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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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의 첫장편 <농담>을 읽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이러니가 꽃피고, 삶을 꿰뚫는 사유가 넘실대는 이 작품을 쓴 나이가 스물여섯이라니! <농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삶을 이해하는 태도는 스물여섯이라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스물여섯에 <농담>을 쓴 쿤데라는 진짜 천재인가? 결국 이건 작품의 출간 년도와 작가의 출생 년도의 뺄셈을 제대로 하지 못한 실수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쿤데라는 <농담>을 서른여섯에 썼다. 그럼 조금 이해가 되는군.

쿤데라가 <불멸>을 쓴 것은 오십 아홉이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쓴 것은 오십 셋이다. 역시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에는 젊은 천재가 있을 수 있어도, 소설에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안심이 된다.  소설에도 어린(혹은 젊은) 천재가 존재한다면 아마도 우울할 것이다. 세상일에 대해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순전히 상상력만으로, 인생의 질곡을 경험해보지도 못한 어린 천재의 손에서 나온다면, 그 작품을 읽는 독자의 기분은 어떨까? 소설에는 단순히 작가의 재능만으로 채워넣을 수 없는 영역이 있다. 그래서 독자는 소설가를 존중한다. 아무리 시답지 않은 작품이라도 최소한의 땀과 노력, 삶의 흔적이 베어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읽은 쿤데라는 잊고 있던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일깨워주었다. 낯선 장소, 낯선 문화, 낯선 시간대에서 펼쳐지는 낯선 인물들의 이야기가 독자의 현재를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독자는 2010년 자본주의 국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만, 1960년대 사회주의 체제 아래 체코에서 벌어진 일들이 전혀 낯설지 않다. <농담>은 역사와 정치, 이념, 문화, 시간의 벽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농담>은 역사와 정치, 이념, 문화,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도 신랄하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불멸>을 잊은 지 오래다. 읽었던 경험은 이제 하나의 이미지로만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런데 우연히 꺼내든 <농담>은 쿤데라를 다시 현재로 불러들이라고 말한다. 살아있으나 독자에게는 죽은 작가나 다름없던 쿤데라를 회생시켰다. 작가와 작품, 독자를 돌이켜보게 만드는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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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08-27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은 <농담>일지 몰라도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을거라는 선입견때문에, 요즘 나오는 책들에 더 눈 돌아가는 속성때문에, 그래서 그의 지명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더 이상 읽을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가 lazydevil님의 이 리뷰 읽고나니 제 마음에서도 혹시 회생의 기회가 될까 생각이 듭니다. '살아있으나 독자에게는 죽은 작가나 다름없던 쿤데라'라는 표현, '작가와 작품, 그리고 독자를 돌이켜보게 만드는' 이라는 표현도 참 멋집니다.
저는 지금 lazydevil님의 리뷰를 리뷰하고 있나봐요 ^^

lazydevil 2010-08-29 01:17   좋아요 0 | URL
저도 어쩌다가, 그것도 뒤늦게 이 작품을 읽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hnine님의 리뷰에 대한 리뷰, 거 재밌고 기분 좋은 걸요~~ㅎㅎ

느린산책 2010-08-27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유일하게 읽은 쿤데라 책은 천구백구십년오월일일 교보에서 구입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유일하게 밑줄 그어져있는 문장은 '그에게 음악은 해방이다.'

지난 세월에 누렇게 변색된 책을 다시 들춰보는 것도 재밌네요..ㅎㅎ

lazydevil 2010-08-29 01:24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일천구백구십년오월 즈음 그 작품을 친구에게 빌려 읽었던 거 같아요. 이듬핸가 책을 사서 다시 읽었던 것 같은데... 뒤적여보니 '구십일년 19판'본을 가지고 있네요. 이참에 누렇게 변색된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볼까요??^^
 
