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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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원래 구질구질합니다. 아무리 파란만장한 삶이라도 아무런 특수효과 없이 그냥 노출하면 구질구질함을 피할 길 없습니다. 밥 먹고, 트림하고, 방귀 끼고, 똥 싸고, 오줌 싸고, 섹스하고, 애 낳고, 하품하고, 잠자고, 뒷말하고, 욕하고....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아무리 3D 입체 영상으로 처발라놔도 구질구질함을 벗어나기 힘듭니다. 더구나 실패한 낙오자의 삶은 어떨까요? <고령화 가족>은 구질구질한 삶에 관한 기록입니다.

우연히 <하이 피델리티>와 <고령화 가족>을 연이어 읽었습니다. 두 작품은 정말 많이 닮아있습니다. 주인공들이 나이를 처먹을 대로 처먹은 낙오자들입니다. 닉 혼비의 로브는 서른 다섯이고, 천명관의 나는 오십대 초반이지만 하는 짓은 똑같습니다. 게다가 무능력한 주제에(그러니까 낙오자겠죠?) 이기적입니다. 영국이나 우리나라나 하는 짓이나 생각하는 건 정말 같아요. 그리고 ‘미스터 루저’!, 그러니까 남자라는 것!!(세상의 모든 남자들이여, 각성하시라!!!)도 같습니다.

다른 게 있다면 한국형 낙오자, 더 정확히 말하면 천명관형 루저가 더 구질구질하다는 겁니다. 찌질한(정확한 표기법은 ‘지질한’이죠) 것은 똑같은데 왜? 도대체 왜 국산 루저의 이야기가 더 구질구질하고, 궁상맞고, 한심해 보일까요?

소설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그간 만난 웨스턴 루저들은 참으로 당당합니다. 국산이나 서양산이나 뻔뻔스러운 건 매한가지인데, 그놈들은 어쩐지 당당해요. 반면 우리 소설, 영화, 드라마에 나오는 한국형 낙오자들에게는 당당함이 없어요. 구박과 눈칫밥으로 단련된 뻔뻔함만 있을 뿐이죠.

<고령화 가족>은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작가의 글재주가 힘을 발휘하죠. 종종 등장하는 농담도 재미있고요. 그런데 별로 유쾌하지 않습니다. 씁쓸해요. 주눅인 든 낙오자의 모습을 보며 마냥 낄낄거릴 수만 없어요. 그들의 모습은 내가 알고 있는 누구(?)와 오버랩되기도 하고, 그들을 할퀴는 주변의 시선을 우리(?)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만 주눅이 든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작가도 마찬가지에요. 독자가 보기엔 천명관은 닉 혼비와 비교해 빠질 게 없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고령화 가족>은 <하이 피델리티>만큼 개운하지 않습니다. 읽는 내내 독자를 우물쭈물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습니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야기에 선뜻 다가서야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눈치를 보게 만듭니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의기소침함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하이 피델리티>의 뻔뻔스러운 당당함은 인물뿐만 아니라 작가의 목소리에서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재미있고 잘 읽히지만, 뭔가 심심하게 흘러가던 이야기는 후반부에 이르러 힘을 발휘합니다. 그건 주인공이 솔직해지기 시작하면서죠. 시종일관 한심한 짓만 하던 ‘미스터 루저’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발휘합니다. 동시에 솔직해집니다. 자기가 얼마나 한심한 놈이고 이기적인 놈인지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그 속죄의 방법도 후련합니다. 최악의 상황에 눈을 떠보니 자신을 돌봐줄 여인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는 결말이 어째 여전히 찌질남의 환타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감이 있지만, 괜찮습니다. 유사 이래 사람을, 특히 남자를 들어다 놨다 하는 건 사랑이니까요.

<고령화 가족>은 미스터 루저가 새로운 낙오자로 거듭나는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항상 가족을 무시하고 경멸했던 미스터 루저가 가족과 화해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둘은 아주 잘 어울립니다. 그 중심에는 배다른 형과, 씨다른 동생을 사십년간 묵묵히 키워온 엄마가 있었고요.

   
  -그 여자 불쌍한 여자야. 속 썩이지 말고 잘해줘.
-걱정 마, 새꺄. 엄마는 잘 계시니?
-엄마, 작년에 돌아가셨어.
-미안하다...... 엄마한테 미안하고...... 미연이한테도 미안하고 너한테도 미안하고.......
-그러게 씨발, 누가 그렇게 살래?
(p.284에서 대화만 추려봤습니다.)
 
   

그리고 보니 <하이 피델리티>에는 없는 <고령화 가족>만의 강력한 비기가 있었군요. 바로 엄마입니다! 대한민국의 엄마는 구원불가한 루저마저도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불가해한 힘을 가지고 있거든요.

책 말미에 실린 작가 후기는 이런 인용문으로 시작합니다.

   
  제니퍼 필즈는 마흔 한 살이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으며 그녀가 원하는 바는 바로 그런 내용을 글로 쓰는 것이다.
-존 어빙, <가아프가 본 세상>중에서
 
   

이는 <고령화 가족>의 주인공 나, 그리고 그의 형 오함마, 여동생 미연에게 고스란히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오랜만에 작품을 발표한 작가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죠. 작가의 다음 작품은 그 좋은 시절에 관한 이야기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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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산책 2010-04-02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명관 소설은 읽어본게 없어요. 세테에서 프로방스기행을 보고 젊은 작가라 생각했는데 나이가 많더군요 ㅎㅎ 그때 받은 인상은 꽤 섬세하고 부드러웠는데, 나중에 인터뷰한 글을 읽어보니 여행을 싫어한다며 약간은 시니컬한 느낌이 들었어요. 좀 있음 친구랑 만든 영화를 개봉한다던데..

저 루저 좋아해요~(또 혼내시겠다 ㅋ) 뭐 솔직히 루저 아닌 인생이 있나여? ㅎㅎ

lazydevil 2010-04-03 11:45   좋아요 0 | URL
이 작가 예전에 <북경반점>이라는 영화의 각본도 썼는데 영화를 만들었군요.
소설의 주인공도 못나가는 영화감독이에요.

뭐.. 180 안되면 루저라고 하니 저도 루접니다.^^ 찌질~~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