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심연 뫼비우스 서재
막심 샤탕 지음, 이혜정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한밤중, 머리 가죽이 벗겨진 여자가 벌거벗은 채 누군가에게서 도망치다가 가까스로 구출됩니다. 뉴욕 경찰청의 애너벨 오도넬은 범인을 쫓는 과정에서 추가 피해자를 찾아내는 것은 물론 이 사건이 피해자가 67명에 이르는 대규모 실종사건과 연관됐음을 알아냅니다. 범인의 은신처에서 발견한 단서는 최소 두 명 이상의 공범이 있음을 암시하지만 수사는 답보상태에 빠집니다. 한편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포틀랜드에서 뉴욕으로 날아온 사립탐정 조슈아 브롤린은 애너벨과의 거래를 통해 비공식적인 협업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공범 중 한 명의 정체를 파악해냄으로써 애너벨을 크게 놀라게 만듭니다. 하지만 공범 체포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두 사람의 협업은 위기에 처하고 맙니다.

 

악의 영혼에 이은 악의 3부작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주인공이며 악의 영혼에서는 FBI 프로파일러 출신의 포틀랜드 경찰서 수사관이던 조슈아 브롤린은 이제 사립탐정으로 변신하여 뉴욕에서 벌어진 희대의 실종사건에 참여합니다. 이 작품이 출간된 2008년에 읽긴 했지만 인생 스릴러로 여기면서도 서평을 남기지 않은 것이 아쉬워서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악의 3부작의 가장 큰 특징은 역대급으로 잔혹한 범죄 묘사입니다. ‘악의 심연의 범인들은 전작보다 훨씬 더 잔혹하고 엽기적인 방법으로 피해자들을 고문하고 난도질하며 살해합니다. 그리고 막판에 밝혀지는 궁극의 범행 동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함을 품고 있어서 어지간히 비위가 강한 독자도 한두 번쯤은 속이 불편해지는 경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시리즈가 단지 잔혹한 묘사에만 기대어 독자를 유인하는 건 아닙니다. 카리스마와 트라우마를 겸비하고 있는 매력적인 주인공, 복잡하지만 정교하고 빈틈없이 설계된 스릴러 서사, 그리고 방대한 자료조사의 흔적이 배어있는 꼼꼼한 디테일 등 연쇄살인 스릴러의 필수 미덕들을 골고루 갖췄기에 출간 당시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었습니다.

 

악의 영혼이 조슈아 브롤린의 원맨쇼였다면 악의 심연은 뉴욕 경찰청의 혼혈 여형사 애너벨 오도넬과 사립탐정 조슈아 브롤린의 버디 스릴러입니다. 브롤린은 포틀랜드 출신의 실종 여성 레이첼을 찾기 위해 뉴욕으로 날아왔고, 애너벨이 수사하는 실종사건 피해자 67명 중 한 명이 레이첼임을 확인하곤 과감하게 애너벨에게 협업을 제안합니다. 경찰이라면 사립탐정의 협업 제안 따윈 받아들일 리 없지만 애너벨은 브롤린이 포틀랜드 유령 사건을 해결한 유명한 전직 수사관이며 무엇보다 실종사건 전문 탐정이란 점 때문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공범의 정체까지 파악해내는 브롤린의 뛰어난 수사능력에 크게 놀랍니다. 다만 브롤린의 존재는 뉴욕 경찰청의 동료들에게는 절대 비밀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브롤린과 애너벨의 수사가 이뤄지는 와중에 간간이 범인들에게 납치된 피해자들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감금된 상황들이 묘사됩니다. 말하자면 범인들이 모든 피해자를 살해한 것은 아니라는 뜻인데 그 때문에 독자는 범인들의 동기와 의도를 좀처럼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 브롤린과 애너벨 역시 첫 번째 범인의 은신처에서 발견한 사진들 때문에 피해자들이 실종 이후 길게는 몇 달 가까이 생존한 사실을 알고 있지만 독자와 마찬가지로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해할 따름입니다.

