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6
알베르 카뮈 지음, 이기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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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스무해 전에 읽은 <이방인>에 대해 남아있는 기억. 쏟아지는 햇빛, 패륜아, 아웃사이더, 뫼르소라는 독특한 이름 정도. 그마저도 희미하다. 그래서일까? 다시 읽은 <이방인>은 무척이나 새로웠다. 옛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렴풋 알고 지내던 사람의 전혀 새로운 면을 보는 듯하다. <이방인>은 두말할 것 없는 걸작이다.

우선 이 작품은 매우 뛰어난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다. 요즘말로 ‘깨알 같은’ 상황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그것을 매우 건조하고 발 빠른 문체로 묘사한다. 특히 1부는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가령 살라마노 노인과 개의 이야기는 참으로 매력적이다. 건달이웃 레몽과의 에피소드는 또 어떠한가? 이밖에도 여러 에피소드들은 모두 따로 떼어내어 단편소설로 독립해도 꽤나 훌륭한 작품이 될 이야기들이다. <이방인>은 짧은 소설이다.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작품에 빼곡하게 들어찬 에피소드라니. 물론 2부에 접어들면, 이 삽화들은 모두 하나로 통합되어 작품의 숨은 의도를 향해 맹렬히 끓어오른다.

엉뚱하게도 <이방인>을 읽는 동안 탐정소설의 구조가 떠올랐다. 1부를 통해 주인공 뫼르소의 생활에 동참하도록 유도한 뒤, 1부 말미에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2부에서는 뫼르소의 재판과정을 방청객(혹은 배심원)의 한 사람으로 지켜보게 한다. 이는 범인의 심리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도서추리물’의 형식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2부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차례로 뫼르소를 변론할 때, 마치 탐정소설을 읽듯 앞선 페이지로 되돌아가 뫼르소의 행동 하나하나를 다시금 살펴보게 만든다.

다시 읽어봐도 뫼르소는 참으로 흥미로운 캐릭터다. 도서추리의 경향이 엿보인 탓인지 어느 순간 뫼르소가 마치 탐정소설의 주인공처럼 보였는데, 특히 극한의 냉소 캐릭터가 등장하는 챈들러의 소설이 떠올랐다. 바꿔 말하면,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에 줄창 등장하는 필립 말로우의 후예들이나, 하루키류의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뫼르소를 큰 형님으로 모실 법하다.

(찾아보니 뫼르소가 세상에 첫 선을 보인 것은 1942년, 필립 말로우는 1939년이다. 챈들러와 카뮈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쏟아지는 햇볕과 건조한 열기가 맹위를 떨치는 알제리와 L.A.는 참으로 닮은 점이 많다.)

새로 출간된 <이방인>의 제목은 ‘이인(異人)’이다. ‘이인’이라는 낯선 제목을 고집한 역자의 의도를 읽어보니, 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지만 ‘백푸로’ 동감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일백푸로 설득된 것도 아니거니와, 새이름에 대한 이물감이 크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방인’이었고, 최근까지도 ‘이방인’이었다. 개명한 친구의 새 이름이 선뜻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는 거처럼 새이름은 낯설다.

그럼에도 깔끔하고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찾아온 ‘이방인’은 반갑다. 김화영이 번역한 책세상본과 몇몇 대목을 비교해보니 옛것과 새것의 차이를 알겠다. 좋고 나쁨에 문제가 아니라 새것으로 만나는 뫼르소가 확실히 생동감있다. 뫼르소는 시대를 불문하고 유효한 캐릭터이기에 새옷을 입은 모습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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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7-12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정도로 익숙한 제목을 과감하게 바꾸다니, 대단한 도전인걸요. 저도 몇 십년 만에 다시 읽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니 출판사 측에서는 성공한 것일까요? ^^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읽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오랜만에 오신거죠? 반갑습니다.

lazydevil 2011-07-13 11:55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왔는데 깜짝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올 걸 싶네요.ㅎㅎ어렸을 때 책 좀 많이 읽을 걸 그랬습니다. 다시 읽기에 나름 즐거움이 있는데 책읽기가 얇다보니 선택의 폭이 좁아요...ㅎㅎ

