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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기도는 이 모습 그대로 2천 년 동안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러니 세계 어느 곳에서든, 누구든 이 기도를 입에 담는 순간, 그는 한때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그 말로 기도를 하는 것이 됩니다. - P12

이 짧은, 언뜻 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기도가 그리스도교의 심장으로 향하는 가장 좋은 길인 이유, 이보다 나은 길은 없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 P12

복음이 그러하듯 이 기도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늘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와 우리 자신, 우리 자신의 필요와 질문, 우리의 순례의 여정을 위한 기도가 되어 줍니다. - P13

하지만 동시에 이 기도의 핵심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으로 남아 언제까지나 가장 중요한 것, 궁극적인 것, 가장 높은 곳으로 우리를 부릅니다. - P13

진정 주의 기도를 들으려면, 이 기도에 참여하려면 우선 우리 내면에 자리한 혼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산만한 정신을 모으고 영혼이 빠지기 쉬운 더러운 곳에서 나와야 합니다 - P13

너무도 자주 우리는 궁극적인 것the ultimate과 마주하라고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그 목소리를 잠재우려 애씁니다. - P14

그렇기에 우리는 먼저 다른 방식으로, 다른 틀로 들어가려 노력해야 합니다. - P14

모든 기도 중의 기도라 할 수 있는 이 기도가 우리 영과 영혼에 울려 퍼지게, 우리 안에서 그 기도가 흐르게, 그 온전한 의미가 밝히 드러나 우리 영혼을 채우는 음식과 음료가 되게 해야 합니다. - P14

우리가 거룩한 창조주를 아버지로 여기며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너무도 소중한 선물이며 모든 위로, 기쁨, 영감의 원천입니다. - P15

이 하나의 말, "아버지"라는 말이 "우리"라는 말과 만나면 이 호칭은 그 모든 개념을 포괄하면서 동시에 다른 모든 개념이 담아내지 못하는 친밀감, 사랑, 너무나도 고유해 반복되지 않고 기쁨으로 가득한 일치를 드러냅니다. - P15

우리 아버지
이 말을 통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이며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봅니다. - P15

친밀한 관계를 체험하며 그 체험에서 오는 기쁨을 맛봅니다. 신앙은 신뢰로 이어지고 의존은 자유가 됩니다. - P15

이 부름을 통해 우리는 친밀감을 맛보며, 이렇게 궁극적인 기쁨이 펼쳐집니다. - P16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말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신성한 사랑 가운데, 세계 곳곳에 스며들어 세계를 끌어안는 그 거룩한 사랑 가운데 있다는 신앙을 표현합니다. - P18

또한 세계에 사랑이 임했고, 세계가 그 사랑을 가리키고 반영한다는 신앙을 표현합니다. - P18

그렇게 우리는 이 말을 통해 인간의 영광과 운명이라는 궁극적인 소명이 하늘에 있음을,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며 그분의 집임을 고백합니다. - P18

성스러움, 거룩함이란 더 높고 더 순수한 최상의 가치를 지닌 모든 것에 돌려 마땅한 감정이자 활동입니다. 그렇기에 거룩함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 P22

진정 성스러운 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내면이 자신이 지닌 ‘성스러움‘을 알아차리고 자유롭게 이를 갈망하게 합니다. - P22

종교적 경험Religious experience이란 가장 순수한 형태로 거룩함을 체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P24

다소나마 이를 경험해 본 이는, 그 경험이 우리의 모든 생애를 관통해 내면과 삶에 변화를 요구한다는 것을 압니다. - P24

그리고 이를 아는 이들은 우리가 이를 진정으로 갈망하고 있음에도 우리 내면에 어떤 관성, 나약함, 존재의 협소함으로 인해 무엇보다도 성스러운 것, 가장 높고 순수하며 거룩한 것을 마주하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인해, 그 성스러움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압니다. - P24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이는 그분을 실제로 보았고, 그분을 받아들인 이의 외침입니다. 그리고 오직 이 전망 안에서만 충만한 삶, 충만한 영감, 충만한 행복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이의 외침입니다. - P25

복음은 거룩하신 그분, 생명으로 충만하신 분, 모든 생명의 생명이 되신 분, 생명 그 자체이신 분, 빛이고 사랑이며 지혜인 영원하신 분을 마주하는 그 ‘나라‘로 우리를 부릅니다. - P36

