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의 눈물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현화 옮김 / 빈페이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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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시대 이래 오랜 세월 동안 명성을 이어온 도자기 노포 도키야 킷페이. 안정과 번영만 누리던 그곳을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만든 건 장차 노포를 이어받을 아들 고헤이가 한밤중에 살해당한 사건입니다. 노포 주인 부부 사다히코와 아키미를 더욱 충격에 몰아넣은 건 범인이 고헤이의 아내, 즉 며느리인 소요코의 전 남자친구라는 점. 특히 범인이 법정에서 소요코가 살인을 사주했다는 뉘앙스의 말을 내뱉은 탓에 그 충격은 더욱 배가됩니다. 남편 사다히코가 범인의 말을 헛소리로 일축한 반면, 아내 아키미는 며느리 소요코에 대한 의심을 좀처럼 지워내지 못합니다. 사건은 종결됐지만 아키미의 의심은 점점 더 증폭되고, 이후 노포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질 때마다 배후에 소요코가 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검찰 측 죄인’, ‘범인에게 고한다’, ‘립맨등 매력적인 정통 미스터리로 만나온 시즈쿠이 슈스케지만 2020년에 읽은 염원은 심리 스릴러 혹은 도메스틱 스릴러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라 무척 놀라웠습니다. “작정하고 심리묘사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작가의 출사표에도 불구하고 비록 별 3개라는 야박한 평점을 주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악어의 눈물은 마치 그 출사표를 다시 한 번, 그것도 훨씬 더 독하고 세게 다듬어서 내보인 듯한 인상을 풍깁니다. 시작과 동시에 살인사건이 터지지만 범인은 금세 잡히고 재판과정도 속전속결로 마무리됩니다. 진짜 이야기는 장례까지 마친 가족들이 집으로 돌아온 뒤부터 시작됩니다.

 

거짓 눈물 말이지. 악어의 눈물. (중략) 악어는 먹잇감을 포식할 때 눈물을 흘리거든. 내가 긴자에 있을 때 눈물도 안 나오면서 억지로 울어서 여러 손님을 다루는 애들을 봐서 그런 건 예리하거든. 아키네 부부도 (소요코에게) 먹히지 않게 조심해.” (p114)

 

사건이 벌어지기 훨씬 전부터, 그러니까 소요코가 노포의 며느리가 된 3년 전부터 시어머니 아키미는 겉으로 드러나는 언행과 표정만으로는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소요코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들을 죽인 범인이 소요코의 전 남친이라는 점, 또 소요코가 사주범이라는 법정에서의 범인의 최후 진술 때문에 아키미의 신경 어딘가가 툭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의심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무엇보다 남편이 살해당했는데도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소요코의 태도가 원망스러웠던 아키미는 동생 하루코로부터 장례식장에서 흘린 소요코의 눈물은 억지로 쥐어짜낸 악어의 눈물이 분명해.”라는 말을 듣곤 그날 이후로 소요코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합니다.

 

악어의 눈물은 엄밀히 말하면 미스터리가 아니라 어둡고 일그러진 심리를 그린 도메스틱 스릴러입니다. 소요코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으로 인해 점점 파국의 길을 걷게 되는 시어머니 아키미, 아키미의 의심에 동조하며 거침없이 소요코의 과거를 캐고 다니는 시이모 하루코, 반대로 소요코를 믿는 것은 물론 어린 손자 나유타를 노포의 후계로 생각하고 있는 시아버지 사다히코, 그리고 눈길을 끄는 외모와 달리 차분하고 내성적이면서도 (아마존 재팬 리뷰대로) 희대의 악녀인지 선량한 피해자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며느리 소요코에 이르기까지 주요 인물들의 불안정한 심리와 갈등이 디테일하게 묘사된 작품입니다.

 

노포 안팎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인물들 사이의 의심과 반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소요코가 진정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판단을 더욱 불가해하게 만듭니다. 아키미의 의심대로라면 소요코는 완벽한 사이코패스입니다. 하지만 그 의심이 틀렸다면 노포를 잠식한 불온하고 어두운 기운은 그야말로 작은 의심의 씨앗이 야기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미권의 심리 스릴러와 도메스틱 스릴러에 질려 있던데다 작가의 전작인 염원에 야박한 평점을 주기도 했고, 큰 사건 없이 진행되는 서사가 다소 느슨하게 읽히기도 해서 중반쯤만 해도 또 시즈쿠이 슈스케에게 별 3개를 줘야 되나?”라는 고민을 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지점을 잘 넘어가면 이 작품의 특별한 미덕과 함께 이야미스에 버금가는 기묘한 여운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내 주위에 소요코라는 인물이 있다면 난 그녀를 믿을 수 있을까, 없을까? 내게 던져진 작은 의심의 씨앗을 단호하게 지워버릴 수 있을까, 없을까? 소요코는 과연 무죄일까, 유죄일까?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쯤 자신도 모르게 이런 씁쓸한 자문을 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악어의 눈물의 진짜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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