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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쇼크 - 위대한 석학 25인이 말하는 사회, 예술, 권력, 테크놀로지의 현재와 미래 베스트 오브 엣지 시리즈 2
존 브록만 엮음, 강주헌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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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나온 마음의 과학에 이어 엣지 시리즈 두번째 책이 드디어 나왔다.

 

 

 제목이 '컬처 쇼크'인데 이번엔 제목 그대로 문화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이야기 한다. '마음의 과학'만큼이나 이번에 실린 저자들의 면면도 역시 화려하다. 포문은 '총,균,쇠'로 우리들에게도 유명한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연다. 그는 흥미롭게도 '사회의 붕괴'를 테마로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가 드는 주요한 사례는 우리에게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이스터 섬'이다.

 

 일단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이스터 섬 사람들, 즉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원래 숲으로 뒤덮여 있던 섬에 정착했다. 그 섬의 숲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야자나무들이 있었다. 이스터 섬 사람들은 숲에서 나무를 베어내 카누를 만들고 땔감으로 사용했으며 석상을 운반하고 세우는 데도 사용했다. (...) 결국 그들은 숲 전체를 베어내 모든 수종을 절멸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달리 말하면 더 이상 카누를 만들 수도 석상을 세울 수도 없었다. (...) 이로 인해 식인 풍습이 전염병처럼 번지며 섬 주민의 90%가 죽음을 맞았고 그들의 사회는 붕괴하고 말았다. (p. 24)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스터 섬은 이렇게 멸망했다. 언제고 꼭 한번은 가보고 싶었던 섬이지만 전혀 몰랐던 섬의 역사였기에 흥미로웠다. 하지만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이걸 흥미 본위의 붕괴 사례로서 말한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그가 이 사례에서 주목했던 건 다음과 같은 물음이었다. "어떻게 한 사회가 전적으로 의존해 살아가던 생존 수단인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내는 재앙과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 이것 말이다.

 

 이 책을 다 읽고나면 왜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이 질문에 주목한 이 글이 가장 먼저 나왔는지 깨닫게 된다.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여기서 우리들이 흔히 말하고 있는 이른바 '집단 지성'의 한계를 논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에게 집단 지성은 언제나(라고 까지는 비록 말하긴 어려워도) 그래도 올바른 쪽에 가까운 결정을 내린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흔히들 들고 있는 사례가 그것이다. 대충 사람들에게 평균을 짐작케하면 가장 많은 대답의 평균치가 실제 평균값하고 맞아떨어진다는 사례 말이다. 그래서 자주 사람들은 하나 보다는 둘이 , 둘 보다는 셋이 생각하는데 더 맞다는 말을 한다.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면서 자리잡게된 현상이기도 하다 아시다시피 민주주의를 이루는 주요한 원칙 중의 하나가 바로 '다수결 원칙'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말하는 이스터 섬 사례에서 보듯 집단 전체가 잘못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러고보면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의 나치 정당은 가장 많은 독일 민중의 지지를 받고 정권을 잡았었다. 그 역시도 집단의 선택이 꼭 올바르지 않음을 알려주는 좋은 사례다. 사실은 이 집단주의적 결정에 대한 불신은 고대 그리스 때부터 있었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다수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민주정을 쉽게 중우정치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보았으니까.

 

  이번에 나온 '컬쳐 쇼크'는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터넷의 광범위화로 온갖 정보들이 너나할 것 없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렇게 지식과 문화가 집단적으로 창출되고 소비되고 있는 시대가 가져온 '문화적 쇼크'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 말이다.

 

  쉽게 말하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저번 세기말에 유행한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일종의 반격이라 할 수도 있다. 하긴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 대로 접어든 개념이니 반격이라는 말 자체가 어폐가 있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예술에 대한 제대로 된 정의를 추구하고 있는 데니스 더턴이나 문화에 대한 꼭 필요한 개념을 위해 이른바 문화 통일장 이론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는 브라이언 이노(개인적으로 가장 반가웠던 글이다. 음악이 아닌 글로 만나보는 브라이언 이노라니 얼마나 신선하던지. 그의 대담을 읽는데 문득 그의 앨범  Another green world 가 다시 듣고 싶어졌고 그래서 음반을 틀어놓고 책을 읽었다.) 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탈색화 시켜버린 문화와 예술에 다시금 구별되고 그만의 독특한 의미망을 설정해주려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이 책은 너무도 미시적으로 다원화 되어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알 수가 없고 그 모든 것이 똑같이 동시에 터져 나와 오히려 사람들을 무가치의 혼돈 속에 빠져들게 만드는 오늘날의 집단주의적 창출과 소비에 우려와 그것을 합리적으로 개선시킬 통로들을 사색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재런 레니어의 '디지털 마오이즘'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글과 뒤에 실린 논쟁들이 이 책의 핵심 부분이라고 본다. 재런 레니어는 이 글은 여러가지 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둔다. 직접 의미를 생산하는 자들 보다는 구글이나 우리나라의 포털과도 같이 오히려 정보를 통합하는 자들이 더욱 높은 수익을 얻고(음원 수익도 마찬가지라고 알고 있다. 창작자들 보다는 배포하는 자들이 더욱 돈을 많이 받는다.) '위키 피디아'나 '아메리칸 아이돌'의 투표와 같이 집단주의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별한 수단이나 존재는 전무하여 다만 그 과정만이 전부인 이런 상황. 그렇게 디지털 사회로 깊숙이 들어서면서 이전과는 여러 면에서 분명 달라진 지금의 현실을 그는 디지털 마오이즘으로 부른다.

