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주식회사
잭 런던 지음, 한원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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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뉴욕, 죽어 마땅한 악인을 법의 테두리 밖에서 처단하는 일을 하는 암살국. 어느 날 암살국의 수장인 이반 드라고밀로프는 그 자신을 처단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의뢰자는 암살국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백만장자 사회주의자청년 윈터 홀. 드라고밀로프와 홀은 불꽃 튀는 논쟁을 펼치고, 결국 도덕광 드라고밀로프는 암살국 해체뿐만 아니라 그 수장인 자기 자신 또한 제거되어야 옳다는 결론에 이른다. 드라고밀로프는 조직원들에게 보스인 자신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하달한 뒤 유유히 모습을 감추고, 이상주의자이자 원칙주의자이며 지성과 체력을 겸비한 조직원들이 그의 뒤를 쫓기 시작하는데... 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난 처형자지 살인자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조직에서 정당한 이유 없이 제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전부 사회를 좀먹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었어요.” (p107)

 

출판사의 소개글과 위의 인용문만 보면 그렉 허위츠의 살인 위원회와 비슷하게 특정집단에 의한 사적 제재를 다룬 전형적인 액션 스릴러로 보이지만, ‘암살주식회사는 암살자들의 캐릭터도, 그들이 품은 신념도, 또 그들이 속한 조직의 정체성도 워낙 특이해서 그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독특한 서사를 선보입니다.

 

러시아 출신의 무정부주의자이자 기업가인 이반 드라고밀로프가 11년 전인 1900년에 설립한 암살국은 미국 곳곳에 지부를 둔 채 그동안 사회를 좀먹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을 처단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는 돈이나 정의감이 아니라 광신에 가까운 윤리의식과 도덕감입니다. 모든 살인 청부를 수용하는 게 아니라 그 처형은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경우에 한해 행동에 나섭니다. 그리고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한 의뢰는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철회되지 않습니다.

지성을 겸비한 S급 킬러라는 홍보 카피처럼 암살국 소속 암살자들은 그저 무기를 잘 다루고 완력만 강한 일반적인 암살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물들입니다. 교수, 학자, 편집자 등 말 그대로 지성을 갖춘 그들은 드라고밀로프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도덕광들이자 행동하는 무정부주의자이며 미친 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신념과 맹약은 그 누구도 균열 하나 낼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고 탄탄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이은 의문사에 의심을 품은 백만장자 사회주의자윈터 홀이 암살국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분투하던 중 우연한 계기를 통해 드라고밀로프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면전에서 당신을 암살해달라.”라는 충격적인 의뢰를 합니다. 암살국의 정당성에 관한 긴 논쟁은 홀의 승리로 끝나고, 드라고밀로프는 조직 전체에게 자기 자신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린 뒤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암살국 전체와 드라고밀로프의 피의 추격전이 시작됩니다. 애초 암살국의 해체가 목적이었던 홀은 예상치 못한 이 추격전에 당황합니다. 더구나 드라고밀로프는 암살국의 관리와 자금을 모두 홀에게 맡기고 떠난 터라 어이없게도 홀은 자신이 해체시키려던 암살국의 임시 사무장이 되고 맙니다.

 

스스로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린 보스와 그 보스를 살해하려는 암살국 전체의 피의 추격전이란 설정만 보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스타일의 흥미진진한 서사가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할 수밖에 없는데, 실은 엄청난 도덕광들이자 행동하는 무정부주의자이며 미친 철학자들이 벌이는 추격전은 한 손에는 철학, 한 손에는 권총이라는 홍보 카피대로 전쟁과 논쟁을 반복하는 특이한 양상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피와 살이 튀는 가운데 도덕과 공의에 관한 철학적 논쟁이 벌어지고, 서로를 죽여야 하는 처지임에도 드라고밀로프와 암살자들은 때로 함께 저녁을 나누며 자신들의 공통된 신념을 찬양하고 호쾌한 웃음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스릴러라고 할까요?

