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볼커 이야기 - 유전체 의학의 불씨를 당기다
마크 존슨.케이틀린 갤러 지음, 금창원 외 옮김, 서정선 감수 / Mid(엠아이디)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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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 유전체 의학이 차세대 의학의 주류 트랜드로 떠오르고 있다. 이 의학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환자 맞춤형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나 암환자의 경우, 환자가 가진 유전자에 따라 양상도 여러가지이고, 치료 방법도 달라진다는 것이 확인되었기에, 유전체 의학은 더욱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물론 여기엔 외부 요인, 즉 DNA 염기 서열 분석 기술의 발달로 유전체 분석의 정확도와 속도 그리고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양은 비약적으로 상승한 반면 들어가는 비용은 격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53년에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처음으로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발견한 이후로, 유전자는 인간의 생명과 존재가 가진 신비를 풀 열쇠로 간주되어 많은 학자들이 인간의 유전자를 해독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그러다 1977년, 영국과 미국 학자들에 의해 유전자 해독법이 처음으로 고안되었고 1990년, 마침내 정부 주도로 인간이 가진 모든 유전자의 지도를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한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13년이 흐른, 2003년, 드디어 32억개로 이루어진 한 인간의 전체 게놈이 완성된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첫번째 인간 게놈 해독을 위해 걸린 시간은 7년이었고, 수 백 대의 분석 기계들이 동원되어야했으며, 여기에 들어간 총 비용만 해도 무려 27억 달러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고 많은 기계를 동원할 필요도 없다. 비용 역시 천 달러 정도로 분석 가능하도록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유전체 의학은 특히나 스마트 환경과 맞물려 한층 더 각광받고 있다.


 앞으로 더 분석 기술이 발달하고, 비용이 저렴해지면 스마트 폰의 앱만으로도 한 인간의 유전자 분석이 가능해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분석된 유전자 정보를 바탕으로, 의사의 진단을 받을 필요 없이 앱 자체가 질병의 관리와 치료 방법을 내놓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손 안의 의사'도 불가능 하지 않다. 하지만 게놈 프로젝트가 완성되었을 때조차 이런 유전체 의학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많이 없었다. 한 인간의 유전자 분석이 실제 치료에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 오늘날과 같은 유전체 의학의 부흥을 가져온 것은 한 소년 때문이었다.



 그 소년의 이름이 바로 니콜라스 볼커다.


 그에겐 병이 있었다. 스테이크를 너무나 좋아하는 아이지만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음식을 먹기만 하면 '소년의 내장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작은 연필 막대 같은 구멍이 생겼기 때문이다.'(p.23) 2년 동안 많은 의사들이 달려들어 소년의 병을 연구했지만 발병의 정확한 이유도, 치료 방법도 찾을 수 없었다. 갖은 방법을 다 써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닉의 병은 흡사 인간 의학에 절대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존재로 보였다. 닉의 담당의 메이어는 닉의 질병이 마치 용과 같다고 생각했다.


 '병은 사실이라고 믿기 어려울만큼 파괴적이었다. 자신이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었더라면 그런 질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을 것 같았다. 자신의 모든 의학 기술을 동원해 용을 겨우 달래서 일시적인 수면 상태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 가라앉고 있는 배에서 물을 퍼내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배가 계속 떠 있게 할수는 있지만 물이 어디서 새고 있는지 밝혀낸 것은 아니었다. (p. 151)


 그런 닉은 혈액 주사를 통해 직접 영양분을 공급 받으며 하루하루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기에 마지막 방법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유전자 분석이었다. 메이어는 닉이 가진 유전자의 결함으로 생겨난 병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쨌든 그가 시도해 볼 수 있는 최후의 복안이었다. 그래서 메이어는 당시 최고의 유전체 서열 해독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하워드 제이콥에게 도움을 구한다. 그 때만 해도 유전체 서열 해독 기술이 실제 의학에 사용될 수 있는지 확실치 않았었다. 제이콥은 의사가 아니었다. 그저 생리학을 전공하고 쥐를 가지고 유전자 서열 해독을 연구하는 과학자였다. 하지만 제이콥은 닉의 엄마 애밀린이 블로그에 쓴 일기를 읽고, 자신 역시 두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닉과 부모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여 결국 닉의 유전체 서열을 분석하기로 결정한다. 그에겐 워디란 직원이 있었다. 그녀는 원래 시애틀생명의학연구소에 있다가 일년 전, 면접에서 제이콥이 2014년부터 아픈 아이들의 DNA 염기 해독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한 말에 감명 받아 제이콥이 있는 위스콘신 의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닉의 해독은 원래 계획 보다 5년이나 앞당겨진 것이었지만 제이콥과 함께 과감히 뛰어들었다.


제이콥은 워디에게 때가 왔다고 얘기했다. 의사들의 손발을 들게 한 치명적인 질병에 고통받은 끝에, 오직 게놈 해독만이 운명을 바꿔줄 수 있는 환자가 눈앞에 있다.(p. 164)


  워디에겐 희망이 있었다. 닉이 가진 병의 초기 증상은 근본적으로 너무 낯설고 불가사의하며 위협적이라 분명 유전적인 것이 원인으로 보였다. 그리고 만일 정말 그렇다면 반드시 닉의 30억개 유전체 서열에 무언가 나타나게 되리라 믿었다. 그녀는 표준 게놈 서열과 닉의 게놈 서열을 비교했다. 표준 게놈이란 '무엇이 정상적인 사람의 게놈인지 그 기준을 알려주고, 질병을 가진 사람의 게놈과 비교하여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p. 168)이다.  하지만 이것이 모범 답안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표준 게놈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고작 28명의 게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28명 모두가 알려진 희귀 질환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를 위한 출발점은 되었다. 그러나 이런 표준 게놈이 있다고 해도 어려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 인간이 가진 DNA는 모두 32억개. 이것들을 소수의 사람이 소수의 도구들만 가지고 전부 분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워디는 인간 행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가 있는 엑솜(exome)에 집중했다. 이 엑솜은 전체 게놈 중 1.2%에 지나지 않기에 분석하기에 훨씬 유용하다. 더구나 '상당수 유전 질환이 단백질 문제에 있었기 때문에 닉의 병 역시 엑솜의 어떤 부위에서 기인'(p. 172)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티스푼 정도의 혈액에서 닉이 가진 병의 탐색이 시작되었다. 그 혈액은 DNA로 축소되고,  DNA는 엑손(exon), 액손은 염기 서열의 구성 문자인 A(아데닌),C(사이토신),G(구아닌),T(티아민)로 환원되었다. 하지만 모든 걸 기계가 하지 않았다. 유전자 정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기본 단위인 백혈구의 핵을 뚫어야 한다. 그것은 사람이 직접 해야 했다. 그렇게 분석되었다. 물론 그 과정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 2009년 10월, 닉의 유전자는 다섯 번째로 해독되었고, 그 결과 16,000개에서 32개로 변이 유전자의 후보를 좁힐 수 있었다. 그것들을 대상으로 워디와 동료들이 직접 개발한 분석 프로그램인 '카르페 노보'를 사용한 끝에, 결국 병을 일으킨 유전자를 찾아내었다. 범인은 바로 XIAP였다.