 

 '컬쳐 쇼크'는 점점 통합화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개인의 고유성을 다시금 복원시키려는 사유들이 모여있는 책이다.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글도, 예술의 의미나 문화의 의미를 추구하는 글도 사실 알고 보면 집단과 별개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할 개인의 정체성과 존재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략 2006년 전후로 나온 이 글들이 그러나 뜬금없이 제기된 것은 아니다. 사실 지금의 사회는 알고보면 저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서 보듯이 파시즘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포스트 모더니즘이 결국은 보수와 파시즘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우려는 당시 부터 존재해 왔다. 지금 유럽이나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까지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면 그들의 예언이 그리 틀린 것 같지는 않다. '컬쳐 쇼크'의 지식인들이 우려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더구나 스마트 폰을 비롯하여 디지털 환경이 더욱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사유라는 걸 하지 않게 되었다. 이 책에 실린 한 저자는 지금 사람들은 자신의 뇌를 머리가 아니라 외부의 하드웨어에 담아놓고 다닌다라고도 했다. 들뢰즈 역시 생전에 앞으로 사유 없는 무뇌아들의 사회가 될 것이라 경고한 바도 있다.

 

 사실 지금 사회가 개성이 넘친다고 하지만 그건 어불성설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개성의 대부분은 외모에만 치중된 일종의 기성품화된 개성들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개성이란 외모만이 아닌 사유와 그에 뒷받침된 행위가 바탕이 될 때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컬쳐 쇼크'의 저자들이 건져내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이다. 지극히 그 자신만의 사유와 성찰 그리고 행동이 근거가 된 개인의 고유성.

 

 이제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되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알 수 있으며, 판단할 수 있는가? 예전에 칸트가 제기했던 인간학적 물음을 우리는 다시 해야 할 시기에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거기서 주어는 칸트와 달리 인간이 아니다. 바로 '나'다. 닥쳐오는 집단화(파시즘이라고 까지는 말하지 않겠다.)의 파도 앞에서 그렇게 계속 스스로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를 건져내 줄 유일한 구명 보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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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공부 - 창의성의 천재들에 대한 30년간의 연구보고서
켄 베인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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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도 낯익고 지은이도 낯익다.

 

  '최고의 공부'라는 제목은 얼마전 방영한 KBS 다큐멘터리 '공부하는 인간'의 마지막 화 소제목이었다. 그 제목으로 지금 세계 최고의 명문대들은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는지 보여주었던 게 기억난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공부 방법과 비교해 주어서 더욱 인상 깊었는데 옥스포드를 비롯한 서양의 명문대들은 주로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상호 토론하는 것을 주요한 공부 방법으로 삼고 있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오로지 홀로 공부했다. 그들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주로 듣고 말을 했지만 우리는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을 일방적으로 듣고 책을 읽거나 필기하는 것 뿐이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심리학과 교수가 행한 실험은 서양과 동양의 공부 방법이 뚜렷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같은 과제를 놓고 서양의 학생들은 주로 말을 하면서 해야 제대로 해냈고 동양의 학생들은 말없이 생각만 해야 제대로 잘 해냈다. 아주 어려운 수학문제를 주고 수학 전문가의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한 실험에서는 서양 학생의 경우 아무 부담없이 얼마든지 전문가의 도움을 요청했고 그렇게 했더라도 전혀 자존감이 낮아지지 않았는데 반면 동양의 학생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걸 내켜하지 않았고 도움을 요쳥한 경우에는 자존감이 매우 낮아졌다. 이렇게 서양과 동양의 공부 방법은 분명히 차이가 났다. 실험을 주도한 교수는 동양의 경우 말로 하기 보다는 묵상을 통해 정답에 이르는 것에 길들여져 있고 타인의 도움을 잘 구하지 않는 것도 서양보다 더욱 타인의 평판을 신경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마디로 도움을 요청하는 건 자신의 체면이 깍이는 일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새삼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대학까지 나왔지만 단 한 번도 공부 그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어릴 때 부터 늘 해오던 것을 한다는 생각만 했을 뿐, 진정한 공부의 의미와 어떻게 해야 공부를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춘기 이후로 우리가 내내 어른들로 부터 공부에 대해 들었던 말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그저 '기계'가 되라는 것이었으니까...

 

 정말 물어야 할 때에 묻지 않고 이렇게 어른이 다 되어서야 새삼 공부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 자체가 우리 교육의 비극이 아닐까 한다. 낯익은 제목 때문에 잡게 된 켄 베인의 '최고의 공부'는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이다.

 

 저자의 이름이 낯익은 것은 역시 방송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예전 EBS 다큐멘터리에서 그 이름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가장 잘 가르치는 방법에 대한 다큐멘터리였을 것이다. EBS가 그때 켄 베인 교수를 특별히 섭외한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그 주제에 대해 켄 베인이 책을 썼기 때문이다.