복음은 인간이 그분과 만나, 그분을 알고, 기쁨으로 또 사랑으로 자신을 그분께 바칠 때 그 나라가 시작된다고 이야기합니다. - P36

복음은 우리 삶이 그분의 빛으로 가득할 때, 그분에 대한 앎, 그분께 받은, 그리고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할 때 그 나라가 임한다고 이야기합니다. - P36

그리고 복음은 이 거룩한 생명 가득한 삶을 사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죽음까지를 포함한 모든 것이 새로운 빛 속에 드러나게 되리라고, 지금 여기의 삶이 영원 그 자체로, 즉 그분 자신으로 채워 지리라고 말합니다. - P37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너무도 독특한 이 말이 우리의 입 밖으로 나올 때, 우리는 무엇을 기도하는 것일까요?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말을 통해 지금 여기, 오늘 이곳, 현재 처한 환경에서 그 나라와 만나기를, 평범한 하루, 고단한 오늘에 "아버지의 나라가 여기 가까이 왔다"는 말이 울려 퍼지기를, 우리의 삶이 그분의 나라의 권능과 빛으로 채워지기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능력이 임하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 P37

더 나아가, 이 간구를 통해 우리는 온 세계, 너무나도 분명하게 악에 사로잡혀 있고 허기져 있으며 두려움에 함몰된 채 분투를 벌이고 있는 이 세계가 그 빛을 받아들이기를 갈망합니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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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정경개론
롤프 렌토르프 지음, 하경택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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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론서를 읽는 것은 여러모로 유익하다. 무엇보다 그 학문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이 큰 유익일 것이다. 즉 그 학문의 핵심적 논의와 과정을 빠르게 조망함으로 그 학문이 향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집중해야 할 주제들에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분배할 수 있다. 또한 파편적인 정보들을 큰 흐름과 맥락 가운데서 통전적으로 볼 수 있다. 꿰어내지 못한 정보는 유의미한 적용까지 이르기 힘들다. 더불어 세부 영역에서 핵심적인 주제들을 다룰 수 있다. 이는 앞의 유익들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각 세부 영역의 역사를 알고, 그러한 파편적 정보들을 모아 더욱 세부적 주제 연구로 이어질 수 있다. 


좋은 개론서가 많지만 정작 개론서를 꼼꼼하게 읽지 않거나 혹은 성급하게 세부적인 주제로 뛰어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모든 개론서가 유익한 것은 아니다. 모든 책이 그렇지만 저자의 관점이 투영되고, 따라서 객관적 정보는 주관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많은 논의들 가운데 어떠한 주장들을 취사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개론서는 신뢰할 수 있는 저자의 책이 필수적이다. 처음에 방향을 잘못 잡으면 되돌아오기에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든다. 효율적 독서의 비결은 어떤 책을 읽을지 선택할 수 있는 분별력을 키우는 것이며, 반대로 어떤 책을 읽지 않아야 할지를 판단할 수 있는 힘일 것이다.


롤프 렌토르프(Rolf Rendtorff, 1925-2014)는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 1901-1971)의 지도 아래 박사학위를 받았다. 렌토르프는 그의 스승인 폰 라트의 주요한 통찰들과 함께 브레바드 차일즈(Brevard Springs Childs, 1923-2007)의 정경비평 관점으로 구약성경을 바라본다. 렌토르프는 역사 비평적 방법을 비판하면서 최종적으로 주어진 구약성경의 본문을 존중한다. 현재의 형태를 존중한다는 것은 이전의 다양한 층을 무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성경이 형성되고 편집되었던 다양한 층과 이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인식한다. 그는 그러한 인식을 배제하지 않고 현재의 형태가 아주 정교하게 결합된 구성을 보인다고 강조한다.