악마를 보았다 - I Saw The Devil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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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영화에 대한 관심이 예전같지 않은 터라 신작에 대한 정보흡수가 거의 백지상태입니다. 누가 연출했고, 누가 출연했는지 정도만 확인하고 영화를 봅니다. 영화평은 고사하고 종종 어떤 내용인지도 모른 채 상영관에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관심을 줄었지만 영화를 보는 행위자체는 여전히 즐거운가 봅니다.
<악마를 보았다>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 김지운이 연출했고, 이병헌과 최민식이 출연한다는 기본정보에, 사이코패스를 소재로 한 복수극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아, 그리고, 작품에 대한 평가가 서로 갈린다고 이야기를 언뜻 들은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오랜만에 나타난 최민식이 반가웠고, 이병헌이라는 댄디한 배우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궁금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왜 이 영화의 평가가 갈리는지 알겠더군요. 영화평이나 관련 기사 하나 제대로 읽지 않았지만 어떤 말들이 나왔는지 알겠더군요. 정말 분명한 영화였습니다. 모든 면에서요.

김지운 감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연출한 영화들은 한결같이 가짜 같았어요. 늘 겉으로는 그럴 싸 해보이지만 알맹이가 없었습니다. 데뷔작 <조용한 가족>부터 <장화홍련>도 그렇고, <달콤한 인생>이나 <놈.놈.놈.>까지 모두 그랬습니다. 그나마 <놈.놈.놈.>이 가장 괜찮았습니다. 역시 알맹이는 없지만 솔직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악마를 보았다>는 이전과 달랐습니다. 정말 분명히 속이 찬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를 만약 싫어하거나, 악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럴 만도 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이 영화는 몹시 불쾌한 영화거든요. 하지만 이 영화를 욕하는 사람일지라도 이것만은 인정해야할 겁니다. <악마를 보았다>는 지금까지 김지운이 만든 작품 중 최고라는 것. 그러니까 좋은 영화는 아닐 지언정 꽤 괜찮은 작품일 수는 있다는 말입니다.
 

<악마를 보았다>가 불쾌한 이유는 최민식이 주인공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 영화는 사이코패스인 연쇄살인마의 동선을 따라 이야기 진행됩니다. 그러니까 복수하는 남자 이병헌의 이야기가 아니라 복수를 당하는 살인마 최민식의 이야기입니다. 그 결과 관객들은 살인마의 만행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봐야만 합니다. 피가 튀고, 살점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고, 사지가 절단되는 순간들을 살인마와 함께 동참해야합니다. 정의(?)를 위한 복수는 나중 이야기입니다. 피해자에게 공권력은 언제나 저 너머에 있듯, 이 영화에서 복수의 카타르시스는 멀기만 합니다. 이는 복수하는 남자 이병헌에게도 마찬가지죠.
불쾌하면서도, 흥미로운 것. 이 영화에서 살인마 최민식이 피해여성들을 사냥하는 동안 관객들은 긴장감을 느끼기보다 감당하기 힘든 무력감에 시달린다는 점입니다. 김지운 감독은 관객들이 살인마 최민식의 숨소리 하나, 땀방울 하나 놓치지 말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카메라를 향해 쏘아보는 그 섬뜩한 눈빛은 관객들을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무기력한 방관자 혹은 잠정적 피해자로 만드는 듯합니다.
지금까지 본 한국영화에서 이토록 살인마의 모습을 한계까지 밀어붙인 영화는 보지 못했습니다. 감독의 용기가 가상할 지경입니다. 살인마 최민식의 마지막 질주를 때로는 거칠고 투박하게, 때로는 산뜻한 기교로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해야만 하는 2시간 20분은 너무나 힘겹고 불쾌합니다. 그래서 전 이 영화를 좋아할 수 없습니다.

