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상회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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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도쿄. 법의학 분야의 권위자인 무라야마 고도 박사가 자택 정원에서 사체로 발견됩니다. 사체의 상태와 사건 현장은 범인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흉기 역시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정황에서 발견된 탓에 경찰은 당황합니다. 한편 고도 박사의 먼 친척이자 유일한 유족인 미나카미 도시코는 3년 전 저택에 침입하여 큰돈을 훔쳐갔던 도둑 하스노라는 남자를 찾아가 탐정이 되어 고도 박사의 죽음을 조사해줄 것을 의뢰합니다. 하스노 본인은 물론 그의 절친인 화가 이구치는 도시코의 의뢰를 이해할 수 없지만 결국 하스노는 탐정 역할을 맡습니다. 얼마 후 하스노는 저택에서 발견한 몇몇 편지를 통해 국제적인 무정부주의자 비밀결사 교수상회가 고도 박사의 죽음에 연관됐음을 알아냅니다.

 

2023방주를 통해 한국 미스터리 독자들에게 이름을 알린 유키 하루오의 데뷔작이자 제60회 메피스토상 수상작입니다. 워낙 인상 깊게 방주를 읽은 덕분에 그의 데뷔작이 무척 궁금하기도 했고, 1920년의 도쿄를 배경으로 한 본격 미스터리라는 점도 호기심을 자극한 대목입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비롯하여 20세기 초중반이 배경인 미스터리를 좋아하다 보니 시대물의 향기를 진하게 맛볼 수 있을 거라 기대됐기 때문입니다.

 

絞首商會라는 원작 제목을 보곤 교수형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집단의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막연한 상상을 했었는데, 실은 교수상회는 국제적인 무정부주의자 비밀 결사로, 일본 정부와 경찰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위험한 단체입니다. 살인사건 직후 저택에서 발견된 몇 통의 편지에 따르면 교수상회는 자신들을 고발하려는 고도 박사를 대리인을 통해 살해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대리인은 고도 박사 주위의 인물이 분명해보였고, 그로 인해 순식간에 몇몇 인물이 용의선상에 오릅니다.

 

탐정 역할을 맡은 하스노는 무척 특이한 인물입니다. 명문대 졸업 후 은행원이 될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지만 사람을 대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금세 사표를 내버렸고, 그 후로 기행에 가까운 삶을 살면서 3년 전엔 도둑으로 체포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하스노와 콤비 플레이를 펼치는 건 화가 이구치입니다. 하스노가 두뇌라면 이구치는 팔과 다리 역할인 셈인데, 홈즈&왓슨 콤비와는 또 다른 이색적인 버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마지막까지 독자의 궁금증을 일으키는 점 중 하나는 왜 유일한 유족인 도시코가 하필 3년 전 저택에 침입했던 도둑인 하스노에게 탐정 역할을 의뢰했는가?”입니다. 그가 분명 뛰어난 인재인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이 어떻게든 경찰이나 하스노보다 먼저 진범을 알아내기 위해 애를 쓴다는 점입니다. 정의감도 아니고 교수상회에 대한 적개심이나 단순한 호기심도 아닌 그들의 진범 체포에 대한 열의는 오히려 하스노와 이구치의 의심을 살 뿐이고 조사가 거듭될수록 수상한 점만 부각되기 시작합니다.

범인의 정체 못잖게 이 두 가지 미스터리가 독자의 촉각을 자극하는데, 유키 하루오는 막판에 이르러 뜻밖의 해답을 내놓음으로써 독자는 물론 등장인물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듭니다. 물론 범인의 정체와 살해의도 역시 유키 하루오다운 반전을 선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가장 아쉬운 점은 미스터리 규모에 맞지 않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500페이지가 훌쩍 넘지만 개인적으론 길어야 400페이지에 어울리는 이야기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옮긴이의 말“‘방주가 초고속열차라면 교수상회는 시대성이 가득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여유롭게 나아가는 관광열차라는 설명이 있긴 하지만, 굳이 지적하자면 볼거리여유를 너무 많이 제공한 탓에 속도가 과하게 느려진 느낌입니다. 기대했던 시대물의 향기는 원 없이 만끽했지만 방주의 전광석화 같은 서사가 수시로 떠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불어 간혹 현학적인 냄새가 풍긴 무정부주의에 대한 설명이라든가, 지나친 비약적 추리 때문에 명탐정 하스노의 천재성이 현실감을 잃은 점 등이 별 1개를 빼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일본에선 하스노가 이번 사건 이전에 맡았던 사건들을 다룬 단편집 시계 도둑과 악인들이 출간됐다고 합니다. ‘교수상회와 비슷한 스타일이라면 좀 고민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래선지 방주처럼 현대를 배경으로 한 십계의 출간소식이 더 기다려집니다. 유키 하루오 특유의 속도감과 반전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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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클레이머
르네 나이트 지음, 김효정 옮김 / 북플라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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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2015년 같은 출판사와 번역가를 통해 누군가는 알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 있습니다. 서평을 쓴 시점까지도 인터넷 서점에 개정판이라는 정보가 설명돼있지 않았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캐서린의 평온했던 일상은 누군가가 자비로 출판한 낯선 사람이라는 소설을 읽은 뒤로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소설을 쓴 누군가가 샬롯이라는 여주인공을 앞세워 20년 전 캐서린이 스페인의 휴양지에서 겪은 일을 상세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20년 동안 비밀로 삼아왔던 그 일이 폭로된다면 직장은 물론 소중한 가족까지 붕괴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소설을 쓴 자가 누군지는 금세 알아냈지만 캐서린으로서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자가 남편 로버트와 아들 니콜라스에게도 그 소설을 전달하며 캐서린을 완전히 망가뜨리기로 작정했다는 점입니다.

