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여름
소메이 다메히토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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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마모루는 지방도시의 사회복지사로 근무 중인 26세의 공무원입니다. 생활보호대상자를 선정하고 부정수급자를 가려내는 고된 업무를 근근이 이어나가던 마모루는 어느 날 큰 충격에 빠집니다. 선배 사회복지사 다카노가 약점을 지닌 여성 생활보호대상자를 협박하여 육체관계는 물론 돈까지 뜯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한편 도쿄에서 사고를 치고 지방도시로 쫓겨난 야쿠자 가네모토 역시 다카노의 비리를 알게 되는데, 그는 다카노를 이용하여 큰돈을 벌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면서 가네모토의 계획은 어그러질 상황에 처하고 마모루의 운명 역시 급격한 혼란에 휩싸이고 맙니다.

 

일가족을 살해한 18세 살인범의 도주극을 그린 정체’(한국 출간 2021)를 통해 한국 독자와 처음 만났던 소메이 다메히토가 37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우수상 수상작이자 자신의 데뷔작인 나쁜 여름으로 다시 한국 독자를 찾았습니다.

정체를 읽고 쓴 서평에 정갈하고 정성이 깃든 문장들과 인물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 작가의 진심이란 표현을 썼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던 터라 그의 데뷔작을 꼭 읽고 싶었는데, 역시 이번에도 기대한 만큼의 만족스러운 책읽기가 됐습니다.

 

다소 극단적인 사례 같기는 해도 사회복지, 특히 생활보조금을 둘러싼 갖가지 사건과 사고를 다루고 있어서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로 분류되겠지만, 소메이 다메히토는 거기에다 소네 케이스케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을 연상시키는, 웃을 수도 찌푸릴 수도 없는 희비극이자 폭주에 가까운 군상극의 미덕을 섞음으로써 독특한 장르물을 완성시켰습니다.

 

생활보호대상자를 선정하고 부정수급자를 가려내는 사회복지사, 말도 안 되는 변명과 핑계를 대며 부정하게 생활보조금을 타내면서도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인간망종들, 그리고 사회복지시스템의 작은 균열을 이용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야쿠자 등 나쁜 여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생활보조금의 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동시에 실제로 복지의 혜택이 필요한 사람들이 정작 사각지대로 밀려나는 모습이라든가 정책 자체는 훌륭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묘사한 대목들은 그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적 없는 독자에게 꽤 큰 경종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매력은 사회복지라는 거창한 주제가 아니라 서로 속고 속이는 것을 넘어 이기심을 위해서라면 최악의 선택도 마다하지 않는 인간망종들의 먹고 먹히는 쇼에 있습니다. 아마 영화로 만들면 숨 쉴 틈조차 없을 정도로 폭주하면서도 흥미진진한 B급 영화의 미덕을 만끽할 수 있는 명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일본 영화감독 소노 시온의 지옥이 뭐가 나빠를 아는 독자라면 어떤 느낌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막판 클라이맥스는 피와 흉기가 난무하는 끔찍한 비극의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웃는 것까지는 어렵더라도) 왠지 희극의 냄새가 더 강하게 풍기는 묘한 감정을 느끼게 만듭니다.

 

정체나쁜 여름모두 적잖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작품이지만 소메이 다메히토는 비중이 적은 단역이나 조연조차 독자에게 그 존재의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이야기 속에 확실히 녹여냅니다. 자칫 우왕좌왕할 수 있는 복잡한 구도를 개성 넘치고 명확한 캐릭터를 지닌 인물들을 통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컨트롤한다고 할까요? 그래선지 다음에 만날 그의 작품 역시 희극이자 비극이면서 통렬한 군상극이기를 바라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모두 8편의 작품을 출간했는데, 그의 나머지 작품들도 머잖아 한국에 모두 소개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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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마물의 탑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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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해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모토로이 하야타는 1945년 패전 후 국가 재건을 위한 노동의 최전선에 몸담기로 결심합니다. 처음 향했던 곳은 탄광이었지만 노동의 보람을 느끼기도 전에 끔찍하고 기괴한 연쇄살인사건을 겪은 탓에 이내 행로를 바꿉니다. 그의 선택은 항로표식 직원, 즉 등대지기입니다. 나름의 사명감을 갖고 등대정신을 실천하던 하야타의 두 번째 부임지는 험준하기로 소문난 고가사키 등대. 그런데 도착과 동시에 하야타는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길함을 감지합니다. 등대 앞의 바다에 솟아오른 거대하고 날카로운 바위, 하얀 마물을 닮은 듯한 등대, 그 등대 앞에 배를 대기 두려워하는 어부, 그리고 등대 위에 서있던 사람을 닮은 기이한 존재 등 모든 것이 불온해보였기 때문입니다.

