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 인 디 에어 Up In The Air
월터 컨 지음, 김환 옮김 / 예문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영화 <인 디 에어>는 떠돎과 정착이라는 소재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풀어낸 품이다. 이 작품이 재미있었던 건 라이언 빙햄이라는 인물이 추구하는 삶과 가치 때문이다.
그는 ‘떠돎’을 삶의 방식으로 택한 인물이다. 스스로 부유하는 삶을 선택했고, 그것에 만족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떠도는 삶을 권장한다. 강연회에서는 청중들에게 가벼운 배낭을 짊어지고 떠나라고 말하고, 정리해고 대상자들에게는 인생이기에 실직을 계기로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서라고 말한다. 정리해고 전문가라는 독특한 직업과 허공을 부유하는 비행기 안에서 안온함을 느끼는 캐릭터는 정말 매력적이다.

떠돎과 정착에 대한 이분적인 편 가르기를 거부한 감독의 태도도 마음에 든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같은 존 던 식의 고리타분한 신념을 맹신하는 것도 아니고, 떠돌 수밖에 없는 별종들의 삶을 적극 옹호하는 어설픈 노마드 사상을 설파하지도 않는다.
빙햄은 떠돌 수 밖에 없는 인물일 뿐이다. 누군가는 그를 동경하고, 누군가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가 끝날 때 빙햄이 깨달은 것이라면, 그 역시 정착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다. 그는 계속 떠돌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겨먹었으니까. ‘떠돎’과 ‘정착’의 문제에서 옳고 그름이란 없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

멋진 배우(조지 클루니!!!)가 좋은 연기를 했고, 훌륭한 시나리오였으며, 재치 있는 연출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극장에서 나오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가 원작 <업 인 디 에어>를 찾아보았고, 마침내 원작까지 읽었다, 불행하게도...

아쉽게도 항공마일리지의 대가 라이언 빙햄에 관한 좋은 기억은 여기까지다. 원작을 읽는 동안 그에 대한 좋은 기억이 거의 증발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지지부진한 책읽기를 이겨내고 원작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을 때 남은 건 뛰어난 각색에 대한 찬사뿐이다.
원작에서 미국 비즈니스계와 항공시스템에 관한 잡지같은 지식만 늘어놓는 원작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 유익하지 않다. 작가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로 끝까지 읽은 걸로 족하다는 생각. 차라리 <인 디 에어>의 감독 제이슨 라이트먼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전작들을 찾아보는 것이 나름 현명한 생각일 터.

** 책을 구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또 다른 이유. 작가 월터 컨이 옥스퍼드 출신의 평론가이자 소설가라는 것. 옥스퍼드 출신의 작가에 대한 근거 없는 신뢰는 순전히 콜린 덱스터와 모스 경감이 심어준 것인데... 검색해보니 정작 콜린 덱스터는 캠브리지 출신이다.  어설픈 정보와 학력지상주가...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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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라의 재
프랭크 매코트 지음, 김루시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안젤라의 재>는 아름답고, 진솔하고, 서정적이고, 애달프고, 유머러스하고, 몽환적이기도 한 훌륭한 회고록이다, 진심으로.  

소설가들은 종종 사람들이 흔히 하는 “내가 살아온 삶을 소설로 쓴다면 수십 권은 될 거다”라는 말을 예로 들며 소설을 설명하기도 한다. 소설은 창작이고, 예술이기에 ‘인생=소설’이 될 수 없다. 즉 인생역정을 고스란히 옮기는 것은 소설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거다. 장정일이 해석하는 ‘구월의 이틀’처럼 소설가는 기나 긴 삶 속에서 ‘이틀’을 포착하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동의한다. 일기와 소설은 본질적으로 다르니까. 그런데 프랭크 매코트의 회고록 <안젤라의 재>는 이를 무색케 한다. 이 책은 여느 소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시종일관 반복되는 주인공의 일상사는 소설가들이 포착한 ‘이틀’을 가볍게 뛰어넘고 있다.

