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리오 영감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평점 :
19세기, 그리고 파리
19세기는 역사에서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 이 세기는 '질풍노도'의 세기였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 기존의 귀족체제가 무너지고,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지배 계급이 등장하여 귀족과 평민의 갈등에서 부르주아와 노동자의 갈등이 심화된 세기였다. 또한, 19세기는 보불 전쟁이나 나폴레옹 전쟁 같은 몇몇 전쟁들을 제외하고, 유럽과 일본, 그리고 미국이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던 '발전의 세기'이기도 했다. 때마침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 일본의 공업화가 시작되고, 1500여년 동안 분단되어 있던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제국들의 성장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한편으로 19세기는 20세기를 암시하는 세기였다. 독일이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되어 강대국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어, 제국주의가 갈수록 심해지고, 일본 역시 그 대열에 끼어들면서 큰 전쟁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식민지 국가들의 투쟁이 암시되었으며, 미국의 노동자와 부르주아간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면서 대공황 역시 암시된 세기였다. 19세기는 이렇게 피와 얼룩, 발전과 진보로 이루어진 세기였다. 그리고 『고리오 영감』의 배경이 된 파리는 19세기의 중점에 있던, 산업화로 인해 발전이 한창 이루어지던, 그러나 어딘가에서 붕괴의 징조가 보였던, 파리였다.
이러한 파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떠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 수많은 정치철학자들이 꿈꾸었던 이상국가의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것이 파리에서 가장 존중받고, 훌륭한 사람이었을까? 발자크는 고발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이 파리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고. 오히려 파리는 그 정반대였다고. 발자크는 보트랭의 입을 빌려서 그것을 설파한다.
"이곳 파리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출세하는가를 알고 있나? 천재성을 떨치든지 아니면 능수능란하게 타락해야 하네. 사회 집단 속으로 대포알처럼 뜷고 들어가거나 페스트 균처럼 스며들어 가야 하네. 정직이란 아무 소용이 없네. 사람들은 천재의 위력에 굴복하고, 그것을 미워하고 비방하려고 들지. 왜냐하면 천재는 분배하지 않고 독점하니까 말이야.
천재가 버티기만 하면 사람들은 굴복하기 마련이네. 한마디로, 사람들은 무릎 끓고 존경하는 법일세. 왜냐하면 사람들은 천재를 진흙 속에 묻어버릴 수 없으니까. 타락은 힘을 얻고 재능은 희귀한 것일세.
(…)
그래서 성실한 인간은 모든 사람의 적이 되어버렸네. 도대체 성실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알겠나? 파리에서 성실한 사람이란 입을 다물고 분배를 거절하는 사람일세(p.148~149)."
(구스타브 카유보트, 「파리의 오후, 비 오는 날(1877)」)
『고리오 영감』에서 묘사된 파리의 사람들은 대부분 위선에 가득차고 돈에 굶주린 사람들이다. 고리오 영감의 두 딸인 뉘싱겐 부인과 델핀은 아버지에게 손을 벌릴 때에만 찾아오고, 고급 하숙집의 주인은 보케르 부인은 '파리 자체'다. 보트랭은 '불사신'이며, 그 외에 주인공 라스티냐크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은 위선적이고 돈만 밝힌다. 만약 이것이 정말로 19세기의 파리의 초상이라면, 파리에는 어떠한 희망도 존재하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다. 발자크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파리가 지니고 있었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발자크는 이 작품에서 그것을 '고리오 영감'과 '라스티냐크'로 잡았다. 우리 모두의 '구세주'이자 '아버지'였던 고리오 영감이 평생 무지몽매하게 살아가다가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된 죽음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죽음은 청년 라스티냐크에게 커다란 희망을 가져다주었으며, 마침내 그로 하여금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라고 외치게 한다. 『고리오 영감』은 그의 이런 희망 찬 외침으로 마무리짓게 된다.
