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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른베르크의 별 

                                     -김광규

 

 

밤마다 북녘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

처음에는 이름 모를 붙박이별인 줄 알았다

높은 산꼭대기에서 반짝이는 불빛

나중에는 그것이 중세의 고성인 줄 알았다

그러나 슈테른베르크 산봉우리에 올라가보니

그것은 산정에 구축한 레이더 기지였다

밤마다 하늘에서 반짝이던 별

갑자기 땅으로 떨어지고

산정에서 빛나던 고성의 불빛

꺼져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가보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마음속에서 반짝이며 빛나고 있을 것을

 

**

 

만약에 내가 20대 그 시절에 고집을 피워 내 멋대로 살았더라면,

만약에 내가 결혼 같은 건 하지 않고 혼자 살았더라면,

만약에 내가 게으름 피우지 않고 매일 글을 썼더라면,

만약에 내가...했었더라면

 

매일 이런 만약을 떠올리며 산다.

가고 싶은 길도 많았고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매번 그냥 돌아서고 다른 길을 가면서 남겨 두었던 일들.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 때는 나무를 쳐다보기만 하던 그 여우처럼

'저 포도는 실 거야.' 한다.

마음 속에서나마 반짝이는 별로 남아있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게 나를 위로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살아갈수록

이 '만약에'가 쌓여만 가니 그 무게에 눌려 점점 키가 줄어들 지경이다.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야 그렇다치고

실현가능한 일들은 '만약에 목록'에서 좀 빼야겠다.

마음 속에서 빛나던 별들을 꺼내 하늘에 올려놓을 수도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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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굽은 곡선

-정현종

 

내 그지없이 사랑하느니

풀 뜯고 있는 소들

풀 뜯고 있는 말들의

그 굽은 곡선!

 

생명의 모습

그 곡선

평화의 노다지

그 곡선

 

왜 그렇게 못 견디게

좋을까

그 굽은 곡선!

 

***

 

 

어제 과음을 한 것도 아닌데 밤새 잠을 못 자고

새벽에 두 번이나 깬 끝에 결국 항복을 하고 배를 뒤집었다.

그때 눈에 비친 건 창문 사이로 보이는 건너편 마을.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거야 늘 봐왔으니 아는 것인데

알지 못하는 사람이 처음 보는 광경이라고 해도

집들간의 거리를 짐작하게 해주는 불빛들이 눈을 찔러댔다.

옆으로 둥글게 퍼져나가는 빛 입자들이

'머리 아프니?'

'속이 쓰린 거니?'

'이렇게 해주면 낫지 않을까?'

다정하게 속삭이며 내게로 건너왔다.

 

둥글게 퍼지던 그 곡선의 힘이었을까?

시끄럽던 머리도 잠잠해지고

잠을 못 잔 것 치고는 상태도 괜찮은 아침을 맞았다.

나도 누구에게 '못견디게 좋은 곡선'처럼 부드럽게 대해야 할 터인데.

평생 세워둔 가시도 둥글둥글 말려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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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

 

           -정끝별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

 

월급 계산할 때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9시 전에 출근카드를 찍으려는

고달픈 노동자처럼 버스바퀴가 서기도 전에 후다닥 내린 아침,

송편을 만들러오라는 엄마의 부름에 친정집으로 가는 길.

 

이제는 제법 가을 냄새를 묻히면서 불어오는 바람이 반갑기도 하지만

바람이 얇은 티셔츠 입은 배를 고스란히 드러낼까 걱정이 되어

잔뜩 힘을 주고 걸어가는 약 10분간 

바람이 부는 데도 진땀이 바짝바짝 난다.

그까짓 거, 똥배 나온 것 좀 보여주면 뭐가 어때서?

흥, 나는 절대 포기 안 할 거다. 뭐!

 

"이번에는 조금만 했다. 금방 끝날 거야."

라면서도 작게 똑똑 끊어놓는 반죽이 한 가득.

노동인원이 5명이 일을 다 끝낸 게 3시 반이니

-작은 반죽을 동그랗게 만들어 소가 들어갈 구멍을 찍는 담당은 아빠,

딸 셋은 부지런히 만들고, 엄마는 만들기가 무섭게 급냉을 시키고 언 송편을 봉투에

20개씩 담는 역할까지-

점심 시간을 한 시간 제한다고 해도 꼬박 5시간 반을 일한 셈이다.

