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환의 심판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6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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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마디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상처였다.

 

  오로지 군산복합체의 돈벌이만을 위해서 벌어졌던 그 전쟁은 그 전까지 급속도로 끓어오르던 미국 내의 모든 이상을 향한 움직임에 동결을 가져왔다. 젊은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전장으로 끌려가야 했고 살아남은 자들 역시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돌아와야 했다. 60년대의 다채롭게 빛나던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의해 롤링스톤즈의 노래 제목 그대로 'PAINT IT BLACK'이 되고 마이클 코넬리가 '라인업'에서 술회했듯이 해리 보슈를 낳아버린 터널 속 어둠이 되어 버렸다. 보슈는 베트남 전쟁에서 '땅굴쥐'가 됨으로써 어머니의 상실과 더불어 속해버렸던 세상의 어둠 속 그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때로 절망은 그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서야 희망의 발판을 마련한다고 하던가. 그 말 그대로 그는 더 이상 그 어떤 외부도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없음을 거기서 깨닫고 이제 스스로가 직접 구원을 찾아 나서려 한다. 어둠만이 존재하는 터널 속에 스스로 빛을 가져오는 존재가 되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형사가 되고 자신에게 어둠을 가져다 준 그리고 바로 그 어둠이 뱉어 낸 죽음들의 진실을 찾아 나선다.

 

  같은 글에서 코넬리는 살인 사건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쨌든 살인사건 현장이란 세상이 뒤집힌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살인 사건 조사란 결국 혼돈과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한 조사가 아니겠는가? 라고 (라인업, P.75)

 

 그렇게 그는 관찰자요 순례자다. 광막한 어둠 가운데 빛을 가져와 스스로 경계가 되려는 자다.

 

 

 그리고 여기 또 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미키 할러.

 그는 변호사다. 보슈가 진실을 찾는 자라면 그는 진실을 만들어내는 자다. 그는 그 어떤 진실이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공할 수 있다. 사실 그는 진실이란 것 자체에 별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어차피 세상이란 것 자체가 온통 거짓말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경찰도 거짓말을 하고, 변호사도 거짓말을 하고, 증인도 거짓말을 하고, 피해자도 거짓말을 한다. 재판은 거짓말 경연장이다. 법정 안의 모든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판사도 알고, 심지어 배심원도 안다. (P.11)

 

 

 그래서 그에겐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이 진실이다. 그래서 돈에 매달린다. 보슈를 어둠으로 몰고 간 돈이 그에겐 진실인 것이다. 계좌에 찍히는 현금의 액수만이 그가 가진 '정의'라는 법전의 전부다. 그렇게 그는 이 소설 1부의 제목 그대로 '밧줄에 묶인 얼간이'로 살았다. 왜 '얼간이'냐고? 결국 그 '돈'에 의해 총을 맞았으니까. 그렇게 그는 그 자신이 믿었던 진실에 의해 보기 좋게 배신을 당했버렸거든.

 

 

  '탄환의 심판'은 '제리'라는 한 변호사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그 제리는 1부에서 할러가 돈을 위해서라면 진실이고 뭐고 물 불 안 가리던 관선변호사였던 시절 법정에서 겨룬 검사였다. 그는 할러에게 패했고 결국 검사직에서 물러났다. 그런 그를 돈 좀 만지는 변호사로 만들어 준 장본인이 바로 할러였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할러는 흡혈귀였다. 정의를 수호하던 검사를 돈만 수호하는 자신의 동류로 만들어버렸으니까. 하지만 제리의 시작은 할러의 시작과 같았다. 그 역시 돈만 수호하던 변호사였던 아버지에 의해 그런 변호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할러와 제리의 관계는 아버지와 할러의 관계의 복제이고 결국 제리는 할러인 것이다. 그렇게 둘은 도플갱어다. 제리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수임된 안건을 할러가 유산처럼 물려받게 되는 것은 그래서이다. 그러므로 제리가 왜 살해당했느냐가 주가 되는 '탄환의 심판'에서 할러가 제리의 죽음을 밝히는 과정은 그대로 전작에서 자신이 (상징적으로)죽어야 했던 그 이유를 밝히는 과정과도 같다. 단적으로 부활한 할러가 자신의 죽음을 다시 조사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가 영화 '킬빌'에서 했던 것과 유사하다. 말하자면 '예수의 부활편' 같은 것이다.

 

  보슈는 진실을 찾기 위해 타인의 죽음을 매개로 순례를 하지만 할러는 자신의 죽음을 반복한다.

 

  정확히 이것은 보슈의 원래 모델 15세기 플랑드르의 화가 히에로니머스 보슈가 그렸던 그리고 코넬리에게 영감을 주어 그 자신의 탐정이 바로 그 이름을 가지게 만들었던 그림 '쾌락의 3부작'의 구도와 같다.

 

  보슈가 가장 오른쪽의 지옥도에 속한다면 할러는 그 가운데, 두번째 화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보슈와 할러가 각각 하나는 진실을 찾는 자요 다른 하나는 진실을 만드는 자이기 때문이다. 보슈가 진실을 찾는 자가 된 것은 그 어둠으로 떨어지는 데 있어서 그 스스로에게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당한 자다. 어머니가 살해 당함과 동시에 내던져졌으니까.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서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다. 아니 찾을 수가 없다. 그것은 저 바깥에, 어딘가에 있다. 그래서 진실을 찾는 자가 된다. 미노타우르스를 찾아 미궁을 헤메는 테세우스와도 같이. 하데스에게 끌려간 에우리디케를 찾아 내려가는 오르페우스와도 같이. 그렇게 진실을 찾는 자는 코넬리 스스로가 말했듯이 관찰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단적으로 객체와 주체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지옥이란 보슈에게 바로 그 객체이며 그래서 보슈의 우주는 바로 지옥이 된다. 하지만 할러는 그와 다르다. 할러의 비극은 오로지 할러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세계가 그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습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렇게 해석하고 받아들인 오로지 주체 하나만 있을 뿐이다. 그에게는 관찰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그저 끊임없이 그가 하고 있는 생각이 혹은 일이 옳은지 그른지 되새기는 것 뿐이다. 그에겐 반복만이 전부다. 중세의 지배적 가치관에 따르면 이 세상은 천국, 연옥, 지옥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아마도 쾌락의 정원 3부작 역시도 어쩌면 이 구도에 그대로 들어맞을 것 같다. 그렇다면 할러는 연옥에 속한 자가 될 것이다. 지옥으로 떨어질만한 죄를 짓시 않은 자는 연옥(림보)에 갇힌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 채, 내내 자신이 저질렀던 결국 천국으로 가지 못하게 만든 죄를 영겁에 걸쳐 반복하면서 상처받고 뉘우치게 된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이 소설 '탄환의 심판'은 정확히 할러가 거기에 속해 있는 자임을 보여준다. 사실 따지고 보면 '탄환의 심판'은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서의 할러의 여정과 참으로 유사하지 않은가?

 

  그렇게 이제 보슈와 할러는 같은 라인에 선다.

 

 사실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서 할러가 즐겨들었던 '2-PAC'의 'TO LIVE AND DIE IN LA'의 가사처럼 로스엔젤레스와 베트남 전장은 그리 다르지 않다. 로스엔젤레스의 삶 역시도 이 소설 미키 할러의 첫 독백에서 드러나듯이 베트남 전장만큼이나 혼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돈을 위해 일으켰던 전쟁에서 영문도 모르고 죽어야 했던 어린 병사들만큼이나 LA 역시 돈 때문에 죽어나가는 이들이 지천으로 널린 곳이다. 제리와 할러 역시도 그 희생자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머리를 관통하는 총알에 대한 공포는 그대로 LA에서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적으로 이러한 LA 의미는 할러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나타난다.(수트케이스 시티는 2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 로고 때문에 가방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수트케이스 시티는 단순한 상점이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자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로스앤젤레스는 타지인들끼리 모여 살면서 아무도 진정한 의미의 닻을 내리지 않는 곳이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곳. 꿈에 이끌린 사람들, 악몽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이 오는 곳. 1천2백만 명의 시민들은 모두 필요하다면 탈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유적으로도 문자 그대로도 LA의 모든 사람들은 항상 여행 가방을 꾸려놓은 상태였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P.83)

 

 

  이러한 LA에 대한 시선은 그대로 베트남에 대한 시선과 닮아 보이지 않는가? LA와 베트남의 유사성은 비단 공간적인 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만일 둘이 비슷하다면 베트남을 초래한 미국이나 현재의 LA를 초래한 미국이나 같다는 것이며 그건 보슈에게 어둠을 안겼을 때의 미국이나 할러에게 상징적 죽음을 가져다 준 지금의 미국이나 똑같다는 그렇게 시간적으로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만일 그렇다면 보슈는 여전히 그 땅을, 그리고 그 때를 떠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베트남의 '땅굴 쥐'라는 지하에서 LA의 형사라는 지상으로의 삶의 전이는 문자 그대로 무덤에서 다시 걸어 나온 자를 형상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대로 다시 되살아난 할러가 '수트케이스 시티'로 재정의되는 LA로 다시 돌아오는 것과 또 닮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코넬리의 의도는 여기서 명백해진다. 즉 그는 보슈에게 두번째의 기회를 주었듯이 할러에게도 역시 그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보슈와 할러는 서로 만나야했을 것이다.(여기에 있어서 의미심장한 장면이 바로 보슈가 할러에게 자기가 듣고 있는 음악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장면이다. 보슈는 자기가 듣고 있는 뮤지션이 프랭크 모건이라고 말해준다. '라인업'에 실린 글에 의하면 프랭크 모건은 보슈의 캐릭터를 형성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영감을 준 음악가였다. 코넬리는 말한다.