 XIAP에 문제가 생기면 면역체계가 좋은 균과 나쁜 균을 구분하는 능력에 이상이 생겼다. XIAP의 유전자에 이상이 생기면 XIAP 단백질 생산이 줄었다. 닉의 백혈구는 필요한 XIAP 단백질의 60%만 가지고 일하고 있었다. 닉의 몸 속에서 일어난 대혼란은 32억개의 DNA 염기서열 중 단 하나의 염기가 잘못된 염기로 치환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잘못된 염기를 바로 잡아야했다. 그러자면 골수 이식밖에 없었다. 결국 닉은 골수이식을 받게 되었고, 생명과 건강한 삶을 되찾았다.


 이렇게 니콜라스 볼커는 당시까지만 해도 반신반의의 대상이었던 거대 게놈 프로젝트과 의학의 연결을 현실적으로 확인시켜 준 계기였다. 이 치료의 성공으로 오늘날과 같은 스포트라이트가 유전체 의학에 비로소 비춰졌던 것이다. '니콜라스 볼커 이야기'는 이 과정을 굉장히 상세하고 충실하게 담고 있다.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니콜라스 볼커의 병을 씨줄로 하여 유전체 의학의 등장과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날줄로 잘 누벼놓았기 때문에 유전체 의학의 전모마저 잘 살벼볼 수 있게 해 준다. 유전체 의학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셨던 분들이라면 정말 좋은 안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곧 입시철이다. 지금 중3들은 과학고 지원으로 한창 바쁠 때다. 그러고 보니, 요즘 과학고에선 아예 모집 공고를 낼 때부터 의대 갈 학생들을 지원하지 말라고 직접 써 둔다고 한다. 의대 진학을 위해 과학고를 이용하는 학생이 많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전체 의학이 지금의 의학 패러다임을 많이 바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유전체 의학이 상용화되면 의사에 대한 수요는 지금보다 훨씬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영화 '프로메테우스'에 나오는 자동 수술 기계도 정녕 꿈만은 아닌 것 같으니. 그러므로 기술로 대체 가능한 의사가 되기 보다는 그 기술 자체를 만들어내는 분야에 뛰어드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어진다. 미래의 직업은 보다 더 많이 알 때, 더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다. 학생이라면 교과서만이 아니라 이런 책을 읽는 것이 자신의 삶을 위해서도 더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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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브렌다 - 본성 대 양육 논쟁의 전환점이 된 일란성쌍둥이에 관한 기록
존 콜라핀토 지음, 이은선 옮김 / 알마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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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하나의 성이 '섹슈얼리티'와 '젠더'로 나뉘어져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게 된 건,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기 기든스가 쓴 '현대 사회학'이란 책에서였다. 대학 신입생 때였는데, 전공은 아니지만 사회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사회학 전공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 책을 가장 많이 본다 하여 읽게 된 책이었다. 거기서 처음으로 인간의 성(sex) 을 태어나면서 가지게 되는 자연적인 '섹슈얼리티(sexuality)'와 한 개인이 사회화되면서 가지게 되는 인위적인 '젠더(gender)'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나누게 된 가장 대표적인 계기로 기든스가 말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여기서 소개할 존 콜라핀토의 '이상한 나라의 브렌다'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데이비드 라이머 케이스'이다.



 데이비드 라이머는 1965년 8월 22일, 예정일을 4주 앞두고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다. 부모는 둘에게 브루스와 브라이언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생후 7개월로 접어 들었을 때, 두 아이 모두 소변 할 때마다 칭얼댄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의 성기를 살펴보니, 포피가 성기 끝 부분을 막아 소변 보는 걸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병원에서 포경 수술로 간단히 치료할 수 있다고 하여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수술은 말처럼 그리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브루스의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가 전류로 절단 부분을 지져서 봉합하는 기구('보비 소작기'라고 한다.)를 썼는데, 의사의 실수인지 아니면 기계의 고장인지 그만 브루스의 성기가 타버린 것이다. 아이는 평생 성적 불능이 될 운명이었다. 그런데 부부에게 머니 박사라는 사람이 연락을 해왔다. 그는 존스홉킨스대학의 저명한 의학 교수였다. 특히 성 심리학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데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한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음양 환자들이 총계를 놓고 보았을 때, 남성이건 여성이건 성 행태와 성 지향성을 본능적으로 타고나지는 않는다. 남성적인 면과 여성적인 면은 선천적으로 결정된다는 이론이 있지만, 반음양 환자들을 관찰한 결과 알 수 있듯이, 심리학적으로 볼 때 출생 당시 중립적이었던 섹슈얼리티는 성장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남성적인 쪽으로 혹은 여성적인 쪽으로 차별화되기 시작한다."(p. 59)


