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앤더슨의 영화
휘트니 크로더스 딜리 지음, 최지원 옮김 / 본북스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광들의 시대가 지나갔음인지 영화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글을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물론 한 해에 천만 관객을 넘는 영화가 몇 편이나 나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있긴 하지만, 소비의 대상일 뿐 진지한 연구나 성찰의 대상은 아니다. 인상 비평과 별점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게 거기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아닐런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본북스에서 나온 두 권의 책이 특별히 반가웠다. 작가주의도 퇴조한 마당에 오직 한 감독에 대한 연구로 한 권의 책을 다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감독이란, '웨스 앤더슨'과 '미카엘 하네케'다. 모두 영화쯤 본다는 사람에게는 아주 낯익은 이름일 것이다. 깊이 영화를 본다고 자부하는 이에겐 필견의 리스트에 올라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현대 영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이 두 사람은 그야말로 작가주의에 어울리는 감독이기도 하다. 스튜디오의 고용 감독 길을 걸은 적도 없고 자기만의 세계가 뚜렷하며 그걸 자신의 작품 속에 내내 누비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내가 알기론, 적어도 우리나라에 출판된 책 중에 이 두 감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는 없었다. 웨스 앤더슨과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에 대해 전문적으로 쓴 책은 이 두 책이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그 책이 어떤 책이냐고?



 그건 바로 '웨스 앤더슨의 영화'와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다. 이게 제목이다. 참 심플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번역서인데, 원래 제목도 그랬다. 작가주의 감독답게 감독의 이름만으로 충분히 브랜드가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미사여구 없이도 충분히 좋은 책이라는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당당히 이 제목을 내걸었고 두 책을 다 읽은 지금, 그 제목은 자신감의 표현이란 걸 알았다.


 웨스 앤더슨도 미카엘 하네케도 개인적인 추억담이 있어서, 어느 걸 먼저 리뷰로 쓸까 약간 고민했다. 뭐, 순서 같은 건 별 상관 없지만. 그래도 처음 만난 게 웨스 앤더슨이니, 그 감독의 책부터 리뷰하기로 한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얘기는 다 사설이었다는 거다. 책은 참 좋은데 이걸 다 설명하자니 분량이 너무 넘쳐나고 그렇다고 상세한 얘긴 생략하고 총평만 하자니 또 너무 부족하여 꼼수를 부려 이렇게 분량을 어거지로 채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색인까지 다 합해 426 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은 모두 세 파트로 나눌 수 있다. 첫 파트는 총론 같은 것으로 감독에 대한 일반론적 해설이 있다. 그의 이력이라든지, 미국 문화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라든지, 그런 총체적인 것을 두 편의 글을 통해 설명한다. 본격적인 작품에 대한 연구는 그 뒤다. 두 번째 파트는 웨스 앤더슨이 지금까지 감독한 영화들을 모두 한 편씩 다루고 있다. 96년에 발표한 데뷔작 '바틀로켓'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단편 영화와 상업 광고까지 말이다. 한 마디로 그의 모든 영화에 대해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상세한 분석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인 것이다. 그러니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좋아하고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만나야 할 책이 아닌가 한다. 이쯤에서 개인적인 추억담 같은 걸 하나 덧붙인다면, 나는 그를 아직 유명해지기 전,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처음 만났다. 98년, 우리나라에 그의 데뷔작 '바틀로켓'이 비디오테이프로 나온 것이다. 96년에 나와 그렇게 커다란 흥행을 못했는데도 98년 나온 것을 보면, 우리나라 비디오 시장이 그래도 영화광들에겐 꽤 풍요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틀로켓'은  지금은 물론 DVD 시절에도 나오지 않았었다. 어쨌든 그 때 처음 보고 너무나 독특한 이 작품에 매료되어 웨스 앤더슨이란 이름을 뇌리에 박아두게 되었고 그 뒤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를 이후로 그의 팬이 되었다. 앤더슨의 영화를 다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나는 이 '바틀로켓'과 '다즐링 주식회사'를 좋아하는데, 그건 첫 만남이어서 그렇기도 하고 가장 자유분방한 분위기라서 그렇기도 하다. 뭔가 좀 헐겁고, 뭔가 좀 방만한 것이 내가 좋아하는 앤더슨의 세계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별 필요도 없는 얘길 해버렸는데, 오래전 그의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가 갑자기 그리워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 책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터라 또 한 번의 꼼수를 부려 분량을 늘인 것이기도 하다. 글이 가볍고 별 내용이 없어 책도 그러하다고 생각하지 말길 바란다. 모처럼 비평다운 비평을 만나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니. 책의 날개를 보니 영화 전문 서적을 꾸준히 발간할 모양이다. 루키노 비스콘티와 난니 모레티의 책이 무척 기대가 된다. 1인 출판사라고 하는데 부디 잘 되어서 계획한 책을 다 내줬으면 좋겠다. 열심히 응원한다.(이런, 끝도 이상해져 버렸군.)