 

작품마다 편차가 크기도 하고 엇비슷한 설정과 캐릭터의 식상함 때문에 기피하게 된 장르가 심리스릴러인데, ‘디스클레이머를 선택한 건 소설의 끔찍한 이야기가 내 과거라면? 나의 비밀이 책이 되어 나타났다.”라는 출판사의 홍보카피에 눈길이 끌렸기 때문입니다.

 

세세한 내용까지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날 오후에 그녀가 입었던 옷의 디자인과 색상, 머리모양까지 정확했다. 그것은 그녀가 기를 쓰고 감추어왔던 삶의 한 토막이었다. 세상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비밀이었다.” (p9)

 

20년 동안 비밀로 삼아온 일이 누군가가 쓴 소설 속에 적나라하게 그려졌다면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소설이 우연이 아니라 명백한 의도를 갖고 쓰인 것이라면, 더구나 소설 속에서 자신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그려졌다면, 또 소설을 쓴 자가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 일부러 책을 배포하고 있다면 그것은 당황의 차원을 넘어 공포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캐서린은 20년 전 그 일을 겪은 직후 남편 로버트에게 솔직히 털어놓지 않은 걸 후회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소설을 쓴 자의 의도를 파악한 뒤엔 수습책이란 게 전혀 없음을 깨닫곤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무엇보다 당시 5살이었던 아들 니콜라스까지 연루된 일이라 캐서린은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니콜라스가 20년 전의 일을 알게 될까봐 전전긍긍합니다.

 

캐서린과 함께 화자를 맡은 건 소설을 쓴 70대 노인 스티븐입니다. 그는 세상을 떠난 아내 낸시가 자신 몰래 간직해온 노트와 사진을 발견한 뒤 큰 충격에 빠졌고, 결국 그것들을 자료삼아 캐서린의 삶, 가족, 직장을 모조리 부숴버리기 위해 소설을 썼습니다. 성치 않은 몸과 굳어버린 학습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캐서린을 궁지에 몰아붙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합니다. 그에겐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심리스릴러 서사대로 이야기의 상당부분은 캐서린과 스티븐,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지인 등 주요 인물들의 요동치는 심리 묘사에 할애됩니다. 후회와 분노, 의심과 갈등, 배신감, 증오심 등 소설 한 편으로 인해 폭발된 여러 인물들의 격한 감정들이 섬세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묘사를 통해 독자의 마음을 쉴 새 없이 흔들어댑니다. 적잖은 심리스릴러 작품들이 동어반복의 지루함을 피하지 못하지만 디스클레이머는 크고 작은 사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속도감과 긴장감을 놓치지 않습니다. 분량 자체도 그리 길지 않고 여러 인물들이 번갈아 화자를 맡은 챕터들은 짧게 구성돼있으며 문장들은 적확한 단어와 비유로 이뤄져있어서 지루함을 느낄 새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20년 간 감춰온 캐서린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이 마지막까지 강력한 페이지 터너로 작동합니다. 예상하기 어렵거나 강력한 반전은 아니지만 막판에 밝혀진 진실은 소설 한 편 때문에 삶의 뿌리까지 뒤흔들렸던 여러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대혼란에 빠뜨립니다.