 

 

 그 책이 바로 'What the Best College Teachers Do' 란 책이다. 제목 그대로 최고의 강의로 유명한 명문대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나를 중점적으로 살펴본 책이다. 이번에 나온 '최고의 공부'는 원제가 'What the Best College Students Do' 로 그 책의 자매편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가장 뛰어난 학업 성취를 보여주는 명문대는 어떻게 공부하는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공부 방법을 실제로 디테일하게 알려준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 책은 그러한 각론이라기 보다는 총론에 가까운 책이다. 그러니까 실제 방법 보다는 공부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을 알려주는 책인 것이다.

 

 

 켄 베인은 왜 거기에 더 중점을 두었는가? 그것은 공부야 말로 동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켄 베인은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예전 스웨덴의 한 대학에서 했던 연구를 소개한다. 그 대학교 학생들의 공부 방법을 면밀히 조사해보니 모두 세 가지 패턴의 공부 방법이 나왔다고 한다. 하나는 책이든 무엇이든 주어진 것만 습득하고 보는 '피상적 유형'  다른 하나는 좋은 성적이든 아니면 출세든 어떤 목표를 미리 세워두고 거기에 맞춰 공부를 하는 '전략적 유형' 마지막으로 별다른 목표 없이 그저 자신이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알아서 공부를 하는 '심층적 유형' 이렇게다. 각 유형별 학업 성취도를 살펴보니 마지막 '심층적 유형'이 앞의 두 유형 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즉 공부에 있어서는 그 동기가 많은 것을 좌우한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그것도 자발적인 동기가 되었을 때 더욱 많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켄 베인은 내가 알고 싶어서 하는 공부가 가장 효과적이며 공부는 또한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는 바로 세계의 리더들은 어떻게 공부했는지 보여준다. 과연 그들은 모두 내적 동기에 따라 공부한 자들이었고 또 그랬기 때문에 최고의 학습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내적 동기가 뒷받침 되어야 하는 이유는 또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이 바로 '메타 인지(metacognitive)'다. 이 '메타인지' 또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인데 그건 쉽게 말해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히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이다. 리더들은 모두 이러한 메타인지 능력이 뛰어났는데 그래서 공부에 대한 내적 동기를 더욱 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메타인지는 자신의 현상태에 머무르게 하지 않으며 언제나 유동하는 정신으로 자신을 더 확장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연구에 따르면 보상 같은 게 주어지는 외적 동기 보다 순수한 자기 만족을 위한 내적 동기가 더욱 공부를 오래 지속시키고 성취도 또한 더욱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니 공부에 있어 그 동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리하여 켄 베인은 그 동기를 고취시키기 위하여 이런 스타일로 책을 썼던 것이다.

 

 읽어보면 여지껏 내가 행했던 공부 방법과는 너무나 달라 왠지 많은 아쉬움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진작에 이렇게 말해주는 책을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더욱 공부를 즐겁게 할 수 있었을텐데...'하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 같은 성인들 보다는 한창 공부 중인 청소년들이 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늘 하고 있는 공부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서 더 이상 지겨운 것이 아닌 보다 즐길만한 것으로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우리가 공부를 지겨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켄 베인은 특히 이걸 '기대 실패' 라 부르는데 우리의 두려움과는 달리 이러한 '기대 실패'야 말로 더욱 공부가 잘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 한다. 연구에 따르면 해외에서 오래도록 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더 공부를 잘 했는데 그렇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기대 실패'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해외에 살면서 자기에게 익숙한 환경이 아닌 전혀 낯선 환경으로 인해 많은 '기대 실패'를 느꼈기 때문에 더욱 현재 상태에 머무르거나 자만에 빠지지 않고 타인과 세계에 대한 보다 확장된 관심으로 공부에 대한 내적 동기를 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실패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해야 하며 그러므로 우리가 느끼는 공부에 대한 지겨움은 우리가 잘못된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음에 기인한다. 이렇게 공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정말 중요하다. 때문에 더욱 제대로 공부라는 것을 바라보게 해 주는 켄 베인의 이 책, '최고의 공부'를 벗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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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무기력이다 - 인지심리학자가 10년 이상의 체험 끝에 완성한 인생 독소 처방
박경숙 지음 / 와이즈베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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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그야말로 무기력의 계절이었다.

 

 

 

  무기력 의 사전적 정의는 뭘까?  어떤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기운이나 힘이 없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그 겨울 난 감당할 수 없는 게 하나 있었다.  그건 다른 것도 아니고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었다. 그 겨울 초입에 내가 마주했던 결과는 그 때까지 내가 보지 못했던, 아니 보았으나 믿고 싶지 않았던, 그래도 그나마 상식은 통하는 세상이겠지 하는 생각에 애써 덮어두기만 했었던 그러한 세상의 혹독한 진실을 보게 만든 것과 같았다.

  나는 그 때까지  내가 믿었던 가치가 있었고 또한 그것이 무엇보다 옳은 것이라 믿었었기에, 더우기  그것은 늘 나의 앞 길 저만치서 하나의 불빛이 되어 이 어둔 밤과도 같은 세상 속에서 내가 실족하지 않고 제대로  내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기도 하였기에, 그 신뢰가 여리고의 성벽처럼 여지없이  허물어져 버린 것을 확인한 날, 이 세상은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무언가가 되어버렸고 대지를 계속 짊어져야 할 의미를 잃어버린 아틀라스와도 같이 난 무기력 속에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그랬기에 겨울은 정말 길었고 추웠다. 실제로도 그랬지만, 마음마저 그러하다보니 피부로 느껴지는 겨울의 길이와 추위가 몇 배나 더 되는 듯 했다.