 

하지만 이 독특함은 독자에 따라 꽤 크게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입니다. 피의 추격전은 무척이나 리얼하지만 그 와중에 벌어지는 철학적인 논쟁은 다소 난해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스릴러의 외피를 쓴 도덕과 공의에 관한 철학서처럼 읽혔는데, 워낙 그 방면으로 취약하다 보니 암살자들의 논쟁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과연 이 독특함이 다른 독자들에겐 어떻게 읽혔을지 무척 궁금한데, 인터넷서점이나 블로그에 이 작품에 관한 서평이 올라오면 꼼꼼히 찾아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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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장 (출간 40주년 기념 특별판)
윤흥길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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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리(현재 전북 익산시 일부) 외곽의 이곡리. 벼락졸부인 최사장은 저수지 사용권을 따낸 뒤 그 관리를 동네건달 임종술에게 맡깁니다. 애초 일이란 걸 할 마음이 없던 임종술이었지만 완장을 차게 해준다는 말에 솔깃해선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스스로 감독이라고 적힌 완장을 만들어 찬 임종술은 그날 이후 저수지 관리는 말할 것도 없고 동네 안팎에서 완장의 위용을 거들먹거리며 유세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어느 새 완장의 권력에 푹 빠져든 임종술은 저수지가 자신의 것이라도 된 양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기 시작하고, 가뭄으로 인해 저수지의 물을 빼기로 한 마을의 결정조차 거부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완장의 위용은 균열을 일으키며 파국을 향하고 있었지만 임종술의 욕망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책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그 제목만은 한두 번쯤 들어본 적 있는 윤흥길의 완장1983년 첫 출간된 이후 5판인 출간 40주년 기념 특별판으로 다시금 독자를 찾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언젠가는 꼭 한 번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던 작품인데, 뒤늦게나마 40주년 특별판으로 읽게 돼서 마치 오랫동안 밀린 숙제를 마친 듯한 개운함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단 두 글자의 제목이지만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완장은 그 자체로 강렬한 이미지를 품은 단어입니다. 공포와 굴복을 강요하는 가공할 폭력성을 상징하기도 하고 완장이라도 찼냐?”라는 흔한 비아냥처럼 한줌도 안 되는 권력에 대한 냉소를 은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 차보고 싶은 욕망을 누구에게나 불러일으키는 요망한 물건이기도 합니다.

건달에 한량인 임종술은 잠시지만 서울에서 험난한 생활을 하는 동안 그 완장의 힘에 수차례 짓눌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쥐꼬리만한 월급의 저수지 관리인이라는 제안에 격분하다가도 완장이란 말을 듣는 순간 앞으로 자신이 거머쥐게 될 권력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자비를 들여 만든 완장을 찬 그 순간부터 임종술의 세상은 그 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는 신세계로 급변했고, 하루하루 커져가는 권력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며 도취하는 것은 물론 광대한 저수지가 마치 자기 소유의 땅이라도 되는 양 열광하게 된 것입니다.

 

완장의 진짜 이야기는 임종술의 권력이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는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본분을 망각한 탐욕, 스스로 초래한 위기, 빼앗기지 않으려는 발버둥,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선택한 위험천만한 정면 돌파, 그리고 예정된 파국에 이르기까지 임종술의 짧은 연대기는 허망한 권력을 탐하다가 몰락해간 유명한 인물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완장의 진짜 미덕은 임종술의 비극이라는 줄거리 자체보다 그 과정을 그려낸 풍자와 해학의 서사에 있습니다. “권력을 희화화하고, 희화화된 권력을 취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주인공을 내세워 권력을 더욱 풍자하는 격이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완장은 정색하고 주제를 강요하는 고발물이 아니라 과거 종이신문의 4단 만화처럼 독자로 하여금 폭소와 냉소를 번갈아 만끽하게 하는 풍자극이자 해학극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이 풍자와 해학은 훨씬 더 예리하고 날카로운 비판의 칼을 지니고 있어서 작가가 임종술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주제를 좀더 생생하게 맛볼 수 있게 해줍니다.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아 마구 꼬집고 할퀴고 옆구리와 발바닥을 간질임으로써 우스꽝스런 꼬락서니로 짓뭉개놓았노라고 생각했을 때의 그 쾌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3판 작가의 말’)

 

주인공 임종술은 악당이 아닙니다. 물론 평범한 인물도 아니긴 하지만 완장과 권력을 향한 그의 욕망은 누구라도 품을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고 손에 넣은 것들을 지키려는 발버둥 역시 자연스러운 대응일 뿐입니다. 누구도 그의 욕망과 발버둥을 비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완장을 채워주겠다고 했을 때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바꿔 말하면 누구라도 임종술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작가가 완장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 역시 임종술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당신도 언제든 완장을 찰 기회가 온다면 임종술이 될 수 있다.”가 아닐까요?