이 영화를 좋아해서 아직도 소장하고 있는 '바틀로켓' 비디오 테이프 / 인증합니다.

오엔 윌슨과 루크 윌슨의 푸릇푸릇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비디오 표지에 '텍사스 소년들'이란 말이 세월의 간격을 느끼게 하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라, 아이야, 가라 1 밀리언셀러 클럽 46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를 정말 좋아한다. 이렇게 시리즈를 전권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이유는 많다. 일단 캐릭터가 너무 좋고(그 중에서 앤지 제나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성 캐릭터다.) 이야기가 다들 흥미로우며(시리즈의 마지막 '문라이트 마일'은 어쩔 수 없이 우울했지만) 마음에 훅 들어오는 문장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 건 이 두 주인공들이 나와 그리 다르지 않는 고민을 하고 내가 그러는 것처럼 힘겹게 버텨가면서 그 고민에서 헤어날 길을 찾아 분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고민이냐고?

 그건 당신이 최근 일어난 PC방 아르바이트생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나 곧 결혼을 앞둔 어린이집 교사가 아무 것도 아닌 이유로 맘 카페 회원들에게 신상이 털리고 괴롭힘을 당하다가 끝내 자살해 버린 사건 아니면 여전히 우리 마음 속에 커다란 아픔으로 남아 있는 세월호 참사를 보았을 때 드는 생각과 비슷하다. 이토록 갑자기 아무 이유없이 생명을 잃을 정도로 세상이 온통 우리가 헤아리기 어려운 악의로 가득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버텨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켄지와 제나로는 늘 이 고민을 마주한다.


 대표적으로 '가라, 아이야 가라'가 그렇다. 한 아이가 실종된다. 무책임한 엄마에게서 자주 방치되고 학대 받는 아이였다. 아이가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오직 아이의 외숙모만이 걱정하여 켄지와 제나로에게 찾아온다. 아이를 찾아달라고. 그런 부인에게 켄지는 말한다.


  "맥크레디 부인, 돈 낭비가 될 겁니다."


 그러자 외숙모는 이렇게 대답한다.


 "조카를 낭비하는 것보단 낫겠죠."(1권, p. 21)


 미국에선 매일 2,300명의 아동이 실종된다(p. 15). 그 중에서 300명의 아이들이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p.16). 이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그걸 2권에서 아주 아프게 확인한다. 어른들의 이기적인 욕망에 처참하게 희생되어버린 몰골로. 켄지와 제나로는 아이가 관련된 사건을 가급적 맡지 않으려 한다. 그 사건을 통해 또 얼마나 무섭고 어두운 세상의 악의를 보게 될 지 두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악의 때문에 절망하여 자신 또한 괴물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라, 아이야 가라'에선 너무나 많이 보아버린 세상의 어둠 때문에 인간과 괴물의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켄지와 앤지가 큰 호감을 갖고 있는, 아동 유괴 범죄 담당의 브루사드 형사는 가장 대표적인 존재다. 맡은 업무로 인해 자주 이성의 한계를 가볍게 초월하는 인간의 어두운 모습을 만나게 되는 브루사드는 어떻게든 사라진 아이를 찾는 것만이 온통 까만 밤과도 같은 이 세상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밝힐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까스로 버텨 나가고 있다. 우리가 그러하듯이.