쥬베이 2011-07-12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몇년만 인가요???ㅋㅋ
lazydevil님의 글은 언제봐도 멋집니다.
간만에 서재돌면서 서평 읽었는데요,
<잔학기>서평은 진짜 명품인 듯ㅋㅋㅋ 자주 오세요^^
* 문체를 '~했습니다'에서 '~했다'로 바꾸셨네요^^

lazydevil 2011-07-13 11:54   좋아요 0 | URL
쥬베이님, 요즘 알라딘 서재에 다시 오시나요??? 궁금했습니다.
<잔학기>는요... 돌이켜보면 참은 영리한 작품같아요. 좋은 작품이란 말이죠. 그래서 제 서평도 좋아 보이는 듯...
암튼 참으로 오랜만에 칭찬이란 걸 듣네요...ㅠㅜ 감사합니다^^
 
순결한 할리우드 - 악동 감독 케빈 스미스의 미국 문화 뒤집기
케빈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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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능 물질이 섞여있다는 비가 부슬부슬 내린 터라 프로야구 경기도 취소되고, 당연히 프로야구 중계는 물론 프로야구 하이라이트도 취소되어 마음 편히 뒹굴 거리며 케빈 스미스의 <순결한 할리우드>를 읽었다. 그렇다고 해야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 일을 딱히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일’이라는 생각에 미루고 또 미루는 아둔함과 불성실함을 언제나 고칠수 있을까? <순결한 할리우드>는 이런 게으르고 한심한 자책감에 사로잡혔을 때 읽기에 적당한 책이다.

할리우드의 영화감독 케빈 스미스가 쓴 이 책은 유익하지도 유해하지도 않다. 어쩌면 유익한 쪽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적당히 재미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유익하지도 유해하지도 않지만 그럭저럭 재미있는 농담들로 가득 한 케빈 스미스의 영화와 닮아있다.(개인적으로 <체이싱 아미>를 꽤 재미있게 보았다.)

‘악동 감독 케빈 스미스의 미국 문화 뒤집기’라는 부제가 달려있는 이 책의 원제는 'Silent Bob Speaks'다. 사일런트 밥은 케빈 스미스의 영화에 늘 등장하는 캐릭터로 케빈 스미스가 직접 연기한다. 이름처럼 대사 없이 스크린만 채우는 캐릭터다.(아니 한두 마디 대사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감독 케빈 스미스는 원래 타고난 수다쟁이이고, 이 책은 감독의 할리우드 생활에 대한 시시껄렁한 농담과 뒷이야기를 모아놓은 신변잡기 수다 모음집이다.

국내 출간 제목인 ‘순결한 할리우드’는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게다가 케빈 스미스를 악동 감독으로 추켜세우는(깎아내리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영화를 보나 이 책을 보나 케빈 스미스는 악동하고는 3만 광년쯤 떨어진 인물인데 말이다. 오타쿠적인 농담과 들어줄 만한 음담패설, 상스러운 비속어로 관객들을 웃겨준 (한때) 비주류 영화감독일 뿐이다. 그의 유머는 썰렁하기는 해도 밉살스럽지 않고, 저속하기는 해도 혐오스럽지는 않다. 그냥 수다쟁이일 뿐이다.

게다가 이 책에서 케빈 스미스는 미국문화를 뒤집어 보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 할리우드 생활과 자기 성생활과 자기 친구와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책과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를 지껄일 뿐이다. ‘케빈 스미스는 이 쓰레기 글로 돈을 받고 있다.’(p.41) 심지어 책으로 출간하고, 게다가 대한민국에 번역되어 출간되기도 한다. ‘케빈 스미스는 아주아주 운이 좋은 개자식이다.’(p.91)

하지만 모두 용서할 수 있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남는 게 없으면 어떠랴? 적어도 무해한 재미가 있는 걸. 게다가 오늘은 방사능 물질이 섞인 비가 내리는 어두컴컴한 2011년 4월의 봄날이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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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11-07-13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게으르고 한심한 자책감에 사로잡혔을 때 읽기에 적당한 책" 이 부분!
지금 제가 꼭 읽어야 하는 책이네요ㅋㅋㅋ
비 내리는 날, 아무 걱정없이 책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렸을때는 저게 가능했는데, 요즘은 안되더라고요 휴...

lazydevil 2011-07-13 22:43   좋아요 0 | URL
그렇죠. 어렸을 땐 가능했죠...ㅜㅠ
그래도 나이가 사람을 현명하게 만들잖아요, 그것이 아주 조금일지라도요^^;
구질구질한 장마철... 팥빙수라도 한그릇 드시고 기운내세요~~~^^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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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과 함께 우리의 1950년대를 훑어보며 발견한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는 한국의 기독교에 관한 기록들이다.