​렌토르프의 『구약정경개론』은 Theologie des Alten Testaments: ein kanonischer Entwurf의 1권으로 이미 국내에 번역 출간된  『구약정경신학』(새물결플러스, 2009)과 짝을 이루는 책이다. 출간의 순서는  『구약정경개론』이 10년가량 늦지만 저자의 의도대로라면 이 책을 읽은 뒤 2권으로 넘어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제1권에서 현재 주어진 성경 본문을 존중하며 첫 구절부터 마지막 구절까지 정경을 한 차례 관통 한 뒤, 각 주제의 관련성을 더욱 부각한 2권을 읽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구약성경을 포괄적이면서도 섬세하게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히브리 성경의 순서에 따라 구성된다. 히브리 성경의 정경은 토라, 예언서, 성문서로 구성된다. '토라'는 '모세오경'이라고 명명되며, 히브리 성경의 '예언서'는 '여호수아로 시작하여 열왕기에 이르는 '전기 예언서'와 우리가 흔히 아는 예언서인 '후기 예언서'를 지칭한다. '성문서'는 앞의 두 부분에 속하지 않은 모든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히브리 성경이 어떤 이유로 이러한 순서와 구성으로 정경화 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더불어 이러한 순서와 구성을 통해 통찰과 새로움을 경험한다. 


​이 책 곳곳에 저자의 통찰이 담겨있다. 꼼꼼하게 읽어 가다 보면 성경의 전체적인 큰 그림을 그리면서도 구약 성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세부적 본문들을 큰 맥락 가운데서 볼 수 있다. 또한 '토라'의 중요성과 더불어 '토라'와 '예언서', '성문서'와의 긴밀한 관계를 인식할 수 있다. 저자는 정경적 흐름 가운데 꼼꼼하게 본문을 살핀다. 중간중간 박스로 삽입되어 있는 설명을 통해 정경적 관점에서 비판받아왔던 본문들은 다시 한번 학문적 첨언으로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그의 약속에 대한 신실함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런 신실하심을 믿었고, 그는 그것을, 말하자면, 자신의 "인정"을 통해 확인했다 - P57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과 벌이는 신학적 논쟁 가운데 다음과 같은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제시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파괴되도록 허용하셨을 때 하나님이 과연 의롭게 행동하셨는가의 여부에 관한 질문이다(18:16-33). "온 땅의 심판자"이신 그분은 소돔에 대한 것과 같이 예루살렘에 대해서도 모두 의롭게 행동하셨다 - P61

파라오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적대자이다. 그는 야훼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했던 그 백성 이스라엘을 압제한다. 그는 매우 근본적인 방식으로 야훼를 "인지하는 것"을 거절한다. 즉, 그는 당초 야훼 알기를 원하지 않았고, 그를 알지도 못한다. 또한 그래서 그는 야훼의 능력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더 강한 자라고 여긴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을 적대하는 신이 되게 한다 - P91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자이시고, 이로써 동시에 열방의 창조자이시다. 하나님은 자신과 특별히 관계를 맺기 위해 어떤 백성을 부를지를 자유롭게 결정하실 수 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역사는 창조와 함께 시작된 세상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갖게 된다. 이런 특별 위치는 아브라함의 부르심에서 이미 구상되어 있었고, 이제는 공식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확장된다. 이런 이스라엘의 특별 위치의 결과는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 될 것이다 - P104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거주하심은 동시에 그분의 "거룩함"의 지속적인 현존을 의미한다. 그분의 "거처"는 그분이 직접 거룩하게 하시는(출 29:43 이하) "성막"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이 거룩함을 유지하고 또한 계속해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이 거룩함을 유지하고 또한 계속해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거룩함의 손상 이후 그 거룩함을 항상 다시 회복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런 거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직접 이스라엘에게 보조 수단으로서 규정들을 주신다. - P127

민수기가 보도하는 시기는 뒤따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역사를 위한 본보기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이 시기에는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계명들과 이 계명들을 지키기에 역부족인, 계속해서 밝혀지는 이스라엘의 무능 사이의 긴장이 지배한다. 광야 세대가 하나님의 위대한 현현과 시내산에서의 율법 수요에 참여하는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그들은 이 계명들을 따라 사는 삶을 포기했다.
그들의 운명에서 두 가지 사실이 표본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첫째, 사십 년의 고난의 시기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징벌이다.
둘째, 그것을 통해 결국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시며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다.
이 두가지는 이스라엘 백성 역사의 이어지는 시기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 P138

