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갇힌 외딴 산장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산장 3부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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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오디션에 합격한 7명의 남녀가 연출가의 지시를 받고 외딴 펜션에 모입니다. 하지만 연출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편지를 통해 “34일 동안 연극의 모든 것을 배우들 스스로 구성해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특이한 건 펜션을 폭설로 고립된 산장으로 여기라는 것,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금지시킨 점입니다. 또한 뜻밖의 일이 벌어지더라도 연극의 일환으로 받아들이라는 애매한 부언까지 남깁니다. 어리둥절한 채 하룻밤을 보낸 일행은 충격적인 아침을 맞이합니다. 배우 한 명이 사라졌고 그 자리엔 살인을 암시하는 쪽지가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논란 끝에 연극의 일부라고 결론 내렸지만 다음 날 또 한 명이 사라지고 명백한 실제 살인의 단서가 발견되자 일행은 현실인지 연극인지 구분할 수 없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편의상 붙인 이름이겠지만 이 작품은 하쿠바산장 살인사건’(1986, 구판 제목은 백마산장 살인사건’)가면산장 살인사건’(1990)에 이은 히가시노 게이고 산장 3부작의 한 편입니다. 일본에서 1992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클로즈드 서클’, 즉 밀실살인을 소재로 다루고 있어서 다분히 고전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고립된 산장’, ‘연이어 발견되는 시체’, ‘범인은 일행 중 한 명이라는 전형적인 공식을 따르고 있지만, 이 작품은 펜션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가 실제 벌어진 살인사건인지 연극 연습의 일환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7명의 배우는 물론 독자마저 혼란에 빠뜨린다는 점에서 나름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사건이 벌어진 직후만 해도 모두들 연극 연습이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두 번째 사건과 함께 명백한 살인 도구가 발견되면서 큰 혼란에 빠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사건이라는 주장과 연극 연습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펜션에 모인 배우들은 공포에 휩싸입니다. 실제 사건임을 전제로 범행 동기를 캐려는 갑론을박도 벌어지지만 그 어떤 추리도 금세 모순이 드러나고 막다른 벽에 부딪힙니다. 독자 역시 배우들의 혼란을 고스란히 체감하게 되는데 동시에 현실이든 연극이든 그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왠지 김이 샐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을 피할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독특한 해법과 엔딩을 제시합니다. ‘현실이냐 연극이냐라는 이분법적 추리를 뛰어넘는 엔딩은 독자에 따라 다소 억지스럽게 받아들일 여지가 많은 게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론 고전적이면서도 꽤 참신한 해법으로 보였습니다. ‘누가 범인?’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의외의 진실 덕분에 기분 좋은 정도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랄까요?

요약하자면, 요즘의 독자 눈높이에 어울리는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가끔 특별한 간식이 생각나듯 아날로그 냄새가 폴폴 풍기는 고전을 읽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질 때 집어 들면 딱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새삼 오래 전에 읽은 하쿠바산장 살인사건과 아직 읽지 못한 가면산장 살인사건을 읽고 싶어졌는데, 연이어 읽기보다는 특별한 간식이 생각날 때를 기다려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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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의 밤 안 된다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청미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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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의 밤은 전작인 절벽의 밤에 이은 이른바 안 된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명이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두 편 모두 수록된 단편들의 제목이 하나같이 ‘~해서는 안 된다로 끝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도 이 시리즈의 명칭은 いけないシリーズ입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단편의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을 통해 독자 스스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터무니없이 어렵진 않아서 저처럼 둔한 독자라도 대부분 진상을 알아챌 수는 있는데, 두 작품 모두 딱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마지막에 실린 옮긴이의 말의 힘을 빌려야만 했습니다. 혹시 미션에 실패하더라도 이어지는 수록작에 그 진상이 설명되는 경우도 있으니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없습니다.

 

전작인 절벽의 밤이 자살 명소로 유명한 유미나게 절벽을 배경으로 삼았다면 폭포의 밤은 모란꽃으로 유명한 미고오리 시 주변의 명승지들이 사건의 주 무대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그 명승지들의 이름은 불길한 뜻이나 유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쿠레이 산에는 죽는다’, 고코 강에는 죽은 뒤 신에게 바쳐지는 공물’, 묘진 폭포에는 저승’, 무쿠로 다리에는 송장이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기이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지만 미스터리는 쉽사리 풀리지 않습니다. 또 주요 인물 대부분이 각 단편에 번갈아 등장한다는 점, 즉 사건은 달라도 이런저런 식으로 얽혀있다는 설정 때문에 미스터리는 더욱 복잡하고 흥미롭게 전개되기도 합니다.

