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 - 1928, 부산
무경 지음 / 나비클럽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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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경성에서 작은 다방 흑조를 경영하는 천연주는 손님들이 가져오는 온갖 기이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깁니다. 때론 그 답례로 자신이 추리한 이야기 이면의 진상을 들려줘서 손님들을 놀라게 만들곤 했는데, 그 일이 소문이 나면서 요즘은 커피보다 다른 볼일로 흑조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탐정으로 여기진 않습니다. 그저 관심이 가는 이야기를 듣고 나면 흥미롭습니다.”라는 한마디와 함께 그 이면의 진상을 나름대로 짐작해볼 뿐입니다. 그런 그녀가 부산 동래온천에서의 요양을 위해 수행원 두 명을 데리고 경부선 열차에 올라탑니다. 그리고 그 여정 중에 구포, 동래, 부산에서 마치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만 같은 기이한 이야기들과 마주칩니다.



무경은 이 작품을 통해 처음 만난 작가인데, 출판사의 가제본 서평단 공지를 보고 인터넷서점에서 검색해보니 계간 미스터리(2023 가을호) 신인상을 수상했고 ‘1929년 은일당 사건 기록으로 호평을 받은 작가라 급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또한 기이한 이야기를 듣고 그 진상을 추리한다는 설정이 제 최애작 중 하나인 미야베 미유키의 미시야마 변조괴담 시리즈와 닮은꼴이란 점도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부산이라는 무대가 먼저 눈길을 끌었지만 역시 이 작품에서 가장 기대가 된 건 주인공의 캐릭터입니다. 어마어마한 부자인 친일파 아버지 때문에 천연주와 센다 아카네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된 그녀는 여고시절부터 다른 사람들이 들려주는 기이하고 흥미로운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으며, 특유의 촉을 발휘하여 그 이야기 이면의 진상을 추리하곤 했습니다. 밝고 쾌활하며 행동력까지 갖춘 천연주의 삶을 요동치게 만든 건 2년 전 온몸에 심각한 화상을 입힌 화마였습니다. 수행원의 부축 없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된 그녀는 약간의 충격에도 솟구쳐 오르는 고통에 절망했고, 그렇게 피폐해진 몸은 그녀에게서 표정과 감정마저 앗아갔습니다.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즐거움은 흑조를 찾은 손님들에게서 기이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이상해야 할 이유가 있기에 이상해 보이는 것이다.”라는 옛 친구의 말을 가슴에 품은 채 그 이상함의 이면을 짐작하는 일에 몰두하곤 합니다. 셜록 홈즈처럼 눈에 보이는 단서만으로 상대의 신분이나 처지를 간파해내는 그녀를 사람들은 요괴 사토리’(사람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읽어내는 요괴)라고 부르기도 하고, 화상을 가리기 위한 검은 옷과 그에 대조되는 창백한 피부의 조합 때문에 인간이 아닌, 그저 인간을 닮았을 뿐인 다른 존재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연도 많고 캐릭터도 독특한 천연주가 아버지의 지시로 동래온천에서의 요양을 위해 경부선에 올라타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마담 흑조는 매구의 이야기를 듣는다

죽은 개를 여우가 물고 갔다.”라는 소문이 퍼지자 개의 주인인 일본인 지주는 여우 소탕령을 내립니다. 부산을 코앞에 두고 우연히 구포에 머물게 된 천연주는 그 소문에 의심을 품곤 개의 죽음과 그 이면의 진상을 파헤치기로 결심합니다.

 

마담 흑조는 감춰진 마음의 이야기를 듣는다

동래온천 스미레장()에 투숙한 천연주는 예기치 못한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됩니다. 자칫 미궁에 빠질 뻔한 사건은 천연주의 추리로 가까스로 해결됩니다.

 

마담 흑조는 지나간 흔적의 이야기를 듣는다

부산에서 고교 선배 채상미를 2년 만에 만난 천연주는 그녀가 무척 곤란한 상황에 빠졌음을 감지합니다. 누군가에게 미행당하는 게 분명하다고 호소하는 채상미를 위해 천연주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기발한 계획을 세웁니다.