 

얼마 후면 국회의원 선거가 있습니다. 코미디에 가깝지만 정치인들이 상대방을 비난할 때 자주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가 완장입니다. 완장 같은 거엔 관심도 욕심도 없다는 뻔한 거짓말을 하면서도 정작 눈에 보이지 않는 완장을 찬 채 권력을 누리고 탐하는 게 자신들이라는 걸 망각한 듯 말입니다. 문득 그들이 윤흥길의 완장을 읽는다면 어떤 독후감이나 서평을 내놓을지 궁금해집니다. 대부분 나는 임종술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겠지만, 적어도 활자로 인쇄된, 그래서 안 보려야 안 볼 수 없는 당연한 교훈만큼은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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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나기라 유 지음, 오민혜 옮김 / 직선과곡선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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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5층 맨션 옥상에 절연의 신을 모셔놓은 신사와 정갈하게 꾸며진 정원이 있습니다. 프리랜서 번역가이자 신사의 신관인 구니미 도리는 이혼한 아내가 재혼한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모네라는 10살 소녀와 5년째 함께 살고 있습니다. 아내와 재혼남 모두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동식 노천 바를 운영하며 맨션에 살고 있는 이노우에 로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고 사는 게이입니다. 그리고 22년 전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을 사고로 잃고 여전히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39살의 다카다 모모코는 맨션에 살진 않지만 오래 전부터 마음의 안식처로 여겨온 옥상의 절연신사를 드나들며 도리, , 모네와 특별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2022년에 출간됐지만 이런저런 바쁜 일로 뒤늦게 읽게 된 나기라 유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19BL소설을 제외하고 한국에 출간된 그녀의 작품들(‘유랑의 달’,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을 인상 깊게 읽은 덕분에 늘 신작 소식이 기다려지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게 됐는데,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이야기라 좀더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맨션 옥상에 신사가 있다는 설정도 재미있지만 그곳에 모셔진 신이 인연을 끊어주는 절연의 신이란 점이 초반부터 눈길을 끌었습니다. 가타시로(かたしろ, 액막이나 기도를 할 때 사람 대신 죄나 부정을 짊어지는 종이인형)에 자신이 인연을 끊고 싶은 대상을 적어 부적함에 넣으면 되는데, 끊어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적는 이도 있고, ‘지는 경기’, ‘괜한 배려처럼 마음속 바람을 적는 이도 있습니다. 왠지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 같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기도 하고, 옥상에 꾸며진 정갈한 분위기의 정원은 동네사람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기도 해서 절연이라는 어감과는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지곤 합니다.

 

다섯 명의 화자가 번갈아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 그들은 제각각 사람과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멋대로 헤집고 긁어대는 타인의 시선과 해석 때문에 불편함을 느낀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습니다.

이혼한 아내가 재혼해서 낳은 아이를 키우는 홀아비도리, 5살에 부모를 잃고 피한방울 안 섞인 도리와 5년째 살고 있는 의붓자식모네, 22년 전 죽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노처녀모모코, 여자에게 동성 애인을 빼앗겨버린 게이, 우울증에 걸려 직장까지 그만둔 뒤 부모에게 빌붙어 살며 연인과도 불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백수모토이.

 

이들 중 누군가는 자신의 상처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평생 그 상처를 끌어안은 채 살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람들은 의심스러운 홀아비’, ‘남자를 거부하는 노처녀’,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게이’, ‘우울증에 걸린 백수’, ‘불쌍한 의붓자식등 제멋대로의 시선과 해석을 공공연하게 던지곤 합니다.