 그래서 부부에게 브루스를 성전환시키고 아예 여자로 기를 것을 제안했다. 결국 부부는 머니 박사의 뜻을 따랐고, 브루스는 브렌다로 자라게 되었다. 하지만 머니 박사가 순수하게 브루스를 위하여 이런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겐 야심이 있었다. 자신이 적극 주장하고 있는 '후천적 성 형성론'이 진리인 것을 입증하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같은 성을 가진 일란성쌍둥이는 좋은 표본이었다. 그렇게 태어나 인위적으로 한 쪽은 남자로, 다른 한 쪽은 여자로 만들고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자라게 된다면 그것만큼 자신의 이론을 강력하게 증명하는 것도 또 없었다. 브루스의 소식을 들었을 때, 머니 박사는 쾌재를 불렀다. 그가 먼저 브루수의 부모에게 연락하여 당장 존스홉킨스대학으로 데려오라고 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브루스는 정말 브렌다로 자라났다. 아이는 아무 거리낌없이 여자 옷을 입었고 여자처럼 행동했으며 생일 선물도 브라이언은 기차를 골랐는데 자신은 인형을 골랐다. 브렌다는 성이 사회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산 증거가 되었다. 삽시간에 이 사실이 전세계로 퍼져 나갔으며, 그래서 사회학의 가장 대표적인 개론서라 할 수 있는 기든스의 책에까지 실리게 되었다. 머니 박사의 명성까지 한없이 높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났다. 브루스와 브렌다에 관한 모든 것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그 뒤, 브렌다가 된 브루스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니 그렇게 알려지기 전이라도 브루스가 진실로 브렌다의 삶을 받아들였는지, 그 정확한 내막과 소식이 알려진 바 없었다. 그러다 우리는 1997년에 화와이대학의 생물학자와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의 한 정신과 의사가 발표한 논문에서 아주 놀랄만한 사실을 알게 된다. 브루스가 처음부터 자신에게 강제된 여성이라는 성 정체성에 계속 반발해 왔으며 결국 열 네살 때 다시 남성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논문은 머니 박사의 실험은 실패라고 단정했다. 우리가 진실로 알고 있었던 '쌍둥이 케이스'는 '공상 의학 게임'일 뿐이라고. 그 논문이 발표되자마자 이 책의 작가 존 클라핀토는 직접 당사자를 찾아갔다. 현재 그는 논문에서 말한 그대로 남자 청년이 되어 있었고 이름도 브렌다에서 데이비드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는 브렌다의 삶에 대해 이렇게 한 마디로 정의내렸다.


 "세뇌 당한 거나 다름 없어요.(p. 11) 


 브렌다는 가장 유명한 아이 중 하나였다. '젠더'라는 개념이 자리 잡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사례의 장본인인 만큼 누구나 브렌다를 알았다. 하지만 그는 가장 알려지지 않은 존재이기도 했다. 아무도 그렇게 살아가는 그의 내면을 알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이상한 나라에 사는 것과 같았던 그의 실존, 그 내면에 자리한 고통은 누구의 관심도 끌 수 없었다. 그는 그냥 머니 박사가 만든 브렌다란 껍데기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저자 존 클라핀토는 그 껍질을 깨고, 데이비드가 되기까지의 진정한 알맹이의 삶을 보여주려 한다. 숨김없이, 남김없이. 그리고 우리는 똑똑히 보게 된다. 제아무리 객관적이라 자부하는 과학이라 해도 얼마나 쉽게 왜곡되고 잘못도 진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또 그런 과학이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처참하게 유린할 수 있는지. 문득 칼 포퍼가 말한, 과학에 있어 진정한 객관적 지식의 의미가 생각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 및 과학적 객관성은 과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객관적'이고자 하는 개인적 노력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과학자들의 우호적-적대적 협동에서 유래하는 것이다.('열린 사회의 적들' 중에서.)


 머니 박사의 권위에 짓눌리지 않고 과학자들이 집단적으로 '브렌다 케이스'를 검증했다면, 브렌다의 고통은 훨씬 빨리 줄어들지 않았을까? 피해자가 비단 브렌다만은 아니었기에 더욱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그 뒤로도 많은 이들이 이 '브렌다 케이스' 때문에 머니 박사와 그의 이론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전환을 당하고 강제적으로 규정 당한 성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문자 그대로 그들은 폭력의 희생양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한 사람의 정체성을 남이 멋대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폭력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게 성 정체성적으로 단 두 개의 삶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한 인간의 삶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 우리는 이 책에서 똑똑히 볼 수 있다. 머니 박사가 남성 아니면 여성의 삶밖에 없다는 고정 관념에서 탈피만 할 수 있어서도 브렌다와 같은 많은 피해자들이 생기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여기서 아무래도 쥬디스 버틀러의 수행적 정체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정체성이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행동을 통해 부단히 형성된다고 말했다. 식물처럼 남성이나 여성으로 대지에 고정되어 그렇게만 자라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라 광활한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바람처럼 어디에나 깃들 수 있는 것이며 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말이다. 그런 마음으로 브렌다에게 여성의 삶만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설령 성기를 잃어버렸다 한들,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삶의 과정을 배려하며 그만이 가진 가능성이 발현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오늘의 데이비드가 훨씬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사람의 성은 신비롭다. '이상한 나라의 브렌다'는 그걸 결코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더하여, 한 사람을 대한다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넌지시 알려주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늘 세심하게 살피고 진중하게 헤아려야 한다는 것을 은연 중에 깨닫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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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경제 - L’economie des inegalites
토마 피케티 지음, 유영 옮김, 노형규 감수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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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성과연봉제가 이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성과연봉제는 업무능력과 성과를 등급별로 평가, 임금에 차별을 두고 저성과자는 해고시키는 게 방침인 제도다. 정부는 일단 공공기관부터 그것을 적용하려는 참인데, 현재 노조의 반발이 꽤나 거세다. 물론 취지는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공공 서비스가 주목적인 공공기관에서 사기업처럼 업무 능력과 성과를 일률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공 기관의 무능과 부패는 대부분 권력이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자행되는 낙하산 인사로 인한 것인데 그 책임을 시키는 대로 묵묵히 일만하는 일반 직원들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과연봉제는 임금 억제와 쉬운 해고가 골자다. 근본적으로 부자 감세로 인한 재정 부족 상황을 노동자의 희생을 통해 타개하려는 데 있다. 단적으로 소득 불평등 심화에 일조하는 정책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불평등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토마 피케티는 이렇게 되는 이유로 전체 소득에서 노동을 통해 얻는 소득의 비율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꼽는다. 그는 그것을 선명히 나타내기 위해 피케티 공식이라는 것을 고안했다. 공식에 대입하면 피케티 지수가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국민 전체 소득 중 자본 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을 가리킨다. 피케티는 이 지수가 1950년 이후로 계속 증가해 왔다고 한다. 즉 원래 가지고 있는 자본에서 얻는 소득이 노동을 통해 얻는 소득보다 갈수록 더 많아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는 부의 획득이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보다 오로지 세습을 통해 더 많이 이뤄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단어인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닌 것이다. 정태인 교수가 피케티 공식에 따라 우리나라의 피케티 지수를 산출했는데, 우리나라 전체 소득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몫이 무려 절반에 가까운 48%였다고 한다. 절반에 가까운 소득이 아무 노동 없이도 가능하다니, 정말 우리나라 불평등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피케티는 이 지수가 앞으로 더욱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라 본다. 당신이 흙수저라면 앞으로의 미래도 현재만큼이나 암울하다는 예언인 것이다. 이 운명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피케티는 조세 정책에 승부수를 띄운다. 