 

독자에 따라 두 주인공 캐서린과 스티븐의 행동과 태도에 ?”라는 의문점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무수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파국까지 몰고 간 이유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문과 불만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극복해내느냐야말로 심리스릴러로서의 가치와 미덕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라는 생각입니다. 때론 눙치듯 넘어간 대목도 분명 있고, 작가에게 따져 묻고 싶은 장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0,5개를 뺀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전체적으론 독자의 의문과 불만을 충분히 잠식시킬 만큼 완성도 높은 심리스릴러라는 생각입니다. 심리스릴러에 지친 독자라도 디스클레이머는 한번쯤 도전해볼 만한 작품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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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 개정판
마타요시 나오키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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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제153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인 불꽃은 작가가 개그맨 - 유명한 콤비 개그 피스의 멤버인 마타요시 나오키 - 이란 점 때문에 당시 장안에 화제를 몰고 왔다고 합니다. 오랜 무명 시절을 견디는 동안 책에 파묻혔던 그의 독특한 이력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는데, 그래선지 그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이 20대의 10년을 지난하게 살아낸 이야기를 그린 불꽃은 여느 성장 스토리보다 사실적이고 절절하게 읽혔습니다. (본문에는 코미디언과 개그맨이 혼용되고 있는데, 서평에서는 개그맨으로 통일하겠습니다.)

 

20살의 무명 개그맨 도쿠나가는 한 불꽃축제장에서 만난 네 살 위의 선배 개그맨 가미야에게 사제지간이 되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각자 콤비 개그 파트너가 있긴 하지만 두 사람은 가끔씩 만나 개그에 대해, 인생에 대해, 미래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도쿠나가는 가미야에게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경외심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미래를 그리고 있는 듯한 이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지독한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개그에 대한 열정 하나로 모든 어려움을 견뎌내지만 10년이란 시간은 결국 두 사람에게 크고 작은 변화를 피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콤비 개그란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만담’, 즉 스탠드마이크 앞에 선 두 개그맨이 각각 바보 역할과 똑똑이 역할을 맡아 속사포 같은 개그로 관객들을 웃게 만드는 장르입니다. 웃음에 대한 센스는 물론 엄청난 순발력과 임기응변이 필요하며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좀처럼 관객에게 호응을 얻기 쉽지 않습니다.

청소년기부터 이미 개그맨이 되기로 결심했지만 도쿠나가는 재능 자체가 여러 모로 부족한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한 불꽃축제장에서 자신과는 차원이 달라 보이는 개그맨 가미야에게 한눈에 반한 나머지 사제지간을 부탁한 건 그만큼 정열적이라는 뜻이기도, 또한 절박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미야는 도쿠나가와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입니다. 타인의 평가 따윈 신경 쓰지 않으며 자신만의 개그에 대한 신념에 투철한 가미야는 쉽게 말하면 주류 개그를 거부하는 4차원 천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중적으로 성공한 개그맨이라는 평범하고도 상식적인 목표를 가진 도쿠나가와는 전혀 상반된 가치관을 지닌 셈입니다. 마치 물과 기름과도 같은, 섞이기 어려운 차이라고 할까요?

도쿠나가가 가미야와 함께 보낸 10년은 바로 그 차이 때문에 고민하고, 그 차이를 따라잡으려 애쓰다가 결국 그 차이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개그맨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훌쩍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통 리스크뿐인 무대에 서서 상식을 뒤엎는 것에 전력을 다해 도전하는 자만이 코미디언이 될 수 있다. 긴 세월을 들인 이 무모한 도전으로 나는 내 인생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p204)

 

개그맨이 쓴, 개그맨에 관한 소설이라고 해서 다소 가벼운 서사에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힐링 코드가 담긴 이야기가 아닐까, 지레 편견 섞인 짐작을 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마치 개그맨은 삶 자체도 개그 같을 것이라는, 지독한 폄하와 다를 바 없는 부끄러운 짐작이었습니다. ‘불꽃은 남들을 웃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과 연습과 좌절이 필요한지, 가난이라는 현실과 손에 닿지 않는 이상 사이에서 얼마나 깊은 절망을 숱하게 겪어야 하는지, 그리고 관객들의 덧없는 반응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도 허무한 일인지를 진지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부족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열정을 놓치지 않는 도쿠나가와 주류 개그에 어울리지 않는 고독한 천재 가미야는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어울리는 엔딩을 맞이하게 됩니다.

