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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초록 - 어쩌면 나의 40대에 대한 이야기
노석미 지음 / 난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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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에 이사를 했다. 충동적으로 결정했으나 오랫동안 꿈꾸던 일이었다.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지 않는 곳에 정착해 살고 싶다는 바람. 집을 알아보면서 많은 일이 있었다. 부동산 업자를 만난 일이 시작이었다. 나는 한 곳에 전화를 했는데 부동산 사무소 두 군데에서 나왔다. 공동 중개라는 걸 몰랐다. 하나의 매물을 가지고 두 명의 중개업자가 일을 주선하는 것이었다. 속전속결로 집을 보여 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 동에 나온 집을 모두 보았다. 마음에 드는 집이 있었는데 결국 계약은 하지 못했다.

노석미의 에세이 『매우 초록』에도 비슷한 경험이 나온다. 작업실 겸 주거 공간을 짓기 위해 땅을 보러 부동산 업자와 돌아다닌다. 다들 알겠지만 문제는 돈이다. 몇 년 전에 살던 곳에 가보았지만 그곳은 고속국도가 들어서면서 땅값이 천정부지로 높아져 있었다. 노석미는 포기하지 않고 경기도와 강원도 사이에 있는 양평 쪽으로 눈을 돌린다. 그곳에서 소설을 쓰다 나온 것 같은 모습의 부동산 업자를 만난다. 그이와 땅을 보러 다닌다. 사람이 땅을 선택하는 게 아닌 땅이 사람을 선택한다는 운명론적 결론으로 땅을 구해 집을 짓는다.

당시 노석미의 나이 38세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사람이 땅을 산다고 해서 땅주인이 조금 놀라워했다. 부동산 업자는 생각보다 어리지 않다고 말하며 계약을 체결했다. 원래 그 땅은 다른 사람이 살 계획이었다. 그 사람이 오다가 사고가 나서 계약을 미뤄달라고 했는데 그 중간에 노석미가 땅을 사겠다고 한 것이다. 땅이 사람을 선택한다는 말. 안 믿을 사람은 안 믿고 믿을 사람을 믿는 그 말을 계시처럼 받아들며 새로운 삶의 시작을 연다.

시골에 살면 그것도 산과 가까운 곳에 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매우 초록』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다양한 짐승들을 만날 수 있고 마음만 먹는다면 꾸릴 수 있는 정원 텃밭에서 싱싱한 야채를 직접 재배해 먹을 수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라는 단서를 붙인 이유는 노동의 양이 꽤 많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따로 난방 장치도 해야 한다. 기름을 무한정 뗄 수 없어 노석미는 중고로 장작 난로를 산다. 연료는 당연히 나무.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오는 건 무리(주인이 있는 산이기 때문). 절단목을 사서 도끼로 쪼갬목을 만들어 쓴다.

혼자 사는 삶. 마을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살아가는 이야기. 야생 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주고 집에 사는 고양이와 정을 나누는 하루.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이 담백한 글과 그림으로 표현된다, 『매우 초록』은. 전원생활의 낭만을 과장 되게 예찬하지 않는다.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을 편안한 문체로 이야기한다. 버스 시간을 몰라 외국인 며느리에게 도움을 받고 작은 도서관에 가서 글을 쓰며 희망 도서를 신청한다.

이사를 온 뒤의 나의 삶과 비슷해서 깊은 공감을 했다. 여름에 문을 열어 놓으면 풀벌레 우는소리가 맹렬하게 들려오고 밤에는 인적이 드물다. 읍과 리로 표기된 주소를 가지게 되었고 걸어서 몇 분만 가면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번화가가 나온다. 어디에서 사는 것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더 깊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살아가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기만 한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사를 가야겠다는 충만한 의지가 솟아올랐다. 솟아오른 의지를 바탕으로 사는 곳을 바꿔보기로. 결과를 말하자면 사는 곳이 바뀌어도 나의 마음을 챙기고 다독이지 않으면 변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소유하는 집이 아닌 사는 집으로써 『매우 초록』에 담긴 집의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준다. 집의 형태가 어떻든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면서 사계절의 변화를 바라보는 삶. 혼자 있는 사람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소중한 1인으로 대접받는 삶'을 이어 나가는 것. 익숙한 길은 무섭지 않음을 깨닫는 것.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면 환경을 바꿔 다른 삶을 꾸리고 있는 이야기가 있는 책을 찾아 읽었으면 한다. 『매우 초록』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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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눈부시게! - 김보통의 내 멋대로 고민 상담
김보통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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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하얗게 불태웠다. 이번 주는 내내 그랬다. 딱히 바쁜 일도 없으면서 바쁜 척하느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이 몸을 힘들게 만들었다. 그래봐야 돌아오는 건 그 일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무거운 마음뿐. 잘 보이고 싶고 좋은 사람이고 싶어 더 긴장한다. 아닌 건 아니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고 집에 와서 한숨만 쉬고 잠 못 이룬다. 이런 쪼다, 바보.