 무엇보다 오직 자본을 압박하는 조세만이 자본과 노동의 진정한 재분배를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다.(p. 91)


 지금까지는 경제 성장이 우리의 생활을 향상시킨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피케티에 따르면 OECD 국가의 경우, 1983년부터 1995년까지 부가 비약적으로 성장했는데, 같은 시기 노동자들의 삶은 별반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실질 임금의 하락으로 삶의 질은 전반적으로 낮아졌다. 한 마디로 성장의 과실은 결코 노동자에게로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보수들이 흔히 주장하듯, 경제 성장이 더 좋은 삶을 가져다 주진 않는다. 한 마디로 넌센스에 불과하다. 때문에 기댈 곳은 오직 재분배 정책밖에 없다. 그것도 자본 소득에 집중된 재분배 정책이어야 한다. 거기에 가장 실질적이며 커다란 효과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조세 정책이다. '21세기 자본론'에서 피케티가 강조한 부유세는 바로 이러한 현실에 대한 고찰에서 나왔다. 그러면서 그는 인적 자본 성장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반적인 불평등도 그렇지만 부국과 빈국 간 불평등의 핵심은 생산 수단의 불공평한 분배가 아니라 인적자본의 불공평한 분배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p. 112)


 이 인적 자본을 평등하게 배분하는 것이 바로 '효율적 재분배'다. 피케티는 재분배 정책에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높은 임금과 낮은 임금 사이의 격차를 완화시키는 '기초적 재분배'이고 다른 하나는 인적 자본 형성 과정에 정부가 직접 개입하여 개인의 학력간 능력간 차이를 없애는 '효율적 재분배'다. 이를테면 효율적 재분배란 로스쿨처럼 돈과 부모의 배경이 있어야만 배움의 기회가 허락되는 것을 근절하고, 독일이나 프랑스의 대학 학제처럼 누구나 균등하게 어려움 없이 자신의 인적 자본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하는 것이다. 가난한 학생들이 부유층 못지 않게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장학금 같은 지원 제도를 정부가 광범위하게 마련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효율적 재분배라 할 수 있다. 즉 부유세를 통해 확충된 재정이 효율적 재분배를 위해 쓰이는 것이다. 결국 이런 식의 인적 자본의 성장 주도가 궁극적으로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심한 불균형을 해소할 것이라 보고 있다. 갈수록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여기저기서 보다 높은 계층으로 올라갈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것을 보게되는 요즘, 피케티의 이런 조언은 아무래도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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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 배제된 생명들의 작은 승리 EBS 다큐프라임 <생명, 40억년의 비밀> 3
김시준.김현우,박재용 외 지음 / Mid(엠아이디)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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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로운 책이다. 진화의 과정을 전혀 새로운 눈으로 보도록 만들어 준다. 바로 '경계'라는 책이다. '경계'는 EBS 다큐 프라임의 '진화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자, 그 완결편이다. 특히 부제가 흥미롭다. 이 책의 부제는 '배제된 생명들의 작은 승리'다. 부제대로, 이 책은 진화에 대한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완전히 바꿔 준다. 우리라고 성급하게 일반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적어도 나는, 진화가 정확히 양육강식 논리의 점철이라 생각했다고 고쳐 말하겠다. 즉 진화를 선도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강자로, 생존 경쟁에서 승리한 주류가 진화를 이끌어왔다고 말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 책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은 생존 경쟁에서 패배한, 그래서 더 어렵고 힘든 생존 환경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정말 부제대로 배제된 생명이자 그래서 한없이 약자였던, 아감벤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야말로 '호모 사케르'와 같은 존재들이 지금까지의 진화를 이끌어온 장본인들이었다고 말이다. 정말 놀라웠다. 이제까지 진화에 대해 가졌던 내 생각에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가져다 주었다.



  이 책은 우리가 학창 시절에 배웠던 생물 교과서의 진화 과정을 그대로 담는다. 식물에서 인류에 이르기까지 다 담겨 있는 것이다. 하지만 듣게 되는 내용은 그것과 많이 다르다. 근본적으로 진화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부터 다르니까 말이다. 이 책을 보면, 진화의 강자는 자연의 강자와 전혀 다르다. 자연의 강자는 강한 것이 이긴다. 그러나 진화의 강자는 약한 것이 이긴다. 강하고 약한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얼마나 변화를 잘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환경 앞에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겸허히 그 조건을 수용하고 거기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화의 강자였다. 사실 진화의 정의마저 정녕 그것이었다. 책은 진화에 대해 정확히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적응하고 변화하는 것(p. 8)


 지구라는 행성은 죽어있지 않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아주 역동적인 행성이다. 당연히 지구의 생태계 또한 이런 지구의 변화 때문에 필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지구라는 별이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45억년 내내 이런 과정이었다. 생명은 끊임없이 과거와 다른 새로이 변화된 환경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했다. 어제의 좋은 환경이 오늘 악조건이 되는 일도 흔치 않았다. '로머의 간격'이라는 게 있다. 고생물학자 알프레드 로머의 이름을 딴 것으로, 석탄기 3억 6천만년전 부터 3억 4천5백만년 전까지, 고생물학적으로 텅 빈 시기를 말한다. 흔히 말하는 '대멸종의 시대'다. 왜 이 시기에 갑자기 생물들이 멸종해버렸는가? 거기에 대해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식물들이 광합성 작용을 하게 되어 대기에 산소 농도가 높아지자, 온실 효과가 일어났다. 그러자 수온이 상승했고, 냉대의 바다가 온대의 바다로 되어가자 이전처럼 차가운 온도에 살 수밖에 없었던 생물들은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산소는 모든 생명이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많아진다는 것은 모든 생명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정작 산소가 많아지자 오히려 파국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환경은 늘 가변적이었고 예측이 불가능했다. 자신의 강한 힘만 믿고 환경에 맞춰 변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던 종들은 모두 멸종을 피할 수 없었다. 공룡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오로지 스스로의 한계를 잘 자각하고 환경의 요구에 맞게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종들만 미래의 지속이 허락되었다. 지금도 아주 소수이지만 잠자리처럼 수 억년에 나타났던 종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 종들 모두가 멸종을 피하고 인간보다 훨씬 더 긴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환경 변화에 발맞춰 자신을 기꺼이 바꿨기 때문이었다. '경계'는 그 여정을 충실히 보여준다. 쉽고도 상세한 설명과 더불어.