 

개그와 세상과 인간에 대한 가미야의 난해한 궤변(?)과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다소 어려운 문장들 때문에 간혹 같은 페이지를 여러 번 되읽을 때도 있지만 불꽃은 한나절이면 충분히 완독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스토리가 아니라 사람을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 그저 한 번의 독서로는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하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두 사람의 10년이 워낙 지난하고 굴곡이 많은 탓에 어쩌면 읽을 때마다 그 맛이 조금씩 달라질 것 같기도 합니다. 언젠가 두 사람의 개그가 생각날 때면 한나절 정도 그들의 10년을 다시 한 번 맛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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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체조 닥터 이라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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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더 풀’, ‘공중그네’, ‘면장선거에 이은 닥터 이라부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일본 출간 기준으로 면장선거이후 17년 만인 2023년에 출간됐는데, 세월이 적잖이 흘렀지만 정신과 의사 이라부 이치로와 간호사 마유미 콤비는 여전히 17년 전 그 나이를 살아가는 중입니다. 물론 괴짜와 마녀라는 캐릭터도 여전합니다. “괜찮아, 괜찮아.”를 남발하며 환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이라부는 누구에게든 뒤룩뒤룩 살찐, 다리 짧은 중년 아저씨라는 첫인상을 남기고, 표정 없는 얼굴에 미니 원피스 간호복을 입고 특대형 비타민 주사를 들이미는 마유미 역시 예전의 그 카리스마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라부의 17년 만의 복귀 이유에 대해 오쿠다 히데오는 코로나를 언급합니다. 팬데믹의 공포 속에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황폐해진 현대인들을 지켜보며 정신과 의사 이라부라면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절 외출 자제, 재택근무, 원격수업 등 사람들로 하여금 고립된 상황에서 불안과 혼란을 느끼게 만든 시스템들이 만들어졌고, 그 결과는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지겹도록 들은 바 있습니다. 우울증을 비롯하여 많은 정신적 질병들이 급증했고, 사람들은 낯설고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라디오 체조속 다섯 편의 수록작에 등장하는 환자들이 모두 팬데믹의 희생자들로 설정된 건 아니지만 요즘 세상에선 더는 낯설지 않은 정신적 상처들을 지니고 있어서 다만 일부 인물이라도 나도 조금은 그런 것 같은데...”라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시청률에 목을 맨 나머지 의존증과 주의력 결핍에 걸린 뉴스쇼 PD, 부당한 일에 화가 나지만 제대로 화를 낼 줄 몰라 공황장애와 과호흡을 겪는 세일즈맨, 데이트레이더가 된 후 100억이란 큰돈을 벌었지만 히키코모리처럼 삶이 황폐해진 남자, 어느 날 갑자기 광장공포증에 빠져 대혼란을 겪게 된 전도유망한 피아니스트, 그리고 자의식이 강한 나머지 팬데믹이 끝난 후에도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된 대학생 등 누구나 조금씩은 갖고 있지만 유독 그 증세가 심각하게 나타난 인물들이 이라부의 진료실을 찾습니다.

 

망했다. 이 의사는 완전 미쳤다. 이라부는 원래부터 사고 회로가 이상한 것이다.” (p343)

 