김보통의 『살아, 눈부시게』를 읽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내 곁엔 책이 있었다. 고독이와 미묘, 노골이가 한 마디씩 툭툭 건네며 나를 위로한다. '내 멋대로 고민 상담소'라는 타이틀이 붙은 『살아, 눈부시게』를 읽으며 피식 웃고 말았다. 분명 심각한 고민이다. 어렸을 때 받은 상처와 내일이 보이지 않는 암담함, 현재의 고통을 말하면 고독이가 미묘가 노골이가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핵심을 찔러서 답을 해준다.

포기하고 싶다는 이야기에 포기해도 된다고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해 쉬는 건 포기가 아니라고. 불안해서 잠으로 도피한다는 고민자에게는 불안할 때 잠을 자는 건 도피가 아닌 충전이라고. 무겁고 아픈 고민을 듣고는 어떤 답을 해줘야 할까 싶은데도 재치 넘치는 말로써 마음을 녹이는 웃음과 다정함으로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이다. 도망쳐도 된다고. 아프면 꼭 병원에 가야 한다고도 말한다.

『살아, 눈부시게』에 담겨 있는 슬픔의 총량을 합치면 내가 겪는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위로를 받는 게 아니다. 감당하지 못할 슬픔임에도 살고 싶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선뜻 꺼내는 용기 때문에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울다가 웃으면 거기에 털 나는데. 글이 많은 책도 아닌데 쉽게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어떤 말에는 웃음을 어떤 말에는 눈물이 났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자. 주눅 들지 말자. 할 말은 꼭 하고 살자. 수없이 다짐해도 막상 눈치를 보고 주눅이 든 채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시간들. 도저히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은 순간들. 그럴 때 김보통의 『살아, 눈부시게』를 곁에 두고 내내 읽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순서대로. 그다음부터는 손이 가는 페이지를 펼쳐서. 망가지지 않고 방치하지도 않은 미래에 나를 데려다 놓기 위해서라도.

꿈과 목표라는 말이 멀게만 느껴지는 요즘이다.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런 말을 하는 이에게 화를 내고 따지고 싶다. 넌 뭐 그렇게 잘났냐. 『살아, 눈부시게』의 리뷰인 척 구질구질하게 힘들고 슬퍼서 죽겠다는 이야기를 길게도 하고 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징징대고 있다. 고독이는 미묘는 노골이는 이런 나를 한심해 하지 않을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임을 아니까. 후회는 해도 미련을 남기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아니까.

가끔 나에게 시련을 주는 이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어느 하루가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는 안다. 인생의 의미를 따지기보다 그냥 살아가야 한다는 고독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시원한 물을 들이켜고 일기를 쓰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수고했어, 오늘의 나 자신. 쓰담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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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0 소설 보다
김혜진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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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봄 2020』에 실린 세 편의 소설을 읽다가 가격을 확인했다. '값 3.500원.' 이거 이거 너무 싸잖아. 아직 커피 한 잔도 안 되는 돈으로 책 한 권을 사서 읽을 수 있다니. 감격. 부지런한 누군가는 각 계절에 나오는 계간지를 사서 읽겠지만 나는 한 계절이 끝나갈 때쯤 나오는 『소설 보다』 시리즈를 산다. '이 계절의 소설'을 대표하는 세 편을 읽는 것으로 한국 문학과 함께 한다는 기분을 느낀다.