19세기 파리의 초상 1: 스탕달의 『적과 흑』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과 더불어 19세기 파리를 묘사한 소설 중 으뜸으로 꼽히는 소설이 있다면, 단연코 스탕달의 『적과 흑』일 것이다.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앵 소렐은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인 라스티냐크와 마찬가지로 야심이 많은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라스티냐크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소렐은 라스티냐크보다도 출세욕이 더 강해서, 사랑조차도 출세하기 위해 사랑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소렐은 정말로 레날 부인에게 사랑에 빠져버린다. 어쩌겠는가. 그게 그의 천성인 것을. 하지만 무엇보다도 쥘리엥 소렐이 파멸한 이유는 자신 때문도 아니고, 레날 부인과의 사랑 때문도 아니었다. 그를 파멸시킨 존재는, 그가 그토록 출세하고 싶어했던 사회였기 때문이다.
스탕달의 『적과 흑』의 제목은 학자간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적(赤)'은 군인의 붉은 의복을, '흑(黑)'은 사제의 검은 의복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는 결국 19세기 프랑스에서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두 직업을 나타내는 것인데, 쥘리엥은 '적과 흑'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파멸해버리고 말았다. 스탕달은 스스로 "문학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했다. 그 말처럼, 스탕달은 『적과 흑』을 비롯한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19세기의 파리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려고 노력했던 작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물론, 발자크도 『인간희극』을 통해 19세기의 파리를 입체적이고 종합적으로 분석해 낸 작가였지만 스탕달의 공 역시 무시할 수 없겠다.
19세기 파리의 초상 2: 플로베르의 『감정교육』
발자크나 스탕달 외에도, 19세기의 파리를 함께 살았고, 체험했던 작가들과 철학자들 역시 19세기 파리를 묘사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중에서 "뛰어나다"라고 평가받는 작가가 바로 플로베르이다. 플로베르는 사실주의의 창시자이기 때문에, 그는 사람의 행동뿐만이 아니라 파리 역시 사실적으로 보고하는 게 당연했다. 많은 사람들은 19세기의 파리를 그린 작품으로 『마담 보바리』를 꼽고 있지만, 나는 그 작품보다는 그의 숨은 걸작인 『감정교육』이 그 점에 더 입각한다고 생각한다.
『감정교육』의 주인공 역시 라스티냐크와 쥘리엥 소렐처럼 청년인 프레데릭 모로이다. 프레데릭 모로는 파리에서 출세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온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는 작품의 첫 부분에서부터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다. 아르누 부인이라는 미모의 귀부인을 보게 된 것이다. 이윽고 프레데릭 모로는 '출세냐, 사랑이냐'의 고민 속에 빠지기 시작한다. 쥘리엥 소로와는 다르게, 그는 사랑과 출세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출세의 길은 물 건너가고, 세월을 허비하게 된다. 그래서 작품의 마지막은 그로부터 약 25년이 흐른 후, 프레데릭과 데로리에가 서로 옛날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끝나나 보다.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은 『고리오 영감』이나 『적과 흑』과는 달리, 혁명기를 배경으로 하고, 사건의 진척이 별로 없다. 이 작품은 굉장히 삽화가 많은데, 그 중 대부분이 주인공 프레데릭이 '감정교육'을 받으며 출세할 준비를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에게 파리는 라스티냐크나 쥘리엥 소렐처럼 야심차고, 거대한 적이 아니라, 왜곡되고 미숙한 연애장에 불과했다. 사실 『감정교육』은 파리의 사교계에 대해 알기 위해 살펴보는 게 아니라, 19세기의 일부분은 '유혈 충돌'을 알아보기 위해 살펴본 것이다.
그 외의 초상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보들레르의 『악의 꽃』
19세기는 한 마디로 형언할 수 없는 세기지만, 동시에 수많은 고전 작가들을 배출한 세기이기도 했다. 프랑스에만 10여명이 넘으니(위의 다섯 작가를 비롯하여 공쿠르 형제, 모파상, 에밀 졸라, 라마르틴, 발레리 등), 엄청난 축복이겠다. 하여튼 그 중에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보들레르의 『악의 꽃』 등은 파리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레 미제라블』은 그 자체로 숭고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빅토르 위고가 묘사한 파리에서 입각해보면, 더욱 위대한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묘사한 파리는 혁명기의 파리이며, 그래서 정치적으로 불안한 세기이자, 더러운 세기였다. 가브로슈 같은 소년들, 꼬제뜨와 같은 소녀들이 그 당시 파리에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빅토르 위고는 장 발장의 이야기를 통해서 밝혀내고 있었다. 『고리오 영감』이나 『적과 흑』에서 본 파리가 모두 거짓이었고, 진실은 따로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악의 꽃』 역시 그것을 증명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시를 지은 낭만주의 시인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는 파리를 상징적으로 비판할 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파리에 반대되는 개념, 즉 자유, 순결함, 지혜 등을 노래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시는 출간 당시 굉장한 파문을 일으켰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서 보면 『악의 꽃』은 숭고한 것을 노래하고 있는 걸작이다. 이 작품뿐만이 아니라 『파리의 우울』이라는 시집 역시 파리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들 중 하나이다.