 

잔인하거나 복잡한 사건들은 아니지만 천연주의 캐릭터도 매력적이고 매 수록작마다 크고 작은 반전의 묘미도 맛볼 수 있어서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상을 사건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 넣은 대목들이나 당시 부산과 그 일대의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낸 장면들도 읽는 내내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덕분에 작가의 전작에도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또한 (후속작에서 그 정체가 밝혀질 것으로 보이는) 천연주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두 사람 - 천연주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과외선생, 천연주와 비슷한 감성을 지녔던 여고시절 친구 선화 - 의 과거와 현재도 궁금해졌는데, 그들이 등장할 사건은 무게감이나 밀도가 남달라서 천연주의 현재의 삶을 크게 뒤흔들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게 읽고도 별 4개에 그친 건 임팩트 있는 한 방이 부족해보였기 때문인데, 천연주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사건이든 감정이든 조금은 더 세고 독한 전개가 펼쳐지기를 기대해봅니다. 이런 기대를 하는 이유는 모처럼 롱런 시리즈를 이끌 만한 매력적인 주인공을 발견한 반가움 때문입니다. 사심 가득한 바람이지만 마담 흑조천연주의 이야기가 미시마야 변조괴담 시리즈만큼 오래도록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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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 1 - 개정판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5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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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기억 속엔 명품으로 남아있지만 다시 읽었을 때 예전 그대로의 감흥을 전해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공원 쓰레기통에서 젊은 여성의 오른팔이 발견된 사건으로 일본 전역이 충격에 빠집니다. 더구나 범인은 언론사는 물론 피해자의 유족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희롱하듯 자신의 범죄를 폭로합니다. 연이어 동일범에게 살해당한 시신들이 발견되지만 경찰은 단서 하나 잡지 못한 채 궁지에 몰립니다. 연속 유괴살인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르포라이터 마에하타 시게코, 가족이 무참하게 살해당한 사건으로 인해 죄책감에 빠져있던 중 공원에서 잘린 오른팔을 발견한 고교생 쓰카다 신이치, 범인에게 손녀를 잃은 70대 노인 아리마 요시오 등 사건 관련자들은 제각각의 희망과 절망 속에서 어떻게든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분투합니다.


일본에서 무려 5년에 걸쳐 연재됐으며 (2006년 번역판 기준으로) 1,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작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론 2007년 가을쯤 일본 미스터리에 입문하게 만든 작품이라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올해의 독서목표인 명품재독을 계획하면서 거의 17년 만에 모방범과 그 후속작인 낙원을 다시 읽을 생각에 무척 설렜는데, 사흘에 걸쳐 다시 읽은 모방범은 역시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작이라 부를 만큼 서사와 여운 모두 압도적이었습니다.


전대미문의 연속 유괴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지만 모방범은 초반부터 진범은 물론 누명을 쓰게 되는 인물까지 공개하는데다 서사의 중심 자체가 추리나 반전보다는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극단적이라고 할 만큼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들을 그리는 데 있기 때문에 단순한 미스터리 이상의 거대한 휴먼 드라마로 읽히는 작품입니다. 경찰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들 역시 수사의 주체라기보다는 사건에 휩쓸린 대다수의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을 헤매는 조연 역할에 더 충실합니다.


이야기를 견인하는 건 크게 세 그룹입니다. 하나는 유괴와 살인은 오로지 부차적인 수단일 뿐이며 궁극적으로는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를 던져줌으로써 을 체현(體現)하고자 하는 사이코패스와 그를 추종하면서 오로지 쾌락을 위해 피해자들을 유린하고 살해하는 잔혹한 살인마이고, 또 하나는 르포라이터 마에하타 시게코와 경찰로 대표되는 사건의 기록자들이자 방관자들입니다. 가장 중요한 그룹은 연속 유괴살인사건의 첫 목격자인 쓰카다 신이치와 범인에게 손녀를 잃은 70대 노인 아리마 요시오, 그리고 범인으로 지목된 오빠의 무죄를 주장하는 다카이 유미코 등 범죄에 직접적으로 휘말린 일반인들입니다.


이미 범인이 누군지 아는 상태에서 독자는 수시로 몰입의 대상과 애증이 뒤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결코 흥미나 인기에 영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결국엔 불확실한 정보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만들뿐인 르포라이터 시게코에게는 응원과 비아냥을 번갈이 보내게 되고, 살아있는 게 지옥이나 마찬가지인 피해자의 유족이나 범인은 따로 있다고 주장하는 용의자의 가족에게도 챕터가 바뀔 때마다 미묘하게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말하자면 누구를 편들어야 할지, 누구를 비난해야 할지, 누구를 동정해야 할지 그 구분 자체가 미묘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바로 이런 점 -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이야기 - 모방범의 가장 큰 미덕이자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워낙 방대한 이야기인데다 등장인물도 많아서 상세한 내용이 없는 인상비평이 되고 말았지만, ‘모방범은 축약한 줄거리만으로는 그 진가를 1/100도 설명할 수 없는 작품이라 직접 읽어보라는 것 외에는 달리 마땅한 추천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엄청난 분량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일단 1권만 읽어보자.”라는 심정으로 도전한다면 어느새 3권 막판까지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미야베 미유키의 현대물에 실망했던 독자라도 출간된 지 20년이 넘은 모방범만큼은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손꼽게 될 것입니다.