 그런 의미에서  켄지와 제나로, 브루사드를 비롯하여 '가라, 아이야 가라'에 나오는 인물들은 저마다 우리의 도플갱어들이며 그들의 길은 단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를 대신하여 찾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내 손을 강하게 잡고 있는 어둠을 놓아버릴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의 대역이 된 그들은 고민하고 갈등하며 버티면서 저마다 자신만의 길을 찾는다. 켄지는 붕괴된 질서를 방치하고 있는 신을 원망하고 앤지는 조금이라도 구원이 될 수 있는 걸 선택한다. 부바는 일단 눈 앞의 악부터 제거하고 본다. 길이 이렇게 다른 건, 답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하여, 누군가 대신 답을 해 줄 수 없는,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대답을 찾아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 또한 그러하듯이, 어둠을 몰아낼 여명이 쉬이 찾아오지 않는 까닭이다. 아니, 가면 갈수록 더 큰 어둠을 목도하며 그 앞에서 우리가 참으로 연약하다는 걸 절감하는 탓이다.


 이 소설에서 켄지와 앤지의 길이 그러하다. 믿었던 인물은 자신을 배신하고, 아이를 위해 최선이라 여겼던 선택도 아이의 삶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 구원을 찾으려 뭔가를 하면 할수록 더욱 흐려져 버린 흙탕물을 마주할 뿐이다.


 "올해 워싱턴에서 생면부지의 엄마에게 딸의 양육권을 넘긴 판결이 나왔죠. 단지 생모라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생모는 태어난 지 6주 된 또 다른 딸을 죽인 죄목으로 복역했어요. 딸 아이가 울어대자 화가 나서 아이의 목을 졸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는 바비큐파티에 갔다는 겁니다. 이 여자한테는 남은 아이가 둘 있었어요. 하나는 친조부모가 키우고 있었고 다른 아이는 수양 부모에게 있었죠. 그녀는 딸을 살해한 죄로 2년 밖에 복역하지 않았고 지금은 양부모에게서 뺏은 딸을 키우고 있어요. 양부모가 법원에 양육권을 청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이건 실화예요. 찾아보세요."

 "말도 안 돼요."

 앤지가 말했다.

 "아니, 말 돼요."

 "도대체 어떻게...."

 "그게 미국이니까요. 모든 성인은 자기 아이를 산 채로 씹어먹을 전적이고도 배타적인 권리를 갖는다."(2권, p. 215)


 어둠은 갈수록 강하고 우리는 늘 차라리 거기에 먹히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괴물이 되는 길과 사람으로 남는 길 사이에서 갈팡질팡 한다. 그런 우리의 연약함, 그로 인한 고통을 너무나 잘 아는 데니스 루헤인은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최대한 받아들여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가 스스로 생각토록 한다. 진정한 강함은 누군가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의 축적을 통한 자발적인 각성 속에서 비로소 도래하기 때문이다. 데니스 루헤인은 독자에게 바로 그런 것을 주려고 한다. 


 '가라, 아이야 가라'는 단순한 스릴러가 아니다. 마치 스릴러 판, 단테의 '신곡'과도 같이 희망 없는 지옥의 순례이며 그 지옥 속에서 인간의 위엄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베르길리우스라 할 수 있다. 물론 눈 앞에 펼쳐진 광막한 악의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 남는 길을 선택할 때의 얘기지만.


 만일 당신도 사람으로 남고자 한다면 당장 켄지와 앤지를 만나라고 권하고 싶다. 나처럼 그들의 신도가 되라고.

 걸으면 걸을수록 더 커다란 어둠을 마주하는 그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인간다움을 굳건히 유지하는 그들의 모습 자체가 희망이 되어 줄 것이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퍼스트맨
제임스 R. 핸슨 지음, 이선주 옮김 / 덴스토리(Denstory)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닐 암스트롱.

 그의 이름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기억되는 이름 중 하나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달에 인류 최초로 발을 디딘 사람이니까. 1969년 7월 20일 일요일, 아폴로 11호는 달에 무사히 착륙했고 인종과 성별, 종교와 이념을 초월하여 전 세계인이 하나가 되어 숨죽이며 지켜 보는 가운데 닐 암스트롱은 착륙선의 사다리를 천천히 타고 내려와 드디어 자신의 발자국으로 인류의 흔적을 남겼다. 그는 말했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도약이다."