김혜진의 「3구역, 1구역」은 현대문학 핀시리즈로 나온 『불과 나의 자서전』과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다룬다. 재개발이 된다, 안 된다를 몇 번씩이나 반복 되어온 구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세입자로서 3구역에 들어온 '나'는 동네 길고양이 태비를 돌본다. 고양이 캔을 사다가 바닥에 두는 것이 전부이지만. 태비가 음식 먹는 것을 바라보다 '너'를 만난다. 부동산 중개 사무소에서 일하는 '너'는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타자를 응시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관조임을 「3구역, 1구역」은 말한다. 가급적 판단을 하지 않을 것.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갖다 던져 버려. 장류진은 「펀펀 페스티벌」에서 쓸쓸한데 비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씁쓸해지는 뒷맛을 남기며 그렇게 말한다.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펼쳐지는 쇼가 가미된 합숙 면접의 풍경을 그리는 「펀펀 페스티벌」. 장류진은 인물을 그리는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별난 인물이 아닌데 옆에 앞에 있어서 내 심기를 툭툭 건드리는 인간을 소설로 데리고 와 시원하게 위선을 까발린다. 대리 만족을 느낀다. 나는 못 까지만 장류진은 까주니 사이다 한 잔을 들이켠 듯한 기분으로 소설을 읽어 나간다.

오늘은 토요일. 내일은 일요일. 이런 사실 만으로도 행복해진다. 한정현의 「오늘의 일기예보」는 단순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오늘과 내일을 꿈꾸는 소설이다. 젠더 문제, 고문 피해자, 비정규직, 비혼의 이야기를 모두 담지만 무겁거나 외면하게 만들지 않는 담백함을 가지고 있다. 어제의 고통을 묵과하지 않은 채 오늘의 소박한 행복을 바라는 「오늘의 일기예보」 속 인물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겨울은 외로웠고 봄은. 우리의 봄은 서로를 다독이고 안아 주어야 한다. 슬픔의 봄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우리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소설 보다 봄 2020』에서 만난 우리들. 인간은 다면적이다. 집을 사고팔아 차익을 남기면서 길고양이를 구하는 「3구역, 1구역」의 '너'와 스펙 쌓으려고 온갖 개고생을 하고서도 노래 부를 때 쪼를 극복하지 못해 좌절하는 「펀펀 페스티벌」의 '지원', 시를 강의하는 고모와 살면서 아름다움을 희망하는 '보나'까지. 소설은 인간의 다양성을 보여주며 봄의 문을 연다.

우리의 봄을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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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스트하우스 Q 창비청소년문학 94
박영란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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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즐기진 않는다. 오래 떠나봐야 당일 치기. 집이 좋다. 내 마음대로 물을 먹고 화장실도 들락날락할 수 있으니까. 분홍 베개에 누워 분홍 이불을 덮고 책을 읽거나 잠에 빠지는 하루. 굳이 멀리까지 가서 불편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 떠나봐야 안다지만 가지 않아도 안다. 좋겠지. 일상을 훌훌 벗어 던지고 낯선 곳으로 가면. 그러나 나의 귀차니즘은 여행을 떠나 멋진 풍경을 보고 맛있는 음식 먹기를 거부한다. 집이면 된다. 배달 음식을 먹고 드라마를 보고 책을 보는 나의 집.

박영란의 『게스트하우스 Q 』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집을 잃어버린 아이가 나온다. 식당 사업을 크게 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심장 마비로 죽었다. 정성이의 가족은 그렇게 뿔뿔이 흩어진다. 죽음 이후에 유산이 아닌 파산이 남았다. 할머니는 집과 과수원을 팔았다. 엄마는 언니가 살고 있는 원룸으로 들어갔다. 원룸에 정성이와 할머니, 엄마, 언니가 살아가야 했다. 오랫동안 소식을 모르던 기라 고모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찾아왔다.

기라 고모는 정성이에게 자신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 Q에 살아도 좋다고 말한다. 정성이는 원룸에서 모두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여름 방학 동안 할머니와 잠깐만 머물기로 한다. 아주 사는 게 아니라고 잠시만 있다가 떠날 것이라는 다짐과 함께. 기라 고모에 대해서는 오랜 기억밖에 없다. 정성이가 어렸을 때 함께 잠들었는데 고모는 수면제 때문에 깨어나지 못했다. 정성이는 그때 고모가 자살을 시도했다고 기억한다.

Q에 머물며 여름을 보내면서 정성이와 할머니는 안정을 찾아간다. 누구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기라 고모의 하루를 동력 삼아. 숙박객들을 위해 조식으로 도미밥을 하는 기라 고모. 정성이의 눈에는 낯설고 이상한 사람이 투숙해도 기라 고모는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게스트 하우스 Q 』는 살아가면서 좌절과 절망을 경험한 사람들을 위로한다.