 

수사를 맡은 주인공은 이제 형사과에 배치된 지 1년밖에 안 돼서 처음으로 살인사건과 마주하게 된 신참 구마지마입니다. (실은 구마지마의 형도 형사였는데, 그는 전작인 절벽의 밤에 등장한 바 있습니다.) 피의자 심문조차 처음 겪는 구마지마는 어설픈 초짜의 티를 벗지 못하지만 엄격한 베테랑 형사 도코로의 질책 속에 조금씩 형사로서의 촉을 발휘해나갑니다.

 

묘진 폭포에서 소원을 빌어서는 안 된다

1년 전 묘진 폭포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언니 히리카의 비밀 SNS 계정을 뒤늦게 발견한 모모카는 언니의 행적을 따라 산에 들어갔다가 산장지기 오쓰키의 도움을 받지만 그의 산장에서 절대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맙니다.

 

머리 없는 남자를 구해서는 안 된다

담력시험을 통해 친구를 놀려주려던 초등학생 신은 은둔형 외톨이로 지내는 삼촌의 도움을 받아 목 없는 인형을 빌려 숲속에 설치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가 벌어진 탓에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그 영상을 조사해서는 안 된다

한 노인이 폭력을 휘두르던 아들을 살해하고 시신을 강에 유기했다고 자수합니다. 하지만 시신은 발견되지 않고 노인의 진술은 어딘가 진실을 숨기는 듯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가까스로 진상을 담은 영상을 발견하지만 오히려 형사 구마지마의 수사를 혼돈에 빠지게 만듭니다.

 

소원 비는 목소리를 연결해서는 안 된다

숲에서 오래 전 매장된 사체가 발견됩니다. 그리고 이 사체는 앞서 벌어진 세 개의 사건을 한 곳으로 소환합니다. 우연과 필연이 복잡하게 얽힌 가운데 형사 구마지마는 가까스로 모든 진실에 다가가게 됩니다.

 

명확한 사건이 있고 집요한 수사가 이뤄지지만 폭포의 밤은 전작인 절벽의 밤과는 달리 호러의 느낌이 강한 작품입니다. 불길한 이름과 유래를 내포한 자연경관 속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사건들, 어둡고 음울하기 짝이 없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심리, 모든 게 우연 같아 보이지만 실은 어차피 벌어질 수밖에 없어 보이기도 하는 지독한 운명 등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분위기는 호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또 초반에는 다소 가벼운 서사처럼 읽힐 수도 있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이야기의 무게와 어둠의 농도가 진해지는 걸 확연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선지 사진 속에 담긴 사건의 진상을 직접 알아냈을 때의 쾌감은 여느 미스터리에서는 맛볼 수 없는 색다른 간식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미치오 슈스케가 안 된다 시리즈를 좀더 내줬으면 하는 바람인데, 혹시 나온다고 해도 구상하는 것 자체가 고역일 것 같은 이 시리즈가 몇 년 후에나 신작 소식을 들려줄 지는 쉽게 예상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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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이 아닌 잘못
아사쿠라 아키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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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건설 대기업의 영업부장인 야마가타 다이스케의 삶이 하루아침에 붕괴되고 맙니다. 한 트위터 계정에 살인자와 피살자가 함께 찍힌 살해 현장 사진이 올라와 파문을 일으켰는데, 10년 전에 만들어진 그 계정의 주인이 바로 다이스케 자신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이스케는 인터넷조차 서투른데다 트위터 계정 같은 건 만든 적도 없습니다. 그날 이후로 마녀사냥의 타깃이 된 다이스케는 경찰과 극렬 유튜버의 추적을 피해 기약 없는 도주길에 오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시신이 그의 집 창고에서 발견되면서 다이스케는 그 어떤 변명과 해명도 통하지 않을 거란 사실에 좌절합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건 직접 진범을 찾는 것. 하지만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진범을 찾는 과정에서 다이스케는 더 큰 충격에 빠지고 맙니다.