 쫓겨난 이들이 경계를 넘어서기 위한 수많은 노력들이 화려한 지구의 생태계를 만들어낸 것이다.(p. 9)


 원래는 수중에만 있었던 식물이 육지 위로 올라올 수 있었던 것도, 고생대 오르도비스기말에 닥친 빙하기로 인해 식물들이 적도로 몰려들게 되자, 한정된 공간에서 홍조류, 갈조류 그리고 녹조류들 간의 생존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는데, 그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 육지 가까이에서 겨우 잔존하던 녹조류 중 일부가 아직은 블루오션으로 남아 있던 육지로 눈을 돌리고 당시 풍부해진 산소를 이용하여 표피에서 수분이 빠져 나가지 않도록 만드는 큐티클과 지금의 식물 물관을 형성하는 리그닌 그리고 건조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분을 일정 정도 보관할 수 있는 액포를 스스로 합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식물의 모습과 조직 대부분은 가혹한 생활 환경 변화에 기존 방식의 고수 보다는 과감한 탈바꿈으로 대응했던 것의 결과였다. 식물만이 아니었다. 어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다의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 물이 부족한 민물에서 살게된 물고기들이 부족한 산소 때문에 아가미 이외에 래버런스 기관과 폐를 만들었고 결국 그 폐가 진화하여 수중 활동을 보다 원활하게 만드는 부레가 되었다. 그렇게 민물에서 살 수 있게 된 이들은 대멸종 시대인 로머의 간격에서도 살아남아 지구에 생명이 다시금 이어가도록 만들었다. 바로 이 폐를 가진 물고기들에게서 미치아강이란 사지가 달린 생물이 생겨났고 양서류까지 진화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식물이 육지로 올라간 과정과 어류가 육지로 올라간 과정은 비슷했다. 주체의 처지도, 이유도 말이다.


 진화는 이렇게 어디까지나 생존 경쟁에서 가장 밀려나 있었던 약자의, 자신과 과거를 철저히 버리는 행위에서 이뤄졌다. 여기엔 결코 큰 승리가 있을 수 없었다. 부제에서 '작은 승리'라고 한 것은 부단히 변하는 지구 생태 환경에 있어서 항상 과거의 모습으로 있을 수는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진화란 그러한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과 무수히 많은 시도를 담보로 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시도들은 지구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남게 된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무수한 '그침' 속에 단 하나 '이어짐'의 역사다. 하지만 그 후손이 이어지지 않고 멸종했다고 해서 그들은 그저, 그 장소, 그 시간에서 유전자의 이어짐을 '그쳤을 뿐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그 수많은 유전자 중 운 조게 이어진 후손 중 하나일 뿐이다.(p. 9)


 우리 인간도 다르지 않았다. 인간은 소화기관의 한계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없었다. 과일과 동물밖에 없었다. 하지만 딸 수 있는 과일은 늘 턱없이 부족했고 초식 동물의 속도를 따라잡기엔 인간의 다리가 너무 느렸다. 그렇다고 자신보다 훨씬 강한 육식 동물에 덤빌 수도 없었다. 이런 열악한 생존 능력으로 인간은 결국 무리지어 살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보잘 것 없는 공격력을 보강하기 위해 손을 사용하게 되었다. 초기 인간들은 육식동물이 사냥하면 그 주위에 있다가 배불리 먹은 육식동물을 돌을 던져 쫓아내 그 동물이 먹다 남긴 것을 모여 앉아 먹는 것으로 연명했다. 인간은 꼭 육식동물이 배가 부른 뒤에야 돌을 던졌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을 공격해 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포식자를 피해 떠돌아 다니던 약자였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직립 보행도 바로 이런 약자로서의 위치가 가져다 준 것이었다. 다시 말해, 선택이 아니라 유일한 대안이었다. 결국 두 팔이 자유로워져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인류 자체가 여타 모든 생명들에게 가혹한 환경이 되고 있다. 그것을 '경계'는 특히 고래와 바다소 그리고 물개를 통해 잘 보여준다. 모두 인간의 탐욕으로 남획 당하여 이제는 멸종 위기에 처한 대표적인 생물들이다. 바다소는 인간에게 너무 사냥 당한 나머지 아예 '목(sirenia)' 자체가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모두 대항해 시대와 제국주의 시절, 백인들이 자행한 결과다. 그래서 책은 지금 유럽과 미국이 이누이트 족과 일본에 대해 고래 잡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을, 취지는 이해하지만 어불성설이라고 못 박는다. 왜냐하면 지금 고래가 멸종 위기에 처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들, 유럽과 미국 백인 탓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략 3세기에 걸쳐 마구잡이로 고래를 잡았다. 그랬던 그들이 고래잡이를 그만두었던 것도 고래가 멸종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잡을 고래가 정말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석유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코 고래잡이를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석유 때문에 고래보다 더 싼 값에 기름을 얻을 수 있었기에 포경 산업은 자연 도태되고 말았다. 그저 상황의 변화였을 뿐, 자성의 실천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고래 멸종 위기의 주범인 자신들의 잘못은 전혀 반성하지 않고 오로지 이누이트 족과 일본만을 탓하고 있으니, 일본 포경 산업이 비난받는 것은 마땅하지만 그들의 주장 역시 선뜻 손을 들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런 태도는 40억년 지구 역사에서 도태되고 멸종되어 버린 모든 자연의 강자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강한 힘 때문에 단기에는 군림할 수 있었지만 장기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모습들을. 결국 오만했기에, 자신의 잘못과 약점을 인정할 줄도 몰랐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도 없었던 존재들을. 진화의 역사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 존재들에겐 멸종밖에 없다는 것을. 인간 역시 아무런 반성 없이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다간 그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한 생존 환경의 경계로 내몰리게 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지극히 불안한 일이다. 하지만 진화는 오히려 그렇게 내몰린 존재들에게서 태어났다. 닥쳐온 고난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거꾸로 생존을 위해 고난을 돌파하려 노력한 이들에게서.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구한 것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진화의 역사마저 일구어냈다. 이런 진화의 궤적은 정말 많은 것을 달리 보게 만들었다. 무엇이 정말 강하고 약한 존재인가에 대해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편협한 시야를 가지고 있는지 일깨워주었고 내게 닥친 고난의 의미와 강도 역시 다른 시선으로 보게 만들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을 진화만큼 실감한 경우도 또  없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너무나 연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생명에게도 거대한 진화의 역사를 태동시킬 역량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생명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진 사명이 자신의 종을 보다 많이 번식시키고 오래 지속시키는 것에 있다고 볼 때, 그런 진화를 만들어 내는 힘은 생명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힘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데 그 거대한 힘은  크기와 능력에 상관없이 지구 위 모든 생명에게 대등하게 나눠져 있었다. 이것을 깨닫고 보니 절로 모든 생명이 숭고하게 보였다. 여기서 숭고란 어디까지나 칸트의 정의를 따른 것이다. 칸트는 숭고를 '우리 자신의 사명에 대한 존경'이라 정의했다. 존재에 당위로 주어진 사명을 꿋꿋이 실천하는 모습을 볼 때 받는 감정인 것이다. 진화의 역사는 숭고의 역사 그 자체였다. 어쩌면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숭고의 감정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존재들에 대한 숭고의 감정이 사라져 버렸기에, 인간은 훨씬 쉽게 다른 존재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런지. 그리고 그게 또 연장되어 같은 인간마저도 그렇게 보도록 만들고 또 그렇게만 다른 존재와 타인을 보다 보니 자기 자신마저 한낱 사는 게 다인 존재로만 여기게 된 것은 아닌지.