<안젤라의 재>는 그 어떤 소설 못지않게 문학적 향기가 넘친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본, 현제시제로 묘사된 1930년대 아일랜드의 빈민가는 아름답고 시적이며, 순수하고 유머러스하다! 그렇다고 이런 문학적 향취 때문에 이 책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작가의 태도, 그것이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안젤라의 재>에는 회고록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코멘터리’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프랭크 매코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냥 보여준다. 곧 사라질 기억의 집을(작가는 이 회고록을 예순여섯에 출간했다.)의 찬찬히 더듬어 하나하나 묘사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현학을 과시하기 위해 주석을 달거나 억지로 의미를 덧대는 짓거리를 하지 않는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예순을 넘긴 작가가 아니라, 오로지 1930년대 아일랜드에 자라고 있는 어린 프랭크 매코트이다. 독자는 그때 그 시절의 프랭크 매코트의 순수한 눈으로 아일랜드를 보고 사람들을 만난다.  
 
<안젤라의 재>에서 만날 수 있는 건 1930년대의 아일랜드 사람들만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의 우리들도 만날 수 있다. 호인이지만 무책임하고 술주정뱅인 프랭크 매코트의 아버지 말라키는 우리네 아버지랑 꼭 닮았으며, 가난을 온몸으로 감당하던 안젤라는 우리의 어머니이고, 이들과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이웃들은 우리의 이웃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프랭크 매코트의 회고록은 아주 특별한 무언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소설로 쓰면 오십권은 족히 될 거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진부한 인생역정을 옮긴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유머러스하다. 이건 전적으로 어린 아이의 눈으로 삶을 묘사한 작가의 솜씨 때문이다. <안젤라의 재>에서 우리는 노작가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유년 시절의 프랭크 매코트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순수함을 맛본다. 프랭크 매코트는 진정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안젤라의 재>를 읽으며 떠오른 생각 몇 가지.

1. 가난과 전쟁, 환란의 최대 피해자는 늘 여자와 아이들인가?
2. 커다란 절망 앞에서 남자는 여자에 비해 무기력하며, 도피적인가? 아내와 자식이 굶고 있는데도 일당을 술집에서 탕진하는 말라키 매코트. 무책임이 몸에 밴 모습.
3. 종교가 과연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그 구원이란 항상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닐까?
4. 아무리 혹독한 시절이었을 지라도 돌이켜보는 과거는 아름다운가? 이는 상처에 대한 극복을 전제로 가능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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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04-27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나왔을때 Angela' ash 라는 제목으로 눈구경을 하도 많이 해서인지, 저도 읽은 줄 착각할 뻔 했어요. 아이들의 시각, 아이들의 관점이 도입되면 이야기가 많이 순화되고 아름다워지는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해요.
마지막 네가지 문항을 보니 요즘 술술 읽히는 책만 일부러 골라 읽고 있는 중인 저는 조금 있다가 읽어야할 듯 하네요.

lazydevil 2010-04-27 22:09   좋아요 0 | URL
맞아요, 분명히 아이들의 눈으로 보면 가난마저 아름답게 보이나봐요.
근데 이 작품 정말 술술 읽히는 작품이에요.
종종 웃기도 하고요, 적지 않은 분량이 후르륵~(무슨 라면같네요^^)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
루이스 페르난두 베리시무 지음, 김라합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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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이라는 짧은 탐정소설에 대한 불만은 짧다는 겁니다. 이 재미있는 탐정소설에 최고의 별점을 주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탐정소설을 두고 짧다고 불평하기는 처음입니다. 그간 읽어온 탐정소설은 필요이상으로 길고 장황한 것이 흠인 경우가 더 많았거든요.