집이 없어진 정성이와 할머니. 아름답지 않은 과거를 가진 기라 고모. 사랑하는 이를 찾기 위해 늘 여행을 떠나는 장기 투숙자. 씩씩한 모습 뒤에 슬픔을 감추고 살아가는 미농 씨. 그들이 게스트 하우스 Q에 모여 슬픔을 치유한다. 별의 추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구에서 나눌 수 있는 최대치의 행복과 따뜻한 밥을 나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의 정의를 기라 고모는 이렇게 말한다.

"어른이 되어도 어른 노릇을 못 하게 되어 버린 거야. 모두가 아이처럼 살도록 되어 버린 거지. 용돈 정도의 임금에 만족하고 어떻게든 작은 기쁨을 찾아 소비하며 살다가, 늙으면 용돈보다 못한 푼돈에 의지해야 하는 세상으로 바뀐 거야."
(박영란, 『게스트하우스 Q 』中에서)

게스트 하우스에서 다정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집을 떠나 여행을 시작해 봐도 좋겠다. 낯선 곳에서 집처럼 편한 익숙함을 느끼게 된다면. 약간 태운 도미밥을 조식으로 주는 곳이라면 지친 마음을 내려놓고 밝은 내일을 희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불행했던 과거를 잊고 현재에 충실하기. 갈아 엎어질 걸 알면서도 할머니는 밭에 해바라기를 심는다. 우린 모두 죽지만 매일을 살고 있다. 마음이 아픈 오늘이었다면 『게스트하우스 Q 』를 읽어 보시기를. 근사한 용기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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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 익스체인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2
최정화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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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대로라면 화성에 땅이라도 사두어야 할 것 같은데. 그래야 옮겨가서도 슬픔에 빠지지 않으며 살 텐데. 2020년에는 하늘을 날으는 자동차가 등장하고 수중 도시가 만들어지리라는 상상화를 그리곤 했다. 인류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서 달나라에도 가리라는 막연한 상상, 은 상상일 뿐이었다. 봄이 되어 꽃이 피었다. 이른 아침과 저녁에는 찬바람이 불지만 봄은 도착해 있다.

최정화의 소설 『메모리 익스체인지』는 어느 먼 미래의 일을 그린다. 지구는 생명체가 살기 힘든 별이 되었고 지구인들은 화성으로 이주해 간다. 화성은 지구인을 이렇게 표현한다. '돈이 덜 드는 만큼 힘을 못 쓴다.' 화성이 지구인의 입국을 허락해 주는 까닭은 싼값에 지구인을 부리기 위해서이다. 지구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화성으로 간다.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 수 있을까. 과연 지구보다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을까.

어렵게 티켓을 구해 화성에 도착한 가족이 있다. 그들은 아이디얼 카드가 없으면 화성 기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걸 몰랐다. 150명의 지구인들이 화성에서 마련한 숙소에 머무른다. 화성의 회사는 그들에게 은밀한 제안을 해오기 시작한다. 갈 곳이 없는 지구인에게 경제 사정이 어려운 화성인이 아이디얼 카드를 파는 것이다. 대신에 그들은 자신의 기억을 넘긴다. 기억을 없애고 화성 특별 구역에 들어가 몸을 의탁한다.

아이디얼 카드를 얻은 지구인은 화성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기억을 교환하는 '메모리 익스체인지'는 지구인과 화성인이 공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나. 최정화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를 끊임없이 소설에서 환기 시킨다. 내일을 위해 어제의 나를 버려야 하는 삶을 축복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화성에 안착해 살기 위해 기억을 교환하는 일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메모리 익스체인지』는 화성이 배경이지만 이는 지구에서의 행태를 그리기 위함이다. 국경의 경계가 모호해졌지만 이주민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자세는 배척, 혐오, 경계라는 단어로 명확하다. 전쟁과 기아를 피해 어렵게 타국에 도착했지만 그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기억을 교환하고 아이디얼 카드를 받는 소설 속 설정은 지금의 이주민이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서로의 기억을 이식받은 그들이 만난다. 나는 내가 아니었음을 확인하고 과거의 나를 받아들인다. 『메모리 익스체인지』의 미래는 가혹하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는 고사하고 지구마저 버려야 한다. 힘들게 화성에 갔지만 그곳에서마저도 배척 당한다. 가진 게 없어 나의 기억을 팔아야 하는 미래는 부디 오지 말았으면. 나를 나이게 하는 기억을 안고서 봄 길을 걷는다. 버스에 앉아 흩날리는 꽃잎을 보는 것으로도 행복했다. 오늘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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