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마물의 탑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해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모토로이 하야타는 1945년 패전 후 국가 재건을 위한 노동의 최전선에 몸담기로 결심합니다. 처음 향했던 곳은 탄광이었지만 노동의 보람을 느끼기도 전에 끔찍하고 기괴한 연쇄살인사건을 겪은 탓에 이내 행로를 바꿉니다. 그의 선택은 항로표식 직원, 즉 등대지기입니다. 나름의 사명감을 갖고 등대정신을 실천하던 하야타의 두 번째 부임지는 험준하기로 소문난 고가사키 등대. 그런데 도착과 동시에 하야타는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길함을 감지합니다. 등대 앞의 바다에 솟아오른 거대하고 날카로운 바위, 하얀 마물을 닮은 듯한 등대, 그 등대 앞에 배를 대기 두려워하는 어부, 그리고 등대 위에 서있던 사람을 닮은 기이한 존재 등 모든 것이 불온해보였기 때문입니다.

 

검은 얼굴의 여우이후 3년 반 만에 출간된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편이 탄광을 무대로 괴담이 가미된 미스터리를 다뤘다면 하얀 마물의 탑은 등대와 그 일대를 무대로 한 정통 호러물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미쓰다 신조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호러와 미스터리가 적절히 조합된 경우를 좋아해서 도조 겐야 시리즈노조키메같은 작품을 손에 꼽는 편인데, 전작인 검은 얼굴의 여우가 다소 밋밋한 호러 설정 때문에 아쉬움을 남긴 반면 하얀 마물의 탑은 미쓰다 신조의 장기가 제대로 배어있어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거친 파도와 짙은 안개와 험준한 지형 때문에 더 위압적으로 보이는 고가사키 등대가 주 무대지만, 초반 1/3은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하야타가 겪는 기이하고 믿을 수 없는 괴현상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등대 앞에 내려주기를 거부하는 어부, 등대까지의 길안내를 약속해놓고 사라져버린 마을사람, 밀림을 방불케 하는 숲을 지나는 동안 하야타의 뒤를 따라오는 듯한 하얀 마물, 그리고 인적 하나 없는 숲속에 자리한 기괴한 분위기의 오두막 등 하야타는 등대에 도착하기도 전에 숱한 괴현상들을 체험합니다. 가까스로 등대에 도착하지만 하야타는 숲에서 목격한 하얀 마물 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합니다. 하야타를 더욱 놀라게 한 건 고가사키 등대를 책임지고 있는 등대장 이사카 고조가 20년 전 자신과 똑같은 경험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굳이 비율로 따지자면 호러가 80%, 미스터리가 20% 정도로 배합돼있습니다. 20년의 시차를 두고 하야타와 이사카가 겪은, 우연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똑같은 경험들의 실체를 파악하는 미스터리가 깔려있긴 하지만, 서사의 중심은 제목 그대로 하얀 마물이며 마지막 반전에 이르기까지 호러의 미덕에 충실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해운산업의 부흥을 위한 근대적 시설인 등대와 아직도 전근대적인 기운이 만연해있는 등대 주변 지역의 분위기가 충돌하면서 호러의 농도가 더욱 짙어지는데, 그런 면에서 1950년대 초반이라는 시대적 배경 자체가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시대적 배경에 아날로그 감성과 호러의 매력이 철철 넘쳤던 도조 겐야 시리즈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혹시 검은 얼굴의 여우에 아쉬워했더라도) 그 이상의 감흥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2021년에 시리즈 세 번째 작품 赫衣’(붉은 옷의 어둠)까지 출간된 상태입니다.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이후 10년째 소식이 없는 도조 겐야 시리즈에 대한 미련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모토로이 하야타의 새로운 이야기라면 그 미련을 조금은 접어둘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2024년에 도조 겐야와 모토로이 하야타를 모두 만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