 

악의 3부작의 특징 중 하나는 프랑스 작가가 이야기의 무대를 미국의 대도시로 삼은 점입니다.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의 스릴러 가운데 범인의 의도와 동기를 설명하기 위해 다소 난해하거나 철학적인 배경, 심지어 신화까지 끌어들이는 작품들이 적지 않은데, 사실 그런 서사는 (이해력이 딸리거나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지만) 한눈에 쏙 들어오지도 않고 피부에 와 닿지도 않는 게 사실입니다. 차라리 단순하더라도 확실하고 명료한 범행 동기가 더 설득력도 있고 개연성도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프랑스 작가 막심 샤탕은 할리우드 스타일의 스릴러 서사를 구사함으로써 이런 거리감을 어느 정도는불식시킵니다.

다만 악의 심연은 전작에 비해 조금은 현학적이고 난해한 범행 동기를 설정했습니다.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브롤린의 입을 통해 장황하게 설명되는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은 앞서 잘 쌓여온 스릴러 서사를 갑자기 모호하게 만들어 오히려 역효과를 냈고, 막판에 밝혀진 범인들의 동기와 의도 역시 뭔가 있어 보이게작위적으로 포장된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 스릴러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별 1개를 뺄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악의 심연의 뒤를 잇는 작품은 악의 주술입니다. 마지막 페이지쯤에 후속작에 대한 약간의 떡밥이 남겨져있는데, 읽은 지 너무 오래 돼서 그 떡밥을 보고도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아무 기억도 없어서 난생 처음 읽는 새 이야기에 대한 기대와 흥분을 만끽할 수 있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조슈아 브롤린의 활약을 지켜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게 너무 아쉽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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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영혼 뫼비우스 서재
막심 샤탕 지음, 이세진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포틀랜드 경찰서 강력반의 조슈아 브롤린은 FBI에서 훈련받은 프로파일러 능력을 발휘하여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해결한 덕분에 30대 초반에 수사 지휘권을 거머쥔 인물입니다. 포틀랜드 일대에서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지만 수사는 답보상태이고 언론은 범인에게 포틀랜드 인간 백정이라는 별명을 붙여가며 경찰을 압박합니다. 그러던 중 브롤린은 과학수사팀의 도움을 받아 살해 현장을 특정할 수 있었고, 범인의 네 번째 범행을 가까스로 저지하며 감금돼있던 줄리에트 라파예트를 구해내는데 성공합니다. 줄리에트는 심각한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삶을 되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1년 후 포틀랜드 인간 백정의 모방범이 나타나자 브롤린과 줄리에트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악의 영혼200226세의 막심 샤탕이 내놓은 악의 3부작가운데 첫 편입니다. 처음 읽은 건 대략 2007년 전후로 기억하는데, 인생 스릴러라고 생각하면서도 서평을 남기지 않은 것이 아쉬워서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젊은 여성을 납치 살해한 뒤 끔찍한 형태로 시신을 훼손하는 포틀랜드 인간 백정은 그 어느 잔혹한 스릴러 속 연쇄살인마와도 비교되지 않는 엽기적인 악마입니다. 하지만 그를 저지한 브롤린과 그에게 목숨을 잃을 뻔 한 줄리에트의 진정한 악몽은 사건 1년 후 포틀랜드 인간 백정을 완벽하게 모방한 또 다른 악마가 나타나면서 시작됩니다. 더구나 이번 범인은 경찰에게 보낸 은유로 가득 찬 편지를 통해 자신의 범행 또는 피해자의 위치를 알려주는데, 그 때문에 브롤린을 비롯한 포틀랜드 경찰은 범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더욱 애를 먹습니다. 그런 와중에 피해자는 연이어 발생하고 브롤린과 줄리에트의 공포는 더욱 깊어집니다.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에 비해 사건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물론 브롤린과 경찰을 대혼란에 빠뜨리는 모방범의 범행 수법과 동기라든가 1년 만에 다시금 연쇄살인마의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줄리에트의 공포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브롤린의 분투 등 다양한 서사들이 이 방대한 분량을 지루할 틈 없이 채워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못잖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건 조슈아 브롤린이 설파하는 프로파일링 기법과 살인자를 잡기 위해 살인자가 된다.”는 프로파일러의 특별한 수사법에 대한 묘사입니다. 살인 현장을 꼼꼼히 살펴본 브롤린이 범인의 특징과 윤곽에 대해 한 페이지 넘게 프로파일링을 하는가 하면, 결정적인 순간에는 스스로 범인이 되어 살해 상황을 상세히 재현해보다가 생각지도 못한 단서를 포착하기도 합니다. 프로파일러라는 개념이 더는 생소한 개념이 아니다 보니 이 작품을 최근에 읽게 된 독자라면 이 대목들이 다소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는데, 제가 이 작품을 읽은 2000년대 중반만 해도 무척 파격적이고 신기하게 여겨진 게 사실입니다.