 

 "내 탐정은 프랭크 모건 처럼 생존자로서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 과거를 극복하는 남자여야 했다.(라인업, P.69)"

 

  말하자면 프랭크 모건은 보슈의 정체성이었다. 그런데 코넬리 자신도 작품을 쓸 때는 꼭 프랭크 모건을 듣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프랭크 모건은 코넬리가 작품 전체에 걸쳐 구현해내려는 우주 자체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독자들이 가장 반대할만한 캐릭터를 창조하기 원했던 코넬리가 그 이유로 만들어낸 할러는 바로 거기에서 코넬리의 우주로 초대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와도 같다. 그런데 할러 역시도 그 뮤지선을 알고 있다고 한다. 어릴때 모건이 아버지의 의뢰인 중 하나였다고. 아마도 그 유년 기억의 소환은 코넬리가 초대한 것에 대한 기꺼운 응답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슈와 할러는 동반자가 된다. 이는 다른 면에서도 확인되는데 할러가 소원했던 딸과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슈 역시도 2009에 나온 '9 DRAGONS'에선 태어난 지 몰랐던 딸을 찾게 된다고 한다. 둘 이 결국은 동반자라는 사실에 이 보다 더 결정적인 증거가 또 있을까?) 지금껏 같은 산에 살면서도 서로의 반대편에 있었지만 이제는 같은 정상을 추구하기 때문에. 보슈는 순례를 통해 할러는 반추를 통해 둘 모두 어둠을 밝히는 빛이요 거짓말에 더 이상 오염될 수 없는 밝고도 분명한 진실, 즉 말하자면 쾌락의 정원 3부작중 가장 왼 편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가고자 하기 때문에 말이다. 어둠이 없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곳. 말 그대로  'THE BRASS VERDICT'의 세상으로. (BRASS는 소설에서 보슈의 말처럼 총알이란 뜻도 있지만 '녹슬지 않는 황동'을 의미하기도 하니까.) 거기서 보슈는 '엔젤스 플라이트'에서 성냥갑에 적혀 있던 '내면의 안식'을 얻게 될 것이고 할러는 5부의 제목 처럼 'THE BRASS VERDICT'의 근본적 의미인 '마지막 평결'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뒤로 베란다에 남아 도시를 바라보았다. 불빛이 도시를 가로지르며 움직였다. 수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걸러져서 저 위의 구름처럼 하늘로 날아갔다. 아름답지만 아주 멀어서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구름. 다시는 보슈를 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와 내가 산의 양편을 하나씩 차지하고 그냥 이대로 살아갈 것만 같은 느낌.(P. 550)

 

 

 아마도 우리가 코넬리의 작품에 열광하는 건 그것이 그저 읽는 재미만을 주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적 구성의 완벽함, 놀라운 반전 등이 물론 한 몫을 하긴 하겠지만 보슈와 할러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삶이 결국은 우리들 자신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라는 공감 때문이 아닐까 한다. 보슈는 여전히 내면의 안식을 가져다 줄 진실을 찾아 헤메이고 할러는 마지막의 저 독백 처럼 결코 만질 수 없을 것 같은 구름(아마도 이것은 삶에 있어 종국적인 의미라는 'THE BRASS VERDICT' 가진 또 하나의 의미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을 쫓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우리도 내내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보슈와 할러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 어떤 거대한 세력이 앞을 막아도 배에 총알을 빵빵 맞아도 그들의 시도는, 추적은 포기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에 계속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래서 아마도 응원을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들처럼 세상의 거대한 벽을 느낄 때마다 안정이란 유혹속에 쉽게 자신의 신념을 포기할 때 우리는 종종 원하지 않았던가? 이 모든 왜소함과 자괴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누군가 자신만의 신념으로 세상과 대적하는 살아있는 모범이 되어 달라고... 아마도 우리는 보슈에게서 그것을 보았고(아마도 이제는 할러에게서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응원하게 되었을 것이고 또 계속 그들의 따라 걷게 되었을 것이다. 보슈가(그리고 이제 할러도) 우리들이 치뤄야 할 싸움을 대신해서 혹은 미리 치뤄주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물론 코넬리는 그들이 그러한 사람들이 되길 원한다고 스스로 말했다. 아마도 그래서 이들은 그 어느 캐릭터 보다 생생하게 빚어졌을 것이다. 읽다보면 분명히 느껴진다. 코넬리가 자신의 캐릭터를 얼마나 공들여 형상화 시키고 있는지. 그의 말투, 몸짓, 등장하는 장면 하나 하나마다 말이다. 할러가 헐리우드에서 잘 나가는 의뢰인 엘리엇에게 이제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음을 알리기 위하여 엘리엇의 개인 사무실이 아니라 중립적인 회의실에서 만날 것을 강요하는 건 얼마나 디테일한 묘사인가? 코넬리는 이 모든 인물들이 그저 텍스트 상의 가상이 아니라 실제 우리들의 곁에서 호흡하고 행동하는 살아있는 인물들로 여겨지길 원한다. 왜? 여기에 하나의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변하지 않는, 바래지 않는 종국적인 진실인 'THE BRASS VERDICT'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 그건 소설에서 할러에게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바로 자신의 새로운 운전기사가 된 패트릭 헨슨과의 관계를 통해서 말이다.

 

  할러는 그 자신의 믿음과 본성에도 불구하고 아무 이유 없이 어려움에 빠진 패트릭을 돕는다. 패트릭이 그 까닭을 묻자 할러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잘 몰라, 패트릭. 하지만 내가 자네를 돕는 게 나 자신을 돕는 일이 되기를 바라고 있어."

 

  그 전에 할러는 이런 생각을 했다.

 

  지난 48시간 동안 새로 맡게 된 사건들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유혹을 느끼는 것이, 역이 내게 줄 수 있는 포근한 세계로 가고 싶은 욕망이 느껴졌다. 약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과 벽돌담 같은 현실 사이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공간을 점점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는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진심이었다. 어쩌면 패트릭이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P. 287)

 

  코넬리가 말한대로 자신의 캐릭터가 프랭크 모건 처럼 과거와 싸우는 인물이기를 원한다면 할러가 두려워하는 약은 돈 밖에 몰랐던, 그래서 죽음을 초래한 예전의 자신이 될 것이다. 그는 세상과 섞일 때 마다 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그 과거란 전부인과의 대화에서도 드러나듯이 딸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는 일이다. 그리고 또한 자신의 죽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미지 역시 코넬리는 고정된 공간으로 표현한다. 마치 이대로 정지하면 죽는다는 듯이. 그래서 그는 죽지 않기 위해,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오로지 자신에게 이익일 돌아올 경우에만 희생을 지불하던 자신을 버리듯이 아무 까닭없이 곤경에 빠진 패트릭을 돕는 것이다. 거기다 그를 정처없이 내내 떠돌아다니게 할 링컨차의 운전기사로까지 고용한다.(이건 내내 탐문을 위해 떠돌아다녀야 할 보슈의 또 얼마나 비슷한가?) 그런 패트릭이 운전기사를 맡는 건 또 얼마나 의미심장한 일인가? 그렇게 패트릭은 내내 할러를 움직여갈 것이다. 그렇게 할러를 살려나갈 것이다. 이 모든 코넬리의 정교한 세팅 속에서 드러나는 목소리는 단 하나다. 내면의 안식을 가져다 줄 변하지 않을 진실을 찾고 싶은가? 그렇다면 머리로만 꿈꾸지 말고 적어도 행동을 하라! 그 것이다. 보슈 처럼 결국은 타인을 살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할러 처럼 자그마한 것이라도 타인을 도와주라는 것이다. 바로 그 행위가 그게 언제가 되었든 결국엔 원하는 그것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그러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당신이 보슈와 할러의 기꺼운 동지가 되기로 작정했다면 아마도 이런 식의 진심에 감응한 결과라고... 그래서 우리는 응원하는 것이다.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 주기를... 마치 보슈와 할러가 희망이란 신기루에 몇 번이나 속아가면서 정처없이 헤메고 있는 사막 위를 우리를 대신 업고 가기라도 하고 있는 것 처럼 말이다. 게오르크 루카치란 한 철학자는 무엇보다도 큰 이 세상의 비극은 우리를 인도해 줄 그 어떤 별자리도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루카치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 것이다. 손가락으로 보슈와 할러를 가리켜 보이며 말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당신의 돈을 걸어라, 몽땅! 그들은 영원히 지지 않는 패다. 