영화는 그야말로 냉혹하고 잔인무도하며 끔찍합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김지운 영화와는 달리 지극히 사실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장화홍련>이나 <달콤한 인생>, <놈.놈.놈.>같은 환타지의 세계가 아니예요. 그런 의미에서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전원주택 에피소드는 눈에 거슬립니다. 이전 김지운 영화 같은 무대장치와 상황들이 작품의 일관성을 저해합니다. 이 시퀀스는 <호스텔>류의 슬래셔 무비에나 어울리는 이미지와 개그들이더군요.
전혀 다른 개성의 두 남자 이병헌과 최민식의 조화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의 상승효과는 초반보다 중반, 중반보다 후반부에 더욱 힘을 발휘합니다. 어쨌거나 두 남자는 좋은 배우임에 분명합니다. 그럼 두 사람의 대결은? 승리자는 최민식이 될 수밖에 없어요. 영화 속에서나 영화 밖에서나 둘 다 말입니다. 복수극이 아닌 살인마의 이야기이니 그럴 수밖에요.
<악마를 보았다>는 분명히 김지운 감독의 또 다른 모습일 겁니다. <달콤한 인생>의 이병헌처럼 댄디한 스타일리스트이면서 잔혹극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컬트 마니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 영화를 보기전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틀리지 않았습니다. 김지운 감독이 <악마를 보았다>같은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은 아주 뜻밖의 일은 아닙니다. 아주 오래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회고전에서 김지운 감독을 본적 기억이 있어요. 영화를 보기 위해 며칠을 출몰하더군요. 구로사와 기요시의 초창기 영화와 <악마를 보았다>가 비슷한 동네에 있다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벌써 칠팔 년전 이야기니까 김지운 감독은 예전부터 하드보일드한 컬트 잔혹극을 꿈꾸고 있었을 겁니다.



김지운 감독의 새로운 시도를 환영합니다. 개인적으로 그간 보여준 댄디한 스타일이 별로였거든요. <악마를 보았다>를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지만, 이전 작품들 보다 분명히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못마땅한 것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제작비는 무려 70억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의 이야기 규모는 70억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마더>가 그랬고, <박쥐>가 그랬던 것처럼요. 이 불쾌한 영화를 욕하는 사람의 일부는 어처구니없는 규모의 제작비 때문에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제경우 <악마를 보았다>를 17억, 아니 27억에 찍었다면, 김지운 감독을 좋아했을 지도, 아니 존경했을 지도 모릅니다. 영화의 때깔이 덜 세련되었을 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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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사육장 쪽으로’는 좋은 소설이다. 이 소설이 담고는 있는 주제,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 등에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 것이다. 이 한 작품만으로도 작가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 정말 괜찮은 소설이다.

단편집 <사육장 쪽으로>는 재미없다. 표제작 ‘사육장 쪽으로’에 드러난 주제의식, 글쓰기 방법 등이 판에 박은 듯 똑같다. 8편이 모아놓은 단편집이지만 마치 한 작품을 읽는 느낌이다. 그런데 다른 작품들은 표제작만큼 강렬하지 못하다. ‘사육장 쪽으로’는 두 번째 실려있다. 이미 최고점을 찍은 작품집은 뒤로 갈 수록 그 힘을 읽는다. 작가는 세상을 인식하는 개성 있는 시선이 가지고 있고, 독특한 문체로 그것을 표현하여 괜찮은 작품을 써냈지만, 독자는 거듭될수록 지친다.

우연히 끼게 된 술자리에서 만난 사람이 있다. 소설가였다. 편혜영의 이야기가 나왔고, 그는 “우리 문단에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소중한 존재”라고 표현했던 것 같다. 자연스레 편혜영에게 관심을 두게 되었다. 나중에 살펴보니 편혜영은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였고, 두 권의 작품집과 한권의 장편을 출간한 작가였다. 그리고 호평 일색이었고, 여러 차례 수상경력도 눈에 띄었다. 결국 두 번째 작품집 <사육장 쪽으로>를 읽게 되었다.