오경, 즉 "토라"는 정경으로서 히브리어 성경의 기초이며 핵심이다. 정경으로서의 히브리어 성경의 다른 어떤 부분도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자기 이해에 관한 중심적인 진술들을 이렇게 풍부하고 집중적으로 포함하지 않고 있다. 이뿐 아니라 다른 어떤 부분도 이렇게 집중적이며 다양한 방법으로 편집되고 형성되지 않았다.
이런 생성사로 인해 오경은 끊임없이 놀라운 방식으로 다음 두 가지를 보여 준다. 즉, 내적인 긴장들과 심지어 대립들까지 그리고 동시에 거대한 통일성과 완결성을 보여 준다.
오경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가장 먼저 정경적 최종 형태가 완결된 부분이다. 이런 사실에서 오경 안에 포함된 전승들의 수집과 구성적인 형태를 갖추게 한 것에 인정되었던 중요한 의미가 드러난다. 동시에 오경은 정경으로서의 히브리어 성경의 다른 부분에 대해 토대를 제공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P165

결국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시기에 대한 총괄적인 회고는 그것의 시작과 끝이 예언자들의 말들을 통해 결정적으로 각인된다는 사실을 또한 보여 준다. 말하자면, 그 예언자들의 말들은 이 시기에 대한 하나의 틀을 형성한다. 다윗은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삼상 16:1-13). 그리고 그가 기름 부음 받은 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거절당한 사울에 대한 대안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통해 특별한 중요성을 획득한다. - P229

엘리야의 등장은 북 왕국 역사에서 특별한 위기의 시점에 이루어진다. 바알 숭배를 국가적으로 장려한 것은 이미 오므리 치하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합은 수도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건축하여(16:32) 바울 숭배에 중요한 지속적 동인을 제공했다. 이런 발전에 대항하는 엘리야의 간섭은 엘리야를 사무엘에서 시작하여 나단과 갓을 지나 아히야에 이르는 이전 예언자들의 반열에 오르게 한다. 그들은 왕들의 정치와 종교적 정책들을 비판하였고, 아울러 정치적 발전의 방향에 영향을 주었고 그것을 변화시켰다 - P246

예상되는 미래의 통치자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통치자보다 더 나을 것이며 그런 통치자와는 다를 것이라는 사실이 여기에서 완전히 분명해진다. 그는 다양한 삶의 영역에 있는 백성을 이끌고 통치하기 위해 필요한 많은 자질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판결은 - "보고 들을 바대로 판단하지 않고" - 확고하며 (3절), 특별히 사회적일 것이다. 그는 공동체에서 매우 낮은 위치에 있는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위해 정의를 베풀고,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인 권력의 수단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자들로부터 그들을 방어한다(4절). - P312

소명 비전으로부터 그의 생애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그 말씀은 줄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레미야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또한 그가 빠져들게 되는 갈등들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러한 하나님의 말 씀을 강조하는 상징 행위들을 통해 유발된다. 그리고 그가 인내해야 했던 외로움이나 고난도 하나님의 말씀의 결과들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의 주변 세계가 반응한 결과였다 - P403

하나님이 이미 귀환의 때에 관해 예고하신 바와 같이(11:19), 돌이킴을 통해서 사람들은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만들어야 한다(31절). 참으로 다시 한번 말한다. 즉, 하나님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죽는 자들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돌이키라. 그러면 너희가 살게 될 것이다"(32절) - P437

요나서는 오바댜서에 대한 중요한 보충,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의 교정을 포함하고 있다. 오바댜서에서는 유다를 위한 구원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주제가 되었다. 이와는 달리 여기에는 하나님 구원 행동의 다른 측면이 분명하게 부각된다. 즉, 그것은 이방인을 위한 구원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 돌아오고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 - P510

물론 양식들의 결정은 개별시들에 대한 격리된 고찰들을 넘어설 수 없다. 최근에 들어서야 비로소 우리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의 시편집이 분명 매우 의도적이며 복잡한 수집 과정을 거친 결과라는 사실이 점차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를 통해 개별 시편은 더 큰 맥락 안에놓이게 되며, 그것을 통해 그 시편은 종종 하나의 추가적인 기능을 획득할뿐만 아니라 드물지 않게 그 진술이 하나의 새로운 강조점을 얻게 된다. - P553

엘리후를 포함한 친구들은 계속해서 오직 하나님에 관해 말했다. 그들은 어떤 대답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말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욥에게 그 대답은 글자 그대로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욥기의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야기체의 도입부와 긴 논쟁의 두 부분이 어떻게 불가분의 관계로 하나를 이루는지를 알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다면, 양측 모두 불완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 P611