한국 개신교에 대해 염증을 느끼는 이유는 노골적인 보수성, 만연된 물주주의, 기복신앙에 탈피하지 못하는 종교의식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의 지독한 보수성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태생적 특징으로만은 설명하기 힘들다. 도대체 한국의 개신교는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강준만은 이런 궁금증의 실마리를 강인철, 김흥수, 함석헌의 글을 토대로 짚어보고 있다.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인물들의 저작을 직접 읽어보야겠지만 핵심은 대략 이러하다.

우선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기독교 장로인 이승만은 제헌국회도 식순에 없는 기도로 시작하고,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할 정도였다. 호불호가 불명했던 이승만은 기독교에 엄청난 특혜를 주었다.(반면 다른 종교를 노골적인 박해했다.) 해방 후 한국 기독교는 이승만이 집권한 15년간 정권의 축복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이승만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6.25 전쟁 때문이다. 이승만은 반공과 북진통일론을 내세우며 여론몰이를 했고, 이에 반하는 세력들은 모두 ‘빨갱이’로 몰아 처단했다. 당연히 이승만을 적극 지지하던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열렬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게다가 6.25전쟁 직후 남한에는 북한에서 월남한 기독교인들이 수가 적지 않았다. 빨갱이 색출에 혈안이 되어있던 남한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들은 북한에서 박해받은 기독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했다. 또한 이북 출신이라는 ‘약점’을 지우기 위해 누구보다 격렬한 반공주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사탄’, ‘마귀’로 표현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공고히 했던 것이다.

한국 개신교의 교세 확장은 6.25 이후 급속하게 이뤄진다. 가난에 굶주린 한국인들에게 “교회는 미국의 은혜와 풍요가 배급되는 주요 채널이었다. 그래서 교회에서 무료로 주는 미국 밀가루를 얻기 위해 교회에 다니는 이른바 ’밀가루 신자‘들도 많이 나오게 되었다.”(p.110)
이 당시 한국 개신교회는 미국의 선교 단체로부터 막대한 물자 및 현금을 원조를 받았다. 이는 한국 개신교의 교세 확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한국 개신교의 친미주의를 증폭시키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렇게 친미주의와 물질주의, 반공주의가 한국의 개신교를 물들였다.

그럼 기복(祈福)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전쟁 후 몸과 마음이 황폐해진 한국인들에게 교회는 엄청난 풍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미국에 대한 동경과 숭배, 물질에 대한 한(恨)의 종교적 표현이 바로 기복신앙”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기복신앙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마저 갖게 되었다.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한 한국의 기복신앙은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했던 한국의 역사적 상황이 낳은 산물”라고 설명한다.

당시 함석헌의 비판은 신랄하고 통렬한 한편 섬뜩하게 와 닿는다. 당시 개신교에 만연한 기복, 물질주의,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 정치권력과의 유착 등의 모습이 지금과 너무나 닮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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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산책 2011-03-24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즈라서 내용이 아주 자세하겠어요.
관심이 생기네요, 한국 개신교에 대한 내용도 흥미롭구여^^

lazydevil 2011-03-24 22:49   좋아요 0 | URL
그해마다 110여페이지 조금 넘는 분량으로 요약하고 있어요.
조금 숨가쁘게 달리는 느낌이지만 연대기별로 일별하는 데 도움이 되더군요.
무엇보다 재미있네요, 정신은 없지만요^^
 
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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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숨그네>는 퍽이나 힘겨운 작품이다. 300여 페이지가 조금 넘는 소설을 두 달 넘게 읽었으니 말이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독자에게 이 작품은 읽기에 벅차고, 공감하기에 버겁고, 쉬 책장을 넘기기에 부담스럽다. 깊고 아름다운 문장, 참혹한 역사의 질곡, 외면하기 힘든 삶의 아픔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도중에 책장을 덮지 못하고 주인공의 수용소 생활을 끝까지 함께 한 것 역시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 작품은 참혹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외면하기 힘들 정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숨그네>에서 혹독한 고통과 아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놀라운 문장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령 ‘10월 말에 벌써 얼음못이 박힌 진눈깨비가 내렸다.’(p.77)라는 문장은 어떠한가. 그야말로 몸과 마음을 파고드는 혹독한 추위와 고통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가슴 아픈 문장이다.

