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는 알고 있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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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 번개를 동반한 큰비가 쏟아진 어느 밤, 독실한 가톨릭 신자 리타가 성당 종탑에 목을 맨 채 발견된다. 사건은 자살로 종결되지만 리타의 어머니 엘레나는 딸이 살해당했음을 주장하며 재수사를 요구한다. 딸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자신이라고, 사건의 진실은 따로 있다고 확신하는 엘레나. 그러나 누구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본인 또한 병을 앓고 있어 직접 수사에 나서기는커녕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는 처지다. 상실감과 무력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엘레나는 불현듯 이십 년 전 리타에게 큰 빚을 진 여자 이사벨을 떠올린다. 리타의 도움으로 무사히 아이를 낳아 가족을 이룬 이사벨. 엘레나는 이사벨이라면 진실을 대신 파헤쳐주리라 기대를 안고 기차에 오른다.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엘레나는 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임을 입증하려는 간절함 가득한 어머니지만 동시에 파킨슨병으로 인해 자신의 몸을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중증 환자이기도 합니다. 작가나 작품에 대한 정보를 모르는 상태에서 읽기 전만 해도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심리학자 조 올로클린(마이클 로보텀이 창조한 스릴러 시리즈 주인공)을 떠올렸던 게 사실인데, 실은 이 작품은 영어판 번역자의 말대로 범죄소설처럼 시작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줄거리를 품고 있습니다. 시작은 딸의 죽음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려는 파킨슨병에 걸린 엄마의 분투지만 몸통은 여성, 성역할, 종교사회의 억압, 가부장적 문화, 자기결정권 등 묵직하면서도 행간에 숨은 의미가 무척 깊은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엘레나가 딸의 죽음에 관해 대신 조사해줄 이사벨을 찾아가는 하루 동안의 여정을 그립니다. 중증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엘레나에게는 발걸음 하나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목 근육까지 손상돼서 그녀의 시선은 늘 바닥에 고정돼있고 그런 탓에 수시로 침이 흘러내리는 수치스러운 상황까지 감내해야만 합니다. 작가는 엘레나의 이런 일거수일투족을 지독하리만치 디테일하게 묘사합니다. “독자는 엘레나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엘레나의 생각에 집중한다. 독자는 엘레나라는 인물에 파묻혀버린다.”라는 추천의 말을 쓴 정보라의 표현대로 독자는 어느새 추리소설과는 전혀 다른 영역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됩니다.

 

기차와 택시를 번갈아 타며 지난한 여정을 거치는 동안 엘레나는 딸 리타와의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돌아봅니다. ‘여성으로서 당연한 삶을 살아온 자신과는 다르게 결혼도 출산도 거부했던 리타. 짝수년마다 떠난 모녀의 여행에서 채찍질을 하듯 모진 소리를 퍼부으며 자신과 싸우곤 했던 리타.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교리에 대해 무심하거나 반발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톨릭 학교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때론 타인에게 가톨릭 교리를 앞세우곤 했던 리타.

엘레나의 회상은 희로애락을 오가지만 대부분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관점에서 서술됩니다. 하지만 이 모성애는 독자에게는 오히려 불안감을 고조시키는 시한폭탄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리타도 과연 그러했을까, 라는 의문과 함께 말입니다.

 

엘레나가 도움을 받기 위해(엘레나의 관점에선 빚을 받기 위해’) 방문한 이사벨은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제 - 여성의 성역할, 육체의 존재의 의의, 자기결정권 등을 드러내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엘레나로 하여금 리타와의 관계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역할도 맡고 있습니다. ‘엘레나의 도우미가 될 거라는 초반부의 나이브한 기대와는 달리 20년 전 엘레나 모녀와 맺은 인연이 그녀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주며 묵직한 여성 서사를 발산하는 인물입니다.

 

좀 심할 정도로 장르물에 편식하는 취향이라 다소 낯선 아르헨티나의 여성 미스터리라는 카피 한 줄만 보고 덥석 집어 들었던 작품인데, 고백하자면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은 책읽기가 됐습니다. 무겁든 가볍든 선명하고 확실한 서사를 좋아하다 보니 이렇듯 단어 하나, 문장 하나는 말할 것도 없고 행간의 의미와 무게에까지 집중해야 하는 작품은 다소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옮긴이의 말추천의 말까지 다 읽고 나니 이 작품의 의미가 좀더 확연하게 다가온 건 사실입니다. 아마 한 번 더, 그리고 천천히 집중해서 읽는다면 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맛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넷플릭스에서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공개된 걸로 아는데,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챙겨보려고 합니다.

 

엘레나는 알고 있다에 이어 대실 해밋 상을 수상한 신을 죽인 여자들이 최근 출간됐습니다. 소개글에 따르면 세 자매의 종교적 신념을 소재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압제를 폭로한 뛰어난 범죄 소설이라고 하는데,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범죄소설가로서의 명성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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