 

검은 얼굴의 여우이후 3년 반 만에 출간된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편이 탄광을 무대로 괴담이 가미된 미스터리를 다뤘다면 하얀 마물의 탑은 등대와 그 일대를 무대로 한 정통 호러물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미쓰다 신조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호러와 미스터리가 적절히 조합된 경우를 좋아해서 도조 겐야 시리즈노조키메같은 작품을 손에 꼽는 편인데, 전작인 검은 얼굴의 여우가 다소 밋밋한 호러 설정 때문에 아쉬움을 남긴 반면 하얀 마물의 탑은 미쓰다 신조의 장기가 제대로 배어있어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거친 파도와 짙은 안개와 험준한 지형 때문에 더 위압적으로 보이는 고가사키 등대가 주 무대지만, 초반 1/3은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하야타가 겪는 기이하고 믿을 수 없는 괴현상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등대 앞에 내려주기를 거부하는 어부, 등대까지의 길안내를 약속해놓고 사라져버린 마을사람, 밀림을 방불케 하는 숲을 지나는 동안 하야타의 뒤를 따라오는 듯한 하얀 마물, 그리고 인적 하나 없는 숲속에 자리한 기괴한 분위기의 오두막 등 하야타는 등대에 도착하기도 전에 숱한 괴현상들을 체험합니다. 가까스로 등대에 도착하지만 하야타는 숲에서 목격한 하얀 마물 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합니다. 하야타를 더욱 놀라게 한 건 고가사키 등대를 책임지고 있는 등대장 이사카 고조가 20년 전 자신과 똑같은 경험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굳이 비율로 따지자면 호러가 80%, 미스터리가 20% 정도로 배합돼있습니다. 20년의 시차를 두고 하야타와 이사카가 겪은, 우연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똑같은 경험들의 실체를 파악하는 미스터리가 깔려있긴 하지만, 서사의 중심은 제목 그대로 하얀 마물이며 마지막 반전에 이르기까지 호러의 미덕에 충실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해운산업의 부흥을 위한 근대적 시설인 등대와 아직도 전근대적인 기운이 만연해있는 등대 주변 지역의 분위기가 충돌하면서 호러의 농도가 더욱 짙어지는데, 그런 면에서 1950년대 초반이라는 시대적 배경 자체가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시대적 배경에 아날로그 감성과 호러의 매력이 철철 넘쳤던 도조 겐야 시리즈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혹시 검은 얼굴의 여우에 아쉬워했더라도) 그 이상의 감흥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2021년에 시리즈 세 번째 작품 赫衣’(붉은 옷의 어둠)까지 출간된 상태입니다.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이후 10년째 소식이 없는 도조 겐야 시리즈에 대한 미련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모토로이 하야타의 새로운 이야기라면 그 미련을 조금은 접어둘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2024년에 도조 겐야와 모토로이 하야타를 모두 만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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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목의 유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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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도쿄. 2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신문사를 그만뒀던 54세의 마쓰다 노리오는 현재 여성잡지 계약직 기자로 일하는 중입니다. 계약 만료 두 달을 앞둔 어느 날, 편집장의 지시로 심령 소재 취재를 시작한 마쓰다는 한 건널목에서 찍힌 긴 머리 여자의 사진과 영상을 보고 크게 놀랍니다. 조작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다 여자의 모습은 분명 유령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여자가 1년 전 그 건널목에서 피살됐음을 알아낸 마쓰다는 큰 충격과 함께 그녀의 정체를 파악하기로 결심합니다. 사건 당시 그녀의 본명이나 주소는 물론 가족조차 경찰이 전혀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마쓰다는 그녀에 관한 놀라운 정보를 하나둘씩 알게 되면서 특종 이상의 흥분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제목도 그렇고 출판사의 소개글도 그렇고, 아마도 작가가 다카노 가즈아키가 아니었다면 읽을까 말까 한참을 주저했을 게 분명한 작품입니다. 물론 미쓰다 신조의 도조겐야 시리즈작가 시리즈였다면 체할 정도로 급하게 찾아 읽었겠지만, 기본적으론 현대를 배경으로 한 유령 호러물은 제 취향 중 좀 아래쪽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 중 한국에 처음 소개된 유령인명구조대의 개정판인 줄 알았는데, 검색해보니 제노사이드이후 11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었고, 그래서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당장 읽지 못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구매신청을 해버렸습니다.