 

 

 

 

 

 



 
 
 
웃음과 망각의 책 (양장) 밀란 쿤데라 전집 5 
밀란 쿤데라 지음, 백선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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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전체는 변주 형식의 소설이다. 서로 다른 부분들이 나로서는 이해하려면 막막함에 빠져들게 되는 한 테마의 내부로, 한 생각의 내부로, 하나뿐인 독특한 상황의 내부로 인도하는 여행의 서로 다른 단계처럼 이어진다. 이것은 타미나의 소설이다. 타미나가 무대를 떠나는 순간에는 타미나를 위한 소설이 된다. 타미나는 주인공이자 주된 청중이다. 다른 이야기들은 그녀 이야기에 대한 변주들이며 거울 속 처럼 그녀 삶 속에서 서로 만난다. 이것은 웃음과 망각에 관한, 망각과 프라하에 관한, 프라하와 천사들에 관한 책이다.(P.310)  

 

 이렇게 밀란 쿤데라는 작품에서 직접 이 소설 '웃음과 망각의 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형식에 있어서는 변주로 하되 주된 주제는 타미나와 관련있다고 말한다. 쿤데라는 변주를 그 형식으로 가져온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변주라는 형식은 집중이 그대로 발휘된 형식이다. 이 형식은 작곡가에게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만 말하게 하고 사물의 핵심에 곧장 다가가게 한다.(P. 308)

 

 

 쿤데라가 변주를 소설의 주 형식으로 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본질적인 것을 말하게 하고 핵심으로 곧장 다가서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소설에서 그것이 필요한 것일까? 그것에 대해 쿤데라는 이 소설에서 한 소설가의 입을 빌려 이렇게 대답한다.

 

 소설이란 인간의 착각의 결실입니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에 대해 무엇을 압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 뿐입니다. 각자 자신에 대한 보고서를 쓰는 거죠. 나머지는 권력의 남용일 뿐이죠. 나머지는 전부 거짓이에요.(P. 172)

 

 즉 쿤데라는 이 소설을 가지고 바로 자신에 대한 보고서를 쓰고 있는 것이며, 그 보고서는 지금 자신이 사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보고서이기 때문에 그 본질만 말하고 핵심에 곧장 다다르게 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 쿤데라는 무엇을 사유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변주에 대해서 쓴 또 다른 부분에서 드러난다.

 

 변주 또한 여행이다. 그런데 이 여행은 외부세계의 무한을 가로지르지는 않는다. 인간은 거대한 무한의 심연과 작은 무한의 심연 사이에서 산다고 말한 파스칼의 생각을 당신들은 알 것이다. 변주의 여행은 이 다른 무한 속으로, 다시 말해 모든 것 속에 감춰진 내면 세계의 무한한 다양성 속으로 나아간다.(P.307)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쿤데라는 변주라는 것을 또 다른 무한성으로의 여행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왜 다른 무한성으로 여행해야 할까? 거기에 대해서는 하이데거가 '동일성과 차이'에서 말한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는 고대 그리스 이래로 서양의 형이상학은 하나의 근원, 즉 아르케를 추구해왔는데 무엇보다도 그것은 오로지 하나이며 그렇게 절대인 그것은 결코 자기와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한다. 바로 그 '절대적 일자(一者)'의 사상이 로마 시대 기독교와 결합하여 차이는 무조건 배척부터 하고보는  '독단의 일자'가 되었고 그로인해 서양은 결국 '파시즘'이나 '전체주의' 같은 비극을 껴안게 되고 말았다고 한다. 쿤데라가 바라보는 것도 이와 같다. 무엇보다 그는 독재의 극한이라 할 수 있는 스탈린이 보낸 탱크들에 의해 뭔가 다른 것이 되고자 했던 '프라하의 봄'이 무참히 짓밟히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독재의 폭압에 의해서 많은 이들이 다른 것을 말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야 했고, 더 많은 이들이 다른 것을 생각한다는 이유로 삶의 터전과 고향에서 쫓겨나야 했다. 운이 좋아 그것을 들키지 않은 자들도 비극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증가된 비밀경찰들과 그 끄나풀 그리고 더욱 더 치밀해지는 그들의  감시 업무 아래서 그들은 그야말로 고공 100미터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듯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으니까 말이다. 자신 역시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 마음은 손에 잡힌 듯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때의 기분을 소설에서 이렇게 술회한다.

 

 그 때 나는 원이 지닌 마법적 의미를 깨달았다. 열에서 이탈했을 때는 아직 돌아갈 수 있다. 열은 열린 조직이다. 하지만 원은 닫혀서, 떠나면 돌아갈 수가 없다. 행성들이 원을 그리며 움직이고, 떨어져 나온 돌이 원심력에 실려 가차없이 멀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행성에서 떨어져 나온 운석처럼 나는 원에서 떨어져 나왔고 오늘날까지도 계속 추락하고 있다.(P. 130)

 

 때문에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은 모조리 배척하는 그 '독단적 일자'가 어떤 비극을 가져오는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하나됨, 소설에서 '목가', '원무' 등으로 암시되는 그 하나됨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써 다른 무한성으로 떠날 수 있게 만드는 그 '변주'를 가져오는 것이다.

 

  단적으로 그 변주란 소설에 나오는 말로 하자면 경계를 넘나드는 일이다. 이를테면 타미나 이야기에서 나오듯 한 발로 이 칸 저 칸을 넘나드는 일이다. 쿤데라는 바로 그렇게 경계를 넘나드는 것, 그 어디에도 정주하려 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독단적인 일자'가 가져올 비극을 줄이는 길이라 믿는다. 소설에서는 3부 '천사들' 이후로 경계를 넘나드는 것을 꾸준히 형상화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소설에서 그토록 '정사(情事)'가 자주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쿤데라에게서 '성적 행위'가 나오는 이유는 마지막 7부 경계선의 얀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데 바로 그가 가장 매료되었다는 고대 소설인 '다프니스와 클로에'가 그것이다. 무엇보다 얀이 매료된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남아 있다. 그 이상 무얼 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포옹 자체가 사랑의 쾌락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흥분했고 심장이 세차게 뛰었지만 정사를 나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P. 370)

 

  이 문장만으로는 그 이유를 얼른 납득하기가 힘들다. 아마도 쿤데라 역시도 그것을 우려했었는지 소설의 마지막에 얀이 매료당했던 진짜 이유를 다음과 같이 풀어놓았다. 

 

 에드위즈와 그는 결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언제나 뜻을 같이했다. 각자가 상대 말을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 그들 사이에는 놀라운 조화가 유지되었다. 몰이해 위에 세워진 경이로운 연대였다. 그들은 그것을 잘 알았고, 그에 거의 흡족해했다. (P. 421)

 

 즉, 바로 이것이 쿤데라가 대지를 지배하는 하나의 목가, 모두가 같은 춤을 추도록 만드는 원무가 가져오는 비극을 없애기 위해서 지향하는 바였다. 굳이 하나의 공간에 머무르려 하지 않으며 비록 상대방이 경계 저 편에 있더라도 아무 이유없이 받아들여 주는 것. 그냥 그렇게 타자 그 자체로서 연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쿤데라가 이 '웃음과 망각의 책'이 지닌 모든 여정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상대방을 순수히 받아들이는 가장 대표적인 행위라 할 만한 '정사'를 쿤데라는 소설 내내 그토록 자주 가져 온

것이다.

 

  이렇게 '웃음과 망각의 책'은 그 자신 역시 희생자였던 무참하게 짓밟힌 프라하의 봄을 통해 체험했던 비극을 어떻게 하면 끊어낼 수 있을까에 대해 천착한 일종의 사유의 여정이었던 셈이다. 한 마디로 쿤데라 자신의 사유의 보고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아예 실명으로까지 등장하여 개인 사유의 보고서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가 이렇게 보고서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독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기 보다는 먼저 독자를 자신의 사유 속으로 참여시키려고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마도 그래서 이 소설이 다른 소설들과는 다르게 다소 특이한 형태를 띠는 것은 아닌가 싶다. 앞서도 쿤데라가 변주의 형식을 취한다고 고백했음을 말했지만 정말 이 소설은 정형화된 소설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작가가 마치 예화를 말하듯 상상된 이야기임을 분명히 드러내는가 하면 곳곳에서 에세이 같은 분석이나 사유의 글들이 출몰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보다 본질적으로는 쿤데라가 그것에 관해 이루어갔던 모든 사유의 결들을 마치 곤충도감을 만들듯 독자가 얼마든지 관찰가능하도록 펼쳐놓은 것과 같다. 그래서 독자 역시도 얼마든지 자신만의 사유로 된 책을 쓸 수 있도록 말이다.

 

 인간은 책을 쓸 때 세계로 바뀐다. 그리고 한 세계의 속성은 그것이 유일하다는 데 있다.(P. 205)

 

 이러한 면모는 제목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 '웃음'은 경계를 넘어선 개인의 고유성을, '망각'은 그 고유성을 소멸하여 하나의 전체성으로 포섭하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게 제목은 이 책이 그 둘이 서로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며 지속해 나가는 사유의 과정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표지에 나온 그림에서도 증명된다. 표지에 나온 저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것으로 제목이 바로 '헤겔의 휴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이 리뷰도 어쩌면 쿤데라가 펼쳐보인 그 여정에 참여한 끝에 나온 나만의 표지 그림과 같은 '변증법적 완성형'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마치 잠언과도 같은 놀랍고 재기발랄한 말들의 향연에서 당신이 결국 집필할 책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소이진 2012-05-20 21:17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보는 헤르메스님 리뷰!
이번 책과 리뷰는 저에겐 한없이 어려워만 보이는군요. 밀란 쿤데라라는 작가 이름부터 소용돌이에 빠진 듯 쑥쑥.
요새 알라딘이 침체기에 접어든 거 같아요. 분위기도 싸하고 밝지 않고, 많이 보이던 분들이 코빼기도 비치질 않으니 알라딘에 와도 심심하기만 하네요. 그 와중에 헤르메스님께서 글 한편 남겨주셔서 좋군요. 하아. 내일은 또 열심히 학교가고, 일해야 겠죠? 헤르메스님도, 나도 파이팅!