 달 착륙 50주년을 맞이하여 발간된, 2005년에 발표된 우주 항공 역사를 주로 연구하는 제임스 R 핸슨의 '퍼스트 맨'은 저 말과 함께 우리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된 이름의 주인공이기도 한 닐 암스트롱의 일대기를 다룬다. 물론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달에 착륙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사실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긴 하지만 정작 그의 삶에 대해서도, 달 착륙이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랬기에,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을 의혹 속에 빠지게 만드는 '달 착륙 음모설'에도 쉽게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책을 통해 암스트롱의 삶과 달 착륙에 관련된 모든 과정을 다 알게 된 지금, 난 단언할 수 있다. 달 착륙 음모설은 헛소리라고. 이들이 인류의 커다란 도약을 위해 무려 천 시간이 넘는 모의 비행을 하고 몇 년에 걸쳐 목숨까지 걸면서 훈련한 것을 안다면 절대 음모라고 말할 수 없다. '퍼스트맨'은 그런 과정의 작은 나사 하나까지도 다 담고 있는, 그야말로 닐 암스트롱의 삶과 달 착륙 전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며 그것으로 달 착륙 음모설을 우주 저 멀리로 날려보내는 책이다.







 닐 암스트롱은 두 살  때 처음으로 비행기 장난감을 가진 뒤로 내내 삶의 중심에 비행기가 있었다. 그는 오직 모형 비행기를 만드는 일에만 열중했으며 청소년기의 어느 때인가엔 이런 꿈을 계속 꾸기도 했다.


 "꿈 속에서 숨을 참으면 공중에 떠서 빙빙 돌 수 있었어요. 그렇다고 대단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어요. 꿈에서 나는 하늘 위로 날아오르지도, 당으로 떨어지지도 않았어요. 그저 빙빙 돌기만 했어요. 어정쩡해서 좀 답답했죠. 꿈에는 어떤 결말도 없었어요.(p. 53 ~ 54)


