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널목의 유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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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도쿄. 2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신문사를 그만뒀던 54세의 마쓰다 노리오는 현재 여성잡지 계약직 기자로 일하는 중입니다. 계약 만료 두 달을 앞둔 어느 날, 편집장의 지시로 심령 소재 취재를 시작한 마쓰다는 한 건널목에서 찍힌 긴 머리 여자의 사진과 영상을 보고 크게 놀랍니다. 조작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다 여자의 모습은 분명 유령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여자가 1년 전 그 건널목에서 피살됐음을 알아낸 마쓰다는 큰 충격과 함께 그녀의 정체를 파악하기로 결심합니다. 사건 당시 그녀의 본명이나 주소는 물론 가족조차 경찰이 전혀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마쓰다는 그녀에 관한 놀라운 정보를 하나둘씩 알게 되면서 특종 이상의 흥분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제목도 그렇고 출판사의 소개글도 그렇고, 아마도 작가가 다카노 가즈아키가 아니었다면 읽을까 말까 한참을 주저했을 게 분명한 작품입니다. 물론 미쓰다 신조의 도조겐야 시리즈작가 시리즈였다면 체할 정도로 급하게 찾아 읽었겠지만, 기본적으론 현대를 배경으로 한 유령 호러물은 제 취향 중 좀 아래쪽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 중 한국에 처음 소개된 유령인명구조대의 개정판인 줄 알았는데, 검색해보니 제노사이드이후 11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었고, 그래서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당장 읽지 못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구매신청을 해버렸습니다.

 

주인공인 마쓰다 노리오는 54세의 월간지 계약직 기자입니다. 가정을 내팽개칠 정도로 사회부 기자로 평생을 일해 온 마쓰다는 2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절망감에 사로잡혀 신문사까지 그만둔 바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계약직 기자가 된 그가 계약 만료를 앞두고 취재하게 된 건 심령 소재입니다. 먼저 간 아내를 유령 형태로라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을 흘리곤 했던 마쓰다지만 정작 심령 소재 취재를 맡게 되자 심한 거부감과 함께 기자로서 막장에 이르고 말았다는 자조적인 태도까지 숨기지 않습니다.

 

그런 마쓰다가 취재를 시작한 이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직접 겪으며 혼란에 빠집니다. 심령사진 속의 여자가 1년 전 끔찍하게 살해된 장본인이라는 걸 안 뒤로 마쓰다는 여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과거 사회부 기자처럼 열정적으로 취재에 나섭니다. 그런데 동시에 현실에선 절대 일어날 리 없는 기이한 현상들도 경험하게 됩니다. 심령현상이 일어나기 직전의 전조라는 나무줄기 쪼개지는 소리를 자주 듣기도 하고, 여자가 살해된 새벽 13분만 되면 울리는 전화기 속에서 희미한 비명 소릴 듣기도 하고, 심지어 사건현장인 건널목에서 유령임에 분명한 존재를 발견하곤 기차가 달려오는 줄도 모른 채 건널목 안으로 달려들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한편에선 살해된 여자의 정체와 사건 이면의 진상을 알아내려는 열정적인 기자 마쓰다의 취재 미스터리가 전개되고, 다른 한편에선 명백히 비현실적인 유령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말도 안 돼.”라는 생각이 든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사실적인 나머지 (마치 영화 사랑과 영혼처럼) 마쓰다가 유령과 소통할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고, 막판에는 마쓰다가 유령의 원통함을 통쾌하게 풀어주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물론 다카노 가즈아키가 절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작가는 아니기에 헛된 바람이란 건 너무나도 잘 알았지만 말입니다.

 

취재를 거듭할수록 마쓰다의 마음은 점점 어둡게 물듭니다. 그녀의 정체는 여전히 요원했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해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인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으로부터 소외당한 여자.”, “늘 음울하게 웃으며 돈을 위해 몸을 파는 성격 나쁜 여자.”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런 평판을 얻기까지의 사연을 하나둘씩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한지를 알게 되면서 마쓰다는 특종을 노리는 기자의 마음가짐 대신 쉽게 꺼지지 않을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마쓰다가 바라는 건 그녀의 유령을 안식에 들게 하는 것뿐이고, 실제로 마쓰다는 그렇게 되게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합니다.

 

정서는 전혀 다르지만 영화 사랑과 영혼에 등장한 유령 샘도 생각이 많이 났고, 비참함으로 점철된 한 여자의 삶이란 점에서 일본 드라마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도 많이 생각났습니다. 다카노 가즈아키 특유의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성실하고 열정적인 기자 마쓰다를 통해 저널리즘 미스터리의 진한 맛을 만끽할 수도 있었습니다. 무겁고 어둡지만 길고 오래 갈 여운도 함께 말입니다.

 

무슨 이유에서 11년 동안 신작을 내지 않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해서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들을 자주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본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봐도 이후 신작 소식은 나오지 않는데, 머잖아 그가 새로운 작품을 냈다는 소식이 들려오길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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