헤르메스 2012-05-23 01:12   URL
소이진님 쿤데라는 저 역시도 어려워요. 아마도 제대로 이해하기가 가장 어려운 작가중의 하나가 아닐까도 싶네요. 그래서 리뷰도 어쩔 수 없이 어렵게 되고 마네요. 제가 제대로 소화시키고 있지 못한 결과로^ ^;
소이진님을 위해서라도 꼬박꼬박 글을 남겨야 하는데 요즘은 통 그런 시간이 안 나더라구요. 그래도 제게 파이팅 해주셔서 고마워요. 요즘 정말 무덥던데 이럴수록 건강 잘 챙기고 학교 생활 제대로 잘 해내시길 빌어요. 아무튼 글을 자주 자주 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근데 요즘 정말 글 안 써지네요... 슬럼프인가? ㅠ ㅠ)

프레이야 2012-05-21 09:24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저는 이 책을 구판으로 읽었는데요 정말 좋아요.
밑줄긋기도 많이. 저 표지 그림의 정체를 알게 됐네요. 헤겔의 휴식! 이군요.^^
변증법적 완성형,이란 말이 쏙 들어옵니다.

헤르메스 2012-05-23 01:16   URL
와! 프레이야님 반갑습니다.
프레이야님이 영화에 대한 글을 많이 읽었는데
그래서 뵙는 건 처음인데도 오래 알던 분 같아요^ ^
쿤데라가 새삼 정말 글을 깊이있게 잘 쓴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느꼈습니다.
저도 밑줄 긋고 따로 적어 둔 말이 참 많아요. 이런 혜안이 질투날 정도로 부럽더군요^ ^ 이번에 나온 쿤데라 전집엔 모두 마그리트의 그림이 사용되었던데 누가 이 책의 표지로 헤겔의 휴식을 선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이 표지만큼은 제대로가 아닌가 싶어요. 아무튼 프레이야님 방문도 댓글도 모두 감사드립니다.^ ^

마녀고양이 2012-05-21 12:00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제가 기억이란 변주와 같다는 요지의 페이퍼를 쓴적이 있었어요...

헤르메스님의 페이퍼는, 제가 인간 관계에서 느끼는, 또는 기억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제 정체감에 대해서 느끼는 부분을 명확하게 말씀해주시네요. 변주, 다들 사실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다들 fact에 대한 변주를 보여줄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측면으로 아까 '정사'에 관해 인용하신 부분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게 한계이지만, 한계를 알아야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수용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생각도 같이 합니다.

즐거운 한주되셔요.

헤르메스 2012-05-23 01:30   URL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을 읽어서 더욱 마녀고양이님의 생각에 동의를 하게 됩니다. 지금은 쿤데라의 '불멸'을 읽고 있는데 저 '정사'에 대한 인식이 더욱 깊어졌더군요. 이를테면 쿤데라의 '불멸'은 사실 어떻게 하면 '불멸'하지 않을 수 있을까에 대한 사유의 여정입니다. 불멸은 기억을 통해 이어지는데 쿤데라는 그 기억이 오히려 존재에 대한 피상적 인식만으로 채워지므로(설사 그것이 괴테나 헤밍웨이의 작품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존재의 순수성을 파괴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을 이어가고 있는 것 같거든요. 아직 끝을 못 보았기에 결론에 다다르지 못했습니다만 작품에서 이렇게 기억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것도 그 기억이 우리에게 남겨져 타자를 만날 때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은 아닌가 싶더군요. 그래서 영원이야말로 오히려 우리 존재들에겐 형벌이 아닌가 이렇게 묻고 있는게 아닌가 싶어져요. 이렇게 보면 불멸 보다는 찰라적인 것을, 항구적인 것 보다는 변주적인 것을 그렇게 쿤데라는 꾸준히 자신의 주제를 심화시켜나가고 있는 것으로도 보여지는군요. 제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라 어쩔 수 없이 수다스러워지는 것을 용서해 주세요. 아무튼 말씀하신대로 한계 자체의 긍정이 무엇보다 출발점인 것 같습니다.('불멸'은 그것을 시작점으로 하고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살펴보는 작품 같기도 합니다.) 마고님 댓글에 저도 이렇게 자꾸 생각을 발전시키게 되네요. 늘 좋은 말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개의 힘 1 밀리언셀러 클럽 124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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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전쟁은 미국에게 있어 최초의 패배였고 그래서 트라우마가 되었다.

건국 이후 미국은 70년대까지 타자들과는 모두 세번의 큰 전쟁을 치뤘다. 40년대의 2차세계대전 50년대의 한국전쟁 그리고 70년대의 베트남 전쟁. 40년대의 2차세계대전은 미국에게 지금과 같은 패권국가의 자리를 가져다주었다. 미국의 달러를 기축통화로 정한 브레턴 우즈 체제는 정치권력 뿐만아니라 경제권력까지 미국에게 넘어갔다는 증거에 다름아니었다. 50년대의 한국전쟁은 휴전선이라는 반쪽의 승리에 그쳤으나 그래도 적어도 패배는 아니었다. 하지만 70년대의 베트남 전쟁은 문자 그대로 완벽한 패배였다. 그토록 유례없는 군비를 투여하고 물량공세를 펼쳤지만 돌아온 것은 전면적 퇴각 밖에는 없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오만했던 콧대를 여지없이 주저앉게 만들었으며 그렇게 아무 것도 거칠 것이 없었던 미국이 처음으로 맞딱드린 그 한계는 지울 수 없는 얼룩, 치유될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트라우마가 생겼다는데 있지 않다. 역사적으로 그런 패배 한 번 겪어보지 않은 나라가 어디있겠는가? 어차피 정상에 있는 존재에게 남은 것이라곤 내리막길 뿐이다. 그러니 미국 역시도 언제고 한 번은 당해야만 하는 아픔이었다. 그래도 미국이 조금 다른 경우라면 당시의 미국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최고의 정점에 서 있는 나라였다는 데 있을 것이다. 자유세계를 마음대로 호령하는 팍스아메리카나! 그게 70년대의 미국이 아니었던가! 마치 소설 '개의 힘'에서 멕시코의 바레라 가문과 같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랬던 미국에게 베트남 전쟁의 패배는 마치 로마의 황제가 변방의 이름없는 부족에게 대패를 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스스로도 적수라 여기지 않았던 상대, 차마 질 것이라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던 상대에게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치욕 또한 컸었다. 바로 그 치욕이 오히려 마치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두고두고 곱씹을 수 밖에 없는 아픔을 가져왔던 것이다. 상처받은 자존심. 더구나 당시의 미국은 자유세계의 지도자적 국가. 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패배는 용납되지 않았다. 패배는 얕보이게 만든다. 미국이 두려워하던 것도 그것이었다. '어라! 미국도 별 거 아니네. 저렇게 큰 힘이 있어도 조그만 베트남 나라조차 이기지 못하잖아'하는 식으로 피식 웃으며 비웃듯 자기를 바라볼 다른 나라들의 시선이었다. 그래서 보스는 더욱 허세를 부리거나 잔인해지게 된다. 소설에서 바레라 가문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되었던 멘데스의 두 아이를 다리 아래로 집어 던졌던 것 처럼...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은 75년부터 2003년까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의 미국과 멕시코간의 마약전쟁을 다룬다. 압도적인 서사로 독자의 넋을 잃게 만드는 작품이지만 윈슬로가 새삼 과거에 군림했던 멕시코의 마약카르텔에 천착하는 것은 그것이 비단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일이기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더 큰 이유는 바로 저기에 있다. 그러니까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안게 되어버린 미국의 트라우마. 비극이긴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보다 현명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계기가 되기도 했었을 그 사건이 어쩌다 미국을 더욱 더 나쁜 쪽으로 몰아가게 되었던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얘기다. 그 상처를 극복하는 데 있어 어떻게 '개의 힘'이라는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을까 돈 윈슬로는 궁극적으로 그것을 묻고 싶어한다.

 

 

 

 

 물론 미국은 실패했다. '개의 힘'은 사실은 그러한 미국의 실패를 복기하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이 소설이 하필이면 베트남 전쟁이 종전된 75년부터 시작되는 것에서 나타난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전쟁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그리고 그 75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반은 미국 반은 멕시코인 주인공 아트 켈러는 이제 마약 단속 수사관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어 멕시코로 파견된다. 바로 그 때 거기서 30년간 피바람을 불러올 비극의 씨앗이 원죄처럼 잉태된다. 아트 켈러가 멕시코로 간 시기는 공교롭게도 미국이 더 이상 베트남에서와 같은 실패를 겪지 않기 위해 더욱 철저하게 그래서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개의 힘'에게마저 의지하여 (그러한 불법적은 간섭들은 모두 미국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용인되었다.) 중앙아메리카의 공산화를 막으려고 개입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아트 켈러의 이야기는 사실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의 역사나 마찬가지다. 그가 티오의 힘을 빌려 처음 했었던 멕시코의 아편 산업에 대한 개입이 그대로 베트남 전쟁을 은유하는 것이라면 그 이후에 벌어지는 아트 켈러의 멕시코 마약 카르텔에 대한 막후 공작은 모두 미국의 중앙아메리카의 개입을 그대로 은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돈 윈슬로는 분명히 보여준다. 베트남 전쟁이 가져온 트라우마를 지워버리려고 그렇게 '개의 힘'을 빌렸던 미국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그렇게 아트 켈러를 통해 상징되듯이 그 한 발자욱도 나가지 못하고 여전히 제자리를 맴도는 성찰없는 미국의 반복된 과오가 무엇을 가져오는지 그는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생생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잊기 위해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개의 힘'에 의지하는 것은 그 저 더 큰 불행, 더 큰 지옥을 가져올 뿐임을 말이다.