 

대략의 줄거리조차 잊고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던 건 이보다 더 끔찍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듭됐던 잔혹한 묘사들입니다. ‘인간 백정과 모방범의 범행 장면은 말할 것도 없고, 차가운 해부대 위에서 진행되는 부검 장면 역시 마치 눈앞에서 지켜보는 듯 생생하고 상세하게 그려져서 어지간히 무딘 저조차도 수시로 불편함을 느낀 기억이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모두 여성이란 점 때문인지 디테일에 대한 찬사 못잖게 선정성에 기댄 서사라는 비난 어린 서평이 적잖았던 것도 기억나는데, 이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조금씩 생각이 다를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제가 손에 꼽을 수 있는 역대급 잔혹 작품임에는 분명하니 이런 스타일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관심을 가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20년도 넘은 작품이지만 지금쯤 개정판이 나와도 괜찮을 정도로 스릴러로서의 완성도도 높고 프로파일링에 대한 해박한 묘사도 수준급인 작품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내용이 워낙 많아서 초반부 정도의 줄거리만 소개했는데, 좀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인터넷 서점이나 블로그에서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찾아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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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초 후에 죽는다
사카키바야시 메이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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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신예 미스터리 작가들의 기발하고 독특한 작품들이 한국 독자들을 찾는 일이 부쩍 잦아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통 미스터리를 선호하는 편이라 기성 베테랑 작가들의 작품에 더 관심을 갖기는 하지만, 간혹 특별한 간식처럼 신예들의 개성 넘치고 독창적인 이야기가 궁금해질 때도 있습니다.

사카키바야시 메이의 ‘15초 후에 죽는다는 일단 제목부터 눈길을 끌었는데, 고백하자면 “‘피해자가 죽기 직전의 15라는 상황 속에서 피해자와 범인의 독특한 공방을 그린 작품이라는 소개글을 보고 우선은 살짝 고개가 갸웃거려진 게 사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초라는, 다소 한계가 명백해 보이는 설정을 어떻게 이야기로 풀어냈을지 한 번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모든 수록작이 피해자와 범인의 공방을 다룬 건 아닙니다. 또한 ‘15가 죽음까지 남은 시간을 의미하는 건 맞지만 각 수록작마다 서로 맛과 느낌이 다르게 설정돼서 대체로 엇비슷한 흐름의 미스터리가 아닐까, 라는 근거 없던 기우를 보기 좋게 날려버리기도 했습니다.

 

15

죽기 전 15초 동안 어떻게든 범인에게 복수하려는 주인공과 완전범죄를 이루기 위해 15초 동안 사력을 다하는 범인의 대결을 그린 작품으로, ‘옮긴이의 말의 표현대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특이한 재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이 다음 충격적인 결말이

시청자 참여형 추리드라마의 마지막 회 엔딩 15초 사이에 여주인공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필 그 장면을 놓친 는 누나와 함께 드라마 첫 편부터 복기하며 여주인공의 죽음의 진상을 추리합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형식으로, 연이은 반전이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불면증

심인성 난청을 앓고 있으며 매일 비슷한 꿈(15초 후에 교통사고가 일어나는)을 반복해서 꾸는 13세 소녀 마쓰리와 어딘가 비밀스럽고 애틋한 사연을 품고 있는 듯한 그녀의 어머니 요우가 이끌어가는 슬프고 애잔한 호러풍 이야기입니다.

 

머리가 잘려도 죽지 않는 우리의 머리 없는 살인 사건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더라도 15초 이내에 붙이기만 하면 생명에 전혀 지장이 없는 수탈(首脫)이라는 기괴한 소재를 다룬 작품으로, 축제날 밤에 벌어진 의문의 습격사건을 추리하는 본격 미스터리입니다.