누군가는 이 꿈이 예지몽은 아닌가 생각할 것이다. 이 꿈은 달 주위 궤도를 빙빙 도는 아폴로 우주선과 많이 닮았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정말로 그의 운명은 달 착륙으로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닐 암스트롱이 어릴 때 과학 선생님은 언젠가 그에게 장래 계획을 물었는데,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언젠가 저 달에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는 열다섯 살 때부터 시간당 9달러인 비행 훈련 비용을 모았고 주말마다 와파코네타에 있는 챔프 비행기 세 대 중 한 대를 타고 비행 훈련을 했다. 그는 수많은 비행을 통해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날을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관심은 그를 저절로 항공 공학 쪽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흐름은 단순한 항공에서 이제 항공우주공학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변화를 실감하면서 닐 암스트롱은 자연스럽게 비행사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바꾸게 되었다. 항공 엔지니어의 정체성으로. 그것이 평생 자신의 직업 정체성이 되었다. 그는 NASA에서 우주비행사로 활동할 때도 단 한번도 자신을 우주비행사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오로지 그는 항공 엔지니어일 뿐이었다. 이런 사실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몰랐던 것은 또 있다. 아폴로 11호에 닐 암스트롱과 함께 탔던 버즈 올드린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과묵하고 오직 자기 일에만 집중하는 닐 암스트롱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올드린과의 사이가 나빠졌다는 건 아니다. 사실 그는 사이가 나빠졌는지 아닌지조차 몰랐다. 그런 쪽에 아예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즈 올드린은 달랐다. 평범한 가정에서 엔지니어로 경력을 쌓아온 닐 암스트롱과는 다르게 아버지가 장성이고 대대로 높은 계급의 군인 집안 출신에다 현역 대령이었던 버즈 올드린은 명예욕이 강했다. 사실 뒤늦게 버즈 올드린을 닐 암스트롱 팀에 합류시키려 했을 때, 책임자가 닐에게 와서 다른 사람을 넣으라고 했다고 한다. 올드린 때문에 팀에 불화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했던 탓이다. 과연 올드린은 누가 달에 첫 발을 딛느냐를 두고 계속 신경쓰면서 그걸 자신이 하기를 바랐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 문제에 대해 언급했고 누가 첫 발자국을 딛는지 빨리 결정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처음으로 달을 밟는 것이 자신의 이름을 인류가 마지막으로 존재하는 그 날까지 기억하게 할 것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닐은 그런 것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착륙선이 달에 무사히 착륙하는 것이 관건이지 누가 처음으로 달을 밟는가 하는 것은 지극히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결국 첫 발자국은 닐이 밟기로 결정났다. 이를 두고 공학적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그건 공식적일 뿐, 사실 그걸 결정하는 책임자들이 올드린의 인성 때문에 날을 고른 것이었다. 이렇게 명예를 바라는 사람은 오히려 명예가 멀어지고, 전혀 바라지 않은 사람엔 그 쪽에서 찾아온다. 닐과 올드린의 이야기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넌지시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닐이 무심했던 것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에 관심이 없어서였다. 그는 자신이 달을 처음 받는 사람이 되어도 그건 자기 혼자 힘이 아니라 모두가 협력한 결과라는 걸 잘 알았다. 아폴로 11호 뿐만 아니라 그 전부터 11호의 달 착륙을 성공시키기 위해 무수히 거듭해온 연구와 훈련 과정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다 받아야할 영예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는 자신이 거대한 기계 속 하나의 작은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겸허가 인류의 커다란 도약을 이끌어 낸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퍼스트맨'은 참으로 많은 것을 알려주는 책이었다. 닐 암스트롱 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달에 착륙하기까지 어떤 여정을 거쳤는지를 포함하여 삶의 어떤 혜안까지 넌지시 깨닫게 만드는 책이었다. 600 페이지가 넘는 좀 부담스런 분량이긴 하지만 제임스 R 랜슨이 잘 써서 그런 건 별로 부담이 되지 않는다. 닐 암스트롱과 달 착륙에 대하여 평소 궁금한 것이 있었다면 꼭 보시라고 추천드리고 싶다. 만족감을 그득 주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 러브 디스 파트
틸리 월든 지음, 이예원 옮김 / 미디어창비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래픽 노블 좋아하시나요? 저는 좋아합니다. 이번에도 독특한 그래픽 노블 하나를 만났네요. 탈다 윈튼의 '아이 러브 디스 파트'란 작품입니다. 일단 작가의 나이가 너무 젊어서 눈길이 갔습니다. 96년생이었거든요. 2015년에 첫 책을 냈으니, 와! 몇 살 때 데뷔한 건가요? 작가의 나이보다 더 이 작품을 이채롭게 기억하게 된 건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10대 레즈비언의 이야기였거든요. 나중에 알았는데, 작가 역시 레즈비언이라고 해요. 자신의 이야기를 그래픽 노블로 풀어간 것이죠. 누군가 그러더군요. 자기 얘기를 할 때 가장 잘 말할 수 있다고. 아마, 라이너 마리아 릴케일 겁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아요.


  미국 사회가 아무리 성소주자의 사랑에 대해 관대해졌다고 해도 막상 밑바닥 현실로 들어가보면 아직 벽이 높은 것이 사실이죠. 처음 사랑을 할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 점차 넘지 못할 현실의 벽 때문에 이런 사랑을 해도 될까 하는 두려움이 슬금슬금 고개를 듭니다. 성인이 아니라 십대라면 더 하겠죠. 그런 과정을 이 그래픽 노블은 담아내고 있습니다. 목소리를 크게 하지 않고 장면의 연출로 느끼도록 하면서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잔함과 더불어 나의 첫사랑은 어떠했던가 추억까지 하게 되니 작가의 실력이 꽤 좋다고 해야겠죠. 만화 부문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룬 작품에 주는 이그나츠 어워드 신인상을 탈만 합니다.





 책의 표지입니다. 처음에 전 옆의 흑인 아이를 남자로만 생각했어요. 그래서 흑인과 백인의 사랑 이야기를 다뤘구나 여겼죠. 하지만 이내 곧 흑인 아이도 여자 아이란 게 밝혀지더군요. 그러므로 이 둘은 두 가지나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랑을 하는 셈입니다. 하나는 인종 간, 다른 하나는 동성 간. 부모와 또래 그룹의 시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10대이니만큼 이들의 사랑 행로가 그리 평탄하지 않을 것임은 명약관화죠.


