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정원
나기라 유 지음, 오민혜 옮김 / 직선과곡선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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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5층 맨션 옥상에 절연의 신을 모셔놓은 신사와 정갈하게 꾸며진 정원이 있습니다. 프리랜서 번역가이자 신사의 신관인 구니미 도리는 이혼한 아내가 재혼한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모네라는 10살 소녀와 5년째 함께 살고 있습니다. 아내와 재혼남 모두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동식 노천 바를 운영하며 맨션에 살고 있는 이노우에 로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고 사는 게이입니다. 그리고 22년 전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을 사고로 잃고 여전히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39살의 다카다 모모코는 맨션에 살진 않지만 오래 전부터 마음의 안식처로 여겨온 옥상의 절연신사를 드나들며 도리, , 모네와 특별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2022년에 출간됐지만 이런저런 바쁜 일로 뒤늦게 읽게 된 나기라 유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19BL소설을 제외하고 한국에 출간된 그녀의 작품들(‘유랑의 달’,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을 인상 깊게 읽은 덕분에 늘 신작 소식이 기다려지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게 됐는데,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이야기라 좀더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맨션 옥상에 신사가 있다는 설정도 재미있지만 그곳에 모셔진 신이 인연을 끊어주는 절연의 신이란 점이 초반부터 눈길을 끌었습니다. 가타시로(かたしろ, 액막이나 기도를 할 때 사람 대신 죄나 부정을 짊어지는 종이인형)에 자신이 인연을 끊고 싶은 대상을 적어 부적함에 넣으면 되는데, 끊어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적는 이도 있고, ‘지는 경기’, ‘괜한 배려처럼 마음속 바람을 적는 이도 있습니다. 왠지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 같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기도 하고, 옥상에 꾸며진 정갈한 분위기의 정원은 동네사람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기도 해서 절연이라는 어감과는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지곤 합니다.

 

다섯 명의 화자가 번갈아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 그들은 제각각 사람과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멋대로 헤집고 긁어대는 타인의 시선과 해석 때문에 불편함을 느낀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습니다.

이혼한 아내가 재혼해서 낳은 아이를 키우는 홀아비도리, 5살에 부모를 잃고 피한방울 안 섞인 도리와 5년째 살고 있는 의붓자식모네, 22년 전 죽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노처녀모모코, 여자에게 동성 애인을 빼앗겨버린 게이, 우울증에 걸려 직장까지 그만둔 뒤 부모에게 빌붙어 살며 연인과도 불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백수모토이.

 

이들 중 누군가는 자신의 상처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평생 그 상처를 끌어안은 채 살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람들은 의심스러운 홀아비’, ‘남자를 거부하는 노처녀’,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게이’, ‘우울증에 걸린 백수’, ‘불쌍한 의붓자식등 제멋대로의 시선과 해석을 공공연하게 던지곤 합니다.

하지만 상처투성이 주인공들은 절연신사와 옥상 정원에서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따뜻한 교류를 나누는 가운데 세상 사람들의 시선과 해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되찾아갑니다. 그리고 신사의 부적함에 자신이 진정으로 끊어내고 싶었던 것들을 적은 가타시로를 집어넣곤 자신을 위한 절실한 기도를 올립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불쌍해 보일 수도 있지만, 편하고 좋을 때도 있어. 너도 갖고 있는 무언가 때문에 힘들면 끊어 버리는 건 어때?” (p261)

 

우릴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그 사람들 해석이고, 너랑 내가 무엇일지는 너랑 내가 결정하면 돼.” (p274)

 

따뜻하고 밝은 스타일의 전형적인 일본소설이지만 억지스런 해피엔딩으로 이끌지도, 부자연스러운 감정의 해소를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내 인생은 내 거니까 내가 알아서 설계할 거야. 그러니 누구도 함부로 끼어들지 마!”라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여운을 남깁니다. 그런 면에서 절연신사를 매개로 인연을 맺은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나름의 출구를 찾아가는 이야기이자 동시에 무엇을 지킬 것인가,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의미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밝은 분위기의 작품이지만 나기라 유 특유의 감성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어서 무척 좋았습니다. 아직 소개되지 않은 그녀의 작품들이 한국에 좀더 많이, 자주 출간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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