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죽인 여자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푸른숲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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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사르다 가족의 막내딸 17살 아나가 토막 난 채 불에 탄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단서 하나 찾지 못한 가운데 경찰은 불특정 성범죄자의 소행으로만 여겼고 금세 미제 사건으로 처리하고 맙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르다 가족은 산산조각 났고, 둘째딸 리아는 아나의 죽음에 조금의 의문도 품지 않은 채 종교적 허식으로 종결지으려는 가족들을 향해 자신은 무신론자라는 폭탄선언을 한 뒤 스페인으로 떠나버렸습니다.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준 아버지 알프레도와만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냈지만, 리아는 알프레도가 지난 30년 동안 아나의 죽음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홀로 싸워온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태어났다는 사실밖에 몰랐던 조카 마테오가 자신을 찾아와 알프레도의 편지를 전하자 큰 충격에 빠집니다.

 

아르헨티나의 대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디아 피녜이로는 2023엘레나는 알고 있다신을 죽인 여자들을 통해 처음으로 한국 독자와 만난 작가입니다. 주로 범죄소설을 집필해왔고 신을 죽인 여자들의 경우 그해 가장 뛰어난 범죄소설에 수여되는 대실 해밋 상을 만장일치로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범죄소설은 일반적인 미스터리나 스릴러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입니다. 며칠 전 읽은 엘레나는 알고 있다는 파킨슨병 환자인 어머니가 딸의 죽음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겪은 만 하루 동안의 여정을 그리고 있지만, 여성, 성역할, 종교사회의 억압, 가부장적 문화, 자기결정권 등 묵직한 주제가 서사의 중심입니다. ‘신을 죽인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미스터리 본연의 서사가 좀더 강하긴 하지만 역시 여성과 종교라는 주제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작품입니다. 대실 해밋 상 수상소감에서 나는 이것이 투쟁의 결과라고 느꼈다. 책과 나, 그리고 수많은 여성들이 오랫동안 싸워온 것에 대한 상이다.”라고 밝힌 걸 보면 이 작품의 경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은 종교에 관한 한 다소 극단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종교적 해석으로 귀결 짓는 광신도에서부터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무신론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30년 전에 벌어진 사르다 가족의 비극의 이면에는 이 바로 이 종교적 갈등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작가는 그 갈등이 여성에게 더욱 가혹하다는 점,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진실을 숨기는지를 ‘30년 전 사건의 진실 찾기 여정을 통해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이야기는 여섯 명의 인물이 한 챕터씩 화자를 맡아 전개됩니다. 동생 아나의 죽음을 계기로 무신론자임을 선언하곤 가족과 조국을 떠난 둘째딸 리아, 할아버지 알프레도의 영향으로 종교의 허상을 내다버린 뒤 그가 남긴 세 통의 편지를 들고 스페인에 사는 이모 리아를 찾아가는 마테오, 절친인 아나가 목숨을 잃을 당시 함께 있다가 기억 장애를 겪게 된 마르셀라, 30년 전 초짜 법의학자로 유일하게 아나의 죽음에 의심을 품었던 엘메르, 리아와 아나의 언니인 카르멘을 아내로 둔 훌리안, 그리고 사르다 집안의 장녀이자 카리스마로 똘똘 뭉친 광신도 카르멘이 그들입니다. 마지막 에필로그는 딸의 죽음의 진실을 30년 동안 추적해온 알프레도의 편지로 장식됩니다.

 

여섯 명의 인물은 사건이 벌어진 30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겪은 일을 마치 참회록 또는 고해성사처럼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나의 죽음의 진상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누가, 왜 그토록 잔혹한 방식으로 아나를 살해하고 토막 내고 불태웠는가, 라는 미스터리가 독자의 눈길을 끌긴 하지만 서사의 핵심은 앞서 언급한대로 여성과 종교입니다. 왜 아나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녀를 죽음으로 이끈 자들은 누구이며 그들에게 물어야 할 죄는 무엇인가? 그녀의 죽음에 종교는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가? 이런 주제의식이 워낙 강렬해서 그런지 이 작품의 번역 제목 신을 죽인 여자들대신 신이 죽인 여자들이 더 어울려 보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원제 ‘Catedrales’대성당이라는 뜻으로 레이먼드 커버의 동명 단편소설에 따왔다고 합니다.)

 

다 읽고 첫 페이지를 다시 보니 처음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던 헌사가 새롭게 읽혔습니다. “하느님 없이, 저들만의 대성당을 짓는 이들에게라는, 종교적 허상과 맹신을 향한 조소 섞인 헌사는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을 절묘하면서도 진정성 있게 함축해놓은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종교, 여성, 도덕 등 좀더 넓은 의미의 사회적 문제와 모순을 다루는, 문학성이 깃든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 헌사야말로 그에 걸맞은 상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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