 미래야 어찌되었든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사랑을 쌓아가던 무렵에는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습니다. 당신도 사랑을 하셨다면 이들의 마음을 잘 알겠지요. 우리도 그러지 않았나요?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된 것마냥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존재가 된 기분을 느끼곤 했었죠. 다음과 같은 장면은 바로 그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큰 존재가 되어, 세상에 오직 단 둘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던 때를.





 이건 마치 제목처럼 음악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을 반복해서 듣는 것과 같죠. 가장 환하게 사랑이 밝았던 시간.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런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음악의 가장 좋은 부분이 그러하듯이, 언제 떠올려도 먼저 흐뭇함으로 다가오는 사랑의 기억이...





 하지만 음악은 가장 좋은 부분만 계속해서 들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악도 언젠가 끝이 납니다. 사랑과 현실 또한 그러합니다. 사랑에 마냥 취했던 시간이 시나브로 지나가면 눈에서 콩깍지가 떨어져 나가며 자신의 사랑을 위협하는 차디 찬 현실의 냉기를 느끼게 됩니다.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사랑을 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하겠죠. 작품은 그런 과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공간이나 풍경의 단편적인 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합니다.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괴로움, 부모에 대한 두려움과 주위 사람들의 수군거림 등 현실 앞에서 약해져만 가는 사랑을 고요하게 소묘합니다. 너무나 거대했던 그들의 존재가 서늘한 현실 속에서 자꾸만 작아져가는 과정을...

 결국 그들의 사랑은 이뤄지지 못하고 이렇게 거대한 현실 안에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지고 맙니다.





 여름의 햇살만큼 눈부셨지만 짧았던 사랑은 그렇게 끝나고 이젠 추억만 남았습니다. 마지막의 장면들은 그걸 묘사합니다. 음악이 끝나고 난 뒤 선율의 여운이 기억되듯이 사랑도 그렇게 남는다는 걸 말이죠. 이토록 잔잔하게 사랑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묻고 있죠. 이들의 사랑이 당신의 사랑과 얼마나 다른가 하고? 왜 이들은 당신과 닮은 사랑을 했는데, 당신은 할 필요가 없었던 걱정과 두려움을 가져야 했냐고. 사랑은 햇살입니다. 누구도 배척하지 않고 두루 환한 빛 속에 있게 만들죠. 그런데 우리는 왜 사랑이 특정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처럼 굴고 있는 걸까요? 사랑이 마치 입장권처럼 자격이 되는 이에게만 부여되는 것으로 여기는 걸까요? 음악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처럼, 인종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삶의 가장 좋은 부분인 사랑을 영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작품의 아이들이 그러했듯이,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이별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들이 없는 세상이 하루빨리 다가오길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
카타리나 잉겔만 순드베리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너무나 많이 듣는 말이다. 그런데 그토록 많이 들으면서도 한 번도 이런 의문은 가져보지 않았다. 왜 소년만 야망을 가져야 하는 거지? 노년은 야망을 가지면 안 되나? 왜 이런 의문이 들었는가 하면,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의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혁명을 꿈꾸는 할머니의 이야기인 까닭이다. 사람들은 말했다. 노년이 야망을 품으면 노욕(老慾)이라고. 늙어서 그러는 건 너무 추하다고. 하지만 이 소설은 정반대로 말한다. 꿈이든 야망이든 사랑이든 그런 건 모두 나이와 전혀 상관 없다고. 혁명도 얼마든지 꿈꾸어도 좋다고. 그 할머니의 이름은 메르타 안데르손. 그녀는 다이아몬드 요양원에서 보호라는 미명 하에 행해지는 온갖 금지 속에 갇혀 있다. 예전에 그녀는 농부였다. 억센 두 손으로 가축도 기르고 작물도 생산했다. 자기 스스로 뭐든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그러지 못한다.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하고 싶은 것도 못 한다. 잠자는 시간조차 정해져 있다. 그야말로 다시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 하는 어린 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다. 내가 끌기 보다는 남에게 끌려가기만 하는 생활. 당연하게도 이런 자신이 못 미더울 수밖에 없다.