베르시무스의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은 탐정소설 독자를 위한 소설이 아닙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보르헤스의 팬을 위한 소설입니다. 그러니까 탐정소설을 기대하면 곤란합니다. ‘보르헤스 월드’의 스핀오프(이거 말되나? 어쨌든 보르헤스 세계관이 탐정소설에 이용되니까 우겨봅니다)같은 작품이죠.

보르헤스 팬이라면 당연히 탐정소설이나 포우, 러브크래프트에 대해 관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보르헤스는 탐정소설을 즐겨 읽었고, 포우나 러브크래프트같은 작가들을 높이 평가했으니까요. 꽤 오래전에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당시는 포스트모던 어쩌구하는 것이 일대 유행이었죠. 죽은 지 20년(1975년 사망)이나 된 보르헤스는 뒤늦게 지구 반대편 나라에 소환되어 이곳저곳을 끌려 다니며 고생 좀 했을 겁니다. 정말 펼치기만 하면 아무나 포스트모던을 들먹였고 그때마다 보르헤스가 증인으로 등장했으니까요.

아무튼 잘 기억 나지 않지만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다보면 작품 자체보다 다른 작품과의 연관성이 더욱 흥미로웠던 것 같습니다. 보르헤스의 글쓰기 전략중 하나가 상호텍스트성 어쩌구니까요. 솔직히 보르헤스가 작품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언급하는 작품들의 대부분을 읽지 못한 터였죠. 그래서 흔히들 말하는 지적 즐거움을 만끽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적어도 그가 펼치는 지적 만화경을 어설프게 탐독하며 재미있다, 고 생각(착각?)했습니다.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은 보르헤스가 직접 등장하여 포우와 러브크래프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물론 허구죠^^).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한다는 미명 아래 보르헤스와 독자가 수다를 떠는 거죠. 잡담이나 다름없는 이런 수다는 보르헤스와 포우, 크래프트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게다가 재미있기까지 합니다. 원래 시시콜콜한 잡담은 재미있는 법이죠. 그러니까 보르헤스가 자기 작품에서 즐겨 사용했던 지적 유희를 쉽고 덜 고상한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럼 탐정소설로서의 재미요? 뭐 그냥저냥이죠. 이건 보르헤스의 실제 작품에서 탐정소설 본연의 재미를 강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르헤스는 탐정소설의 열렬한 독자였지 뛰어난 탐정소설 작가는 아니었으니까요. 그에게 탐정소설은 어디까지나 문학적 유희였습니다.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은 더 길고 두꺼운 작품이어야 합니다. 주인공 포켈슈타인과 보르헤스의 끝없이 갈라지는 문학적 혹은 문학적 잡담이 더욱 풍성하게 전개되지 않은 게 무척 아쉬워요. 동서양의 고전에서 장르문학에 이르기까지 해박한 지식을 집적했던 보르헤스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아쉽습니다. SF나 탐정소설같은 장르문학에만 국한해서 좀더 깊이있게 잡담을 이어갔으면 얼마나 즐거웠을까요? 마치 이 소설은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만큼이나 아쉽고 주마간산격입니다.
 
생각해보면 길고 두꺼운 탐정소설도 보르헤스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보르헤스는 평생 짤막한 글만 썼으니까요. 게다가 말년의 보르헤스가 좋지 못한 건강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나마 출연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비록 허구일지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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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4-21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제목만 보고 보르헤스가 쓴 글인줄 알았네요^^ 뭐 글을 읽어버니 약간은 추리 소설적 요소가 있는것 같은데 한번 읽어봐야 겠네요.
그리고 보르헤스와 탐정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을 읽어 보세요.앨러리 퀸이 자신의 선정한 150개의 단편집중(1840년~1965년에 출간된 책중) 하나로 뽑은 명작이지요.

lazydevil 2010-04-25 00:43   좋아요 0 | URL
앨러리 퀸이 선정한 150개 중 하나요? 카스피님 서재 페이퍼 한번 훑어봐야겠네요. <이시드로..>는 전에 읽어보리라 생각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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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당연하고 늘 곁에 있지만 잊고 살아가는 것, 죽음입니다. <에브리맨>은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뻔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는 작품입니다.