더불어, 소제목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프랑스의 대표적인 자연주의 작가 에밀 졸라의 『나나』를 비롯한 『루공 마카르 총서』, 드레퓌스 사건이 벌어지자 그를 옹호하기 위해서 쓰여진 『나는 고발한다』 등의 작품들 역시 훌륭한 작품들이며, 19세기 파리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다시 발자크로: 『사촌 베트』와 『고리오 영감』
이렇게 수많은 19세기 프랑스 작가들이 '파리', 나아가 '19세기'의 본질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도 발자크처럼 거대한 계획과 체계를 가지고 19세기를 묘사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분명 19세기 프랑스를 묘사한 작가들 중 최고봉에 서 있는 작가는 오노레 드 발자크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는 『고리오 영감』을 비롯하여,『골짜기의 백합』이나 『나귀 가죽』, 『루이 랑베르』 등, 발자크의 작품이 점점 번역되고 있지만, 나는 아직 이 소설과 『사촌 베트』 밖에 읽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느낌이 분명히 왔다. 발자크의 작품들은 모두 맥을 잇고 있다는 것을.
『사촌(누이) 베트』의 주인공은 당연히 '베트'이다. 그녀는 노처녀로서, 거짓된 사랑이 들끓은 이 파리에서 '순수한 여인'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복수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에, 온 정성을 다해 보호하고 사랑하던 벤세슬라스를 조카딸에게 빼앗긴 것에 대해 복수를 감행한다. 한편, 이 소설에는 또 다른 축이 되는 여인이 있는데, 그녀의 이름은 창부 '발레리',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매혹하여, 여러 남자들을 파멸시키고 돈을 가로채는 '악당'이다.
『사촌 베트』는 이야기가 비교적 단순하게 전개되는 『고리오 영감』과는 달리, 음모가 들끓는 파리의 전형적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고금 횡령 음모로 자살한 사람, 벤세슬라스의 음모로 죽은 크르벨과 발레리, 못 생긴 리스베트의 음모로 여러 위기를 맞는 윌로 남작 집안……. 이런 음모가 모이고 모여 파리가 완성된다니, 정말 끔찍하다.
하지만 『사촌 베트』에도 희망적인 존재가 나온다. 바로 윌로 남작의 아들 빅토랭이다. 변호사인 그는, 라스티냐크와 프레데릭, 그리고 쥘리엥 소렐과 같은 다른 작품의 젊은 청년을 연상시키지만, 그들과는 다르게 믿음직한 '영웅'으로 묘사된다. 그는 방탕한 아버지가 집안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지 않고, 자신의 능수능란한 능력으로 집안을 재기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발자크는 그의 행적에 대해서 꽤나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면에서 보든, 그는 가장 완벽한 '영웅'이자 '구세주'이다. 물론 그 역시 인간이기에 실수도 하고, 단점도 많지만, 19세기 파리의 전형에 비하면 아주 청결한 인간이다.
자, 우리는 어느새 우리가 다시 『고리오 영감』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19세기 파리의 초상은 『고리오 영감』을 축으로 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그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비스러운 것은 라스티냐크다. 처음에 "출세만이 미덕이야!"라고 부르짖던 이 청년은 어느새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라고 외치고 있으니...... 아무리 고리오 영감의 죽음으로 그가 바뀌었다고 해도 그럴 순 없는 법이다. 그렇다, 그 와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다. 『고리오 영감』의 중심 사건을 잊으면 안 되는 법이다.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보트랭이 잡혀가는 부분, 그리고 보트랭이 라스티냐크에게 충고하는 부분이다. 아까 전에 보트랭의 충고를 일부분 보여주었지만, 정말로 발자크가 보트랭의 입을 빌려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 말이 아니었을까?