 

교실이, 혼자가 될 때까지’,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아사쿠라 아키나리의 작품입니다. 앞선 두 작품이 각각 초능력과 신입사원 공채를 소재로 삼은 이야기들이라 읽을지 말지 무척 고민했던 게 사실인데, 예상외로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이번에는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의 세부 장르는 인터넷 마녀사냥 미스터리 도주극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사회 문제와 본격 미스터리의 완벽한 만남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설명 모두 이 작품의 반전의 미덕을 내포하진 못하고 있는데, 그건 아마도 그 반전을 상징하는 단 하나의 단어만 사용해도 초대형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도망자 다이스케를 향한 인터넷 마녀사냥이 횡행하는 미스터리도 맞고, 사회 문제를 다룬 미스터리도 맞지만, ‘내 것이 아닌 잘못은 딱히 어떤 장르라고 못 박기 어려운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작품입니다. 살인, 도주, 마녀사냥, 인터넷범죄, 학대, 복수, 참회 등 여러 가지 소재가 복잡하게 버무려진 이야기라고 할까요?

 

이야기는 도망자 다이스케, 그의 딸 나쓰미, 관할서 형사 호리, 그리고 진범이 올린 트윗을 리트윗하여 폭발적으로 퍼지게 만든 대학생 쇼마 등 여러 사람의 시점으로 나뉘어 전개됩니다. 하루아침에 전 국민에게 지탄받는 연쇄살인마가 된 다이스케가 힘겨운 도주를 거듭하며 겪는 여러 에피소드들 외에도 그의 범죄를 부인하면서도 어딘가 어두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가족들, 다이스케의 진범 여부를 놓고 갈등을 벌이는 관할서 형사와 현경 형사, 갑자기 나타난 여대생 때문에 엉겁결에 다이스케 추격전에 나서게 된 대학생 등 여러 인물들의 다이스케를 향한 복잡한 시선과 감정들이 빠른 속도로 펼쳐집니다. 그리고 매 챕터 후반부에 인터넷과 트위터에서 벌어지는 막무가내식 마녀사냥이 적나라하게 소개됩니다.

 

다이스케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아는 건 독자뿐입니다. 당연히 그의 누명 벗기를 간절히 바라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이야기는 예상외의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하고, 어느 시점인가부터는 진범의 의도는 무엇인가?’, 다이스케가 이런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에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막판의 한차례 반전을 통해 소개되면서 독자의 뒤통수를 때립니다. 저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독자는 그 지점에서 책의 앞부분을 허겁지겁 뒤져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작가가 얼마나 교묘하게 복선을 깔아놓았는지를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도주극은 빠른 템포에 긴장감과 사실감을 놓치지 않았고,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심리도 세밀하게 잘 묘사됐으며, 반전도 나름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딱히 어디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고는 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중요 인물의 부자연스러운 등장, 감동을 강요하는 듯한 반성과 참회, 누가 봐도 수상한 단서를 애써 무시하는 인물,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주제와 교훈에 대한 강의에 가까운 설파 등 위화감이나 불편함을 일으킨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큰 것 하나만 꼽자면 진범의 동기입니다. 마지막에 밝혀진 진범의 동기는 그럴 만 했다라는 생각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로 다소 억지스러웠습니다. 연쇄살인도, 다이스케를 함정에 빠뜨린 일도 필연적이거나 운명적이란 느낌을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반전 자체는 놀라웠지만 설득력 없는 진범의 동기 때문에 그 맛이 반감된 게 사실입니다.

 

교실이, 혼자가 될 때까지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고,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은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면 내 것이 아닌 잘못은 딱 두 작품의 중간쯤이었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에 출간된 아사쿠라 아키나리의 작품 중 누아르 레버넌트‘9번째 18살을 맞이하는 너와는 왠지 취향과 거리가 먼 것 같아 읽지 않았지만, 그의 정통 미스터리가 출간된다면 일단은 찾아 읽으려고 합니다. 아직은 호불호를 확실히 결정하지 못한 상태라 적어도 한 작품 정도는 더 읽어봐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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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의 눈물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현화 옮김 / 빈페이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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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시대 이래 오랜 세월 동안 명성을 이어온 도자기 노포 도키야 킷페이. 안정과 번영만 누리던 그곳을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만든 건 장차 노포를 이어받을 아들 고헤이가 한밤중에 살해당한 사건입니다. 노포 주인 부부 사다히코와 아키미를 더욱 충격에 몰아넣은 건 범인이 고헤이의 아내, 즉 며느리인 소요코의 전 남자친구라는 점. 특히 범인이 법정에서 소요코가 살인을 사주했다는 뉘앙스의 말을 내뱉은 탓에 그 충격은 더욱 배가됩니다. 남편 사다히코가 범인의 말을 헛소리로 일축한 반면, 아내 아키미는 며느리 소요코에 대한 의심을 좀처럼 지워내지 못합니다. 사건은 종결됐지만 아키미의 의심은 점점 더 증폭되고, 이후 노포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질 때마다 배후에 소요코가 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검찰 측 죄인’, ‘범인에게 고한다’, ‘립맨등 매력적인 정통 미스터리로 만나온 시즈쿠이 슈스케지만 2020년에 읽은 염원은 심리 스릴러 혹은 도메스틱 스릴러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라 무척 놀라웠습니다. “작정하고 심리묘사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작가의 출사표에도 불구하고 비록 별 3개라는 야박한 평점을 주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악어의 눈물은 마치 그 출사표를 다시 한 번, 그것도 훨씬 더 독하고 세게 다듬어서 내보인 듯한 인상을 풍깁니다. 시작과 동시에 살인사건이 터지지만 범인은 금세 잡히고 재판과정도 속전속결로 마무리됩니다. 진짜 이야기는 장례까지 마친 가족들이 집으로 돌아온 뒤부터 시작됩니다.