<에브리맨>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무섭습니다, 진심으로!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주인공과 함께 늙어가는 것 같고, 주인공처럼 죽음의 공포에 몸서리치게 됩니다. 서서히 다가와 목을 조이는 죽음의 담담하고 엄격한 태도 앞에 독자는 무기력해집니다. 주인공이 겪는 상황을 독자들도 예외 없이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죽음 앞에는 모든 사람이 평등합니다!!(이건 축복이겠죠??)

죽음을 둘러싼 풍경을 묘사하는 작가의 어투는 무심할 정도로 담담합니다. 어찌나 담담한지 사망신고서를 접수하는 공무원을 보는 듯해요. 도처에 널려있는 것이 죽음이고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죽는데 굳이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는가? 그래서 더욱 무섭습니다. 흔해빠진 죽음. 방식은 다르지만 모든 죽음은 결국 똑같습니다.

<애브리맨>은 ‘너도 죽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작품입니다. 제발 좀 망각에서 벗어나라고 나지막이 말하고 있죠. 몸서리치도록 무섭고 슬픈 사실이지만 이런 자각은 당연히 삶의 소중함을 역설합니다. 매우 철학적이죠. 여든 살을 눈앞에 둔 노작가 필립 로스가 들려주는 메시지이니 결코 제스추어가 아닐 겁니다.

이 짧고 분명한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을 앞에 두고 무슨 이야기를 길게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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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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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원래 구질구질합니다. 아무리 파란만장한 삶이라도 아무런 특수효과 없이 그냥 노출하면 구질구질함을 피할 길 없습니다. 밥 먹고, 트림하고, 방귀 끼고, 똥 싸고, 오줌 싸고, 섹스하고, 애 낳고, 하품하고, 잠자고, 뒷말하고, 욕하고....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아무리 3D 입체 영상으로 처발라놔도 구질구질함을 벗어나기 힘듭니다. 더구나 실패한 낙오자의 삶은 어떨까요? <고령화 가족>은 구질구질한 삶에 관한 기록입니다.

우연히 <하이 피델리티>와 <고령화 가족>을 연이어 읽었습니다. 두 작품은 정말 많이 닮아있습니다. 주인공들이 나이를 처먹을 대로 처먹은 낙오자들입니다. 닉 혼비의 로브는 서른 다섯이고, 천명관의 나는 오십대 초반이지만 하는 짓은 똑같습니다. 게다가 무능력한 주제에(그러니까 낙오자겠죠?) 이기적입니다. 영국이나 우리나라나 하는 짓이나 생각하는 건 정말 같아요. 그리고 ‘미스터 루저’!, 그러니까 남자라는 것!!(세상의 모든 남자들이여, 각성하시라!!!)도 같습니다.

다른 게 있다면 한국형 낙오자, 더 정확히 말하면 천명관형 루저가 더 구질구질하다는 겁니다. 찌질한(정확한 표기법은 ‘지질한’이죠) 것은 똑같은데 왜? 도대체 왜 국산 루저의 이야기가 더 구질구질하고, 궁상맞고, 한심해 보일까요?

소설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그간 만난 웨스턴 루저들은 참으로 당당합니다. 국산이나 서양산이나 뻔뻔스러운 건 매한가지인데, 그놈들은 어쩐지 당당해요. 반면 우리 소설, 영화, 드라마에 나오는 한국형 낙오자들에게는 당당함이 없어요. 구박과 눈칫밥으로 단련된 뻔뻔함만 있을 뿐이죠.