 '경계'는 이 숭고의 감정이야 말로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이라 말해주고 있었다. 인류 차원으로 보자면, 인간의 탈출이 기존 생태계에 대한 공습이 되어 생태계마저 지구에 태어난 이래 최초로 그 영역이 축소되기 시작한(p. 267) 현 상황에 있어 그것이 지구와 자신의 멸종마저 막는 길이고, 나 개인에 있어서는 그저 하루 버티기에 급급한 삶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삶의 질적인 가치를 추구하게 만드는 동인(動因)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오늘 찾아온 고난도, 가지고 있는 불안도 지금과는 아주 다르게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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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클래식 세트 - 전3권 더 클래식 시리즈
문학수 지음 / 돌베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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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옛사랑이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하루는 베란다에 있는 벽장 정리를 했다. 그러다 이사 올 때 나중에 정리하겠다고 넣어두고는 지금까지 내내 잊어버리고 있었던, 클래식 CD가 빼곡하게 담긴 박스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게 넣어둔 것이 벌써 3년 전이다. 한 때는 누군가의 말처럼 하루라도 안 들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을 정도로 좋아했었는데, 어쩌다 3년이 되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되어버린 것일까? 케이스에 쌓인 먼지를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관심도, 열정도 그리고 사랑도 다 유통기한이란 것이 있다더니, 정말인 것 같았다. 그러나 기한이 있다고 해서 다 소진되는 것도 아니었다. CD들을 하나하나 꺼내보면서 그걸 깨달았다. 아주 어렵게 구해서 너무나 기뻤던 CD들이 있었고 이제는 만나볼 수 없는 이가 선물해 준 CD가 있었으며, 가장 힘들었던 때에 정처없이 떠났던 여행지의 한 가게에서 구매한 CD들도 있었다. CD에 얽혀 있는 그런 기억들이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마들렌처럼, CD를 보자마자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랬다. 어떤 것이든 그냥 사라지는 것은 없었다. 관심이든, 열정이든 그리고 사랑이든 내가 쏟은 그만큼 그것은 확실히 남아있었다. 다만 나설 때가 아니기에,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마음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든 자신을 불러줄 날을 기다리며. 그러니 이렇게 재회의 순간이 찾아오자, 내가 언제 잤냐는 듯이 부리나케 나와서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안아줄 수 있었겠지. 나는 그런 순간을 경험하고 있었고 그래서 CD 하나하나가 거기에 투영된 과거의 나와 만나게 하는 타임머신 같았다. 기억만이 아니었다. CD를 플레이 하면 그 선율이 가장 명징하게 나를 찾아왔던 순간의 내 감정과 생각마저 환기할 수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오랜만에 재회한 클래식을 다시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마를 보면 첫사랑과 아주 오랜만에 재회한 남자가 과거보다 더 열렬히 사랑하게 되는 일이 있는데 지금 내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재회의 여파로 결국 난 세 권의 책까지 만나게 된 것이다. 바로 현재 경향신문에서 음악을 담당하고 있는 문학수 기자가 쓴  '더 클래식'이란 시리즈를 말이다.

 흔히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을 한다. 내가 경험해 보니, 클래식만큼 이 말이 잘 들어맞는 곳도 또 없는 것 같다. 단순히 듣는 것과 곡에 관련된 이런저런 정보와 사연들을 알고 듣는 것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작곡가가 어떤 시대적 상황 아래서 어떤 마음으로 곡을 썼으며 곡의 전개 방식 같은 것을 알고 들으면 모르고 들었을 때보다 훨씬 이해의 폭과 깊이가 넓고 깊어질 뿐만 아니라 선율 또한 뇌리에 오래 남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 작곡, 그 여자 작사'란 영화에 이런 대사가 있었던 게 기억난다. 휴 그랜트와 드류 베리모어가 주인공 커플인데, 남자는 작곡가이고 여자는 작사가이다. 작곡가인 남자가 노래 가사를 무시하는 투로 말하자, 여자가 이렇게 항변한다.

 '선율이 처음 만난 누군가에게 끌리는 것과 같다면 가사는 그들이 대화를 하는 것과 같지. 가사는 그 만남에 그들만의 스토리를 주고 마법처럼 그들의 관계를 단단하게 만들어줘.'
 
