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유희
이가라시 리쓰토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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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간 사법시험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했지만 호토대학교 로스쿨에는 뛰어난 세 명의 인재가 있습니다. 이미 사법시험에 합격하고도 로스쿨에 들어온 괴짜 천재 유키 가오루, 사법시험 합격이 유력해 보이는 구가 기요요시와 오리모토 미레이가 그들입니다. 실제로 기요요시와 미레이는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가오루는 예상과 달리 법조인 대신 학자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살인사건의 피해자, 가해자, 변호인의 처지로 재회합니다. 가오루가 칼에 찔린 시신으로 발견된 가운데 미레이가 현장에서 범인으로 체포됐고 기요요시는 미레이의 변호인이 되어 재판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0.1%도 되지 않는 승산에 기요요시는 애가 타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구치소에 갇힌 미레이는 좀처럼 기요요시에게 협조하지 않습니다.

 

현직 변호사인 이가라시 리쓰토는 2023뒤틀린 시간의 법정으로 한국 독자와 처음 만났습니다. 법정 미스터리를 좋아하지만 타임 슬립 코드가 깔려 있어서 구매목록에서 뺐던 작품인데, ‘법정유희를 읽고 나니 조만간 다시 장바구니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작 제목도 法廷遊戯인데 유희(네이버 사전을 그대로 인용하면) ‘즐겁게 놀며 장난함. 또는 그런 행위’. 영어로는 ‘play’, ‘game’을 뜻합니다. 실제로 이 작품 속엔 법의 테두리 안에서, 또 법정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갖가지 유희가 등장합니다. 다만 즐거운 놀이나 장난과는 거리가 먼 어둡고 길고 고통스러운 한 판의 게임이 벌어집니다.

 

죄와 벌, 제재와 구제, 무고와 원죄(冤罪) 등 법을 둘러싼 묵직하고 심오한 주제들이 이야기 전반에 흐르고 있고,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분투하는 미스터리의 매력도 잘 살아있어서 진지한 법정 미스터리이면서도 모든 복선이 하나로 연결되는 본격 미스터리 특유의 쾌감을 선사한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작품입니다. 동시에 오래 전부터 여러 겹의 악연으로 얽혀온 세 주인공이 법정 안팎에서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는 비극도 미스터리 못잖게 눈길을 끌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과 비슷한 암담하고도 먹먹한 분위기까지 더해져 마지막 장까지 독자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어버립니다.

 

법률 전문용어가 꽤 많이 등장하기도 하고, 인물들의 심리나 속내를 에둘러 표현한 부분도 종종 있어서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는 작품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런 느린 책읽기 덕분에 세 주인공의 비밀과 거짓말, 숨은그림찾기처럼 정교하게 설치된 복선들, 0.1%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법정 안팎의 긴장감 등에 좀더 몰입할 수 있었고, 또 그런 몰입 덕분에 막판에 연이어 터지는 불꽃놀이 같은 반전의 참맛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정당한 죗값은 누가 정해야 하는 걸까?”라는 심오한 주제와 함께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아들이는 길벌을 거부하고 죄와 마주하는 길을 선택하는 인물들의 고뇌와 갈등 역시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좀 복잡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스포일러가 될 여지들이 너무 많아서 세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도, 법정에서 벌어지는 공방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가 조심스러운 작품입니다. 달리 말하면 소개글이나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접하지 말고 바로 본편을 읽어야 이 작품의 맛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정 궁금하다면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 출판사의 소개글 정도만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가라시 리쓰토는 한국에 소개된 두 작품 외에도 일본에서 꽤 여러 편의 법정 미스터리를 출간한 걸로 검색되는데, 조만간 그의 세 번째 작품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필명을 律人으로 정할 정도로 법룰의 매력을 전하기 위하여 꾸준히 소설을 발표해 왔다는 이가라시 리쓰토의 진심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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