 

주인공인 마쓰다 노리오는 54세의 월간지 계약직 기자입니다. 가정을 내팽개칠 정도로 사회부 기자로 평생을 일해 온 마쓰다는 2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절망감에 사로잡혀 신문사까지 그만둔 바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계약직 기자가 된 그가 계약 만료를 앞두고 취재하게 된 건 심령 소재입니다. 먼저 간 아내를 유령 형태로라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을 흘리곤 했던 마쓰다지만 정작 심령 소재 취재를 맡게 되자 심한 거부감과 함께 기자로서 막장에 이르고 말았다는 자조적인 태도까지 숨기지 않습니다.

 

그런 마쓰다가 취재를 시작한 이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직접 겪으며 혼란에 빠집니다. 심령사진 속의 여자가 1년 전 끔찍하게 살해된 장본인이라는 걸 안 뒤로 마쓰다는 여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과거 사회부 기자처럼 열정적으로 취재에 나섭니다. 그런데 동시에 현실에선 절대 일어날 리 없는 기이한 현상들도 경험하게 됩니다. 심령현상이 일어나기 직전의 전조라는 나무줄기 쪼개지는 소리를 자주 듣기도 하고, 여자가 살해된 새벽 13분만 되면 울리는 전화기 속에서 희미한 비명 소릴 듣기도 하고, 심지어 사건현장인 건널목에서 유령임에 분명한 존재를 발견하곤 기차가 달려오는 줄도 모른 채 건널목 안으로 달려들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한편에선 살해된 여자의 정체와 사건 이면의 진상을 알아내려는 열정적인 기자 마쓰다의 취재 미스터리가 전개되고, 다른 한편에선 명백히 비현실적인 유령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말도 안 돼.”라는 생각이 든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사실적인 나머지 (마치 영화 사랑과 영혼처럼) 마쓰다가 유령과 소통할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고, 막판에는 마쓰다가 유령의 원통함을 통쾌하게 풀어주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물론 다카노 가즈아키가 절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작가는 아니기에 헛된 바람이란 건 너무나도 잘 알았지만 말입니다.

 

취재를 거듭할수록 마쓰다의 마음은 점점 어둡게 물듭니다. 그녀의 정체는 여전히 요원했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해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인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으로부터 소외당한 여자.”, “늘 음울하게 웃으며 돈을 위해 몸을 파는 성격 나쁜 여자.”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런 평판을 얻기까지의 사연을 하나둘씩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한지를 알게 되면서 마쓰다는 특종을 노리는 기자의 마음가짐 대신 쉽게 꺼지지 않을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마쓰다가 바라는 건 그녀의 유령을 안식에 들게 하는 것뿐이고, 실제로 마쓰다는 그렇게 되게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합니다.

 

정서는 전혀 다르지만 영화 사랑과 영혼에 등장한 유령 샘도 생각이 많이 났고, 비참함으로 점철된 한 여자의 삶이란 점에서 일본 드라마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도 많이 생각났습니다. 다카노 가즈아키 특유의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성실하고 열정적인 기자 마쓰다를 통해 저널리즘 미스터리의 진한 맛을 만끽할 수도 있었습니다. 무겁고 어둡지만 길고 오래 갈 여운도 함께 말입니다.