 

 

 

 

 그렇게 더할 나위 없이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 이솝 이야기에 나오는 나그네처럼 봄이 되어 다시금 온기를 찾은 햇살은 자꾸만 나로 하여금 겨울 내내 꽁꽁 덮어쓰고만 있었던 무기력의 외투를 벗도록 유혹했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은 사람의 감정에도 통용되는 것인지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때 마음에 돋우었던 결기는 서서히 마모되고 있던 참이었다. 그리하여 난 다시금 책이란 걸 찾기 시작했고 시간이 나면 서점으로 발길을 돌리게도 되었다. '문제는 무기력이다'라는 책은 그러던 가운데 만난 책이었다. 겹겹이 껴입고 있었던 무기력의 외투를 이제는 좀 벗고 싶었던 나에게는 때마침 내린 단비와도 같은 만남이었다.

 

 

 

 이 책의 저자 박경숙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지과학 박사라고 한다. 그녀는 그러한 입장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마주하게 되는 무기력을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녀가 중점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인지심리학자이자 동물행동학자인 Martin Seligman가 동물 실험을 통해 밝혀 낸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란 개념이다. '학습된 무기력'이란 쉽게 말해 무기력이라는 것이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Martin Seligman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그림은
Martin Seligman 이 무기력이 학습되는 것임을 보여준 동물 실험의 모습
 
 
 하나의 방을 가운데 울타리를 놓아 저런 구조로 만들고 개가 A에서 B로 건너가려 하면 개가 있는 아래의 철판에 전류를 흐르게 하여 찌릿한 고통을 주었다. 개가 울타리를 넘으려 할 때마다 저렇게 반복적으로 고통을 주었더니 개는 차츰 건너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되었고 나중엔 아예 울타리마저 치워버렸음에도 불구하고 B 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결국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개가 되어버린 것이다.
 

 
 
 Martin Seligman 은 이 실험을 통해 무기력이라는 게 무엇보다 만들어지는 것이란 걸 알게되었다. 무기력은 어느 순간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집적된 일종의 결과물과도 같았다. 모든 존재가 느끼는 무기력함이란 초기의 시도가 부정적인 결과에 직면하고 그로 인해 가지게 된 감정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례대로 반복적으로 누적됨으로써 발생하게 된 하나의 상태였던 것이다. 이렇게 Martin Seligman 은 무기력이란 게 무엇보다 신체의 상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정의 상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도 그냥 감정의 상태가 아닌 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내가 살면서 알게 모르게 학습을 통해 받아들인 삶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궁극적으로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책 표지에도 나와 있는 '실패하면 어쩌지?' '해도 안될거야' '될 리가 없어'와 같은 부정적인 말들을 입버릇처럼 되뇌이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무기력한 상태마저 초래하게 된 것이었다. 즉 우리의 무기력이란 우리 내부에 살면서 알게 모르게 굳어진 나의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나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무기력에 빠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그렇게 무기력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열쇠는 더 이상 나의 바깥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건 바로 나의 내부에 있었다. Martin Seligman 은 결론적으로 나와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무기력을 막을 수 있는 근원적 처방이라고 말한다. 저자 박경숙이 '문제는 무기력이다'라는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위의 그림처럼'학습된 무기력'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무기력이란 상자로 부터 벗어나는 일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냥 다른 것 없이 상자의 문을 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상자의 문이 애초부터 닫혀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닫혀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저 환경이 바뀌길 기다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낙관하는 마으으로 그게 무엇이든 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핵심이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그녀는 책을 통해 충분히 깨우쳐 주는 것이다. 그것을 그녀는 그녀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까지 포함하여 아주 많은 실제적인 사례들로써 보여준다. 더구나 그 모습들은 어쩌면 우리 역시도 일상을 영위하면서 한번쯤은 가져보았을 그런 모습들이다. 그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 살면서 우리들은 크고 작은 많은 문제에 직면한다. 엉킨 실타래를 풀 때 그 첫 시작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듯 우리들의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그 첫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가가 아주 중요하다. 그 때 대부분 우리들의 시선은 직면한 문제에 두기 마련이다. 먼저 그 문제의 크기를 가늠하고 그 뒤 내가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를 가늠한다. 하지만 '문제는 무기력이다'는 그 첫 시선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그 때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나'이다. 그것도 냉정하게 내가 할 수 있고 없고를 따지는 시선이 아니라 내가 아직 모르는 잠재된 가능성까지 믿고 응원하는 그런 시선 말이다. 그렇게 이 책은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그 시선이 바로 문제 해결의 50%라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 이라는 격언이 바로 문제를 직면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어쨌든 포기하지 않는 꾸준한 걸음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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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1 -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 향연, 2017년 개정판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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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고전의 시대다. 여기저기서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이제는 인간 처세의 방법까지 고전을 통해 배우고 있다. 고전의 중요성은 시대를 막론하고 부침이 없었으나 그 요청에 있어서는 시대의 격량을 따라 이리저리 부침해 왔던 게 사실이다. 단순히 말해, 살만할 때 고전은 나른한 귀족을 위한 관현악과도 같다. 너무도 지루해 단지 쉽게 잠들기 위해 필요할 뿐인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저기 가지에 널린 과실을 따느라 바쁜 인부에게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귀찮은 소음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어 보이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만 이루어져 있으니까.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그는 호메로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쇼! 정 내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그만 닥치고 기다란 막대기나 가져오란 말이오!"