하지만 상처투성이 주인공들은 절연신사와 옥상 정원에서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따뜻한 교류를 나누는 가운데 세상 사람들의 시선과 해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되찾아갑니다. 그리고 신사의 부적함에 자신이 진정으로 끊어내고 싶었던 것들을 적은 가타시로를 집어넣곤 자신을 위한 절실한 기도를 올립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불쌍해 보일 수도 있지만, 편하고 좋을 때도 있어. 너도 갖고 있는 무언가 때문에 힘들면 끊어 버리는 건 어때?” (p261)

 

우릴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그 사람들 해석이고, 너랑 내가 무엇일지는 너랑 내가 결정하면 돼.” (p274)

 

따뜻하고 밝은 스타일의 전형적인 일본소설이지만 억지스런 해피엔딩으로 이끌지도, 부자연스러운 감정의 해소를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내 인생은 내 거니까 내가 알아서 설계할 거야. 그러니 누구도 함부로 끼어들지 마!”라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여운을 남깁니다. 그런 면에서 절연신사를 매개로 인연을 맺은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나름의 출구를 찾아가는 이야기이자 동시에 무엇을 지킬 것인가,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의미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밝은 분위기의 작품이지만 나기라 유 특유의 감성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어서 무척 좋았습니다. 아직 소개되지 않은 그녀의 작품들이 한국에 좀더 많이, 자주 출간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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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료시카의 밤
아쓰카와 다쓰미 지음, 이재원 옮김 / 리드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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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한국에 처음 소개돼 호평을 받은 단편집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는 읽지 못했지만 샤센도 유키와 함께 집필한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이후 두 번째로 만난 아쓰카와 다쓰미의 단편집입니다.

 

코로나 시국을 배경으로 소재도 서사도 독특하기 이를 데 없는 네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습니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본격 미스터리로 주요 무대가 헌책방인 위험한 도박-사립탐정 와카쓰키 하루미’, 한 대학이 입시 논술시험을 미스터리 지문을 읽고 범인 맞히기로 치르기로 하면서 벌어진 갖가지 소동을 그린 ‘2021년도 입시라는 제목의 추리소설‘, 연이어 상황이 바뀌고 반전이 거듭되는 양파 같은 미스터리 마트료시카의 밤‘, 그리고 한 대학 레슬러가 살해당한 살벌한 사건을 다루면서도 코믹한 전개와 캐릭터들 덕분에 웰메이드 B급 영화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던 ’6명의 격앙된 마스크맨등입니다.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마지막 장을 덮고 남은 인상은 이 작가의 천재성을 따라가기엔 내가 너무 역부족이다.”입니다. 읽는 동안 몸과 마음이 피로감을 느낄 정도로 몰입해야만 했는데, 한순간만 방심하면 미스터리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눈앞의 활자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대혼란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거꾸로 말하면 그만큼 복잡하고 현란하지만 정교하게 설계된 미스터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이 작품에서 그 내용이 소개되거나 오마주의 대상이거나 인용의 출처로 거론된 수많은 명작 미스터리의 목록은 아쓰카와 다쓰미의 해박하고 방대한 지식과 독서이력을 잘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큰 부담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뭐랄까, 살짝 짓눌린다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아무래도 본 내용과 관련 있는 텍스트들이라 더 신경 쓰면서 읽어야만 했는데, 읽어본 작품이거나 낯익은 작가가 아닌 경우에는 꽤나 난감해지곤 했습니다.

 