편혜영의 소설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과연 독자들의 생각도 문단의 평가와 같을까?하는 생각 말이다. 이건 작가의 재능, 혹은 작품의 완성도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육장 쪽으로’는 훌륭한 단편이고, 함께 실린 작품들도 좋은 소설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재미가 없는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미안하지만 편혜영의 소설을 읽으며 이렇게 쓰면 평론가들이 좋아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쓰면 독자들과의 소통은 요원하겠구나 싶었다. 그가 ‘아오이가든’이나 ‘사육장 쪽으로’같은 뛰어난 단편을 쓴 작가라할 지라도 말이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성급하다. 첫 장편 <재와 빨강>을 읽은 뒤에야 이야기하는 것이 작가에게 공평하리라. 하지만 선뜻 끌리지 않는다. 장편이 ‘사육장 쪽으로’의 확장판이라면 기꺼이 반기겠지만, ‘사육장 쪽으로’와 닮은 작품들의 장편화라면... 거부감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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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의 나라
조너선 캐럴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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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가는 언제나 작품 뒤에 숨어있다. 자신의 음험한 모습을 작품으로 가리거나, 미화하거나, 과장한다. 왜 음험한 모습이냐고? 비록 작품의 창조자이지만 결국 인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음험하니까. 암튼 작가는 작품을 통해 자신을 꾸미는 일을 즐긴다는 것이 한 독자의 생각이다. 그런데 종종 그들이 꾸며낸 것들만 보고 작가에게 빠지기도 한다.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을 존경하거나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필경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나는 마셜 프랜스의 어떤 점에 이끌렸는가? 바로 그의 상상력이었다. 하나하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가며, 나를 조용히 사로잡고, 겁에 질리게 하고, 눈을 휘둥그레 뜨게 하거나 미심쩍어하게 만들고, 눈을 가리거나 반대로 기쁨에 박수를 치게 하는, 능력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가끔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작품에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 그는 내 상담 치료사이기도, 단짝 친구이기도, 고백을 받아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어떻게 나를 웃게 만드는지도, 어떻게 나를 겁주는지도, 어떻게 적절하게 이야기를 끝내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내 입맛을 정확하게 아는 요리사였다.(p.207)  
   

마치 ‘내게 100%의 이상형인 연인’을 만난 사람의 행복한 비명과 같다. 그렇다. 한 작가가 있고, 그가 쓴 작품에 내게 100% 들어맞는 작가를 발견했다는 것 무지무지 행복한 일 것이다. 평생 이런 작가를 한 두 명이라도 찾아낸 독자는 그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웃음의 나라>의 주인공 토머스는 운 좋은 독자다. 마셜 프랜스라는 동화작가가 100%였으니까. 그를 통해 평생 즐거움과 위로를 얻었던 토마스. 결국 만사를 때려치우고 자신의 영웅이자 친구이며, 베일에 가린 괴짜 동화작가 마셜 프랜스의 전기를 쓰기로 마음먹는다. <웃음의 나라>는 토마스가 마셜 프랜스의 전기를 쓰기로 결심하고, 마셜 프랜스가 살던 시골 마을에 방문하여, 마침내 전기를 쓰는 와중에 벌어진 일들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을 꽤 오래 붙잡고 있었다. 미묘한 분위기와 어투를 즐기지 못하고 초반부에서 머뭇거리던 차, 작정하고 첫 페이지를 되돌아가 내달렸더니 뒤늦게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마도 작품의 무게와 분위기, 캐릭터를 잘 못 파악한 독자의 둔감함 때문이리라.
가속이 붙자, <웃음의 나라>는 무척 재미있었다. 최근 이 만큼 재미있던 소설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조나선 캐롤은 유머가 넘치고, 인물의 개성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아는 작가다. 게다가, 게다가, 게다가 이야기를 끌어갈 줄 안다!!
<웃음의 나라>를 읽는 동안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도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 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네 페이지짜리 에필로그 빼놓고는 말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 소설은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다.(이런 비슷한 설정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라고 하면, 소설과 영화를 합하면 49편은 예로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책읽기를 했다는 것은, 독자가 아둔하거나, 작가가 명민하거나... 뭐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웃음의 나라>는 책과 작가, 독자에 대한 질펀한 환타지다. 동시에 태평양 건너 미국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로도 읽힌다. 단출한 역사를 등지고 살아가는 미국 작가들은 종종 현실 속에 환타지를 접목시켜 신화의 공간을 만들곤 하는데, 그 속에서 역사성을 획득하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오즈의 마법사>처럼 말이다.(텍사스 벌판과 토이네도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 우리에겐 그 얼마나 생소한가!) 유대계 출신의 이민자 동화작가 마셜 프랜스가 게일런에 정착하고,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을 두고 이렇게 읽는 것은 오버일까?
암튼 <웃음의 나라>는 가슴에 푹 박히는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는 작품이다. 책읽기의 초반부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맨 것은 앞서 이야기한 너무나 미국적인 무언가에 쉽게 이입할 수 없었기에 그러지 않았나 싶다.(실제로 90년대 미국에서 맹활약했던, 몹시 미국적인 밴드 토드 더 웻 스프라켓(Todd the Wet Sprocket)의 음악을 반복해서 들으며 <웃음의 나라>를 읽었다. 참 잘 어울리더라.)