유대 전승에서 "성문서"의 다섯 권의 작은 책들은 ‘메길로트’, 즉 "두루마리들" 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 긴밀한 연관을 가진 하나의 그룹으로서 취급된다. 이 책들은 제의력을 따른 특정한 절기에 해당 절기의 낭독물로서 읽혔다. 즉, 유월절에는 아가서가, 칠칠절에는 룻기가, 성전의파괴를 기념하는 아브월 9일에는 애가가, 초막절에는 전도서가, 부림절에는 에스더가 낭독되었다 - P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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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은 욥이 하나님을 알고 있으며, 그 하나님은 히브리어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 P584

욥은 하나님을 알았을 뿐 아니라 그분께 말하고 기도하며 부르짖었다-그리고 그분께 대항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성경 안에서 어느 누구도 하지 않았던 행동이었다. - P584

욥이 이스라엘 사람이든지 아니든 상관없이, 그는 하나님과 마주하는 인간으로서 하나의 모범적인 인물이다. - P584

엘리후를 포함한 친구들은 계속해서 오직 하나님에 관해 말했다. 그들은 어떤 대답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말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 P611

그러나 욥에게 그 대답은 글자 그대로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욥기의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야기체의 도입부와 긴 논쟁의 두 부분이 어떻게 불가분의 관계로 하나를 이루는지를 알 수 있다. - P611

만일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다면, 양측 모두 불완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 P611

유대 전승에서 "성문서"의 다섯 권의 작은 책들은 ‘메길로트’,
즉 "두루마리들" 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 긴밀한 연관을 가진 하나의 그룹으로서 취급된다. - P643

이 책들은 제의력을 따른 특정한 절기에 해당 절기의 낭독물로서 읽혔다. 즉, 유월절에는 아가서가, 칠칠절에는 룻기가, 성전의파괴를 기념하는 아브월 9일에는 애가가, 초막절에는 전도서가, 부림절에는 에스더가 낭독되었다. - P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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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의 많은 말들은 임박한 심판의 불가피성에 대한 통찰로 각인되어 있다. - P394

이때 항상 분명하게 나타나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고 행동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심판이 올 것이며 심판은 와야 한다는 점이다. - P394

그러므로 "돌이킴" 에 대한 요청은 예레미야의 선포의 본질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 P394

그럼에도 계속해서 그는 바로 상투적인 것이 되어 버리고 종종 거의 체념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인식에직면한다. - P394

그러나 너희는 듣지 않았다(렘 29:19). - P394

돌이킴과 그것에 따른 재앙에서의 벗어남의 가능성이 이스라엘에 주어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기회를 붙잡지 않았다. - P394

소명 비전으로부터 그의 생애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그 말씀은 줄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레미야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 P403

또한 그가 빠져들게 되는 갈등들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러한 하나님의 말 씀을 강조하는 상징 행위들을 통해 유발된다. - P403

그리고 그가 인내해야 했던 외로움이나 고난도 하나님의 말씀의 결과들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의 주변 세계가 반응한 결과였다. - P403

예레미야는 그가 예고해야만 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단순히 받아 들이지 않는다. - P404

그는 끊임없이 계속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되고 숙명적인 길로부터 벗어 나도록 노력하고 그들이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 P404

그래서 "돌이킴"이란 낱말이 그의 말의 중심적 요소가 된다. - P404

즉, 돌이킴에 대한 요청, 그들이 돌이키지 않는다는 사실 확인, 미래에 돌이킬 것이라는 희망, 그리고 끝으로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사로잡힘을 되돌리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예고 등이다. - P404

여기에서 이제 특별히 강조되어 나타나는 사실은 예레미야의 심판 선포에서 구원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 P404

왜냐하면 종국으로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이 계획하고 계시는 바가 재앙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이다. - P404

하나님은 포로 기간이 끝나게 하시고 이스라엘과 유다를 모으시고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 P405

그리고 그런 다음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 P405

하나님은 토라를 그들의 마음에 새겨 이스라엘이 더 이상 그 언약을 파기할 수 없게 하실 것이다. - P405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모으실 것이고, 그들에게 이스라엘 땅을 돌려주실 것이며,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어 언약 관계를회복시키실 것이다. - P423

하나님이 이미 귀환의 때에 관해 예고하신 바와 같이(11:19), 돌이킴을 통해서 사람들은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만들어야 한다(31절). - P437

참으로 다시 한번 말한다. 즉, 하나님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죽는 자들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돌이키라. 그러면 너희가 살게 될 것이다"(32절). - P437

