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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피리 꽃 ㅣ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3월
평점 :
2016년에 제목이 바뀐 개정판(‘비둘기피리꽃’)이 나온 걸 보고 예전에 중고로 구매했던 게 기억나서 “아, 읽어야겠구나.”라고 생각한 게 벌써 8년 전의 일입니다. 2024년에는 책장에 오래 방치해놓은 책들을 일부라도 소화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첫 번째 대상이 미야베 미유키의 ‘구적초’입니다.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괴담 시리즈 ‘미야베 월드 2막’을 두 번씩 읽을 정도로 미미 여사의 광팬이긴 하지만 실은 현대물 중에는 안 읽은 작품이 훨씬 더 많기도 하고 심지어 읽다가 포기한 경우도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구적초’라는 어딘가 고색창연한 제목에 끌려서 현대물이란 것도 모르고 구매했고, 읽기 전에도 앞뒤 표지의 소개글을 일부러 보지 않았는데 예상치도 못한 초능력 이야기가 펼쳐져서 잠시 당황한 게 사실입니다. 다 읽고 앞뒤 표지를 보니 “초능력을 지닌 세 명의 여성을 둘러싼 세 가지 이야기”라는 소개글이 눈에 띄었는데, 아마 이 소개글을 먼저 봤다면 구매는 물론이거니와 읽는 것도 꺼려했을 게 분명합니다. 아무리 미미 여사라도 초능력이나 SF물은 사양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록된 세 개의 단편은 무지한 상태에서 이 작품을 구매하고 읽은 게 정말 다행이라고 여기게 할 만큼 매력적이고 애틋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어떠한 능력이라도 편리함이나 즐거움 뒷면에는 반드시 혹독함이며 괴로움을 감추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SF라는 형태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고 미스터리나 연애소설 속에서 이 주제를 다룰 수 없을까 하는 고민 속에서 이 책이 태어났습니다.” (미야베 미유키)
예지몽을 꿀 수 있는 도모코, 불을 일으키고 조종할 수 있는 염화(念火) 능력을 가진 준코, 타인의 몸이나 소지품에 손을 대면 그의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다카코 등 세 편의 주인공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그 능력을 제대로 통제하고 조절하려면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그전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능력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자랑할 수도 없는 것은 물론 절대 들켜서도 안 되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고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선지 흔히들 초능력 서사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과는 전혀 결이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①스러질 때까지
21살 도모코는 함께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집을 정리하다가 뜻밖의 유품을 발견합니다. 그건 8살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부모가 남긴 비디오테이프들입니다. 당시 사고로 그 전의 기억들을 모두 잃어버렸던 도모코는 비디오테이프들을 보다가 큰 충격에 빠집니다.
②번제(燔祭)
여동생 유키에를 살해한 유력한 용의자를 포착하고도 경찰이 증거와 단서 부족으로 머뭇거리자 가즈키는 반드시 자기 손으로 범인을 죽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그때 가즈키를 돕겠다는 한 여성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녀는 가즈키의 눈앞에서 직접 염화 능력을 선보입니다.
③구적초(개정판에선 ‘비둘기피리꽃’)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경찰이 됐고 이제 형사과의 어엿한 일원까지 된 다카코는 최근 들어 자신의 능력이 점차 소멸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크게 당황합니다. 능력 없이도 자신이 과연 형사로서 제대로 일할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과 함께 말입니다.
앞선 두 편의 주인공 도모코와 준코가 자신의 능력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또는 그 능력을 저주하는 캐릭터라면, 표제작의 주인공 다카코는 그 능력의 소멸 가능성 때문에 힘들어하는 인물입니다. 미미 여사는 서로 처지는 달라도 결국 특별한 능력이란 것이 마냥 편리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라는 점, 특히 그것을 신기하고 부러운 눈으로만 지켜보는 제3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특유의 애틋하고 안쓰러운 문장들을 통해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래선지 “SF라는 형태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고 미스터리나 연애소설 속에서 이 주제를 다룰 수 없을까 하는 고민”의 깊이와 절실함에 100%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미미 여사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SF나 판타지 쪽은 꺼려지는 게 사실이지만, 이 작품을 읽고 보니 일단 무슨 이야기인지 정도는 파악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설정이라면 힘들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의외의 재미와 여운을 맛볼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