작품 뒤에 숨은 작가의 음험함을 이야기하다가, 엉뚱하게 <웃음의 나라>는 미국적인 소설 어쩌구하는 엉뚱한 이야기로 마무리가 되었다. 앞서 작가가 음험하다고 느낀 것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작가의 사진은 물론 프로필도 실리지 않은 것 때문일 것이다.(이봐 비겁하게 숨어있지 말고 나와!!) 이것이 오히려 독자의 호기심과 환타지를 자극하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물론 작품을 좋을 때의 이야기지만. 작가의 의도가 신비주의 노선 때문인지, 진정 작품과 독자와 순결한 만남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지는 알 수 없지만, <벌집에 키스하기>가 궁금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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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산책 2010-08-13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데빌님!!
완전 리뷰에 폭 빠져 읽었네요 ㅎㅎ
근데 리뷰가 넘 좋으니 그 흡족감에 더이상 책에 대해선 관심이 사라진다는..ㅋ
이 책도 첨 접하는데, 아주 재미난 발상 같네요^^

lazydevil 2010-08-13 12:18   좋아요 0 | URL
이런.. 이런.. 과찬의 말씀을~~ㅎㅎ
암튼 이 책 재미있어요, 시간 나시면 읽어보세요^^

곤조 2010-08-16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벌집에 키스하기 저 있습니다. 빌려드릴게요. 먹지만 마세요.

lazydevil 2010-08-17 10:17   좋아요 0 | URL
ㅎㅎ 감사합니다. 사진 찍으세요.
 

원래 우리말로 쓴 소설을 읽고 싶어 우리소설을 집어 들었다. 즐겁다, 우리글을 읽는 것이. 편안하다, 내가 속한 곳의 이야기가. 그럼 재미는...? 암튼 최근에 읽은 세 편의 우리소설이다. 공교롭게 모두 여성작가의 작품이다. 


난감하다. 내가 이상한 것일까? 내가 틀리지 않다면 비평가들은 왜 침묵하는가?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난감한 소설이다. 거북한 번역투 문장 때문에 난감하고, 공감할 수 없는 인물 때문에 난감하고, 품격 있는 청춘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의도 때문에 난감하고, 전작 <엄마를 부탁해>의 신뢰가 무너져 난감하다.
퇴고의 문제인가? 반복되는 번역투 문장은 번번이 눈에 거슬린다. 이 책의 주인공은 ‘생각을 하거나’, ‘기억을 하거나,’ ‘상상을 하지’ 않는다. 늘 ‘생각이 되고’, ‘기억이 된다’, ‘상상이 된다’고 말한다. ‘한 대의 버스’같은 표현은 어떠한가? 정현종 시의 제목 ‘한 꽃 송이’처럼 시적 의도가 있는 영어식 표현인가?
꾸미는 말이 꾸밈을 받는 말과 너무 멀리 떨어져 두 번 세 번 읽게 하는 문장도 있고, ‘세상에 태어나 첫 책을 훔치다’같은 알 수 없는 문장도 등장한다.(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훔친 책이다‘라는 뜻. 쿨럭~~) 이런 어색한 문장을 방기하는 작가에게 비평가들은 문체를 운운하더라.
더욱 답답한 건 공감할 수 없는 캐릭터다.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고 있는 캐릭터,라고 작가는 생각할 지 모르지만 공감율 마이너스 백프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시대의 아픔 때문에 상처입은 청춘이기는커녕 상처입고 싶은 공주님같다. 그들이 말하고, 입고, 생각하고, 고양이를 쓰다듬는 태도에서 눈곱만치도 아픔을 느낄 수 없었다. 글쓴이는 진정 시대의 아픔 때문에 몸서리를 쳐본 기억일 있을까?라는 의구심마저 든다. 그런 경험이 있다면,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되지’ 않는 걸까?
지난해 <엄마를 부탁해>는 오랜만에 읽은 우리소설이었다. 좋은 소설이었고, 크게 공감했다. 베스트셀러에 대해 가지고 있는 비뚤어진 편견조차 불식시키며 고개를 끄덕이게 했던 작품이다. 그 작가가 이 작가란다. 정말인가? 결국 신경숙은 신경숙인가?