 

쪼그리고 앉아서 하는 일은 언제나 힘들다.

갓 뽑은 커피 한 잔을 들고 의자에 앉아 있으려니

나른한 피로감으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다.

일을 다 하고 들어오는 배들처럼 기진맥진하지만

문득

'언제까지 엄마와 함께 송편을 빚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엄마가 건강하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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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108번

 

                              -  함민복

 

 

국민들을 위한다면

국민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말을 팔았으면

아무리 최선을 다해 일을 하셨어도

진정 국민들을 위하였다면

자신이 부족하였음을 느끼셨을 텐데

부족하여

미안하여

재산을 다 헌납하시거나

아무도 모르게 선행으로 다 쓰셨어야 옳았을 텐데

재산이 늘었다니요!

잘못 전달된 거겠지요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 재산을 늘린 분들이 계신다면

대통령님이시거나, 국회의원님이시거나, 검사님이시거나,

도지사님이시거나, 시의원님이시거나, 농협장님이시거나,

다 개새끼님들 아니십니까

국민들을 위하여 일하겠다고

말을 파신 분이나

말을 파실 분은

중생들이 다극락왕생할 때까지

성불하시지 않겠다는

기호 108번

지장보살님 꼭 한 번 생각해주세요

 

 

**

 

이제 곧 치러질 10월 재보선 때문에 어수선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내노라 하는 이들이 서울시장에 출마한다 하는데

선거를 치르기도 전에 걱정부터 앞서는 건

괜찮은 인물이다 싶은 분들이라도

꼭 선거판에만 들어가면 엉망이 되는 꼴을 수도 없이 봐왔던 탓.

 

부디

어느 누가 나서더라도

어떤 자리인지를 잊지말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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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궁가

                         -윤제림

 

 



죽어서 공동묘지에 가 눕는다면

소리 좋은 이웃 하나 찾아가 눕겠네.

가가호호 주인을 물으며

자리 골라 눕겠네.

뉘 알리. 내, 송만갑씨 북채를 잡을지.

한성권번 춘심이

가야금 병창을 들을지.

 



‘고고천변일륜홍(皐皐天邊一輪紅)’ 귀를 모으면

생전 처음 뭍에 나온 별주부 모양으로

눈이 부시리.

봉분 위로 봄볕은 늘어지고

무덤을 둘러 붉은 꽃 흐드러진 날,

나이쯤은 진작 잊어버린,

아주 오래된 봄날.





**

 

 

죽은 뒤에야 화장을 할 터이므로

내 동네 주민이 누가 될 것인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지금 당장은 아주 조용한 사람들로만 이웃이 되면 좋겠다.

낮에야 활동을 하든 조용히 엎드려있든 상관없지만

밤에 음악을 들을 땐 헤드폰을 사용하고,

걸을 때는 사뿐사뿐,

책장 넘기는 소리만 사락사락 나는 그런 이웃들만

내 곁에 있으면 참 좋겠다.

 



온갖 소리들을 끌어들이는 흡인력 최고의 창문들은

여름내 나를 괴롭혔다.

새벽까지도 쉴 새 없이 지나다니는 자동차 소음은 물론이고

홍콩느와르 주인공이 되고 싶은 피 끊는 청춘들이

연기는 잊어버리고 속도에만 집착해서 내는 오토바이 굉음과,

술 취해도 집은 잘 찾아온다는 ‘귀소본능’ 이야

그들만의 자랑할 거리인지는 몰라도

크게 소리를 질러야 점수가 나오는 노래방기계에 익숙해져

음정박자도 안 맞는 노래로 내 귀를 마비시키기가 일쑤였으니

더위와 나만 찾아오는 일편단심 모기와 함께 소음들은

여름내 나를 괴롭힌 일등공신들이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더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도 이제 슬슬 꼬리가 보인다.

수은주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술래처럼

돌아보면 시치미 뚝 떼고 딴 곳을 보고 있다가

다시 돌아서면 개미발자국만큼 움직여

눈 밝은 사람이나 알아차릴 만큼 내려가고 있지만

새벽녘에 이불을 끌어당기게 만드는 기분 좋은 서늘함으로

시력 안 좋은 나도 온도차를 느낄 수 있게 해주니

문을 닫고 잠을 청할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다.

 



가을이 되고 다시 봄이 올 때까지는

모두들 좋은 이웃이 될 테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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