 

무슨 이유에서 11년 동안 신작을 내지 않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해서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들을 자주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본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봐도 이후 신작 소식은 나오지 않는데, 머잖아 그가 새로운 작품을 냈다는 소식이 들려오길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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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없는 검사의 분투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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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재단, 재무공무원, 국회의원까지 연루된 국유지 헐값 매각 사건이 오사카지검을 긴장하게 만듭니다. 수사결과에 따라 정권을 위협하는 대형스캔들로도 비화할 수 있는 사건이라 오사카지검은 특수부를 비롯하여 유능한 검사들을 다수 투입하지만, 얼마 후 특수부 검사 한 명이 증거를 조작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사카지검은 패닉에 빠집니다. 수년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고 그때 바닥까지 추락한 지검의 신뢰는 아직도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대검에서 조사팀을 투입하기에 이르렀고, 그때까지 특수부 파견을 거부해온 오사카지검의 에이스 후와 슌타로는 지검장의 명령으로 대검 조사팀과 함께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2020년에 한국에 출간된 표정 없는 검사에 이은 후와 슌타로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일본에서는 2021년에 출간됐던 터라 곧 만나볼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거의 3년이 지난 후에야 한국 독자를 찾아왔습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주인공들 대부분이 비범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지만 후와 슌타로는 이른바 能面檢事’, 즉 일본 전통극 ’()에 쓰이는 가면을 쓴 듯 그 표정에 전혀 변화가 없는 기계와도 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어서 더 도드라져 보입니다. 뛰어난 능력 덕분에 오사카지검의 에이스라 불리면서도 후와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과 차가운 말투 때문에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과거 도쿄지검 재직 시 저지른 최악의 실책 이후 제대로 된 사법기관으로서 역할하기 위해 표정을 지웠을 뿐 그는 타고난 반골은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분은 어떤지, 좀전에 뭘 했는지 등 그야말로 머릿속의 모든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무관 소료 미하루가 후와의 곁을 지킵니다. 1편에서 후와의 사무관으로 배속된 이후 숱한 좌절과 절망을 겪으면서도 1년 가까운 시간을 견뎌내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후와의 일거수일투족에 놀라고, 당황하고, 허둥댑니다.

 

1편에서 오사카 경찰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후와가 이번에 상대하는 건 자신이 속한 조직인 검찰입니다. 수년 전 세상을 놀라게 했던 특수부 검사의 증거조작이 또다시 되풀이되면서 오사카지검은 궁지에 몰렸고, 대검의 조사팀에게 지검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 처지에 빠집니다. 그런데 대검 조사팀 중 한 명인 도쿄지검 차장검사 미사키는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후와를 수사에 합류시켰고, 결과적으로 후와는 대검 조사팀의 일원이 되어 오사카지검의 동료를 조사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합니다. 성과를 올릴 경우 동료를 욕보인 원흉이 될 것이고, 실패할 경우에도 오사카지검의 공중분해를 야기한 주범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후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진실 찾기에 나서겠다고 대응했고, 실제로 그는 주위에서 놀랄 정도로 냉정하게 조사를 진행합니다. 문제는 그가 조사해야 하는 대상도 검사이고, 시기심과 공명심에 사로잡혀 그를 비난하고 견제하는 것도 검사라는 점입니다. 말 그대로 검사가 벌이는 검사와의 전쟁이라고 할까요?

 

다소 딱딱하고 어려운 용어들이 난무하는 국유지 헐값 매각 사건과 증거조작 사건은 중반 이후 후와와 미하루의 현장 조사를 통해 과거의 다른 사건과 맥이 닿으면서 급물살을 탑니다. 이 대목이 살짝 비약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집요한 탐문과 현장조사를 통해 후와가 알아낸 진실은 원래 사건에선 도저히 유추할 수 없었던 소소한 감동과 안타까움을 선사합니다. 나카야마 시치리 특유의 연속 반전의 쾌감과 함께 말입니다. 물론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회의실에 앉아서 후와의 공을 훔치고 오사카지검을 공중분해시키려던 대검 조사팀을 제대로 물 먹이는 일도 잊지 않습니다. (애초 후와를 조사팀에 끌어들인 도쿄지검 차장검사 미사키는 이 작품에서 거의 유일하게 좋은 검사로 활약하는데, 그는 나카야마 시치리의 또다른 주인공 미사키 요스케의 아버지로 밝혀집니다.)