 클래식도 마찬가지다. 감상의 진정한 목적이 온전히 내 것으로 소화하는데 있다고 한다면 알고 들을 때라야 곡은 진짜 내 것이 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율을 그냥 듣기만 하는 것은 잎새 위를 흐르는 이슬과 같다. 그것이 가진 아름다움을 잠시 감각할 수 있겠지만 내게 오래 머물지 못한다. 나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것은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기 때문이다. 그걸 머물게 하고 나아가선 마음 속에 단단히 정박시킬 수 있는 것. 그 닻이 바로 곡에 대한 지식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나는 듣는 것만으로는 그치지 않고 거기에 대해 알려줄 책도 같이 찾았다. 그런 내 눈에 들어온 책이 바로 문학수 기자의 '더 클래식'이었던 것이다.

 나는 원래 이제는 고인이 되신 안동림 교수의 '이 한 장의 명반'이란 책으로 클래식에 입문했다. 사실 소장한 CD들 다수도 거기서 추천한 음반들이었다. 그 책을 다시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연주가도, 음반도 너무 오래된 시절의 것이라 지금 다시 읽기에는 아무래도 세월의 격차가 컸다. 좀 더 시대를 따라잡은, 보다 업데이트 된 지식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더 클래식'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일단 외관이 날 사로잡았다. 마침 '더 클래식' 시리즈가 세 권으로 완결 되었는데, 그것을 기념하여 출판사에서 특별히 한정판 박스 세트를 내놓은 것이다. 외관이 클래식답게 중후했다. 겉면에 작곡가들의 이름을 새긴 글자체도 어딘가 서양의 고서(古書)를 연상시켜서 좋았다. 나는 이런 시각적인 것에 무척 약하다. 남들이 팔랑귀라고 한다면 나는 팔랑눈인 것이다. 사이렌의 노래 소리에 홀린 오디세우스와도 같이 외관이라는 미끼를 덥석 물어 버린 나는 이 책이 내 요구에 부응하는 책인지 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풍문으로 들어보니, 내가 원하는 책 같았다. 하여, 좀 부담 되는 거금이었지만 아끼지 않고 바로 구입했다.

 그렇게 우리는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더 클래식 세트 한정판 박스의 외관.
항상 박스 세트 살 때 걱정되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박스가 약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다행히 박스는 튼튼해 잘 구겨질 것 같지 않았다. 부피도 두툼해서 소장할 맛이 제법 났다.

 표지만으로 만족하지 못하실 분들을 위하여 옆으로 펼쳐 전면을 담아 본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작곡가들의 이름이 이렇게 앞과 뒤로 새겨진 디자인이다.

  어느 정도 소장할 맛이 나는가를 확인시키기 위해 이번엔 세워서 펼쳐 보았다.
중앙 아래의 '101'이란 숫자가 보이는데  '더 클래식' 시리즈가 소개하는 곡이 모두 101곡인 것을 나타내는 것 같다. 하나 아쉬운 것은, 가죽 느낌이 나는 색을 입혔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더 고풍스럽고 소장할 맛이 나지 않았을까? 

 열면 이렇게 '더 클래식' 세 권과 책에 소개된 음반만 따로 모아 놓아서 음반 찾기에 편한 '더 클래식 추천 음반' 소책자가 함께 들어있다. 이 소책자는 '더 클래식 세트'를 구입하면 사은품으로도 받을 수 있는데, 나는 모르고 사은품으로 소책자를 주문했다. 이렇게 나처럼 두 권을 가지게 된 분들도 있을 것이다.

 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 요즘 LP 재발매가 활발하게 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클래식이 가장 전성기였던 때가 그래도 LP 시절인지라 거기에 대한 향수를 나타낸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책 내용에 무척 어울리는 디자인이다. LP의 라벨을 책에서 소개하는 시대의 음악 분위기에 맞게 색깔을 달리한 것도 좋다.
 이렇게 나란히 놓아 보니, 언뜻 신호등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그것도 노렸으려나~^^

  뭔가 인상적인 장면을 하나 넣고 싶어 빈약한 머리를 총동원하여 낸 아이디어에 따라 CD를 배경으로 찍어 보았다.
이 사진을 찍은 것은 책을 다 읽고 난 뒤로, 책 아래의 CD들 하나하나가 내게 다 각별한 의미를 남긴 것처럼, 이 책도 이제 아주 각별해질 것 같다. 아마도 클래식을 벗하는 동안 내내 자주 들춰 보지 않을까 싶다.

 자, 외모는 실컷 감상했으니, 이제는 그 내면을 살필 차례다.
 과연, 나는 미끼에 현혹 당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원했던 바로 그 존재를 제대로 만난 것일까?

 인내심이 부족한 당신을 위하여 얼른 대답한다면, 후자다. 그렇다. 나는 내가 찾았던 책을 딱 만난 것이다. 
 그래도 리뷰랍시고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내 주관적인 기준에만 맞춰 이 책을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리뷰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래도 타인의 공감을 얻을 때다. 그러니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책에 대해 말해 본다.

 보통 사람들에게 클래식의 위상이란 철학과 거의 비슷하다. 한 마디로 철학처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인 것이다. 다가가기엔 난해와 지루함의 허들이 너무 높은 탓이다. 그래서 철학을 너무나 사랑하여, 거기서 향유하는 행복을 좀 더 많은 이들에게 나눠주려고 대중화를 지향하는 이들은 되도록 쉽고 재밌게 철학을 설명하려 든다. 클래식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독자에 대한 배려'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수 기자의 '더 클래식'은 그런 배려가 넘치는 책이다.

 일단 책의 편집부터가 그러하다.
 앞서 말했듯이 여기서는 101곡을 소개하고 있는데, 각 곡을 한 챕터씩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말이다.

 101곡의 노래가 모두 위 사진처럼 시작하는데 색깔도, 밑의 그림도 다 다르다. 이렇게 시각적으로까지 모든 곡을 별개의 장으로 구분하여 그만큼 찾기 쉽고 기억하기 편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안동림의 '이 한 장의 명반'에 실린 사진이나 그림들은 대부분 흑백이라 시각적인 쾌감이 별로 없는 편인데, 이 책은 그런 것도 주려한 노력이 역력하게 느껴진다.( 옆의 CD는 이 꼭지에서 추천한 음반.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68년 녹음이다.)


 이렇게 작곡가의 사진(사진은 슈만이다.)과 곡에 관련된 그림들(아래)까지 큰 도판으로 삽입하여 더욱 이해를 돕고 있는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이 많던데, 작가가 특별히 좋아하는 화가라 그런 것일까?(아래의 CD는 슈만의 '시인의 노래'에서 추천한 분덜리히의 음반.)
 