 

죽음 직전의 15는 무척이나 다루기 힘든 설정이지만 사카키바야시 메이는 판타지, 액자소설, 본격 미스터리 등 다채로운 장르와 이야기 속에 그 설정들을 맛깔나게 잘 녹여 넣었습니다. 그야말로 신인의 패기가 아니라면 도전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인데, 그 과감함에 정교한 설계까지 가미돼서 흥미진진하게 읽힌 작품입니다. 만점까지 주진 못했지만 색다른 미스터리를 맛보고 싶은 독자에겐 적극적으로 추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이 2021년에 출간됐으니 사카키바야시 메이의 두 번째 작품이 나올 때도 된 것 같은데 아직 일본에서도 출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어쩌면 난산을 겪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데뷔작에 버금가는 두 번째 작품으로 독자들을 찾아와주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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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무녀전 조선의 여탐정들
김이삭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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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궁녀였지만 절친의 참혹한 죽음에 충격을 받고 궁을 나와 무당골에 은신한 뒤 탐관오리에게 사기를 치며 살아가는 신기 없는 무녀무산, 서자라는 처지에 신내림까지 받아 남들이 듣거나 보지 못하는 것을 듣고 보는 능력을 갖게 된 설랑, 앞 못 보는 무당이지만 특유의 친화력으로 여러 가지 정보를 손에 넣는 돌멩 등 범상치 않은 세 사람이 이끌어가는 역사추리소설입니다. 도성과 경기 일대에서 발생한 괴력난신, 즉 복수와 저주를 대신해준다는 두박신의 정체를 알아내라는 밀명을 받은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진실에 다가갈 기회를 잡지만 그때부터 사람들이 연이어 죽어나가는 등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직면합니다.

 

야박한 평점을 주긴 했지만 우선 이 작품의 미덕부터 소개해보겠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인물들의 캐릭터입니다. 신기 없는 무녀, 신내림 받은 서자, 앞 못 보는 무당 등 세 명의 주인공은 과거의 이력은 물론 현재의 처지나 성격, 그리고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는 재능 등 모든 면에서 매력적으로 설정된 인물들입니다. 특히 감찰궁녀였다가 자진해서 궁을 나온 뒤 사이비 무녀가 된 무산은 시리즈물 주인공에 어울리는 매력과 카리스마로 중무장하고 하고 있어서 반강제로 떠맡게 된 두박신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지 사뭇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인공들을 돕는 조연들 역시 다양한 계층과 신분을 갖고 있는데다 개성도 강해서 흥미를 유발하는데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여러 번 놀랄 만큼 꼼꼼하고 세세했던 고증도 이 작품의 미덕 중 하나입니다. 무당 혹은 무격에 관한 폭넓고 깊은 자료조사의 흔적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고, 방대한 지식 없이는 불가능한 조선시대 초기 여러 공간에 대한 묘사 역시 감탄을 자아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매력적인 캐릭터와 디테일한 고증 등 화려한 재료들에도 불구하고 야박한 평점을 준 가장 큰 이유는 이야기 자체가 그 재료들의 맛을 살려내지 못할 만큼 산만하고 모호했기 때문입니다. 470여 페이지의 적지 않은 분량 속에서 무산 일행은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 조사를 벌이고, 때론 살인사건과 마주치기도 하고, 심지어 살해될 위기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우여곡절 중 선명하게 읽힌 대목은 별로 없습니다. 두박신 조사가 살인사건 수사로 비화하더니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다가 맥이 툭 끊어지고 맙니다.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무산과 그 일행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애초 그들의 목표가 무엇이었던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의 병을 치료하는 활인원 한증소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활인원은 이 작품에서 꽤 중요한 공간으로 등장하는데, 저는 활인원에서 벌어진 일들 가운데 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곳의 인물들은 너무 단편적으로만 소개됐고 정체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 갑자기 퇴장하거나 죽어버리곤 합니다. 사건 역시 뜬금없이 벌어졌다가 흐지부지됐고 범행동기도 방법도 불분명하게 마무리됩니다. 그 와중에 무산 일행은 그저 이리저리 휩쓸려만 다닐 뿐 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뭘 얻어낸 건지, 뭘 해결한 건지도 알 수 없으니 사건이 마무리 된 후 무산 일행이 품은 짙은 회한과 분노에 공감하기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터넷 서점의 평을 보니 대체로 호평 일색이었는데, 그렇다면 제가 오독의 우를 범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서평을 쓴 뒤 별도로 대략의 줄거리를 정리해놓곤 하는 제가 무산의 행보만이라도 정리해보려다가 포기한 걸 보면 100% 오독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오독의 우를 확인하기 위해 감찰무녀전을 다시 읽는 건 어려울 것 같지만,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저의 야박한 평점보다는 다른 분들의 호평에 귀를 기울여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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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피리 꽃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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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제목이 바뀐 개정판(‘비둘기피리꽃’)이 나온 걸 보고 예전에 중고로 구매했던 게 기억나서 , 읽어야겠구나.”라고 생각한 게 벌써 8년 전의 일입니다. 2024년에는 책장에 오래 방치해놓은 책들을 일부라도 소화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첫 번째 대상이 미야베 미유키의 구적초입니다.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괴담 시리즈 미야베 월드 2을 두 번씩 읽을 정도로 미미 여사의 광팬이긴 하지만 실은 현대물 중에는 안 읽은 작품이 훨씬 더 많기도 하고 심지어 읽다가 포기한 경우도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구적초라는 어딘가 고색창연한 제목에 끌려서 현대물이란 것도 모르고 구매했고, 읽기 전에도 앞뒤 표지의 소개글을 일부러 보지 않았는데 예상치도 못한 초능력 이야기가 펼쳐져서 잠시 당황한 게 사실입니다. 다 읽고 앞뒤 표지를 보니 초능력을 지닌 세 명의 여성을 둘러싼 세 가지 이야기라는 소개글이 눈에 띄었는데, 아마 이 소개글을 먼저 봤다면 구매는 물론이거니와 읽는 것도 꺼려했을 게 분명합니다. 아무리 미미 여사라도 초능력이나 SF물은 사양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록된 세 개의 단편은 무지한 상태에서 이 작품을 구매하고 읽은 게 정말 다행이라고 여기게 할 만큼 매력적이고 애틋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어떠한 능력이라도 편리함이나 즐거움 뒷면에는 반드시 혹독함이며 괴로움을 감추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SF라는 형태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고 미스터리나 연애소설 속에서 이 주제를 다룰 수 없을까 하는 고민 속에서 이 책이 태어났습니다.” (미야베 미유키)