창고 같은 진료실에 괴짜 같은 외모도 놀랍지만 이라부의 기이한 처방은 환자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피하고 싶은 상황과 직접 대면하게 만들기도 하고, 도저히 치료라고 볼 수 없는 황당하고 비상식적인 지시를 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 한 적당히 힘을 빼라고, 너무 힘주고 살지 말라고, 그러니 괜찮다고 말하며 부지불식간에 환자의 마음을 풀어주곤 합니다. 반신반의하던 환자들은 어느 샌가 이라부의 황당한 처방이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편하게 만들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실은 이라부의 처방은 의사가 환자에게 가하는 치료라기보다는 환자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스스로의 힘으로 딛고 일어설 수 있게 거드는 일종의 위약(플라시보)이나 다름없습니다. 지시하는대로 따라오라는 권위적인 의사가 아니라 환자에게 거울을 내밀고 스스로를 지켜봐라.”라고 권하는 마음씨 좋은 이웃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선지 이라부의 캐릭터도, 그가 내리는 처방도 모두 현실에선 절대 만나볼 수 없는 판타지라는 걸 잘 알면서도 독자는 어딘가 그런 의사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기행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괴짜 콤비 이라부와 마유미를 통해 웃음과 온기를 전파하는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유머와 힐링 메시지는 오래 전에 읽은 시리즈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어서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전작들을 순서대로 한 편씩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세상이 답답하고 마음이 팍팍해질 때, 황당한 처방을 남발하는 이라부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명의는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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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야가의 밤 - 각성하는 시스터후드 첩혈쌍녀
오타니 아키라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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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흉기라고 할 만큼 순수한 폭력의 화신인 22살의 신도 요리코. 어느 날 자신을 성추행한 양아치 일당을 무자비하게 때려눕히던 중 야쿠자 회장의 저택으로 끌려간 그녀는 회장의 딸인 18살 쇼코의 운전기사이자 보디가드가 되라는 어이없는 협박성 제안을 받습니다. 개죽음만은 피하고 싶었던 요리코는 이후 저택에 머물며 마치 인형처럼 감정도, 표정도 없어 보이는 쇼코의 시중을 들게 됩니다. 어색하고 냉랭하기만 했던 둘의 관계는 사소한 일탈을 계기로 조금씩 녹기 시작했고 가슴에 담아뒀던 이야기까지 꺼내는 단계에 이릅니다. 하지만 야쿠자 저택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태로 인해 두 사람의 운명은 예기치 못한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윈저 노트, 여왕의 비밀 수사 일지’(소피아 베넷), ‘세상 끝의 살인’(아라키 아카네)과 함께 북스피어의 첩혈쌍녀 시리즈로 출간된 작품입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시리즈 명칭에 진심으로 걸맞은 작품으로, 순수한 폭력을 갈구하는 싸움의 신신도 유리코와 야쿠자 회장의 금지옥엽나이키 쇼코가 벌이는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와도 같은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편집자인 삼송 김사장 님의 평을 조합해서 정리하면 이 작품의 장르는 심장 떨리는 하드보일드 바이올런스 액션 스릴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훗카이도의 외진 마을에서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에 의해 고문에 가까운 훈련을 받은 요리코는 몸과 마음 모두 폭력이 주는 희열에 빠진 채 성장했습니다. 18살이 되어 도쿄에 온 요리코는 싸움꾼이 되진 않았지만 누군가 시비를 걸어오면 반드시 두 배로 갚아주며 폭력의 쾌감을 만끽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폭력 재능에 반한 야쿠자가 숱한 희생을 치러가면서 그녀를 회장 딸 쇼코의 보디가드로 삼기 위해 끌고 간 것입니다.

피지컬도 멘탈도 강한 여성, 게다가 싸우기 위한 동기가 내면에서 솟아나는 여성을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 오타니 아키라는 영웅적인 여주인공에게 반드시 필요한 싸워야 할 이유’, 즉 가족이나 연인이나 친구를 위한 복수심 같은 것 없이도 순수하게 폭력을 갈망하고 희열을 느끼는 요리코를 창조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멋있으면서도 폭력적인 남성 영웅 중에는 굳이 아무 이유 없이도 매력적으로 그려진 경우가 적지 않으니 오타니 아키라의 일성은 충분히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튼... ‘보디가드요리코와 아가씨쇼코의 관계가 조금씩 풀어지며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는 지점까지만 해도 오락성이 풍부한 재미 만점의 해피엔딩 액션 스릴러라고 단정하고 있다가 중반부쯤의 예기치 못한 전개에 꽤 세게 뒤통수를 맞은 순간엔 말 그대로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오고 말았습니다. 무자비한 야쿠자의 세계에서 요리코와 쇼코가 말랑말랑한 해피엔딩을 맞이할 거라고 예상하진 않았지만, 극적인 반전과 함께 이야기의 톤 자체가 처절함과 처연함으로 급변하는 대목에선 단순한 놀람 이상의 충격을 받고 말았습니다. 다 읽은 뒤 인터넷서점 출판사 소개글에서 발견한 이 지옥 같은 세계에서 등을 맡기고 싸우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라는 일본 아나운서 우가키 미사토의 한 줄 평은 그 반전을 읽은 순간의 제 심정을 100%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삼송 김사장 님은 아주 깜찍한 반전이라고 표현하셨지만 저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묵직한 반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바야가의 밤2021년 제74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장편부문에서 최종 후보에 올랐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론 신초샤(新潮社)가 주관하는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R-18 문학상에 어울리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심장 떨리는 하드보일드 바이올런스 액션 스릴러지만 동시에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치열하고 리얼한 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요리코와 쇼코는 연인도, 친구도 아니지만 그 이상의 연대로 묶인 시스터후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슬라브 신화에 등장하는 마귀할멈 바바야가처럼 엄청 강하고, 마을사람들이 무서워하지만 착하고 친절한 여자애가 간절히 부탁하면 어려운 일을 도와주기도 하는사람이 되고 싶다는 두 여자가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남성 야쿠자의 세계를 벗어나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과정은 무척이나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사족 1. 요리코가 순수한 폭력의 화신이며 이야기의 주 무대가 야쿠자의 저택인 만큼 꽤 높은 수위의 폭력적인 묘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사족 2. 오타니 아키라의 또 다른 한국 출간작 우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진심으로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소설 같은데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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