  이 그림이 실린 곳은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인데, 참 궁금했던 곡이었지만 정작 안동림의 '이 한 장의 명반'에는 소개되지 않아 많이 아쉬웠었다. 그런데 '더 클래식'엔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서 참 반가웠다. '더 클래식'을 좋아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거기다 설명만 있었던 게 아니라 저자는 '이 곡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가사의 의미를 마음 속으로 따라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독일 레퀴엠의 노래 가사마저 다 번역해 실어 두었다. 마침 사진 아래에 있는 오토 클렘페레의 '독일 레퀴엠' 음반을 가지고 있어 번역한 가사를 옆에 두고서 음악을 감상해 보았다. 역시 모르고 들었을 때보다 곡에 투영된 정서들을 훨씬 더 살갑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만이 아니고 슈베르트, 슈만 그리고 말러에서도 그랬다. 노래가 나오면 번역한 가사를 적어 두었다. 이런 식으로 책은 독자들이 되도록 클래식과 쉽게 친해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물론 이런 경향은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곡의 설명에선 더욱 현저하다.

 클래식의 초심자나 문외한도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한 어조로 쉽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여기서 안동림 교수의 '이 한 장의 명반'과 결정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굳이 안동림의 '이 한 장의 명반'을 예로 든 것은, 지금까지 가장 대표적인 클래식 가이드 책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곡을 먼저 소개하고 마지막에 추천 음반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더 클래식'의 형식과 유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겹치는 곡들도 물론 많다. 그런 이유로 얼른 안동림 교수의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을 또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게 될 수도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좀 더 최신의 지식을 얻고 싶어서 이 책을 구했지만(이제와 말하지만 '더 클래식'은 그런 내 요구에 부응했다. 무엇보다 추천 음반인데, 최근의 녹음까지 다 섭렵해서 좋은 음반을 소개해 놓아 마침 최근엔 어떤 좋은 음반들이 있나 궁금했던 마음을 풀어주었다. 국내에서 구입 가능한 음반 위주로 추천한 것도 이 책을 더욱 마음에 들게 했다.), 그렇지 않을 분들도 많으실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 안동림 교수의 책과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차이점에 대해 말해 보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책만이 가진 가치가 더 한층 잘 부각되지 않을까 한다.


 일단 안동림 교수의 '이 한 장의 명반'은 곡의 소개로 직접 뛰어든다. 그러니까 작가에 대한 설명과 그 작가가 어떻게 이런 곡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것보다 곡 자체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클래식'은 같은 곡이더라도 원근법으로 접근한다.


 먼저 가장 넓은 범위의 시대적 상황을 훑은 다음, 보다 범위를 좁혀서 작곡가의 생애를 더듬고 그리고 마침내 곡 자체로 다가간다. 그래서 곡에 대한 설명만 들을 때보다 훨씬 더 입체적으로 그 곡을 이해하게 만든다. 물론 그 곡이 태어난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되므로 곡을 더 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 3권의 말러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가 대표적이다. 안동림 교수의 책에선 이 곡을 쓰게 된 말러의 상황이 잠깐만 언급되고 노래 소개에 훨씬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반면 문학수 기자는 '말러가 쓴 교향곡 상당수가 그 음악적인 씨앗은 노래에 있다'고 하면서 그가 노래에 몰두하게 된 배경을 작가의 삶을 통하여 먼저 독자에게 상세하게 알려주려 한다. 그것을 통해 독자는 말러가 일찍부터 가난과 폭력 그리고 비극에 노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노래가 바로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며 말러 개인의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의 산물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노래 속에 은밀히 깃들었던 말러 자신의 초상이 독자 눈 앞에 서서히 드러나는 것과도 같다. 이제 음악은 말러의 발화가 되고, 독자의 감상은 대화가 되어간다. 음악이 독자의 피부 가까이 와 닿을 수밖에 없다. 노래의 가사가 선율에 스토리를 부여하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대화를 통해 음악과 청자 둘의 관계를 확실히 맺듯이, 문학수 기자가 소개한 말러의 생애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설명 방식은 세 권 모두에 걸쳐 지속적으로 투영되어 있는 신념의 소산이기도 하다. 그는 음악이 결코 그것을 만든 사람과 또 그것을 둘러싼 사회와 별개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과 개인 그리고 사회는 상호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이 음악 자체에 대한 소개 보다는 그것을 만들고 낳아버린 사람과 사회에 대한 설명을 보다 많은 비중으로 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독자는 음악만 보았을 때는 보지 못했던 면을 주시하게 되고, 덕분에 음악에 대한 이해도 좀 더 범주를 넓혀서 입체적으로 하게 된다. 무엇보다 음악을 단순한 추상이 아닌 인간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도 현실적인 삶의 희노애락과 구체적인 욕망과 이상까지 투영된.


 이런 이유로 설사 나처럼 '이 한 장의 명반'을 읽었더라도 이 책을 만나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같은 곡을 전혀 다르게 볼 수 있게도 하고, 거기서 접해보지 못했던 곡에 대한 사연을 여기서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물론 클래식을 즐겨 듣는 사람에겐 이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같은 곡도 저마다 다른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다양한 버전(version)으로 감상하는데는 이미 익숙하니까 말이다. '이 한 장의 명반'과 '더 클래식'도 그렇게 읽으면 될 것 같다.


 결국 이 책은 몸(형식)과 마음(내용)을 다하여 클래식이 어렵고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을 클래식과의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이고, 몰랐던 매력을 보고 알게 하여 독자 쪽에서 먼저 다가가도록 만드는데 성공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문외한과 초심자만 만족시키는 책은 아니다. 내가 그랬듯이 어느 정도 클래식과 친숙한 사람들도 이 책에 녹아든 곡이 탄생한 시대의 상황이나 작곡가의 삶을 통해 설령 아주 익숙한 곡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렇게 문외한과 초심자 그리고 기성의 팬들 모두를 두루 만족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클래식'은 클래식 가이드로서는 감히 최고의 책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예전에 '이 한 장의 명반'이 클래식 가이드로써 차지했던 위상과 역할을 이제 '더 클래식'이 물려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서양에서 상품 이름이나 제목에 '더(THE)'를 붙일 때는, 동종의 상품이나 작품에 비추어서 더 뛰어날 자신이 있을 때다. 내 생각엔 충분히 그럴만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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