 

거짓 눈물 말이지. 악어의 눈물. (중략) 악어는 먹잇감을 포식할 때 눈물을 흘리거든. 내가 긴자에 있을 때 눈물도 안 나오면서 억지로 울어서 여러 손님을 다루는 애들을 봐서 그런 건 예리하거든. 아키네 부부도 (소요코에게) 먹히지 않게 조심해.” (p114)

 

사건이 벌어지기 훨씬 전부터, 그러니까 소요코가 노포의 며느리가 된 3년 전부터 시어머니 아키미는 겉으로 드러나는 언행과 표정만으로는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소요코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들을 죽인 범인이 소요코의 전 남친이라는 점, 또 소요코가 사주범이라는 법정에서의 범인의 최후 진술 때문에 아키미의 신경 어딘가가 툭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의심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무엇보다 남편이 살해당했는데도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소요코의 태도가 원망스러웠던 아키미는 동생 하루코로부터 장례식장에서 흘린 소요코의 눈물은 억지로 쥐어짜낸 악어의 눈물이 분명해.”라는 말을 듣곤 그날 이후로 소요코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합니다.

 

악어의 눈물은 엄밀히 말하면 미스터리가 아니라 어둡고 일그러진 심리를 그린 도메스틱 스릴러입니다. 소요코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으로 인해 점점 파국의 길을 걷게 되는 시어머니 아키미, 아키미의 의심에 동조하며 거침없이 소요코의 과거를 캐고 다니는 시이모 하루코, 반대로 소요코를 믿는 것은 물론 어린 손자 나유타를 노포의 후계로 생각하고 있는 시아버지 사다히코, 그리고 눈길을 끄는 외모와 달리 차분하고 내성적이면서도 (아마존 재팬 리뷰대로) 희대의 악녀인지 선량한 피해자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며느리 소요코에 이르기까지 주요 인물들의 불안정한 심리와 갈등이 디테일하게 묘사된 작품입니다.

 

노포 안팎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인물들 사이의 의심과 반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소요코가 진정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판단을 더욱 불가해하게 만듭니다. 아키미의 의심대로라면 소요코는 완벽한 사이코패스입니다. 하지만 그 의심이 틀렸다면 노포를 잠식한 불온하고 어두운 기운은 그야말로 작은 의심의 씨앗이 야기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미권의 심리 스릴러와 도메스틱 스릴러에 질려 있던데다 작가의 전작인 염원에 야박한 평점을 주기도 했고, 큰 사건 없이 진행되는 서사가 다소 느슨하게 읽히기도 해서 중반쯤만 해도 또 시즈쿠이 슈스케에게 별 3개를 줘야 되나?”라는 고민을 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지점을 잘 넘어가면 이 작품의 특별한 미덕과 함께 이야미스에 버금가는 기묘한 여운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내 주위에 소요코라는 인물이 있다면 난 그녀를 믿을 수 있을까, 없을까? 내게 던져진 작은 의심의 씨앗을 단호하게 지워버릴 수 있을까, 없을까? 소요코는 과연 무죄일까, 유죄일까?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쯤 자신도 모르게 이런 씁쓸한 자문을 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악어의 눈물의 진짜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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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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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이치를 포함한 대학시절 등산동아리 멤버 6명과 슈이치의 사촌형 쇼타로 등 7명은 나가사키의 산속에 위치한 기이한 지하 건축물 - 거대한 화물선을 닮은 지하 3층 규모의 방주’ - 을 발견하곤 크게 놀랍니다. 천연동굴을 이용하여 지은데다 수십 년 넘게 사용한 흔적이 없어 으스스한 기분을 자아내지만 멤버들은 폐허 탐험의 기회라며 하룻밤을 묵기로 합니다. 하지만 다음날 새벽 지진과 함께 방주의 출입구는 거대한 바위로 막혀버립니다. 거기다가 지하수의 흐름마저 바뀌어 며칠 후면 전원이 수몰될 위기에 처합니다. 문제는 바로 그 시점에 의문의 살인사건이 벌어졌다는 점입니다. 과연 누가, , 하필 이 시점에 살인을 저지른 건지 아연한 가운데 연이어 살인이 벌어지자 멤버들은 패닉에 빠지고 맙니다.