 

 일단 악이 활동을 시작하고 나면 그 움직임을 멈출 힘이 없다는 사실을 티오는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악과 결탁하기를 멀리하는 일이며 지속하다가 멈추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2권 p. 125)

 

 그 다리 위에서 멘데스의 두 아이를 던져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새로운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보스 아단은 문득 이렇게 느낀다. 그와 똑같이 아무리 선한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그 힘을 빌렸더라도 한 번 빠져버린 '개의 힘'은 마약과 똑같이 그저 더 한 중독만이 있을 뿐이며 오로지 더 강한 자극의 집착만을 가속화시키는 그 중독이 결국에는 가져오고야 말 파멸만이 있을 뿐이다. 이는 돈 윈슬로가 아트 켈러를 통해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는 바다. 자신이 마약 수사관으로서의 경력이 끝장날 것을 두려워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아단의 삼촌인 티오와 하게 된 하나의 작은 타협이, 그렇게 '개의 힘'에로의 가벼운 입맞춤이 과연 어떤한 것들을 불러왔던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멕시코의 막강한 마약 카르텔을 완성시켰을 뿐 아니라 그 카르텔로 인해 '멕시코 트램펄린'이라는 중앙아메리카의 자유화 바람을 조기에 억제하는 미국 정부의 은밀한 작전까지 가져와 중앙아메리카의 자유와 평등을 염원하는 시민들을 케르베로스 혹은 레드미스트 작전으로 무자비하게 짓밟도록 도왔다. 더하여 그렇게 유입된 마약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이 지켜야 하는 자국의 미국 빈민계층들의 삶마저 파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트 켈러가 바레라 카르텔에게 복수를 다짐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인 어니의 죽음 또한 그 자신 고백했듯이 자신이 초래한 것은 둘째치고라도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돈 윈슬로우가 어니의 죽음을 베트남 전쟁의 패배로 인한 트라우마의 상징으로 만들고 있는 것임을 본다. 결국 그 어니의 죽음으로 아트는 완전히 '개의 힘'에게 지배당해 버렸고 결국 그가 불러온 것은 아단 카르텔의 성장이며 그로 인해 라헬이나 파비안과 같은 괴물들이 몰고 오는 더 큰 고통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커다란 고통이 바로 가장 순결한 영혼이라 할만한 후안 신부의 죽음일 것이다. 돈 윈슬로우의 '개의 힘'은 사소한 타협에서 무자비하고도 광대한 학살로 이어지는 고통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적 궤도를 재현한다.)

 

 근데, 돈 윈슬로는 왜 새삼 베트남 전쟁이 가져온 트라우마로 인해 미국이 가장 불법적으로 정치적 혹은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한 그 시기의 이야기를 지금 가져오려 한 것일까?  그건 지금도 여전히 그 '개의 힘'이 미국에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2001년의 9.11 사태 이후에 그 보복으로 감행된 이라크 침략 전쟁이 미국이 아직도 그 '개의 힘'에 빠져있음을 증명한다. 그렇게 돈 윈슬로는 보았을 것이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여전히 타인에게 가하는 고통으로만 위안 받으려는 미국을. 그렇게 베트남 전쟁 이후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미국을. 해서 그는 우려했던 것이 아닐까? 단 한 번도 자성의 시간을 가지지 않았던 미국을. 그래서 자꾸만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는 미국을. 그리하여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그 반성하지 않음에서 오는 반복으로 점철된역사적 잘못이 언젠가의 미래에 또 다시 불러올 지 모르는 비극을... 소설에서 아트의 비극이 칼란의 비극으로 반복되었듯이(아트가 어니로 인해 그렇게 되었듯이 칼란 역시 오밥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개의 힘'에 빠져들게 되지 않았던가? 그렇게 돈 윈슬로는 반복을 통해 아무리 사람을 살리기 위한 길이라 하더라도 불법적인 방법이 가져오는 것은 오로지 비극 밖에는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은 그래서 보다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소설이다. 미국에게 더 이상 '개의 힘'에 의지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그렇게 더 이상 예전의 잘못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 것을 호소하는 그런 목소리! 그래서 그는 과거에 일어난 미국의 실패를 이리도 충실히 복원하는 것이다. 독자들에게 그 과오가 얼마나 엄청난 비극을 가져왔는지 제대로 느끼게 하기 위해서. 또한 진정한 성찰이란 무엇보다도 현실을 온전히 인식하는 가운데 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그는 장장 5년이라는 시간을 집필에 들이면서까지 사건과 상황을 완벽하게 재현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러한 돈 윈슬로우의 시도는 보기좋게 성공했다.

 

 그러므로 '개의 힘'을 그저 단순히 재미를 위한 스릴러로 생각하고 읽는 것은 큰 오산이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숙연한 자세로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물론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이 소설에 나타난 돈 윈슬로우의 어조는 어떻게 보면 안토누치 추기경 앞에서 대답하는 후안 신부의 어조와 닮았다.

 "저의 주요 관심사는 복음이 현재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굶어 죽은 다음이 아니고(2권 p.57)"

 

 또는 아단이 티오 삼촌을 도와달라고 찾아왔을 때 했던 후조의 어조와도 비슷하다.

 "난 운명의 장난이 소리소문없이 지나가도록 놔둘거야. 인과응보라는 개념은 알지?"

 "진심으로 참회하며 자신의 길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영혼일 경우에나 그렇지. 삼촌이 그러신가?:(2권 p.67)

 

 그러니까 경청해야 한다는 것은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이 바로 저 두 가지를 독자에게 전해주기 위해 들려주는 미국에 대한 고해성사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도움이 되기 위해 다른 하나는 너무 늦기 전에 반성을 촉구하고 경고가 되기 위해. 지금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바라보면 아직도 '개의 힘'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물리기만 해도 감염되는 광견병을 닮았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으로 촉발된 자본주의의 위기는 여전히 심화중이고 그리스의 재정 위기로 드러난 유로의 위기 또한 가속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가중되고 있는 고통이 곳곳에서 갈등과 저항을 부르고 노르웨이에서의 이민자 청소년 학살 같은 무시무시한 범죄마저 양산하고 있다. 한 마디로 파멸을 가져오는 광견병이 언제 범람하게 될 지 모르는 판국이다. 증오와 공격만을 불러오는 광견병의 가장 좋은 특효약은 예방이다. 자신에게 전가된 고통의 의미를 제대로 되새기고 그 속에서 가장 현명한 해결 방법을 찾는 것. 그것만이 파멸로 치달을 고통의 연쇄를 끊는 유일한 길이다. 즉, 내가 지금 안고 있는 고통에 대한 성찰만이 진정한 예방이다. 그런 의미에서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은 거기에 대한 진정한 백신이다. 언제 물들게되어 버릴지 모를 파멸의 광견병을 미연에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돈 윈슬로의 이 백신을 접종할 필요가 있다.

 



 
 
마녀고양이 2012-05-14 01:16   댓글달기 | URL
방금요, 에세르님의 서재에서 <개의 힘> 리뷰를 읽었거든요.
그리고 그 서재에서 헤르메스님을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같은 책에 대한 리뷰를
연이어 읽으니 사람마다 다른 관점이 굉장히 흥미롭네요.....

제목이 하두 강렬해서, <개의 힘>의 의미가 뭘까 생각했는데....
무슨 의미인지 다가왔습니다. 네, 광견병, 악의 힘, 비단 미국까지 갈 것도 없겠는데요.
요즘 우리나라 정치 정세를 보면 말입니다. 머, 사회도 나을 것도 없지요, 교육두요. ^^

어떤 형태이든, 중독은 무섭습니다. 다양한 중독이 있죠,
비단 물질 중독-마약, 알콜, 음식- 등만 중독이라고 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권력이나 힘도 중독인거 같아요...

헤르메스 2012-05-20 21:13   URL
정말 우리나라 정치 정세를 보면 '개의 힘'에 어느정도나 중독되어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리뷰를 썼더 날이 하필이면 통진당 중앙위원회 회의를 하고 있던 날이었죠. 오후 2시 부터 시작된 회의를 10시간 넘게 지켜보면서 정말 중독된 '개의 힘'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꿋꿋하게 민주적으로 회의를 진행했던 심상정이나 유시민 그리고 그 오랜시간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자신의 한 표를 끝까지 행사할 것을 결의했던 나머지 중앙위 사람들을 보면서 결국 그것을 치유하는 길도 우리에게 열려있으며 그 무엇보다 옳은 것을 선택할 우리의 결단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희망은 남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란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계기가 아니었던가 싶네요^ ^
 
퓨어 1 
줄리애나 배곳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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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토피아가 결핍이 만들어낸 이상이라면 디스토피아는 삶의 어느 순간 문득 엄습하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하는 불안이 결국은 보게 만드는 진실이다. 이렇게 유토피아가 인간의 힘과 이성으로 얼마든지 결핍을 메울 수 있다는 낙관론의 소산이라고 한다면 디스토피아 역시 비관론의 소산이긴 하지만 그 밑바닥에 존재하는 것은 '부재하는 것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고 결핍은 영원히 충족되지 않을 것이니 우리의 힘과 이성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가운데 출발하자'라는 일종의 겸허한 자기 긍정이다. 그렇게 유토피아가 다소 자기 능력의 과신에 자리잡는다고 한다면 디스토피아는 냉정한 현실 인식 위에 자리잡는다. 즉 유토피아가 이카루스의 날개라면 디스토피아는 메두사에게로 다가가는 페르세우스의 거울인 것이다.