 여기, 노인 요양소에 들어온 이후로는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변해버렸을까? 국민들이 자기 나라 정부와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할 경우 국민들은 혁명을 일으킨다. 여기서도 혁명을 일으켜야 할지 모른다. 메르타는 <거의 언제나, 꿈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메르타는 이 믿음이 조금 두렵기도 했다.(p. 15)


 그녀는 다시 한 번 그 믿음에 기대어 보려고 한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그러나 바란다고 해서 다 되는 건 아니다. 메르타처럼 꿈을 이루기가 요원한 장소에 있는 경우엔 더 그렇다. 자신이 원하는 감을 따고자 한다면 직접 장대를 사용해 가지를 흔들지 않으면 안된다. 혁명이 행위로 완성되듯이 오로지 적극적인 실천만이 자신이 바라는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메르타에겐 과감한 실천력이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쥐구멍을 찾아내는, 아니 찾아내고야 마는 사람이다. 그녀는 사람을 모으고 함께 금지를 위반해, 거기서 오는 자유와 쾌감을 통해 반기의 즐거움을 동료들에게 전염시킨다. 그렇게 하나의 그룹이 형성된다. 장차 다이아몬드 요양원만이 아니라 스웨덴 전국의 노인 요양원 전체를 뒤바꿀,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갖고 올 그룹이.


 애초엔 감옥에 가기 위해서였다. 자신들을 전혀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요양원의 처사에 반발해서였다. 감옥의 간수는 적어도 죄수를 어린아이처럼 대하진 않으니까. 다시 말해 메르타와 그녀의 동료들은 어린아이로 길들이려는 요양원의 행태에 지쳤던 것이다. 


 메르타가 바르브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젊은 것은 노는 게 뭔지 도통 몰라! 어린아이들도 잔치를 하면 밤새 놀고 그러잖아! 우리에겐 그럴 권리도 없다는 거야."

 천재가 입을 열었다. "규칙을 아주 정확하게 지켜야만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야."(p. 525)


 그건 그들의 성미에 전혀 맞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세계를 가진, 주체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선원 출신 갈퀴는 각종 꽃과 허브를 길렀다. '천재'라 불리는 오스카르 크루프는 온갖 물건들을 발명했다. 사서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여성 모자를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었던 스티나는 회화에 몰두했다. 평생 은행에서 일하다 은퇴한 안나그레타만이 다소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늘 정해진 궤도만 따라 살던 사람에겐 위반이 더 큰 의미와 즐거움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므로. 그리하여 그들 모두 메르타에 뜻에 동조, 감옥에 가기 위하여 범죄를 지으려 했다.


 감옥, 그 곳은 평범했던 그들의 인생에서 무진장 멀리 있는 장소였다. 그러므로 그런 곳에 스스로 간다고 하는 것은 구획된 삶에서 탈주하는 것과 같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이 탈주를 무엇보다 주체가 되는 행위라 보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치 화단에 심어 놓은 꽃처럼 사회가 정한 위치에서 그가 부여한 정체성에 갇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된 일상이 형성하는 사회적 정체성의 중력으로 어느새 무엇이 진짜 자신인지 모르게 된 우리들은 사회가 씌어준 가면을 나의 진짜 얼굴로 여기며 벗어날 줄 모른다. 탈주란 그 예속의 상태에서 스스로 빠져나오는 것이다. 사회가 정한 자리가 아니라 내가 정한 자리에서 뿌리 내리려는 움직임이기에 주체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작가는 그러한 탈주의 강조를 위하여 보통 사람들의 비정상의 장소로써 '감옥'을 가져왔을 것이지만 그 하나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메르타 일행이 막상 감옥에 가보니 요양원과 그리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양원에 바르브로가 있다면 감옥엔 리사가 있듯이, 어디서나 개인에게 주체의 역량을 빼앗고 명령을 잘 따르는 아이로 길들이려 하는 건 똑같았던 것이다. 이러한 동일성으로 작가는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일단 마음을 먹고 작은 실천이라도 하다보면 탈주는 이뤄지는 것이며 장소따윈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이다. 즉 메르타와 '노인 강도단' 동료들이 모여서 범죄를 모의하고 그것을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는 그 순간, 그들은 이미 예전의 그들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뭘 해야 하지?