 

 그러므로 사람들이 고전을 찾는다는 것, 그것도 열화와 같이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는 반영인지도 모른다. 대부분 사람들은 고전이 어떤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지도처럼 왜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미로에 빠진 것처럼 의문투성이가 되어버린 삶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오래 살아 남았는 걸 보면 뭔가 있지 않겠어?' 그런 생각으로 문제집 푸는 아이가 모범 답안을 찾듯 고전을 뒤적인다. 사실 고전 열풍은 그런 믿음들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고전을 읽으라고 부추기는 책들을 통해 고전의 중요성을 새로이 체득하는 게 아니라 익히 자기가 생각하고 있었던 고전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금연을 결심한 사람이 금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비디오를 보면서 다시금 결의를 다지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즉 금연을 결심하긴 했는데 잘 실천은 하지 않는 스스로를 채찍질 하기 위하여 비디오를 보듯이 고전에 대한 책들 역시도 같은 이유로 찾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 책들이 더 쉽게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몰랐던 고전의 의미를 되새겨준다는 걸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측면에서 고전 안내서를 찾는 것은 분명 고전을 읽겠다는 다짐을 보다 의지를 가지고 실천할 수 있도록 촉매제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고전의 인플레이션은 시대의 디플레이션과 분명 관계가 있다.

 

  어쨌거나 상황은 이렇다. 고전 때문에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 고전을 탓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남겨진 여지는 그래서 단 하나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이다. 고전은 어쨌든 먼 과거의 산물이다.  어떤 것은 수천년도 된다. 거대한 역사의 유물도 그 정도 세월이면 풍화되어 사라지는데 하물며 한 권의 책에 담긴 뜻이 그 모습 그대로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우리가 서 있는 수천년 세월의 끝자락에서 원 뜻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건 그간에 있었던 인류 역사의 변화를 그대로 통째로 무시해버리라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이런 말이 있는 것이다. 고전은 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게 새 포도주만은 아닌 것이다. 고전의 해석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 이 시간에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그들의 말이 살아있지 못하면 고전은 그 평가가 아무리 높고 화려해도 그저 묘비명에 새겨진 좋은 비문일 뿐이며 그 아래 안장된 죽은 말들의 주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더우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고전이 그 생명을 지속시켜나갈 수 있는 것도 동시대에 알맞게 그 의미들이 새로이 채워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았다면 옆구리가 터져버려 나날이 속에 있는 밀짚을 쏟아내고 있는 허수아비처럼 진작에 먼 기억 속의 존재가 되어 산산이 흩어져 버렸을 것이다. 고전이 되지 못한 먼 옛날의 무수한 작품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다시말해 고전이 고전으로 살아남는 이유는 작품 자체가 원래부터 그럴 정도로 탁월해서라기 보다는 각 시대가 새롭게 해석해서 그 의미를 채울 수 있는 그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즉 고전을 만드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현대다.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얼마나 적절히 잘 부합할 수 있느냐가 고전의 수명을 장단을 결정하는 척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래도록 살아남은 고전은 시대에 따라 가지각색으로 자신의 색깔을 바꿔 왔다고 볼 수 있으므로 그야말로 카멜레온이 아닐까 싶다. 얼마나 새로운 해석으로 열 수 있는 수로가 많았기에 시대마다 지역마다 적재적소로 스스로를 변형하면서 그 오랜 세월을 견뎌 오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정작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어쩐지 숙연하게 된다. 이번에 나온 천명희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소크라테스 변론/크리톤/파이돈/향연'이 바로 거기에 대한 대표적인 존재가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이렇게 말을 하려면 먼저 한 가지를 증명해야 한다. 즉 과연 이 작품들이 지금 시대가 요청하는 의문에 대해 제대로 응답할 수 있는가 말이다.

 