이제 그의 이웃 나라들이 더 이상 치명적인 가시와 찔레로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진술(24절)을 통해 최종적으로 이 모든 말씀은 이스라엘과 연관된다. - P439

그리고 여기에 이어서 나오는 구원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흩어져 있는 곳으로부터 모을 것이며,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예고된다. - P439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열방의 눈앞에서 자신의 거룩함을 입증하실 것이다(25절). - P439

이스라엘의 선택은 단순히 특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것은특별한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는 의무를 의미한다. - P490

요나서는 오바댜서에 대한 중요한 보충,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의 교정을 포함하고 있다. - P510

오바댜서에서는 유다를 위한 구원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주제가 되었다. - P510

이와는 달리 여기에는 하나님 구원 행동의 다른 측면이 분명하게 부각된다. 즉, 그것은 이방인을 위한 구원이다. - P510

그리고 동시에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 돌아오고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 - P510

나훔서는 하나의 시편으로 시작했고(나 1:2-8), 하박국서는 하나의 시편으로 끝을 맺는다. 이것을 통해서 아시리아인들이나 바벨론인들과 벌이는 야훼의 투쟁에 관한 진술들이 단순히 세속적인 사건의 의미를 넘어선다. - P523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날 일들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활동과 연관된다. 이스라엘의 운명이 창조와 종말 사이에 있는 사건의 거대한 맥락으로 편입된다. - P523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토라를 주었다. 이스라엘은 야훼의 날이 도래하기까지의 시간에 토라에 따라 살아야 한다. - P543

그 시간은 지금, 즉 예언자와 그예언을 듣고 읽는 자들의 현재뿐 아니라 그것과 곧바로 이어지는 미래를 포함한다. - P543

동시에 이로써 예언자들의 메시지도 토라에 비추어 읽혀야 한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상기된다. - P543

우리는 시편을 바로 "이스라엘의 응답"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그 응답 안에서 "야훼 앞에 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구원행동에 대해서 반응한다(Rad 1962, 366). 그것은 다성적이며 다층적인 응답이다. - P551

물론 양식들의 결정은 개별시들에 대한 격리된 고찰들을 넘어설 수 없다. - P553

최근에 들어서야 비로소 우리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의 시편집이 분명 매우 의도적이며 복잡한 수집 과정을 거친 결과라는 사실이 점차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 P553

이를 통해 개별 시편은 더 큰 맥락 안에놓이게 되며, 그것을 통해 그 시편은 종종 하나의 추가적인 기능을 획득할뿐만 아니라 드물지 않게 그 진술이 하나의 새로운 강조점을 얻게 된다. - P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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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북 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 의존성에도 불구하고 유다는매우 뚜렷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 P238

(광의의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의 전체적인 진행을 고려할 때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서 조성된 정치 - 종교적 복합체의 기본 요소들은 예루살렘, 즉 유다에 지속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들은 다윗 왕정과 예루살렘 성전이다. - P238

이 두 가지 요소들은 예루살렘과 유다에 하나의 지속성을 보장했다. - P238

엘리야의 등장은 북 왕국 역사에서 특별한 위기의 시점에 이루어진다. 바알 숭배를 국가적으로 장려한 것은 이미 오므리 치하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합은 수도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건축하여(16:32) 바울 숭배에 중요한 지속적 동인을 제공했다. - P246

이런 발전에 대항하는 엘리야의 간섭은 엘리야를 사무엘에서 시작하여 나단과 갓을 지나 아히야에 이르는 이전 예언자들의 반열에 오르게 한다. 그들은 왕들의 정치와 종교적 정책들을 비판하였고, 아울러 정치적 발전의 방향에 영향을 주었고 그것을 변화시켰다. - P246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셨다." "그가 돌이키지 않으셨다"는 말은 앞선 구절에서 요시야는 "돌이킨" 왕이었다는 진술과 하나의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 P268

요시야의 돌이킴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 P268

사백 년 이상 이스라엘과 유다에 지속되었던 정치 구조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P269

더 이상 왕이나 국가의 주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적이며 정신적인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되었다. - P269

주민들 가운데 중심 부류의 사람들이 포로민이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 P269

이처럼 많은 점에서 하나의 공백이 당시 상황을 지배했고, 미래가 무엇을 가져다줄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 P269

이것을 통해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이 수 세기 동안 살았던 삶의 내용들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이 파괴될 수는 없었다. - P269

