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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의 전쟁 ㅣ 이스케이프 Escape 3
존 카첸바크 지음, 권도희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요즘은 길을 가다가, 또는 어떤 행동을 하다가 머뭇거릴 때가 있다.
걸음을 늦춰 이것저것 쳐다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예 멈추고 뒤돌아 내가 지나온 길을 쳐다보기도 한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을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난 과연 내 길을 잘 가고 있을까?
내가 가는 길을 바꾸면 안 될까?
어릴 때는 그저 길 위에 있는 것으로 안도했었다.
온통 뒤얽힌 미로에서 길을 잃었어도 그저 길 위에 있는 것으로 안도했었다.
이제는 한걸음 떨어져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내 길이지만, 한걸음 떨어져 바라보니 실타래처럼 엉킨 부분도,막힌 부분도 감지된다.
엉킨 실타래를 풀고, 막힌 곳을 뚫을 방법을 궁리한다.
전시에는 거의 다 전쟁터에서 죽을 운명을 갖고 태어난다.
전쟁터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가?
엉킨 실타래를 만났을때 포기하고 주저 앉지 않은 사람들, 막힌 부분을 뚫은 사람들, 또는 다른 길을 모색한 사람들이 아닐까?
운명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해준 사람이 있는데,
그의 조언을 빌리자면 '적선, 기도와 명상, 좋은 스승, 독서, 자기 사주를 아는 것, 명당'등이 그것이다.
누군가가 내게 제일 좋아하는 작가를 묻는다면, '존 카첸바크'를 얘기한다.
'하트의 전쟁'이 번역되기 전이라, '어느 미친 사내의 고백'이나 '애널리스트'등을 얘기하곤 했지만 말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떠오른다.
떠듬떠듬 원서로 읽던 그 시절, 이 책의 주인공 하트가 엄청 부러웠다.
('하트의 전쟁'은 우리나라에 영화로 먼저 소개되었었다. 큰 틀에서는 비슷하지만, 영화와 책은 좀 다르므로 책을 권한다.)
그런 멋진 기수를 상관으로 둔 그가 부러웠고, 전쟁 포로로 끌려가서도 스승이 있어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그가 부러웠다.
세월이 좀 흐르고, 요번에 번역본을 읽으면서,
그런 사수와 스승을 둔 하트를 부러워만 할 게 아니라, 이젠 나도 누군가의 사수와 스승이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에 어깨가 무겁다.
이 책은 다방면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전쟁의 상흔이 무섭고 인종차별이 잔혹하다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꽃 피우는 인간애가 있고...그것이 사람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이책에는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용기를 주고,북돋워 줄 수 있는지, 어떻게 힘이 될 수 있는지 그게 거짓일지라도 사실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얘기되어지고 있다.
물론 시대 상으로 미루었을 때,
운명을 안 좋은 쪽으로 바꾸는 악연도 등장하지만...
내가 읽은 건 '사람의 운명을 나은 쪽으로 바꾸는 법'에 대해서이다.
“대위님,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을 해봤는데,
처음엔 희망과 믿음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다시말해, 운명이 곧이 곧대로만 흘러간다면,
그래서 희망이나 절망 따윈 생각지도 못하고 살아간다면, '사람답게'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굴곡이 있어야, 어떤 방향으로든 나아갈 수 있다.
때로는 그 희망이 거짓되고 무모해도 말이다.
그런데,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건 저런 질문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저런 질문을 생각해 내고, 누군가를 향하여 저런 걸 물어볼 수 있고 대답을 모색해 볼 수 있는 그런 행위를 통해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엉킨 실타래를 풀고, 막힌 부분을 뚫고, 다른 길을 모색하는 건...
자기가 읽은 책들을 통해서 일수도 있지만, 대부분 사수나 스승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또 하나 깨달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내편과 네편의 경계가 있는게 아니라...
자기 마음 속에 만들어낸 허상의 적,다시말해 자기연민 따위가 가장 큰 적이 아닐까?
편이나 경계 따위에 대해서는 항상 생각이 복잡하다.
나로부터냐, 나로 말미암음이냐, 기준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서 마냥 틀려질 수 있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하트, 젠장, 굶어 죽는 줄 알았어.”
“모두들 항상 배가 고프죠. 그건 중위님도 알 거예요. 질문이 있는데, 얼마나 배고픈가를 물었을 때, 집에서 지내는 중위님이 ‘굶어 죽을 것 같다’고 말하는 건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은 지 여섯 시간 정도 지났고, 이제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일 거예요. 아마 포트 로스트가 나오겠죠. 익힌 야채와 감자에 그레이비를 듬뿍 끼얹어서 말이에요. 물론 여기서 ‘굶어 죽을 것 같다’는 건 실감 나라고 한 말일 거예요, 안 그래요? 만일 중위님이 요 전날 이곳을 지나간 불쌍한 러시아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면, ‘굶어 죽을 것 같다’는 말은 그보다 훨씬 사실적인 의미였겠죠. 안 그런가요? 단순한 말 몇마디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저 해보는 말이 아니란 말이죠.”
토미는 친구의 장점 중 하나를 깨닫고 내심 미소 지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상태에서, 그 즉시 입을 다물고 세부적인 사항들을 살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과묵함은 배려심에서 나오는 건지도 모른다. 토미는 휴가 폭격기 조종석에서도 특유의 관찰력과 정서에 따라 말이 없고 유능했을지 새삼 궁금했다. 분명히 그랬으리라.(167쪽)
“하트 소위, 자네는 뭘 보려고 왔지?”
........
“특별히 보고 싶은 건 없습니다. 어딘가에 기대를 품고 가면 보통 기대한 만큼만 보게 되니까요. 그래서 그냥 지켜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뭐든 필요한 것을 보게 되겠죠.”(186쪽)
토미는 빠르게 걸으며 주변의 공기를 흩뜨리는 이른 아침의 습기를 느꼈다. 비행하기에 좋은 말씨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날씨가 안개와 진눈깨비, 폭풍에 시달리는 편이 나았다. 날씨가 청명하게 맑고 따뜻하다면, 그건 사람이 죽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잿빛 하늘의 추운 날씨, 영혼까지 스며들 것 같은 쌀쌀한 날씨가 나았다.(210쪽)
"내가 알기로 믿음이란 신뢰를 얻은 사람에게 남아 있는 최고의 선물이지 요구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믿음이란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생겨나는 겁니다. 상공에서 나란히 비행하는 중에 심한 옆바람에 흔들리면서, 메서슈미트와의 싸움에 함께 뛰어들며 생기는 거죠. 믿음은 가지기 힘들지만 한번 가지면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겁니다."(227쪽)
이 책이 지금이라도, 이렇게라도 번역되어 나와 다행이다.
번역 상의 오류도 많았고, 좋은 구절, 생각해 볼 구절도 많아서...포스트 잇을 잘라 붙여 놓은 게 도깨비 방망이 핫도그를 닮았다.
'견고한 서스펜스'나 '고감도 심리 스릴러' 따위의 헌사로는 부족하다. 부디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