 

 

 

 새삼 이런 구별을 말하는 것은 이러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모습이 지금 말하는 이 소설 줄리애나 배곳의 '퓨어'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소설은 대폭발로 인해 멸망해버린 지구의 모습을 그리는데 거기엔 그 대폭발로 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일단의 무리들이 모여사는 '돔'이라는 곳이 있다. 그 '돔'은 폐허와 굶주림 그리고 죽음만이 가득한 거기에다 사람들 또한 화상으로 인한 흉터와 기형 그리고 온갖 사물들과의 융합으로 기괴한 모습을 이룰 수 밖에 없는 그 곳에서 유일하게 온전하고 안전한 세계가 된다. 제목인 '퓨어'는 바로 그 '돔'에 살고 있는 몸에 아무런 화상 자국도 흉터도 없으며 융합도 되지 않은 멀쩡한 신체를 가진 이들을 그 바깥의 사람들이 부르는 명칭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마치 소설 속 재활원 처럼 순백으로 결빙된 구원이라 할만한 '돔' 자체에 대한 의미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 '돔'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것이 바로 주인공 패트리지의 아버지인 월럭스의 유토피아적 욕망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미 지독한 병에 걸려 죽어 가고 있었어. 요양원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감옥은 감염된 병자들을 위한 곳으로 변해갔어. (...) 게다가 도시는 탄약으로 넘쳐나고 민란이 들끓었어. 슬픔은 커지고 삶의 무게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버거워졌어. (..) 굳이 대폭발이 아니었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갈 데까지 가다가 결국은 서로를 죽이며 피바다를 만들었을 거야. 그러니까 어찌 보면 그들이 빨리 끝장을 내 준 셈이기도 해. 안 그래?"(2권 P. 18)   

 

 

 대폭발은 바로 월럭스가 일으킨 것이었고 그건 바로 위에서 잉거십이 말하는 바와 같은 그런 세상을 뜯어고쳐보겠다는 유토피아적 욕망에서 발현된 것이었다. 그렇게 이 소설엔 그 누군가의 유토피아적 욕망과 그 결과로서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일종의 댓구를 이룬다. 이러한 댓구의 모습은 무엇보다 두 가지 중요하지만 서로 대립되는 상징에서도 나타난다. 그 두 상징이 바로 불사조와 백조이다.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불사조는 대폭발을 가져온 계획에 붙여진 이름이고 백조는 패트리지와 프레시아 일행을 어머니에게로 인도하는 조각이다. 아니 백조 자체가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렇게 불사조는 유토피아를 백조는 디스토피아를 의미한다. 이제와 말하지만 여기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어떤 묘사된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세상에 대한 어떤 시선자체를 의미한다. 아시다시피 유토피아란 어디까지나 세계의 발전가능성과 인간의 완전가능성이란 개념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즉 여기에는 단순히 현상의 서술이 아니라 그 서술 자체를 가져오는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어떤 시선 혹은 태도가 근원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불사조와 백조의 상징은 바로 그 각각에 자리잡은 그 근원적 시선에 대한 것이다.

 

  불사조란 언제 죽더라도 자기 의지로 온전히 부활할 수 있는 새다. 때문에 그것은 인간의 현재가 어떠한 모습이든 인간의 의지와 이성으로 언젠가 분명 완벽한 세상을 이룰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욕망의 근원에 자리잡은 낙관적인 자기 확신과 닮아있다. 자신의 의지만으로 부활까지 가능하게 만드는 불사조는 분명 그것의 제대로 된 상징이리라. 반면에 백조는 유아하지만 연약하다. 그는 부드러운 순응의 존재이다. 더구나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단 한 번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스완송(swansong - 여기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그건 바로 귀에 큰 이상이 생겼을 때 들려오는 이명(耳鳴)이다. 그런데 그 이명이 끝나면 더 이상 듣게 되지 못한다고 한다.)'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배곳은 아마도 이 때문에 백조를 디스토피아적 자기 긍정의 상징으로 가져온 것일지 모른다. 그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비록 생애의 마지막 노래이지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백조의 모습에서 주어진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의지와 태도를 보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백조는 디스토피아 문학의 일종의 창세기라 할만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가 궁극적으로 주려했던 것이 인간의 이성과 의지의 한계를 인정하게 하여 무모와 무지가 가져올 수 있는 비극을 경고하고 그것이 닥쳐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심할 것을 종용하려했던 것임에 비추어 본다면 그야말로 적합한 상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말해 불사조가 유토피아적 욕망에 내재된 발전가능성과 완전가능성(사실 이것은 월럭스가 가지고 있는 생각 그대로이기도 하다.)에 대한 상징이라면 백조는 완전히 그 반대인 퇴보가능성과 불완전가능성(단적으로 어머니에게 있으리라 여겼던 치유약의 불완성성은 이러한 디스토피아가 가지는 시선상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에 대한 상징인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줄리애나 배곳의 '퓨어'는 단순히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소설이 아니라 그 시선에 있어서(그리고 태도에 있어서도) 디스토피아를 추구하는 소설인 것이다.(백조는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일종의 구원으로 인도하는 빛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이 소설의 디스토피아는 하나의 방법론임과 동시에 하나의 지향점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배곳은 왜 하필이면 디스토피아 - 궁극적으로는 그 근원에 자리잡은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 - 를 지향하는 것일까?

 