그것의 결말에서 이런 질문이 제기되어야만 했던 이 책들은 정말이지 기록되었거나 편집되지 않았다. - P269

오히려 그 책들은 이전에 그토록 상세하고 그토록 참여적으로 기술되었던 모든 것의 종말과 실패를 회고적으로 고찰하고 애도하기 위하여 계속 전승되었다. - P269

"전기 예언서들"을 되돌아본다면, 그것들 안에서 실제로 실패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 P271

그 책들은 전체로서의 이스라엘의 삶과 이로써 포로 이후의 삶을 위한 큰 의미가 있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의미가 있었던 몇 가지 기본적인 전통을 갖고 있다. - P271

오경에서 이미 이스라엘이 보유하고 있던 두 가지 근본적인 선물에 관해 말한다. - P271

즉, 그것은 모세를 통해 주어진 토라와 조상들에게 약속되고 이미 보증금처럼 주어진(창23장) 땅이었다. - P271

땅에 대한 약속은 "전기 예언서"의 시작에서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현실화된다. - P271

왕정기의 역사 서술에서 예언자들이 보여 주는 중요한 역할은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이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분명한 답변을 포함하고 있다. - P275

왕정은 자신의 임무에 올바르게 행동하지 못했다. 그 임무는 왕정이 이스라엘의 "기본법"으로서 야훼 신앙을 요구한 것과 같이 그렇게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 P275

따라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정치적인 운명은 "이스라엘"이라는 정치적 실체의 실패로서 해석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해석되어야만 했다. - P275

그러나 동시에 이런 역사의 서술을 통해 매우 분명하게 의식된 사실은 거기에는 토라의 요구들과 일치하며 이스라엘을 "선택된 민족",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 되게 하는 다른 길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 P275

이것은 하나님이 이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강력한 확증임과 동시에 그분이 이 일을 행하실 이유에 대한 근거가 된다. - P311

왕이 다시 다윗의 왕위에 앉을 것이라는 사실, 그의 통치와 함께 평화가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 무엇보다 다시 한번 공평과 정의가 지배할 것이라는 사실, 이 모든 것이 단지 이스라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일어날 것이다. - P311

그래서 그분은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열정을 가지고 지켜보실 것이다. - P311

예상되는 미래의 통치자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통치자보다 더 나을 것이며 그런 통치자와는 다를 것이라는 사실이 여기에서 완전히 분명해진다. - P312

그는 다양한 삶의 영역에 있는 백성을 이끌고 통치하기 위해 필요한 많은 자질을 갖추게 될 것이다. - P312

그리고 그의 판결은 - "보고 들을 바대로 판단하지 않고" - 확고하며 (3절), 특별히 사회적일 것이다. - P312

그는 공동체에서 매우 낮은 위치에 있는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위해 정의를 베풀고,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인 권력의 수단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자들로부터 그들을 방어한다(4절).

처음 장(1:8)부터 마지막 장(66:8)까지 시온이라는 이름은 이사야서 거의 모든 곳에서 나타난다. 여기에서 시온이라는 이름은 이사야 선포에 나타난 다른 중요한 낱말에 대한 연결을 통해 매우 특별한 강조점을 얻는다. - P315

즉, 그것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라는 표현이다.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로써 예루살렘에 현존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이사야서 메시지의 이 첫 번째 거대한 장을 끝마치는 희망 가득한 종결어다. - P315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운명은 더 큰 역사적인 맥락 속에 놓인다. 하나님은 자신이 다윗에게 보이셨던 "신실한 은혜"를 기억하신다. - P340

이제 그분은 동일한 방식으로 이스라엘과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맺고자 하신다(55:3). - P340

예레미야는 자기 메시지로 인해 고통당하는 예언자다. 그는 자신의 백성이 임박한 재앙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 P371

그 재앙은 그의 마음을 찢어지게 한다(4:19). 그러한 예레미야에게 자신의 백성을 위한 중재가 허락되지 않는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 중의 하나이다. - P371

이처럼 예언자를 상징으로 묘사하는 본문들은 그의 선포의 모든 폭과깊이를 포함한다. 즉, 그것은 모든 열방을 포괄하는 세계사로부터 예언자의 가장 개인적인 삶의 영역까지 이르고, 피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임박한종말에 대한 냉혹한 예고에서부터 살 보람이 있는 미래의 희망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까지 아우른다. - 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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