 일단 여기에 실린 내용부터 간단하게나마 소개하고 나아가고 싶다. 앞서 말한대로 여기엔 네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이렇게 앞의 세 작품은 소크라테스의가 혹세무민으로 아테나이의 법정에 선 이후부터 독배를 마시고 죽기까지 시간 순으로 이어지는 작품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에 관한 일화들은 여기에 다 나온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이끌어내는 방법인 '대화법'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으며 '크리톤'에서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과 함께 가장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말인 '악법도 법이다'를 과연 어떤 연유로 말한 것인지 그의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또한 '파이돈'에서는 기독교에 강한 영향을 끼친 '혼 불멸론'과 배움이란 전생에 알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라는 '상기론' 그리고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새로이 시작되는 고상한 모험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럼 남아있는 나머지 하나인 '향연'에서는 무엇을 들을 수 있을까? 여기에는 소크라테스의 '사랑관'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쓰곤하는 에로스니 플라토닉이니 하는 말은 다 여기서 나왔다. 사랑이 오직 그 육체를 탐하는 에로스일 뿐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자신 역시도 그리 생각했지만 예언녀 디오티마를 만나고 나서 바뀌었다며 순수한 정신적 사랑인 플라토닉이야말로 궁극의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일단 이런 고전을 말했을 경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에 대해 대답하자면 절대 어렵지 않다. 소크라테스가 주로 하는 방법인 개인간의 대화를 통한 '산파술'답게 오로지 대화로만 이루어진('소크라테스의 변론'만은 법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스스로를 변호하는 말이므로 독백으로 채워져있지만) 이 책은 원전 번역이지만 천병희 선생님이 너무도 대화체를 잘 살려 번역하셔서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있는 듯 생생한 느낌마저 가질 수 있어서 더욱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 언젠가 한 번 이름만 들었던 소크라테스의 진면목을 확인해 보리라 마음먹었던 분들에게는 이 책이야 말로 장본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제 책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애초에 내가 던졌던 전제. 그러니까 이 책이 지금 시점에 있어 어떤 동시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로 돌아가보자. 즉 지금 시대에 가장 디플레이션 되는 것과 관련하여 그 문제에 대해 과연 이 책이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까를 보는 것이다. 지금 우리시대에 있어 가장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지난 5년간 우리를 가장 스트레스 받게 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그건 정치다. '80년대로 회귀하고 있다'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었듯이 민주주의의 후퇴. 그것이 가장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고 기필코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게 된 계기였다. 공기도 없어져봐야 그 소중함을 알듯이 정의나 민주주의도 잃어봐야 그 가치를 안다. 우리가 마이클 센델의 책을 통해 새삼 '정의'라는 가치를 생각했던 건, 불공정이 판을 치고 있을 때였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보이는 현상이 질문을 낳는 법이다. 그렇게 민간인 사찰이 이루어지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말할 수 없이 억압된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럴 때 우리는 고전을 찾는다. 동화를 보면 지혜로운 대답을 들려주는 존재는 언제나 아주 오래된 나무나 동물들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은 것은 왠지 현명해 보인다. 아마도 보편적으로는 인간의 수명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기에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한 존재라 보고 그런 권위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현명함이 얼마나 많은 것을 볼 수 있는가 하는 시야의 넓이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인류의 아주 오래된 생각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바로 거기에 제대로 된 해답을 줄 수 있을 때 고전은 죽은 유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육체가 된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거기에 좋은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까?

 

 물론이다. 내가 이 책을 보고 다시금 놀랐던 것은 내용이 아니었다. 그건 소크라테스의 태도였다. '대화법'이라는 말을 많이 듣긴 했으나 그 진면목은 바로 이 책을 통해서야 비로소 느끼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대화를 이끌어가는 이 소크라테스의 태도에 오늘의 민주주의에 대해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와 관련하여 여기서 드러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보여주는 특징을 말해보자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무리 무지한 청년과 대화를 해도 절대 자신의 기준에 맞추는 법이 없다. 모르면 모르는만큼 그 수준에 맞춰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그 나아감의 보폭을 결정하는 것 역시도 언제나 소크라테스에게 있지 않다. 그는 철저하게 듣는 상대가 나아갈 수 있을만큼 대화를 진행시킨다. 그 청년은 지혜나 언변에 있어 분명 소크라테스의 약자다. 이를테면 진중권 앞에 선 초등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얕잡아 보지 않는다. 그러기보다는 자신을 스스로 초등학생으로 맞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이러면서도 그는 설득하지 않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소크라테스는 그 어떤 진리도 주장하지 않는다. 질문하고 상대방이 먼저 대답함을 통해 언제나 납득 시킨다.  설득과 납득. 비록 한 글자 차이지만 이것이 민주주의적 태도에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설득은 진리는 오직 말하는 자에 있고 듣는자는 오직 굴복시켜야 할 대상으로 만든다. 그는 듣는 귀만 있지 말할 입은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게 '설득'이다. 하지만 '납득'은 그렇지 않다. 어디까지나 상대방에 맞춰 그의 헤아림을 기초로 모두의 진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듣는 귀뿐만 아니라 말할 입까지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납득인 것이다. 지난 5년을 생각해보자. 미국 쇠고기, 4대강, 인천공항 민영화 그리고 지금의 철도 민영화까지 정부가 내내 해온 것은 설득이었다. 아무리 여론이 반대해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설득은 포기가 없다. 진리가 오직 자신들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까지 상대방이 설득되지 않으면 쉽게 단절이 일어난다. 그렇게 듣는 타자는 버려지고 '강행'만이 남는 것이다. '답답하다'는 것은 설득의 절기요 '오해'는 설득의 절세 신공이다. 우리 역시도 정부로 부터 이해하지 못해서 답답하다 혹은 오해한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그들은 말하려는 입은 있어도 들으려는 귀가 없다. 그들이 대화하는 것은 다른 견해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생각을, 그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위장된 통로로 대화를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듣는 타자를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거수기로 만드는 것.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설득의 근본 모습은 이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무엇이라 이야기 했던가? 제대로 된 증거자료를 가지고 납득시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소크라테스가 보여주는 대화의 태도에서 무엇보다 '납득'이 민주주의의 기본 태도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다.