  이것엔 아마도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첫째는 동시대성의 추구 때문이다. 그러니까 배곳 스스로가 이 작품에다 최대한 동시대적 현실을 담으려 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미국의 경제학자 누리엘 루비니는 최근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유토피아의 반대인 디스토피아는 이 시대를 대변하는 용어다. 많은 불확실성과 리스크를 대면한 우리에게 이제 유토피아는 사라졌다."라고. 이것은 비단 루비니 교수만의 입장은 아니다. 지금 세계의 경제분야의 석학들은 2012년을 한 마디로 디스토피아의 시대라 부른다. 왜 그렇게 부르는 것일까? 그것은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 그리고 현재 진행중인 유로의 위기 거기다 여전히 높은 실업난 그리고 날로 악화되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지금까지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리라 믿었던 유토피아적 전망이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음을 절절히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소설 '퓨어' 그대로 유토피아적 욕망으로 충동되었던 자본주의가 결국은 디스토피아로 귀결하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엔 그 전까지 꾸준히 생산되던 십대들의 풋풋한 사랑을 다루는 하이틴 로멘틱 코미디가 헐리우드 영화에서 사라졌음을 보게된다. 이제 헐리우드 영화속 십대들은 더 이상 사랑의 달콤함을 얘기하지 않는다. 대신 데브릭 그레닉의 영화 '윈터스 본' 처럼 아버지가 떠넘긴 빚을 청산해야 하거나 잭 스나이더의 영화 '써커펀치' 처럼 자신의 존재를 압살하려 드는 아버지로 부터 스스로를 구원해야 하거나 게리 로스의 영화 '헝거게임' 처럼 어른들이 망쳐놓은 세상을 제대로 고쳐야 하는 짐을 떠 맡는다. 이렇게 보니 십대들에게 얹혀진 짐이 과부하가 걸릴 만큼 어마어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토록 세상을 치유할 책임을 십대들에게 지우는 까닭이 뭘까? 그건 아마도 십대들이 이제는 차츰 폐기물로 전락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사고 방식에 그래도 어른들 보다는 조금이나마 덜 오염되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덜 오염된 생각 바로 거기에 구원의 가능성 역시 자리잡고 있다고 여기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공교롭게도 이 소설 '퓨어'의 주인공들도 모두 십대들이다. 그들 역시 앞서 인용한 영화들의 십대들처럼 어른들이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세상의 구원을 대신 이룩해야 하는 책임을 떠 맡는다. 어쩌면 이 것은 지금 예술가들이 바라보고 있는 십대들의 의미에 대하여 배곳 역시 공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렇게 소설이 디스토피아를 다루게 된 것은 단순한 소설적 설정이라기 보다는 무엇보다 배곳이 동시대성에 충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대성에 충실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단적으로 배곳 그녀 자신이 소설 '퓨어'를 그저 그런 암담한 미래를 그린 판타지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바로 지금의 세상에 대해 말하는 소설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즉 그녀는 이 소설이 다만 재미를 위한 읽을거리로 그치지 않고 지금 처한 현실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렇게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린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하면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는지 사유하게 만드는 그런 계기가 말이다. 그래서 배곳은 디스토피아적 시선을 담는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그러니까 하나가 동시대성의 추구를 통해 지금 처한 현실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작품에다 담고자 한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 담겨진 현실을 가지고 그것을 극복할 대안을 독자들 스스로 생각할 때 참조할만한 것으로써 배곳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디스토피아적 시선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주어진 한계의 긍정과 그 안에서의 최선이다. 배곳은 이것을 무엇보다 아이들의 신체 묘사를 통해 드러낸다. 앞서도 '돔'을 제외한 바깥의 사람들은 흉터와 융합의 존재라고 말을 했는데 주요 인물 중 '퓨어'인 패트리지와 라이다를 제외하고는 프레시아, 브래드웰 그리고 엘 캐피턴 모두는 융합된 존재다. 프레시아는 한 쪽 손이 예전의 행복한 가정이었을 때의 프레시아를 암시하는 인형의 머리와 융합되어 있으며 브래드웰은 새들과 융합되어 있고 엘 캐피턴은 가장 아끼던 동생과 융합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융합된 존재들은 그저 단순한 사물이나 존재만은 아니다. 배곳은 주의깊게도 각 인물들이 가장 바라마지 않는 것을 융합시켰다. 이를테면 프레시아는 옛날의 그 행복하고도 안전했던 자신으로 되돌아가기를 늘 꿈꾼다. 바로 인형의 머리는 바로 그 때의 상징이자 프레시아 욕망의 상징인 것이다.  브래드웰도 마찬가지다. 그는 늘 자유롭기를 꿈꾼다. 새는 언제나 자유의 상징이었다. 그렇게 브래들웰도 자신이 욕망하는 것의 상징과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엘 캐피턴은 어떠한가? 그는 융합되기전 동생을 무엇보다 아껴왔다. 또한 그들이 만나게 되는 선한 어머니들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그녀들 역시 그녀들이 무엇보다 아끼는 자녀들과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배곳은 융합된 존재들이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무엇보다 그들 욕망의 상징임을 밝힌다. 왜 배곳은 하필이면 그것들과 융합시켰던 것일까? 거기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융합된 존재들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반응에서 짐작된다. 프레시아, 브래드웰은 자기 욕망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숨긴다. 프레시아는 어떻게든 소매로 인형 머리의 손을 가리려 하고 브래드웰 또한 셔츠로 끝끝내 가리려 한다. 그것은 비단 그 모습의 흉물스러움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그것들을 가리는 진정한 이유는 그들이 처해있는 현실상 그들의 욕망이 그대로 충족되어질 수 없음을 스스로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레시아는 인형이 상징하는 안전과 안락함을 가져다 줄 '돔'에 대한 염원을 스스로도 뻔한 욕망이라고 생각하며 부끄러워한다. 브래드웰은 홀로 자유롭게 되고 싶지만 아직도 그의 도움을 많이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기에 그럴 수 없다. 그는 그렇게 될 수 있을 때 조차 남들을 돕기 위해 기꺼이 그 자유를 포기한다. 즉 그들의 숨김은 그들의 냉정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라는 마음의 간접적 표현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세상에 대한 현실의 인식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욕망을 억제한다. 그것은 결국 자본주의의 좌초를 가져온 (특히나 현 금융권에서 보여지는) 무분별한 욕망 추구와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이것이 덜 오염된들 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구원의 가능성이라면 어떻게 해서 이것들이 가능한지가 관심사가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소설 속에서 그러한 자기 제어, 절제가 바로 세계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에서 나오는 것임을 본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런 존재라고 해서 세상이 그렇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그냥 주어진 신체의 한계와 세계의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그야말로 디스토피아적 태도 그대로다. 그런데 이러한 긍정 그리고 최선이 왜 필요한 것일까? 그것은 그 긍정이 바로 공존을 위한 토대이며 포용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패트리지와 프레시아 그리고 브래드웰이 소설속에서 보여주는 한결같은 모습이 있다. 그것은 늘 타인의 반응을 신경쓰고 되도록 그 반응에 공감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건 자신의 한계를 알기 때문이었다. 월럭스 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과신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과 능력의 한계를 순순히 인정한 가운데 타인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과 세계의 긍정은 곧 타인과의 연대로 나아가게 한다.

 

 배곳은 무엇보다도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린 오늘의 현실을 제대로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 연대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배곳은 '퓨어'의 주인공들을 일종의 '파티(party - RPG게임에서 흔히 보는 집단적 주체)' 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공존 그리고 연대의 추구는 무엇보다도 엘 케피턴의 신체가 보여준다. 엘 케피턴은 자신의 등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동생 헬머드가 융합되어 있다. 하지만 동시에 헬머드는 늘 한시라도 빨리 자유롭고 싶어지는 굴레이기도 하다. 특히나 케피턴에게 있어 헬머드의 꾸물럭거리는 두 손의 움직임은 그러한 분리 욕망을 더욱 부채질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배곳은 그 꾸물럭거림의 정체를 밝힌다.(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감탄한 부분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스포일러상 그 정체는 말하지 않겠다.) 결국 그들은 공존을 선택한다. 서로의 한계 지점에 존재하는 이들이지만 긍정하고 포용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독특한 모습이라고 할만한 융합 역시도 바로 이 공존과 연대를 전면적으로 말하기 위해서 가져온 것이다. 융합이란 섞임이요 그렇게 나 아닌 것들을 포용하는 것이다. 그것도 일순간이 아니라 영원히! 문제는 소설에서 그렇게 융합된 존재들이 모두 그것을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융합된 존재들 중 그 누구도 자신에게 융합된 것에 대해 증오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수용하고 그것과 공존하는 가운데 최선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렇게 융합은 연대의 기반이 타자의 긍정이요 자신과 똑같은 것으로 여기는 포용임을 드러내는 중요한 상징이다. 이러한 융합의 상징성은 모든 악의 근원인 월럭스와 그의 중개자이자 또 하나의 가부장적 존재인 잉거십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과 대비해서 보면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월럭스와 잉거십, 그들은 절대 포용하는 자들이 아니다. '돔'은 철저하게 바깥의 사람들과 격리되어 있으며 더구나 그 안에서 시행되는 '코딩'의 비밀 역시 개인의 의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월럭스는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패트리지의 어머니를 버리고 잉거십은 순종하지 않는 아내를 구타한다. 모두 일방적이고 거기다 강요적이다. 배곳이 유토피아적 욕망을 위험하다고 보는 것은 어쩌면 거기에 바로 이러한 타자를 고려하거나 배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시선 혹은 태도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한 무절제한 욕망 추구를 보여주었던 자본주의 또한 바로 이러한 시선 혹은 태도를 근원적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디스토피아를 가져왔을지 모른다는 의심 역시 가능하다. 바로 그래서 배곳은 공존과 연대의 상징으로써 전면적으로 융합을 가져온 것이다.

 

  더러 좋은 작품을 표현할 때 '의외의 보물'이라는 말이 있는데 '퓨어'는 그야말로 거기에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융합된 존재들로 이루어진 독특한 설정. 현실의 디스토피아적 의미와 그 극복을 위한 대안을 깊이있게 담아내면서도 절대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이야기적 재미. 한 마디로 나같이 설정의 참신성에 많은 점수를 주는 사람으로서는 매혹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물론 더욱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은 자신의 주제를 온전히 독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꽤나 세부적으로 공을 들여 설정해 놓았고 또한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제대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은유와 상징의 정교한 건축물'이라는 표현은 이 작품의 또다른 닉네임이다. 이 책은 이것저것 건드려 볼 부분이 참으로 많은 작품이다. 총 3부작이라고 하는데 앞으로 두 작품이 나온다면 음미해 볼 부분은 더욱 쌓이게 될 것이다. 그 때 또 얼마나 이런 저런 말들을 내가 쏟아내게 될 지 은근히 기대가 된다. 그 때의 보다 풍성한 수다를 기약하며 1부, '퓨어'에 대한 얘기는 이쯤에서 그치는게 좋겠다.

 

 리뷰의 제목으로 삼은 GRAVE NEW WORLD는 우리에게는 AUTUMN으로 유명한 그룹 STRAWB의 노래 제목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를 무덤을 뜻하는 GRAVE로 살짝 바꾼 제목의 이 노래는 아일랜드 출신인 그룹 STRAWBS가 종교적 갈등으로 일어난 아일랜드 유혈 사태를 보면서 만들었는데 모두들 빛나는 유토피아를 가져온다면서 시작했지만 결국 가져오는 것은 무덤과 같은 신세계일 뿐이지 않냐며 꼬집는 노래이다. '퓨어'를 읽으면서 많이 생각났고 많이 들었던 노래였다. 월럭스의 '돔'처럼 타자에 대한 배려와 연대가 없는 유토피아란 결국 GRAVE NEW WORLD가 아닐까...

 

 

Grave New World - Strawbs

 

 

There's blood in the dust
Where the city's heart beats
The children play games
That they take from the streets
How can you teach when you've so much to learn
May you turn
In your grave
New world.

There is hate in your eyes
I have seen it before
Planning destruction
Behind the locked door
Were you the coward who fired the last shot
May you rot
In your grave
New world.

There is death in the air
With the lights growing dim
As those who survive
Sing a desperate hymn
Pray that God grants you one final request
May you rest
In your grave
New world.

