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세는 천하를 잡으러 간다
미야지마 미나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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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에서 단박에 느껴지는, 어딘가 4차원스러운 10대 소녀가 주인공인 청춘물은 실은 제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은 먼 장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가진 이유는 이 연작단편집의 첫 수록작 고마웠어! 오쓰 세이부백화점!’이 제20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R-18 문학상대상 수상작이기 때문입니다.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구보 미스미)화소도중’(미야기 아야코)장르물 일본소설 가운데 베스트로 꼽을 만큼 매력적인 작품들인데 이 두 작품 모두 ‘R-18 문학상수상작이라 같은 상을 수상한 나루세는 천하를 잡으러 간다를 조금의 고민도 없이 장바구니에 담았던 것입니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주인공 나루세 아카리는 각 수록작을 통해 중학교 2학년부터 고교 3학년까지의 성장과정을 보여줍니다. 주위의 시선이나 평가 따윈 신경 쓰지도 않으며 오직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자신이 바라는 꿈만을 위해 돌직구처럼 살아가는 나루세의 삶은 그저 괴짜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4차원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루세가 민폐녀 혹은 반골녀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누구도 기분 나쁘게 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의 길을 걸을 뿐입니다. 44년의 역사를 지닌 백화점이 문을 닫게 되자 그 마지막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 나는 올여름을 세이부에 바칠까 한다.”라는 말과 함께 여름방학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곳을 찾는다든가, “나는 개그의 정점을 찍을까 한다.”라는 뜬금없는 목표를 세우곤 전국적인 만담 대회에 출전하는가 하면, 지금껏 누구도 이루지 못한 200살의 수명에 도달하기 위해 규칙적인 운동과 올바른 생활습관을 견지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문득 뭔가 하고 싶어지면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직진하는 순도 100%의 노력파라고 할까요?

그런 나루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건 거의 대부분 다나까로 처리된 어미입니다. 애어른이 하는 말 같기도 하고, 전국시대의 무장이나 미래의 로봇의 말투 같기도 한 나루세의 화법은 그녀만의 독특한 캐릭터와 절묘하게 조합이 돼서 읽는 내내 웃음을 자아냅니다.

 

평범하지 않은 성격 때문에 또래들에게 배척당하기도 하지만 나루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딘가 감각 하나가 망가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신을 향한 비난이나 공격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화이트 사이코패스처럼 보일 때도 있는데, 그런 나루세도 성장과 함께 특별한 경험들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는다든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마음의 상처와 후회에 사로잡힌다든가, 누군가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낀다든가 - 을 하나둘 겪으면서 조금씩 자신 외의 존재들과 소통하며 그 또래에 어울리는 삶과 사고방식에 익숙해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익숙함은 결코 부정적인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루세가 좀더 크고 드넓은 세상으로 나가게 만드는 통과의례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소망대로 200살까지 살더라도 나루세는 여전히 나루세로 살아갈 게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수록작 중엔 나루세가 완전 조연으로만 등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그런 작품들은 나루세의 친구들이나 소도시(나루세의 고향이자 이 작품의 주 무대인 시가현오쓰시)의 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소박한 일상과 인간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간혹 울컥하게 만들기도 하는 그들의 이야기엔 일본소설 특유의 정갈하면서도 따뜻한 행복감이 잘 배어있어서 나루세의 성장담과 함께 깊은 여운을 맛보게 해줍니다.

 

작가는 책머리의 서문을 통해 나루세처럼 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주변에 많습니다. 그런 소망을 투영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면...”이라는 바람을 밝히고 있습니다. 비록 기대했던 ‘R-18 문학상수상작의 특별한 맛을 즐기진 못했지만(앞서 언급한 두 작품은 모두 19금인데다 이야기가 무척 세고 독합니다), 심각한 장르물 편식 와중에 나루세 덕분에 잠시나마 웃음과 휴식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후속편인 나루세는 믿었던 길을 간다20241월에 출간됐다고 하는데, 좀더 큰 세상으로 나와 대학생 혹은 사회 초년생이 됐을 나루세가 어떻게 자신의 고집과 꿈을 더 단단하게 키워나가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나루세의 두 번째 이야기를 읽을 기회가 꼭 찾아오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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