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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이야기 - 시대를 움직인 뒤틀린 정의 ㅣ 예문아카이브 역사 사리즈
월러 뉴웰 지음, 우진하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조선 시대 폭군을 떠올려 보면 '연산군'이 생각납니다.
밖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같은 이름이 떠오르죠.
우연일까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역사는 이들을 폭군으로 기록하는 동시에 '실패자' 혹은 '패배자'로 적습니다. 만약 이들이 승리했다면, 그래서 그들의 뜻이 실현됐다면, 그때도 이들은 폭군으로 기억됐을까.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한 번은요.
2017년 3월 10일.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탄핵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탄핵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국민 다수는 끊임없이 탄핵을 요구해왔고 마침내 그 결과가 나온 거죠.
박근혜 전 대통령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제왕적 통치'로 함축되는 불통의 정치였습니다.
'불통'.
불통은 폭군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태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역사는 오늘을 어떻게 기록할까요.
진실이 밝혀지면 알게 될 일입니다.
<폭군 이야기>는 신화 속 인물인 아킬레우스에서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이후까지 3,000년 인류 역사 속에 등장한 폭군들을 이야기합니다.
"아킬레우스는 영웅이 아닌가?"하고 의아할 수 있겠는데, 그는 영웅인 동시에 '전형적 폭군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게 저자의 판단입니다. 판단의 근거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였습니다.
아킬레우스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무수한 적을 죽입니다. 그 적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미래가 있었겠지만 아킬레우스는 그런 건 생각조차 하지 않죠. 다만 죽이고, 부수고, 파괴하고, 점령할 뿐입니다.
그랬던 그가, 분노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의 손에 죽은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가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죠. 아킬레우스는 기어이 헥토르를 해치웠고, 시신을 끌고 다니며 모욕하기에 이릅니다. 늙은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가 시신을 돌려주기를 빌기 전까지요.
뛰어난 재능과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추었지만 오만하고 방자하며 자기만을 생각하는 모습.
이것이 폭군의 대표적인 면모 가운데 '하나'라는 겁니다.
<폭군 이야기>에서 저자는 폭군의 유형을 크게 셋으로 나눕니다.
첫째는 '전형적인' 폭군입니다.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죠. 자기 자신과 측근들을 위해 국민을 착취하는 것조차 서슴지 않는 이들이 바로 전형적인 폭군입니다.
둘째는 '개혁형' 폭군입니다. 권력을 활용하되 국가의 발전이나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책을 펴는 지도자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국가 발전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가진 자들의 재산을 반강제 혹은 강제로 거두어 간다거나, 국가사업에 국민을 반강제 혹은 강제로 동원한다는 식의 수단을 통해 실제로 발전을 이루어내는 지도자들 말이죠.
첫째와 둘째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셋째는 앞의 둘과 조금 다릅니다. 저자는 이들을 '영원불멸형' 폭군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포함되는 건 공포정치를 실행했던 로베스 피에르를 시작으로 유태인 600만 명 이상을 학살한 히틀러와 경제 부흥을 이유로 수천만 러시아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수천만 중국인을 희생시킨 마오쩌둥과 같은 이들이 포함됩니다.
이들이 '적'을 죽이는 이유는 필연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끝없는 증오와 잔혹함이 있을 뿐이죠.
'인종청소' 혹은 '인종말살', '대대적이고 광범위한 숙청'을 일삼는 이들이 바로 영원불멸형 폭군들입니다.
저자는 영원불멸형 폭군을 특별히 깊이 다룹니다. 이들이야말로 이해할 수 없으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이고 참혹한 살육과 학살, 파괴의 흔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어느 폭군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영원불멸형 폭군이야말로 다시는 역사 속에 등장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거죠.
<폭군 이야기>는 단순히 폭군들의 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쓴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이야기를 시작하며 이렇게 묻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는 '좋은' 폭정이 존재할 수 있느냐?"라고요.
우리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대략 이런 답이 되겠죠.
"그래서는 안 되는 걸 알지만, 그렇게 용납되고 시행되는 폭정은 어디에나 있다."라고요.
많은 나라에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 타국을 희생시키는 정책을 찬성합니다.
한 나라가 전쟁터로 변해도, 그 전쟁 속에서 무고한 사람들과 아이들이 죽어가도 '어쩔 수 없다'라고 합니다.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순간에도요.
사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저자의 시선과 판단은 전혀 공정하지 않았습니다. 특정 국가와 특정 인물에 대해서는 더 적대적이고 부정적으로 대하고 있음을 느끼기도 했죠. 예를 들면 레닌의 경우 혹독한 비판을 내놓습니다.
반대로 미국인이기에 자국 지도자가 세계사에서 행한 악행들은 언급하지 않고 넘어갑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만 해도 그렇습니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보이와 팻맨의 경우 수십만 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냈음에도 말이죠.
여기서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저자의 시선이나 판단이 전적으로 옳다거나 객관적이지 않다는 걸 잊어버리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압도적인 악인, 상대적으로 더 나쁜 범죄가 있다고 해서 죄를 저지른 사람이 무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 사실을 잊는 순간 우리 역시 폭군의 성정을 품게 됩니다.
누구든 폭군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다면 그 사실을 꼭 잊지 말아주기를 새삼 부탁드립니다.
<폭군 이야기>에는 많은 폭군이 등장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현대에도 얼마든지 그런 폭정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게 폭정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자신들을 다스리는 사람이 폭군이라는 걸 모르는 걸 강요당하기도 합니다.
인식되지 않는 것, 드러나지 않는 일은 결코 해결되지도 해소될 수도 없습니다.
이 책이 도움이 되는 부분이 바로 그 지점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폭정이고, 누가 폭군인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우리에게 이득이 되기에 폭군이 아니고, 해가 되기에 폭군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안일한 생각입니다. 지금 당장은 타인에게 가해지는 폭정이 언제 내게 돌아올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내일을 약속하며 제한된 자유와 기쁨을 언제 돌려받을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확신이 없는, 알지 못하는 상태의 기다림은 고통이 됩니다. 폭정은 누군가의 고통과 괴로움을 연료로 지속됩니다. 그렇기에 어떤 폭정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폭정은 국민이 궁극적인 행복을 추구하도록 만들 수 없다.
<폭군 이야기> 中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폭력, 강압, 고통, 희생.
역사는 이 모든 어둠이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며, 끝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줍니다.
나의 정당한 분노가 타인에게도 정당한 건 아닐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정의가 타인에게는 불의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절대, 틀림없이, 이것이다'라고 확신하는 순간.
이 확신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강제하는 순간 폭군은 탄생합니다.
국가, 사회처럼 거대한 세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와 너, 나와 우리.
어디에서든 폭군은 생겨납니다.
만드는 것도, 없애는 것도 우리의 몫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