출간된 지 15년만에 <새의 노래>를 읽었다. 은희경이 명성이 하늘을 찌를 시기부터 우리소설과 멀어진 것 같다. 은희경의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것이 없으니 은희경의 책임은 아니다. 뒤늦게 은희경의 소설을 집어든 것은, 신경숙 소설이 준 충격을 잊고자 함이다. <어디선가...>의 마지막 백페이지를 결국 읽어내지 못하고 책장을 덮은 나는 본능적으로 <새의 노래>를 펼쳐들었다. 반대급부를 찾는 본능적인 선택이었고, 선택은 성공적이었다.
<어디선가...>에 공감할 수 없는 ‘공주’가 등장한다면, <새의 노래>에는 12살 여자가 등장한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에 생>에 등장하는 모모같은 애늙은이다.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그러나 아직 어린 아이이기에 성장통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아이다. 사랑스럽다. 추천인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국민소설’이란다. 그런데 이제 읽다니.(추천해주어 고맙소! 나의 견고한 편견을 깨뜨리는데 당신은 종종 큰 역할을 한다우.)
암튼 1994년에 출간된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참으로 낯설었다. 옛스러운 문장말이다. 이것은 요즘 젊은 작가들과는 확실히 다른 문장이었는데, 거북함은 없었으나 낯설었기에 입에 착착 감기지 않았다. 그래서 천천히 읽었다. 문장을 음미했다기보다 낯선 어감과 리듬에 익숙해지기 위해 재촉하지 않았다. 덕분에 작품 말미에는 주인공 진희의 위악적인 어투가 오히려 곰살맞게 다가왔다. 작가의 의도인가? 16년 동안 우리소설의 문장이 변한 것인가? 이후 출간된 은희경의 다른 작품을 보거나, 같은 세대 작가의 같은 시기 작품을 찾아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게을러서...


첫 단편집 <냉장고>는 괜찮았으며(좋은 의미로), 두 번째 단편집 <까마귀가 쓴 글>은 힘겨웠다.(나쁜 의미로) 첫 장편 <러브 차일드>는 힘겨웠지만 괜찮았다.(좋은 의미로)
뜻밖에도 <러브 차일드>는 SF소설이다. 그렇다고 본격 SF는 아니다. SF적인 세계관 위에 펼쳐진 참혹하고 불우한 시대극이다. 그 시대는 물론 저 먼(혹은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참혹하다. 읽기 힘들다.
힘겨운 책읽기를 멈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작가의 태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한자 한자 꾸욱꾸욱 눌러 쓴 문장들은 독자로 하여금 참혹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데 그 이미지는 황폐하기 그지없는 것들이니 어찌 힘겹지 않을 수 있을까?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소설이다. 하지만 읽는 동안 작품과 문장을 대하는 작가의 진실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김유진의 <늑대의 문장>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것을 느꼈다.)
물론 순전히 참혹한 이미지 때문에 책읽기가 힘겨워지는 것만은 아니다. 더 큰 요인은 이미지가 이야기를 앞선다는 점이다. 참혹함과 황폐함을 낯선 이미지로만 직조하기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와 함께 했으면 어땠을까? 그 SF적인 상상력이 분명히 현실에 발을 담그고 있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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