이제 모방범이후 9년의 시간이 지난 시점을 배경으로 한 낙원을 읽으려고 합니다. 희미한 기억이긴 하지만 모방범보다는 다소 인상과 여운이 깊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원역시 충분히 매력적인 책읽기의 시간을 제공해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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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유희
이가라시 리쓰토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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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간 사법시험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했지만 호토대학교 로스쿨에는 뛰어난 세 명의 인재가 있습니다. 이미 사법시험에 합격하고도 로스쿨에 들어온 괴짜 천재 유키 가오루, 사법시험 합격이 유력해 보이는 구가 기요요시와 오리모토 미레이가 그들입니다. 실제로 기요요시와 미레이는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가오루는 예상과 달리 법조인 대신 학자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살인사건의 피해자, 가해자, 변호인의 처지로 재회합니다. 가오루가 칼에 찔린 시신으로 발견된 가운데 미레이가 현장에서 범인으로 체포됐고 기요요시는 미레이의 변호인이 되어 재판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0.1%도 되지 않는 승산에 기요요시는 애가 타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구치소에 갇힌 미레이는 좀처럼 기요요시에게 협조하지 않습니다.

 

현직 변호사인 이가라시 리쓰토는 2023뒤틀린 시간의 법정으로 한국 독자와 처음 만났습니다. 법정 미스터리를 좋아하지만 타임 슬립 코드가 깔려 있어서 구매목록에서 뺐던 작품인데, ‘법정유희를 읽고 나니 조만간 다시 장바구니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작 제목도 法廷遊戯인데 유희(네이버 사전을 그대로 인용하면) ‘즐겁게 놀며 장난함. 또는 그런 행위’. 영어로는 ‘play’, ‘game’을 뜻합니다. 실제로 이 작품 속엔 법의 테두리 안에서, 또 법정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갖가지 유희가 등장합니다. 다만 즐거운 놀이나 장난과는 거리가 먼 어둡고 길고 고통스러운 한 판의 게임이 벌어집니다.

 

죄와 벌, 제재와 구제, 무고와 원죄(冤罪) 등 법을 둘러싼 묵직하고 심오한 주제들이 이야기 전반에 흐르고 있고,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분투하는 미스터리의 매력도 잘 살아있어서 진지한 법정 미스터리이면서도 모든 복선이 하나로 연결되는 본격 미스터리 특유의 쾌감을 선사한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작품입니다. 동시에 오래 전부터 여러 겹의 악연으로 얽혀온 세 주인공이 법정 안팎에서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는 비극도 미스터리 못잖게 눈길을 끌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과 비슷한 암담하고도 먹먹한 분위기까지 더해져 마지막 장까지 독자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어버립니다.

 

법률 전문용어가 꽤 많이 등장하기도 하고, 인물들의 심리나 속내를 에둘러 표현한 부분도 종종 있어서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는 작품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런 느린 책읽기 덕분에 세 주인공의 비밀과 거짓말, 숨은그림찾기처럼 정교하게 설치된 복선들, 0.1%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법정 안팎의 긴장감 등에 좀더 몰입할 수 있었고, 또 그런 몰입 덕분에 막판에 연이어 터지는 불꽃놀이 같은 반전의 참맛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정당한 죗값은 누가 정해야 하는 걸까?”라는 심오한 주제와 함께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아들이는 길벌을 거부하고 죄와 마주하는 길을 선택하는 인물들의 고뇌와 갈등 역시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좀 복잡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스포일러가 될 여지들이 너무 많아서 세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도, 법정에서 벌어지는 공방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가 조심스러운 작품입니다. 달리 말하면 소개글이나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접하지 말고 바로 본편을 읽어야 이 작품의 맛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정 궁금하다면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 출판사의 소개글 정도만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가라시 리쓰토는 한국에 소개된 두 작품 외에도 일본에서 꽤 여러 편의 법정 미스터리를 출간한 걸로 검색되는데, 조만간 그의 세 번째 작품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필명을 律人으로 정할 정도로 법룰의 매력을 전하기 위하여 꾸준히 소설을 발표해 왔다는 이가라시 리쓰토의 진심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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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섬
필리프 클로델 지음, 길경선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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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 지중해에 위치한 개의 형상을 닮은 군도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이 살고 있는 한 화산섬. 외부와 거의 고립되다시피 한 그 섬에 세 구의 흑인의 시신이 파도에 떠밀려오면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비극이 시작됩니다. 시장, 의사, 신부 등 섬의 지도층은 성사가 코앞인 온천사업을 지키기 위해 시신들을 화산 구덩이에 은폐합니다. 단 한 명뿐인 섬의 교사는 엄연한 범죄행위에 반대하지만 유일한 외지인인 그가 토박이들의 뜻을 꺾진 못합니다. 하지만 육지에서 온 경찰이 페리선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섬에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그의 태도와 말투에서 마치 시장 일행이 저지른 시신 은폐를 모두 알고 온 듯한 명백한 비난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섬은 불온한 광기에 잠식되기 시작합니다.

