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주식회사
잭 런던 지음, 한원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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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뉴욕, 죽어 마땅한 악인을 법의 테두리 밖에서 처단하는 일을 하는 암살국. 어느 날 암살국의 수장인 이반 드라고밀로프는 그 자신을 처단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의뢰자는 암살국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백만장자 사회주의자청년 윈터 홀. 드라고밀로프와 홀은 불꽃 튀는 논쟁을 펼치고, 결국 도덕광 드라고밀로프는 암살국 해체뿐만 아니라 그 수장인 자기 자신 또한 제거되어야 옳다는 결론에 이른다. 드라고밀로프는 조직원들에게 보스인 자신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하달한 뒤 유유히 모습을 감추고, 이상주의자이자 원칙주의자이며 지성과 체력을 겸비한 조직원들이 그의 뒤를 쫓기 시작하는데... 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난 처형자지 살인자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조직에서 정당한 이유 없이 제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전부 사회를 좀먹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었어요.” (p107)

 

출판사의 소개글과 위의 인용문만 보면 그렉 허위츠의 살인 위원회와 비슷하게 특정집단에 의한 사적 제재를 다룬 전형적인 액션 스릴러로 보이지만, ‘암살주식회사는 암살자들의 캐릭터도, 그들이 품은 신념도, 또 그들이 속한 조직의 정체성도 워낙 특이해서 그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독특한 서사를 선보입니다.

 

러시아 출신의 무정부주의자이자 기업가인 이반 드라고밀로프가 11년 전인 1900년에 설립한 암살국은 미국 곳곳에 지부를 둔 채 그동안 사회를 좀먹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을 처단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는 돈이나 정의감이 아니라 광신에 가까운 윤리의식과 도덕감입니다. 모든 살인 청부를 수용하는 게 아니라 그 처형은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경우에 한해 행동에 나섭니다. 그리고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한 의뢰는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철회되지 않습니다.

지성을 겸비한 S급 킬러라는 홍보 카피처럼 암살국 소속 암살자들은 그저 무기를 잘 다루고 완력만 강한 일반적인 암살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물들입니다. 교수, 학자, 편집자 등 말 그대로 지성을 갖춘 그들은 드라고밀로프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도덕광들이자 행동하는 무정부주의자이며 미친 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신념과 맹약은 그 누구도 균열 하나 낼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고 탄탄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이은 의문사에 의심을 품은 백만장자 사회주의자윈터 홀이 암살국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분투하던 중 우연한 계기를 통해 드라고밀로프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면전에서 당신을 암살해달라.”라는 충격적인 의뢰를 합니다. 암살국의 정당성에 관한 긴 논쟁은 홀의 승리로 끝나고, 드라고밀로프는 조직 전체에게 자기 자신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린 뒤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암살국 전체와 드라고밀로프의 피의 추격전이 시작됩니다. 애초 암살국의 해체가 목적이었던 홀은 예상치 못한 이 추격전에 당황합니다. 더구나 드라고밀로프는 암살국의 관리와 자금을 모두 홀에게 맡기고 떠난 터라 어이없게도 홀은 자신이 해체시키려던 암살국의 임시 사무장이 되고 맙니다.

 

스스로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린 보스와 그 보스를 살해하려는 암살국 전체의 피의 추격전이란 설정만 보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스타일의 흥미진진한 서사가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할 수밖에 없는데, 실은 엄청난 도덕광들이자 행동하는 무정부주의자이며 미친 철학자들이 벌이는 추격전은 한 손에는 철학, 한 손에는 권총이라는 홍보 카피대로 전쟁과 논쟁을 반복하는 특이한 양상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피와 살이 튀는 가운데 도덕과 공의에 관한 철학적 논쟁이 벌어지고, 서로를 죽여야 하는 처지임에도 드라고밀로프와 암살자들은 때로 함께 저녁을 나누며 자신들의 공통된 신념을 찬양하고 호쾌한 웃음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스릴러라고 할까요?

 

하지만 이 독특함은 독자에 따라 꽤 크게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입니다. 피의 추격전은 무척이나 리얼하지만 그 와중에 벌어지는 철학적인 논쟁은 다소 난해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스릴러의 외피를 쓴 도덕과 공의에 관한 철학서처럼 읽혔는데, 워낙 그 방면으로 취약하다 보니 암살자들의 논쟁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과연 이 독특함이 다른 독자들에겐 어떻게 읽혔을지 무척 궁금한데, 인터넷서점이나 블로그에 이 작품에 관한 서평이 올라오면 꼼꼼히 찾아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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