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상회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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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도쿄. 법의학 분야의 권위자인 무라야마 고도 박사가 자택 정원에서 사체로 발견됩니다. 사체의 상태와 사건 현장은 범인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흉기 역시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정황에서 발견된 탓에 경찰은 당황합니다. 한편 고도 박사의 먼 친척이자 유일한 유족인 미나카미 도시코는 3년 전 저택에 침입하여 큰돈을 훔쳐갔던 도둑 하스노라는 남자를 찾아가 탐정이 되어 고도 박사의 죽음을 조사해줄 것을 의뢰합니다. 하스노 본인은 물론 그의 절친인 화가 이구치는 도시코의 의뢰를 이해할 수 없지만 결국 하스노는 탐정 역할을 맡습니다. 얼마 후 하스노는 저택에서 발견한 몇몇 편지를 통해 국제적인 무정부주의자 비밀결사 교수상회가 고도 박사의 죽음에 연관됐음을 알아냅니다.

 

2023방주를 통해 한국 미스터리 독자들에게 이름을 알린 유키 하루오의 데뷔작이자 제60회 메피스토상 수상작입니다. 워낙 인상 깊게 방주를 읽은 덕분에 그의 데뷔작이 무척 궁금하기도 했고, 1920년의 도쿄를 배경으로 한 본격 미스터리라는 점도 호기심을 자극한 대목입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비롯하여 20세기 초중반이 배경인 미스터리를 좋아하다 보니 시대물의 향기를 진하게 맛볼 수 있을 거라 기대됐기 때문입니다.

 

絞首商會라는 원작 제목을 보곤 교수형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집단의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막연한 상상을 했었는데, 실은 교수상회는 국제적인 무정부주의자 비밀 결사로, 일본 정부와 경찰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위험한 단체입니다. 살인사건 직후 저택에서 발견된 몇 통의 편지에 따르면 교수상회는 자신들을 고발하려는 고도 박사를 대리인을 통해 살해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대리인은 고도 박사 주위의 인물이 분명해보였고, 그로 인해 순식간에 몇몇 인물이 용의선상에 오릅니다.

 

탐정 역할을 맡은 하스노는 무척 특이한 인물입니다. 명문대 졸업 후 은행원이 될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지만 사람을 대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금세 사표를 내버렸고, 그 후로 기행에 가까운 삶을 살면서 3년 전엔 도둑으로 체포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하스노와 콤비 플레이를 펼치는 건 화가 이구치입니다. 하스노가 두뇌라면 이구치는 팔과 다리 역할인 셈인데, 홈즈&왓슨 콤비와는 또 다른 이색적인 버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마지막까지 독자의 궁금증을 일으키는 점 중 하나는 왜 유일한 유족인 도시코가 하필 3년 전 저택에 침입했던 도둑인 하스노에게 탐정 역할을 의뢰했는가?”입니다. 그가 분명 뛰어난 인재인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이 어떻게든 경찰이나 하스노보다 먼저 진범을 알아내기 위해 애를 쓴다는 점입니다. 정의감도 아니고 교수상회에 대한 적개심이나 단순한 호기심도 아닌 그들의 진범 체포에 대한 열의는 오히려 하스노와 이구치의 의심을 살 뿐이고 조사가 거듭될수록 수상한 점만 부각되기 시작합니다.

범인의 정체 못잖게 이 두 가지 미스터리가 독자의 촉각을 자극하는데, 유키 하루오는 막판에 이르러 뜻밖의 해답을 내놓음으로써 독자는 물론 등장인물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듭니다. 물론 범인의 정체와 살해의도 역시 유키 하루오다운 반전을 선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가장 아쉬운 점은 미스터리 규모에 맞지 않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500페이지가 훌쩍 넘지만 개인적으론 길어야 400페이지에 어울리는 이야기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옮긴이의 말“‘방주가 초고속열차라면 교수상회는 시대성이 가득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여유롭게 나아가는 관광열차라는 설명이 있긴 하지만, 굳이 지적하자면 볼거리여유를 너무 많이 제공한 탓에 속도가 과하게 느려진 느낌입니다. 기대했던 시대물의 향기는 원 없이 만끽했지만 방주의 전광석화 같은 서사가 수시로 떠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불어 간혹 현학적인 냄새가 풍긴 무정부주의에 대한 설명이라든가, 지나친 비약적 추리 때문에 명탐정 하스노의 천재성이 현실감을 잃은 점 등이 별 1개를 빼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일본에선 하스노가 이번 사건 이전에 맡았던 사건들을 다룬 단편집 시계 도둑과 악인들이 출간됐다고 합니다. ‘교수상회와 비슷한 스타일이라면 좀 고민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래선지 방주처럼 현대를 배경으로 한 십계의 출간소식이 더 기다려집니다. 유키 하루오 특유의 속도감과 반전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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