 

 또 하나가 있다. 그건 '합의의 중시' 이다. 먼저 합의된 사항을 존중하고 언제나 그것을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간다는 게 또 하나의 소크라테스 대화의 원칙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이 바로 '우리가 합의한 대로'라는 말이다. 그렇게 소크라테스는 상호가 인정한 사항을 중심으로 그 안에서 상호 납득 가능한 진리를 찾아간다. 솔직히 놀라웠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이 오류를 저질렀을 때조차 요즘 '100분 토론'에서 흔히 보듯이 '에이~ 그게 아니죠.'하는 식으로 통박하지 않았다. 그러기 보다는 언제나 '당신과 내가 합의한 것에 따르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하는 식으로  상대방에게 먼저 자신이 시인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스스로 그 오류를 발견하도록 도왔다. 사실 '납득' 역시도 바로 그와 같은 과정으로 일어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철저한 '우리가 합의한 바에 따르자면'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옳다고 여긴 것을 떠올리게 하였으며 스스로 '생각해 보니 그걸 시인했다면 지금 이 말도 시인할 수 밖에 없겠군' 하는 생각으로 소크라테스의 견해를 납득했던 것이다. 이러한 '합의의 중시'가 기본적인 민주적 태도라는 걸 굳이 '설득과 납득'처럼 지난 5년의 경험을 들어 달리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저 지금 우리 현실에서 '합의'나 '약속'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공허해졌는가만 떠올려도(대통령조차 선거 공약은 홍보의 일환일 뿐이라고 말하는 세상이 아니던가?) 거기에 대한 설명은 다 되지 않을까 싶다.

 

  이상으로 내가 내세웠던 고전의 전제, 즉 지금 현실의 시대적 요청에 제대로 응답할 수 있어야 진정한 고전이라 할 수 있다에 대해 나름 응답을 해 보았는데 제대로 대답이 된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도 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비롯한 네 작품이 고전의 가치를 충분히 가지고 있음은 설명되지 않았나 싶다. 어떤 이가 내게 말하길 고전은 운명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 한다. 그냥 세상에 툭 내던져지는 고전은 없다는 것이다. 운명의 시계가 딱 맞아 떨어져서 시대가 자신을 요구할 때 나와야 고전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이야말로 운명의 시계가 딱 맞아 떨어졌을 때 나오지 않았는가 싶다. 점점 후퇴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로 진정한 민주주의적 가치를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생각해보게 되는 이 때, 이 책은 그 가장 기본적인 민주적 태도의 모습을 너무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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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번던스 - 혁신과 번영의 새로운 문명을 기록한 미래 예측 보고서
피터 다이어맨디스.스티븐 코틀러 지음, 권오열 옮김 / 와이즈베리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당신이 만일 공학도라면, 그것도 로켓 공학도라면 누구보다 빨리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안자이 X- 프라이즈 프로그램에 응모하는 것이다. 안자이 X- 프라이즈 프로그램은 X-프라이즈 재단이 매년 개최하는 민간기업과 개인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우주 여행 공모전으로 정부에서 운영하는 NASA와 달리 그렇게 천문학적 비용을 들이지 않고서도 그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도 사람을 우주 여행시킬 수 있는 방법을 실제적으로 찾아내는 이들에게 상금을 수여하는데 그 상금이 무려 천만달러나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4년 10월 4일. 버트 루탄과 그의 투자자들은 스페이스 쉽 원으로 주최측이 요구하는 대로 2주 사이에 62마일 상공을 두 차례 비행함으로써 천만달러라는 상금을 획득했을뿐 아니라 민간 로쳇으로 최초로 우주여행에 성공한 사례로 기록되었다.

 

 

 

 

 이 X-프라이즈 재단을 이끌고 있는 사람이 바로 피터 다이어맨디스이다.

 이 책, '어번던스'를 보았을 때 그래서 난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하나는 물론 공학계에서는 유명한 X-프라이즈 재단을 이끌고 있는 피터 다이어맨디스의 책이라 놀랐고 다른 하나는 이 책 역시도 미치오 카쿠의 '미래의 물리학'처럼 낙관적인 미래관을 보여주는 책이라 놀랐다. 과학계에서 이름 높은 이 두 사람이 비슷한 성격의 책을 냈다는 것은 바야흐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시각이 점차 바뀌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도 될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어쩌면 '어번던스'에 우러난 낙관적인 미래관은 안사이 X-프라이즈 프로그램에 비추어 볼 때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 공모전 자체가 추구하는 아주 적은 비용으로도 우주 여행이 가능하다는 생각 아래에는 테크놀로지 앞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신념이 분명 바탕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 '어번던스'도 바로 다가올 눈부신 테크놀로지의 발전 앞에서 우리가 우려하거나 비관해야 할 것은 그리 없을 것임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제목 그대로 풍요의 미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바라보는 풍요는 관점이 조금 다르다. 저자의 말을 직접 빌어와 본다면 그들이 바라보는 풍요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사치스러운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가능성의 삶을 제공하는 문제다 (...) 모든 사람이 아등바등하며 그날그날 연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꿈꾸고 행동하는 데 자신의 하루하루를 소비하는 세계다.(P. 35)

 

 '어번던스'는 바로 이러한 풍요로움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잠재성들을 무한히 펼칠 수 있는 그러한 가능성들의 풍요로움이다. 피터 다이어맨디스는 우리에게 찾아왔거나 앞으로 찾아올 기술들이 어떻게 우리를 무한의 가능성으로 충만한 세계로 인도할지 이 책에서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말을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지금의 현실을 고려하자면 미래는 더욱 더 비관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피터 다이어맨디스도 그걸 알고 있다. 그래서 특별히 한 장을 할애하여 우리에게 각인된 인지 편향에 대해 설명한다.

