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박상천을 읽는다.
시작은 '5679는 나를 불안케 한다'였지만, 읽다보니 여럿 더 읽게 되었다.
난 담을 높이 쌓아놓고 살았었다.
언제부턴가 담은 조금씩 허물었지만,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더 견고해진 것 같다.
영화를 보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신문을 보다가도 꺼이꺼이 잘 울지만...
돌이켜보면 내 자신의 일로는 울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주 작은 곳에서라도 한번 새어나오면 감당할 수 없이 허물어질 것 같아서였다.
어제 남동생이랑 다퉜다.
저녁을 먹기 위한 모임이었는데, 남동생이 자꾸 이런 저런 딴지를 거는 거였다.
이렇게 저렇게 받아주는데도 딴지를 거는 게 뭔가 할말이 있는 데 하지 못하는 거 같아, 그냥 놔두었더니...
결국 이런 말을 했다.
"난 누나가 그런 거 못한다 하고 야무지게 넘어갈 줄 알았어. 근데 이게 뭐냐? 얼마나 힘들면 보름만에 이렇게 살이 빠져?"
남동생이 말한 그런 거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어머니의 간병까지 하는 날 두고 하는 말이다.
급기야 날 고생시키는 남편과도 한바탕 할 태세였다.
언성은 높아지고 분위기는 험악해졌었지만,
난 어쩜 남동생이 고마웠는지도 모르겠다.
동생아, 고맙다.
오랜만에 무장해제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울 수 있게 해주어서...
아무 일 없었던 듯 출근을 해서 박상천을 읽다가,
툭.
균열이 있는 듯하여 가다듬고 재정비하려고 앉아 있다.
나의 누이들에게
너희들은 날 걱정하고 있겠지.
오늘도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어두운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며
바람에 흔들리는 풀꽃을 보았다.
그들은 척박한 땅에 가냐른 뿌리를 내리고,
분노같은 꽃을 피워 놓고 있었다.
왜 그들이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고
메마른 땅에라도 뿌리를 박아야 하고
분노같은 꽃들을 피워 놓아야 하는 지 생각해야만 했다.
어둠 속에 빛나는 그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가슴에 칼이라도 품을 만큼 독하지 못한 그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빛나야 하는 이유를 생각했다.
너희들은 또 날 걱정하고 있겠지.
오늘 밤에도 술을 마시며
바르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러한 윤리주의자가 아니다.
뜻대로 살 수 없다 해서 혹은 그와 유사한 이유로
밤마다 술을 마셔야 한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나는 패배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풀꽃들이,
왜 이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바람을 견디고
어둠을 이기면서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꽃을 피워야 하는지
왜 그 꽃은 분노 같아야 하는지.
독하지도 않고 쓰러지지도 않고
이 땅에서 아름답게 사는 풀꽃들을 생각했다.
나는 오늘도 술을 마시며
왜 사느냐고 자문하며 허무해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살아 있음이 내게 감당키 어려운 만큼의
아름다운 무게로 전해져 왔다.
아, 나는 풀꽃의 아름다운 저주를 보듯
우리의 생을 본다.
너희들은 밤마다 술을 마시는 나를 걱정하고 있겠지.
그리움
그대를 만나고서도,
쓴 약을 한입에 넘기듯
그립다는 말을 삼켜버린다
물없이 넘긴 약처럼
그리움이
울컥 목에 걸린다
헐거워짐에 대하여
맞는다는 것은
단순히 폭과 길이가
같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오늘 아침,
내 발 사이즈에 맞는
250미리 새 구두를 신었는데
하루종일
발이 그렇게 불편할 수 없어요, 맞지 않아요.
맞는다는 것은 사이즈가 같음을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어제까지 신었던 신발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어요.
맞는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 헐거워지는 것인지 모릅니다.
서로 조금 헐거워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편안해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잘 맞는 게지요.
이제, 나도 헐거워지고 싶어요
헌 신발처럼 낡음의 평화를 갖고 싶어요.
발을 구부리면 함께 구부러지는
헐거운 신발이 되고 싶어요.
감당할 만한 거리
멀리서 보는 단풍은 아름답다.
욕심을 부려 가까이 다가가
잎잎을 보면
상하고 찢긴 모습을
만날 뿐이다.
가까이 다가가 바라본
단풍든 잎잎의 상하고 찢긴 모습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가까이 다가가는 일에
겁을 낸다.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한다.
감당할 만한 거리에 서 있으려고 한다.
5679는 나를 불안케 한다
나는 왜,
앞에 가는 자동차 번호판 숫자를
바꾸고 싶을까
5679는 5678이나 4567로 순서를 맞추고 싶고
3646은 3636으로, 7442는 7447로 짝을 맞추고 싶을까
5679, 3646, 7442는 나를 불안케 한다.
나는 왜,
카세트 테이프는 맨 앞으로 돌려서 처음부터 들어야 하고
삐긋이 열린 장롱문은 꼬옥 닫아야 하고
주차할 때 핸들은 똑바로 해두어야 하고
손톱은 하얀 부분이 보이지 않도록 바짝 깎아야 할까
테이프와 장롱문과 핸들과 손톱이 나를 불안케 한다.
나는 왜,
시계는 1분쯤 빨리 맞추어 두고
컴퓨터의 백업 파일은 2개씩 만들어 두고
식당에서는 젓가락을 꼭 접시 위에 얹어 두어야 하고
손을 씻을 때면 비눗기가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손을 헹구어야 할까
시계와 컴퓨터와 젓가락과 비누가 나를 불안케 한다.
그래도 나는,
나를 불안케하는 것들과 함께 살아간다, 잘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