 

나카야마 시치리는 자신들의 업무를 소홀히 하는 공무원들이 심심치 않게 언론과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와중에 영웅 같은 공무원이 활약하는 작품을 쓰는 것이 대중 소설가의 책무라고 집필의도를 밝힌 바 있는데, 요즘의 한국 상황을 보면 후와 같은 검사가 한 명쯤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습니다. ‘표정 없는 검사 후와 슌타로 시리즈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두 작품쯤은 더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옮긴이의 말에 나온 것처럼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신념 투철한 사법기계의 활약은 언제 읽어도 속 시원한 사이다처럼 짜릿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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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유괴 붉은 박물관 시리즈 2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한수진 옮김 / 리드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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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하루아침에 경시청 수사1과에서 한직 중의 한직인 경시청 부속 범죄자료관, 일명 붉은 박물관으로 추락한 데라다 사토시와 경찰로서 뛰어난 스펙은 물론 천재적인 추리능력까지 지녔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수년째 붉은 박물관관장으로 살아가고 있는 히이로 사에코 콤비의 두 번째 이야기로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작품입니다.

 

붉은 박물관의 원래 목적은 미결 혹은 종결된 형사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보관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는 간혹 이 사건의 재수사를 실시한다!”라는 사에코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곤 합니다. 사에코는 과거의 자료들 속에서 의문점을 발견하거나 위화감이 느껴지면 그것이 미제사건이든 이미 시효가 지난 사건이든 관계없이 기어이 재수사를 감행하는 것입니다. 다만, “나는 이 붉은 박물관이 법망을 피해 도망치는 범인을 막아내는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한다.”라는 멋진 사명감을 갖고 있긴 해도 의사소통능력 자체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탓에 탐문은 아예 불가능한 4차원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로 아직 초짜 티를 벗진 못한데다 비록 좌천되긴 했어도 수사1과 출신의 자부심을 품고 있는 사토시가 그녀의 곁을 지키며 현장 조사와 탐문을 도맡습니다.

 

사에코의 추리는 대범하다 못해 기괴하다는 인상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망상에 가까운 추리력을 발휘할 때마다 사토시가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발상인가?”라고 탄식을 내뱉곤 하는데, 그것은 곧 독자의 심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긴 사건의 대전제들을 180도 뒤집는가 하면, 애초 상상 자체가 불가능한 추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지다가 곧바로 진상에 도달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에코의 기행이야말로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이자 미덕이기도 합니다. 본격과 트릭의 향연을 맛깔나게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소스라고 할까요?

 

시리즈 첫 편인 붉은 박물관에서 사에코에게 하도 여러 차례 놀란 덕분인지, 두 번째 작품인 기억 속의 유괴는 조금은 더 객관적이고 차분하게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다섯 편의 수록작 중 한 편은 (비록 과정까지는 제대로 맞히지 못했지만) 중반쯤 범인의 윤곽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전작의 교훈을 제대로 숙지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수록작에서 사에코의 파격적인 추리는 여전히 빛났고,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발상인가?”라는 독자와 사토시의 탄식 역시 매작품마다 반복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작인 붉은 박물관서평에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별 0.5개를 뺀 건 사에코의 비범한 능력이 종종 과도한 비약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썼는데, ‘기억 속의 유괴역시 비슷한 느낌입니다. 물론 붉은 박물관보다는 훨씬 더 현실감 있고 안정적으로 읽혔지만 아무래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비약하는 사에코의 모습에서 살짝 이물감이 느껴진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만 역설적이게도 비약 없는 사에코였다면 과연 이만큼 재미있게 읽혔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아직 보진 못했지만 붉은 박물관수록작 중 일부가 TV드라마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기억 속의 유괴에도 영상화가 기대되는 수록작들이 몇 편 있습니다. 의문의 연쇄방화범을 그린 연화와 기이한 유괴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표제작 기억 속의 유괴가 가장 기대됐고, 영상화가 쉽진 않겠지만 본격의 맛이 잘 살아있는 황혼의 옥상에서역시 드라마로 보고 싶어진 작품입니다.

 

본격과 트릭의 향연에 4차원 천재와 어리바리 형사의 콤비 플레이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이 일본에서 20221월에 출간됐으니 어쩌면 1~2년 안에 그들의 세 번째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단편이지만 설계와 구성에 적잖은 공이 필요한 작품들이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새 작품과 만나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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