     

  

 

 



 
 
소이진 2012-05-12 16:21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ㅠㅠㅠ 왜이렇게 뜸하셔요, 요즘.
매일 알라딘에 들어오면 서재브리핑보면서 헤르메스님 글 먼저 찾는데 요 며칠동안 전혀 보이지 않아서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더워서 글쓰는게 귀찮아지신거에요?ㅎㅎㅎㅎㅎ

헤르메스 2012-05-13 20:31   URL
더워서 그런 것은 아니고^ ^;...
흑흑 요즘 너무나 바쁘답니다.ㅠ ㅠ
거기다 또 며칠간은 몸이 안 좋기도 했고...

글도 자주 올리고 해야 하는데...
소이진님은 중간고사 이제 끝났죠?
얼마나 후련하실까요?
저도 좀 그런 빈 시간들이 주어졌으면 좋겠어요^ ^;

소이진 2012-05-14 22:47   URL
아이코야 ㅠㅠㅠㅠㅠ
바쁘시구나, 헤르메스님.
맞아요. 요즘 한창 일이 바쁠때죠.
저만 학생이다보니 하릴없이 떠돌아다니기만 하고.
다들 잘 안보이시던데 얼른 일이 처리되서(?) 헤르메스님 좀 더 쉴 시간이 많아지기를. 그래야 나도 좋은데 ㅠㅠㅠ 파이팅!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오늘따라 밤이 왜 이리 무덥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불면의 눈으로 바라봐서 그런가, 베란다 창문 밖 덩그맣게 뜬 달이

 참으로 고독해 보입니다.

 

 불면은 불면이고 허기는 또 허기인지라

 라면을 끓여먹다가 손가락을 데었습니다.

 따끔한 통증이 오늘은 그냥 넘기리라 생각했던

 신간 추천 페이퍼를 다시금 잡게 하는군요.

 때로는 이상한 인과관계로 일상은 지속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튼 11기의 첫 신간추천페이퍼를 쓰게 되었습니다.

 얼른 신간을 검색해보니 4월달은 발간수가 그리 많지 않은 가운데

 그래도 반가운 작품들이 여럿 눈에 띄었습니다.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이 그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작품입니다.

2005년에 나온 이 작품은 돈 윈슬로가 완성하는데 취재와 집필까지 해서 모두 6년이나 걸렸습니다. 그 긴 시간이 투자된 만큼 재미도 재미이지만 지금도 잔혹함으로 종종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곤 하는 맥시코의 마약시장을 이 소설만큼 제대로 형상화낸 작품은 없다고 평가받을 만큼 압도적인 현실감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제르미날'의 에밀졸라나 '레미제라블'의 빅토르 위고 처럼 때로는 소설이 그 어떤 역사서 보다도 당대의 사회를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곤 하는데 바로 이 '개의 힘'이 바로 그와 같은 소설이 아닌가 합니다. 사회 고발 스릴러의 대표작으로 기꺼이 일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다음에 들어온 것은 발라드의 '물에 잠긴 세계'입니다.

개인적으로 출간이 무척 반가운 책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화 '크래시'의 원작자로 그리고 어린 시절 일본 포로수용소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져 결국 스필버그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던 '태양의 제국' 원작자로 유명한 J. G 발라드의 소설이었으니까요. 원래 그는 SF 작가였습니다. '물에 잠긴 세계'는 1962년에 나온 그의 두번째 작품입니다. 당시에는 아직 지구 온난화에 대한 개념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발라드는 특유의 상상력으로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 빙하가 녹게됨으로써 지상의 도시들이 서서히 잠겨 버리는 세계의 종말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후 이 월드 연작으로 64년에 BURNING WORLD를  66년에 CRYSTAL WORLD를 2년 간격으로 꾸준히 발표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후에 이 세 작품을 묶어 지구 종말 3부작이라 부르고 많은 이들이 발라드의 대표작으로 꼽았습니다. 때문에 발라드를 좋아하는 이라면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었는데  이 중 우리나라에는 유명한 그리폰북스로 '크리스탈 월드'가 한 차례 출간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3부만 출간되어 그 시작을 볼 수 없어 더욱 애태우게 만들뿐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출간되었네요. 앞으로 3부작의 남은 작품들도 모두 출간되길 기원해 봅니다.

 J.G 발라드는 2009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죠.

 뒤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초기의 대표작 '그들' 때 부터 실제 인물을 모델로 소설을 써왔습니다. 그렇게 오츠는 현실이 어떻게 문학으로 걸려지는가 혹은 과연 문학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가를 작품을 통해 탐구해왔었죠. 얼마전에 나온 마를린 몬로를 모델로 한 '블론드'도 이러한 오츠의 작가의식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츠는 그것을 통해 오히려 문학의 한계를 발견하고('그들'은 단적으로 현실 앞에서 문학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그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그대로 문학이 할 수 있는 영역을 타진하며 나아가는 작가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 '좀비' 역시도 그러한 오츠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역시나 실제 연쇄살인마 제프리 다머를 모델로 쓰여졌으며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 전부를 문학적으로 다양한 방면으로 살펴보는 작품입니다. 어둠을 그려내는데 더 탁월한 빛을 발하는 오츠의 매력이 유감없이 드러난 작품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가장 출간이 반가운 작품이로군요.

 세라 워터스의 빅토리아 시대 3부작을 이루지만 유일하게 출간되지 않았던 '끌림'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정말 얼마만에 '벨벳 애무하기', '핑거스미스'와 더불어 빅토리아 시대 3부작이 완성을 보게 되는 지 모르겠네요. 하필이면 딱 중간이 빠져있던지라 더욱 애태웠었는데 이제야 그 목마름을 해갈하게 되나 봅니다.

 

 

 

 

  

  마지막은 존 어빙의 2009년도 작품인 '트위스티드리버에서의 마지막 밤' 입니다.

어빙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된다는 것이겠죠. 또한 그는 무엇보다도 '작가로서의 자신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늘 염두에 두고 있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작가로서의 자의식은 데뷔작 '가프가 본 세상'에서 이미 투영되고 있는데 그 때문에 그의 작품에선 성장이 종종 주된 테마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사이더하우스'가 그 대표적인 경우겠죠. 이 '트위스트리버에서의 마지막 밤' 역시도 '사이더 하우스'와 비슷합니다. 자신의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반영된 '성장'을 다루고 있으며  '사이드 하우스' 처럼 그 성장을 '부자관계'를 통해 다루고 있으니까요. 사실 알고보면 어빙이야 말로 작가는 무엇보다도 얼레에 매인 연 같은 존재임을 말해주는 작가가 아닌가 싶어요. 방식은 매번 다르지만 한결같이 천착하는 그 주제가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표현되어질 지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Sean 2012-05-04 18:09   댓글달기 | URL
이번 포스팅에는 어떤 책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쟁쟁한 책들이 많네요. 개인적으로는 발라드의 책을 가장 기대하고 있습니다. 시공사 그리폰북스의 크리스탈 월드는 정신나간 중고가로 읽을 엄두도 못 냈었는데, 문학수첩에서 나머지 지구종말 시리즈 두 편도 출판할 계획이라니 더욱 반갑습니다. 끌림도 엇그제 교보문고에서 봤는데 이쁘장하게 잘 나왔더군요. 끌림이 시리즈 두 번째라고 하시니 첫 번째 시리즈부터 읽어 봐야겠네요. 벨벳이 첫번째고 핑거스미스가 세 번째 인가요? 아님 반대인가요? ^^: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은 이번 좀비를 통해서 처음 접했는데, 제 취향은 아닌가 봐요. 책소개에 박찬욱 감독 얘기가 나와서 솔직히 더 관심을 갖고 나오자 마자 읽었습니다. 박 감독님이 추천한 책을 읽고 실망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좀비는 좀 아니더군요. 이 분이 실제 모델을 주인공으로 글을 쓰신다고 하셨는데, 그럼 다른 작품들도 이런 스타일인가요? 그렇담 이 분 작품은 제 취향하고는 차이가 좀 있을 거 같네요.

헤르메스 2012-05-05 22:24   URL
안녕하세요, Sean님 이렇게 들러주시고 또한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반갑고 또 감사합니다. 와! Sean님도 발라드의 책을 가장 많이 기대하시는군요. 저 역시
발라드의 작품들을 좋아하는지라 이번에 '물에 잠긴 세계' 발간은 정말로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이번을 계기로 3부작이 다시금 평가받게 되었으면 하네요. 세라워터스의 빅토리아 시대 3부작은 벨벳 애무하기가 첫번째이고 핑거스미스가 가장 마지막 작품입니다. 핑거스미스는 BBC에서 드라마로도 만들었는데 작품의 분위기와 주제를 정말 잘 살려놓았기 때문에 소설을 읽기전에 한 번 감상하시면 이 삼부작이 대강 어떤 작품인가 잘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네, 대부분 조이스 캐롤 오츠의 스타일은 실제 삶을 모델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람들이 들어가기 어려워하는 어둠이나 고통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걸 일종의 원칙으로 하지요. 그래서 사실 오츠가 그리 많은 이들에게 호감을 얻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구요.^ ^; 개인적으로는 창비에서 나온 '멜베이니 가족'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오즈의 진가를 알기에는 더없이 좋은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환유 2012-05-14 19:43   댓글달기 | URL
많은 분들이 좀비를 꼽으셨네요. 아마도 선정 확률이 높을 것 같아 저는 추천리스트에서 뺐지만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라도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에요. 개의 힘도 추천이 많더라구요. 스토리텔링이 완전 굳이라고...

이프리트 2012-05-15 20:00   URL
개의 힘
남자의 자리
좀비 중 하나는 무조건 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