이 살 날이 30,000여 일밖에 남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 이것은 앞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긍정적 입장이다. 또한, 이 다짐은 연주가 아픔을 겪는 과정 속에서 성장을 했다는 증거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가수가 꿈인 14살의 연주는 부모님이 이혼한 친구 민지를 친구로 사귀면서 즐겁게 지낸다. 한편, 연주는 자신을 도와 준 지섭 선배를 은근히 좋아한다. 그런데 어느 날, 지섭 선배가 미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학교에서는 일종의 '노래 대회'가 열린다. 지섭 선배를 떠나보낸 연주는 이윽고 그 대회를 준비하지만, 결국 떨어진다. 하지만 연주는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계속 성장할 준비를 한다. 밝고 힘찬 가능성을 보여주는 결말이었지만, 대회에서 떨어지는 부분은 약간 반전이었다. 그것도 아주 냉담한 문체로, "연주는 노래자랑대회의 예선에서 떨어졌다"고 말한다. 연주의 심리 묘사 역시 자세하지 않다. 

  이 소설에서는 '어른'도, '어린이'도 아닌 중간 단계에 속한(정체성이 상실된 시기) 14살 연주가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드러난다. 그리고 노경실 작가는 그 과정을 연주의 심리 묘사로써 밝혀낸다.

 "세상은 연극 무대인가?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니! 

 세상은 패션쇼 무대인가? 

 등장하는 사람마다 모두 나보란 듯이 잘난 존재들이니! 

 세상은 신생아 병동인가? 

 TV를 켤 때마다 어제보다 더 잘나고 멋진 인물들이 탄생하니! 

 아니면 다윈의 진화론대로 사람들이 진화해서일까?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하는 대신, 이제는 사람이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 같다(p.20~21)." 

 

 "어쨌든 나는 '아직' 열네 살이고, '겨우' 열네 살이고, 어쩌면 '벌써' 열네 살이고, '어느새' 열네 살이 됐다고 말할 수 있다(p.122)." 

 

 "-그럼 도대체 몇 살 때부터 남자 선배를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열여섯 살! 춘향이도 열여섯 살에 연애했잖아. 

 -열여섯? 바보냐, 넌 그 나이 되면 고등학교 준비해야 해. 너희 엄마는 네 성적을 알면서도 너를 특목고에 보내려고 하잖아!  

 -바보! 너 모르니? 

 -뭘? 

 -로미오와 줄리엣 알지? 거기서 줄리엣이 몇 살에 연애를 시작했는지 알아? 

 -몇 살인데? 

 -열네 살! 그리고 로미오는 거의 지섭이 선배 나이 정도이고! 

 -정말? 정말? 줄리엣이 열네 살이었어? 그럼 내가 비정상인 거 아니네? 

 -그럼! 줄리엣이 죽은 나이도 열네 살일 거야. 

 -사랑을 시작하는 것도, 불행에 빠지는 것도 모두 열네 살 때에 일어난 거네. 그 말은 진짜 인생의 역사가 시작되는 게 열네 살이라는 거야? 

 -옳지, 옳지! 잘 알아듣는구나(p.154~155)."  

 

 "이거 하나만 기억해라. 너희가 울든, 웃든, 노력하든 포기하든, 주저앉든 다시 일어나든…… 시간은 단 한 번도 멈추거나 쉬거나 요령 피우지 않고 계속 앞으로, 앞으로만 가고 있다는 것을(p.166)." 

  

 "내가 살아온 날은 겨우 오천백십 일. 우리가 평균 백 살까지 산다면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은…….' 

 365×85=31,025. 

 연주는 휴대전화 뚜껑을 화닥 덮었다. 

 '앞으로 내가 살 날이 고작 3만 일 정도라고?' 

 85년이라고 생각할 때에는 숨이 탁 막힐 정도로 길고 긴 날들인데, 날수로 3만 일이라고 하니 얼마 되지 않는 시간들로 여겨졌다.  

 괜히 마음이 바빠졌다. 

 하다 만 숙제도 해야 하고, 노래연습도 더 열심히 하고, 갈 수만 있다면 미국에 가서 지섭 선배도 만나고! 이렇게 인생이 바쁜데 엄마는 지리산에 다녀와서는 만날 느림, 내려놓음, 슬로우 라이프, 버리기, 비우기를 말한다. 

 '엄마는, 어른들은 해볼 것 다 하고 살아와서 그런 식으로 말하겠지만,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는 우리한테 그런 식의 삶을 강요하면 너무하잖아! 우리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본 다음에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 아냐?' 

 연주는 엄마가 청소를 하고 있는 거실 쪽을 향해 혀를 쏙 내밀었다(p.250~251)."  

  

 (윗 부분은 작품의 첫 부분과 운율 혹은 리듬을 형성한다.)

 

 "그 때 연주의 가슴속 글에 응원을 보내듯 파란 시계의 소리가 크게 들렸다. 

 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  

 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 

 또, 다시…….

 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  

 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p.253)."  

 

 현대 사회는 순수함이 사라지고 '로스트 제네레이션(잃어버린 세대)'가 반복되고 있는 사회이다. 다시 한 번, 21세기 초에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가 부활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와는 뭔가 다르다. 분명 그 때 젊은이들은 제 1차 세계대전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잃어버린 세대가 되었다. 그런데 21세기에는 전쟁도 없고, 가난함도 없다. 그런데 왜 그들은 잃어버린 세대가 되어 가고 있는가? 그들이 육체적으로 방황하고, 정신적으로도 방황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열네 살들은 학교에서 학원, 학원에서 학원, 학원에서 집으로 옮겨가는 삶을 반복하면서 몸이 지쳐간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생각을 한다. '왜 내가 이러고 있지? 왜 내가 이런 지겨운 삶을 반복해야 하지?'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할 생각이 그들 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굴복된 열네 살들은 비행청소년이 되거나 나쁘게 물들게 된다. 작품 속의 연주처럼 성장하게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유머러스한 철학자 같은 민지 같은 열네 살 역시 드물다.

 사람의 인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유년기, 청소년기, 성숙기(어른의 시기)로 말이다. 그리고 유년기와 성숙기의 중간인 청소년기는 매우 중립적인 관계에 놓였으며, 정체성이 쉽게 상실된다. 그리고 청소년기의 가장 첫 부분에 위치한 열네 살은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고, 또한 강하지도 못하다. 유년기의 첫 부분은 강한 자에 의해 보호받고, 성숙기의 첫 부분은 스스로 강하여 보호할 수 있지만, 청소년기의 가장 첫 부분, 즉 열네 살은 그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고, 그 누구에게도 저항할 수 없다. 그래서 열네 살은 현대 사회의 '로스트 제네레이션', '잃어버린 세대'가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작품에 공감한다. 왜냐하면 나도 14살이기 때문이다. 14살의 설움이 무엇인지 안다. 14살은 이제 어린이가 아니라서, 어린이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모두 날아가버린다. 그렇지만 14살은 성인도 아니다. 성인이 되려면 15살이 된 후, 자신의 생일이 지나야만 성인이 된다. 즉, 14살은 어른도 어린이도 아닌, 혜택 같은 건 아무 것도 없는 시기이다. 어른들은 "이제 어른이니까 철이 들어야지"라고 14살의 '어른'에게 말하면서도, "너희들은 아직 어른이 아니니까 참견 말아"라며 14살의 '어린이'에게 말한다. 하지만 14살은 온통 그 설움을 참아내야 했다. 하지만 이 성장 소설은 당당하게 "열네 살이 어때서!"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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