 

예지몽을 꿀 수 있는 도모코, 불을 일으키고 조종할 수 있는 염화(念火) 능력을 가진 준코, 타인의 몸이나 소지품에 손을 대면 그의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다카코 등 세 편의 주인공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그 능력을 제대로 통제하고 조절하려면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그전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능력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자랑할 수도 없는 것은 물론 절대 들켜서도 안 되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고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선지 흔히들 초능력 서사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과는 전혀 결이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스러질 때까지

21살 도모코는 함께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집을 정리하다가 뜻밖의 유품을 발견합니다. 그건 8살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부모가 남긴 비디오테이프들입니다. 당시 사고로 그 전의 기억들을 모두 잃어버렸던 도모코는 비디오테이프들을 보다가 큰 충격에 빠집니다.

 

번제(燔祭)

여동생 유키에를 살해한 유력한 용의자를 포착하고도 경찰이 증거와 단서 부족으로 머뭇거리자 가즈키는 반드시 자기 손으로 범인을 죽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그때 가즈키를 돕겠다는 한 여성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녀는 가즈키의 눈앞에서 직접 염화 능력을 선보입니다.

 

구적초(개정판에선 비둘기피리꽃’)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경찰이 됐고 이제 형사과의 어엿한 일원까지 된 다카코는 최근 들어 자신의 능력이 점차 소멸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크게 당황합니다. 능력 없이도 자신이 과연 형사로서 제대로 일할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과 함께 말입니다.

 

앞선 두 편의 주인공 도모코와 준코가 자신의 능력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또는 그 능력을 저주하는 캐릭터라면, 표제작의 주인공 다카코는 그 능력의 소멸 가능성 때문에 힘들어하는 인물입니다. 미미 여사는 서로 처지는 달라도 결국 특별한 능력이란 것이 마냥 편리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라는 점, 특히 그것을 신기하고 부러운 눈으로만 지켜보는 제3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특유의 애틋하고 안쓰러운 문장들을 통해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래선지 “SF라는 형태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고 미스터리나 연애소설 속에서 이 주제를 다룰 수 없을까 하는 고민의 깊이와 절실함에 100%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미미 여사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SF나 판타지 쪽은 꺼려지는 게 사실이지만, 이 작품을 읽고 보니 일단 무슨 이야기인지 정도는 파악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설정이라면 힘들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의외의 재미와 여운을 맛볼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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