 

일본의 각종 미스터리 차트를 석권한 것은 물론 본격 미스터리가 살아남기 위한 단 한 가지 멋진 방법이 여기 있다.”(노리즈키 린타로), “얼얼한 맛의 에필로그에 백퍼센트 경악 보증.”(아키요시 리카코) 등 거장들의 찬사를 받은 방주는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의 전형적인 공식을 따르면서도 지금껏 본 적 없는 특이한 설정과 예측 불허의 반전이 빛나는 작품입니다.

 

외부와 차단된 지하건축물 방주에서 살아나갈 길은 오직 하나, 지하 2층에 있는 닻감개를 통해 출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밑으로 떨어뜨리는 것인데, 문제는 그 닻감개를 조작하는 사람은 밖으로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지하수의 상승으로 전원 수몰되기까지는 단 1주일밖에 안 남은 상태이고, 결국 누군가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잃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하필 이런 때 벌어진 살인사건으로 인해 멤버들의 혼란은 극에 달합니다. 전날 밤늦게 산에서 길을 잃고 방주에 합류한 일가족 3명까지 모두 10명으로 시작된 폐허 탐험은 첫 피살자가 나온 순간부터 이른바 데스 게임, 즉 누군가 한 사람이 죽어야만 종료되는 참혹한 상황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밀실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무리 중에 범인이 있다.”라는 고전적인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의 외양을 갖고 있지만 방주는 거기에다 데스 게임의 원칙을 부여하여 이야기를 한층 복잡하고 긴장감 넘치게 만듭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 (닻감개로 바위를 치우고 홀로 갇히는 식으로) 희생돼야만 모두가 생존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멤버들은 살인범에게 그 희생을 맡겨야 한다고 의견을 모읍니다. 하지만 살인범을 밝혀낸다고 해도 그가 희생을 받아들일 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 살겠다고 피비린내 나는 폭력이 난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그가 아무리 살인범이라 해도 그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건 살인행위와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멤버들 모두 심한 내적 갈등을 겪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 상태에서 연이어 잔혹한 살인사건이 벌어지지만 누구도 단서 하나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 방주를 수몰시킬 지하수의 수위는 계속 높아질 뿐입니다.

 

과연 살인범이 기꺼이 희생양이 돼줄까?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굳이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동기는 무엇일까? 왜 하필 지진 직후 살인이 시작된 것일까? 왜 살인범은 수고스럽게도(?)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잔혹한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얼핏 쉬워 보이는 밀실살인사건으로 시작됐지만 풀리는 수수께끼라곤 거의 없고 연이어 희생자가 등장하는데다 범인을 밝히는 것만으로 이 이야기가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 때문에 독자는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누가?’도 궁금하지만 ?’를 전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에 작가가 마지막에 어떤 엔딩을 내놓을지 예측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또한 막판에 의외의 인물이 범인으로 밝혀지지만 사실 진짜 클라이맥스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다 읽고 나면 얼얼한 맛의 에필로그에 백퍼센트 경악 보증.”이라는 아키요시 리카코의 극찬에 100% 동감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사실 중반부에 동어반복과 함께 살짝 느슨해지는 대목이 있긴 하지만(이 때문에 별 0.5개를 뺐습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거듭 반복되는 반전을 제대로 맛보려면 그 지점들을 꼼꼼하게 읽어야만 합니다.

 

유키 하루오는 1993년생의 젊은 작가입니다. 거장들의 극찬을 받은 방주가 본인에겐 더없는 영광이자 자랑이겠지만 동시에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허들인 것도 사실입니다. 유키 하루오가 머잖아 방주를 뛰어넘는 본격 미스터리를 선보여줄 것을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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