 

프랑스 문학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섬은 외형적으로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에 자리 한 가상의 화산섬을 배경 삼아 심연 속에 파묻힌 진실을 폭로하는 미스터리지만 동시에 난민 문제를 소재로 한 사회성 짙은 고발물 혹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비꼰 우화이기도 합니다. 또한 섬의 이름은 그저 개의 군도’(이 작품의 원제이기도 합니다)일뿐이고, 등장인물 모두 직업 또는 그 특징으로만 명명될 뿐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지 않으며 화산섬이라는 공간 역시 고정세트 같은 무대처럼 보여서 다분히 연극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어둡고 이기적인 심리는 몇 백 페이지의 장편만큼이나 묵직하고 심도 깊게 그려집니다.

 

화산섬의 비극은 해변에서 세 구의 흑인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작됩니다. 극소수의 반발 속에 은폐가 진행되지만 육지에서 온 경찰 한 명 때문에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이어 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비열한 음모가 전개되고 사태는 뜻밖의 방향으로 폭주합니다. 하지만 섬의 운명은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파국으로 치달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파국에 동조하듯 화산은 점차 빈번하게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25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분량이지만 무척 다양한 코드를 품고 있는 작품입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일부 인용하면 난민 위기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척, 목적을 이루기 위한 권력자들의 권모술수, 매 순간 모든 곳에서 감시당하는 사생활, 대중을 선동하는 가짜 뉴스, ‘아니면 말고식의 마녀사냥, 가정 폭력에 노출된 아동등 인간이 일으키는 현대사회의 갖가지 문제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파괴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은 인간을 파괴하고 인간들의 세상을 파괴한다.”(p238)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 자체가 딱딱한 다큐멘터리 같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직설적인 화법으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대목도 있지만 대부분은 프랑스 문학 특유의 지독한 풍자와 비유로 채워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시장과 경찰(공권력), 의사(과학), 신부(종교), 교사(지식), 노파(방관자) 등 고유한 이름도 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은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에 몰입하는 대신 객관적인 시선으로 화산섬의 비극을 바라보게 하는 우화적인 설정이라 초반부터 눈길을 끌었습니다. 말하자면 특정인물에게 공감하거나 반감을 갖게 하지도 않고, 선과 정의가 승리하기를 혹은 악과 부패가 응징되기를, 이라는 바람조차 갖지 못하게 함으로써 탐욕과 방관과 무지에 휩싸인 화산섬의 인간들이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똑바로 바라보게 만든다고 할까요?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간혹 목격되곤 하는 프랑스 문학 특유의 난해함 또는 모호함입니다. 불편할 정도로 심한 건 아니지만 앞뒤 맥락을 살펴봐야 하거나 같은 문장을 두어 번 되읽어야만 하는 수고를 간간이 반복해야 되곤 합니다. 매번 프랑스 작품을 읽을 때마다 첫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긴장하게 되는 게 사실인데,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섬은 평균보다는 쉽게 읽히는 작품이니 미리 편견을 갖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처음 만난 작가라 이름이 생소했지만 검색해보니 이전까지 한국에 소개된 필리프 클로델의 작품이 무려 다섯 편이나 됐습니다. 모두 순문학이나 에세이 등으로 아마 장르물이 아니라서 그동안 제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섬으로 관심이 생긴 독자라면 전작들을 찾아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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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싸리 정사 화장 시리즈 2
렌조 미키히코 지음, 정미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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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싸리 정사회귀천 정사와 함께 화장(花葬) 시리즈로 불리는 단편집입니다. 화장(花葬)꽃으로 장사 지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두 작품 제목에 공통적으로 들어간 정사(情死)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한 연인들이 내세에서의 인연을 기약하며 죽음을 선택하는 일을 뜻합니다. 시리즈 명과 제목만 보면 무척이나 애틋하고 슬픈 사랑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하게 되지만 실은 두 작품집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은 겉으로 드러난 애틋함이나 슬픔과는 거리가 먼, 무척이나 잔혹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발표된 회귀천 정사에 다섯 편이 실렸고, ‘저녁싸리 정사에는 나머지 세 편과 함께 전혀 결이 다른 유머 미스터리 한 편이 수록돼있습니다.