   
  빵의 덫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 배고픈 천사가 놓은 가장 고약한 덫은 꿋꿋함이다. 배도 고프고 빵도 있지만 먹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단단히 얼어붙은 땅보다 혹독해지는 것이다. 배고픈 천사는 아침마다 말한다. 저녁을 생각해.(p.134)
 
   

굶주림을 배고픈 천사와 덫에 비유하는 작가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먹고, 마시고, 편히 쉴 곳이 있다는 것이 한없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쓰레기통이 쓸만한 것들, 먹을 수 있는 것들로 넘쳐나는 우리의 삶이 문득 섬뜩하게 느껴진다.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풍요로움 속에도 늘 허기를 느끼는 우리는, 헤르타 뮐러 식으로 말하면 안락한 악마가 선사한 덫에 걸린 것일까?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흥미로운 것 하나.
2차 세계대전 당시 우크라이나 강제수용소에 전쟁포로로 끌려간 주인공 레오는 꿈을 꾼다.

   
  사흘 밤 연달아 같은 꿈을 꾸었다. 나는 하얀 돼지를 타고 구름 속을 달려 집으로 갔다. 그런데 공중에서 내려다보니 이번에는 땅 모양이 달랐다. 가장자리에 바다도 없었다. 한가운데 산도 없고 카르파티아 산맥도 없었다. 납작한 땅에 도시도 마을도 없었다. 벌써 노란 가을 색으로 익은 야생귀리만 지천이었다.
누가 땅을 바꿔놓았지, 내가 물었다.
배고픈 천사가 하늘에서 나를 보고 말했다. 미국.
지벤뷔르겐은 어디 있고, 내가 물었다.
그가 말했다. 미국에.
사람들은 어디 있어, 내가 물었다.
배고픈 천사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p.212)
 
   

위에 인용한 내용은 놀랍게도 우리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전쟁세대가 겪은 그것과 너무나 닮아있다. 예를 들어 6.25의 비극을 노래한 ‘꿈에 본 내고향’이라는 노래와 얼마나 닮았는가?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 리/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하나는 노벨상 수상작가의 글이고, 하나는 흘러간 유행가 가사다. 하나는 2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문학으로 표현했고, 다른 하나는 6.25의 아픔을 구성진 유행가자락으로 노래한다. 하지만 전쟁의 아픔을 체험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매한가지다. 6.25 전쟁이 끝난 후 피난민을 맞이한 폐허가 된 고향의 모습은 루마니아 소년이 꿈에 본 고향과 다를 바 없었을 것. 그리고 폐허가 된 고향땅에는 구원자(혹은 파괴자)였던 미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루마니아 소년이 겪은 전쟁도, 우리의 전쟁세대가 겪은 6.25도 실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닌 ‘그들’의 전쟁이었던 거다.

** 지난 해 여름이었던가? 영등포의 한 서점에서 우연히 헤르타 뮐러는 만났다. 독자 사인회가 있었던 것. 재미있었던 것은 실제로 본 작가의 모습이 책 홍보물에 담긴 저자 사진과 똑같았다는 거다. 무슨 말인고 하니 머리 모양은 물론, 머리띠, 안경, 입은 옷까지 사진 속 모습과 너무나 똑같아 놀랐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작가는 늘 같은 옷차림과 같은 머리 모양만 고집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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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산책 2011-03-21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메~ 헤르타 뮐러를 직접 뵈셨군여~
넘 반가워 한걸음에 달려온 뭉클이옵나이다.
데빌님의 컴백을 무한 환영하며..ㅋ