"인생이란 부엌보다 더 아름답지 않으면서도 썩은 냄새는 더 나는 거라네. 인생의 맛있는 음식을 훔쳐 먹으려면 손을 더럽혀야 하네. 다만 손 씻을 줄만 알면 되지. 우리 세대의 모든 윤리가 거기에 있네. 내가 이처럼 자네에게 세상 얘기하는 것은 세상이 나에게 그럴 권리를 주었기 때문이야. 나는 세상을 알고 있네(p.149)."
이 말이야말로 '파리'를 넘어서 '19세기'를 표현하는 단 한 마디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기의 추악함을 고발하는 발자크, 그리고 그를 대신해 그것을 표현한 인물 보트랭은 분명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람들이다. 보트랭, 그의 본명은 자크 콜렝으로, 사기죄로 툴롱 도형장에 수감되었다가 탈옥한 죄수이다. 그의 별명은 '불사신'. '세상을 알고 있는' 그가 결코 굴복하지 않는 이유다. 그가 불사신인 이유는 그가 죽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19세기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가 죽으면 이 모두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보트랭은 발자크가 창조해 낸 그 어떤 인물보다도 독특하고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보트랭이 이 작품의 전부가 될 순 없다. 결국 라스티냐크에 변화된 이유는 그 곁에서 항상 악마의 조언을 하는 사기꾼 보트랭이 그의 곁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보트랭은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유혹하는 뱀과 같이, 파리에 대해 모르는 라스티냐크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충족하려고 했다. 라스티냐크는 꼭두각시처럼 그의 말에 따라 이용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잡혀가자 라스티냐크는 더 이상 그럴 동기가 없어지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라스티냐크는 외쳤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그렇다. 보트랭이 잡혀가고 라스티냐크 곁을 떠난 것, 그 순간부터 발자크는 희망과 가능성을 작품 속에 던져넣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작품들이 그렇듯이 마지막 부분은 중요하지만 『고리오 영감』의 경우 그것이 더욱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초상으로: 발자크의 현대성
우리가 이렇게 깊이 19세기의 초상을 엿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오늘날의 우리의 초상과 19세기의 초상과 유사하기 때문이 아닐까? 여전히 사람들은 출세하려고, 권력을 잡으려고 폭력과 뇌물을 일삼고, 사기죄를 저지르고 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어서 출세하려고 사교계에서 성공하고 있다. 세상은 그것을 '연예(entertainment)'라고 부른다. 하지만 명심하라. 그런 것들은 모두 '도박'에 불과하다는 것을. 물론 어떤 사람들은 진심으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연예계에 들어가려고 한다. 하지만 그 나머지는 모두 돈을 벌기 위해, 혹은 어쩔 수 없이 연예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보트랭이 말했듯이, "한 걸음만 잘못 내디디면 지옥 같은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오늘날에까지 적용되고 있다. 왜? 발자크의 근대성, 아니 '현대성' 때문이다.
사실, 본질적으로 근대성(modernity)과 현대성(modernity)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근대성'이라는 표현보다는 '현대성'이 더욱 적절한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현대'라고 부르지, '근대'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자크의 작품, 나아가 수많은 과거의 고전들을 읽는 이유란 본질적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더욱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함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우리가 『고리오 영감』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은 이 세상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위선적이고 거짓에 가득찬 세계에서 밝고 진실된 세계로 나아가는 그 날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고전을 읽으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죽은 고리오 영감도 분명히 그것을 바랄 것이다. 발자크 역시 우리에게 던져주지 않았던가. 우리에겐 커다란 가능성이 있고, 또한 희망을 품고 있다는 걸.
마지막으로, 나는 이 리뷰가 발자크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지침서가 되길 바란다. 누군가에게 이 리뷰가 커다란 도움이 되길 나는 기대한다.
자, 이제 세상과 나와의 대결이다. 커다란 가능성으로, 빛을 향해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