내용보다는 작가에 대한 비평같은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다만 이런 느낌을 받은 이유는 작품 자체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아쓰카와 다쓰미의 미스터리를 감당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독자라면 앞으로도 내내 찐팬이 되어 그의 천재성을 만끽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론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를 담은 첫 번째 수록작 위험한 도박-사립탐정 와카쓰키 하루미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캐릭터, 무대, 미스터리 그리고 짜릿한 반전까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인데, 비록 아쓰카와 다쓰미가 제 취향과 살짝 거리가 있는 작가라는 걸 알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스타일의 작품이 나온다면 꼭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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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윤수 옮김 / 들녘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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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인 미치오는 결석한 친구 S에게 숙제와 유인물을 전해주러 갔다가 목을 맨 채 죽어있는 S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담임과 경찰이 찾아갔을 때 S의 시신은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고 누군가 현장을 손 댄 흔적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1주일 뒤 S는 거미로 환생하여 미치오 앞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신은 자살한 게 아니라 살해당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죽인 자를 지목하기까지 합니다. 이제 겨우 세 살이지만 어른스럽고 생각이 깊은 여동생 미카와 함께 미치오는 S를 살해한 범인의 범행을 입증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S의 어머니, 사건 당일 S를 목격한 노인, 뭔가를 감추는 듯한 담임, 영적 능력을 가진 노파 등 여러 사람과의 만남을 거듭하면서 미치오는 S의 이야기를 점점 믿을 수 없게 됩니다.

 

미치오 슈스케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인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을 오랫동안 책장에 방치했던 가장 큰 이유는 (매번 그의 작품에 대한 서평을 쓸 때마다 반복하는 이야기지만) ‘이 작가가 나와 잘 맞는 작가인지통 결론을 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나름 잘 맞는 작품을 읽은 뒤에도 책장에서 꺼내기가 왠지 주저됐고, 그 반대의 경우엔 조금도 읽을 생각이 나지 않아 그대로 방치하곤 했던 겁니다. 그러다가 최근 1~2년 사이에 읽은 용서받지 못한 밤’, ‘절벽의 밤’, ‘폭포의 밤에게 연이어 좋은 평점을 주게 된 걸 계기로 드디어 책장에서 구해낼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부조리한 일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환상소설 같으면서 불편한 감정을 자극하는 일종의 사이코 서스펜스이지만 마지막에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본격 미스터리이기도 하다.”라는 출판사의 소개글대로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은 어떤 한 가지 장르로 특정하기 어려운 미묘한 작품입니다. 환생이라는 명백히 비현실적 설정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불안정하거나 악의로 가득 찼거나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복잡 미묘한 심리를 발산합니다. 몇몇 인물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캐릭터 때문에 그 정체성 자체가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말하자면 독자 입장에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혼란을 겪으며 숱한 위화감에 사로잡힌 채 미치오가 이끄는 본격 미스터리 스타일의 진실 찾기를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좀 억지 같은 비유지만 스티븐 킹과 온다 리쿠와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기를 펄펄 끓는 열탕 속에 녹여 넣은 이야기 같다고 할까요?

 

클라이맥스를 지나면서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미스터리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더 복잡한 미궁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와 동시에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더욱 모호해지면서 독자의 머릿속을 한없이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또 어느 순간부터 광기를 띠기 시작한 미치오의 진실 찾기가 애초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폭주하면서 과연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조금도 예측할 수 없게끔 만듭니다. 모든 게 꿈이었다는 황당한 엔딩이 튀어나와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클라이맥스는 궁금증 이상의 불쾌감과 불편함을 일으켰고 마지막 세 페이지의 에필로그마저 ... 그런 건가?”라는, 애매한 여운이라도 느끼려면 두세 번은 되읽어야 할 만큼 짙은 안개 속 풍경처럼 느껴집니다.

 

이야기도 복잡하고 스포일러가 될 소지도 많아서 내용에 관해 언급하기가 무척 어려운 작품입니다. 안 읽은 독자라면 무슨 얘긴지 전혀 알 수 없는 서평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오고도 남겠지만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자체가 그런 작품이니 저로서도 딱히 변명할 거리가 없습니다. ‘내 이해력이 부족한가?’라며 자책하는 독자도 있을 것 같고, 취향이 너무나도 안 맞아 별 1~2개의 평점만 주곤 다시는 미치오 슈스케를 돌아보지 않을 독자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두 경우의 중간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동안 읽은 그의 작품 중에 마음에 들어 호평을 한 작품이 그래도 몇 편쯤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스켈리튼 키에 이어 또다시 그의 작품에 별 3개를 주게 된 건 무척 아쉬울 뿐입니다. 동시에 읽지 않은 그의 작품이 아직도 책장에 여러 편 방치돼있다는 게 한없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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