lazydevil 2011-03-22 23:02   좋아요 0 | URL
환영까지 해주시니 영광이여요~
틈틈이 서재관리 좀 해야겠군요^^

곤조 2011-03-31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정말 오랜만입니다. 반가워요~

lazydevil 2011-04-08 00:54   좋아요 0 | URL
네 오랜만에 몸과 마음의 스트레칭을 해보려구요.^^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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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신상옥 감독의 1959년작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을 보았다. 김진규가 열연한 이승만은 그야말로 민족과 나라를 생각하는 순수한 영웅이다.(개인적으로 김진규라는 배우를 좋아한다!) 기울어가는 국운을 통탄하던 청년 이승만은 민족과 역사를 위해 활약한다.
이 영화는 이승만의 4선을 위해 고심하던 정치깡패 임화수가 제작한 작품이다. 그는 주목받던 젊은 감독인 신상옥에 연출을 의뢰함과 동시에 상상을 초월하는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거대한 세트, 화려한 의상, 대규모 엑스트라 등 엄청난 물량 투여의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이 작품은 꽤 잘 만든 시대극이지만 크게 감동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단조로운 연대기식 구성 탓에 드라마는 밋밋했고, 이승만을 우상화하기 위해 순진할 정도로 골몰한 결과 ‘인간’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은 재미있었다. 청년 이승만을 열연한 김진규의 연기도 좋았다. 막 물이 오르기 직전 신상옥의 연출 솜씨를 감상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정권의 강압에 못이겨 떠밀리듯 출연한 당대 스타들의 한자리에 만나는 것은 꽤나 즐거운 경험이었다. 최은희, 황정순, 이민, 남궁원, 김승호, 허장강, 독고성, 엄앵란, 이빈화, 최무룡, 이예춘, 김지미, 도금봉, 황해... 정말이지 이렇게 화려한 출연진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었던 한국영화가 있었던가?
솔직히 이승만을 민족의 영웅으로 만든 미화한 것은 전혀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묘하게도 노골적인 이 영화의 불순한 의도는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않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가공의 민족 영웅’을 연기한 김진규만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김진규는 얼마나 매력적인 배우인가!!!) 영화 속 청년 이승만은 실존 인물과는 전혀 오버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편한 없이 즐길 수 있었다.
실제로 이 영화는 “당시 선거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 것 같다”고 신상옥은 회고했다. 이 영화가 개봉된 이듬해 1960년에는 그 유명한 3.15 부정선거가 있었고, 한 달 후 4.19가 있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의 주인공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다. 영화 속에서 고종의 배려 아래 조선을 탈출해 미국으로 떠났던 청년 이승만은 이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한국전쟁을 치른다.
강준만은 여러 사료를 바탕으로 50,51,52년을 개괄하며, 이승만과 한국전쟁의 발발과 전개 과정을 다루고 있다. 잘 알려진 사건과 숨겨진 사실을 정리하며 50년대 초 3년간을 추적하는 발길은 무겁기만 하다.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초대 대통령이자 부패한 정치인이었던 이승만이 저지른 패악은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그가 행한 것들은 평가하기가 두려울 정도로 잔인하고 끔찍한 결과로 역사를 더럽혔다. 도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이해가 불가한 그의 판단 때문에 짓밟힌 수많은 희생자를 생각하면, 나의 부모님이 살아남았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다.
50년대 초 삼년간은 참사(慘事)라는 말로 밖에 요약할 수 없다. 더욱 끔찍한 것은 그 상처가 아직도 청산되지 않고 대물림하고 있다는 것.

학교 교과서 속의 한국전쟁은, 마치 남의 나라 일처럼 담담하게 쓰인 교과서 속 한국전쟁은 영화 속 ‘청년 이승만’처럼 한없이 쿨하기만 하다. 지나간 상처는 담담하게 묻어두는 것이 현명하다고 역설하는 것인가? 50년전 참혹한 현실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았던 관객들은 스크린 속에 그려진, 그렇게 쿨하기만 한 청년 이승만을 어떻게 보았을까? 슬프게도 영화는 현실보다 늘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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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2011-03-17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랜만의 리뷰가 너무 반가워서 자취를 남깁니다.
팬이에요^^

lazydevil 2011-03-17 20:19   좋아요 0 | URL
지나가다님(???), 반가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반갑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