 

회귀천 정사의 서평에 살인이나 죽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꽃들의 향연이 주는 묘한 위화감과 끈적거림, 그리고 밝혀진 진실 속에 담긴 어이없음, 망연함, 안타까움 등 복잡한 감정들 때문에 이야미스(イヤミス)’와는 다른 성격의 불편함과 불쾌함을 맛봤다.”라고 쓴 적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편함과 불쾌함이 다시 그리워질 때까지 저녁싸리 정사를 읽는 걸 미뤄두겠다는 다짐도 남겼는데, 그게 꼭 3년 반 전의 일입니다. 올해 초, 책장에 방치한 책들 가운데 일부라도 소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우자마자 저녁싸리 정사가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제는 그 불편함과 불쾌함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다는 욕심이 불쑥 솟아올랐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수록작인 유머 미스터리 양지바른과() 사건부는 제외하고) 세 편의 단편 모두 다이쇼 시대(1921~1926)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일본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무척 혼란을 겪었던 것으로 기록돼있는데, 그런 분위기는 각 수록작에서 다루는 처연하고 비극적인 죽음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만듭니다.

 

5년 만에 재회한 여동생에 대한 애정이 너무 깊은 나머지 그녀를 희롱하려는 절친한 친구에게 증오심을 품는 오빠('붉은 꽃 글자‘), 유력한 권력자의 아내지만 버림받은 처지가 된 여자와 여덟 살 연하 대학생의 비극적인 정사('저녁싸리 정사‘), 메이지 유신으로 몰락한 왕실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자결을 선택한 전직 군인과 그 아내의 이야기('국화의 먼지‘) 등 세 단편 속의 죽음은 적어도 언론을 통해 또는 경찰 조사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진 바에 의하면 자살 혹은 자결입니다. 하지만 화자의 고백 또는 제3자의 조사를 통해 드러난 죽음 이면의 진실은 전혀 다릅니다. 거기엔 지독한 시기심과 질투심, 타인의 마음을 철저히 기만하고 이용하는 이기심, 자신의 신념을 위해 그 어떤 지독한 업보도 감내하겠다는 집착 등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갖가지 악의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화장 시리즈가 여느 미스터리와 차별되는 건 바로 이런 인간의 악의를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으로 그려낸 점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막론하고 심금을 울릴 정도로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는가 하면, 그들 주변에선 색과 향을 뿜어내는 갖가지 꽃들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혼란과 어둠에 잠식된 시대 속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의 행복과 미래를 놓치지 않으려는 간절함도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악마파 화가가 그린 순수하고 맑은 풍경화처럼 묘한 이질감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흠뻑 빠져들게 되는 농밀한 아름다움이 뒤섞인 느낌이라고 할까요? “비정한 범죄 트릭과 서정적인 사랑의 드라마. 언뜻 보면 섞일 수 없어 보이는 양자가 함께 하면서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라는 평론가 센가이 아키유키의 평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간혹 트릭 자체가 과유불급으로 보인 이야기도 있고, 서사의 심도와 무게를 위해 지나치게 시대성을 강조한 경우도 있으며, 내용보다는 형식만 눈에 띄는 작품도 있습니다. 첫 수록작인 '붉은 꽃 글자화장 시리즈라는 타이틀에 잘 어울려 보인 반면 나머지 두 작품은 발단은 매력적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다소 억지스럽거나 결과론처럼 읽힌 게 사실입니다. 전체적으로 평하자면 회귀천 정사의 수록작들에 비해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컸습니다.

 

화장 시리즈는 절대 급하게 페이지를 넘겨선 안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읽었을 때는 그 맛의 깊이와 농도가 전혀 달라지는 작품입니다. 렌조 미키히코의 독특하고 개성 강한 미스터리에 호감을 가진 독자라면 언젠가 화장 시리즈에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에 수록된 양지바른과() 사건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접하지 못한 렌조 미키히코의 유머 미스터리인데, 재미있긴 하지만 앞선 세 편의 화장 시리즈와 너무 결이 달라서 한 번에 이어 읽으면 좀처럼 빠져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 편의 단편의 여운이 다 가시고 난 후에 따로 읽어야 그 재미를 제대로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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