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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
루이스 페르난두 베리시무 지음, 김라합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이라는 짧은 탐정소설에 대한 불만은 짧다는 겁니다. 이 재미있는 탐정소설에 최고의 별점을 주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탐정소설을 두고 짧다고 불평하기는 처음입니다. 그간 읽어온 탐정소설은 필요이상으로 길고 장황한 것이 흠인 경우가 더 많았거든요.
베르시무스의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은 탐정소설 독자를 위한 소설이 아닙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보르헤스의 팬을 위한 소설입니다. 그러니까 탐정소설을 기대하면 곤란합니다. ‘보르헤스 월드’의 스핀오프(이거 말되나? 어쨌든 보르헤스 세계관이 탐정소설에 이용되니까 우겨봅니다)같은 작품이죠.
보르헤스 팬이라면 당연히 탐정소설이나 포우, 러브크래프트에 대해 관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보르헤스는 탐정소설을 즐겨 읽었고, 포우나 러브크래프트같은 작가들을 높이 평가했으니까요. 꽤 오래전에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당시는 포스트모던 어쩌구하는 것이 일대 유행이었죠. 죽은 지 20년(1975년 사망)이나 된 보르헤스는 뒤늦게 지구 반대편 나라에 소환되어 이곳저곳을 끌려 다니며 고생 좀 했을 겁니다. 정말 펼치기만 하면 아무나 포스트모던을 들먹였고 그때마다 보르헤스가 증인으로 등장했으니까요.
아무튼 잘 기억 나지 않지만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다보면 작품 자체보다 다른 작품과의 연관성이 더욱 흥미로웠던 것 같습니다. 보르헤스의 글쓰기 전략중 하나가 상호텍스트성 어쩌구니까요. 솔직히 보르헤스가 작품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언급하는 작품들의 대부분을 읽지 못한 터였죠. 그래서 흔히들 말하는 지적 즐거움을 만끽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적어도 그가 펼치는 지적 만화경을 어설프게 탐독하며 재미있다, 고 생각(착각?)했습니다.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은 보르헤스가 직접 등장하여 포우와 러브크래프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물론 허구죠^^).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한다는 미명 아래 보르헤스와 독자가 수다를 떠는 거죠. 잡담이나 다름없는 이런 수다는 보르헤스와 포우, 크래프트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게다가 재미있기까지 합니다. 원래 시시콜콜한 잡담은 재미있는 법이죠. 그러니까 보르헤스가 자기 작품에서 즐겨 사용했던 지적 유희를 쉽고 덜 고상한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럼 탐정소설로서의 재미요? 뭐 그냥저냥이죠. 이건 보르헤스의 실제 작품에서 탐정소설 본연의 재미를 강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르헤스는 탐정소설의 열렬한 독자였지 뛰어난 탐정소설 작가는 아니었으니까요. 그에게 탐정소설은 어디까지나 문학적 유희였습니다.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은 더 길고 두꺼운 작품이어야 합니다. 주인공 포켈슈타인과 보르헤스의 끝없이 갈라지는 문학적 혹은 문학적 잡담이 더욱 풍성하게 전개되지 않은 게 무척 아쉬워요. 동서양의 고전에서 장르문학에 이르기까지 해박한 지식을 집적했던 보르헤스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아쉽습니다. SF나 탐정소설같은 장르문학에만 국한해서 좀더 깊이있게 잡담을 이어갔으면 얼마나 즐거웠을까요? 마치 이 소설은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만큼이나 아쉽고 주마간산격입니다.
생각해보면 길고 두꺼운 탐정소설도 보르헤스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보르헤스는 평생 짤막한 글만 썼으니까요. 게다가 말년의 보르헤스가 좋지 못한 건강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나마 출연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비록 허구일지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