 이 세상에서 가장 성가신 노인들이 돼보는 거야.(p. 54)


 정말 그들은 그런 존재가 되었다. 감옥에서의 그들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노쇠한 몸에게 어디서든 공격이 이뤄질 수 있는 감옥은 그야말로 공포의 장소다. 하지만 메르타 일행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감옥은 오히려 메르타는 더 원대한 꿈을 꾸고 천재는 다른 사람의 범죄 방법을 배우며 몸을 젊게 가꾸는 등, 더 능동적인 주체로 만드는 토양이 될 뿐이다.


 이처럼 요양원의 금지된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는 이미 자기 내부에 있다. 안주하지 않고 탈주를 감행할 때 열쇠 또한 이미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소설 초반, 가장 먼저 능동적인 주체가 된 메르타가 하필이면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를 훔치게 되는 건 그런 의미다.


 그런데 왜 작가는 이러한 탈주를 강조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우리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는 미리 형성되어 있는 정형화된 이미지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성별, 인종별, 종교별 그리고 연령별. 저마다 우리가 직접 경험한 데서 오지 않은, 누군가 주입한 이미지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자주 우리는 거기에 따라 판단한다. 우리는 이런 걸 선입관이라고 한다. 소설에서 메르타 일행이 고가의 명화 두 점을 훔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사람들의 선입관 덕분이었다. 노인은 약하고 수동적이라 범죄 행위 같은 건 감히 꿈도 꿀 수 없다는, 이러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선입관이 경비원으로 하여금 메르타 일행을 범행 현장에서 뻔히 보고도 그냥 가게 한 것이다. 이런 장면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의 선입관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그러고 보면 메르타 일행이 하필이면 범죄를 저지르게 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온 수많은 범죄 영화에서 노인들은 은행 같은 곳에서 범인들의 총구 앞에 덜덜 떠는 존재이거나 갑자기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되어 주인공으로 하여금 활약하게 만드는 계기였지 이렇게 범죄 행위의 주축이 된 적은 거의 없었다. 특히 메르타 일행이 저지르는 것과 같은 강탈 행위에선 더욱 그랬다. 갑자기 횡단 보도 위로 넘어져 주인공의 활약을 방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작가가 허다한 범죄 중에서도 절도와 은행 강도 같은 강탈 행위를 가져온 건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걸로 영화가 노인에게 반복적으로 형성한 관습적인 이미지를 통렬하게 깨뜨리려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마음은 다음과 같은 메르타의 생각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모두 웃는 얼굴 밑에 참으로 많은 것을 숨기고 산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웃음에 얼마나 잘 속는가!(p. 45)


 다시 말해, 우리는 자신도 사회가 씌어 놓은 가면을 진짜 얼굴로 여기지만 타인을 볼 때도 가면인 줄 모르고 진짜 얼굴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의 어리석음 속에서 우리는 기성복처럼 양산된 가짜 얼굴에 안주하며 그 아래에 있는 맨얼굴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로 사회가 이식(移植)한 자리를 마냥 있어야 할 내 자리로 알고 살아가는 것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평생 누군가 씌워준 가면을 진짜 얼굴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만큼 비극적인 것도 또 없다. 그러므로 작가는 이 소설로 그 가면을 벗기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진짜 얼굴이 드러나도록. 그리하여 탈주를 강조한다. 탈주란, 다름아닌 그 가면을 벗기는 행위이니까.

 스티나가 덧칠한 것을 벗겨내자 비로소 진짜 명화가 드러났던 것처럼.


 노인의 야망을 노욕이라 부르는 것도 선입관이다. 어떤 나이든간에 자신의 가능성을 한껏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해선 안된다. 탈주로 주체가 되기 위해서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듯 나이 또한 그런 것이다. 그 어떤 선입관 없이 사람은 다만 그 자체로 이해받아야 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겉모습이, 거기에 덧칠된 선입관이 점점 본질을 압도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특히 성별과 인종, 국적과 계층 그리고 세대에 있어 그런 것이 더 심해지고 있다. 그 사이에서 오고가는 혐오와 적대의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말들의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어떤 범주에 속하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거기 있는 단 한 사람으로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선입관에 물든 가면을 벗기고 그 사람만의 진실된 얼굴을 보려고 해야 한다. 메르타의 탈주는 그 직시(直視)를 위한 궤적이다. 그러므로 더욱 열렬히 응원할 수밖에 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10-30 0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01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