<고령화 가족>은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작가의 글재주가 힘을 발휘하죠. 종종 등장하는 농담도 재미있고요. 그런데 별로 유쾌하지 않습니다. 씁쓸해요. 주눅인 든 낙오자의 모습을 보며 마냥 낄낄거릴 수만 없어요. 그들의 모습은 내가 알고 있는 누구(?)와 오버랩되기도 하고, 그들을 할퀴는 주변의 시선을 우리(?)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만 주눅이 든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작가도 마찬가지에요. 독자가 보기엔 천명관은 닉 혼비와 비교해 빠질 게 없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고령화 가족>은 <하이 피델리티>만큼 개운하지 않습니다. 읽는 내내 독자를 우물쭈물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습니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야기에 선뜻 다가서야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눈치를 보게 만듭니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의기소침함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하이 피델리티>의 뻔뻔스러운 당당함은 인물뿐만 아니라 작가의 목소리에서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재미있고 잘 읽히지만, 뭔가 심심하게 흘러가던 이야기는 후반부에 이르러 힘을 발휘합니다. 그건 주인공이 솔직해지기 시작하면서죠. 시종일관 한심한 짓만 하던 ‘미스터 루저’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발휘합니다. 동시에 솔직해집니다. 자기가 얼마나 한심한 놈이고 이기적인 놈인지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그 속죄의 방법도 후련합니다. 최악의 상황에 눈을 떠보니 자신을 돌봐줄 여인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는 결말이 어째 여전히 찌질남의 환타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감이 있지만, 괜찮습니다. 유사 이래 사람을, 특히 남자를 들어다 놨다 하는 건 사랑이니까요.

<고령화 가족>은 미스터 루저가 새로운 낙오자로 거듭나는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항상 가족을 무시하고 경멸했던 미스터 루저가 가족과 화해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둘은 아주 잘 어울립니다. 그 중심에는 배다른 형과, 씨다른 동생을 사십년간 묵묵히 키워온 엄마가 있었고요.

   
  -그 여자 불쌍한 여자야. 속 썩이지 말고 잘해줘.
-걱정 마, 새꺄. 엄마는 잘 계시니?
-엄마, 작년에 돌아가셨어.
-미안하다...... 엄마한테 미안하고...... 미연이한테도 미안하고 너한테도 미안하고.......
-그러게 씨발, 누가 그렇게 살래?
(p.284에서 대화만 추려봤습니다.)
 
   

그리고 보니 <하이 피델리티>에는 없는 <고령화 가족>만의 강력한 비기가 있었군요. 바로 엄마입니다! 대한민국의 엄마는 구원불가한 루저마저도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불가해한 힘을 가지고 있거든요.

책 말미에 실린 작가 후기는 이런 인용문으로 시작합니다.

   
  제니퍼 필즈는 마흔 한 살이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으며 그녀가 원하는 바는 바로 그런 내용을 글로 쓰는 것이다.
-존 어빙, <가아프가 본 세상>중에서
 
   

이는 <고령화 가족>의 주인공 나, 그리고 그의 형 오함마, 여동생 미연에게 고스란히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오랜만에 작품을 발표한 작가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죠. 작가의 다음 작품은 그 좋은 시절에 관한 이야기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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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산책 2010-04-02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명관 소설은 읽어본게 없어요. 세테에서 프로방스기행을 보고 젊은 작가라 생각했는데 나이가 많더군요 ㅎㅎ 그때 받은 인상은 꽤 섬세하고 부드러웠는데, 나중에 인터뷰한 글을 읽어보니 여행을 싫어한다며 약간은 시니컬한 느낌이 들었어요. 좀 있음 친구랑 만든 영화를 개봉한다던데..

저 루저 좋아해요~(또 혼내시겠다 ㅋ) 뭐 솔직히 루저 아닌 인생이 있나여? ㅎㅎ

lazydevil 2010-04-03 11:45   좋아요 0 | URL
이 작가 예전에 <북경반점>이라는 영화의 각본도 썼는데 영화를 만들었군요.
소설의 주인공도 못나가는 영화감독이에요.

뭐.. 180 안되면 루저라고 하니 저도 루접니다.^^ 찌질~~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