 

  인지편향이란 우리가 바깥의 어떤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내적으로 가지고 있는 편향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뜻한다. 쉽게 말해 이미 존재하는 우리 내부의 선입견을 스스로 진실이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인데 왜 이러한 인지편향이 생겼냐 하면 그건 우리가 단적으로 매우 불확실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피터 다이어맨디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의사 결정은 결코 쉽지 않다. (...) 인간은 좀처럼 모든 사실을 알지 못하며 모든 결과를 알 수도 없다. 설사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전체 데이터를 분석할만한 시간적인 유연성도 신경학적인 능력도 없다. 오히려 우리의 결정은 제한적이고 종종 믿을 수 없는 정보를 기초로 내려진다. 더 나아가 뇌의 처리 능력 부족이라는 내적인 한계와 빠르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외적인 한계의 방해를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상황을 위한 문제 해결 도구로 '어림법(HEURISTICS)'이라는 잠재의식적 전략을 개발했다.(P.59)

 

 바로 이러한 쉽게 말해 우리 무의식에 존재하는 어림잡아 사물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인해 인지편향이 생기게 되었다. 여기서 인간들이 가장 많이 드러내는 것이 바로 '확증편향'이다. 즉 자기의 선입견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정보를 찾거나 해석하는 것이다. 피터 다이어맨디스는 우리에게 널리 유포된 미래에 대한 비관론은 바로 이러한 대표적인 확증편향에 불과하다고 본다. 여기엔 두려움과 공포를 심어주어 대중을 통제하에 두려는 권력과 미디어의 역할까지 더해져서 지금 전개되고 있는 테크놀로지들이 정말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지 그 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번던스'는 그러한 우리 눈에 '편향'으로 씌어져버린 콩깍지를 벗겨내어 기술이 가져다 줄 미래의 참모습을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미치오 카쿠의 '미래의 물리학'과 마찬가지로 식량과 에너지 그리고 의료와 교육 분야 더하여 민주주의까지 특히 어떤 혁신들이 우리에게 찾아올지 자세히 보여준다.

 

 읽으면서 가장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던 것은 교육 분야였다. 거기서 나의 편향을 깨뜨렸던 것은 '게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었다. 피터 다이어맨디스는 애리조나 주립대학의 언어학자 제임스 지의 연구를 인용하고 있는데 제임스 지는 게임을 통한 교육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는 학자이다. 그는 당당히 이렇게 주장한다.

 

  "게임이 시간낭비라는 생각은 진지하고 깊은 학습을 시간낭비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P.298)

 

 왜냐하면 그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관찰해 본 결과 그 과정이 그대로 학생들이 오래도록 어렵고 복잡한 학문을 배우는 과정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도 잘 알듯이 똑같은 과정인데도 학습에 있어서 아이들은 쉽게 지치는 반면 게임에 있어서는 전혀 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지는 게임이 주는 이러한 학습의 유용성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게임은 암기 위주의 구식 교육이 줄 수 없는 것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위기 대처 능력이나 어떤 것을 경영하고 기획하며 전략과 전술을 짜는 능력  그리고 창의력과 혁신능력까지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비단 제임스 지의 주장만은 아니다. 피터 다이어맨디스는 미국 내에서 이런 교육방식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신시내티주의 데이스쿨을 비롯하며 많은 학교들이 이미 그 방법을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학교들에게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나는 게임에 대하여 이런 식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어릴 때 부터 부모와 학교로 부터 형성된 인지편향이 어쩌면 게임이 가지고 있을 긍정적인 측면까지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서 피터 다이어맨디스가 왜 첫 머리부터 자기 책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러한 인지편향에 대해서 설명했고 그 인지편향을 후반의 여러 사례들을 통하여 부수어나가는지 그 이유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피터 다이어맨디스는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나날이 좀 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보의 발자국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눈을 사로잡아버린 인지 편향으로 닫혀진 마음 때문이며 바로 그 마음을 열어야 그 발자국들을 비로소 볼 수 있을 것임을 말이다. 문제는 우리의 눈이요 마음이다. 피터 다이어맨디스가 풍요를 무엇보다 가능성으로 정의한 것도 현명했다. 수전노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풍요로움을 느끼지 못한다. 독재자 역시 아무리 자신에게 권력이 많아도 풍요로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언제나 만족할 줄 모르며 끊임없이 "좀 더!"를 외친다. 생각해보면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수전노는 오로지 돈 그리고 독재자는 오로지 권력 그렇게 획일적으로 오직 하나이며 다른 가능성들은 닫혀있다. 그들이 끊임없이 굶주림을 느끼는 것은 바로 그 닫혀진 가능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른 눈으로 세상과 타인을 볼 수 없기에 언제나 남아있는 간극만을 느끼게 되며 그 모자람 때문에 끝없는 허기를 가지는 것이다. 결국 풍요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의 문제다. 보다 다양한 세상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보다 다양한 가능성들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나날이 풍요로울 것이다.

 

  결국 풍요란 것도 알고보면 파랑새처럼 우리 곁에 있었다. 다만 닫혀진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보지 못하게 했을 뿐...

 

  알고보면 '어번던스'를 읽고나서 얻은 최고의 수확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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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12-28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은 정말 다양하게 읽으시는군요...
감탄 중입니다.... 평안한 연말되시고, 즐거운 일 담뿍 생기는 새해 되세요.

ICE-9 2012-12-29 02:28   좋아요 0 | URL
제가 원래 잡식성이에요^ ^ 그러고보니 정말 올해도 얼마남지 남았네요. 달여우님도 잘 마무리 하시고 더욱 행복한 새해 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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